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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봉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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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봉예는 최치원의 기록을 통해 알려진 발해의 왕족으로, 897년 당나라에 하정사로 파견되었으나 조공 서열에서 발해 사절의 위치가 신라보다 낮게 책정된 것에 불만을 품고 항의했다. 그러나 당나라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효공왕은 당나라에 감사를 표하는 국서를 보냈다. 최치원은 이 국서인 《사불허북국거상표》에서 발해 건국 세력을 고구려 영내의 말갈족으로 묘사하며 발해의 기원에 대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대봉예에 대한 평가는 긍정적, 부정적 시각 모두 존재하며, 그의 외교적 행보는 발해와 신라의 복잡한 관계 속에서 해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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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봉예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대봉예
한자 이름大封裔
왕조발해
생애 정보
재위 기간미상
사망일미상
가족 관계
아버지미상
어머니미상
왕후미상
기타 정보
참고 자료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 생애

대봉예는 문헌에서 실전되었지만 신라 최치원의 기록을 통해 20세기 이후 알려졌다. 최치원의 《사불허북국거상표》에 따르면 그는 왕자로 기록되었으나, 발해대현석, 대인선, 대위해 중 누구의 아들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897년 당나라에 하정사로 파견되었을 때, 발해 사신의 자리가 신라 사신보다 아래에 놓이자 이에 불만을 품고 항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구당서》, 《신당서》에는 그의 이름이 나타나지 않아 이후 행적은 알 수 없다.

최치원의 『사불허북국거상표』에는 "발해를 건국한 대조영은 고구려 영내에 거주했던 속말말갈인이며, 발해는 고구려 영내에 거주했던 속말말갈인에 의해 건국되었다"는 기록이 있다.[2]

2. 1. 출생과 가계

신라 사람 최치원(崔致遠)의 기록에 따르면 대봉예는 왕자로 기록되어 있으나, 누구의 아들인지는 확실하게 기록되지 않았다.[1] 발해의 왕 중 대현석, 대인선, 대위해 중 누구의 아들인지는 알려진 바가 없다.

2. 2. 당나라 파견과 항의

897년 7월 하정사로 당나라에 파견되었으나, 당나라조공 순서를 발해 사절을 신라 사절보다 아래에 두었다. 대봉예는 이에 불만을 품고 당나라에 항의하여 신라보다 윗자리에 앉을 것을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1] 이후 그의 행적은 알려진 바 없다.

최치원이 작성하고 효공왕당나라 황제 소종에게 보낸 공식 문서인 『사불허북국거상표』에 이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3]

3. 사불허북국거상표

신라 최치원이 작성한 《사불허북국거상표》에는 대봉예가 왕자로 기록되어 있으나, 누구의 아들인지는 명확하게 기록되지 않았다.[1] 897년 대봉예는 하정사로 당나라에 파견되었을 때, 발해 사신의 조공 순서가 신라 사신보다 아래에 놓이자 이에 항의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 사건은 최치원이 《사불허북국거상표》를 작성하여 당나라에 보내게 된 계기가 되었다.

3. 1. 기록 내용

897년 7월에 하정사로 당나라에 들어갔으나, 당나라조공의 서열에서 발해 사절의 자리를 신라 밑에 두었다. 이에 대봉예는 석차를 신라보다 상위에 놓을 것을 요청했지만, 당나라는 허락하지 않았다.[1]。당나라가 이를 허락하지 않은 것에 감사하며, 최치원이 집필하고, 신라 왕인 효공왕당나라황제인 소종에게 보낸 공식 국서가 『사불허북국거상표』이다.[3]

『사불허북국거상표』에는 "발해를 건국한 대조영은 고구려 영내에 거주했던 속말말갈인이며, 발해는 고구려 영내에 거주했던 속말말갈인에 의해 건국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2]

4. 발해-당-신라 관계 속 대봉예의 위치

대봉예는 발해의 왕자로, 신라 사람 최치원의 기록을 통해 20세기 이후 알려졌다. 최치원의 《사불허북국거상표》에는 그가 왕자로 기록되어 있지만, 대현석, 대인선, 대위해 중 어느 왕의 아들인지는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897년 7월, 대봉예는 하정사로 당나라에 들어갔으나, 당나라가 조공 서열에서 발해 사절의 자리를 신라 사절보다 아래에 두자 이에 불만을 품고 당나라에 항의하였다. 그러나 당나라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1] 이후 그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4. 1. 조공 질서와 외교적 갈등

897년 7월, 대봉예는 하정사로 당나라에 들어갔다. 그러나 당나라는 조공 서열에서 발해 사절의 자리를 신라 사절보다 아래에 두었다. 대봉예는 이에 불만을 품고 당나라에 석차를 신라보다 상위에 놓을 것을 요청했지만, 당나라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1] 이 사건에 대해 최치원효공왕을 대신하여 당나라 황제인 소종에게 보낸 공식 국서가 『사불허북국거상표』이다.[3]

4. 2. 신라와의 관계

최치원의 기록에 따르면, 대봉예는 발해의 왕자로, 당나라 황궁에서 조헌(朝獻)할 때 발해 사신이 신라 사신보다 아래에 자리하는 것에 불만을 품고 당나라에 항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1] 이 사건은 당시 발해와 신라 간의 경쟁 관계를 보여주는 사례로 해석된다.

5. 평가

대봉예는 당나라에서 발해의 외교적 위상을 높이기 위해 노력한 인물로 평가받지만, 당시 국제 정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비판도 받는다.

5. 1. 긍정적 평가

대봉예는 발해의 왕자로, 신라 사람 최치원의 기록에 처음 등장한다. 그는 당나라에서 발해 사신이 신라 사신보다 낮은 자리에 배치된 것에 대해 항의하며 발해의 위상을 높이려 노력한 외교관으로 평가받는다. 비록 그의 항의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이는 자주적인 외교 활동을 펼치려 했던 그의 노력을 보여주는 사례로 꼽힌다.[1]

5. 2. 비판적 평가

최치원의 기록에 따르면, 대봉예는 당나라 황궁에서 조헌할 때 발해 사신의 자리가 신라 사신보다 아래에 있자 이에 불만을 품고 당나라에 항의했다. 그러나 이러한 항의는 받아들여지지 않아 외교적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는 대봉예가 당시 당나라 중심의 조공 질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받는다.

참조

[1] 뉴스 대봉예(大封裔) http://encykorea.aks[...] 2022-04-18
[2] 서적 日本渤海関係史の研究 吉川弘文館 2001-04
[3] 서적 日本渤海関係史の研究 吉川弘文館 20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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