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대문형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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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대문형무소는 일제강점기에 한국 독립운동가들을 투옥하기 위해 1908년 경성감옥으로 설립되었다. 이후 서대문감옥, 서대문형무소로 명칭이 변경되었으며, 3.1 운동 이후 수감자가 급증하여 유관순 열사 등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수감되었다. 광복 후 서울형무소, 서울교도소, 서울구치소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1987년 폐쇄된 후 1988년 사적 제324호로 지정되었다. 1998년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이 개관하여 일제강점기 감옥과 관련된 주제를 다루며 추모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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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문형무소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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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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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명칭 | 서대문형무소역사관 |
한자 표기 | 西大門刑務所歷史觀 |
로마자 표기 | Seodaemun Hyeongmuso Yeoksagwan |
개관 | 1908년 (형무소) 1992년 (박물관) |
유형 | 기념 박물관 |
다른 이름 | 경성감옥 (京城監獄, Gyeongsong Gamok) 서울형무소 (서울刑務所, Seoul Hyeongmuso) 서울교도소 (서울矯導所, Seoul Gyodoso) 서울구치소 (서울拘置所, Seoul Kuchiso) |
다른 이름 (의미) | 서울 감옥 서울 교도소 서울 구치소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통일로 251 (현저동) |
역사 | |
건립 시기 | 대한제국, 일제강점기 |
지정일 | 1988년 2월 27일 |
사적 번호 | 324호 |
면적 | 3,346.9m² |
소유 | 서울특별시 |
관리 | 서대문구 |
관련 정보 | |
문화재청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
서울시 공원 | 서울의 공원 |
2. 역사
1908년 10월 21일, 조선 최초의 근대적 감옥인 "경성감옥"으로 설립되었다. 1912년 "서대문감옥", 1923년 "서대문형무소"로 이름이 변경되었다.
일제 강점기 동안 서대문형무소는 한국 독립운동가들을 수감하는 데 사용되었다. 1911년 김구가, 1919년 3·1 운동 직후에는 유관순 열사를 포함한 약 3천 명의 독립운동가들이 이곳에 수감되었다.
1945년 해방 후, "서울형무소"로 이름이 바뀌었고, 1961년 "서울교도소", 1967년 "서울구치소"로 변경되었다. 이 기간 동안 반민족행위자, 친일파, 정치적 격변기의 시국사범 등이 수감되었다.
1987년 11월 15일, 서울구치소가 경기도 의왕시로 이전하면서 서대문형무소는 폐쇄되었다. 1992년 서대문독립공원의 일부인 서대문형무소역사관으로 지정되었고, 1998년 11월 5일 역사관이 개관하여 일반에 공개되었다.
2015년 8월, 하토야마 유키오 전 일본 총리는 서대문형무소를 방문하여 일본의 전쟁 범죄에 대해 사과하며 추모비 앞에 무릎을 꿇었다.[8]
2. 1. 일제강점기 (1908년 ~ 1945년)

일제 통감부는 항일의병들을 투옥하기 위해 현재의 서대문구 현저동에 근대적 감옥을 만들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일본인에게 설계를 맡겼다. 그 설계에 따라 1907년 8월 무렵에 완공된 감옥시설의 첫 이름은 '경성감옥'이었다.[13]
최초의 경성감옥은 약 500명을 투옥할 수 있는 560여 평 규모의 목조건물이었으며, 증축 과정에서 수감자를 효과적으로 감시할 수 있는 원형의 감옥인 파놉티콘 구조로 만들어졌다.
1908년 10월 21일, 당시 조선에서는 최초의 근대적 감옥으로서 “'''경성감옥'''”이라는 이름으로 설립되었고, 1912년 9월 3일에는 “서대문감옥”, 1923년 5월 5일에는 “서대문형무소”로 이름이 변경되었다. 이후 일제는 1912년에 현재의 마포구 공덕동에 '마포형무소'로 알려진 또 다른 감옥을 세우고 그 이름을 '경성감옥'이라고 칭했는데, 그 과정에서 원래의 경성감옥 이름은 '서대문감옥'으로 바뀌게 되었다. 1923년에 이르러 서대문감옥은 오늘날 잘 알려진 이름인 '서대문형무소'로 개칭하게 된다.
'경성감옥'에서 '서대문감옥', '서대문형무소'로 명칭이 바뀌는 동안 수감인원은 계속하여 증가하였는데, 서대문형무소는 18세 미만의 여성, 10년 이상을 선고받은 자, 그리고 무기수를 수용하였으며, 1944년 기준 2,890명이 수용되어 있었다.
이 감옥은 일제 강점기 동안 한국 독립운동가들을 수감하는 데 사용되었다. 원래 약 500명의 수감자를 수용할 수 있었다.[3] 여성과 어린 소녀들을 위한 별도의 시설이 있었다. 1911년에는 저명한 독립운동가 김구가 이곳에 수감되었다. 1919년, 3·1 운동 직후 수감자 수가 급격히 증가했다.[4] 약 3천 명의 독립운동가들이 이곳에 수감되었다.[3] 3·1 운동 이후 수감된 사람들 중에는 고문으로 사망한 유관순 열사도 있었다. 잘 알려진 수감자로는 백범김구 선생, 강우규 의사, 유관순 열사가 있다. 유관순 열사는 서대문형무소에서 목숨을 다하였다.[11]
1945년 일제 강점기 말 직전 수감자 수는 2980명이었다.[5]
2. 2. 광복 이후와 한국전쟁 (1945년 ~ 1953년)
1945년 광복 후 서대문형무소는 '서울형무소'로 이름이 바뀌었고,[14] 이 시기에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에 의해 이광수, 노덕술 등의 반민족행위자와 친일파들이 수용되었다.[11] 그러나 이승만 정부 시기에는 반민특위 활동이 와해되면서, 오히려 독립운동가 출신 정치인들이 서울형무소에 수감되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했다.[15] 한국전쟁 중에는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하여 반공·친미 인사로 추정되는 인물들을 투옥하였으며, 1950년 서울을 수복한 후에는 이승만 정부가 북한군에 협조한 부역자들을 서울형무소에 가두었다.[15]2. 3. 군사독재 시기 (1961년 ~ 1987년)
1961년 '서울형무소'는 '서울교도소'로 이름이 변경되었고, 4․19혁명과 5․16군사정변 등 정치적 격변기에 많은 시국사범들이 수감되었다. 김두한은 국회 오물투척사건으로 1966년 서울교도소에 수감되기도 했다.[15]1967년 '서울교도소'는 '서울구치소'로 이름이 바뀌었다.[11]
2. 4. 폐쇄와 역사관 개장 (1987년 ~ 현재)
1987년 11월 15일 서울구치소가 경기도 의왕시로 이전하면서 서대문형무소는 폐쇄되었다.[11] 1988년 2월 27일, 남은 건물들은 '서울 구 서대문형무소'라는 명칭으로 대한민국의 사적 제324호로 지정되었다.[11] 1992년 8월 15일 광복절에는 형무소 일대에 독립공원이 개원하였다.1995년 김영삼 정부의 대한민국 독립 50주년 기념 사업으로 '서대문형무소역사관' 건설 공사가 시작되어 1998년 11월 5일에 개관하여 일반에 공개되었다. 역사관은 일제 강점기 동안 감옥과 관련된 주제를 다루며 추모관으로서 계속 운영되고 있다.[7]
2015년 8월, 하토야마 유키오 전 일본 총리는 서대문형무소를 방문하여 제2차 세계 대전 중 일본의 전쟁 범죄에 대해 사과하며 추모비 앞에 무릎을 꿇었다.[8] 2006년 9월 5일에는 시이 가즈오 일본공산당 위원장이 일본 정당 당수로는 처음으로 서대문형무소를 시찰하였다.[9]
3. 시설
일제는 항일의병들을 투옥하기 위해 현재의 서대문구 현저동에 근대적 감옥을 만들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일본인에게 설계를 맡겼다. 1907년 8월 무렵 완공된 감옥시설의 첫 이름은 '경성감옥'이었다.[13]
최초의 경성감옥은 약 500명을 투옥할 수 있는 560여 평 규모의 목조건물이었으며, 증축 과정에서 수감자를 효과적으로 감시할 수 있는 파놉티콘 구조로 만들어졌다. 1912년 마포구 공덕동에 '마포형무소'로 알려진 또 다른 감옥(경성감옥)이 세워지면서, 원래의 경성감옥은 '서대문감옥'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1923년 서대문감옥은 '서대문형무소'로 개칭되었다. '경성감옥'에서 '서대문감옥', '서대문형무소'로 명칭이 바뀌는 동안 수감인원은 계속 증가하였는데, 1944년 기준 2,890명이 수용되어 있었다. 서대문형무소는 18세 미만의 여성, 10년 이상을 선고받은 자, 무기수를 수용하였다. 백범김구 선생, 강우규 의사, 유관순 열사가 이곳에 수감되었으며, 유관순 열사는 서대문형무소에서 목숨을 다하였다.[11]
현재 사적으로 지정된 서울 구 서대문형무소의 주요 건물들은 다음과 같다.[11]
- 보안과 청사
- 중앙사
- 9옥사
- 사형장
3. 1. 보안과 청사
보안과 청사는 서대문형무소의 업무를 총괄하던 건물로 1923년에 지상 2층, 지하 1층 규모로 지어졌다. 1층은 사무실, 2층은 회의실과 소장실, 지하는 조사실로 사용되었다. 일제가 위압감을 주기 위해 정면의 지붕을 높고 웅장하게 세웠다고 한다.[11] 현재는 서대문형무소 역사 전시관으로 사용된다.3. 2. 중앙사
1920년대 중반에 2층 규모로 지어진 건물로, 옥사들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역할을 했다. 잔존해 있는 10, 11, 12옥사와 연결되어 있으며, 중앙 간수소의 기능을 맡았다. 1층은 간수들의 사무 공간, 2층은 수감자들의 사상교육 공간으로 사용되었다.[11]3. 3. 9옥사
1920년대에 2층 규모로 지어졌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중앙사(중앙 간수소)와 분리되어 있는 유일한 옥사로서, 일제강점기에 주로 '사상범'을 가두고 특별 감시와 통제를 했던 감옥으로 알려져 있다.[11]3. 4. 사형장
1916년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일본식 목조건물이다. 지상 1층, 지하 1층 규모로 5m 높이의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다. 1층에서 사형을 집행하였고, 지하실은 시신을 수습하는 장소로 이용되었다.[11]4. 주요 수감 독립운동가
5. 교통
서울 지하철 3호선 독립문역 4번 또는 5번 출구와 가깝다.
6. 사진
참조
[1]
서적
Annual Report on Reforms and Progress in Chosen
https://books.google[...]
Government-General of Korea
[2]
서적
'Difficult Heritage' in Nation Building: South Korea
https://books.google[...]
2019-04-23
[3]
뉴스
Former prison lives with vestiges of Korea's patriotic past
http://www.koreahera[...]
The Korea Herald
2018-08-02
[4]
서적
Capitalist Development in Korea
https://books.google[...]
2009-01-13
[5]
서적
For reconciliation: Textbook, Comfort women, Yasukuni shrine and Liancourt Rocks
Heibonsha
[6]
뉴스
인왕산 도성탐방기<2>서대문형무소역사관, 국사당, 선바위
http://www.hanion.co[...]
The Hankyoreh
2017-05-09
[7]
웹사이트
Korea
https://books.google[...]
[8]
뉴스
Former Prime Minister Hatoyama Kneels at Wartime Prison in Seoul
https://blogs.wsj.co[...]
Wall Street Journal
2015-08-13
[9]
뉴스
志位委員長が訪韓/西大門刑務所歴史館を訪問/日本共産党党首として初
https://www.jcp.or.j[...]
しんぶん赤旗
2006-09-06
[10]
뉴스
政治犯の地位を要求する靖国放火中国人…「祖父は抗日闘争の英雄」
https://japanese.joi[...]
中央日報
2012-11-03
[11]
웹인용
서울 구 서대문형무소 - 안내판·문화재 설명
http://www.heritage.[...]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 문화재 종목별 검색
2022-07-19
[12]
웹인용
독립공원
https://parks.seoul.[...]
서울의 공원 - 공원안내 - 공원소개
2022-07-19
[13]
저널
대한제국 말기 일제의 경성감옥 설치와 본감 ‧ 분감제 시행
http://www.kmch.or.k[...]
한국근현대사학회
2008
[14]
웹인용
어제와 오늘
https://sphh.sscmc.o[...]
서대문형무소역사관 - 역사관소개
2022-07-19
[15]
뉴스
“이승만 집권 때도 독립운동가 수감했다” - 김삼웅 前 독립기념관장 4일 ‘서대문형무소 수감자 변천사’ 논문 발표
https://www.seoul.co[...]
서울신문
2012-07-04
[16]
웹인용
Seodaemun Prison
https://generalfacts[...]
2011-11-29
[17]
웹인용
서울구치소 - 오시는길
https://www.correcti[...]
법무부 교정본부 - 교정기관 안내 - 서울·경기·강원 - 서울구치소
2022-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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