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체스터 고지 요새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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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도체스터 고지 요새화는 미국 독립 전쟁 중인 1776년 3월, 조지 워싱턴이 이끄는 대륙군이 도체스터 고지를 점령하고 요새화한 사건을 말한다. 영국군은 도체스터 고지의 전략적 중요성을 인지하고 있었으나, 미국의 요새화로 인해 보스턴에서 철수하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보스턴 포위전이 종식되었고, 이후 도체스터 고지는 미영 전쟁 중 재요새화되기도 했다. 현재는 기념비와 국립 사적지로 지정되어 있으며, 3월 17일은 지역의 아일랜드계 미국인들에게 ‘해방의 날’로 기념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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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체스터 고지 요새화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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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분쟁 | 도체스터 고지 요새화 |
관련 전쟁 | 미국 독립 전쟁 중 보스턴 포위전 |
날짜 | 1776년 3월 4일 – 5일 |
장소 | 보스턴 지역, 도체스터 고지 |
결과 | 3월 17일 영국군의 보스턴 철수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대륙군 |
교전국 2 | 그레이트브리튼 왕국 |
지휘관 | |
지휘관 1 | 조지 워싱턴 |
지휘관 1 추가 | 존 토머스 |
지휘관 2 | 윌리엄 하우 |
병력 규모 | |
병력 1 | 도체스터 고지에 2,000–6,000명 |
병력 2 | 보스턴에 10,000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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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표 | |
기타 정보 |
2. 배경
미국 독립 전쟁의 시작을 알린 1775년 4월 19일의 렉싱턴 콩코드 전투 이후, 식민지 민병대는 보스턴 시를 포위하여 보스턴 포위전에 돌입했다.[1][37] 포위전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화력 지원, 즉 대포가 필수적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코네티컷 민병대의 베네딕트 아놀드는 뉴욕주에 위치한 타이컨더로가 요새의 방비가 허술하며, 그곳에 보관된 대포 등 귀중한 군수 물자를 확보할 것을 매사추세츠 안전 위원회에 제안했다.[2][38] 위원회의 승인을 얻은 아놀드는 이선 앨런과 그린 마운틴 보이즈 등과 협력하여 1775년 5월 10일 타이컨더로가 요새를 성공적으로 점령하고 그곳의 무기를 확보했다.[3][39]
이후 1775년 여름, 대륙군 총사령관으로 부임한 조지 워싱턴은 포위전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타이컨더로가 요새에서 확보한 대포를 보스턴 전선으로 가져와야 할 필요성을 절감했다. 이 어려운 임무는 포병 지휘관 헨리 녹스 대령에게 맡겨졌다. 녹스는 1775년 겨울, 혹독한 날씨와 험난한 지형에도 불구하고 수십 톤에 달하는 대포와 군수품을 타이컨더로가 요새에서 매사추세츠주 케임브리지까지 성공적으로 수송하는 놀라운 병참 작전을 완수했다.[5][6][40][41] 이 작전의 성공은 보스턴 포위전의 양상을 바꿀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했으며, 도체스터 고지 요새화의 직접적인 배경이 되었다.[7][42]
2. 1. 렉싱턴 콩코드 전투와 보스턴 포위전
1775년 4월 19일, 미국 독립 전쟁의 시작을 알린 렉싱턴 콩코드 전투 이후 식민지 민병대가 보스턴 시를 포위하면서 보스턴 포위전이 시작되었다.[1][37] 포위전을 지원하기 위해 코네티컷 민병대를 이끌고 온 베네딕트 아놀드 대위는 매사추세츠 안전 위원회에 뉴욕주에 위치한 타이컨더로가 요새의 방비가 허술하며, 그곳에 보관된 대포 등 귀중한 군수 물자를 탈취할 것을 제안했다. 5월 3일, 위원회는 아놀드에게 대령 계급을 부여하고 부대를 조직하여 요새 점령 임무를 지휘할 권한을 주었다.[2][38] 아놀드는 이선 앨런과 그의 부대인 그린 마운틴 보이즈, 그리고 코네티컷과 서부 매사추세츠 민병대와 협력하여 5월 10일 타이컨더로가 요새를 성공적으로 점령하고 그곳의 무기를 확보했다.[3][39]1775년 7월(또는 6월), 조지 워싱턴이 보스턴 외곽에 주둔하고 있던 대륙군의 지휘관으로 취임한 후, 헨리 녹스 대령은 포위전을 강화하기 위해 타이컨더로가 요새에서 확보한 대포를 가져올 것을 제안했다. 워싱턴은 이 제안을 받아들여 녹스에게 타이컨더로가에서 케임브리지까지 무기를 운반하는 임무를 맡겼다. 녹스는 1775년 11월 타이컨더로가로 가서, 겨울철 3개월에 걸쳐 총 60ton[4]에 달하는 대포와 기타 무기를 운반하는 고된 작업을 수행했다. 이 작전에는 배, 말과 소가 끄는 썰매, 그리고 인력이 동원되었으며, 열악한 도로를 따라 이동하고 두 개의 반쯤 얼어붙은 강을 건너야 했다. 또한 인적이 드문 버크셔 산맥의 숲과 습지를 통과하여 마침내 보스턴 지역에 도착했다.[5][6][40][41] 역사학자 빅터 브룩스는 헨리 녹스의 이 성공적인 노력을 전쟁 전체에서 "가장 놀라운 병참술 중 하나"라고 높이 평가했다.[7][42]
2. 2. 타이컨더로가 요새 점령
1775년 4월 19일, 렉싱턴 콩코드 전투 이후 식민지 민병대가 보스턴 시를 포위하면서 보스턴 포위전이 시작되었다.[1] 이 포위전을 지원하기 위해 코네티컷 민병대 대위 베네딕트 아놀드는 자신의 부대와 함께 도착했다. 그는 매사추세츠 안전 위원회에 뉴욕주에 위치한 타이컨더로가 요새가 방비가 허술하며, 대포를 비롯한 귀중한 군수품이 보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그 점령을 제안했다. 5월 3일, 위원회는 아놀드를 대령으로 임명하고, 부대를 조직하여 요새 점령 임무를 지휘할 권한을 부여했다.[2]아놀드는 이선 앨런과 그의 부대인 그린 마운틴 보이즈, 그리고 코네티컷과 서부 매사추세츠의 민병대와 협력하여 5월 10일 타이컨더로가 요새를 기습적으로 점령하고 모든 무기를 확보했다.[3]
이후 1775년 7월 조지 워싱턴이 보스턴 외곽의 대륙군을 지휘하게 되자, 헨리 녹스 대령은 타이컨더로가 요새에서 확보한 대포를 보스턴 포위전에 활용할 것을 제안했다. 워싱턴은 이 제안을 받아들여 녹스에게 타이컨더로가에서 케임브리지까지 무기를 운송하는 임무를 맡겼다. 녹스는 1775년 11월 타이컨더로가로 가서, 겨울철 3개월 동안 총 60ton[4]에 달하는 대포와 기타 무기를 운반했다. 이 과정은 매우 험난했는데, 배, 말과 소가 끄는 썰매, 그리고 인력을 동원하여 상태가 좋지 않은 도로를 지나고, 반쯤 얼어붙은 강을 두 개나 건넜으며, 인적이 드문 버크셔 산맥의 숲과 늪지대를 통과해야 했다.[5][6] 역사가 빅터 브룩스는 녹스의 이러한 성공적인 노력을 미국 독립 전쟁 전체에서 "가장 놀라운 병참술 중 하나"라고 평가했다.[7]
2. 3. 헨리 녹스의 대포 수송 작전
보스턴 포위전이 한창이던 1775년, 대륙군은 영국군을 보스턴에서 몰아낼 결정적인 수단인 대포가 부족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헨리 녹스 대령이 중요한 작전을 제안하고 실행에 옮겼다. 앞서 1775년 5월 10일, 베네딕트 아놀드와 이선 앨런이 이끄는 민병대가 뉴욕주에 위치한 타이컨더로가 요새를 점령하면서 많은 대포와 중요한 군수품을 확보한 상태였다.[2][3][38][39] 하지만 이 대포들을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보스턴 포위선까지 옮기는 것은 매우 어려운 과제였다.1775년 6월 또는 7월[2][38] 대륙군 총사령관으로 부임한 조지 워싱턴에게, 포병 지휘관이었던 헨리 녹스 대령은 타이컨더로가 요새의 대포를 보스턴으로 가져올 것을 제안했다. 워싱턴은 이 제안을 받아들였고, 녹스는 타이컨더로가 요새에서 매사추세츠주 케임브리지까지 대포를 운반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녹스는 1775년 11월 타이컨더로가 요새로 가서 작전을 시작했다. 겨울철 3개월에 걸쳐 총 60ton[4]에 달하는 대포와 기타 무기들을 옮겨야 했다. 운반 과정은 극도로 험난했다. 녹스와 그의 부대는 배, 말과 소가 끄는 썰매, 그리고 인력을 총동원하여[5][40] 울퉁불퉁하고 열악하게 관리된 도로를 따라 이동했다. 또한, 반쯤 얼어붙은 강 두 개를 건너야 했으며, 사람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는 버크셔 산맥의 숲과 늪지대를 통과해야만 했다.[5][6][40][41]
이러한 수많은 역경에도 불구하고, 헨리 녹스는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하여 대포들을 케임브리지의 대륙군 진지까지 무사히 운반했다. 역사학자 빅터 브룩스는 녹스의 이 성공적인 노력을 미국 독립 전쟁 전체를 통틀어 "가장 놀라운 병참술 중 하나"[7] 또는 "가장 엄청난 병참 업무의 공적 중 하나"[42]라고 높이 평가했다. 이 작전의 성공은 이후 도체스터 고지 요새화를 가능하게 하여 보스턴 포위전의 승패를 가르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3. 전략
도체스터 고지는 보스턴 시와 항구를 내려다보는 전략적 요충지였기 때문에 미국 독립 전쟁 초기부터 대륙군과 영국군 양측 모두에게 중요한 지점이었다. 영국군 지휘부, 특히 윌리엄 하우 장군은 이 고지의 중요성을 일찍부터 인식하고 포위전 초기에 점령 계획까지 세웠으나, 이 계획이 미국 측에 누설되면서 벙커 힐 전투가 발발하는 계기가 되었고 결국 실행되지 못했다.[9][10][44][67]
조지 워싱턴이 이끄는 대륙군 역시 1775년 고지 점령을 고려했지만, 당시에는 영국군의 공격에 대비할 준비가 부족하다고 판단하여 계획을 보류했다.[12][45][68] 이처럼 양측 모두 고지의 전략적 가치를 인지하고 있었지만, 벙커힐 전투에서의 큰 피해를 겪은 영국군의 신중함과 대륙군의 준비 부족으로 인해 한동안 어느 쪽도 선뜻 점령에 나서지 못하는 상황이 이어졌다.[11]
이러한 교착 상태는 1776년 초, 헨리 녹스가 타이컨더로가 요새에서 대포를 성공적으로 운반해 오고, 부족했던 화약과 포탄 등 군수 물자가 확보되면서 전환점을 맞이했다.[14][47][70] 워싱턴은 이를 결정적인 기회로 판단하고, 도체스터 고지를 기습적으로 점령하여 신속하게 요새화함으로써 보스턴의 영국군을 압박하는 과감한 전략을 실행하기로 결단했다. 이는 길어지는 보스턴 포위전의 국면을 타개하기 위한 중요한 전략적 결정이었다.
3. 1. 도체스터 고지의 전략적 중요성

영국군 지휘부는 윌리엄 하우 장군을 필두로 도체스터 고지의 중요성을 일찍부터 인식하고 있었다. 이 고지는 찰스타운에 있는 고지와 함께 보스턴 시와 외항을 내려다보는 전략적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당시 보스턴 항구는 영국 해군에게 매우 중요했는데, 처음에는 사무엘 그레이브스 제독, 나중에는 멀리뉴 슐덤 제독[43]의 지휘 아래 육군의 영국군을 보호하고 포위된 시내로 물자를 수송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포위전 초기, 영국군은 도체스터 고지를 확보할 계획을 세웠다. 특히 항구에 대한 조망이 더 좋은 도체스터 고지를 찰스타운 고지보다 먼저 점령하려 했다. 그러나 이 계획이 미국 측에 누설되면서 1775년 6월 17일 벙커 힐 전투가 발발하는 계기가 되었다.[44]
1775년 조지 워싱턴이 포위전 지휘관으로 부임했을 때, 그 역시 아직 점령되지 않은 도체스터 고지를 확보하는 방안을 고려했다. 하지만 당시 대륙군이 영국군의 공격을 막아낼 준비가 부족하다고 판단하여 이 생각을 접었다.[45] 1776년 2월 초, 고지 점령 문제가 다시 논의되었지만, 지역 안전 위원회는 영국군의 강력한 전력과 화약 등 중요 군수품 부족을 이유로 시기상조라고 판단했다.[46]
상황은 2월 말 헨리 녹스가 타이컨더로가 요새에서 운반해 온 대포가 도착하고, 화약과 포탄이 보충되면서 바뀌었다.[47] 워싱턴은 마침내 도체스터 고지를 점령하고 요새화할 때가 왔다고 판단하고 작전 개시를 결정했다.
3. 2. 영국군의 계획과 우려
영국군 지휘부, 특히 윌리엄 하우 장군은 도체스터 고지가 찰스타운의 고지와 함께 보스턴 시와 항구를 내려다보는 전략적 요충지임을 잘 알고 있었다.[8] 이 항구는 왕립 해군에게 매우 중요했는데, 처음에는 새뮤얼 그레이브스 제독, 이후 멀리뉴 셜덤 제독의 지휘 아래 육군을 보호하고 포위된 도시에 물자를 공급하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8]
포위전 초기인 1775년 6월 15일, 영국군은 도체스터 고지와 찰스타운 고지를 모두 점령할 계획을 세웠으며, 항구 조망이 더 좋은 도체스터 고지를 우선 목표로 삼았다.[9] 그러나 이 계획이 대륙군 측에 누설되면서 6월 17일 벙커힐 전투가 발발하는 계기가 되었다.[10]
벙커힐 전투에서 상당한 손실을 입은 영국군은 이후 도체스터 고지 점령에 대해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양측 모두 고지의 전략적 중요성을 인지하고 있었지만, 선뜻 점령하여 요새화하지는 못했다.[11] 영국군은 대륙군이 먼저 고지를 점령하고 요새화할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었다. 한편, 조지 워싱턴이 이끄는 대륙군 역시 1775년 고지 점령을 고려했으나, 영국군의 공격에 대비할 준비가 부족하다고 판단하여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12]
3. 3. 워싱턴의 전략과 준비
조지 워싱턴은 도체스터 고지가 보스턴과 항구를 내려다보는 전략적 요충지임을 잘 알고 있었다. 영국군 지휘부 역시 이 고지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으며, 포위전 초기에 이곳을 점령하려 했으나 벙커힐 전투로 이어지는 사건 속에서 실행되지 못했다.[9][10] 워싱턴은 1775년 포위전 지휘를 맡았을 때 도체스터 고지 점령을 고려했지만, 당시에는 병력과 물자가 부족하여 영국군의 공격을 막아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판단하여 계획을 보류했다.[12][45]
1776년 2월 초, 고지 점령 문제가 다시 논의되었으나, 지역 안전 위원회는 영국군 병력이 우세하고 화약 등 중요 군수품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시기상조라고 판단했다.[13][46] 그러나 상황은 2월 말 헨리 녹스가 타이컨더로가 요새에서 어렵게 운반해 온 대포와 추가로 확보된 화약 및 포탄 덕분에 급변했다.[14][47] 워싱턴은 마침내 도체스터 고지를 점령하고 요새화하여 영국군을 압박할 때가 왔다고 결단했다.
워싱턴의 전략은 치밀하게 준비되었다. 먼저, 녹스가 가져온 중포 일부를 케임브리지의 리치미어스 포인트, 코블힐, 그리고 록스버리의 램스댐에 배치했다.[48] 3월 2일 밤부터 이 포들을 이용해 보스턴 시내를 향해 포격하여 영국군의 주의를 분산시키는 양동 작전을 펼쳤다. 영국군도 응사했지만, 양측 모두 큰 피해는 없었다. 이 포격은 3월 3일 밤까지 이어지며 도체스터 고지 점령 작전을 위한 시간을 벌었다.[49]
본격적인 작전은 3월 4일 밤에 시작되었다. 존 토마스 장군이 이끄는 약 2,000명의 병력이 영국군의 눈을 피해 조용히 도체스터 고지로 이동했다.[50] 병사들은 토목 공구와 대포 가대를 운반했고, 이동 경로와 항구 사이에 건초 묶음을 쌓아 작업 소음을 최소화했다. 밤새 교대로 투입된 병력들은 보스턴 시와 항구를 직접 조준할 수 있는 위치에 신속하게 토치카와 방어 시설을 구축했다. 워싱턴 장군도 직접 현장에 나와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았으며, 3월 5일이 보스턴 학살 사건 6주년임을 상기시키며 그들의 노고를 격려했다.[51] 새벽 4시경에는 소화기나 포도탄 공격을 막아낼 수 있을 정도의 견고한 요새가 완성되었다. 이후에도 나무를 베어 말뚝울타리를 만들고, 영국군의 공격 시 굴려보낼 수 있도록 돌을 채운 통들을 배치하는 등 방어 준비를 계속했다.[50][52]
워싱턴은 영국군 사령관 윌리엄 하우 장군이 새로 구축된 요새를 보고 보스턴에서 철수하거나, 아니면 고지를 탈환하기 위해 공격해 올 것이라고 예상했다.[54] 만약 영국군이 공격을 감행한다면, 이는 벙커힐 전투의 참패를 되풀이할 가능성이 높았다.[55] 워싱턴은 하우가 공격을 선택할 경우에 대비하여, 케임브리지에서 보스턴 시내로 역습을 가할 계획까지 세워두었다. 이를 위해 2척의 포대선과 약 3,000명의 병력을 수송할 선박도 준비시켰다.[56] 하우 장군은 다음 날 아침, 하룻밤 사이에 언덕 위에 나타난 견고한 요새를 보고 크게 놀라 "반역군은 우리 군 전체가 한 달에 할 일을 하룻밤 만에 해냈다"고 말했다고 전해진다.[53] 워싱턴의 예측대로 하우는 철수와 공격이라는 두 가지 선택지를 놓고 고심하게 되었다.
4. 요새화
3월 2일과 3월 3일 밤, 워싱턴은 타이컨더로가 요새에서 가져온 대포를 이용해 케임브리지와 록스베리 등지에서 보스턴을 향해 포격하는 양동작전을 펼쳤다.[15][48][16][49] 이는 영국군의 주의를 분산시키고 도체스터 고지 점령 준비를 감추기 위함이었다.
본격적인 작전은 3월 4일 밤에 시작되었다.[17][50] 존 토마스 장군이 이끄는 약 2,000명의 대륙군 병력은[51] 어둠을 틈타 조용히 도체스터 고지로 이동하여 요새화 작업을 개시했다. 얼어붙은 땅 때문에 참호 구축이 어려운 상황에서, 루퍼스 퍼트넘의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활용하여[18][19][20] 밤새 대포를 운반하고 신속하게 방어 시설을 구축했다. 워싱턴 장군도 현장에서 보스턴 학살 6주년(3월 5일)을 상기시키며 병사들을 독려했다.[21][51]
다음 날 아침, 하룻밤 사이에 고지 위에 세워진 견고한 요새는 영국군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23][53] 워싱턴은 영국군 사령관 하우 장군이 고지를 공격하거나 보스턴에서 철수할 것으로 예상했으며,[24][54] 영국군이 공격을 선택할 경우 벙커 힐 전투의 전철을 밟게 될 가능성이 높았다.[25][55] 이에 대비해 워싱턴은 보스턴 시내를 공격할 병력과 수송선도 준비해 두었다.[26][56]
4. 1. 기습 작전의 시작
워싱턴은 먼저 타이컨더로가 요새에서 옮겨온 중포 몇 문을 케임브리지의 리치미어 포인트와 코블 힐, 그리고 록스베리의 램스 댐에 배치했다.[15][48] 이는 도체스터 고지 점령을 위한 양동작전이었다. 3월 2일과 3월 3일 밤, 이 포들을 이용해 보스턴 시내를 향해 포격을 가했고, 영국군도 이에 응사했으나 양측 모두 큰 피해는 없었다.[16][49] 이 포격으로 영국군의 주의를 끄는 동안, 미국 대륙군은 고지 점령 준비를 진행했다.루퍼스 퍼트넘은 얼어붙은 땅 때문에 참호 구축이 어렵다는 점을 고려하여, 미리 제작된 목재 구조물(샹들리에)과 파시네(나무 묶음)를 이용해 신속히 방어 진지를 구축하는 계획을 세웠다. 필요한 자재들은 영국군의 눈을 피해 비밀리에 준비되었다.[18][19][20]
3월 4일 밤, 대륙군 포대는 다시 보스턴을 향해 포격을 개시했고, 이와 동시에 기습 점령 작전이 시작되었다.[17][50] 존 토마스 장군이 약 2,000명의 병력을 이끌고[51] 어둠 속에서 조용히 도체스터 고지 정상으로 이동했다. 병사들은 요새 건설 도구, 대포, 그리고 미리 준비된 자재들을 운반했다.[21][51] 이동 중 소음을 줄이기 위해 행군로와 항구 사이에 건초 더미를 깔았다.[21][51]
밤새 병사들은 교대로 투입되어 대포를 고지 위로 옮기고, 보스턴 시내와 항구가 내려다보이는 위치에 토루(土壘)를 쌓았다.[21][51] 워싱턴 장군도 현장에서 병사들을 격려하며, 다음 날인 3월 5일이 보스턴 학살 6주년임을 상기시켜 사기를 높였다.[21][51]
새벽 4시경에는 소총 사격이나 포도탄 공격을 막을 수 있는 기본적인 요새가 완성되었다.[21][51] 이후에도 주변 나무를 베어 아바티스(나무 장애물)를 설치하고,[17][50] 토루 바깥에는 돌을 채운 통들을 배치하여 영국군의 공격 시 언덕 아래로 굴려보낼 수 있도록 준비하는 등 요새화 작업은 계속되었다.[22][52]
다음 날 아침, 하룻밤 만에 도체스터 고지에 세워진 요새를 본 영국군 사령관 하우 장군은 크게 놀라며 "반군들은 하룻밤 만에 내 군대 전체가 한 달 동안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일을 해냈다"고 말했다고 전해진다.[23][53]
4. 2. 존 토마스의 요새화 작업
조지 워싱턴은 타이컨더로가 요새에서 가져온 중포를 케임브리지의 리치미어 포인트와 코블 힐, 그리고 록스버리의 램 댐에 우선 배치했다.[15][48] 이는 도체스터 고지 점령 작전을 숨기기 위한 양동작전의 일환이었다. 3월 2일 밤, 이 포대들은 보스턴 시내를 향해 포격을 시작했고, 영국군도 응사했으나 양측 모두 큰 피해는 없었다. 포격은 3월 3일 밤에도 이어졌으며, 그 사이 대륙군은 도체스터 고지를 점령할 준비를 계속했다.[16][49]3월 4일 밤, 포격이 다시 시작되었고 이번에는 실제적인 점령 작전이 함께 이루어졌다.[17][50] 영국군이 3일간 이어진 포격에 집중하는 동안, 존 토마스 장군이 이끄는 약 2,000명 이상의 병력이 조용히 도체스터 고지 정상으로 이동했다.[17][51] 병사들은 토목 공사 도구와 타이컨더로가 요새에서 가져온 대포를 운반했으며, 당시 병참 총장이었던 존 고다드 역시 이 작전에 참여했다.[18][19][20] 이동 경로와 항구 사이에는 건초 더미를 깔아 소음을 최소화했다.[71][21][51]
당시 땅이 얼어붙어 참호를 파는 것이 어려웠기 때문에, 제재업자 출신이었던 루퍼스 퍼트넘은 샹들리에(틀로 사용되는 길이 10피트의 굵은 목재)와 파시네(나뭇가지 묶음)를 이용한 요새화 방식을 고안했다. 이 구조물들은 영국군의 눈을 피해 미리 제작되었다.[18][19][20] 밤새도록 병력들은 교대로 대포를 고지 위로 끌어올리고, 미리 준비된 구조물들을 이용해 마을과 항구를 내려다보는 위치에 신속하게 토루(土壘, 흙으로 쌓은 보루)를 구축했다.[71][21][51] 워싱턴 장군도 현장에서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았으며, 3월 5일이 보스턴 학살 사건 6주년임을 상기시키며 그들을 격려했다.[71][21][51]
새벽 4시경에는 소총 사격이나 포도탄 정도는 막아낼 수 있는 기본적인 요새가 완성되었다. 이후에도 병사들은 나무를 베어 영국군의 공격을 저지하기 위한 아바티스(방어용 장애물)를 설치하는 등 진지 보강 작업을 계속했다.[17][50] 또한, 토루 외곽에는 돌을 채운 통들을 배치하여, 영국군이 공격해 올 경우 언덕 아래로 굴려보낼 수 있도록 준비했다.[72][22][52] 다음 날 아침, 하룻밤 사이에 나타난 견고한 요새를 본 영국군 사령관 하우 장군은 "반군들은 하룻밤 만에 내 군대 전체가 한 달 동안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일을 해냈다"고 말하며 놀라움을 표했다.[76][23][53]
워싱턴은 하우 장군과 그의 군대가 고지를 탈환하려 하거나 혹은 보스턴에서 철수할 것이라고 예측했다.[73][24][54] 만약 영국군이 고지 탈환을 시도한다면, 이는 벙커 힐 전투의 재앙적인 결과를 반복할 가능성이 높았다.[74][25][55] 워싱턴은 하우가 공격을 감행할 경우에 대비하여, 케임브리지에서 약 3,000명의 병력을 태운 배와 2척의 부유 포대를 동원해 보스턴 시내를 공격할 계획까지 세워두었다.[75][26][56] 워싱턴의 예측대로, 이는 하우가 실제로 고려했던 선택지들이었다.
4. 3. 워싱턴의 격려와 보스턴 학살
3월 4일 밤, 존 토마스 장군이 이끄는 약 2,000명의 병력은 조용히 도체스터 고지 정상으로 이동하여 밤새 요새화 작업을 진행했다.[50] 조지 워싱턴 장군도 이 중요한 작전에 동행하여 병사들의 사기를 높이고자 했다. 그는 병사들에게 다음 날인 3월 5일이 바로 영국군의 압제를 상징하는 사건 중 하나인 보스턴 학살 6주년임을 상기시키며, 현재 진행 중인 투쟁의 의미를 되새기고 분발하도록 격려했다.[51]5. 영국군의 반응
도체스터 고지가 요새화되자 영국군은 큰 위협을 느꼈다. 영국 함대 사령관 셜덤 제독은 고지를 점령하지 않으면 함대가 위험하다고 판단했고,[27][57] 하우 장군 역시 고지 탈환을 위한 공격 계획을 세웠다.[27][57] 그는 2,400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야간 기습 공격을 준비했다.[27][57]
그러나 워싱턴은 영국군의 움직임을 미리 파악하고 도체스터 고지의 방어 병력을 약 6,000명으로 증강했다.[28][58] 설상가상으로 3월 5일 밤에 폭설이 내려 영국군의 공격은 실행되지 못했다.[29][59] 며칠 후 폭풍이 잦아들자, 하우 장군은 보스턴을 지키는 것보다 병력을 보존하여 다른 곳에서 싸우는 것이 더 유리하다고 판단하여 공격 계획을 철회했다.[30][60]
결국 하우 장군은 보스턴에서 철수하기로 결정하고, 중재자를 통해 워싱턴에게 영국군이 방해받지 않고 떠날 수 있다면 도시를 파괴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전달했다.[31][32][61] 며칠간의 활동과 악천후 끝에, 3월 17일 영국군은 1,000명이 넘는 왕당파 민간인들과 함께 배를 타고 핼리팩스로 철수했다.[33][62]
5. 1. 영국군의 충격과 위협 인식
다음 날 아침, 보스턴에서 요새화된 고지를 본 영국군 사령관 윌리엄 하우는 '미국인들이 하룻밤 사이에 자신의 군대가 한 달 동안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일을 해냈다'고 평가하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불과 약 9.66km 떨어진 숲에서 벌어진 대규모 작업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영국 함대의 지휘관이었던 몰리뉴 셜덤은 고지에 구축된 미국 측 진지를 제거하지 않으면 함대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27] 이에 하우 장군과 참모들은 고지를 탈환하기로 결정하고, 야음을 틈타 2,400명의 병력을 투입하여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27] 조지 워싱턴은 이러한 영국군의 움직임을 통보받고 즉시 도체스터 고지의 방어 병력을 증강시켜 약 6,000명에 달하는 병력을 배치했다.[28]
그러나 3월 5일 늦게 폭설이 내리기 시작하면서 영국군의 공격 계획은 며칠 동안 실행될 수 없었다.[29] 폭풍이 잦아들 무렵, 하우 장군은 공격 계획을 재고하게 되었다. 그는 보스턴을 지키는 것보다 다른 중요한 지역에서의 전투를 위해 군대를 보존하는 것이 더 가치 있다고 판단했다.[30]
3월 8일, 중재자들은 서명되지 않은 문서[31]를 워싱턴에게 전달하여, 하우 장군의 군대가 방해받지 않고 도시를 떠날 수 있게 해준다면 보스턴을 불태우지 않고 철수하겠다는 의사를 전달했다.[32] 며칠간의 추가적인 활동과 악천후 끝에, 3월 17일 영국군은 배를 타고 보스턴을 떠나 핼리팩스 (노바스코샤)로 향했다. 이때 1,000명이 넘는 왕당파 민간인들도 함께 보스턴을 떠났다.[33]

5. 2. 하우의 공격 계획과 좌절
영국 함대 사령관 셜덤 제독은 도체스터 고지의 대륙군 진지를 점령하지 않으면 함대가 위험에 처할 것이라고 하우 장군에게 경고했다. 이에 하우와 그의 참모들은 고지를 공격하기로 결정하고, 어둠을 틈타 3월 5일 밤에 2,400명의 병력을 보내 진지를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27][57]
하지만 워싱턴은 영국군의 움직임을 미리 파악하고 도체스터 고지의 병력을 증강하여, 방어 병력은 약 6,000명에 달했다.[28][58] 이는 하우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강력한 방어 태세였다. 설상가상으로 공격 예정일이었던 3월 5일 늦게 폭설이 내리기 시작하여 영국군의 공격은 며칠 동안 불가능해졌다.[29][59]
폭풍이 잦아들 무렵, 하우는 공격 계획을 재고했다. 워싱턴의 강력한 방어 태세와 이전 벙커힐 전투에서의 큰 피해를 경험했던 점[30][60] 등을 고려하여, 보스턴을 무리하게 지키는 것보다 병력을 보존하여 다른 중요한 지역에서 싸우는 것이 더 가치 있다고 판단했다.
결국 하우는 퇴각을 결정하고, 3월 8일 중재자를 통해 워싱턴에게 영국군이 방해받지 않고 보스턴을 떠날 수 있게 해준다면 도시를 불태우지 않겠다는 내용의 서명되지 않은 문서를 전달했다.[31][32][61] 며칠간의 활동과 악천후 끝에, 3월 17일 영국군은 배를 타고 보스턴을 떠나 노바스코샤 핼리팩스로 향했다. 이때 1,000명이 넘는 왕당파 민간인들도 함께 떠났다.[33][62]
5. 3. 보스턴 철수 결정
영국 함대의 지휘관 셜덤 제독은 도체스터 고지의 진지를 점령하지 않으면 함대가 위험에 처할 것이라고 선언했다.[27] 이에 호 장군과 참모들은 고지를 공격하기로 결정하고, 어둠을 틈타 2,400명의 병력을 보내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27] 워싱턴은 이러한 영국군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도체스터 고지의 병력을 증강하여 방어 병력은 약 6,000명에 달했다.[28][58]그러나 3월 5일 늦게 폭설이 내리기 시작하여 영국군의 공격 계획은 며칠 동안 실행될 수 없었다.[29][59] 폭풍이 잦아들 무렵, 호 장군은 공격 계획을 재고하게 되었다. 그는 보스턴을 지키는 것보다 군대를 보존하여 다른 더 가치 있는 곳에서 싸우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다.[30][60]
3월 8일, 호 장군은 중재자를 통해 워싱턴에게 서명되지 않은 문서를 전달했다.[31] 이 문서에는 영국군이 방해받지 않고 보스턴을 떠날 수 있게 해준다면 도시를 파괴하지 않겠다는 제안이 담겨 있었다.[32][61] 며칠간의 활동과 악천후가 이어진 후, 3월 17일 영국군은 마침내 배를 타고 보스턴을 떠나 노바스코샤 핼리팩스로 향했다. 이때 1,000명이 넘는 왕당파 민간인들도 함께 보스턴을 떠났다.[33][62]
6. 결과
1776년 3월 17일, 영국군은 보스턴에서 철수하여 노바스코샤주 핼리팩스로 향했다.[1][2] 이는 조지 워싱턴 휘하의 대륙군이 도체스터 고지를 성공적으로 점령하고 요새화하여 보스턴 항구와 시내를 내려다보는 전략적 위치를 확보한 직접적인 결과였다. 영국군은 고지에서 가해지는 포격 위협을 감당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더 이상의 저항 없이 도시를 포기하고 철수하기로 결정했다.[3][4]
도체스터 고지 요새화는 보스턴 포위전을 종식시키는 결정적인 사건이었으며, 미국 독립 전쟁 초기 국면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5] 이 성공적인 작전은 대륙군의 사기를 크게 높였고, 영국을 상대로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또한, 독립을 향한 움직임을 더욱 가속화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영국군의 철수는 미국 식민지 전체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전쟁의 다음 단계를 예고하는 사건이었다.[6]
7. 유산
미국 독립 전쟁 이후에도 도체스터 고지는 전략적 중요성을 유지했다. 미영 전쟁 중에는 영국군의 침략에 대비하여 다시 요새화되고 군대가 주둔하기도 했으나, 전쟁이 끝난 후에는 완전히 버려졌다. 19세기 후반에는 보스턴 항구 확장을 위한 매립 재료로 사용되면서 지형의 일부가 변형되기도 했다.[34][63]
20세기 초, 지역 역사에 대한 관심이 되살아나면서 도체스터 고지의 역사적 의미를 기리기 위한 노력이 시작되었다. 1902년에는 현재 사우스 보스턴 지역의 고지대에 도체스터 고지 기념비가 세워졌다.[34][63] 또한, 이 지역에 많이 거주하던 아일랜드계 미국인들의 노력으로 3월 17일이 영국군 철수를 기념하는 해방의 날(Evacuation Day)로 지정되어, 보스턴 시를 포함한 서퍽 카운티의 공식 공휴일이 되었다. 이날은 아일랜드의 기념일인 성 패트릭의 날이기도 하다.[35][36][64][65]
도체스터 고지 유적은 그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1966년 국립 사적지 등록부에 도체스터 고지 국립 사적지로 등재되었으며, 1978년부터는 보스턴 국립 역사 공원의 일부로 편입되어 국립 공원 관리청의 관리하에 보존되고 있다.[34][63]
7. 1. 역사적 장소로서의 가치
미국 독립 전쟁이 끝난 후 요새는 한동안 유지되다가 폐기되었다. 이후 미영 전쟁 시기에는 영국군의 침략 가능성에 대비하여 다시 요새화되고 군대가 주둔하기도 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자 요새는 완전히 버려졌고, 19세기 후반에는 보스턴 항구 확장 공사의 매립 재료로 사용되면서 언덕의 일부가 사라지기도 했다.[34][63]1902년, 지역 역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현재 사우스 보스턴 지역에 남아있는 고지대에 도체스터 고지 기념비가 세워졌다.[34][63] 또한, 이 지역에 많이 거주하던 아일랜드계 미국인들의 노력으로 3월 17일(아일랜드의 기념일인 성 패트릭의 날)을 영국군으로부터의 해방을 기념하는 대피의 날로 지정하여, 보스턴 시를 포함한 서퍽 카운티의 공식 공휴일로 삼게 되었다.[35][36][64][65]
도체스터 고지 유적은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1966년에는 국립 사적지 등록부에 등재되었고, 1978년부터는 보스턴 국립 역사 공원의 일부로 편입되어 국립 공원 관리청의 관리하에 보존되고 있다.[34][63]
7. 2. 도체스터 고지 기념비
미국 독립 전쟁 이후 폐기되었던 도체스터 고지 요새는 미영 전쟁 때 잠시 재요새화되었으나, 전쟁 후 완전히 버려졌고 19세기 후반에는 보스턴 항의 확장을 위한 매립 재료로 사용되었다.[34][63]1902년, 지역 역사에 대한 관심이 다시 높아지면서 현재 사우스 보스턴의 고지대에 도체스터 고지 기념비가 세워졌다.[34][63] 이 지역에 많이 거주하던 아일랜드계 미국인들은 보스턴 시를 포함한 서퍽 카운티에서 3월 17일을 '해방의 날'로 지정하고 휴일로 삼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날은 아일랜드의 축일인 성 패트릭의 날이기도 하다.[35][36][64][65]
도체스터 고지 유적은 1966년 국립 사적지 등록부에 도체스터 고지 국립 사적지로 등재되었으며, 1978년에는 보스턴 국립 역사 공원의 일부로 편입되어 국립 공원 관리청의 관리를 받게 되었다.[34][63]
7. 3. 해방의 날 (3월 17일)
1902년, 지역 역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현재 사우스 보스턴의 고지대에 도체스터 고지 기념비가 세워졌다.[34][63] 이 지역에 많이 거주하던 아일랜드계 미국인들은 3월 17일을 '해방의 날'(Evacuation Day)로 이름 붙이고, 보스턴 시를 포함한 서퍽 카운티의 공식 휴일로 지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35][36][64][65] 이날은 아일랜드의 주요 축제일인 성 패트릭의 날이기도 하다.[35][36][64][65]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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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thingham (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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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lmer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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