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덴마크 침공 (194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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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의 덴마크 침공은 1940년 4월 9일, 독일이 노르웨이 침공 작전인 베저쥐붕 작전의 일환으로 덴마크를 점령한 사건이다. 독일은 노르웨이로 향하는 철광석 수송로 확보, 노르웨이 점령을 위한 발판 마련, 그리고 영국 해군의 북쪽 우회를 막기 위해 덴마크를 침공했다. 독일군은 공수부대를 활용한 기습, 해상 상륙, 지상 공격을 통해 코펜하겐을 점령하고 덴마크 정부의 항복을 받아냈다. 덴마크는 6시간 만에 항복했으며, 독일은 비교적 관대한 점령 정책을 펼쳤다. 이 침공으로 덴마크는 2차 세계 대전 중 가장 짧은 군사 작전을 경험했으며, 덴마크군의 일부는 스웨덴으로 망명하여 저항 운동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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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0년 덴마크 - 베저위붕 작전
1940년 4월 9일 나치 독일이 철광석 수송로 확보와 영국 해군 기지 건설 저지를 목표로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침공한 베저위붕 작전은, 주요 도시 기습 점령, 해상 및 육상 전투, 노르웨이 왕실 망명, 연합군 개입을 야기하며 제2차 세계 대전 전개에 영향을 미쳤고 뉘른베르크 재판의 쟁점이 되었다. - 1940년 독일 - 삼국 동맹 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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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덴마크 침공 (1940년)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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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분쟁 명칭 | 독일의 덴마크 침공 |
다른 명칭 | 베저위붕 작전 – 남부 (Operation Weserübung – Süd, 독일어) |
일부 | 노르웨이 전역 |
날짜 | 1940년 4월 9일 (6시간) |
장소 | 덴마크 |
결과 | 독일의 승리 |
점령 | 독일, 덴마크 점령 |
영토 변경 | 독일의 확장을 막기 위해 영국, 페로 제도 점령 및 아이슬란드 점령. 그린란드, 영국, 미국, 캐나다에 점령될 가능성이 있는 상태로 남음. |
교전 세력 | |
지휘관 | |
독일 | 레온하르트 카우피슈 |
덴마크 | 크리스티안 10세 빌럼 베인 프리오르 |
병력 규모 | |
독일 | Höheres Kommando XXXI: 170 보병 사단 198 보병 사단 제11 슈첸 여단 항공기 527대 (X. Fliegerkorps 소속) |
덴마크 | 병사 14,500명 (셸란, 윌란 사단 및 보른홀름 수비대) 4개 공군 비행대대 해안 방어함 2척 어뢰정 6척 잠수함 7척 기뢰 부설함 3척 소해정 9척 검사선 4척 |
사상자 및 피해 | |
독일 | 불확실 (참조: 사상자) 포로 2명 전차 4대 손상 장갑차 12대 파괴 또는 손상 항공기 1대 손상 예인선 1척 침몰 전함 1척 좌초 |
덴마크 | 사망 16명 부상 20명 항공기 12대 파괴 항공기 14대 손상 |
2. 배경
덴마크 공격은 독일의 노르웨이 침공 계획인 베저쥐붕 작전 남부의 일부였다. 주요 목적은 나르비크에서 수송되는 철광석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노르웨이를 점령하기 위해 독일은 유틀란트(Jylland) 북부의 올보르(Ålborg) 밖 항구를 장악해야 했다.[11] 독일 해군(Kriegsmarine) 최고 사령부는 독일 해상 방어망을 북쪽으로 확장하여 대서양에서 함선을 공격할 때 영국 함선이 북쪽에서 우회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기 위해 덴마크 점령을 승인했다.[12] 노르웨이의 피오르는 또한 북대서양에서 독일 잠수함에 대한 우수한 기지 역할을 했다.[12] 독일은 이 침공을 영국의 곧 있을 공격에 대한 방어 조치로 묘사했다.[13]
전략적으로 독일에게 덴마크는 노르웨이 작전의 발판으로 중요했다. 물론 어떤 식으로든 지배해야 할 인접국이기도 했다. 발트해와의 관계에서 볼 때 덴마크의 위치는 독일과 소비에트 연방으로 향하는 항로 장악 측면에서도 중요했다. 당시 덴마크와는 불가침 조약을 맺고 있었기에 초기 작전 계획에는 덴마크 침공은 고려되지 않았으나,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의 강력한 요구에 따라 덴마크도 침공 대상이 되었다.
독일 최고 사령부는 덴마크를 가능한 한 신속하게 점령하기 위해 덴마크에 대한 복합 공격을 계획했다. 그 내용은 올보(Aalborg) 비행장에 대한 공중 공격, 코펜하겐(København) 해군 보조대에 대한 강습 상륙, 그리고 유틀란트 반도(Jylland)를 가로지르는 지상 공격 등이었다.[12] 4월 4일에는 아프베어(Abwehr) 수장인 빌헬름 카나리스(Wilhelm Canaris) 제독이 덴마크에 대한 침략이 임박했음을 경고했다.[13]
하지만 덴마크군은 방어선 구축 명령을 받지 못했다. 독일군에게 침공 명분을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1940년 4월 9일 최초의 독일군 덴마크 침공 직전, 독일 주덴마크 대사 세실 폰 렌테-핑크(Cécil von Renthe-Fink (Diplomat))는 덴마크 외무장관 피터 로체군 뮌크(Peter Rochegune Munch)에게 전화를 걸어 면담을 요청했다. 20분간의 면담 후, 렌테-핑크는 프랑스와 영국의 공격으로부터 이 나라를 보호하기 위해 현재 독일군이 덴마크로 향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렌테-핑크는 덴마크가 즉시 저항을 멈추고 덴마크 당국과 독일군 사이에 연락을 취할 것을 요구했으며, 만약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독일 공군이 수도 코펜하겐을 공습할 것이라고 말했다.
2. 1. 덴마크 침공의 동기
독일의 덴마크 침공은 베저위붕 작전의 일환으로 시작되었다. 이 작전의 주요 목적은 나르비크에서 수송되는 철광석을 확보하는 것이었다.[11] 노르웨이를 점령하기 위해 독일은 윌란반도 북부의 올보르 공항 점령이 필요했다.[11] 독일 공군 사령부는 영국 폭격기가 독일 도시를 공격할 때 북쪽에서 우회할 수 없게 만들기 위해 독일 항공 방어 시스템을 북쪽으로 연장하고자 덴마크 공격에 찬성했다.[12] 또한, 노르웨이의 피오르는 북대서양의 독일 잠수함 기지에 적합했다.[12]전략적으로 덴마크는 노르웨이 작전의 발판이자 발트해와 독일, 소비에트 연방으로 향하는 항로 장악 측면에서도 중요했다. 아돌프 히틀러의 강력한 요구에 따라 덴마크 침공이 결정되었다.
독일 최고 사령부는 올보르 비행장에 대한 공중 공격, 코펜하겐 해군 보조대에 대한 강습 상륙, 윌란반도를 가로지르는 지상 공격 등 덴마크에 대한 복합 공격을 계획했다.[12] 덴마크는 독일군에게 침공 명분을 주지 않기 위해 방어선 구축 명령을 받지 못했다.
1940년 4월 9일, 독일 주덴마크 대사 세실 폰 렌테-핑크는 덴마크 외무장관 피터 로체군 뮌크에게 독일군이 덴마크로 향하고 있다고 말하며, 덴마크의 즉각적인 저항 중단과 덴마크 당국과 독일군 사이의 연락을 요구했다.
2. 2. 독일의 침공 계획
독일 최고 사령부는 덴마크를 신속히 정복하기 위해 올보르(Ålborg)를 폭격하고, 해군의 보조로 보병이 코펜하겐(København)과 윌란반도(Jylland)를 동시에 침공하는 계획을 세웠다.[13] 아브베어(Abwehr) 수장이자 나치 독일 저항 운동에 연루되었던 빌헬름 카나리스(Wilhelm Canaris) 제독은 4월 4일 덴마크 측에 곧 있을 침공을 경고했다.[13]하지만 덴마크 정부는 독일에 공격 명분을 주지 않기 위해 방어 준비를 하지 않았다. 전략적으로 덴마크는 노르웨이 작전의 발판이자 발트해와 소련으로 향하는 항로 장악에 중요한 위치였다. 초기에는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의 강력한 요구에 따라 침공 계획에 포함되었으며, 덴마크와는 불가침 조약을 맺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침공이 결정되었다.
1940년 4월 9일, 독일 주덴마크 대사 세실 폰 렌테-핑크(Cécil von Renthe-Fink (Diplomat))는 덴마크 외무장관 피터 로체군 뮌크(Peter Rochegune Munch)에게 독일군이 덴마크로 향하고 있다고 통보하고, 저항 중단 및 독일군과의 연락을 요구했다.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독일 공군이 수도 코펜하겐을 공습할 것이라고 위협했다.
3. 전투 경과
비록 덴마크 육군이 공격을 미리 예측하고 방어 위치로 이동하고 준비하였지만 덴마크 정부는 독일에게 공격의 명분을 주고 싶지 않았다. 지상 침공은 국경 경비대와 유틀란트 반도의 소규모 부대가 흩어져 있어 공격하기에 알맞았다.[14] 덴마크 측은 공격을 예고받았지만, 덴마크 정부가 독일의 행동에 대한 어떠한 자극도 주고 싶어 하지 않았기 때문에 방어 진지를 구축하거나 병력을 배치할 허가를 받지 못했다. 국경 수비대의 소규모 분산된 부대와 쥐틀란트(Jylland) 사단의 일부만이 육상 침공에 대응할 수 있었다.
=== 유틀란트 반도 전투 ===
1940년 4월 9일 새벽 4시 15분, 독일군은 새드, 랜스, 파드보르, 크루사 등 덴마크 국경 마을을 기습 공격했다. 동시에 크릭스마리네는 릴레벨트 해협에 병력을 상륙시켜 덴마크 국경 수비대를 고립시켰다.[4] 덴마크 정부는 독일의 도발을 우려하여 제대로 된 방어 준비를 하지 않았고, 소수의 국경 수비대와 쥐틀란트 사단 병력만이 저항할 수 있었다.
하더슬레우에서는 A. 하르츠 대령 휘하의 유틀란트 사단 주둔군이 도시와 병영을 방어했다. 오전 7시 50분경, 하더슬레우 남쪽 교외에서 덴마크군 37mm 대전차포가 독일 전차 2대에 사격을 가해 궤도를 파괴하는 등 피해를 입혔으나, 덴마크 포병 2명이 전사하고 나머지는 부상당했다. 스나브로 거리에서는 20mm 포와 기관총으로 무장한 덴마크군이 저항을 계속했지만, 독일군의 집중 사격으로 1명이 사망하고 2명이 부상당했다. 이 전투는 코펜하겐에서 항복 명령이 내려올 때까지 10분간 지속되었다. 그러나 하더슬레우 주둔군은 항복 명령을 받지 못하고 독일군을 공격, 독일군 전차와 트럭을 파괴하기도 했다. 오전 8시 15분, 덴마크 주둔군에 항복 명령이 전달되면서 전투가 종료되었다. 이 과정에서 덴마크 병사 1명과 민간인 3명이 사망했다.
서유틀란트에서는 아빌과 슬루스테즈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아빌에서는 덴마크군 20mm 포가 독일 제11기갑연대의 장갑차 2대를 격파하고 독일군을 후퇴시켰다. 슬루스테즈에서는 덴마크군 대전차 부대가 20mm 포로 독일군 장갑차를 공격, 첫 번째 차량을 파괴하고 후속 차량을 저지했다. 독일 보병의 돌파 시도는 격렬한 저항에 부딪혀 실패했다. 독일 연대장은 헨셸 Hs 126 항공기의 지원을 요청, 덴마크군을 폭격 및 기총소사하여 후퇴시켰다. 덴마크군 사상자는 보고되지 않았으며, 투나 수비대가 브뢰세브뢰에 도착했을 때 항복 명령이 내려져 전투가 종료되었다.
=== 동부 ===
유틀란트 반도에서 덴마크군과 독일군 사이에 최초의 충돌이 발생했다. 덴마크 국경은 4월 9일 04시 15분에 세드(Sæd), 렌스(Rens), 파드보르(Padborg), 크루사(Krusaa)에서 돌파당했다. 동시에 크리그스마리네(Kriegsmarine)가 리틀벨트(Lillebælt)에 상륙부대를 투입함으로써, 국경에 있던 덴마크군은 전투 초기에 고립되었다.
- '''론토프트비에르''' 전투: 04:50에 2문의 20mm 포와 경기관총으로 무장한 덴마크 대전차 소대가 도로를 봉쇄하여 방어선을 구축하고, 독일군 장갑차 2대를 격파했다. 그러나 근처 헛간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독일군의 전진이 저지되었고, 결국 덴마크군은 후퇴했다. 북쪽으로 약 1.5km 떨어진 곳에서 자전거 소대가 철교 방어를 맡았으나, 장갑차와 기관총 사격으로 인한 화재로 인해 후퇴했으며, 3분의 1이 포로가 되었다. 독일군은 장갑차 2대와 오토바이 3대를 손실했고, 덴마크군은 1명이 사망하고 1명이 부상당했다.
- '''호겔롭''' 전투: 05:30에 론토프트비에르 동쪽 수 킬로미터 지점인 호게로프(Høgeløp)에서 독일군이 덴마크군이 설치한 바리케이드에 부딪혔고, 덴마크군은 장갑차 3대를 파괴하여 독일군을 후퇴하게 만들었다. 독일군은 37mm 포를 설치했지만, 덴마크군 20mm 포의 포격으로 파괴되었다. 백병전이 이어졌고, 덴마크군 1명이 사망하고 3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1명은 치명상을 입었다. 06:15에 독일군 부대가 항공 지원을 통해 덴마크군 부대를 포위하고 섬멸했다.
- '''비에르그스코우''' 전투: 론토프트 비어 북쪽 7km 지점에서 오토바이 1대와 자전거 2개 소대가 05:00경 비어그스코우(Bjægskov)에 도착했다. S. E. 클라우스(Clausøn) 중령 지휘 아래, 오토바이 부대는 20mm 포 2문으로 바리케이드를 설치했고, 나머지 소대는 숲 속에 흩어져 있었다. 06:30에 독일군 부대가 도착하여 전차는 장애물을 옆으로 밀어내고 포격했다. 전차가 그 위를 지나갈 때까지 한 정의 총이 반격했다. 20mm 포 포수는 숲으로 숨으려고 달렸지만, 독일군 항공기의 기관총 사격으로 사망했다. 다른 병사들은 오토바이로 도주하려 했지만, 독일군은 장갑차로 그들을 포위하고 포로로 잡았다. 덴마크 병사 4명이 부상했고, 독일군 장갑차 1대가 손상되었다.
=== 중부 ===
국경 북쪽 10km 지점 브뢰세바즈(Brøsevad)에서 덴마크군과 독일군의 교전이 벌어졌다. 4대의 장갑차로 이루어진 독일군 선봉대가 마을에 접근했고, 덴마크군은 오전 6시 30분에 도착했다. 방어 시설을 구축할 시간이 없어 정원에 숨었다. 소대에 배치된 기관총과 20mm 포가 경고 사격을 가했지만, 독일군은 이를 무시했다. 덴마크군은 300미터 거리에서 사격을 개시하여 선두 장갑차를 파괴했다. 치열한 소규모 교전이 이어졌고, 덴마크군은 독일군 장갑차 3대를 추가로 파괴하며 독일군 사상자 4명을 냈다. 7시 15분에, 강력한 독일군 기계화 부대가 팅글리우(Tinglille)에서 도착하여 덴마크군을 격파하고, 덴마크군은 항복했다. 덴마크군 사망자 2명, 부상자 5명이 발생했다.
오벤뢰(Aabenraa)에서 짧은 전투가 발생했다. 스코우 육군 주둔지의 덴마크군이 북쪽으로 후퇴하고, 유틀란트 사단의 주력이 전투 준비를 하며 바이레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을 때, 론트포트비에르(Røntoftbjerg) 출신의 대전차 소대가 독일 전차를 추격하여 공격했다. 독일 전차를 무력화한 후, 후위는 크니우스비에르(Knisiusbjerg)로 돌아갔다. 그들은 독일군 항공기 공격으로 1명이 사망하고 3명이 부상을 입었다. 그 후 스투벡스코우(Stubekskov)의 자전거 소대와 합류했다. 그 후 덴마크 지휘관은 하젤뢰(Hasselø) 북쪽으로 후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 서부 ===
서유틀란드에서의 첫 번째 전투는 아빌과 슬루스테즈에 파견된 투나 수비대와의 전투였다. 아빌에서는 덴마크군의 20mm 포 사수들이 독일 제11기갑연대의 독일 장갑차 2대를 격파했고, 독일군은 후퇴했다. 슬루스테즈에서는 50명 미만의 병력으로 구성된 덴마크군 대전차 부대가 도로 위에 20mm 포를 설치한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독일 제11기갑연대 부대가 접근했을 때, 첫 번째 독일 장갑차가 사정거리 안에 들어오자마자 덴마크군은 포격을 가했다. 첫 번째 차량은 격파되어 도랑에 빠졌고, 다음 차량은 전진을 계속했지만 피탄되어 후퇴했다. 그 후에도 피탄되었지만 완전히 격파되지는 않고 반격할 수 있는 상태였다. 독일군 보병은 덴마크군 진지를 두 차례 돌파하려 했지만, 두 시도 모두 격렬한 저항에 부딪혀 막혔다. 공격이 실패하자 독일 연대장은 지원을 무선으로 요청했다. 그 요청을 받고 헨셸 Hs 126 항공기가 출격하여 덴마크군 사령관이 후퇴 명령을 내릴 때까지 덴마크군을 폭격하고 기총소사했다. 그러나 이래도 덴마크군의 사상자는 보고되지 않았다. 투나 수비대 병사들이 브뢰세브뢰에 도착했을 때, 항복 명령이 내려졌고 전투는 끝났다.
=== 공수 상륙 ===
독일군은 세계 최초로 낙하산병을 이용한 대규모 공수 작전을 감행했다.[24] 05시경, 융커스 Ju 52 9대에서 강습한 팔시름예거 대원 96명이 셸란섬의 팔르스테르와 마네되 섬 해안 요새를 잇는 스토르스퇴름 다리로 강하했다.[24] 독일군은 요새 주변에서 큰 전투가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팔시름예거들이 요새에는 사병 2명과 장교 1명만 있는 것을 보고 놀랬다.[25] 이 다리를 점령하면서 독일 198 보병 사단이 육지를 통해 코펜하겐으로 진격할 길을 확보했다.[25]
75분 후, 낙하산병 수백명이 올보르에 도착하면서 베저위붕 쉬드 작전에서 주요 군사 목표 및 북부 유틀란트 반도의 주요 도시를 점령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목표인 올보르 비행장을 점령했다.[26] 이 점령 작전은 노르웨이 침공을 위한 주요 발판으로 계획되었다.[26] 팔시름예거는 1시간 이내에 모든 저항을 불식시켰고, 엄청난 수의 독일군 비행기들이 올보르 비행장으로 착률하기 시작했다. 첫날에만 200번 이상의 이착륙이 있었으며, 이들 대부분은 노르웨이 오슬로 포르네부 국제공항으로 병력 및 연료를 운반시키는 데 사용했다.[26]
=== 해상 상륙 ===
독일 해군은 제198보병사단의 병력을 퓐 섬에 상륙시켰다. 이와 동시에 전함 슐레스비히-홀슈타인호의 지원을 받은 병력이 코르쇠르와 뉘보르에 상륙하여 퓐 섬과 셸란섬 사이의 연결을 차단했다. 코르쇠르에 상륙한 병력은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고 정오에 코펜하겐에 도착했다.

3시 55분, 독일군은 바르네뮌데에서 출발한 현지 페리를 이용하여 덴마크 최남단 도시인 게드세르를 기습 공격했다. 병사들은 내륙으로 몰려들어 전화선을 절단했고, 장갑차와 오토바이가 뒤따라 신속하게 진격하여 낙하산부대와 함께 스토르스트룀 다리를 점령했다.
=== 코펜하겐 점령 ===
현지 시각 4시 20분, 독일군 보병 1000명이 기뢰부설함 한자타트 단치히에서 코펜하겐 항구에 상륙하여 저항 없이 요새화된 덴마크군 주둔지를 신속하게 점령했다.[1] 또한 덴마크 왕족 구금을 위해 독일군은 항구에서 아말리엔보르 궁전으로 향했다. 독일군이 도착했을 때, 덴마크 근위대는 이미 경계 태세를 갖추고 있었고, 다른 증원 부대도 이동 중이었다. 아말리엔보르 궁전에 대한 독일군의 첫 공격은 격퇴되었고, 크리스티안 10세 국왕과 장관들은 육군 사령관 빌헬름 하인리히 폰 프뢰(Vilhelm Hejnrich Prytz)와 협의할 시간을 얻었다.[1]
협의 중, He111과 Do 17 편대 여러 개가 도시 상공을 비행하며 OPROP! 전단을 투하했다. 코펜하겐 시민에 대한 폭격의 위험에 직면하여 전투를 계속하는 데 찬성한 것은 프뢰 장군뿐이었고, 8시 34분에 국내 문제에 대한 정치적 독립 유지를 조건으로 크리스티안 10세와 덴마크 정부는 전면 항복했다. 덴마크는 망명 정부를 구성하지 않았기 때문에 연합군에 일부 영토를 점령당했다(아이슬란드).[1]



=== 아말리엔보르 궁 전투와 덴마크의 항복 ===

아말리엔보르 궁에 도착한 독일 보병은 덴마크 국왕 근위대의 근무 중인 중대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했다. 초기 공격은 격퇴되었고, 근위병 3명과 독일군 4명이 부상을 입었다. 그러자 로젠보르그 막사에서 덴마크 증원군이 여러 마드센 기관총을 가지고 신속하게 도착하면서 상황은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이어 아말리엔보르 주변에서 격렬한 시가전이 벌어졌고, 특히 브레드가데에서 치열한 충돌이 발생하여 독일군의 진격을 완전히 멈추게 했다.[1]
국왕 근위대의 완강한 저항 덕분에 크리스티안 10세 국왕과 그의 장관들은 덴마크 육군 총사령관 프라이어 장군과 협의할 시간을 벌었다. 논의가 진행되는 동안, ''제4 전투비행단'' 소속의 하인켈 He 111과 도르니어 Do 17 폭격기 여러 편대가 도시 상공을 굉음을 내며 선회하며 OPROP! 전단을 뿌렸다. 코펜하겐 시민들을 ''루프트바페''가 폭격할 것이라는 명백한 위협에 직면하여, 프라이어 장군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항복에 찬성했다. 항복을 주장한 이유는 덴마크의 군사적 입지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덴마크의 땅과 인구는 독일군에 대해 장기간 버틸 만큼 크지 않았고, 평평한 지형은 독일군 전차에 의해 쉽게 점령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쥐틀란트(이웃 땅)는 남쪽의 슐레스비히-홀슈타인에서 전차 공격에 취약했다.) 노르웨이와 달리 덴마크에는 장기간 저항을 펼칠 수 있는 산맥이 없었다. 덴마크 정부는 06:00에 휴전을 명령했고, 내정에 대한 정치적 독립을 유지하는 대신 08:34에 공식적으로 항복했다.
=== 덴마크 공군 기지 공격 ===
독일 공군(Luftwaffe) 항공기가 1940년 4월 9일 새벽 5시 25분에 덴마크 육군 항공대의 4개 비행대대가 주둔하고 있던 베를뢰세 기지 상공에 나타났다. 독일의 침공을 예상하고 전국 각지의 비행장으로 분산 배치할 준비를 했지만, 독일 공군의 공격으로 완료되지 못했다.

독일 항공기가 베를뢰세에 도착했을 때, 폭커 C.V-E 정찰기 1대가 이륙을 시도했지만, 볼프강 팔크가 조종하는 메서슈미트 Bf 110에 의해 고도 50미터에서 격추되어 승무원 2명 모두 사망했다. 이후 독일 Bf 110들은 강한 대공포 사격 속에서 기지를 기총소사하여 이륙을 위해 활주로를 이동 중이던 덴마크 육군 항공대의 항공기 11대를 파괴하고 14대를 심하게 손상시켜 단 한 번의 공격으로 대부분을 무력화시켰다. 덴마크 해군 항공대는 자체 기지에 남아 피해를 입지 않았다.
=== 덴마크군의 저항과 항복 ===
덴마크 육군은 공격을 예측하고 방어 태세를 갖추었지만, 덴마크 정부는 독일에 공격 명분을 주지 않기 위해 적극적인 대응을 자제했다. 덴마크 국경 경비대와 유틀란트 반도의 소규모 부대들이 분산 배치되어 독일군의 공격에 취약했다.[14]
대부분의 덴마크 군대는 항복 명령에 따랐으나, 뢰스킬러(Roskilde)에 주둔한 제4연대장 헬게 베니케(Helge Bennike) 대령은 항복 명령이 독일군에 의해 강요된 것이며 스웨덴도 공격받았다고 믿고 휘하 부대를 이끌고 스웨덴으로 망명했다. 오해가 풀린 후에도 많은 덴마크 군인들은 스웨덴에 남아 1943년 스웨덴 주둔 덴마크 여단(Danish Brigade in Sweden)의 핵심 전력이 되었다.
하더슬레우(Haderslev)에서는 유틀란트 사단(Jydske Division)이 A. 하르츠(A. Harts) 대령의 지휘 아래 도시의 병영과 도로를 방어하고 있었다. 오전 7시 50분경, 하더슬레우 남쪽 교외에서 덴마크군 37mm 대전차포가 접근하는 독일군 전차 2대를 공격하여, 덴마크군 포병 2명이 사망하고 나머지는 부상당했다. 스나브로(Snabbrød) 거리에서는 덴마크군의 20mm 포와 기관총이 저항을 계속했으나, 코펜하겐으로부터 전화로 항복 명령을 받으면서 전투는 10분 만에 종료되었다.
독일군은 하더슬레우로 진군했으나, 주둔군은 항복 명령을 받지 못하고 공격을 계속했다. 론트포트비에르(Rønloftbjerg)의 대전차 부대는 독일군 전차와 오토바이를 공격하여 피해를 입혔으나, 결국 오전 8시 15분에 항복 명령을 받고 전투를 중단했다. 이 과정에서 덴마크 병사 1명과 민간인 3명이 사망했다.
3. 1. 유틀란트 반도 전투
1940년 4월 9일 새벽 4시 15분, 독일군은 새드, 랜스, 파드보르, 크루사 등 덴마크 국경 마을을 기습 공격했다. 동시에 크릭스마리네는 릴레벨트 해협에 병력을 상륙시켜 덴마크 국경 수비대를 고립시켰다.[4] 덴마크 정부는 독일의 도발을 우려하여 제대로 된 방어 준비를 하지 않았고, 소수의 국경 수비대와 쥐틀란트 사단 병력만이 저항할 수 있었다.하더슬레우에서는 A. 하르츠 대령 휘하의 유틀란트 사단 주둔군이 도시와 병영을 방어했다. 오전 7시 50분경, 하더슬레우 남쪽 교외에서 덴마크군 37mm 대전차포가 독일 전차 2대에 사격을 가해 궤도를 파괴하는 등 피해를 입혔으나, 덴마크 포병 2명이 전사하고 나머지는 부상당했다. 스나브로 거리에서는 20mm 포와 기관총으로 무장한 덴마크군이 저항을 계속했지만, 독일군의 집중 사격으로 1명이 사망하고 2명이 부상당했다. 이 전투는 코펜하겐에서 항복 명령이 내려올 때까지 10분간 지속되었다. 그러나 하더슬레우 주둔군은 항복 명령을 받지 못하고 독일군을 공격, 독일군 전차와 트럭을 파괴하기도 했다. 오전 8시 15분, 덴마크 주둔군에 항복 명령이 전달되면서 전투가 종료되었다. 이 과정에서 덴마크 병사 1명과 민간인 3명이 사망했다.
서유틀란트에서는 아빌과 슬루스테즈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아빌에서는 덴마크군 20mm 포가 독일 제11기갑연대의 장갑차 2대를 격파하고 독일군을 후퇴시켰다. 슬루스테즈에서는 덴마크군 대전차 부대가 20mm 포로 독일군 장갑차를 공격, 첫 번째 차량을 파괴하고 후속 차량을 저지했다. 독일 보병의 돌파 시도는 격렬한 저항에 부딪혀 실패했다. 독일 연대장은 헨셸 Hs 126 항공기의 지원을 요청, 덴마크군을 폭격 및 기총소사하여 후퇴시켰다. 덴마크군 사상자는 보고되지 않았으며, 투나 수비대가 브뢰세브뢰에 도착했을 때 항복 명령이 내려져 전투가 종료되었다.
3. 1. 1. 동부
유틀란트 반도에서 덴마크군과 독일군 사이에 최초의 충돌이 발생했다. 덴마크 국경은 4월 9일 04시 15분에 세드(Sæd), 렌스(Rens), 파드보르(Padborg), 크루사(Krusaa)에서 돌파당했다. 동시에 크리그스마리네(Kriegsmarine)가 리틀벨트(Lillebælt)에 상륙부대를 투입함으로써, 국경에 있던 덴마크군은 전투 초기에 고립되었다. 04시 17분에 경보가 발령되었고, 최초의 덴마크군은 04시 35분에 파견되었다.
- '''론토프트비에르''' 전투: 04:50에 2문의 20mm 포와 경기관총으로 무장한 덴마크 대전차 소대가 도로를 봉쇄하여 방어선을 구축하고, 독일군 장갑차 2대를 격파했다. 그러나 근처 헛간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독일군의 전진이 저지되었고, 결국 덴마크군은 후퇴했다. 북쪽으로 약 1.5km 떨어진 곳에서 자전거 소대가 철교 방어를 맡았으나, 장갑차와 기관총 사격으로 인한 화재로 인해 후퇴했으며, 3분의 1이 포로가 되었다. 독일군은 장갑차 2대와 오토바이 3대를 손실했고, 덴마크군은 1명이 사망하고 1명이 부상당했다.
- '''호겔롭''' 전투: 05:30에 론토프트비에르 동쪽 수 킬로미터 지점인 호게로프(Høgeløp)에서 독일군이 덴마크군이 설치한 바리케이드에 부딪혔고, 덴마크군은 장갑차 3대를 파괴하여 독일군을 후퇴하게 만들었다. 독일군은 37mm 포를 설치했지만, 덴마크군 20mm 포의 포격으로 파괴되었다. 백병전이 이어졌고, 덴마크군 1명이 사망하고 3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1명은 치명상을 입었다. 06:15에 독일군 부대가 항공 지원을 통해 덴마크군 부대를 포위하고 섬멸했다.
- '''비에르그스코우''' 전투: 론토프트 비어 북쪽 7km 지점에서 오토바이 1대와 자전거 2개 소대가 05:00경 비어그스코우(Bjægskov)에 도착했다. S. E. 클라우스(Clausøn) 중령 지휘 아래, 오토바이 부대는 20mm 포 2문으로 바리케이드를 설치했고, 나머지 소대는 숲 속에 흩어져 있었다. 06:30에 독일군 부대가 도착하여 전차는 장애물을 옆으로 밀어내고 포격했다. 전차가 그 위를 지나갈 때까지 한 정의 총이 반격했다. 20mm 포 포수는 숲으로 숨으려고 달렸지만, 독일군 항공기의 기관총 사격으로 사망했다. 다른 병사들은 오토바이로 도주하려 했지만, 독일군은 장갑차로 그들을 포위하고 포로로 잡았다. 덴마크 병사 4명이 부상했고, 독일군 장갑차 1대가 손상되었다.
3. 1. 2. 중부
국경 북쪽 10km 지점 브뢰세바즈(Brøsevad)에서 덴마크군과 독일군의 교전이 벌어졌다. 4대의 장갑차로 이루어진 독일군 선봉대가 마을에 접근했고, 덴마크군은 오전 6시 30분에 도착했다. 방어 시설을 구축할 시간이 없어 정원에 숨었다. 소대에 배치된 기관총과 20mm 포가 경고 사격을 가했지만, 독일군은 이를 무시했다. 덴마크군은 300미터 거리에서 사격을 개시하여 선두 장갑차를 파괴했다. 치열한 소규모 교전이 이어졌고, 덴마크군은 독일군 장갑차 3대를 추가로 파괴하며 독일군 사상자 4명을 냈다. 7시 15분에, 강력한 독일군 기계화 부대가 팅글리우(Tinglille)에서 도착하여 덴마크군을 격파하고, 덴마크군은 항복했다. 덴마크군 사망자 2명, 부상자 5명이 발생했다.오벤뢰(Aabenraa)에서 짧은 전투가 발생했다. 스코우 육군 주둔지의 덴마크군이 북쪽으로 후퇴하고, 유틀란트 사단의 주력이 전투 준비를 하며 바이레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을 때, 론트포트비에르(Røntoftbjerg) 출신의 대전차 소대가 독일 전차를 추격하여 공격했다. 독일 전차를 무력화한 후, 후위는 크니우스비에르(Knisiusbjerg)로 돌아갔다. 그들은 독일군 항공기 공격으로 1명이 사망하고 3명이 부상을 입었다. 그 후 스투벡스코우(Stubekskov)의 자전거 소대와 합류했다. 그 후 덴마크 지휘관은 하젤뢰(Hasselø) 북쪽으로 후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3. 1. 3. 서부
서유틀란드에서의 첫 번째 전투는 아빌과 슬루스테즈에 파견된 투나 수비대와의 전투였다. 아빌에서는 덴마크군의 20mm 포 사수들이 독일 제11기갑연대의 독일 장갑차 2대를 격파했고, 독일군은 후퇴했다. 슬루스테즈에서는 50명 미만의 병력으로 구성된 덴마크군 대전차 부대가 도로 위에 20mm 포를 설치한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독일 제11기갑연대 부대가 접근했을 때, 첫 번째 독일 장갑차가 사정거리 안에 들어오자마자 덴마크군은 포격을 가했다. 첫 번째 차량은 격파되어 도랑에 빠졌고, 다음 차량은 전진을 계속했지만 피탄되어 후퇴했다. 그 후에도 피탄되었지만 완전히 격파되지는 않고 반격할 수 있는 상태였다. 독일군 보병은 덴마크군 진지를 두 차례 돌파하려 했지만, 두 시도 모두 격렬한 저항에 부딪혀 막혔다. 공격이 실패하자 독일 연대장은 지원을 무선으로 요청했다. 그 요청을 받고 헨셸 Hs 126 항공기가 출격하여 덴마크군 사령관이 후퇴 명령을 내릴 때까지 덴마크군을 폭격하고 기총소사했다. 그러나 이래도 덴마크군의 사상자는 보고되지 않았다. 투나 수비대 병사들이 브뢰세브뢰에 도착했을 때, 항복 명령이 내려졌고 전투는 끝났다.3. 2. 공수 상륙
독일군은 세계 최초로 낙하산병을 이용한 대규모 공수 작전을 감행했다.[24] 05시경, 융커스 Ju 52 9대에서 강습한 팔시름예거 대원 96명이 셸란섬의 팔르스테르와 마네되 섬 해안 요새를 잇는 스토르스퇴름 다리로 강하했다.[24] 독일군은 요새 주변에서 큰 전투가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팔시름예거들이 요새에는 사병 2명과 장교 1명만 있는 것을 보고 놀랬다.[25] 이 다리를 점령하면서 독일 198 보병 사단이 육지를 통해 코펜하겐으로 진격할 길을 확보했다.[25]75분 후, 낙하산병 수백명이 올보르에 도착하면서 베저위붕 쉬드 작전에서 주요 군사 목표 및 북부 유틀란트 반도의 주요 도시를 점령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목표인 올보르 비행장을 점령했다.[26] 이 점령 작전은 노르웨이 침공을 위한 주요 발판으로 계획되었다.[26] 팔시름예거는 1시간 이내에 모든 저항을 불식시켰고, 엄청난 수의 독일군 비행기들이 올보르 비행장으로 착률하기 시작했다. 첫날에만 200번 이상의 이착륙이 있었으며, 이들 대부분은 노르웨이 오슬로 포르네부 국제공항으로 병력 및 연료를 운반시키는 데 사용했다.[26]
3. 3. 해상 상륙
독일 해군은 제198보병사단의 병력을 퓐 섬에 상륙시켰다. 이와 동시에 전함 슐레스비히-홀슈타인호의 지원을 받은 병력이 코르쇠르와 뉘보르에 상륙하여 퓐 섬과 셸란섬 사이의 연결을 차단했다. 코르쇠르에 상륙한 병력은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고 정오에 코펜하겐에 도착했다.3시 55분, 독일군은 바르네뮌데에서 출발한 현지 페리를 이용하여 덴마크 최남단 도시인 게드세르를 기습 공격했다. 병사들은 내륙으로 몰려들어 전화선을 절단했고, 장갑차와 오토바이가 뒤따라 신속하게 진격하여 낙하산부대와 함께 스토르스트룀 다리를 점령했다.
3. 4. 코펜하겐 점령
현지 시각 4시 20분, 독일군 보병 1000명이 기뢰부설함 한자타트 단치히에서 코펜하겐 항구에 상륙하여 저항 없이 요새화된 덴마크군 주둔지를 신속하게 점령했다.[1] 또한 덴마크 왕족 구금을 위해 독일군은 항구에서 아말리엔보르 궁전으로 향했다. 독일군이 도착했을 때, 덴마크 근위대는 이미 경계 태세를 갖추고 있었고, 다른 증원 부대도 이동 중이었다. 아말리엔보르 궁전에 대한 독일군의 첫 공격은 격퇴되었고, 크리스티안 10세 국왕과 장관들은 육군 사령관 빌헬름 하인리히 폰 프뢰(Vilhelm Hejnrich Prytz)와 협의할 시간을 얻었다.[1]협의 중, He111과 Do 17 편대 여러 개가 도시 상공을 비행하며 OPROP! 전단을 투하했다. 코펜하겐 시민에 대한 폭격의 위험에 직면하여 전투를 계속하는 데 찬성한 것은 프뢰 장군뿐이었고, 8시 34분에 국내 문제에 대한 정치적 독립 유지를 조건으로 크리스티안 10세와 덴마크 정부는 전면 항복했다. 덴마크는 망명 정부를 구성하지 않았기 때문에 연합군에 일부 영토를 점령당했다(아이슬란드).[1]
3. 4. 1. 아말리엔보르 궁 전투와 덴마크의 항복
아말리엔보르 궁에 도착한 독일 보병은 덴마크 국왕 근위대의 근무 중인 중대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했다. 초기 공격은 격퇴되었고, 근위병 3명과 독일군 4명이 부상을 입었다. 그러자 로젠보르그 막사에서 덴마크 증원군이 여러 마드센 기관총을 가지고 신속하게 도착하면서 상황은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이어 아말리엔보르 주변에서 격렬한 시가전이 벌어졌고, 특히 브레드가데에서 치열한 충돌이 발생하여 독일군의 진격을 완전히 멈추게 했다.[1]
국왕 근위대의 완강한 저항 덕분에 크리스티안 10세 국왕과 그의 장관들은 덴마크 육군 총사령관 프라이어 장군과 협의할 시간을 벌었다. 논의가 진행되는 동안, ''제4 전투비행단'' 소속의 하인켈 He 111과 도르니어 Do 17 폭격기 여러 편대가 도시 상공을 굉음을 내며 선회하며 OPROP! 전단을 뿌렸다. 코펜하겐 시민들을 ''루프트바페''가 폭격할 것이라는 명백한 위협에 직면하여, 프라이어 장군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항복에 찬성했다. 항복을 주장한 이유는 덴마크의 군사적 입지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덴마크의 땅과 인구는 독일군에 대해 장기간 버틸 만큼 크지 않았고, 평평한 지형은 독일군 전차에 의해 쉽게 점령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쥐틀란트(이웃 땅)는 남쪽의 슐레스비히-홀슈타인에서 전차 공격에 취약했다.) 노르웨이와 달리 덴마크에는 장기간 저항을 펼칠 수 있는 산맥이 없었다. 덴마크 정부는 06:00에 휴전을 명령했고, 내정에 대한 정치적 독립을 유지하는 대신 08:34에 공식적으로 항복했다.
3. 5. 덴마크 공군 기지 공격
독일 공군(Luftwaffe) 항공기가 1940년 4월 9일 새벽 5시 25분에 덴마크 육군 항공대의 4개 비행대대가 주둔하고 있던 베를뢰세 기지 상공에 나타났다. 독일의 침공을 예상하고 전국 각지의 비행장으로 분산 배치할 준비를 했지만, 독일 공군의 공격으로 완료되지 못했다.독일 항공기가 베를뢰세에 도착했을 때, 폭커 C.V-E 정찰기 1대가 이륙을 시도했지만, 볼프강 팔크가 조종하는 메서슈미트 Bf 110에 의해 고도 50미터에서 격추되어 승무원 2명 모두 사망했다. 이후 독일 Bf 110들은 강한 대공포 사격 속에서 기지를 기총소사하여 이륙을 위해 활주로를 이동 중이던 덴마크 육군 항공대의 항공기 11대를 파괴하고 14대를 심하게 손상시켜 단 한 번의 공격으로 대부분을 무력화시켰다. 덴마크 해군 항공대는 자체 기지에 남아 피해를 입지 않았다.
3. 6. 덴마크군의 저항과 항복
덴마크 육군은 공격을 예측하고 방어 태세를 갖추었지만, 덴마크 정부는 독일에 공격 명분을 주지 않기 위해 적극적인 대응을 자제했다. 덴마크 국경 경비대와 유틀란트 반도의 소규모 부대들이 분산 배치되어 독일군의 공격에 취약했다.[14]대부분의 덴마크 군대는 항복 명령에 따랐으나, 뢰스킬러(Roskilde)에 주둔한 제4연대장 헬게 베니케(Helge Bennike) 대령은 항복 명령이 독일군에 의해 강요된 것이며 스웨덴도 공격받았다고 믿고 휘하 부대를 이끌고 스웨덴으로 망명했다. 오해가 풀린 후에도 많은 덴마크 군인들은 스웨덴에 남아 1943년 스웨덴 주둔 덴마크 여단(Danish Brigade in Sweden)의 핵심 전력이 되었다.
하더슬레우(Haderslev)에서는 유틀란트 사단(Jydske Division)이 A. 하르츠(A. Harts) 대령의 지휘 아래 도시의 병영과 도로를 방어하고 있었다. 오전 7시 50분경, 하더슬레우 남쪽 교외에서 덴마크군 37mm 대전차포가 접근하는 독일군 전차 2대를 공격하여, 덴마크군 포병 2명이 사망하고 나머지는 부상당했다. 스나브로(Snabbrød) 거리에서는 덴마크군의 20mm 포와 기관총이 저항을 계속했으나, 코펜하겐으로부터 전화로 항복 명령을 받으면서 전투는 10분 만에 종료되었다.
독일군은 하더슬레우로 진군했으나, 주둔군은 항복 명령을 받지 못하고 공격을 계속했다. 론트포트비에르(Rønloftbjerg)의 대전차 부대는 독일군 전차와 오토바이를 공격하여 피해를 입혔으나, 결국 오전 8시 15분에 항복 명령을 받고 전투를 중단했다. 이 과정에서 덴마크 병사 1명과 민간인 3명이 사망했다.
4. 결과 및 영향
덴마크 침공은 6시간 만에 종료되었으며, 이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가장 짧은 군사 작전 중 하나로 기록된다. 덴마크는 빠르게 항복하였고, 그 결과 독일은 비교적 관대한 점령 정책을 시행하였다. 덴마크 왕립 육군은 침공 이후 크게 축소되어 3,300명 규모의 "근위대" 부대만 남게 되었다.
독일 최고 사령부는 선전 목적으로 덴마크 침공을 평화적인 것으로 묘사하려 했고, 덴마크가 저항하지 않았다고 믿게 하려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양측 모두 사상자가 발생했다. 카이 소렌 닐센(Kay Søren Nielsen)은 덴마크 무기 제조업체 DISA의 기록 보관소를 근거로 203명의 독일군이 유틀란트에서 사망했다고 주장했지만, 이 수치는 많은 역사가들에 의해 과장된 것으로 여겨진다. 군사 역사 저널 ''Krigshistorisk Tidsskrift''에 따르면, 독일군 사상자는 2~3명 사망, 25~30명 부상이었고, 덴마크군은 16명 사망, 20명 부상이 확인되었다. 민간인 저항군의 사상자는 확실하지 않지만, 10명 사망, 3명 부상으로 추정된다. 군사 역사가 데이비드 T. 자베츠키(David T. Zabecki)는 덴마크가 49명(사망 26명, 부상 23명)의 사상자를 냈고, 20명의 독일군이 사망하거나 부상당했다고 언급한다. 전선에서의 사상자 외에도, 몇몇 항공기가 격추되거나 추락했고, 독일 선박과 충돌한 후 예인선이 그레이트 벨트에서 침몰했으며, 독일 전함 ''슐레스비히-홀슈타인''(Schleswig-Holstein)은 아게르쇠 서쪽에서 일시적으로 좌초되었다.
덴마크 군인들은 그날 오후 무장 해제되었고, 포로로 잡힌 군인들은 부대로 돌아갈 수 있었다. 다음 날, 본홀름 섬이 아무런 사건 없이 점령되었다. 많은 덴마크 상선들이 갑작스럽고 빠른 침공 이후 해외에서 붙잡혔다. 이러한 선박 중 약 240척은 연합군 상선대에 편입되었고, 덴마크 항구에 남아 있던 선박들은 철광석 운송에 독일군을 위해 일했다. 소수의 덴마크 군인과 조종사들은 영국으로 탈출하여 RAF 또는 SOE에서 복무했다.
덴마크의 평화로운 점령이 보고된 후, 연합국의 덴마크에 대한 시각은 경멸적인 것이었다. 한 권투 해설자가 1라운드 KO에 대해 "싸우지 않고 — 덴마크인처럼"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 이후로 덴마크인들은 "Aldrig mere 9 Aprilda" (결코 다시 4월 9일은 없다)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로스킬레 제4연대장 헬게 베니케(Helge Bennike) 대령는 항복 명령이 독일군에 의해 정부에 강요되었고, 스웨덴도 공격받았다고 믿었다. 베니케와 그의 부대는 엘시노어의 페리를 타고 스웨덴으로 망명했다. 나중에 오해가 풀렸을 때, 덴마크 병사 대부분은 스웨덴에 머물렀고, 1943년 스웨덴의 덴마크 여단의 핵심을 형성하게 되었다.
5. 덴마크 침공에 대한 한국의 관점
6. 관련 작품
4월의 병사들: 나치의 북유럽 침공(로니 에즈라(Ronny Ezrah) 감독, 2015년, 덴마크)은 덴마크에서 제작된 영화이다.
참조
[1]
웹사이트
9. April 1940 – Nilausens minder fra A-borg
https://www.garderfo[...]
[2]
서적
Dildy 2007
[3]
서적
Dildy 2007
[4]
웹사이트
The German occupation of Denmark
http://www.milhist.d[...]
2013-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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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ldy 2007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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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ldy 2007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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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oton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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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oton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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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oton 2007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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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ldy 2007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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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ndeberg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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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ldy 2007
[15]
서적
Lindebe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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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ndebe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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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ndebe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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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ndebe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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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ndeberg
[20]
웹사이트
http://www.dr.dk/Reg[...]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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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ndebe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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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ndebe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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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ndeberg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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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ndeberg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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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ldy 2007
[26]
서적
Lindebe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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