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자와 마사자네
1. 개요
도자와 마사자네는 1832년에 태어나 1896년에 사망한 인물로, 신조 번의 마지막 다이묘이자 자작이었다. 그는 1843년 아버지의 사망으로 가독을 상속받았으나, 어린 나이로 인해 조부와 어머니의 보좌를 받았다. 보신 전쟁 당시 신정부군에 협력했으나 오우에쓰 열번 동맹에 가담하여 적대하게 되었고, 신조 번은 쇼나이 번의 공격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이후 신정부에 협력하여 가증을 받았으며, 폐번치현 이후 도쿄로 이주하여 자작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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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칭 | 자작 |
|---|---|
| 본명 | 도자와 마사자네 (戸沢正実) |
| 출생 | 1833년 1월 7일 |
| 사망 | 1896년 8월 16일 |
| 묘소 | 도쿄도미나토구미타의 조린지 즈이운인 |
| 어린 시절 이름 | 치요즈루 (千代鶴) |
| 관위 | 종4위 하 가즈사노스케 나카쓰카사다이스케 (中務大輔) 자작 증 종2위 |
| 통치 시기 (신조 번) | 시작: 1843년 종료: 1869년 |
|---|---|
| 신조 번 번주 대수 | 11대 |
| 전임 | 도자와 마사요시 |
| 후임 | 폐번치현 |
| 통치 시기 (신조 현) | 시작: 1869년 종료: 1871년 |
| 천황 | 메이지 천황 |
| 쇼군 | 도쿠가와 이에요시 도쿠가와 이에사다 도쿠가와 이에시게 도쿠가와 요시노부 |
| 씨족 | 도자와 씨 |
|---|---|
| 아버지 | 도자와 마사토모 |
| 어머니 | 공자 (貢子, 모모레인(桃令院)) |
| 형제자매 | 도자와 마사자네 혼다 다다쓰라 나카조 노부히로 도다 나오카즈 도자와 마사토키 이와키 다카나가 정실 |
| 배우자 | (1) 오가사와라 다다아키라의 딸 (고쿠라 번) (2) 아오야마 다다나가의 딸 (사사야마 번) (3) 마쓰다이라 다다카타의 딸 (우에다 번) (4) 마쓰다이라 노부요리의 딸 (요시다 번) (5) 사카이 다다아키의 딸 (쓰루오카 번) |
| 자녀 | 도자와 사다사다 (장남) 도자와 도미히사 (차남) 요시 (시마즈 하야히코 실) 마스 (요네즈 마사카타 정실) 다카 (이와쿠라 도모사다 실) |
| 막부 | 에도 막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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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와씨 -
신조번
신조번은 에도 시대 데와국 모가미군 주변을 도자와 가문이 다스린 번으로, 모가미 요시토시의 영지 몰수 후 6만 석을 받아 세워졌으며, 사케노베 성을 거쳐 신조성을 본거지로 삼았으나 재정난과 보신 전쟁에서의 혼란스러운 행보를 겪고 폐번치현으로 폐지되었다. -
도자와씨 -
도자와 마사스케
도자와 마사스케는 신조 번의 7대 번주이며, 형의 사망으로 가독을 상속받았으나 번 재정난과 덴메이 대기근으로 어려움을 겪고 26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 -
신조번주 -
도자와 마사스케
도자와 마사스케는 신조 번의 7대 번주이며, 형의 사망으로 가독을 상속받았으나 번 재정난과 덴메이 대기근으로 어려움을 겪고 26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 -
신조번주 -
도자와 마사타다
도자와 마사타다는 에도 시대 신조 번의 6대 번주로, 가로 호조 로쿠에몬에 의해 번정 개혁이 추진되고 번교 메이린도를 창설하여 인재 양성에 힘썼으나 젊은 나이에 사망하여 동생이 가문을 이었다. -
지번사 -
부번현 삼치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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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번사 -
판적봉환
판적봉환은 1868년부터 1871년까지 일본에서 시행된 제도로, 봉건적 막번 체제를 개혁하고 중앙집권화를 강화하기 위해 각 번의 토지와 백성을 천황에게 반환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2. 생애
도자와 마사자네는 마사요시의 장남으로, 1843년 부친의 사망으로 다이묘가 되었으나 어렸기 때문에 은퇴한 조부 도자와 마사쓰구가 섭정을 하였다. 1846년부터는 가로 요시타카 카게요의 도움을 받아 여러 정치 및 경제 개혁을 시작했다.
메이지 유신 시기 보신 전쟁에서 신조 번은 삿초 동맹과 오우에쓰 열번 동맹 사이에서 복잡한 행보를 보였다. 처음에는 삿초 동맹을 지지했지만, 나중에 오우에쓰 열번 동맹에 가담했다가 구보타 번이 메이지 정부 지지로 돌아서자 신조 번도 이에 따랐다. 이 과정에서 인근 쇼나이 번의 공격을 받아 신조 성과 주변 성곽 마을이 파괴되기도 했다. 마사자네는 구보타 성으로 피신하여 메이지 정부 충성 군대에 의해 영지가 해방될 때까지 70일간 망명 생활을 하였다.
1869년 신정부는 신조 번에 15,000코쿠의 수입 증가를 부여했고, 폐번치현 칙령으로 마사자네는 신조 번지사가 되었다. 1871년 번은 야마가타현에 흡수되었고, 마사자네는 도쿄로 이주했다. 1884년에는 화족 작위 제도에 따라 자작이 되었다. 1896년 8월 16일에 사망했다. 향년 65세.
2.1. 초기 생애 (1832년 ~ 1843년)
도자와 마사자네는 1832년(덴포 3년) 윤11월 17일, 마사요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843년(덴포 14년) 아버지 마사요시가 에도에서 사망하면서 가독을 상속받아 다이묘가 되었다. 그러나 아직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은퇴했던 조부인 도자와 마사쓰구가 처음에는 섭정으로서 통치했다. 마사쓰구 사후에는 어머니 토레이인이 보좌했다고 전해진다. 1846년(고카 3년)부터는 영지의 가로 요시타카 카게요의 도움을 받아 여러 정치 및 경제 개혁을 시작했다.
2.2. 번정 개혁 (1846년 ~ 1868년)
도자와 마사자네는 1843년 부친의 사망으로 다이묘가 되었으나, 어렸기 때문에 은퇴한 조부 도자와 마사타네가 섭정으로 통치했다. 1846년부터는 가로 요시타카 칸게유의 도움을 받아 번정 개혁을 시작했다.
게이오 4년(1868년) 보신 전쟁에서는 처음에는 신정부군에 협력했지만, 쇼나이 번에 패하여 오우에쓰 열번 동맹에 참가하여 신정부군과 적대하게 되었다. 한때 쇼나이 번과 협력하여 신정부군을 압도했지만, 얼마 안 가 반격을 받게 되자 신조 번은 멋대로 전선을 이탈하여 동맹군 패주의 원인을 만들었다. 이에 격분한 쇼나이 번은 신조 번을 적으로 간주하고 신조 성을 함락시켰다. 이때 신조의 조카마치는 잿더미가 되었고, 마사자네 등 번주 일족과 번사들은 가까스로 구보타 번으로 피신했다. 이후 신조 번은 신정부군이 반격할 때까지 70일 동안 쇼나이 번에 의해 점령되었다. 신조 번이 이처럼 기본적으로 신정부 측으로 행동한 것은 사쓰마 번 시마즈 가문 출신이었던 토레이인의 영향이 크다고 추측된다.
당초에는 신정부 측에서 이탈했다는 이유로 배신을 추궁받았지만, 사쓰마 번의 오야마 카쿠노스케를 통해 해명하여 용서받았다. 1869년(메이지 2년) 6월 2일, 전선 이탈로 신정부군 우위를 만들어낸 공적을 치하받아 1만 5,000석을 가증받았다. 같은 해 6월에는 판적 봉환에 의해 신조 번지사가 되었다. 성은 소실되었기 때문에 조카마치의 토키와쵸 별저에 살았지만, 1870년(메이지 3년) 8월, 신조성의 임시 복구가 이루어져 정청과 치번사 저택이 성내로 돌아왔다.
1871년(메이지 4년) 7월의 폐번치현에 의해 치번사 직을 면직되었고, 8월에는 도쿄로 이주했다.
2.3. 보신 전쟁과 메이지 유신 (1868년 ~ 1871년)
메이지 유신 시기 보신 전쟁에서 신조 번은 처음에는 삿초 동맹을 지지했지만, 이후 오우에쓰 열번 동맹에 가담했다. 그러나 구보타 번이 메이지 정부 지지로 돌아서자 신조 번도 이에 따랐다. 배신에 분노한 인근 쇼나이 번은 군대를 보내 신조 번을 공격했고, 격렬한 전투 끝에 신조 성과 주변 성곽 마을 대부분을 파괴했다. 마사자네는 구보타 성으로 피신해 70일간 머물렀고, 메이지 신정부에 충성하는 군대에 의해 영지가 해방되었다.
1869년 6월 2일, 신정부는 신조 번에 15,000코쿠의 수입 증가를 부여했다. 같은 달 말, 폐번치현 칙령으로 마사자네는 신조 번지사로 임명되었다. 1871년 7월, 번은 야마가타현에 흡수되었고, 마사자네는 도쿄로 이주했다. 1884년에는 화족 작위 제도에 따라 자작이 되었다. 1896년에 사망했다.
게이오 4년(1868년) 보신 전쟁에서 처음에는 신정부군에 협력했으나, 쇼나이 번에 패해 오우에쓰 열번 동맹에 가담, 신정부군과 대립했다. 쇼나이 번과 협력해 신정부군을 압도했지만, 곧 반격을 받자 신조 번은 독단적으로 전선을 이탈해 동맹군 패배의 원인을 제공했다. 분노한 쇼나이 번은 신조 번을 적으로 간주, 신조 성을 함락시켰다. 신조의 조카마치는 잿더미가 되었고, 마사자네 등 번주 일족과 번사들은 구보타 번으로 피신했다. 이후 신조 번은 신정부군이 반격할 때까지 70일 동안 쇼나이 번에 점령되었다. 신조 번이 신정부 측으로 움직인 것은 사쓰마 번 시마즈 가문 출신 토레이인의 영향이 컸다고 추측된다.
당초 신정부 측 이탈로 배신을 추궁받았지만, 사쓰마 번 오야마 가쿠노스케를 통해 해명하여 용서받았다. 1869년(메이지 2년) 6월 2일, 전선 이탈로 신정부군 우위를 만든 공로로 1만 5,000석을 가증받았다. 같은 해 6월 판적 봉환으로 신조 번지사가 되었다. 성이 소실되어 조카마치 토키와쵸 별저에 거주했으나, 1870년(메이지 3년) 8월 신조 성 임시 복구로 정청과 번지사 저택이 성내로 복귀했다.
1871년(메이지 4년) 7월 폐번치현으로 번지사 직에서 면직되었고, 8월 도쿄로 이주했다. 1884년(메이지 17년) 7월 8일, 자작에 서임되었다.
2.4. 메이지 시대 (1871년 ~ 1896년)
메이지 유신 당시 보신 전쟁에서 신조 번은 처음에는 삿초 동맹을 지지했지만, 이후 오우에쓰 열번 동맹에 가담했다. 그러나 구보타 번이 메이지 정부 지지로 돌아서자 신조 번도 이에 따랐다. 배신에 분노한 인근 쇼나이 번은 군대를 보내 신조 번을 침략했고, 격렬한 전투 끝에 신조 성과 주변 성곽 마을 대부분을 파괴했다. 마사자네는 구보타 성으로 피신하여 70일간 망명 생활을 했고, 이후 메이지 정부 충성 군대에 의해 영지가 해방되었다.
1869년 6월 2일, 신정부는 신조 번에 15,000코쿠의 수입 증가를 부여했다. 같은 달 말, 폐번치현 칙령으로 마사자네는 신조의 제국 지사로 임명되었다. 1871년 7월, 이전의 번은 야마가타현에 흡수되었고, 마사자네는 도쿄로 이주했다. 1884년에는 화족 작위 제도에 따라 자작(시샤쿠)이 되었다. 1896년에 사망했다.
1868년(게이오 4년) 보신 전쟁에서 처음에는 신정부군에 협력했지만, 쇼나이 번에 패하여 오우에쓰 열번 동맹에 참가, 신정부군과 적대하게 되었다. 쇼나이 번과 협력하여 신정부군을 압도했지만, 곧 반격을 받자 신조 번은 독단적으로 전선을 이탈하여 동맹군 패배의 원인을 제공했다. 분노한 쇼나이 번은 신조 번을 적으로 간주, 신조 성을 함락시켰다. 이때 신조의 조카마치는 잿더미가 되었고, 마사자네 등 번주 일족과 번사들은 구보타 번으로 피신했다. 이후 신조 번은 신정부군 반격 때까지 70일간 쇼나이 번에 점령되었다. 신조 번의 이러한 신정부 측 행보는 사쓰마 번 시마즈 가문 출신 토레이인의 영향이 컸다고 추측된다.
당초 신정부 측 이탈로 배신을 추궁받았으나, 사쓰마 번 오야마 가쿠노스케를 통해 해명하여 용서받았다. 1869년(메이지 2년) 6월 2일, 전선 이탈로 신정부군 우위를 만든 공로로 15,000석을 가증받았다. 같은 해 6월 판적 봉환으로 신조 번지사가 되었다. 성 소실로 조카마치 토키와쵸 별저에 거주했으나, 1870년(메이지 3년) 8월 신조 성 임시 복구로 정청과 치번사 저택이 성내로 복귀했다.
1871년(메이지 4년) 7월 폐번치현으로 치번사 직에서 면직되었고, 8월 도쿄로 이주했다. 1884년(메이지 17년) 7월 8일, 자작에 서작되었다. 1896년(메이지 29년) 8월 16일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