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인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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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도인권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목사이다. 1880년 평안남도 용강에서 태어나 엄격한 교육을 받았으며, 1904년 무관학교를 졸업하고 교관으로 활동하다가 교육운동에 투신했다. 이후 김구와 교류하며 독립운동에 참여, 1910년 투옥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활동했으며, 만주에서 목회 활동을 하며 교회와 학교를 설립했다. 해방 후 귀국하여 3.1동지회를 조직하고 제주도에서 감리사로 재직하며 9개의 교회를 설립하는 등 선교 활동을 펼쳤다.

도인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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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도인권은 초기 생애, 교육 및 독립운동, 상해 임시정부 활동, 만주 및 제주도 목회 활동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다.

1880년 평안남도 용강에서 태어나 1904년 대한제국 무관학교를 졸업하고 교관으로 임명되었으나, 1907년 군대 해산으로 교육 운동에 투신하였다. 황해도 재령의 문창학교와 안악의 양산학교에서 교사로 일하며 김구를 만나 독립운동에 가담하였다. 1910년 국권피탈 후 장로회 선교사 밀러에게 세례를 받고, 안중근의 종제 명근의 독립운동 자금 모금 사건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상하이 임시정부에서는 군사국장, 무관학교 교관·학도대장, 임시의정원 부의장, 상해거류민단장 등을 역임하였다. 1921년 고려혁명위원회에 가입하여 시베리아에서 공산주의자들과 대결하며 독립운동을 하였다.

1922년부터 남감리교회 소속으로 시베리아 지역 선교에 힘썼다. 1929년 소련의 종교 핍박을 피해 중국 훈춘 동흥진으로 이주하여 교회와 학교를 설립하고 목회 활동을 하였다. 1931년 만주사변 당시 비적에게 붙잡혔으나 토벌대로 인해 풀려났다.

1939년 간도 연길구역으로 파송되어 연길교회와 유치원을 설립하고 해방 때까지 시무하였다. 해방 후 귀국하여 3.1동지회 총재를 맡았고, 황해도 옹진에서 한국독립당 옹진지당부 지도책임 등을 맡았다. 옹진중학교를 설립하고 옹진읍교회를 담임하기도 했다. 1950년 6.25 전쟁으로 월남하였다.

제주도에서는 감리교 선교 사업 관리자로 활동하며 1957년 4월까지 제주지방 감리사로 재직, 9개 교회를 설립하였다. 제주중앙교회 부지 분쟁을 해결하고 유형기 감독 선교 기념 예배당을 봉헌하였다.

2.1. 초기 생애 (1880-1907)

도인권은 1880년 1월 17일 평안남도 용강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엄격한 예절 및 한문 교육을 받았으나, 10살에 아버지를 여의었다. 14세에 평양으로 이주하였고, 아버지의 장례는 마을 이장의 주도로 성대하게 치러졌다. 1904년 대한제국 무관학교 군사특별과에 입학, 졸업 후 교관으로 임명되었다.

1907년 군대 해산 이후, 도인권은 교육 운동에 투신하였다. 용강에 충일학교를 설립하고, 황해도 재령의 문창학교와 안악의 양산학교에서 교사로 활동하였다. 이 시기에 김구를 만나 독립운동에 더욱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2.2. 교육 및 독립운동 (1907-1919)

도인권은 어려서부터 엄격한 예절 교육과 한문 교육을 받았다. 1904년 대한제국 무관학교 군사특별과를 졸업하고 교관으로 임명되었으나, 1907년 군대 해산으로 교육 운동에 투신하였다. 용강에 충일학교를 설립하고 황해도 재령의 문창학교와 안악의 양산학교에서 교직 생활을 하며 김구와 만나 독립운동에 적극 가담하였다.

1910년 국권피탈 후 기독교(개신교)에 귀의하여 장로회 선교사 밀러(F.S. Miller, 한국명 민노라)에게 세례를 받았다. 같은 해 12월, 안중근의 종제 명근의 독립운동 자금 모금 사건이 탄로나 김구 및 해서교육총회 지도자들과 함께 투옥되었다. 10년 형을 선고받고 6년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감옥에서 일본 경찰관이 불당을 건축하고 입불식을 거행하며 죄수들에게 분향배례를 강요했을 때, 도인권은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불응하여 구타를 당했다. 가출옥 조치에도 출옥을 거부하고 형기를 모두 채우고 풀려났다. 김구는 《백범일지》에 이 사건을 기록하며 도인권의 강직함을 칭찬했다.

출감 후 평양교회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계속하다 1918년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2.3. 상해 임시정부 활동 (1919-1921)

도인권은 상하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 군사국장, 무관학교 교관·학도대장, 임시의정원 부의장, 상해거류민단장 등을 역임하였다. 1921년 고려혁명위원회에 가입하여 시베리아로 가서 공산주의자들과 대결하고 독립운동을 하였다.

2.4. 만주 목회 활동 (1922-1939)

도인권은 1922년 10월부터 남감리교회 소속으로 외수청(外水淸)구역을 담당하며 시베리아 지역 선교에 힘썼다. 1929년 소련 공산 정권의 종교 핍박을 피해 교인들과 함께 중국 훈춘의 동흥진으로 이주하여 6개의 교회와 5개의 학교를 설립하고, 동흥진교회 담임 목사로 활동하며 큰 성과를 거두었다.

1931년 만주사변 당시에는 비적들에게 붙잡혀 사형 선고까지 받았으나, 토벌대가 오면서 비적들이 도망가거나 항복하여 풀려났다. 교회는 도인권 목사를 구해준 토벌대장 다케모도(竹本) 헌병대장에게 감사장을 보내기도 했다. 또한, 일본 감리교 신자인 훈춘 영사관 부영사 기다기리에게 파괴된 예배당 재건비 60만 원을 받아 교회 성전을 다시 짓기도 했다.

〈조선감리회보〉는 도인권 목사가 동흥진을 떠날 때, 만주사변 당시 어려움 속에서도 꾸준히 전도 활동을 하여 700~800명이나 되는 신자를 얻었다고 보도했다. 교육에도 힘써 동흥학교를 건전히 발전시켜 많은 졸업생을 배출했으며, 당시 재학생도 수백 명에 달했다. 이는 도 목사가 10년간 이룬 영적, 육적인 성과였다.

〈감리회보〉는 도인권을 떠나보내는 동흥진 사람들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금번에 연길로 파송되여서 지난 6월 30일에 동흥진을 떠난 바 본 교회교인 전부는 물론이고 장로교회 교인들과 학교학생과 학부형들고 특별히 각관청 각기관의 관공리제씨까지 전송을 남녀로소 五六백명이 정거장까지 나오고 더욱이나 사회유지제씨들이 도목사의 파송을 애석히역여 귀중한 기렴품까지 증정하여 분교회교인들은 감사함을 마지안는다더라."

2.5. 연길 및 해방 이후 활동 (1939-1950)

1939년 6월, 도인권은 간도의 연길구역으로 파송되어 연길교회와 유치원을 설립하고 해방 당시까지 시무하였다. 1945년 10월 해방 후 귀국하여 3.1동지회를 조직하고 총재 직임을 맡았다. 이후 황해도 옹진으로 내려가 한국독립당 옹진지당부 지도책임, 민족통일총본부 옹진사무국장,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옹진지부장 등을 맡았으며, 옹진중학교를 설립하였다. 1947년에는 옹진읍교회를 담임하며 유치원을 설립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1950년 6.25 전쟁 당시 공산학정을 피해 월남하였다.

2.6. 제주도 목회 활동 (1950-1957)

도인권은 1950년 6.25 전쟁 당시 공산 치하를 피해 남쪽으로 내려왔다. 감리교의 제주도 선교 사업이 시작되면서, 그는 관리자로 활동하였다. 1957년 4월까지 제주지방 감리사로 재직하면서 9개의 교회를 설립하였다. 특히 제주중앙교회의 부지 분쟁을 해결하고, 유형기 감독 선교 기념 예배당을 건축하여 1956년에 봉헌하는 업적을 이루었다.

그는 제주지방 감리사로 재직하면서 〈감리회보〉에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라는 글을 기고하여 지난 세월을 회고하기도 하였다.

光陰중국어을 아끼라는 그의 회고는 다음과 같다.

> 나는 송구영신이 이해에 들어 77회인데 지낸날을 회고하면 실로 감개무량한바 있다. 77회를 지냈으나 정신적으로 일하고 생활한 시일이 얼마나되는지? 17회까지는 미성년이니만큼 세속에 의해서 새옷입고 세배나 나녔고 그 후 26회까지는 호화와 영웅적 방탕으로 지냈고 27회에는 나라를 위한 생각으로 구사일생 살아온 것이 50년간인데 하루 24시간 중 3시간은 식사와 휴식시간이여서 3분지 1밖에 일할 시간이 없으니 50년의 3분지 1이면 16년 8개월로 셈할 수 있는데 흔상절일 질병따위를 계산하면 1년에 60일이 된다. 인간칠십 고래희라하지만 77년을 살기도 어렵고 그동안 일한시간이 5천25일밖에 못된다는 것을 따져보게 될 때 놀라지 않을 수 없다. …… 선한싸움을 싸우고 달려갈길을 거진다 걸어온 나로서 촌음이 척벽보다 귀하다는 생각이 들 때 앞이 창창한 젊은 동역자 들에게 부탁하는 말은 "광음을 아끼라 이 때가 악하니라" 이 말씀뿐이다.

그는 제주중앙교회 등 제주에 7개 교회를 개척했다. 또한 그가 제주도 감리사로 있을 때, 그의 자녀들은 제주교회에 종을 헌납하여 주위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일로 기록되기도 하였다. 이는 교역자 자녀들의 보기 드문 선행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다고 한다. 현재 제주시 오라벌 제주중앙교회 정원 한쪽에는 도인권 목사의 목회 기념비가 있다.

3. 저서

道人權 先生의 記錄중국어, 1962 (미간행)

4. 참고 문헌

* 都寅權zh-cn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 都寅權zh-cn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만주에 대한 우리 감리교회의 사명, 〈조선감리회보〉, 1938. 6.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