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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문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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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대문교회는 1887년 동대문부인진료소 설립으로 시작되어, 1891년 윌리엄 스크랜튼 목사가 기도처를 시작하며 교회로서의 기능을 수행했다. 이후 예배실 건립, 학교 개설 등 교육 사업을 병행했으며, 일제강점기에는 민족말살정책으로 인해 학교가 폐교되는 시련을 겪었다. 해방 후 부흥회를 개최하며 교회 분위기를 쇄신했고, 청소년 직업 교육에도 힘썼다. 2014년 한양도성 복원 사업으로 인해 건물이 철거되었고, 이후 교회 이전 및 존치를 둘러싼 갈등으로 인해 신도들이 분열되어, 일부는 분당으로 이전하고 일부는 동대문 일대에 남아서 예배를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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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문교회

2. 역사

1887년 동대문부인진료소 설립으로 시작되었다. 1891년 윌리엄 스크랜튼 목사가 동대문부인진료소 내 기도처를 시작하며 교회로서의 기능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1892년 예배실을 건립하고 볼드윈 매일여학교를 개설하여 교육 사업을 시작했다. 1900년 흥인배재학교를 개설하여 남자 아이들을 위한 교육도 실시하였다. 1906년 볼드윈 매일여학교가 동대문여자보통학교로 승인받았다. 1909년 새 예배당을 착공하였으며, 1910년 동대문부인성경학원을 개설하여 성경 교육을 강화했다.

1918년 흥인배재학교에서 동대문유치원을 분립하여 유아 교육을 시작했다. 1920년 엡웟청년회를 결성하여 청년 활동을 지원했다. 1942년 동대문여자보통학교가 폐교되고, 동구여자상업전수학교가 설립되었다. 1944년 흥인배재학교가 폐교되었다. 이는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의 일환으로, 한국의 교육 기관을 탄압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일이었다. 1945년 해방 후 최초의 부흥회를 개최하며, 침체되었던 교회 분위기를 쇄신하고 신앙 부흥을 이끌었다. 부흥회 강사는 김응조 목사였다.

1945년 해방 이후 최초로 김응조 목사를 강사로 초빙하여 부흥회를 개최하였다. 1970년에는 어려운 환경에 있는 청소년들에게 직업 교육을 제공하기 위해 동대문직업소년학교를 개설하였다. 1973년에는 흥인지문 근처에 새 예배당을 완공하였다.

2014년 서울특별시한양도성 복원 및 동대문성곽공원 조성 사업으로 인해 동대문교회 건물이 철거되었다.[3][5] 이화여자대학교 동대문병원 부지가 서울시에 매각되면서 동대문성곽공원 조성 시 동대문교회 부지가 편입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서기종 목사는 토지 보상금 200억원으로 광교신도시에 새 교회를 짓기로 결정했다가[4] 출교되었으나, 법원 판결로 목사직을 되찾았다. 이 과정에서 교회 이전 문제를 두고 갈등이 심화되었고 광교 이전은 취소되었다.

교회 건물을 지키려는 신도들은 '동대문보존교회'를 만들어 예배를 이어갔고, 철거 이후에는 '동대문천막교회'를 열어 2016년 1월까지 구 동대문교회 주변에서 예배를 열었다.[5]

서기종 목사를 따르는 신도들은 분당새롬교회와 통합하여 분당 동대문교회로 이전했다. 한편, 동대문교회 잔류 신도들은 동대문남은자교회로 활동하다가 2020년 흥인문교회에 합류하여 동대문교회로 명칭을 변경했다.[6]

2. 1. 설립 초기 (1887년 ~ 1910년)

1887년 동대문부인진료소 설립으로 시작되었다. 1891년 윌리엄 스크랜튼 목사가 동대문부인진료소 내 기도처를 시작하며 교회로서의 기능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1892년 예배실을 건립하고 볼드윈 매일여학교를 개설하여 교육 사업을 시작했다. 1900년 흥인배재학교를 개설하여 남자 아이들을 위한 교육도 실시하였다. 1906년 볼드윈 매일여학교가 동대문여자보통학교로 승인받았다. 1909년 새 예배당을 착공하였으며,1910년 동대문부인성경학원을 개설하여 성경 교육을 강화했다.

2. 2. 일제강점기 (1910년 ~ 1945년)

1918년 흥인배재학교에서 동대문유치원을 분립하여 유아 교육을 시작했다. 1920년 엡웟청년회를 결성하여 청년 활동을 지원했다. 1942년 동대문여자보통학교가 폐교되고, 동구여자상업전수학교가 설립되었다. 1944년 흥인배재학교가 폐교되었다. 이는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의 일환으로, 한국의 교육 기관을 탄압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일이었다. 1945년 해방 후 최초의 부흥회를 개최하며, 침체되었던 교회 분위기를 쇄신하고 신앙 부흥을 이끌었다. 부흥회 강사는 김응조 목사였다.

2. 3. 해방 이후 (1945년 ~ 2014년)

1945년 해방 이후 최초로 김응조 목사를 강사로 초빙하여 부흥회를 개최하였다. 1970년에는 어려운 환경에 있는 청소년들에게 직업 교육을 제공하기 위해 동대문직업소년학교를 개설하였다. 1973년에는 흥인지문 근처에 새 예배당을 완공하였다.

2. 4. 철거와 분열 (2014년 이후)

2014년 서울특별시한양도성 복원 및 동대문성곽공원 조성 사업으로 인해 동대문교회 건물이 철거되었다.[3][5] 이화여자대학교 동대문병원 부지가 서울시에 매각되면서 동대문성곽공원 조성 시 동대문교회 부지가 편입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서기종 목사는 토지 보상금 200억원으로 광교신도시에 새 교회를 짓기로 결정했다가[4] 출교되었으나, 법원 판결로 목사직을 되찾았다. 이 과정에서 교회 이전 문제를 두고 갈등이 심화되었고 광교 이전은 취소되었다.

교회 건물을 지키려는 신도들은 '동대문보존교회'를 만들어 예배를 이어갔고, 철거 이후에는 '동대문천막교회'를 열어 2016년 1월까지 구 동대문교회 주변에서 예배를 열었다.[5]

서기종 목사를 따르는 신도들은 분당새롬교회와 통합하여 분당 동대문교회로 이전했다. 한편, 동대문교회 잔류 신도들은 동대문남은자교회로 활동하다가 2020년 흥인문교회에 합류하여 동대문교회로 명칭을 변경했다.[6]

3. 사회적 활동

3. 1. 여성 의료 선교

3. 2. 교육 사업

참조

[1] 웹사이트 https://www.kcmusa.o[...]
[2] 웹사이트 https://his.kmc.or.k[...]
[3] 문서 이화여대 의과대학은 1990년대에 목동으로 이전하였다.
[4] 웹사이트 http://www.dangdangn[...]
[5] 웹사이트 http://www.igoodnews[...]
[6] 웹사이트 https://www.kmcda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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