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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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위해는 발해의 제14대 왕으로, 다른 이름은 위계이다. 895년 당나라에서 책봉을 받았으며, 894년 일본, 905년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하는 등 외교 활동을 펼쳤다. 897년에는 신라 정벌을 논의했으나 무산되었다. 대현석과의 관계는 불확실하며, 정약용은 대위해의 재위 기간을 50년으로 추정했으나 신뢰하기 어렵다는 평가가 있다. 당나라와의 외교 관계를 유지하며 왕자 대봉예를 조공으로 보내거나, 유학생 오광찬이 빈공에 급제하여 신라 사절과 자리다툼을 벌이는 등의 사건이 있었다. 현재까지 대위해와 관련된 유물이나 유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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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위해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휘 | 대위해(大瑋瑎) |
왕조 | 발해 |
재위 기간 | 895년 - 907년? |
아버지 | 대현석 |
몰년 | 천우 4년 (907년)? |
정보 | |
봉호 | 가독부 |
2. 생애
다른 이름은 위계(瑋階)이다. 그의 존재는 오랫동안 기록이 실전되었다가 20세기에 들어서야 확인되었다.
895년 10월 당나라로부터 관직을 올려주는 책봉을 받으며 이름이 처음 기록에 나타난다.[1][2] 905년에는 오소도(烏炤度)를 당나라에 파견하는 등 외교 활동을 이어갔다.[3] 897년에는 신라 정벌을 논의하기도 했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3]
1940년대 중국의 역사학자 진위푸가 《당회요》(唐會要)를 연구하던 중, 당나라 건녕(乾寧) 2년(895년) 10월 '발해 국왕 대위해(大瑋瑎)에게 칙서를 내렸다'는 기록을 발견하면서 그의 존재가 알려지게 되었다. 이 기록은 당나라가 대위해에게 관직을 올려주는 책봉을 했음을 의미한다. 이로써 그는 발해의 역대 국왕 중 한 명으로 복원되었다. 이전까지 정약용은 발해속고에서 대현석과 마지막 왕 대인선 사이에 몇몇 왕의 이름이 당나라 사서(구당서, 신당서)에서 누락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했는데, 이는 후대 청나라 학자 김육불에 의해 사실로 확인되었다. 『신당서』에는 선왕 대현석까지만 기록되어 있으나, 『당회요』와 『한림군서』 등의 기록을 통해 그의 즉위 사실이 확인된다.
대위해는 활발한 외교 활동을 펼쳤다. 894년에는 문적원감(文籍院監) 배정(裵挺)을 일본에 파견했고, 905년에는 오소도(烏炤度)를 당나라에 사신으로 보냈다. 당시 당나라는 잇따른 내란으로 국력이 쇠퇴하고 있었지만, 발해는 꾸준히 사절을 보내고 많은 유학생을 파견하며 교류를 이어갔다.
그러나 당나라와의 관계에서 신라와의 경쟁으로 인한 마찰도 있었다. 건녕 3년(896년)에는 왕자 대봉예가 당나라에 조공 사절로 갔을 때, 수도 장안에 머물고 있던 신라 사절과 상석(上席)을 다투는 '쟁장(爭長)' 사건이 벌어졌다. 또한 천우 3년(906년)에는 발해 유학생 오광찬이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과거 시험인 빈공과에 응시하여 진사로 급제했는데, 같은 시험에 합격한 신라의 최언휘보다 아래 등급에 놓이자 이에 항의하며 다시 자리다툼을 벌이는 등 발해의 위상을 지키려는 노력이 나타났다.
897년에는 신라 정벌을 논의하기도 했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그의 가계나 행적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진 바가 없어 선왕 대현석과의 관계도 불확실하다. 안정복의 《동사강목》이나 유득공의 《발해고》에도 그에 대한 내용은 기록되지 않았다. 한때 그의 시호가 철왕(澈王)이라는 설이 있었으나, 명확한 근거는 부족하다.
3. 재위 기간의 주요 사건
당시 당나라는 거듭된 내란으로 국력이 약해지고 있었지만, 발해는 꾸준히 사절을 보내고 많은 유학생을 파견하며 관계를 유지했다.[4] 건녕 3년(896년)에는 왕자 대봉예가 당나라에 조공 사절로 갔을 때, 수도 장안에 머물고 있던 신라 사절과 서열 다툼을 벌이는 일이 있었다.[4] 이는 당시 발해와 신라 사이의 외교적 경쟁 관계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또한 천우 3년(906년)에는 발해 유학생 오광찬이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과거 시험인 빈공과에 응시하여 진사로 급제했는데, 같은 시험에 합격한 신라의 최언휘보다 낮은 등위에 놓이자 이에 항의하며 다시 자리다툼 문제로 비화되기도 했다.[4]
4. 가계
왕손 : 대원양(大元讓)[5]
왕손 : 대원겸(大元謙)
5. 평가 및 논란
안정복의 동사강목과 유득공의 발해고에는 대위해에 대한 기록이 없다.[1] 정약용은 발해속고에서 대현석 이후 말왕 대인선 사이에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 왕들이 누락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하며[2] 대현석이 50년간 재위했다고 추정했으나, 이 주장은 신뢰하기 어렵다는 평가를 받는다.[2]
대위해의 존재는 오랫동안 역사 기록에서 누락되어 알려지지 않았다. 이후 청나라 학자 김육불 등이 누락된 왕의 존재 가능성을 확인하였고,[2] 1940년대 중국 역사학자 진위푸가 《당회요》(唐會要)에서 895년 10월 당나라가 발해 국왕 대위해(大瑋瑎)에게 칙서를 내린 기록('賜渤海王大瑋瑎勅書...')을 발견하면서[3][4] 공식적으로 확인되어 발해 역대 국왕 중 한 명으로 복원되었다.[2]
한때 그의 시호가 철왕(澈王)이라는 설이 제기되기도 했으나, 명확한 근거는 부족하다.[5]
참조
[1]
간행물
乾寧二年十月. 賜渤海王大瑋瑎敕書. 翰林稱加官合是中書撰書意. 諮報中書.
[2]
웹사이트
대위해(大瑋瑎)
http://encykorea.aks[...]
[3]
문서
[4]
문서
[5]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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