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번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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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폐번치현은 1871년 메이지 정부가 일본의 지방 행정 체제를 개편한 주요 정책이다. 메이지 유신 이후 다이묘(지방 영주)들의 실질적인 권력이 남아있던 상황에서, 중앙 집권화를 위해 각 번을 해체하고 정부가 직접 통치하는 현(県)으로 재편했다. 기슈번의 번정 개혁이 모델이 되었으며, 1871년 8월 29일 지번사들에게 폐번치현을 명했다. 이로 인해 각 번은 현으로 바뀌고, 지번사는 면직되어 도쿄로 이주했으며, 구 번주 가문에는 수입의 일부가 지급되었다. 폐번치현은 군제 통일과 재정 건전화를 이루는 데 기여했지만, 구 번의 채무 문제와 상인들의 파산 등 경제적 문제도 발생했다. 1871년 3부 302현으로 시작하여 여러 차례 통합과 분할을 거쳐 1889년 3부 42현으로 최종 정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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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번치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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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번치현 | |
개요 | |
명칭 | 폐번치현(廃藩置県) |
로마자 표기 | Haihan-chiken |
시행일 | 1871년 8월 29일 (양력) |
배경 | 메이지 유신 이후 중앙집권화 추진 사쓰마 번, 조슈 번 등 유력 번의 지지 |
목적 | 봉건 제도 철폐 중앙집권 국가 확립 지방 제도 개편 |
내용 | |
번의 폐지 | 전국 276개 번 폐지 |
현의 설치 | 3부 72현 설치 |
다이묘의 지위 | 옛 다이묘는 도쿄로 강제 이주 옛 다이묘에게는 일정 수준의 금전적 보상 지급 |
중앙 정부의 권한 강화 | 지방 행정 조직을 중앙 정부 직할로 변경 세금 징수 및 군사 권한 중앙 정부로 집중 |
결과 | |
정치적 영향 | 중앙집권 체제 강화 지방 분권 세력 약화 근대 국가 체제 확립 |
사회적 영향 | 사족 계층 몰락 평민 계층의 사회적 지위 향상 |
평가 | |
긍정적 평가 | 근대화의 중요한 발판 마련 국가 통합에 기여 국가 발전의 원동력 |
부정적 평가 | 급격한 변화로 인한 혼란 발생 일부 사족의 불만 야기 지방 자치의 후퇴 |
기타 | |
관련 인물 | 오쿠보 도시미치, 기도 다카요시, 이와쿠라 도모미 |
관련 법령 | 폐번치현의 조 |
2. 배경
1868년 왕정복고 쿠데타 이후 도쿠가와 막부가 무너지고 신정부가 들어섰지만, 실질적인 권력은 여전히 지방 영주(다이묘)들이 장악하고 있었다.[5] 중앙집권화를 위해서는 각 번을 해체하고 정부가 직접 통치하는 행정 구역으로 재편해야 했다.[5]
1868년 11월, 기슈번 제14대 번주 도쿠가와 모치쓰구로부터 번정 개혁의 전권을 위임받은 쓰다 이즈루는 기슈 번 출신의 무쓰 무네미쓰를 만나 군현제와 징병령의 구상을 논의하였다.[48][49][50] 무쓰 무네미쓰는 1869년 7월 폐번치현에 관한 의견서를 제출했으나 채택되지 못하고, 이후 쓰다 이즈루와 함께 기슈번의 번정 개혁에 참여하였다.[11][12][13]
메이지 정부는 군사 및 재정 측면에서 중앙집권 체제 강화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51][14] 그러나 사쓰마번의 시마즈 히사미쓰와 같이 근대화와 중앙집권화에 반대하는 세력도 여전히 존재했으며, 오쿠보 도시미치와 기도 다카요시 등은 점진적인 태도를 취했다.[51][14] 특히 군사력을 보유한 사쓰마번의 동향은 큰 우려 요소였다.[51][14]
1871년 8월 29일 14시, 메이지 정부는 도쿄 주재 지번사들을 황거에 모아 폐번치현을 명했다.[20]
폐번치현은 헤이안 시대 후반부터 이어온 봉건적 토지 지배 방식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것으로, 메이지 유신의 최대 개혁이라 할 수 있다.[22] 오쿠마 시게노부가 건의한 "전국 일치의 정치 체제" 설립을 위해서는 법제적 정비가 필요했으며, 이는 이와쿠라 사절단 외유 중 류수 정부에 의해 실시되었다. 류수 정부는 징병령, 학제 공포, 사법 개혁, 지조개정 등 새로운 제도를 시행했다.[22]
폐번치현으로 구번의 채무와 가록은 모두 신정부의 책임이 되었다.[24] 에도 시대 중기부터 각 번은 심각한 재정난에 시달렸고, 오사카 등의 유력 상인으로부터 "다이묘다시"를 받거나 영민으로부터 고용금을 징수하여 겨우 버티고 있었다.[24] 각 번은 번정개혁을 추진했지만, 흑선 내항 이후 정치적 긴장과 보신전쟁 출병으로 많은 재정 지출을 감수해야 했다. 폐번치현을 앞두고 스스로 영토 반환을 신청하고 해체되는 번이 속출했으며,[24] 막말·유신기에는 많은 번에서 화폐 위조가 이루어져 외교 문제로 발전하기도 했다.[25]
1869년 판적봉환(版籍奉還)으로 토지와 인민은 정부 소유가 되었지만, 다이묘들은 '지번사(知藩事)'로서 번을 통치하여 실질적인 변화는 거의 없었다.[5] 당시 번과 부·현(정부 직할지)의 구역 분할은 복잡하고 비효율적이었으며, 정부는 재정난에 시달렸다.[6][7] 각 번은 막대한 부채에 시달렸고,[8] 번사(藩士)들의 불만도 커져갔다.
오쿠마 시게노부는 "전국 일치의 정치 체제" 확립을 위해 부·번·현의 기구를 통일할 것을 제안했다. 사쓰마번, 조슈번, 도사번은 신정부 직속 친병을 구성하여 중앙집권화를 추진했다.[10]
1869년 7월, 귀족(華族) 제도가 형성됨에 따라 다이묘(大名)라는 용어도 폐지되었다.
3. 기슈번의 번정 개혁
기슈 번의 번정 개혁은 군현제 실시, 번주와 번사들에게 지급하던 가록을 10분의 1로 삭감하는 것을 포함하였다.[48][49][50] 또한, 카를 쾨펜의 지도를 통해 프로이센식 군대를 창설하고, 징병 제도를 마련하여 만 20세 이상의 남성에 대한 징병 검사를 실시하였다. 번주 아래에 집정 1인을 두어 번 전체를 통괄하게 하였고, 집정 아래에 참정공의인을 두어 집정을 보좌하고 번과 중앙정부 간 연락을 담당하게 하였다. 정치부, 공용국, 군무국, 회계국, 형법국, 민정국의 5국과 교육을 담당하는 학습관(와카야마 대학)을 설치하였다.
번주의 가계 업무를 번정과 분리하는 번치직제를 새로 마련하여 봉건적 질서를 해체하였다. 무익고만을 받는 자는 성외로의 이주와 부업, 내직으로의 전환이 허가되어 기슈 번의 봉건제는 사실상 해체되었다.
조슈번의 도리오 고야타는 이 개혁에 참여하였고, 사이고 주도, 사이고 다카모리의 대리로 무라타 신파치, 야마다 아키요시가 시찰하였다. 이 개혁은 일본 근대 국가 건설의 모델 사례가 되었으며, 1871년의 폐번치현과 1873년의 징병령에 큰 영향을 미쳤다.
4. 실행 전야
메이지 3년(1870년) 7월 4일, 야마구치번 출신 병부소보 야마가타 아리토모와 노무라 야스시, 기슈번의 번정 개혁에 참여했던 도리오 고야타는 폐번치현 즉각 단행을 제안했고, 야마가타는 즉시 찬성했다.[52][15] 다음 날, 노무라와 도리오는 대장성을 이끌던 이노우에 가오루를 설득했다.[53] 7월 6일에는 이노우에가 기도 다카요시를,[54][16] 야마가타가 사이고 다카모리를 설득하는 데 성공하였다.[55][17] 사이고는 보신 전쟁 이후 사쓰마번 사족 부양 문제와 번 체제의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56][18] 사이고의 지지로 오쿠보와 기도도 찬성으로 돌아섰다.
폐번치현 계획은 사쓰마번과 조슈번 간에 비밀리에 진행되었으며, 7월 9일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 사이고 주도, 오야마 이와오, 기도 다카요시, 이노우에 가오루, 야마가타 아리토모 등 7명이 기도 저택에 모여 계획을 수립하였다. 이후 산조 사네토미, 이와쿠라 도모미, 도사번의 이타가키 다이스케, 사가번의 오쿠마 시게노부 등 주요 인물들의 찬성을 얻었다. 반발에 대비하여 사쓰마, 조슈, 도사번 출신 병사들로 구성된 친병을 동원하여 진압할 계획을 세웠다.[57][19]
5. 실행
가고시마번 지사 시마즈 다다요시, 야마구치번 지사 모리 모토노리, 사가번 지사 나베시마 나오히로, 고치번 지사 대리 이타가키가 먼저 소환되어 칙령이 낭독되었고,[58] 이후 나고야번 지사 도쿠가와 요시카츠, 구마모토번 지사 호소카와 모리히사, 돗토리번 지사 이케다 요시토쿠, 도쿠시마번 지사 하치스카 모치아키를 포함한 다른 번 지사들에게도 칙령이 전달되었다.[20]
폐번치현으로 각 번은 현으로 재편되었고, 지번사는 면직 후 도쿄로 이주해야 했다. 옛 번주 가문에는 과거 번 수입의 10%가 지급되었고, 번사의 가록 지급 의무와 번의 채무에서 해방되었다. 각 현에는 중앙 정부에서 파견된 현령이 임명되었다. 번찰(藩札)은 당일 시세에 따라 정부 발행 지폐로 교환되었다.[2]
처음에는 3부 302현이었으나, 1871년 3부 72현으로 통합되었다(제1차 부현 통합).[21] 이후 통합과 분할이 반복되어 1889년에는 3부 42현으로 최종 정착되었다. 통합된 부현의 경계는 옛 율령국 경계와 겹치는 경우가 많았고, 석고를 기준으로 재정적 부담을 고려하여 규모를 조정했다.
현령 등 상층부 인사는 해당 현 출신자를 기용하지 않아 옛 번과의 연계를 끊으려 했다. 야마구치현(옛 조슈번)은 구 막부 신하 출신 현령을 파견하여 성공을 거두었고, 이를 통해 지방 행정에서 조슈파의 발언권을 확립했다. 이러한 제한은 문관 임용 제도가 확립된 1885년경까지 이어졌다.
6. 결과
폐번치현이 급속히 이루어진 가장 중요한 이유는 군제 통일 및 재정 건전화였다. 군제는 번의 군사 조직을 해체하고 징병령에 따라 군을 재편성하여 통일했다. 재정 면에서는 폐번치현 직후 신정부 세출의 37%가 화족에 대한 봉록이었으나,[22] 척록처분을 통해 화족의 봉록을 완전히 폐지하여 재정 개선을 이루었다.
사족 대부분이 근대 통일 국가 건설을 지지했고, 구 번주 계급을 신분적·경제적으로 우대하여 도쿄로 이주시켜 번사들과 분리함으로써 개혁에 대한 저항은 억제되었다.[23] 판적봉환 직후 구 번주인 지번사의 가록은 구 번 전체 수입의 10분의 1로 하고, 화족으로 대우했다.[23]
7. 구번 채무 문제
신정부는 번채를 세 종류로 분류했다. 메이지 원년(1868년) 이후의 채무는 공채를 발행하여 원금을 3년간 유예 후 연 4%의 이자를 붙여 25년 할부로 상환하는 신공채, 홍화 연간(1844년~1847년) 이후의 채무는 무이자 공채를 발행하여 50년 할부로 상환하는 구공채, 그리고 덴포 연간 이전의 채무는 에도 막부가 덴포 14년(1843년)에 기헌령(무이자 연부 상환령)을 발령한 것을 구실로 전혀 승계하지 않고 무효로 하는 것이었다. 번표는 폐번 당시 시가에 따라 정부 지폐와 교환되었고, 외채는 현금으로 상환되었다.[28]
신고액의 절반 이상이 무효 선언되어 총 3486만 엔(신공채 1282만 엔, 구공채 1122만 엔, 소액 채무 등을 이유로 현금 지불 등으로 처리된 1082만 엔)이 신정부 명의로 상환되었다(번채 처분).[29] 번채의 대부분은 덴포 이전부터 연기되어 온 것이었고, 모두 무효로 처리되었다. 예를 들어 사쓰마번의 조쇼 히로사토의 "무이자 250년 분할 상환"은 35년간의 지불을 끝으로 무효가 되었다.
일반적으로 에도 시대의 금리는 높았고, 대출자인 상인들에게 다이묘다시는 원금 상환의 가능성이 희박한 부실채권이었지만, 명목상으로는 자산으로 인정되었고, 이자 수입이 크고 사회적 지위가 될 수도 있었지만, 이 처분으로 인해 그 모두가 대손 상태가 되어 상인 중에는 그대로 파산으로 내몰리는 자도 속출했다. 막신 상대 채권을 소유하고 있던 삿사는 와해되었다.
에도보다 막부의 제약이 적은 오사카에 자금 조달처가 요구되었기 때문에 다이묘다시 상인이 에도보다 많았던 오사카는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일본 경제의 중심이었던 오사카는 중심적 지위에서 추락하는 요인이 되었다. 다만, 오사카 상인의 곤경에는 막말 이후의 은의 가치 하락으로 인해 은본위제로 기울고 있던 오사카의 은 자산 가치 하락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구번주와 그 가신은 모든 채무를 면책받았고, 그중에는 폐번 직전에 번표를 증쇄하여 채무로 신고하고 사복을 채운 자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8. 부·현 목록 (1871년 8월 29일 기준)
1871년 8월 29일(메이지 4년 7월 14일) 당시 폐번치현으로 설치된 부·현 목록은 다음과 같다. 부현명은 도시명(부현청 소재지)을 붙인 것이지만, 특히 옛 막부·기본령이나 옛 중소번을 이어받은 현에서는 부현청 소재지 주변보다 더 많은 비지를 원격지에 가진 곳이 적지 않다.
9. 제1차 부현 통합
1871년(메이지 4년) 10월부터 11월에 걸쳐 제1차 부현 통합이 이루어져 3부 302현이 3부 72현으로 재편되었다.[2] 각 부현의 관할 구역은 국가 및 군 단위의 일원적인 영역으로 재편되었다.[30][31][32][33][34][35][36][37][38][39][40]
- 메이지 4년 9월 4일(1871년 10월 17일) 사가현(제1차)과 겐겐현을 통합하여 이마리현이 설치되었다.
- 메이지 4년 9월 5일(1871년 10월 18일) 다테현, 히로사키현, 구로이시현, 도난현, 나나에현, 하치노헤현을 히로사키현에 통합하였다. 이후 9월 23일(1871년 11월 5일) 현청을 이전하여 아오모리현으로 개칭하였다.
1871년 12월 10일(메이지 4년 10월 28일)부터 1872년 1월 2일(메이지 4년 11월 22일)까지 군마현, 효고현, 아오모리현, 모리오카현, 이치노세키현, 센다이현, 히라현, 니혼마쓰현, 와카마쓰현, 아키타현, 사카타현, 야마가타현, 치시마현, 이바라키현, 신지현, 인바현, 키사라즈현, 우쓰노미야현, 도치기현, 이루마현, 사이타마현, 도쿄부, 가나가와현, 아시가라현, 고쿠라현, 오이타현, 후쿠오카현, 미즈마현, 이마리현, 나가사키현, 쿠마모토현, 야쓰시로현, 미미쓰현, 도죠현, 가고시마현, 명동현, 가가와현, 마쓰야마현, 우와지마현, 고치현, 돗토리현, 시마네현, 하마다현, 호죠현, 오카야마현, 후카쓰현, 히로시마현, 야마구치현, 시즈오카현, 하마마쓰현, 아카다현, 상가와현, 니가타현, 카시와자키현, 신카와현, 나나오현, 가나자와현, 후쿠이현, 쓰루가현, 야마나시현, 나가노현, 치쿠마현, 오사카부, 와카야마현, 나가하마현, 오쓰현, 교토부, 사카이현, 나라현, 아노쓰현, 와타라이현, 나고야현, 기후현등이 설치되거나 통합되었다.
중앙 정부는 전직 다이묘들에게 풍족한 연금을 약속하고, 영지의 빚을 흡수하며, 영지 화폐(판사쓰)를 새로운 국가 화폐로 액면가로 전환하겠다고 약속함으로써 이러한 재편을 달성했다.[2] 그러나 중앙 재무부는 그러한 관대한 조치를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에 1874년 전직 다이묘들의 연금은 5년치 연금에 상당하는 액면가를 가진 국채로 전환되었고, 연 5%의 이자를 지급했다.[3]
마키노 노부아키는 이와쿠라 사절단의 학생 구성원으로서 그의 회고록에서 "한 제도의 폐지와 함께 이와쿠라 사절단의 미국과 유럽 파견은 메이지 유신 이후 우리 국가의 기반을 구축한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꼽혀야 한다."라고 언급했다.
10. 제1차 부현 통합 이후의 변동
메이지 4년(1871년) 제1차 부현 통합 이후, 현청 이전 없이 개칭되거나, 현청 이전을 동반한 개칭, 통합, 편입, 분할 편입, 분립, 경계 변경 등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30][31][32][33][34][35][36][37][38][39][40]
- 현청 이전 없는 개칭:
- 1871년 12월 20일 - 히메지현(가시마현)[41]
- 1872년 1월 9일 - 헤이현(이와키현)
- 1872년 2월 8일 - 후쿠이현(아스와현)
- 1872년 2월 16일 - 센다이현(미야기현), 모리오카현(이와테현)
- 1872년 2월 27일 - 오쓰현(시가현)
- 1872년 3월 17일 - 마쓰야마현(이시테쓰현)
- 1872년 5월 8일 - 나고야현(아이치현)
- 1872년 7월 19일 - 구마모토현(시라카와현) ※1875년 재개칭
- 1872년 7월 28일 - 우와지마현(카미야마현)
- 1875년 12월 10일 - 시라카와현(구마모토현)
이러한 개칭은 "인심일신" 등을 요구하는 현 측의 상신에 따른 조치였다.
- 현청 이전 동반 개칭:
- 1871년 11월 5일 - 히로사키현(아오모리현)
- 1871년 12월 25일 - 니혼마쓰현(후쿠시마현)
- 1872년 1월 22일 - 이치노세키현(미즈사와현) ※1875년 재개칭
- 1872년 3월 10일 - 가나자와현(이시카와현)
- 1872년 4월 4일 - 나가하마현(이나카미현)
- 1872년 4월 24일 - 아노쓰현(미에현)
- 1872년 7월 4일 - 이마리현(사가현)
- 1872년 7월 10일 - 후카쓰현(오다현)
- 1875년 8월 31일 - 사카타현( 쓰루오카현)
- 1875년 11월 22일 - 미즈사와현(이와이현)
- 통합:
- 1871년 10월 17일 - 사가현(제1차)과 겐겐현 통합, 현청 이전하여 이마리현(伊万里県) 설치.
- 1871년 10월 18일 - 다테현, 히로사키현, 쿠로이시현, 도난현, 나나에현, 하치노헤현을 히로사키현에 통합.
- 1871년 11월 5일 - 현청을 이전하여 아오모리현으로 개칭.
- 1873년 1월 15일 - 미미쓰현·도조현 (미야자키현)
- 1873년 2월 20일 - 이시테쓰현·가미야마현 (애히메현)
- 1873년 6월 15일 - 인바현·키사라즈현 (지바현), 군마현·이루마현 (쿠마가야현)
- 편입:
- 1871년 12월 10일 - 군마현에 사노현(세타군·미도리노군), 이와츠키현(나파군·세타군), 마쓰미네현, 이즈미현, 요도현(각각 세타군)의 점유지 편입.
- 1871년 12월 13일 - 효고현에 탄고국, 타지마국 전역, 탄바국 타기군, 히카미군, 아마다군 편입.
- 1871년 12월 13일 - 효고현에 하리마국 전역 편입.
- 1871년 12월 25일 - 아오모리현에 무쓰국 전역 편입.
- 1871년 12월 25일 - 이바라키현에 히타치국 다가군, 쿠지군, 나가군, 이바라키군, 마카베군, 요도현 관할의 히타치국 마카베군의 비지령 편입.
- 1871년 12월 25일 - 신지현에 히타치국 신지군, 쓰쿠바군, 가와치군, 시다군, 행방군, 가시마군, 시모우사국 카토리군, 소사군, 가이죠군 편입.
- 1871년 12월 25일 - 인바현에 시모우사국 유키군, 사루시마군, 가쓰시키군, 소마군, 오카다군, 토요다군, 지바군, 하니우군, 인바군 편입.
- 1871년 12월 25일 - 키사라즈현에 안방국, 카즈사국 전역 편입.
- 1871년 12월 25일 - 우쓰노미야현에 시모쓰케국 호우가군, 시오야군, 나스군, 가와치군 편입.
- 1871년 12월 25일 - 도치기현에 시모쓰케국 아시카가군, 야나다군, 칸카와군, 안소군, 도가군, 코즈케국 우라쿠군, 신다군, 야마다군 편입.
- 1871년 12월 25일 - 이루마현에 무사시국 요코미군, 이루마군, 치치부군, 오부스마군, 오오사토군, 하자와군, 카미군, 하타라군, 히키군, 신자군, 나카군, 코다마군, 고마군, 다마군(일부) 편입.
- 1871년 12월 25일 - 사이타마현에 무사시국 사이타마군, 가쓰시키군(일부), 아다치군(일부) 편입.
- 1871년 12월 25일 - 도쿄부에 무사시국 에바라군, 토요시마군, 다마군(일부), 아다치군(일부), 가쓰시키군(일부) 편입.
- 1871년 12월 25일 - 가나가와현에 사가미국 미우라군, 가마쿠라군, 무사시국 키타즈키군, 쿠라키군, 쓰쿠이군 편입.
- 1871년 12월 25일 - 아시가라현에 사가미국 아시가라카미군, 아시가라시모군, 코우자군, 아이코군, 타오야군, 쓰쿠이군, 이즈국 전역 편입.
- 분할 편입:
- 1872년 10월 30일 - 이누카미현(시가현)
- 1872년 12월 27일 - 누카타현(아이치현)
- 1873년 1월 14일 - 아시하현(쓰루가현)
- 1873년 1월 15일 - 하치노헤현(시라카와현)
- 1873년 2월 20일 - 가가와현(메이토현) ※1875년 재분립
- 1873년 6월 10일 - 카시와자키현(니가타현)
- 1873년 6월 15일 - 우츠노미야현(도치기현)
- 1875년 12월 20일 - 오다현(오카야마현)
- 1872년 10월 29일 - 나나오현 중 노토국(이시카와현), 에치고쿠(니이가타현)
- 1875년 5월 7일 - 신지현 중 시모우사국(지바현), 히타치국(이바라키현)
- 분립:
- 1872년 10월 16일 - 가고시마현의 류큐 제도(류큐번) ※류큐 처분
- 1875년 9월 5일 - 메이토현의 사누키 국(가가와현) ※1873년에 병합
- 경계 변경:
- 1872년 1월 26일 - 시마네현 중 오키국(돗토리현)
- 1872년 6월 20일 - 도성현 중 오스미국 히시카리군, 아이라군 및 쿠와하라군 쿠리노고, 요코카와고(가고시마현), 미미즈현 중 히유가국 쇼켄군 스기고, 노지리고 및 코바야시고 중 동방촌(도성현)
- 1872년 9월 19일 - 사가현 중 쓰시마국(나가사키현)
- 1872년 10월 22일 - 아오모리현 중 오시마국(개척사)
- 1873년 1월 15일 - 도성현 중 오스미국(가고시마현)
- 1875년 5월 7일 - 지바현 중 시모우사국 유키군, 사루시마군, 오카다군, 도요다군 및 소마군, 가츠시카군의 각 일부[41](이바라키현)
11. 제2차 부현 통합
1876년, 오쿠보 도시미치는 사이고 다카모리, 키도 다카요시, 이와쿠라 도모미,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도움을 받아 261개의 봉건 영지를 3개의 도시 부(府)와 302개의 현(縣)으로 재편성하는 천황 칙령을 강행했다.[2] 이후 대규모 부현 통합이 이루어졌으며, 그 수는 이듬해 통합을 통해 3개의 도시 부와 72개의 현으로 줄어들었다.[2]
4월 18일에는 아가와현(니가타현), 신카와현(이시카와현), 도와이현(미에현), 나라현(사카이현), 하마다현(시마네현), 호조현(오카야마현), 고쿠라현(후쿠오카현), 사가현(미즈마현)이 통합되었다. 같은 날 이와이현 중 륙중국(이와테현)과 륙전국(미야기현), 아시가라현 중 사가미국(가나가와현)과 이즈국(시즈오카현)이 통합되었다.
8월 21일에는 와카마쓰현(후쿠시마현), 오키타마현·쓰루오카현(야마가타현), 구마가야현(사이타마현), 하마마쓰현(시즈오카현), 쇼쿠마현(효고현), 도토리현(시마네현), 가가와현(에히메현), 메이토현(고치현), 미야자키현(가고시마현)이 통합되었다. 같은 날 이와키현 중 이와키국 카리타군·이구군·와타리군(미야기현)과 나머지(후쿠시마현), 츠쿠마현 중 시나노국(나가노현)과 히다국(기후현), 츠루가현 중 와카사국 및 에치젠국 츠루가군(시가현)과 나머지(이시카와현), 토요오카현 중 탄고국 및 탄바국 아마다군(교토부)과 타지마국 및 탄바국 히카미군·타키군(효고현), 미즈마현 중 치쿠고국(후쿠오카현)과 히젠국(나가사키현)이 통합되었다.
이후에도 분립과 경계 변경이 계속되었다. 도쿠시마 번, 에치젠 번, 돗토리 번, 사가 번, 다카마쓰 번 등 다른 현에 편입된 구 번 영지에서의 독립 운동에 의한 분립, 오사카부와 나라현, 이시카와현과 도야마현 등 도로 건설과 수해 대책 중 예산 배분 우선순위를 둘러싼 대립에 의한 분립이 많았다.
1879년 3월 27일에는 류큐번을 폐지하고 오키나와현을 설치하였다.[45][46] 1882년 2월 8일에는 개척사를 폐지하고 삿포로현・하코다테현・네무로현을 설치했으며, 1886년 1월 26일에는 삿포로현・하코다테현・네무로현을 폐지하고 홋카이도청을 설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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