댈러스 카우보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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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댈러스 카우보이스는 1960년 창단된 NFL 팀으로, 1970년대 전성기를 거쳐 5번의 슈퍼볼 진출과 2번의 우승을 기록했다. 1989년 제리 존스가 구단주가 된 이후 지미 존슨 감독 체제에서 1990년대 초반 2년 연속 우승을 달성했다. 이후 배리 스위처, 챈 게일리, 데이브 캠포, 빌 파셀스, 웨이드 필립스, 제이슨 개럿을 거쳐 현재 마이크 매카시 감독이 팀을 이끌고 있다. 필라델피아 이글스, 뉴욕 자이언츠, 워싱턴 커맨더스와 라이벌 관계를 형성하고 있으며, 텍사스주를 연고로 하는 휴스턴 텍산스와도 라이벌 관계를 맺고 있다. 댈러스 카우보이스는 24명의 선수를 프로풋볼 명예의 전당에 헌액했으며, 구단을 상징하는 "링 오브 오너"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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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사
댈러스 카우보이스는 1960년, 클린트 머치슨 주니어와 베드포드 윈에 의해 창단되었다.[16] 초대 단장 텍스 슈램,[19] 초대 감독 톰 랜드리[21]가 팀의 기틀을 다졌으며, 이들은 30년간 카우보이스의 운영을 이끌었다. 머치슨은 워싱턴 레드스킨스 구단주 조지 프레스턴 마셜과의 갈등 끝에, 레드스킨스 응원가 "헤일 투 더 레드스킨스"의 저작권을 구매하여 NFL 프랜차이즈를 얻어냈다.[18]
창단 초기에는 어려움을 겪었으나,[23] 밥 릴리, 돈 머레디스, 돈 퍼킨스 등 스타 선수들을 영입하며 전력을 강화했다. 특히, 1960년 쿼터백(QB) 돈 머레디스(Don Meredith), 1961년 러닝백(RB) 돈 퍼킨스(Don Perkins)와 디펜시브 태클(DT) 밥 릴리(Bob Lilly), 1964년 코너백(CB) 멜 렌프로(Mel Renfro)등을 영입했다.[22] 1965년에는 승률 5할을 기록했다.
1966년 첫 플레이오프 진출을 시작으로,[24] 1966년, 1967년 NFL 챔피언십에서 그린베이 패커스에게 아쉽게 패하며 "아이스볼"이라는 명경기를 남겼다.[24] 1968년과 1969년에는 디비전 타이틀을 획득했지만, 플레이오프에서 클리블랜드 브라운스에게 패했다.
1970년대: 전성기의 시작1970년, 쿼터백 크레이그 모턴의 지휘 아래 댈러스 카우보이스는 첫 슈퍼볼에 진출했으나, 볼티모어 콜츠에게 경기 종료 직전 필드골을 허용하며 패했다.[27][28] 이 경기에서 라인배커 척 하울리는 패배팀 선수로는 유일하게 슈퍼볼 MVP로 선정되었다.[27][28]
1971년, 카우보이스는 코튼 볼에서 텍사스 스타디움으로 홈구장을 이전하고, 쿼터백 로저 스토바흐를 중심으로 슈퍼볼 VI에서 마이애미 돌핀스를 꺾고 첫 우승을 차지했다.[29]
1975년, 랜디 화이트와 토마스 "할리우드" 헨더슨 등 새로운 스타 선수들이 합류하며 강력한 수비를 구축했지만, 슈퍼볼 X에서 피츠버그 스틸러스에게 패했다.[30]
1977년, 슈퍼볼 XII에서 덴버 브롱코스를 꺾고 두 번째 우승을 차지했으며,[31] 수비 라인맨 랜디 화이트와 하비 마틴이 공동 슈퍼볼 MVP로 선정되었다.
카우보이스는 1970년대에만 5번의 슈퍼볼에 진출하여 2번의 우승(1971년과 1977년)을 기록하며 NFL 최고의 팀으로 군림했다.[25] 1978 시즌 이후 슈퍼볼에 다시 진출했지만 피츠버그에 35-31로 패했다.[32]
1980년대: 세대 교체와 과도기1970년대에 로저 스토바흐가 은퇴한 후, 대니 화이트가 주전 쿼터백을 맡았다.[25] 화이트는 1980년부터 1982년까지 3년 연속으로 팀을 NFC 챔피언십 게임에 진출시켰으나, 슈퍼볼 진출에는 실패했다.[25]
1983년 1월 3일, 미네소타 바이킹스와의 먼데이 나이트 풋볼 경기에서 토니 도셋은 NFL 역사상 최장 거리인 99야드 터치다운 러닝을 기록했다.[331][332]
1984년, 범 브라이트가 팀을 인수했으나, 이후 성적이 점차 하락했다.[25] 1985년에는 10승 6패를 기록했지만, 1986년 7승 9패, 1987년 7승 8패, 1988년에는 3승 13패로 부진을 면치 못했다.[25]
제리 존스 시대 (1989-현재)지미 존슨 왕조 (1989-1993)1989년, 제리 존스는 팀을 인수하고 톰 랜드리를 해고한 뒤, 마이애미 대학교 감독이자 자신의 아칸소 대학교 시절 동료였던 지미 존슨을 감독으로 임명하며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했다.[41] 존슨은 드래프트 1순위로 UCLA 쿼터백 트로이 에이크먼을 지명했고, 허셸 워커를 미네소타 바이킹스로 보내는 대규모 트레이드를 통해 팀 재건의 발판을 마련했다.[42][43]
존슨 감독은 쿼터백 트로이 에이크먼, 러닝백 에밋 스미스, 와이드 리시버 마이클 어빈 등 "트리플렛츠"를 중심으로 팀을 재건했다.[44] 1989년 드래프트에서 트로이 에이크먼외에 풀백 데릴 존스턴과 센터 마크 스테프노스키를 영입했고, 1990년에는 에밋 스미스를, 1991년에는 러셀 메릴랜드와 에릭 윌리엄스, 1992년에는 대런 우드슨을 영입하며 전력을 강화했다.
1991년에 카우보이스는 11승 5패를 기록하며 플레이오프에 진출, 와일드 카드 라운드에서 베어스를 꺾고 1982년 이후 첫 플레이오프 승리를 거두었다.[45]
1992년 정규 시즌을 13승 3패로 마감한 카우보이스는[46] 슈퍼볼 XXVII에서 버펄로 빌스를 52-17로 꺾고 세 번째 슈퍼볼 우승을 차지했다.[51] 이로써 존슨은 대학 미식축구와 프로 미식축구에서 모두 우승을 차지한 최초의 감독이 되었다.[52]
1993년에도 카우보이스는 슈퍼볼 XXVIII에서 버펄로 빌스를 30-13으로 꺾고 2년 연속 우승을 달성했다.[58] 1993년 댈러스는 당시 NFL 기록인 11명의 선수를 프로볼에 배출했다.[55] 그러나 에밋 스미스와의 계약 협상이 길어지면서 시즌 개막 후 2경기에 결장했고, 1993년 NFL에 도입된 프리 에이전트 제도와 1994년 시즌부터 도입되는 연봉 상한제(샐러리 캡) 때문에 지미 존슨은 구단주 제리 존스에게 인사권 위임을 요청했지만, 존스 구단주는 이를 거부했으며,[333] 슈퍼볼 XXVIII 1주일 후 존슨 감독은 사임했다.[334]
배리 스위처 시대 (1994-1997)지미 존슨 감독과의 불화 끝에 배리 스위처가 새로운 감독으로 부임했다.[60] 카우보이스는 1994년 시즌에 12승 4패를 기록했지만,[61] NFC 챔피언십 게임에서 샌프란시스코 포티나이너스에게 38-28로 패하며 슈퍼볼 진출에는 실패했다.[63]
1995년, 댈러스 카우보이스는 샌프란시스코 포티나이너스에서 올프로 코너백 디온 샌더스를 영입했다.[64] 댈러스 카우보이스는 슈퍼볼 XXX에서 피츠버그 스틸러스를 27-17로 꺾고 다섯 번째 슈퍼볼 우승을 차지했다.[69] 이로써 배리 스위처는 지미 존슨과 함께 대학 풋볼 전국 챔피언십과 슈퍼볼을 모두 우승한 감독이 되었다.[70]
하지만 이후 자유 계약, 선수들의 노쇠화, 부상 등으로 인해 카우보이스의 전성기는 저물기 시작했다. 스타 리시버 마이클 어빈은 약물 관련 체포로 1996년 시즌 처음 5경기 동안 리그에서 출전 정지 처분을 받았다.[71] 1997년에는 6승 10패를 기록하며 시즌 마지막 6경기에서 연속 패배를 기록했고, 규율 문제와 경기장 밖 문제가 큰 방해 요소가 되었다.[75][76] 결국 배리 스위처는 1998년 1월 감독직에서 사임했다.[77]
챈 게일리 & 데이브 캠포 시대 (1998-2002)피츠버그 스틸러스 출신의 공격 코디네이터였던 챈 게일리가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챈 게일리(챈 게일리)는 1998년 1998년 시즌에 10승 6패를 기록하며 팀을 플레이오프로 이끌었고, NFC 동부 지구 우승을 차지하며 7년 만에 6번째 우승을 달성했다.[78] 그러나 카우보이스는 와일드 카드 라운드에서 애리조나 카디널스에게 홈에서 20대 7로 패했다.[78]
1999년 시즌에는 8승 8패를 기록했고, 이 시즌에 마이클 어빈이 필라델피아 이글스와의 경기에서 경추 부상을 당해 은퇴했다. (베테랑스 스타디움)[78] 카우보이스는 와일드 카드 플레이오프에서 미네소타 바이킹스에게 27대 10으로 패하며 탈락했다.[78] 게일리는 해고되었고, 팀을 슈퍼볼로 이끌지 못한 최초의 카우보이스 감독이 되었다.[78]
2000년 시즌에는 수비 코디네이터였던 데이브 캠포가 감독으로 승격되었다.[79] 시즌 시작 전, 코너백 디오 샌더스가 5시즌 만에 팀에서 방출되었고,[80] 그는 라이벌 팀인 워싱턴 레드스킨스와 계약했다. 1주차 경기에서 필라델피아 이글스에게 41대 14로 대패했는데, 이 경기에서 베테랑 쿼터백 트로이 에이크먼이 심각한 뇌진탕을 입어 은퇴하게 되었다. 오랫동안 NFL 쿼터백으로 활동했던 랜들 컨닝햄이 에이크먼을 대신했다. 카우보이스는 5승 11패로 시즌을 4위로 마쳤다.[81] 2000년의 유일한 하이라이트는 에밋 스미스가 10년 연속 1,000야드 돌파를 달성하고 레드스킨스를 전승으로 꺾은 것이다.[81]
2001년 시즌 시작 전, 에이크먼은 팀에서 방출되었고, 그는 입었던 뇌진탕으로 인해 은퇴했다.[82][83] 제리 존스는 쿼터백으로 토니 뱅크스와 계약했다. 뱅크스는 전년도에 슈퍼볼 XXXV 우승팀인 볼티모어 레이븐스에서 시즌 절반 동안 선발로 활동했지만 벤치로 밀려났다. 존스는 또한 그 해 드래프트 2라운드에서 쿼터백 퀸시 카터를 지명했고, 뱅크스는 프리시즌 중에 방출되었다. 라이언 리프, 앤서니 라이트, 그리고 클린트 스터너가 그 시즌 쿼터백 자리를 놓고 경쟁했다. 댈러스는 다시 5승 11패로 NFC 동부 최하위를 기록했지만, 워싱턴 레드스킨스를 4년 연속 전승으로 꺾었다.
2002년 시즌을 앞두고 댈러스는 세이프티 로이 윌리엄스를 전체 8순위로 지명했다. 시즌은 확장팀인 휴스턴 텍산스에게 19대 10으로 패하며 좋지 않게 시작되었다. 2002년 가장 큰 하이라이트는 10월 28일 시애틀 시호크스와의 홈 경기에서 에밋 스미스가 월터 페이지가 가지고 있던 NFL 역대 최다 러싱 기록을 경신한 것이었다. 추수감사절에 워싱턴 레드스킨스를 상대로 승리한 것은 레드스킨스를 상대로 10연승을 기록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그들의 2002년 마지막 승리가 되었고, 그 후 4경기를 내리 패하며 5승 11패로 다시 최하위를 기록했다. 연패는 17주차에 레드스킨스에게 20대 14로 패하며 끝났습니다. 그 경기는 스미스의 카우보이스 선수로서의 마지막 경기였고, 그는 시즌 오프시즌에 방출되었다.[84] 캠포는 시즌 종료와 함께 즉시 감독직에서 해고되었다.[85]
결론적으로 챈 게일리와 데이브 캠포 감독 시절, 댈러스 카우보이스는 뚜렷한 성적 부진을 겪으며 어려운 시기를 보냈다.
빌 파셀스 시대 (2003-2006)존스는 댈러스 카우보이스 감독직에 명장 빌 파셀스를 영입했다.[86] 2003 시즌의 다크호스로 7승 2패의 좋은 출발을 보였지만, 시즌 후반 3승 4패를 기록했다.[87] 10승 6패로 NFC 와일드카드 2위를 차지했지만, 컨퍼런스 우승팀인 캐롤라이나 팬서스에게 와일드카드 라운드에서 29-10으로 패했다.[88]
2004년 댈러스는 2003년의 성공을 재현하지 못하고 6승 10패로 시즌을 마쳤다.[89] 프리시즌 중 퀸시 카터는 방출되었고, 쿼터백 자리는 비니 테스타베르데가 대신했다.[90][91]
2005 시즌 댈러스는 7승 3패의 좋은 출발을 보였지만, 9승 7패로 3위에 그쳤다.[92] 시즌 시작 전에 베테랑 쿼터백 드류 블레드소를 영입했다.[93]
2006년은 카우보이스에게 흥미로운 해였다. 시즌 전에 재능 있지만 논란의 여지가 있는 프리에이전트 와이드 리시버 테렐 오웬스를 영입했다.[94] 카우보이스는 시즌 초반 3승 2패를 기록했다. 7주차 뉴욕 자이언츠와의 경기에서 시즌 초반부터 부진했던 블레드소가 경기에서 교체되었고, 백업 쿼터백 토니 로모가 그의 자리를 대신했다.[95] 로모는 경기를 뒤집지 못했고 댈러스는 36-22로 패했다. 그러나 로모는 선발 쿼터백으로 지명되었고 첫 6경기에서 5승 1패를 기록했다. 댈러스는 9승 7패로 2위를 차지하며 시즌을 마쳤다.[96] 플레이오프 5번 시드를 확보했고 시애틀 시호크스와의 경기에서 21-20으로 패했다.[97] 시즌 후 파셀스는 은퇴했고 웨이드 필립스가 그의 후임으로 임명되었다.[98][99]
웨이드 필립스 & 제이슨 개럿 시대 (2007-2019)웨이드 필립스 감독 체제의 카우보이스는 2007 시즌을 5연승으로 시작하여 13경기 중 12승을 거두었으나, 그 기간 동안 유일한 패배는 무패를 기록한 뉴잉글랜드 패트리어츠에게 당한 것이었다.[100][101] 정규 시즌 막판 부진에도 불구하고 NFC 1번 시드를 확보했으나, 디비전 라운드에서 뉴욕 자이언츠에게 21-17로 패하며 슈퍼볼 우승 기회를 놓쳤다.[102]
2008 시즌은 혼란스러웠다. 쿼터백 토니 로모가 애리조나 카디널스와의 경기에서 새끼손가락 골절 부상을 입는 등 주전 선수들의 부상이 이어졌다.[103] 결국 정규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필라델피아 이글스에게 패하며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다.2. 1. 창단 초기 (1960-1969)
댈러스 카우보이스는 1960년, 클린트 머치슨 주니어와 베드포드 윈에 의해 창단되었다.[16] 초대 단장 텍스 슈램,[19] 초대 감독 톰 랜드리[21]가 팀의 기틀을 다졌으며, 이들은 30년간 카우보이스의 운영을 이끌었다. 머치슨은 워싱턴 레드스킨스 구단주 조지 프레스턴 마셜과의 갈등 끝에, 레드스킨스 응원가 "헤일 투 더 레드스킨스"의 저작권을 구매하여 NFL 프랜차이즈를 얻어냈다.[18]
창단 초기에는 어려움을 겪었으나,[23] 밥 릴리, 돈 머레디스, 돈 퍼킨스 등 스타 선수들을 영입하며 전력을 강화했다. 특히, 1960년 쿼터백(QB) 돈 머레디스(Don Meredith), 1961년 러닝백(RB) 돈 퍼킨스(Don Perkins)와 디펜시브 태클(DT) 밥 릴리(Bob Lilly), 1964년 코너백(CB) 멜 렌프로(Mel Renfro)등을 영입했다.[22] 1965년에는 승률 5할을 기록했다.
1966년 첫 플레이오프 진출을 시작으로,[24] 1966년, 1967년 NFL 챔피언십에서 그린베이 패커스에게 아쉽게 패하며 "아이스볼"이라는 명경기를 남겼다.[24] 1968년과 1969년에는 디비전 타이틀을 획득했지만, 플레이오프에서 클리블랜드 브라운스에게 패했다.
2. 2. 1970년대: 전성기의 시작
1970년, 쿼터백 크레이그 모턴의 지휘 아래 댈러스 카우보이스는 첫 슈퍼볼에 진출했으나, 볼티모어 콜츠에게 경기 종료 직전 필드골을 허용하며 패했다.[27][28] 이 경기에서 라인배커 척 하울리는 패배팀 선수로는 유일하게 슈퍼볼 MVP로 선정되었다.[27][28]1971년, 카우보이스는 코튼 볼에서 텍사스 스타디움으로 홈구장을 이전하고, 쿼터백 로저 스토바흐를 중심으로 슈퍼볼 VI에서 마이애미 돌핀스를 꺾고 첫 우승을 차지했다.[29]
1975년, 랜디 화이트와 토마스 "할리우드" 헨더슨 등 새로운 스타 선수들이 합류하며 강력한 수비를 구축했지만, 슈퍼볼 X에서 피츠버그 스틸러스에게 패했다.[30]
1977년, 슈퍼볼 XII에서 덴버 브롱코스를 꺾고 두 번째 우승을 차지했으며,[31] 수비 라인맨 랜디 화이트와 하비 마틴이 공동 슈퍼볼 MVP로 선정되었다.
카우보이스는 1970년대에만 5번의 슈퍼볼에 진출하여 2번의 우승(1971년과 1977년)을 기록하며 NFL 최고의 팀으로 군림했다.[25] 1978 시즌 이후 슈퍼볼에 다시 진출했지만 피츠버그에 35-31로 패했다.[32]
2. 3. 1980년대: 세대 교체와 과도기
1970년대에 로저 스토바흐가 은퇴한 후, 대니 화이트가 주전 쿼터백을 맡았다.[25] 화이트는 1980년부터 1982년까지 3년 연속으로 팀을 NFC 챔피언십 게임에 진출시켰으나, 슈퍼볼 진출에는 실패했다.[25]1983년 1월 3일, 미네소타 바이킹스와의 먼데이 나이트 풋볼 경기에서 토니 도셋은 NFL 역사상 최장 거리인 99야드 터치다운 러닝을 기록했다.[331][332]
1984년, 범 브라이트가 팀을 인수했으나, 이후 성적이 점차 하락했다.[25] 1985년에는 10승 6패를 기록했지만, 1986년 7승 9패, 1987년 7승 8패, 1988년에는 3승 13패로 부진을 면치 못했다.[25]
2. 4. 제리 존스 시대 (1989-현재)
### 지미 존슨 왕조 (1989-1993)1989년, 제리 존스는 팀을 인수하고 톰 랜드리를 해고한 뒤, 마이애미 대학교 감독이자 자신의 아칸소 대학교 시절 동료였던 지미 존슨을 감독으로 임명하며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했다.[41] 존슨은 드래프트 1순위로 UCLA 쿼터백 트로이 에이크먼을 지명했고, 허셸 워커를 미네소타 바이킹스로 보내는 대규모 트레이드를 통해 팀 재건의 발판을 마련했다.[42][43]
존슨 감독은 쿼터백 트로이 에이크먼, 러닝백 에밋 스미스, 와이드 리시버 마이클 어빈 등 "트리플렛츠"를 중심으로 팀을 재건했다.[44] 1989년 드래프트에서 트로이 에이크먼외에 풀백 데릴 존스턴과 센터 마크 스테프노스키를 영입했고, 1990년에는 에밋 스미스를, 1991년에는 러셀 메릴랜드와 에릭 윌리엄스, 1992년에는 대런 우드슨을 영입하며 전력을 강화했다.
1991년에 카우보이스는 11승 5패를 기록하며 플레이오프에 진출, 와일드 카드 라운드에서 베어스를 꺾고 1982년 이후 첫 플레이오프 승리를 거두었다.[45]
1992년 정규 시즌을 13승 3패로 마감한 카우보이스는[46] 슈퍼볼 XXVII에서 버펄로 빌스를 52-17로 꺾고 세 번째 슈퍼볼 우승을 차지했다.[51] 이로써 존슨은 대학 미식축구와 프로 미식축구에서 모두 우승을 차지한 최초의 감독이 되었다.[52]
1993년에도 카우보이스는 슈퍼볼 XXVIII에서 버펄로 빌스를 30-13으로 꺾고 2년 연속 우승을 달성했다.[58] 1993년 댈러스는 당시 NFL 기록인 11명의 선수를 프로볼에 배출했다.[55] 그러나 에밋 스미스와의 계약 협상이 길어지면서 시즌 개막 후 2경기에 결장했고, 1993년 NFL에 도입된 프리 에이전트 제도와 1994년 시즌부터 도입되는 연봉 상한제(샐러리 캡) 때문에 지미 존슨은 구단주 제리 존스에게 인사권 위임을 요청했지만, 존스 구단주는 이를 거부했으며,[333] 슈퍼볼 XXVIII 1주일 후 존슨 감독은 사임했다.[334]
### 배리 스위처 시대 (1994-1997)
지미 존슨 감독과의 불화 끝에 배리 스위처가 새로운 감독으로 부임했다.[60] 카우보이스는 1994년 시즌에 12승 4패를 기록했지만,[61] NFC 챔피언십 게임에서 샌프란시스코 포티나이너스에게 38-28로 패하며 슈퍼볼 진출에는 실패했다.[63]
1995년, 댈러스 카우보이스는 샌프란시스코 포티나이너스에서 올프로 코너백 디온 샌더스를 영입했다.[64] 댈러스 카우보이스는 슈퍼볼 XXX에서 피츠버그 스틸러스를 27-17로 꺾고 다섯 번째 슈퍼볼 우승을 차지했다.[69] 이로써 배리 스위처는 지미 존슨과 함께 대학 풋볼 전국 챔피언십과 슈퍼볼을 모두 우승한 감독이 되었다.[70]
하지만 이후 자유 계약, 선수들의 노쇠화, 부상 등으로 인해 카우보이스의 전성기는 저물기 시작했다. 스타 리시버 마이클 어빈은 약물 관련 체포로 1996년 시즌 처음 5경기 동안 리그에서 출전 정지 처분을 받았다.[71] 1997년에는 6승 10패를 기록하며 시즌 마지막 6경기에서 연속 패배를 기록했고, 규율 문제와 경기장 밖 문제가 큰 방해 요소가 되었다.[75][76] 결국 배리 스위처는 1998년 1월 감독직에서 사임했다.[77]
### 챈 게일리 & 데이브 캠포 시대 (1998-2002)
피츠버그 스틸러스 출신의 공격 코디네이터였던 챈 게일리가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챈 게일리(챈 게일리)는 1998년 1998년 시즌에 10승 6패를 기록하며 팀을 플레이오프로 이끌었고, NFC 동부 지구 우승을 차지하며 7년 만에 6번째 우승을 달성했다.[78] 그러나 카우보이스는 와일드 카드 라운드에서 애리조나 카디널스에게 홈에서 20대 7로 패했다.[78]
1999년 시즌에는 8승 8패를 기록했고, 이 시즌에 마이클 어빈이 필라델피아 이글스와의 경기에서 경추 부상을 당해 은퇴했다. (베테랑스 스타디움)[78] 카우보이스는 와일드 카드 플레이오프에서 미네소타 바이킹스에게 27대 10으로 패하며 탈락했다.[78] 게일리는 해고되었고, 팀을 슈퍼볼로 이끌지 못한 최초의 카우보이스 감독이 되었다.[78]
2000년 시즌에는 수비 코디네이터였던 데이브 캠포가 감독으로 승격되었다.[79] 시즌 시작 전, 코너백 디오 샌더스가 5시즌 만에 팀에서 방출되었고,[80] 그는 라이벌 팀인 워싱턴 레드스킨스와 계약했다. 1주차 경기에서 필라델피아 이글스에게 41대 14로 대패했는데, 이 경기에서 베테랑 쿼터백 트로이 에이크먼이 심각한 뇌진탕을 입어 은퇴하게 되었다. 오랫동안 NFL 쿼터백으로 활동했던 랜들 컨닝햄이 에이크먼을 대신했다. 카우보이스는 5승 11패로 시즌을 4위로 마쳤다.[81] 2000년의 유일한 하이라이트는 에밋 스미스가 10년 연속 1,000야드 돌파를 달성하고 레드스킨스를 전승으로 꺾은 것이다.[81]
2001년 시즌 시작 전, 에이크먼은 팀에서 방출되었고, 그는 입었던 뇌진탕으로 인해 은퇴했다.[82][83] 제리 존스는 쿼터백으로 토니 뱅크스와 계약했다. 뱅크스는 전년도에 슈퍼볼 XXXV 우승팀인 볼티모어 레이븐스에서 시즌 절반 동안 선발로 활동했지만 벤치로 밀려났다. 존스는 또한 그 해 드래프트 2라운드에서 쿼터백 퀸시 카터를 지명했고, 뱅크스는 프리시즌 중에 방출되었다. 라이언 리프, 앤서니 라이트, 그리고 클린트 스터너가 그 시즌 쿼터백 자리를 놓고 경쟁했다. 댈러스는 다시 5승 11패로 NFC 동부 최하위를 기록했지만, 워싱턴 레드스킨스를 4년 연속 전승으로 꺾었다.
2002년 시즌을 앞두고 댈러스는 세이프티 로이 윌리엄스를 전체 8순위로 지명했다. 시즌은 확장팀인 휴스턴 텍산스에게 19대 10으로 패하며 좋지 않게 시작되었다. 2002년 가장 큰 하이라이트는 10월 28일 시애틀 시호크스와의 홈 경기에서 에밋 스미스가 월터 페이지가 가지고 있던 NFL 역대 최다 러싱 기록을 경신한 것이었다. 추수감사절에 워싱턴 레드스킨스를 상대로 승리한 것은 레드스킨스를 상대로 10연승을 기록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그들의 2002년 마지막 승리가 되었고, 그 후 4경기를 내리 패하며 5승 11패로 다시 최하위를 기록했다. 연패는 17주차에 레드스킨스에게 20대 14로 패하며 끝났습니다. 그 경기는 스미스의 카우보이스 선수로서의 마지막 경기였고, 그는 시즌 오프시즌에 방출되었다.[84] 캠포는 시즌 종료와 함께 즉시 감독직에서 해고되었다.[85]
### 빌 파셀스 시대 (2003-2006)
존스는 댈러스 카우보이스 감독직에 명장 빌 파셀스를 영입했다.[86] 2003 시즌의 다크호스로 7승 2패의 좋은 출발을 보였지만, 시즌 후반 3승 4패를 기록했다.[87] 10승 6패로 NFC 와일드카드 2위를 차지했지만, 컨퍼런스 우승팀인 캐롤라이나 팬서스에게 와일드카드 라운드에서 29-10으로 패했다.[88]
2004년 댈러스는 2003년의 성공을 재현하지 못하고 6승 10패로 시즌을 마쳤다.[89] 프리시즌 중 퀸시 카터는 방출되었고, 쿼터백 자리는 비니 테스타베르데가 대신했다.[90][91]
2005 시즌 댈러스는 7승 3패의 좋은 출발을 보였지만, 9승 7패로 3위에 그쳤다.[92] 시즌 시작 전에 베테랑 쿼터백 드류 블레드소를 영입했다.[93]
2006년은 카우보이스에게 흥미로운 해였다. 시즌 전에 재능 있지만 논란의 여지가 있는 프리에이전트 와이드 리시버 테렐 오웬스를 영입했다.[94] 카우보이스는 시즌 초반 3승 2패를 기록했다. 7주차 뉴욕 자이언츠와의 경기에서 시즌 초반부터 부진했던 블레드소가 경기에서 교체되었고, 백업 쿼터백 토니 로모가 그의 자리를 대신했다.[95] 로모는 경기를 뒤집지 못했고 댈러스는 36-22로 패했다. 그러나 로모는 선발 쿼터백으로 지명되었고 첫 6경기에서 5승 1패를 기록했다. 댈러스는 9승 7패로 2위를 차지하며 시즌을 마쳤다.[96] 플레이오프 5번 시드를 확보했고 시애틀 시호크스와의 경기에서 21-20으로 패했다.[97] 시즌 후 파셀스는 은퇴했고 웨이드 필립스가 그의 후임으로 임명되었다.[98][99]
### 웨이드 필립스 & 제이슨 개럿 시대 (2007-2019)
웨이드 필립스 감독 체제의 카우보이스는 2007 시즌을 5연승으로 시작하여 13경기 중 12승을 거두었으나, 그 기간 동안 유일한 패배는 무패를 기록한 뉴잉글랜드 패트리어츠에게 당한 것이었다.[100][101] 정규 시즌 막판 부진에도 불구하고 NFC 1번 시드를 확보했으나, 디비전 라운드에서 뉴욕 자이언츠에게 21-17로 패하며 슈퍼볼 우승 기회를 놓쳤다.[102]
2008 시즌은 혼란스러웠다. 쿼터백 토니 로모가 애리조나 카디널스와의 경기에서 새끼손가락 골절 부상을 입는 등 주전 선수들의 부상이 이어졌다.[103] 결국 정규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필라델피아 이글스에게 패하며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다.[104]
2009년 5월 2일, 댈러스 카우보이스의 연습 시설이 돌풍으로 무너지는 사고가 발생하여 12명의 선수와 코치가 부상을 입었다.[105] 특히 특별팀 코치 조 데카밀리스는 경추 척추골절, 스카우팅 어시스턴트 리치 빔은 척추 절단으로 하반신 마비라는 심각한 부상을 당했다.[106]
2009 시즌에는 새로운 홈구장인 AT&T 스타디움으로 이전했다. 시즌 초반 부진을 딛고 뉴올리언스 세인츠를 꺾는 등 선전하며 3년 만에 NFC 이스트 타이틀과 NFC 플레이오프 3번 시드를 확보했다.[108][109] 2009년 와일드 카드 라운드에서 필라델피아 이글스를 꺾고 1996년 이후 첫 플레이오프 승리를 기록했으나,[110] 디비전 라운드에서 미네소타 바이킹스에게 34-3으로 대패했다.[111]
2010 시즌 1승 7패의 부진한 성적을 거두자 필립스 감독은 해임되었고, 공격 코디네이터였던 제이슨 개럿이 임시 감독으로 부임했다.[340] 개럿은 2010 시즌을 6승 10패로 마무리하고,[113] 이러한 성적 향상을 바탕으로 2011 시즌 정식 감독으로 임명되었다.[114][115]

2011 시즌부터 2013 시즌까지 3년 연속 8승 8패를 기록하며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다. 특히 2011 시즌에는 뉴욕 자이언츠와의 최종전에서 패배하며 지구 우승을 놓쳤고,[343] 2012 시즌과 2013 시즌에도 마지막 경기에서 패배하며 아쉬움을 남겼다.[344]
2013년 8월, 홈구장인 카우보이스 스타디움은 AT&T와 12억 달러의 명명권 계약을 체결하여 AT&T 스타디움으로 이름이 변경되었다.[345]
2014 시즌에는 샌프란시스코 포티나이너스에게 패배로 시작했지만, 이후 6연승을 달렸다. 시애틀 시호크스를 30-23으로 꺾는 등 선전하며 12승 4패로 정규 시즌을 마감, NFC 이스트 챔피언에 등극했다.[124] 디트로이트 라이온스와의 와일드카드 라운드에서 승리했지만,[125] 그린 베이 패커스와의 디비전 라운드에서 논란의 여지가 있는 판정으로 패배하며 시즌을 마감했다.[126]
2015 시즌에는 데마코 머리가 디비전 라이벌 필라델피아 이글스로 이적하고,[127] 데즈 브라이언트는 5년 7000만 달러 계약에 사인했다.[128] 시즌 중반 토니 로모가 쇄골 골절 부상을 입는 등 악재가 겹치며 4승 12패, 지구 최하위로 시즌을 마감했다.[129]
2016 시즌에는 토니 로모의 부상으로 신인 쿼터백 닥 프레스콧(Dak Prescott)이 주전으로 활약하며 13승 3패로 컨퍼런스 최고 성적을 기록했다.[130] 신인 런닝백 에제키엘 엘리엇(Ezekiel Elliott)은 토니 도셋(Tony Dorsett)의 카우보이스 신인 시즌 최다 러싱 기록을 경신했다. 그러나 NFL 플레이오프 디비전 라운드에서 그린 베이 패커스에게 패배했다.[132] 닥 프레스콧은 NFL 올해의 신인상을 수상했고,[133] 제이슨 개럿은 올해의 감독상을 수상했다.[133]

2017 시즌에는 토니 로모가 은퇴하고,[134] 에제키엘 엘리엇이 6경기 출장 정지 처분을 받는 등 어려움 속에서 9승 7패를 기록,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다.[135][136] 시즌 후 데즈 브라이언트가 방출되고, 제이슨 위튼(Jason Witten)이 은퇴했다.[137][138]
2018 시즌에는 10승 6패로 NFC 이스트 우승을 차지했다.[140] 와일드카드 라운드에서 시애틀 시호크스를 24-22로 꺾었으나,[141] 디비전 라운드에서 로스앤젤레스 램스에게 30-22로 패배했다.[142]
2019 시즌에는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고, 2020년 1월 5일 제이슨 개럿 감독이 해고되었다.
### 마이크 매카시 시대 (2020-현재)
2019 시즌 종료 후, 카우보이스는 10시즌 중 7번째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고, 오랜 기간 감독직을 맡았던 제이슨 개럿과 결별했다. 마빈 루이스 (전 벵골스 감독)와 마이크 매카시 (그린베이를 슈퍼볼 우승으로 이끈 전 패커스 감독)가 감독직 인터뷰를 받았다.[143]
마이크 매카시는 2020년 댈러스 카우보이스의 새로운 감독으로 부임했다. 매카시와 카우보이스는 2주차 애틀랜타 팰컨스와의 경기에서 첫 승리를 거머쥐었다.[144] 그러나 10월 11일, 쿼터백 덕 프레스콧이 심각한 발목 부상을 입으면서 2020 시즌은 사실상 막을 내렸다.[145] 프레스콧의 부상에도 불구하고, 매카시의 첫 시즌 카우보이스는 정규 시즌 대부분 플레이오프 진출 가능성을 유지했다. 최종적으로 6승 10패를 기록하며 NFC 동부지구 3위를 차지했다.[146] 2020 시즌 내내 카우보이스의 수비는 심각한 부진을 겪었다. 시즌 후 수비 코디네이터 마이크 놀란과 수비 라인 코치 짐 톰술라가 해임되었다.[147]
2021 시즌은 2018년 이후 첫 승률 5할 이상 시즌이었고, 샌프란시스코 포티나이너스가 16주차에 테네시 타이탄스에게 패배하면서 2018년 이후 처음으로 플레이오프 진출을 확정지었다. 덴버 브롱코스가 라스베이거스 레이더스에게 패배하면서, 승리 팀 강도에 따른 동률 결정 방식을 기반으로 카우보이스는 NFC 동부지구 우승을 차지했는데, 이는 2018년 이후 처음 있는 일이였다.[148] 1998년 이후 처음으로 NFC 동부지구 팀들을 모두 이겼다. 신인 미카 파슨스는 수비 부문 올해의 신인으로 선정되었고, 리그 최고 수준의 수비에 기여했다.[149] 카우보이스의 강력한 공격은 530점을 기록하며 리그 최고이자 팀 신기록을 세웠다.[150] 12승 5패로 시즌을 마무리하며 2016년 이후 최고 성적을 거두었지만, 와일드카드 라운드에서 샌프란시스코 포티나이너스에게 23-17로 패배했다.[151]
2022 시즌에도 12승 5패를 기록했다. 15주차에 잭슨빌 자가스에게 패했지만, 같은 날 워싱턴 커맨더스가 패배하면서 플레이오프 진출을 확정했다. 이는 2006년–2007년 이후 처음으로 카우보이스가 연속으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한 것이다.[152] 쿼터백 덕 프레스콧은 지역 사회와 자선 활동에 대한 공헌으로 월터 페이턴 NFL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했다.[153] 플레이오프 와일드카드 라운드에서 카우보이스는 탬파베이 버커니어스를 꺾고 1992년 슈퍼볼 우승 이후 처음으로 플레이오프 원정 경기에서 승리했으며, 톰 브래디와의 경기에서 연패를 끊었다. 이 경기는 브래디의 선수 생활 마지막 경기였다.[154] 하지만 두 번째 시즌 연속으로 샌프란시스코 포티나이너스에게 패배했는데, 이번에는 디비전 라운드에서 패하며 7시즌 연속 디비전 라운드에서 패배했다.[155]
2023년에 카우보이스는 3년 연속으로 12승 5패를 기록했다.[160] 2021년 이후 처음이자 3시즌 동안 두 번째로 NFC 동부지구 우승을 차지했다.[161] 12승 5패로 샌프란시스코 포티나이너스와 디트로이트 라이온스와 NFC 1위를 다투는 3팀 동률을 이뤘다. 그러나 콘퍼런스 기록 동률 결정전에서 포티나이너스에 패했지만 라이온스와의 상대 전적 동률 결정전에서 승리하여 플레이오프 2번 시드를 확보했다.[162] 카우보이스는 15주차에 버팔로 빌스에게 패했지만, 그린베이 패커스와 애틀랜타 팰컨스가 각각 탬파베이 버커니어스와 캐롤라이나 팬서스에게 패배하면서 경기장에 나서기 전에 3시즌 연속 플레이오프 진출을 확정했다.[163] 이는 1991년부터 1996년까지 6시즌 연속 플레이오프 진출 이후 처음으로 3시즌 연속 플레이오프에 진출한 것이다. 하지만 카우보이스는 플레이오프에서 리그 최고 수준의 공격과 수비에도 불구하고 와일드카드 라운드에서 라이벌인 7번 시드 그린베이 패커스에게 48-32로 크게 패했다. 4쿼터 한때 48-16까지 뒤쳐졌다.[164][165][166] 이 패배로 카우보이스는 2020-21 NFL 플레이오프 이후 플레이오프 대진표가 확장된 이후 7번 시드 팀에게 패한 최초의 팀이 되었으며,[167][168][169] 또한 3시즌 연속 12경기 이상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컨퍼런스 챔피언십 게임에 진출하지 못한 최초의 팀
2. 4. 1. 지미 존슨 왕조 (1989-1993)
1989년, 제리 존스는 팀을 인수하고 톰 랜드리를 해고한 뒤, 마이애미 대학교 감독이자 자신의 아칸소 대학교 시절 동료였던 지미 존슨을 감독으로 임명하며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했다.[41] 존슨은 드래프트 1순위로 UCLA 쿼터백 트로이 에이크먼을 지명했고, 허셸 워커를 미네소타 바이킹스로 보내는 대규모 트레이드를 통해 팀 재건의 발판을 마련했다.[42][43]존슨 감독은 쿼터백 트로이 에이크먼, 러닝백 에밋 스미스, 와이드 리시버 마이클 어빈 등 "트리플렛츠"를 중심으로 팀을 재건했다.[44] 1990년에는 데릴 존스턴과 마크 스테프노스키를, 1991년에는 에밋 스미스를, 1992년에는 러셀 메릴랜드와 에릭 윌리엄스, 대런 우드슨을 영입하며 전력을 강화했다.
1991년에 카우보이스는 11승 5패를 기록하며 플레이오프에 진출, 와일드 카드 라운드에서 베어스를 꺾고 1982년 이후 첫 플레이오프 승리를 거두었다.[45]
1992년 정규 시즌을 13승 3패로 마감한 카우보이스는[46] 슈퍼볼 XXVII에서 버펄로 빌스를 52-17로 꺾고 세 번째 슈퍼볼 우승을 차지했다.[51] 이로써 존슨은 대학 미식축구와 프로 미식축구에서 모두 우승을 차지한 최초의 감독이 되었다.[52]
1993년에도 카우보이스는 슈퍼볼 XXVIII에서 버펄로 빌스를 30-13으로 꺾고 2년 연속 우승을 달성했다.[58] 1993년 댈러스는 당시 NFL 기록인 11명의 선수를 프로볼에 배출했다.[55]
2. 4. 2. 배리 스위처 시대 (1994-1997)
1994년, 지미 존슨 감독과의 불화 끝에 배리 스위처가 새로운 감독으로 부임했다.[60] 카우보이스는 1994년 시즌에 12승 4패를 기록했지만,[61] NFC 챔피언십 게임에서 샌프란시스코 포티나이너스에게 38-28로 패하며 슈퍼볼 진출에는 실패했다.[63]1995년, 댈러스 카우보이스는 샌프란시스코 포티나이너스에서 올프로 코너백 디온 샌더스를 영입했다.[64] 댈러스 카우보이스는 슈퍼볼 XXX에서 피츠버그 스틸러스를 27-17로 꺾고 다섯 번째 슈퍼볼 우승을 차지했다.[69] 이로써 배리 스위처는 지미 존슨과 함께 대학 풋볼 전국 챔피언십과 슈퍼볼을 모두 우승한 감독이 되었다.[70]
하지만 이후 자유 계약, 선수들의 노쇠화, 부상 등으로 인해 카우보이스의 전성기는 저물기 시작했다. 스타 리시버 마이클 어빈은 약물 관련 체포로 1996년 시즌 처음 5경기 동안 리그에서 출전 정지 처분을 받았다.[71] 1997년에는 6승 10패를 기록하며 시즌 마지막 6경기에서 연속 패배를 기록했고, 규율 문제와 경기장 밖 문제가 큰 방해 요소가 되었다.[75][76] 결국 배리 스위처는 1998년 1월 감독직에서 사임했다.[77]
2. 4. 3. 챈 게일리 & 데이브 캠포 시대 (1998-2002)
챈 게일리(챈 게일리)는 1998년 1998년 시즌에 10승 6패를 기록하며 팀을 플레이오프로 이끌었고, NFC 동부 지구 우승을 차지하며 7년 만에 6번째 우승을 달성했다.[78] 그러나 카우보이스는 와일드 카드 라운드에서 애리조나 카디널스에게 홈에서 20대 7로 패했다.[78]1999년 시즌에는 8승 8패를 기록했고, 이 시즌에 마이클 어빈이 필라델피아 이글스와의 경기에서 경추 부상을 당해 은퇴했다. (베테랑스 스타디움)[78] 카우보이스는 와일드 카드 플레이오프에서 미네소타 바이킹스에게 27대 10으로 패하며 탈락했다.[78] 게일리는 해고되었고, 팀을 슈퍼볼로 이끌지 못한 최초의 카우보이스 감독이 되었다.[78]
2000년 시즌에는 수비 코디네이터였던 데이브 캠포가 감독으로 승격되었다.[79] 시즌 시작 전, 코너백 디오 샌더스가 5시즌 만에 팀에서 방출되었고,[80] 그는 라이벌 팀인 워싱턴 레드스킨스와 계약했다. 1주차 경기에서 필라델피아 이글스에게 41대 14로 대패했는데, 이 경기에서 베테랑 쿼터백 트로이 에이크먼이 심각한 뇌진탕을 입어 은퇴하게 되었다. 오랫동안 NFL 쿼터백으로 활동했던 랜들 컨닝햄이 에이크먼을 대신했다. 카우보이스는 5승 11패로 시즌을 4위로 마쳤다.[81] 2000년의 유일한 하이라이트는 에밋 스미스가 10년 연속 1,000야드 돌파를 달성하고 레드스킨스를 전승으로 꺾은 것이다.[81]
2001년 시즌 시작 전, 에이크먼은 팀에서 방출되었고, 그는 입었던 뇌진탕으로 인해 은퇴했다.[82][83] 제리 존스는 쿼터백으로 토니 뱅크스와 계약했다. 뱅크스는 전년도에 슈퍼볼 XXXV 우승팀인 볼티모어 레이븐스에서 시즌 절반 동안 선발로 활동했지만 벤치로 밀려났다. 존스는 또한 그 해 드래프트 2라운드에서 쿼터백 퀸시 카터를 지명했고, 뱅크스는 프리시즌 중에 방출되었다. 라이언 리프, 앤서니 라이트, 그리고 클린트 스터너가 그 시즌 쿼터백 자리를 놓고 경쟁했다. 댈러스는 다시 5승 11패로 NFC 동부 최하위를 기록했지만, 워싱턴 레드스킨스를 4년 연속 전승으로 꺾었다.
2002년 시즌을 앞두고 댈러스는 세이프티 로이 윌리엄스를 전체 8순위로 지명했다. 시즌은 확장팀인 휴스턴 텍산스에게 19대 10으로 패하며 좋지 않게 시작되었다. 2002년 가장 큰 하이라이트는 10월 28일 시애틀 시호크스와의 홈 경기에서 에밋 스미스가 월터 페이지가 가지고 있던 NFL 역대 최다 러싱 기록을 경신한 것이었다. 추수감사절에 워싱턴 레드스킨스를 상대로 승리한 것은 레드스킨스를 상대로 10연승을 기록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그들의 2002년 마지막 승리가 되었고, 그 후 4경기를 내리 패하며 5승 11패로 다시 최하위를 기록했다. 연패는 17주차에 레드스킨스에게 20대 14로 패하며 끝났습니다. 그 경기는 스미스의 카우보이스 선수로서의 마지막 경기였고, 그는 시즌 오프시즌에 방출되었다.[84] 캠포는 시즌 종료와 함께 즉시 감독직에서 해고되었다.[85]
결론적으로 챈 게일리와 데이브 캠포 감독 시절, 댈러스 카우보이스는 뚜렷한 성적 부진을 겪으며 어려운 시기를 보냈다.
2. 4. 4. 빌 파셀스 시대 (2003-2006)
존스는 댈러스 카우보이스 감독직에 명장 빌 파셀스를 영입했다.[86] 2003 시즌의 다크호스로 7승 2패의 좋은 출발을 보였지만, 시즌 후반 3승 4패를 기록했다.[87] 10승 6패로 NFC 와일드카드 2위를 차지했지만, 컨퍼런스 우승팀인 캐롤라이나 팬서스에게 와일드카드 라운드에서 29-10으로 패했다.[88]2004년 댈러스는 2003년의 성공을 재현하지 못하고 6승 10패로 시즌을 마쳤다.[89] 프리시즌 중 퀸시 카터는 방출되었고, 쿼터백 자리는 비니 테스타베르데가 대신했다.[90][91]
2005 시즌 댈러스는 7승 3패의 좋은 출발을 보였지만, 9승 7패로 3위에 그쳤다.[92] 시즌 시작 전에 베테랑 쿼터백 드류 블레드소를 영입했다.[93]
2006년은 카우보이스에게 흥미로운 해였다. 시즌 전에 재능 있지만 논란의 여지가 있는 프리에이전트 와이드 리시버 테렐 오웬스를 영입했다.[94] 카우보이스는 시즌 초반 3승 2패를 기록했다. 7주차 뉴욕 자이언츠와의 경기에서 시즌 초반부터 부진했던 블레드소가 경기에서 교체되었고, 백업 쿼터백 토니 로모가 그의 자리를 대신했다.[95] 로모는 경기를 뒤집지 못했고 댈러스는 36-22로 패했다. 그러나 로모는 선발 쿼터백으로 지명되었고 첫 6경기에서 5승 1패를 기록했다. 댈러스는 9승 7패로 2위를 차지하며 시즌을 마쳤다.[96] 플레이오프 5번 시드를 확보했고 시애틀 시호크스와의 경기에서 21-20으로 패했다.[97] 시즌 후 파셀스는 은퇴했고 웨이드 필립스가 그의 후임으로 임명되었다.[98][99]
2. 4. 5. 웨이드 필립스 & 제이슨 개럿 시대 (2007-2019)
웨이드 필립스 감독 체제의 카우보이스는 2007 시즌을 5연승으로 시작하여 13경기 중 12승을 거두었으나, 그 기간 동안 유일한 패배는 무패를 기록한 뉴잉글랜드 패트리어츠에게 당한 것이었다.[100][101] 정규 시즌 막판 부진에도 불구하고 NFC 1번 시드를 확보했으나, 디비전 라운드에서 뉴욕 자이언츠에게 21-17로 패하며 슈퍼볼 우승 기회를 놓쳤다.[102]2008 시즌은 혼란스러웠다. 쿼터백 토니 로모가 애리조나 카디널스와의 경기에서 새끼손가락 골절 부상을 입는 등 주전 선수들의 부상이 이어졌다.[103] 결국 정규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필라델피아 이글스에게 패하며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다.[104]
2009년 5월 2일, 댈러스 카우보이스의 연습 시설이 돌풍으로 무너지는 사고가 발생하여 12명의 선수와 코치가 부상을 입었다.[105] 특히 특별팀 코치 조 데카밀리스는 경추 척추골절, 스카우팅 어시스턴트 리치 빔은 척추 절단으로 하반신 마비라는 심각한 부상을 당했다.[106]
2009 시즌에는 새로운 홈구장인 AT&T 스타디움으로 이전했다. 시즌 초반 부진을 딛고 뉴올리언스 세인츠를 꺾는 등 선전하며 3년 만에 NFC 이스트 타이틀과 NFC 플레이오프 3번 시드를 확보했다.[108][109] 2009년 와일드 카드 라운드에서 필라델피아 이글스를 꺾고 1996년 이후 첫 플레이오프 승리를 기록했으나,[110] 디비전 라운드에서 미네소타 바이킹스에게 34-3으로 대패했다.[111]
2010 시즌 1승 7패의 부진한 성적을 거두자 필립스 감독은 해임되었고, 공격 코디네이터였던 제이슨 개럿이 임시 감독으로 부임했다.[340] 개럿은 2010 시즌을 6승 10패로 마무리하고,[113] 이러한 성적 향상을 바탕으로 2011 시즌 정식 감독으로 임명되었다.[114][115]
2011 시즌부터 2013 시즌까지 3년 연속 8승 8패를 기록하며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다. 특히 2011 시즌에는 뉴욕 자이언츠와의 최종전에서 패배하며 지구 우승을 놓쳤고,[343] 2012 시즌과 2013 시즌에도 마지막 경기에서 패배하며 아쉬움을 남겼다.[344]
2013년 8월, 홈구장인 카우보이스 스타디움은 AT&T와 12억 달러의 명명권 계약을 체결하여 AT&T 스타디움으로 이름이 변경되었다.[345]
2014 시즌에는 샌프란시스코 포티나이너스에게 패배로 시작했지만, 이후 6연승을 달렸다. 시애틀 시호크스를 30-23으로 꺾는 등 선전하며 12승 4패로 정규 시즌을 마감, NFC 이스트 챔피언에 등극했다.[124] 디트로이트 라이온스와의 와일드카드 라운드에서 승리했지만,[125] 그린 베이 패커스와의 디비전 라운드에서 논란의 여지가 있는 판정으로 패배하며 시즌을 마감했다.[126]
2015 시즌에는 데마코 머리가 디비전 라이벌 필라델피아 이글스로 이적하고,[127] 데즈 브라이언트는 5년 7000만 달러 계약에 사인했다.[128] 시즌 중반 토니 로모가 쇄골 골절 부상을 입는 등 악재가 겹치며 4승 12패, 지구 최하위로 시즌을 마감했다.[129]
2016 시즌에는 토니 로모의 부상으로 신인 쿼터백 닥 프레스콧(Dak Prescott)이 주전으로 활약하며 13승 3패로 컨퍼런스 최고 성적을 기록했다.[130] 신인 런닝백 에제키엘 엘리엇(Ezekiel Elliott)은 토니 도셋(Tony Dorsett)의 카우보이스 신인 시즌 최다 러싱 기록을 경신했다. 그러나 NFL 플레이오프 디비전 라운드에서 그린 베이 패커스에게 패배했다.[132] 닥 프레스콧은 NFL 올해의 신인상을 수상했고,[133] 제이슨 개럿은 올해의 감독상을 수상했다.[133]
2017 시즌에는 토니 로모가 은퇴하고,[134] 에제키엘 엘리엇이 6경기 출장 정지 처분을 받는 등 어려움 속에서 9승 7패를 기록,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다.[135][136] 시즌 후 데즈 브라이언트가 방출되고, 제이슨 위튼(Jason Witten)이 은퇴했다.[137][138]
2018 시즌에는 10승 6패로 NFC 이스트 우승을 차지했다.[140] 와일드카드 라운드에서 시애틀 시호크스를 24-22로 꺾었으나,[141] 디비전 라운드에서 로스앤젤레스 램스에게 30-22로 패배했다.[142]
2019 시즌에는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고, 2020년 1월 5일 제이슨 개럿 감독이 해고되었다.
2. 4. 6. 마이크 매카시 시대 (2020-현재)
2019 시즌 종료 후, 카우보이스는 10시즌 중 7번째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고, 오랜 기간 감독직을 맡았던 제이슨 개럿과 결별했다. 마빈 루이스 (전 벵골스 감독)와 마이크 매카시 (그린베이를 슈퍼볼 우승으로 이끈 전 패커스 감독)가 감독직 인터뷰를 받았다.[143]마이크 매카시는 2020년 댈러스 카우보이스의 새로운 감독으로 부임했다. 매카시와 카우보이스는 2주차 애틀랜타 팰컨스와의 경기에서 첫 승리를 거머쥐었다.[144] 그러나 10월 11일, 쿼터백 덕 프레스콧이 심각한 발목 부상을 입으면서 2020 시즌은 사실상 막을 내렸다.[145] 프레스콧의 부상에도 불구하고, 매카시의 첫 시즌 카우보이스는 정규 시즌 대부분 플레이오프 진출 가능성을 유지했다. 최종적으로 6승 10패를 기록하며 NFC 동부지구 3위를 차지했다.[146] 2020 시즌 내내 카우보이스의 수비는 심각한 부진을 겪었다. 시즌 후 수비 코디네이터 마이크 놀란과 수비 라인 코치 짐 톰술라가 해임되었다.[147]
2021 시즌은 2018년 이후 첫 승률 5할 이상 시즌이었고, 샌프란시스코 포티나이너스가 16주차에 테네시 타이탄스에게 패배하면서 2018년 이후 처음으로 플레이오프 진출을 확정지었다. 덴버 브롱코스가 라스베이거스 레이더스에게 패배하면서, 승리 팀 강도에 따른 동률 결정 방식을 기반으로 카우보이스는 NFC 동부지구 우승을 차지했는데, 이는 2018년 이후 처음 있는 일이였다.[148] 1998년 이후 처음으로 NFC 동부지구 팀들을 모두 이겼다. 신인 미카 파슨스는 수비 부문 올해의 신인으로 선정되었고, 리그 최고 수준의 수비에 기여했다.[149] 카우보이스의 강력한 공격은 530점을 기록하며 리그 최고이자 팀 신기록을 세웠다.[150] 12승 5패로 시즌을 마무리하며 2016년 이후 최고 성적을 거두었지만, 와일드카드 라운드에서 샌프란시스코 포티나이너스에게 23-17로 패배했다.[151]
2022 시즌에도 12승 5패를 기록했다. 15주차에 잭슨빌 자가스에게 패했지만, 같은 날 워싱턴 커맨더스가 패배하면서 플레이오프 진출을 확정했다. 이는 2006년–2007년 이후 처음으로 카우보이스가 연속으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한 것이다.[152] 쿼터백 덕 프레스콧은 지역 사회와 자선 활동에 대한 공헌으로 월터 페이턴 NFL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했다.[153] 플레이오프 와일드카드 라운드에서 카우보이스는 탬파베이 버커니어스를 꺾고 1992년 슈퍼볼 우승 이후 처음으로 플레이오프 원정 경기에서 승리했으며, 톰 브래디와의 경기에서 연패를 끊었다. 이 경기는 브래디의 선수 생활 마지막 경기였다.[154] 하지만 두 번째 시즌 연속으로 샌프란시스코 포티나이너스에게 패배했는데, 이번에는 디비전 라운드에서 패하며 7시즌 연속 디비전 라운드에서 패배했다.[155]
2023년에 카우보이스는 3년 연속으로 12승 5패를 기록했다.[160] 2021년 이후 처음이자 3시즌 동안 두 번째로 NFC 동부지구 우승을 차지했다.[161] 12승 5패로 샌프란시스코 포티나이너스와 디트로이트 라이온스와 NFC 1위를 다투는 3팀 동률을 이뤘다. 그러나 콘퍼런스 기록 동률 결정전에서 포티나이너스에 패했지만 라이온스와의 상대 전적 동률 결정전에서 승리하여 플레이오프 2번 시드를 확보했다.[162] 카우보이스는 15주차에 버팔로 빌스에게 패했지만, 그린베이 패커스와 애틀랜타 팰컨스가 각각 탬파베이 버커니어스와 캐롤라이나 팬서스에게 패배하면서 경기장에 나서기 전에 3시즌 연속 플레이오프 진출을 확정했다.[163] 이는 1991년부터 1996년까지 6시즌 연속 플레이오프 진출 이후 처음으로 3시즌 연속 플레이오프에 진출한 것이다. 하지만 카우보이스는 플레이오프에서 리그 최고 수준의 공격과 수비에도 불구하고 와일드카드 라운드에서 라이벌인 7번 시드 그린베이 패커스에게 48-32로 크게 패했다. 4쿼터 한때 48-16까지 뒤쳐졌다.[164][165][166] 이 패배로 카우보이스는 2020-21 NFL 플레이오프 이후 플레이오프 대진표가 확장된 이후 7번 시드 팀에게 패한 최초의 팀이 되었으며,[167][168][169] 또한 3시즌 연속 12경기 이상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컨퍼런스 챔피언십 게임에 진출하지 못한 최초의 팀이 되었다.[170]
3. 라이벌리
NFC 이스트는 댈러스 카우보이스, 필라델피아 이글스, 워싱턴 커맨더스, 뉴욕 자이언츠로 구성되어 있으며, NFL-AFL 합병 이후 형성된 원래 여섯 개 디비전 중 가장 변화가 적은 디비전 중 하나이다.[244][262][245]
필라델피아 이글스, 뉴욕 자이언츠, 워싱턴 커맨더스와 오랜 라이벌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특히 필라델피아 이글스와의 라이벌리는 NFL 역사상 가장 치열한 라이벌리 중 하나로 꼽힌다.
- 댈러스-필라델피아 라이벌 관계: 1970년대 후반부터 치열해졌으며, 1981년 1월 NFC 챔피언십에서 필라델피아가 20대 7로 승리했다. 1980년대와 1990년대에는 1989년 바운티 볼과 베터런스 스타디움 팬들이 카우보이스에게 눈덩이와 기타 파편을 던진 사건 등이 있었다.[243] 1999년 마이클 어빈이 베터런스 스타디움 경기장에서 움직이지 못하고 쓰러져 있는 동안 이글스 팬들이 환호하는 모습이 목격되기도 했다. 2014년에는 서로 원정 경기에서 승리했으며, 댈러스는 플레이오프 진출을 확정 짓고 필라델피아는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했다. 댈러스는 역대 전적에서 73승 56패로 앞서 있다.[244]
- 댈러스-뉴욕 라이벌 관계: 1960년 12월 4일에 첫 경기가 31대 31 무승부로 끝났으며, 댈러스는 1961년 10월 29일에 첫 승리를 거두었다. 뉴욕은 1962년 11월 11일에 첫 승리를 기록했다. 2007년 플레이오프에서 자이언츠가 댈러스를 꺾고 슈퍼볼 XLII에서 우승을 차지했고, 2009년 카우보이스 스타디움에서 열린 첫 정규 시즌 경기에서 댈러스가 승리했다. 현재 댈러스가 전체 시리즈에서 75승 47패 2무로 앞서고 있다.[262]
- 댈러스-워싱턴 라이벌 관계: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가 역대 최고의 NFL 라이벌리이자 "스포츠 역사상 가장 위대한 라이벌리 중 하나"라고 칭했다. 워싱턴 구단주 조지 프레스턴 마셜과 카우보이스 창립자 클린트 머치슨 주니어 사이에 새로운 미식축구 팀 창설을 둘러싼 불화 때문에 앙숙 관계가 시작되었다. 1960년 첫 경기에서 워싱턴이 26대 14로 승리했다. 댈러스는 정규 시즌 전체 시리즈에서 78승 46패 2무로 앞서고 있으며, 워싱턴은 전체 플레이오프 시리즈에서 2승 0패로 앞서고 있다.[245] 1982년 NFC 챔피언십에서 워싱턴이 댈러스를 꺾었고, 1989년 댈러스가 그 해 유일한 승리를 거두며 워싱턴을 꺾었다. 톰 랜드리가 감독을 맡은 마지막 카우보이스 경기는 1988년 12월 11일 워싱턴을 상대로 거둔 승리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