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응조 (목회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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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응조는 대한민국의 목회자, 독립운동가, 교육자이다. 1896년 경상북도 영덕에서 태어나 3.1 운동에 참여하여 투옥되었으며, 이후 경성성서학원을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는 기독교대한성결교회에서 활동하며 북선 및 호남지방 감리목사를 역임했고,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교단을 탈퇴하기도 했다. 해방 후 교단에 복귀하여 서울신학교 교수를 지냈으며,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총회장을 역임했다. 1962년 성결신학교를 설립하여 교장으로 봉사했고, 독립유공자 및 교육공로자로 포상받았다. 1991년 96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저술 활동을 통해 신학 사상을 펼쳤다.
김응조는 1896년 12월 3일 경상북도 영덕군 지품면 낙평동에서 아버지 김원섭과 어머니 함영국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1910년, 14세가 되던 해 일제가 한국을 강점하자, 경성에서 온 애국지사 최봉희의 "구국이 곧 기독교 수용"이라는 말에 감동받은 김원섭은 가족과 함께 수암교회에 입교하였고, 이는 김응조의 신앙생활 시작이 되었다.
2. 약력
연도 내용 1896년 1월 26일 경상북도 영덕군 지품면 낙평리에서 출생 1915년 4월 15일 대구 계성고등학교 4년 수학 및 교원 양성학과 졸업 1917년 4월 경성성서학원 입학 1917년 5월 일본어 가능한 경성성서학원 수양생 7명이 대거부락전도운동 대원으로 선발되어 1년간 일본에 파송 1917년 9월 13일 일본에서 대거부락전도운동 사역중 재림의 환상과 성결의 은혜 체험 1918년 4월 김응조 등 수양생 7인, 일본에서 대거부락전도운동 사역을 마치고 조선 귀국 1919년 3월 3.1 운동에 경성성서학원 학생대표로 참가 1919년 4월 14일 만세운동 주동자로 고향 영덕에서 체포 1919년 9월 징역 2년 판결 1920년 7월 15일 왕세자 이은의 가례 특사로 대구형무소 복역후 석방 1920년 10월 1일 경성성서학원 졸업 1920년 10월 10일 전도사로서 철원교회 주임교역자 부임 1921년 3월 전도사로서 경안교회(現 광주교회) 주임교역자 부임 1923년 3월 전도사로서 안성교회 제3대 주임교역자 부임 1924년 3월 전도사로서 아현교회 제6대 주임교역자 부임 1926년 3월 29일 조선야소교 동양선교회 성결교회 제3회 전국교역자회에서 목사 안수 1927년 3월 북청감리목사로 파송 1929년 7월 15일 목포교회(現 북교동교회) 제2대 주임교역자 부임 1930년 9월 30일 목포 유달산 신유 체험으로 건강 회복 1931년 3월 호남지방 감리목사로 파송 1931년 7월 이리교회(現 사랑의동산교회) 주임교역자 부임 1936년 4월 ~ 1938년 5월 4일 중부지방 감리목사 및 독립문교회(現 한우리교회) 제8대 주임교역자 겸임 1938년 5월 4일 ‘신사참배’ 거부하고 성결교단 탈퇴 1938년 ~ 1942년 복음·전도 잡지 「생명지광」 경영 1946년 7월 성결교 월간잡지 『活泉』에 원고 기고 약속을 계기로 교단 복귀 1950년 8월 ~ 1953년 8월 성결교회 전임 부흥사로 활약 1953년 9월 ~ 1961년 3월 서울신학교 교수 역임 1956년 4월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제11대 총회장 당선 1961년 4월 14일 복음진리 수호동지회 조직 1962년 7월 미국 훼이스 신학대학원에서 명예 신학박사 취득 1962년 9월 ~ 1980년 11월 성결신학교 설립 및 교장 취임(교수 겸임) 1977년 12월 13일 독립유공자 서훈 1987년 12월 5일 교육공로자 대한민국 국민포장 1991년 4월 17일 경기도 안양시 자택에서 소천 (향년 96세)
2. 1. 출생과 성장
김응조는 1896년 1월 26일 경상북도 영덕군 지품면 낙평리에서 태어났다. 1915년 4월 15일 대구 계성고등학교에서 4년간 수학하고 교원 양성학과를 졸업하였다. 1917년 4월 경성성서학원에 입학하였다.
1917년 5월, 김응조를 포함한 경성성서학원 수양생 7명은 일본어가 가능하다는 이유로 대거부락전도운동 대원으로 선발되어 1년간 일본에 파송되어 전도 활동을 하였다. 같은 해 9월 13일, 일본에서 대거부락전도운동 사역 중 재림의 환상과 성결의 은혜를 체험하였다. 1918년 4월, 김응조 등 수양생 7명은 일본에서 대거부락전도운동 사역을 마치고 조선으로 귀국하였다.
2. 2. 신학 수업과 초기 사역
김응조는 1915년 4월 15일 대구 계성고등학교에서 4년간 수학하고 교원 양성학과를 졸업하였다. 1917년 4월 경성성서학원에 입학하였다.
1917년 5월, 일본어가 가능한 경성성서학원 수양생 7명이 대거부락전도운동 대원으로 선발되어 1년간 일본에 파송되어 전도에 힘썼다. 김응조는 1917년 9월 13일 일본에서 대거부락전도운동 사역 중 재림의 환상과 성결의 은혜를 체험하였다. 1918년 4월, 김응조를 포함한 수양생 7인은 일본에서 대거부락전도운동 사역을 마치고 조선으로 귀국하였다.
1919년 3월 3.1 운동에 경성성서학원 학생대표로 참가하였고, 1919년 4월 14일 만세운동 주동자로 고향 영덕에서 체포되었다. 1919년 9월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다. 1920년 7월 15일 대구형무소 복역 후 석방되었는데, 이는 왕세자 이은의 가례 특사로 인한 출옥이었다.
1920년 10월 1일 경성성서학원을 졸업하고, 10월 10일 전도사로서 철원교회 주임교역자로 부임하였다. 이후 1921년 3월 경안교회(現 광주교회) 주임교역자, 1923년 3월 안성교회 제3대 주임교역자, 1924년 3월 아현교회 제6대 주임교역자로 부임하였다. 1926년 3월 29일 조선야소교 동양선교회 성결교회 제3회 전국교역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2. 3. 목사 안수와 북선지방 사역
1926년 3월 29일, 조선야소교 동양선교회 성결교회 제3회 전국교역자회에서 김응조는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27년 3월, 북청감리목사로 파송되었고, 1929년 7월 15일에는 목포교회(現 북교동교회) 제2대 주임교역자로 부임하였다. 1930년 9월 30일, 목포 유달산에서 신유 체험으로 건강을 회복했으며, 1931년 3월에는 호남지방 감리목사로 파송되었다. 같은 해 7월, 이리교회 (現 사랑의동산교회) 주임교역자로 부임하였다.
2. 4. 유달산 신유 체험과 호남지방 사역
1929년 7월 15일 김응조는 목포교회(現 북교동교회) 제2대 주임교역자로 부임하였다. 1930년 9월 30일, 목포 유달산에서 신유 체험을 통해 건강을 회복하였다. 1931년 3월에는 호남지방 감리목사로 파송되었으며, 같은 해 7월 이리교회(現 사랑의동산교회) 주임교역자로 부임하였다.
2. 5. 중부지방 사역과 신사참배 거부
1936년 4월부터 1938년 5월 4일까지 중부지방 감리목사 및 독립문교회(現 한우리교회) 제8대 주임교역자를 겸임하였다. 1938년 5월 4일,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반대하여 성결교단을 탈퇴하였다.
2. 6. 독립운동과 저술 활동
1919년 3.1 운동에 경성성서학원 학생 대표로 참가하였다. 1919년 4월 14일, 만세운동 주동자로 고향 영덕에서 체포되어 1919년 9월 징역 2년 판결을 받았다. 1920년 7월 15일, 왕세자 이은의 가례 특사로 대구형무소에서 복역 후 석방되었다.
1938년 5월 4일,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성결교단을 탈퇴하였다. 이후 1942년까지 복음·전도 잡지 「생명지광」을 경영하였다.
1977년 12월 13일, 독립유공자로 서훈 받았다.
2. 7. 해방 이후 활동과 교단 복귀
1946년 7월 성결교 월간잡지 『活泉』에 원고 기고를 약속하면서 교단에 복귀하였다. 1950년 8월부터 1953년 8월까지는 성결교회 전임 부흥사로 활약하였다.
2. 8. 서울신학교 교수 및 총회장 역임
1953년 9월부터 1961년 3월까지 서울신학교 교수를 역임했다. 1956년 4월에는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제11대 총회장을 역임했다.
2. 9. 교단 분열과 성결신학교 설립
1938년 5월 4일, 김응조는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성결교단을 탈퇴하였다. 1946년 7월 성결교 월간잡지 『活泉』에 원고 기고를 약속하면서 교단에 복귀하였다.
1961년 4월 14일, 복음진리 수호동지회를 조직하였다. 1962년 9월부터 1980년 11월까지 성결신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으로 취임하여 교수를 겸임하였다.
2. 10. 사망과 유산
김응조 목사는 1991년 4월 17일 경기도 안양시 자택에서 96세로 별세하였다. 그는 3.1 운동 참여와 신사참배 거부 등 민족운동과 교단 수호에 헌신한 공로를 인정받아 1977년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았으며, 1987년에는 교육공로자로 대한민국 국민포장을 받았다.
3. 신앙생활과 초기 활동
어느 주일, 김응조는 선생님의 모세 설교에 감동받아 모세와 같은 인물이 되기로 결심했다. 계동학교를 졸업하고 대구 계성학교에 진학한 그는 미국 유학을 꿈꿨으나 좌절되었다. 이후 기도와 성경 연구로 1917년 4월 15일 경성성서학원에 입학, 모세의 미디안 땅, 바울의 아라비아 수양처로 여기며 헌신을 결심했다.
3. 1. 신앙의 시작과 계성학교 시절
김응조 목사는 경상북도 영덕군 지품면 낙평동에서 1896년 12월 3일, 강직하고 유연한 성격의 부친 김원섭 씨와 모친 함영국 씨의 차남으로 출생하였다. 1910년, 김응조가 14살이 되던 해 일제는 한국을 강점했다. 이때 경성에서 온 애국지사 최봉희는 “구국이 곧 기독교 수용”이라며 연설했고, 이에 감동받은 김원섭은 5명의 가족과 함께 수암교회에 입교하였다. 이것이 김응조 목사의 신앙생활의 시작이었다.
어느 주일날 동화 시간에 선생님으로부터 모세에 대한 설교를 듣고 크게 감동을 받은 김응조는 원님이 아닌 모세와 같은 인물이 되겠다고 결심했다. 계동학교를 졸업한 후 대구에 있는 계성학교로 진학한 그는 장래에 대해 고민하며 미국 유학을 꿈꿨으나, 이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계성학교 졸업 후 유학의 꿈이 좌절되자, 김응조는 기도와 성경 연구에 매진하여 1917년 4월 15일 경성성서학원에 입학하였다. 그는 성서학원을 모세의 미디안 땅, 바울의 아라비아 수양처로 여기며 일생을 하나님께 바칠 것을 결심하였다.
3. 2. 경성성서학원 입학과 일본 전도
김응조는 1917년 4월 15일 경성성서학원에 입학하였다. 어릴 때 모세의 꿈을 가졌던 그는 성서학원을 모세의 미디안 땅으로, 바울의 아라비아 수양처로 생각하고 일생을 하나님께 바칠 것을 결심하였다.
4. 3.1 운동과 독립운동
3·1 운동 이후 김응조는 목사 안수를 받고 북선지방 감리목사로 임명되어 함경남북도, 북부 강원도 일부, 북간도 전체를 책임졌다. 1926년, 30세의 김응조 목사는 당시 성결교회 5개 지방 중 하나였던 북선지방에서 5년 만에 교회를 10개에서 40개로 늘리는 성과를 이루었다.
4. 1. 3.1 운동 참여와 투옥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김응조는 경성성서학원 대표로 경성 시내 전문학교 학생들과 만세 운동에 참여하여 약 1년 6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경성성서학원을 졸업한 김응조 전도사는 “한국을 나의 교구로 삼아 주소서”라는 기도와 함께 한국 지도에 의주에서 부산까지, 그리고 인천에서 원산까지 종횡으로 붉은 십자가를 그려 놓고 기도하였다. 그는 본부의 파송 결정에 따라 강원도 철원교회, 경기도 광주 경안교회, 안성교회, 아현교회에서 사역한 후, 1926년 3월 29일 제3회 전국교역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4. 2. 독립운동 정신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김응조는 경성성서학원 대표로 경성 시내 전문학교 학생들과 만세 운동에 참여하여 약 1년 6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경성성서학원을 졸업한 김응조 전도사는 "한국을 나의 교구로 삼아 주소서"라는 기도와 함께 한국 지도에 의주에서 부산까지, 그리고 인천에서 원산까지 종횡으로 붉은 십자가를 그려 놓고 기도하였다. 그는 본부의 파송 결정에 따라 강원도 철원교회, 경기도 광주 경안교회, 안성교회, 아현교회에서 사역한 후, 1926년 3월 29일 제3회 전국교역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5. 북선 및 호남지방 사역과 신유 체험
김응조는 유달산에서 신유 체험을 한 뒤 목포교회를 중심으로 도서 지방 전도에 힘썼다. 총회본부는 그의 건강 회복 소식을 듣고 호남 지방(충청도, 전라도) 감리 목사로 임명하여 대전교회에 머무르게 하였다. 1936년 4월 연회에서 중부 지방(서울, 경기도, 강원도) 순회 이사로 임명되어 지방 교회 순회에 힘쓰며, 독립문교회를 겸임하기도 했다.
5. 1. 호남지방 감리목사 사역과 유달산 신유 체험
김응조는 몸을 돌보지 않고 사역에 힘쓴 탓에 병을 얻었다. 이에 요양 차 따뜻한 남쪽의 목포교회로 내려갔다. 그러나 교회, 주택 문제, 생활고에 시달려 요양은 고사하고 병이 가중되어 고통과 낙망 가운데 죽음만을 기다리게 되었다. 마지막 선택으로 김응조 목사는 죽기를 각오하고 하나님께 호소하기 위해 1930년 9월 1일 기어서 유달산에 올랐다. 이후 매일 올라가 기도하였다. 그리고 한 달 후인 1930년 9월 30일 유달산에서 하나님의 뜨거운 신유의 복음을 체험하게 된다.유달산에서 신유체험을 한 후, 목포교회를 중심으로 도서지방 전도에 성공을 거두었다. 총회본부에서 그의 건강 회복 소식을 듣고, 그를 호남지방(충청도, 전라도) 감리목사로 임명하여 대전교회에 주재케 하였다. 그는 1931년부터 1936년까지 호남지방회를 맡아 사역하는 중에 신개척 39개소, 교회당 건축 36처소, 신자 수 4,000명 증가라는 결실을 맺었다.
6. 신사참배 거부와 교단 탈퇴
1938년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요할 때, 김응조 목사는 성결교회 지도부가 "신사참배는 국가의식이요 우상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며 변절한 것에 대해 여러 차례 반대했다. 그러나 이러한 반대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교단과 교회를 떠나 문서 선교를 통해 복음을 전파하기로 결심했다.
6. 1. 신사참배 반대와 신념
1938년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요할 때, 김응조 목사는 "신사참배는 국가의식이요 우상이 아니다"라는 성결교회 지도부의 변절된 주장에 대해 몇 차례 반대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에 김응조 목사는 하나님만 바라보고 홀로 외로운 길을 걸어가기로 결심하고 1938년 5월 4일 교단과 교회를 떠났다. 성결교회를 떠난 김응조 목사는 문서전도를 통해 국내외로 복음을 전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기독신보판과 같은 『생명지광』을 만들어 배포했다.6. 2. 교단 탈퇴와 '생명지광' 발행
1938년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요할 때, 김응조 목사는 "신사참배는 국가의식이요 우상이 아니다"라는 성결교회 지도부의 변절된 주장에 대해 몇 차례 반대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에 김응조는 하나님만 바라보고 홀로 외로운 길을 걸어가기로 결심하고 교단과 교회를 1938년 5월 4일 떠났다. 성결교회를 떠난 김응조는 문서전도를 통해 국내외로 복음을 전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기독신보판과 같은 『생명지광』을 만들어 배포했다.7. 해방 이후 활동과 교단 분열
해방 후 김응조는 지방 순회 부흥 집회를 인도하다 1946년 7월 활천에 기고하면서 성결교회로 돌아와 서울신학교 전임교수가 되었다. 6.25 전쟁 발발 후에는 부산에서 피란 신학교 교수 생활을 했고, 휴전 후 서울로 복귀하여 저술 활동에 집중했다. 1956년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제11대 총회장에 선출되어 교단 발전에 기여했다.
1961년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총회가 NCC와 NAE 탈퇴 문제로 논란을 빚자, 김응조는 이명직, 이성봉, 황성택 목사와 함께 ‘복음진리수호동지회’를 조직해 교단 분열에 참여했다.
7. 1. 교단 복귀와 부흥 운동
해방과 함께 서울 동대문감리교회에서 김응조가 인도한 부흥회는 1945년 광복 후 한국에서 처음으로 열린 집회로 알려지고 있다. 해방 직후 지방 각지로 순회하면서 부흥집회를 인도하던 그는 1946년 7월 활천에 원고를 기고하기로 약속하면서 성결교회로 돌아왔고, 곧 성결교회 전임 부흥사로서 활약하였으며, 이후 서울신학교 전임교수로 초빙받게 되었다.7. 2. 서울신학교 교수와 총회장 역임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나자 부산으로 피란하여 피란신학교에서 교수 생활을 하였다. 휴전 후 4년 만에 신학교가 서울로 복귀하자 김응조는 서재에서 저술 활동에 주력하여 많은 책을 펴냈다. 1954년에 펴낸 그의 저서 「말세와 예수의 재림」은 6.25 전쟁 중 부산 피난 시절에 했던 강론을 묶은 것으로 보인다.1956년 4월에 개최된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제50차 총회에서 제11대 총회장으로 당선되어 성결 교단의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
7. 3. 교단 분열과 '복음진리수호동지회'
1961년 4월 11일 제16회 교단 총회는 지난 제15회 총회에서 NCC와 NAE 두 기관에 대한 동시 탈퇴 안이 보류되어 이월됐음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를 거론하지 않고 오히려 양 기관에 더 많은 대표를 파송하기로 결정했다. 사태가 여기에 이르자 양 기관 탈퇴를 이명직, 이성봉, 황성택 목사와 함께 주장하던 김응조 목사는 이들과 함께 ‘복음진리수호동지회’를 조직하였다. '복음진리수호동지회'는 ‘예수교대한성결교회’의 전신이다.8. 성결신학교 설립과 교육 활동
예수교대한성결교회 목회자 양성을 위해 1962년 9월 20일 성결대학교의 전신인 성결신학교를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충정로 자신의 집에서 50명의 입학생과 함께 시작하여 초대 교장으로 헌신하였다.
8. 1. 성결신학교 설립 배경과 과정
1962년 9월 20일 예수교대한성결교회의 목회자 양성을 위하여 성결신학교(聖潔神學校)가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충정로에 있는 김응조 목사의 사택에서 50명의 입학생과 함께 개교하였고, 김응조 목사는 초대 교장으로 헌신하였다.8. 2. 교육 철학과 헌신
1962년 9월 20일 예수교대한성결교회의 목회자 양성을 위하여 성결대학교의 전신인 성결신학교를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충정로 김응조 목사의 사택에서 50명의 입학생으로 개교하였고, 김응조 목사는 초대 교장으로 헌신하였다.9. 저술 활동
김응조는 목회자이자 신학자로서 평생 동안 다양한 주제의 책을 저술했다. 그의 저술은 목회학, 설교 작성법, 성경 강해, 신학 이론, 자서전 등 폭넓은 분야를 다루고 있다.
9. 1. 다양한 저술 목록
출판 연도 | 제목 |
---|---|
1937 | 목회학 |
1937 | 모범 설교 500제 |
1937 | 성서아동설교집 |
1939 | 성서부인설교집 |
1953 | 다니엘서 강의 |
1954 | 말세와 예수재림 |
1954 | 사막의 생수 |
1954 | 부흥의 불꽃 |
1955 | 설교예제 5백 문제 |
1956 | 기독전 |
1956 | 바울전 |
1959 | 성서절기설교 |
1959 | 구약성서대강해-상 |
1960 | 구약성서대강해-중 |
1960 | 구약성서대강해-하 |
1961 | 신약성서대강해-상 |
1961 | 신약성서대강해-중 |
1962 | 신약성서대강해-하 |
1967 | 하늘의 만나 |
1968 | 하나님의 장막 |
1968 | 기독교 2천년사 |
1968 | 황야의 과객 |
1968 | 성서난해구 해석 |
1968 | 신구약성서 답안 |
1969 | 성서적 정통신학 |
1970 | 구약역사철학 |
1971 | 하늘의 매일 메시지 |
1971 | 나는 기도해서 얻었다 |
1973 | 실천신학 목회학 |
1973 | 모범설교예제 |
1980 | 성서대강해-제1권 |
1981 | 성서대강해-제2권 |
1981 | 성서대강해-제3권 |
1981 | 성서대강해-제4권 |
1981 | 성서대강해-제5권 |
1981 | 성서대강해-제6권 |
1981 | 성서대강해-제7권 |
1981 | 성서대강해-제8권 |
1981 | 성서대강해-제9권 |
1981 | 성서대강해-제10권 |
1981 | 성서대강해-제11권 |
1981 | 성서대강해-제12권 |
1983 | 은총 90년: 영암 김응조 박사의 자서전 |
1985 | 사중복음-교리 |
1988 | 생수를 주리라-설교 |
(연도 미상) | 성서대강해(24권) |
9. 2. 신학 사상과 특징
김응조는 생전에 방대한 저술을 남겼으며, 그의 신학 사상과 특징은 주로 그의 저서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출판 연도 | 저서 |
---|---|
1937 | 목회학, 모범 설교 500제, 성서아동설교집 |
1939 | 성서부인설교집 |
1953 | 다니엘서 강의 |
1954 | 말세와 예수 재림, 사막의 생수, 부흥의 불꽃 |
1955 | 설교예제 5백 문제 |
1956 | 기독전, 바울전 |
1959 | 성서절기설교, 구약성서대강해-상 |
1960 | 구약성서대강해-중, 구약성서대강해-하 |
1961 | 신약성서대강해-상, 신약성서대강해-중 |
1962 | 신약성서대강해-하 |
1967 | 하늘의 만나 |
1968 | 하나님의 장막, 기독교 2천년사, 황야의 과객, 성서난해구 해석, 신구약성서 답안 |
1969 | 성서적 정통신학 |
1970 | 구약역사철학 |
1971 | 하늘의 매일 메시지, 나는 기도해서 얻었다 |
1973 | 실천신학 목회학, 모범설교예제 |
1980 | 성서대강해-제1권 |
1981 | 성서대강해-제2권, 성서대강해-제3권, 성서대강해-제4권, 성서대강해-제5권, 성서대강해-제6권, 성서대강해-제7권, 성서대강해-제8권, 성서대강해-제9권, 성서대강해-제10권, 성서대강해-제11권, 성서대강해-제12권 |
1983 | 은총 90년: 영암 김응조 박사의 자서전 |
1985 | 사중복음-교리 |
1988 | 생수를 주리라-설교 |
(연도 미상) | 성서대강해(24권) |
10. 사망과 유산
김응조는 1991년 4월 17일 96세를 일기로 경기도 안양시 자택에서 소천하였다.
10. 1. 소천과 장례
1991년 4월 17일 김응조는 96세의 나이로 경기도 안양시 자택에서 소천하였다.10. 2. 김응조 목사의 유산과 영향
1991년 4월 17일, 김응조 목사는 96세를 일기로 경기도 안양시 자택에서 별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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