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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화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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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상화는(1901년 ~ 1943년)은 일제강점기 시인으로, 본명은 이상화이며 무량, 상화, 배가 등의 필명을 사용했다. 1922년 《백조》에 시를 발표하며 등단하여, 초기에는 낭만주의적 경향의 시를 썼으나, 1925년 이후 민족 시인으로 변모하여 일제에 저항하는 시를 썼다. 대표작으로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와 《나의 침실로》 등이 있다. 그의 작품은 한국 문학사에서 독특한 스타일 변화를 보여주는 예로 평가받으며, 사후 대구 달성공원에 시비가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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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화 (시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학력
직업
활동
가족
기타
한국의 민족주의 시인
한국의 민족주의 시인

2. 생애

이상화는 1901년 대구에서 태어나 서울의 정동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에서 프랑스 문학을 공부했다.[2] 1919년 대구에서 3·1 운동에 참여했고,[5] 1923년 한국으로 돌아와 대구의 한 고등학교에서 영어와 프랑스어를 가르쳤다.[2] 1921년 프랑스 유학을 위해 일본으로 갔으나, 관동 대지진 이후 1923년 귀국했다.

1920년대 초, 홍사용, 박종화, 박영희, 김기진 등과 함께 백조 시인회에 가입하여 '부패한 시대의 환희'(말세의 환희), '이중의 사망', '나의 침실로' 등의 시를 발표하며 시인으로서의 경력을 시작했다.[1]

김기진 등과 함께 파스큘라(PASKYULA)라는 문예 연구 모임을 만들었고, 1925년 8월에는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APF)에 참여, 이듬해 KAPF 기관지인 『문예동맹』의 편집장이 되었다.

1937년 형 이상정 장군을 만나러 만경에 갔다가 귀국 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4개월 동안 투옥되었다. 석방 후 대구 경남학교(현 대륜중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춘향전』 영어 번역에 전념했다.[1]

1943년 4월 25일 암으로 사망했다. 유해는 경상북도 달성군 화원면 월성이씨 묘역에 안장되었다. 1943년 백기만, 서동진 등 친구들의 제의로 조선총독부의 눈을 피해 "시인 백아이공휘상화지묘"라는 묘비가 세워졌다. 해방 후 김소운의 제창으로 대구 달성공원에 "상화시비"가 세워졌다.

2. 1. 초기 활동

이상화는 1901년 경상북도 대구에서 태어나, 서울 정동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에서 프랑스 문학을 공부했다.[2] 1923년 한국으로 돌아와 대구의 한 고등학교에서 영어와 프랑스어를 가르쳤으며,[2] 1919년 대구에서 3·1 운동에 참여했다.[5]

1921년 프랑스 유학을 위해 일본으로 갔으나, 관동 대지진 이후 1923년 귀국했다. 1922년 《백조》 창간호에 〈말세의 희탄〉을 발표하며 등단하였고, 백조 시인회에 가입하여 시인으로서의 경력을 시작했다.[1]

1923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의 아테네 프랑세에서 프랑스어를 공부했으나, 그해 9월 관동 대지진으로 인해 1924년 봄 귀국했다. 이후 김기진 등과 함께 파스큘라(PASKYULA)라는 문예 연구 모임을 만들었고, 1925년 8월에는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APF)에 참여, 이듬해 KAPF 기관지인 『문예동맹』의 편집장이 되었다. 1937년 형 이상정 장군을 만나러 만경에 갔다가 귀국 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4개월 동안 투옥되었다. 석방 후 대구 경남학교에서 한동안 교편을 잡다가 『춘향전』의 영어 번역을 위해 독서와 연구에 전념했다.[1]

이상화의 초기 활동은 다음 표와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연도사건
1901년경상북도 대구 출생
1915년서울 중앙학교 입학
1918년중앙학교 졸업, 금강산강원도 일대 여행
1919년삼일운동 참여, 서울 피신, 박태원 집에 하숙, 결혼
1922년『백조』 동인, 〈말세의 희탄〉으로 등단
1923년일본 유학, 도쿄 아테네 프랑세에서 프랑스어 공부
1924년관동 대지진으로 귀국, 취운정 거주, 백조파 교류
1925년파스큘라(PASKYULA) 문예 연구 모임 결성,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APF) 참여
1926년경향파 동조, 장남 용희 출생, KAPF 기관지 『문예동맹』 편집장
1927년고향 대구 귀향
1934년조선일보 경북총국 경영, 차남 충희 출생
1935년중국 방문, 형 이상정 만남
1936년귀국, 스파이 혐의로 구속, 교남학교 강사(~1940)
1937년일본 경찰에 체포, 4개월 투옥
1940년춘향전』 영어 번역(미완)


2. 1. 1. 출생과 가계

이상화는 1901년 4월 5일 경상북도 대구 중구 서문로 12번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이시우(李時雨)는 둘째 아들이었고, 어머니는 김해 김씨 김신자(金愼子)였다. 이상화는 4형제 중 둘째로, 형제로는 독립운동가인 형 이상정, 한국 최초의 IOC 위원이자 사회학자인 셋째 이상백, 수렵가이자 바둑 유단자인 넷째 이상오가 있었다.

이상화의 집안은 대구의 명문가이자 대 부잣집이었다. 할아버지 이동진은 우현서루라는 신식 학교를 세워 한학과 신식 학문을 가르쳤는데, 남녀와 신분을 가리지 않고 학생들을 받아들였다.[12] 큰아버지 이일우(李一雨)는 우현학교를 이어받아 운영했으며, 그의 자손들은 대구의 명문가로 성장했다. 2000년대 초반 기준으로 이일우의 자손들은 대학 학장 3명, 교수 10명, 의사 30명, 장군 2명, 언론·출판분야 11명을 배출했다.[12] 또한 사촌 이상악은 작가이자 최남선의 사돈이었고, 다른 자손들은 박중양 집안과도 인척 관계를 맺었다.[12]

이상화는 여덟 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14세까지 큰아버지 이일우의 훈도를 받으며 우현학교(현재의 대륜중학교, 대륜고등학교)에서 수학하였다.

2. 1. 2. 학창 시절과 문단 등단

이상화는 1901년 4월 5일 경상북도 대구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여의고 숙부 밑에서 한문을 배웠다. 1915년 열네 살 때 서울 중앙학교(지금의 서울중앙고등학교)에 입학했으나, 1918년 봄에 중퇴하고 강원도 금강산 일대를 방랑하였다.[13]

1919년 대구에서 친구들과 3·1 만세 운동 거사를 모의하다 밀정의 추적으로 주요 인물들이 잡혀가자 서울로 피신하여 박태원의 하숙에서 은신하였다.[13] 1921년 현진건의 소개로 박종화를 만나 〈백조〉 동인에 참여했고, 박종화의 소개로 여러 문인들과 교류하였다. 이 중 최남선은 그의 친척과 사돈 관계였다.[12]

1919년 12월 충청남도 공주 출신 서온순과 결혼하였다. 부인은 남편을 원망하지 않고 헌신적으로 내조했으며, 남편 사후에도 재혼하지 않고 자녀를 키웠다.[12] 1922년 이상화는 《백조》에 시를 발표하며 문단에 나왔다. 같은 해 프랑스 유학을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다.[2] 1923년 일본 도쿄의 아테네 프랑세에서 프랑스어를 공부하며 유학 기회를 엿봤지만, 관동 대지진으로 인해 1924년 귀국했다.

2. 2. 작품 활동

이상화는 한국 문학사에서 독특한 시 스타일 변화를 보여준 시인이다. 초기에는 낭만주의 문학 동인회인 백조파의 일원으로, 산문적인 요소가 많고 퇴폐적인 감각과 자기애를 묘사하는 시를 썼다. 데뷔작 〈나의 침실로〉에서는 진정한 사랑을 얻기 위해 자살을 생각하고, 다른 시에서는 현실과 단절된 몽상의 삶을 이상적으로 제시하기도 했다.[6]

1925년, 일본 제국주의식민 지배 현실에 대한 우려가 커지면서 이상화는 이전의 시 세계와 결별하고 민족 시인으로서 정체성을 택했다. 그는 식민 지배에 대한 저항과 반항의 시를 썼는데, 당시 제약 때문에 정치적 좌절을 직접 표현할 수 없어, 조국 자연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거나 억압받는 만주 이주 한국인의 고난을 묘사하는 등 자연 상징을 통해 자신의 견해를 드러냈다. 이 시기 대표작 중 하나인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는 이러한 저항 정신을 잘 보여준다.[6]

2. 2. 1. 문학, 동인 활동

1922년 《백조》 1호에 〈말세의 희탄〉, 〈단조〉, 〈가을의 풍경〉 세 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이후 《백조》 나머지 호, 《개벽》, 《문예운동》, 《삼천리》, 《여명》, 《신여성》, 《조선문단》, 《조선지광》, 《별건곤》 등 잡지에 〈나의 침실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대구 행진곡〉, 〈서러운 해조〉 등 60여 편의 작품을 발표하였다.

생전에 출간된 시집은 없으며, 사후 1951년 백기만이 청구출판사에서 펴낸 《상화와 고월》에 시 16편이 실렸다. 이기철 편 《이상화 전집》(문장사, 1982)과 김학동 편 《이상화 전집》(새문사, 1987), 대구문인협회 편 《이상화 전집》(그루, 1998) 등 세 권의 전집에 유작이 모두 실렸다.

대표적인 작품들은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의 침실로〉이다.

한국문학번역원은 이 시인의 시적 공헌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 이상화의 시는 한국 문학사에서 가장 독특한 스타일의 변화를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낭만주의자들의 모임인 백조파의 일원으로서, 그의 초기 시는 산문적인 요소가 많았고 퇴폐적인 감각과 자기애에 찬 세계를 묘사했다. 예를 들어 그의 데뷔 시인 「나의 침실로」에서 시인은 진정한 사랑을 얻기 위해 자살을 고려하고, 또 다른 시에서는 현실과 완전히 단절된 몽상의 삶을 가장 이상적인 목표로 제시한다.[6]

: 그러나 1925년, 한국에 대한 일본 제국주의의 현실에 대한 우려가 커짐에 따라 이상화는 이러한 시 세계와 갑작스럽고 단호하게 결별했다. 그는 민족 시인의 정체성을 택하고, 식민 지배에 대한 저항과 반항의 시를 쓰기 시작했다. 당시의 제약으로 인해 정치적 좌절을 직접적으로 표현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의 견해는 조국 자연의 아름다움 표현이나 억압자들에 의해 모든 것을 빼앗긴 만주 이주 한국인과 같은 개인의 고난 묘사와 같은 자연의 상징을 통해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이 시기 후반의 시들 중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는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그의 저항 정신을 드러낸다.[6]

2. 2. 2.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1926년 《개벽》에 발표되었다. 이상화의 반일(反日) 민족의식을 표현한 작품으로 비탄과 허무, 저항과 애탄이 깔려 있다. 비록 나라는 빼앗겨 얼어붙어 있을 망정, 봄이 되면 민족혼이 담긴 국토, 즉 조국의 대자연은 우리를 일깨워준다는 것이다. 국토는 일시적으로 빼앗겼다 하더라도 우리에게 민족혼을 불러일으킬 봄은 빼앗길 수 없다는 몸부림, 즉 피압박 민족의 비애와 일제에 대한 강력한 저항의식을 담고 있다.[6]

한국문학번역원은 이 시인의 시적 공헌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However, in 1925, with a growing concern for the reality of Japanese imperialism over Korea, Lee Sang-hwa made an abrupt and decisive break from such poetic world. He took on the identity of a national poet, and began to write poems of resistance and defiance against the colonial rule. Because of the constraints of the time, which made it impossible to express political frustrations directly, his views tended to surface through the symbolism of nature, such as expressions of the beauty of the native land of Korea or the depiction of the hardships of individuals, such as the Korean immigrants in Manchuria who were deprived of everything by their oppressors. For example, the poem “Does Spring Come to Stolen Fields?” from the later part of this period reveals his spirit of resistance in precisely this manner.영어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 ----------------------

지금은 남의 땅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닿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마음에는 내 혼자 온 것 같지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하구나, 말을 해 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 발자국도 서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다리는 울타리 너머 아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털을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혼자라도 힘겹게나 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 기름을 바른 이가 쟁기질하던 그 들이라 다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 다오.

살찐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달리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웃기구나,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몸에 풋풋한 기운을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이끌었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 ―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2. 2. 3. 귀국과 문학, 언론 활동

1925년 시, 평론, 소설 번역 등 다방면으로 활발한 작품 활동을 펼쳤다. 같은 해 8월 카프 발기인으로 참여했다.[14] 1927년 대구로 돌아와 의열단이종암 사건에 연루되어 대구경찰서에 수감되었다가 풀려났다.[14]

1933년 교남학교에서 조선어, 영어, 작문을 가르치는 교사로 근무했다. 1934년 교사직을 사직하고 조선일보 경상북도 총국을 경영했으나, 사업 수완 부족으로 1년 만에 실패하고 교남학교 영어, 작문 담당 교사로 복직했다.[14]

2. 3. 생애 후반

1937년 형 이상정 장군을 만나러 만경에 갔다가 귀국 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4개월 동안 투옥되었다.[1] 석방 후 대구 경남학교(현 대륜중학교)에서 한동안 교편을 잡다가 『춘향전』의 영어 번역을 위해 독서와 연구에 전념했다.[1]

1943년 4월 25일 암으로 사망했다. 유해는 경상북도 달성군 화원면 별리 1구의 월성이씨 묘역에 안장되었다. 1943년 백기만, 서동진 등 동향 친구들의 제의로, 조선총독부의 눈을 피하기 위해 "시인 백아이공휘상화지묘"라고만 새겨진 묘비가 세워졌다. 해방 후 김소운의 제창으로 대구달성공원에 "상화시비"가 세워졌다.

1948년 3월 14일 김소운이 발의하고 이윤수, 구상 등이 참여하고 죽순시인구락부가 협찬하여 시인을 기리는, 대한민국 최초의 시비를 달성공원에 세웠다.

이상화의 고택은 대구광역시 중구 서성로 6-1(계산동2가 84)에 있으며, 맞은편에 서상돈의 고택도 있다. 1999년 도시개발로 한때 헐릴 위기에 놓이기도 했으나 1999년부터 고택을 보존하자는 시민운동이 벌어졌고 2008년 8월 13일 결실을 맺어 이상화 고택 개방에까지 이르게 되었다.[14] 2008년 8월 12일 새롭게 단장되어 문을 열었다.[14][15]

2009년 초부터 대경대학교 뮤지컬학과 학생들은 이상화의 일대기를 그의 아들인 이충희 씨에게 자문받아 극을 구성했다.[16] 이들은 지난 6개월간 시인의 삶을 기록한 책자를 참고하면서 대구광역시 중구 계산동2가 소재 이상화 고택을 수십차례 방문해 당시 분위기를 몸에 익혔다. 대경대 뮤지컬과 1학년 학생 30여명은 1920년대 식민지 시대를 살면서 저항시인으로 뜻을 굽히지 않은 이상화 시인의 삶과 비극적 역사상황을 담은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만들었다.

2009년 11월 30일12월에는 그의 일대기를 다룬 창작 뮤지컬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가 공연되었다.[17]

3. 사후

1948년 대구 달성공원에 이상화 시인을 기리는 기념비가 세워졌고, 1951년에 그의 시집이 출판되었다. 한편, 이육사의 방치되었던 집은 2005년에 복원되어 시인과 항일 운동 관련 유품들과 함께 개방되었다.[9]

4. 작품 목록

이상화는 1922년 《백조》 창간호에 〈말세의 희탄〉, 〈단조〉, 〈가을의 풍경〉 3편의 시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이후 《백조》, 《개벽》, 《문예운동》, 《삼천리》, 《여명》, 《신여성》, 《조선문단》, 《조선지광》, 《별건곤》 등 여러 잡지에 〈나의 침실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대구 행진곡〉, 〈서러운 해조〉 등 60여 편의 작품을 발표하였다.

생전에 출간된 시집은 없으며, 사후 1951년 백기만이 청구출판사에서 펴낸 《상화와 고월》에 시 16편이 실렸다. 이후 이기철 편 《이상화 전집》(문장사, 1982), 김학동 편 《이상화 전집》(새문사, 1987), 대구문인협회 편 《이상화 전집》(그루, 1998) 등 세 권의 전집에 유작이 모두 실렸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의 침실로〉 등이 있다.

5. 평가

이상화의 시는 한국 문학사에서 가장 독특한 스타일 변화를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백조파의 일원으로서, 그의 초기 시는 산문적인 요소가 많았고 퇴폐적인 감각과 자기애에 찬 세계를 묘사했다. 예를 들어 그의 데뷔 시인 〈나의 침실로〉에서 시인은 진정한 사랑을 얻기 위해 자살을 고려하고, 또 다른 시에서는 현실과 완전히 단절된 몽상의 삶을 가장 이상적인 목표로 제시한다.[6]

그러나 1925년, 일본 제국주의의 현실에 대한 우려가 커짐에 따라 이상화는 이러한 시 세계와 갑작스럽고 단호하게 결별했다. 그는 민족 시인의 정체성을 택하고, 식민 지배에 대한 저항과 반항의 시를 쓰기 시작했다. 당시의 제약으로 인해 정치적 좌절을 직접적으로 표현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의 견해는 조국 자연의 아름다움 표현이나 억압자들에 의해 모든 것을 빼앗긴 만주 이주 한국인과 같은 개인의 고난 묘사와 같은 자연의 상징을 통해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이 시기 후반의 시들 중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는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그의 저항 정신을 드러낸다.[6]

아래는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일부이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한국어[7]

봄바람은 몰라도 새는 알아|봄바람은 몰라도 새는 알아.한국어

향기가 날리고 푸른 새싹이 돋고|향기가 날리고 푸른 새싹이 돋고.한국어

모진 풍파에 울부짖어도|모진 풍파에 울부짖어도.한국어

그 꽃이 질리면 그 잎이 지면|그 꽃이 질리면 그 잎이 지면,한국어

그 나무는 죽어도 새봄은 돋는다.|그 나무는 죽어도 새봄은 돋는다.한국어

...|...한국어

가슴속에 나도 봄을 가져왔다.|가슴속에 나도 봄을 가져왔다.한국어

이러한 푸른 봄은|이러한 푸른 봄은,한국어

내게도 다시 봄을 준다.|내게도 다시 봄을 준다.한국어

... 무엇을 찾는가, 영혼이여|... 무엇을 찾는가, 영혼이여?한국어[8]

내 맹목된 영혼이여, 끝없이 날뛰는|내 맹목된 영혼이여, 끝없이 날뛰는.한국어

강가에서 노는 어린아이처럼|강가에서 노는 어린아이처럼.한국어

대답하여라, 나는 어디로 가는가|대답하여라, 나는 어디로 가는가?한국어

풀 냄새에 가득 차서, 섞여 있는|풀 냄새에 가득 차서, 섞여 있는.한국어

푸른 웃음과 푸른 슬픔으로|푸른 웃음과 푸른 슬픔으로.한국어

절뚝거리며 걸어가면서, 나는 온종일 걷는다, 마치 사로잡힌 듯이|절뚝거리며 걸어가면서, 나는 온종일 걷는다, 마치 사로잡힌 듯이.한국어

봄귀신에게 사로잡힌 듯이|봄귀신에게 사로잡힌 듯이.한국어

이것은 빼앗긴 들이고, 우리의 봄은 빼앗겼다.|이것은 빼앗긴 들이고, 우리의 봄은 빼앗겼다.한국어

6. 기타

조연현은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일제에 대한 일종의 저항 의식으로 볼 수 있으나, 이상화의 중요한 특성으로 격렬한 미적 욕구와 그 강렬한 낭만적 의욕을 지적[18]하여 그의 문단 초기 활동인 <백조> 동인 활동, 즉 낭만주의적 경향에 주목했다.

김현은 1920년대 한국시의 두 가지 과제를 식민지 현실 직시와 새로운 시 형식의 모색이라고 분석하면서, 이를 나름대로 해결하려고 노력한 시인으로 김소월, 한용운, 이상화 세 사람을 꼽았다. 그러면서 이상화의 현실 인식이 식민지 현실은 한국 궁핍화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직시하는 면에서 투철하며, 그 현실 인식이 현실 밖이라면 어디든 괜찮다는 극단적인 탈출 욕구를 낳는다면서 이상화의 시를 식민지 초기의 낭만주의적 성격의 한 상징으로 보았다.[19]

반면, 감태준은 이상화의 카프 활동에 주목하여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조소〉, 〈선구자의 노래〉에서 볼 수 있듯이 이상화가 낭만주의적 태도를 버리고 현실에 대한 불신을 적극적 저항 내지 수용으로 변모시켰다고 보았다.[20]

이명재는 이상화 시의 형성과 전개 과정을 20년대 초엽의 감상적인 퇴폐성의 낭만주의 시, 중후엽의 항일 시, 30년대 이후의 민족적 비애를 담은 우국 시의 세 단계로 나누고, 이상화의 문학사적 위상을 항일 민족 문학의 구현자로 자리매김했다.[21]

조병춘도 이명재와 비슷하게 이상화 시의 세 단계를 감상적 낭만주의 시, 저항적 민족주의 시, 민족적 비애와 국토 예찬의 시로 나눴으며, 특히 40년대에 문인들 거의가 친일 문학을 일삼았음에도 불구하고 굴하지 않은 그의 민족정기와 문학정신을 높이 평가하였다.[22]

7. 가족 관계

관계이름출생-사망비고
할아버지이동진? ~ ?우현서루 설립, 한학 교육
큰아버지이일우(李一雨)? ~ ?우현서루 운영[12]
아버지이시우(李時雨)? ~ 1907년
어머니김신자(金愼子)? ~ ?김해 김씨
이상정(李相定)1897년 6월 10일 ~ 1947년 10월 27일독립운동가, 대한독립군 중장
형수한문이(韓文伊)1897년 5월 7일 ~ ?이상정의 부인
형수권기옥(權基玉)1901년 1월 11일 ~ 1988년 4월 19일이상정의 부인, 여성 비행사, 대한독립군 대령
동생이상백(李相佰)1904년 8월 6일 ~ 1966년 4월 14일사학자, 체육행정가, 前 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
동생이상오(李相旿)1905년 ~ 1969년수렵가, 바둑
조카사위박창암(朴蒼巖)1923년 5월 15일 ~ 2003년 11월 10일군인, 정치가, 이상오(李相旿)의 사위, 대한민국 육군 준장 전역
부인서온순(徐溫順)? ~ 1980년서순애(徐順愛)로도 불림
첫째 아들이용희? ~ ?사망
이성희? ~ ?사망
둘째 아들이충희1933년 ~ ?전 흥국공업사 대표
셋째 아들이태희? ~ ?미국 이민
사돈최남선(崔南善)1890년 4월 26일 ~ 1957년 10월 10일
사돈박중양(朴重陽)1872년 5월 3일 ~ 1959년 4월 23일
사돈허억(許億)1889년 6월 1일 ~ 1957년대구광역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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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웹사이트 Lee Sang-hwa's Poetry [sic] https://www.koreatim[...] 2008-02-12
[3] 웹사이트 Lee Sang-hwa's Poetry [sic] https://www.koreatim[...] 2008-02-12
[4] 서적 Who's Who in Korean Literature Hollym
[5] 웹사이트 Lee Sang-hwa's Poetry [sic] https://www.koreatim[...] 2008-02-12
[6] 웹사이트 Author Database - Korea Literature Translation Institute http://klti.or.kr/ke[...] 2013-09-03
[7] 서적 Modern Korean Poetry https://books.google[...]
[8] 서적 Poems from Korea University Press of Hawaii
[9] 웹사이트 Visit Korea http://english.visit[...]
[10] 웹사이트 (6)경주 이씨(慶州李氏)-1,424,866명 http://www.seoulecon[...] 2014-07-06
[11] 웹사이트 이상화(李相和) https://encykorea.ak[...] 2023-11-30
[12] 뉴스 특집- 상화의 큰 집 사람들 http://www.lifemaeil[...] 주간매일 2002-11-27
[13] 웹인용 [김명환의 뮤직톡톡] 대구 음악의 선구자 박태원 https://www.yeongnam[...] 2020-10-20
[14] 웹사이트 헐릴 위기에서 우뚝선 이상화 고택 http://www.ohmynews.[...] 오마이뉴스 2008-08-13
[15] 뉴스 [동호동락] 시인 이상화 고택 근대골목 자전거 투어, 역사`문화예술 공부 기회 http://www.imaeil.co[...] 매일신문 2013-11-14
[16] 뉴스 민족시인 이상화 일대기 창작뮤지컬로 그린다 http://news.mk.co.kr[...] 매일경제 2009-11-25
[17] 뉴스 민족시인 이상화 일대기 창작뮤지컬 공연 http://www.kbmaeil.c[...] 경북매일신문 2009-11-26
[18] 서적 한국현대문학사 성문각 1969-09-05
[19] 서적 한국현대문학사 민음사 1973-08-30
[20] 서적 한국현대문학사 현대문학 1989-08-20
[21] 서적 이상화 전집 그루 1998-03-30
[22] 논문 한국 현대시의 전개양상 연구 명지대학교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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