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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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양도성은 조선의 수도 한양을 방어하기 위해 1396년에 완공된 성곽이다. 서울 도심과 성저십리 지역을 구분하는 기준으로, 현재는 종로구와 중구 일대에 걸쳐 있으며, 북악산, 낙산, 남산, 인왕산을 따라 18.627km에 달하는 성곽이 남아 있다. 일제강점기 도시 계획과 한국 전쟁으로 훼손되었으나, 1974년부터 복원 사업이 진행되어 상당 부분이 복구되었다. 2012년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등재되었으며, 각자성석을 통해 축성 당시의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순성놀이로 도성 안팎의 풍경을 감상하는 문화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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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도성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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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이름 | 서울 한양도성 |
다른 이름 | 한양도성 |
로마자 표기 | Seoul Hanyangdoseong, Seoul seonggwak |
한자 표기 | 서울 漢陽都城, 서울 城郭 |
위치 | 서울특별시 |
지역 | 도심 |
유형 | 성곽 |
건설 시기 | 1395년 ~ 1396년 (추정) |
건설 목적 | 조선의 수도, 한성부 방어 |
관리 주체 | 서울특별시청 |
소유 주체 | 대한민국 정부 |
웹사이트 | 서울 한양도성 공식 웹사이트 |
문화재 정보 | |
지정 종류 | 대한민국의 사적 |
지정 명칭 | 서울 한양도성 |
지정 번호 | 10 |
지정 날짜 | 1963년 1월 21일 |
문화재 구역 면적 | 1,311.15m² (22필지) |
문화재 보호 구역 면적 | 40,563.47m² (95필지) |
이미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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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세계유산 | |
등재 시도 결과 | 아쉽게 불발 (2017년 3월 22일) |
2. 한양도성에 해당하는 행정구역
행정동을 기준으로 할 때, 현재 한양 도성 내의 행정구역은 종로구 8개동과 중구 7개동에 해당한다. 이는 조선시대부터 근대기를 거치면서 성벽을 기준으로 행정동이 나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벽이 소실된 구역이라도 지적도와 행정동 경계를 통해 과거 성벽의 위치를 비교적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다만,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 이화여고, 한양공업고등학교 일원 등 일부 지역에서는 과거의 성벽 경계를 넘어 행정구역이 설정된 예외적인 경우도 드물게 존재한다.
2. 1. 조선시대

조선의 수도 한양은 계획도시로서 1394년 9월에 그 터를 정하고 같은 해 10월부터 궁궐과 관청, 성곽 등을 건축하였는데, 한양도성은 그 중 도심부를 둘러싼 방어시설로서의 성곽에 해당한다.[16]
이때 한양도성은 수도 한양의 경계를 구분짓는 시설이 아니었으며, 수도 한양의 범위는 초창기부터 성곽 내부의 도심과 성곽으로부터 10리까지의 외부 교외지역을 모두 포함하는 개념이었음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성곽 내부 지역은 성내(城內), 성중(城中) 또는 경중(京中) 지역으로 불렸으며, 성곽으로부터 10리 내의 외부 교외지역은 성저십리(城底十里)라고 불렸다.[17]
다만 성저십리 지역은 성내 지역과 같이 한성부가 직접 관할하는 지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거주 인구가 적다는 등의 사정으로 인해 종종 한성부에 이웃한 경기도의 요역(徭役) 징발에 노출되기도 하였다. 성저십리 지역의 거주민들이 한성부 관할 지역 거주민으로서의 부담을 질 뿐만 아니라 이웃한 경기도에 대해서도 부담을 지는 이중적 부담구조가 완전하게 해소된 것은 1788년 무렵으로, 이때부터 조선은 성저십리 지역이 한성부가 관할하는 수도 한양 오부의 일부로서 오직 한성부에 대해서만 부담을 진다는 것을 명확히 하였다.[17]
2. 2. 현황

행정동을 기준으로 할 경우, 현재 한양도성 내의 행정구역은 종로구 8개동 및 중구 7개동에 해당한다. 조선시대부터 근대기를 거치면서 성벽을 기준으로 행정동이 나뉘었기 때문에, 비록 성벽이 소실된 구역이라도 지적도와 행정동 경계를 통해 과거 성벽의 위치를 비교적 정확히 파악할 수 있다. 다만,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 이화여고, 한양공업고등학교 일원 등 일부 지역에서는 과거 성벽 경계를 넘어 행정구역이 설정된 예외적인 경우도 드물게 존재한다.
한양도성 내부에 해당하는 행정동은 다음과 같다.
구분 | 해당 행정동 |
---|---|
종로구 (8개동) | 청운효자동, 사직동, 삼청동, 가회동, 종로1·2·3·4가동, 종로 5·6가동, 이화동, 혜화동 |
중구 (7개동) | 소공동, 회현동, 명동, 필동, 장충동, 광희동, 을지로동 |
한양도성 건설은 1395년 시작되어 1396년에 8대문을 포함한 주요 부분이 완성되었다.[1] 조선 시대 전반에 걸쳐 지속적으로 보강되었으며, 특히 14세기, 15세기, 18세기에 대대적인 개수가 이루어졌다.[2]
현재 서울특별시는 한양도성을 기준으로 내부 지역에 한하여 '녹색교통지역'을 설정하고, 이 지역에 진입하는 전국의 배출가스 5등급 차량에 대해 진입 제한 조치를 시행하고 있다.
오랜 시간에 걸쳐 완성된 한양도성은 일제강점기와 근대화 과정에서 도시 계획 사업과 전차 선로 설치 등을 이유로 많은 부분이 강제로 철거되거나 훼손되었다. 그러나 상당 부분 원형 또는 복원된 형태로 남아 있다. 가장 잘 보존되어 널리 알려진 구간은 북악산 성곽으로, 숙정문에서 창의문까지 이어지는 약 2.3km 길이의 구간이다. 이 구간은 과거 청와대와 가깝다는 이유로 군사 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일반인의 접근이 통제되었으나, 시민들의 요구와 시대 변화에 따라 2006년에 개방되었다. 오랜 기간 인위적인 개발이 제한되었던 덕분에 비교적 자연환경이 잘 보존되어 있다.[11]
3. 역사
초기 한양도성은 수도의 중심부인 성중(城中, 도성 안)과 외곽 지역인 성저십리(城底十里)를 구분하는 행정적 경계 역할을 했다.[3] 그러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조선 중기 이후에는 수도 방어라는 군사적 기능이 강화되었다.[4]
일제강점기에는 도시 개발이라는 명목 아래 서대문을 비롯한 성곽의 많은 부분이 일제에 의해 강제로 철거되는 수난을 겪었다.[5] 이러한 파괴에도 불구하고 종로구와 중구를 중심으로 상당 구간의 성곽이 남아 대한민국의 사적으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5] 오늘날 한양도성은 중요한 역사 유적이자 시민들의 휴식 공간으로 활용되며, 여전히 서울 도심과 그 외 지역을 구분하는 상징적인 경계로 인식되고 있다.[6]
3. 1. 축성과 개수
1395년(태조 4년) 한양(지금의 서울) 방위를 위한 도성 건설을 위해 도성축조도감(都城築造都監)을 설치하고, 정도전에게 성터 조사 및 측량을 명하였다.[18] 이듬해인 1396년 음력 1월 9일, 전국에서 징발된 장정 11만 8천 7백여 명을 동원하여 축성을 시작하였다. 도성의 길이는 9,970보(步, 1보는 6자), 높이는 40자 2치였으며, 전체를 97개 구간으로 나누어 각 구간에 천자문 순서에 따라 하늘 천(天) 자부터 조상할 조(弔) 자까지 번호를 매겼다.[19] 총 98일 만에 북악산, 낙산, 남산, 인왕산 능선을 따라 성벽 축조를 완료하였다.[20]
같은 해 음력 9월 24일에는 성문이 모두 완성되었다. 정북(正北)에는 숙청문(肅淸門), 동북(東北)에는 홍화문(弘化門), 정동(正東)에는 흥인문(興仁門), 동남(東南)에는 광희문(光熙門), 정남(正南)에는 숭례문(崇禮門), 소북(小北)에는 소덕문(昭德門), 정서(正西)에는 돈의문(敦義門), 서북(西北)에는 창의문(彰義門) 등 8개의 문을 두었고, 수문 1개소도 설치하였다.[21][22]
1422년(세종 4년)에는 기존에 흙으로 쌓았던 구간을 모두 돌로 바꾸는 대대적인 개수 공사가 진행되었다. 봉족(奉足)과 잡색(雜色) 32만 2천 4백 명을 동원하여 38일 만에 완료하였다. 이후 1451년(문종 1년)에도 성곽을 보수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일부가 파괴되었다. 1616년(광해군 8년)에 다시 개수하였지만 병자호란으로 또다시 파손되었다.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와의 조약에 따라 성벽 신축 및 보수가 금지되어 한동안 방치되다가, 1704년(숙종 30년) 이조판서 이유(李儒)의 건의로 5군문(五軍門)의 장정을 동원하여 1711년(숙종 37년)까지 수축하였다. 1743년(영조 19년)에도 다시 보수하였다. 그 외에도 효종, 현종, 영조, 순조 시대에 부분적인 개수가 이루어졌으며, 현재 남아있는 한양도성의 모습은 주로 태조, 세종, 숙종, 순조 시대의 축성 및 개수 결과이다.[23]
시대별 축성 기법에는 차이가 있다. 태조 시기에는 자연석을 거칠게 다듬어 사용했으며, 아래쪽에는 큰 돌을, 위로 갈수록 작은 돌을 쌓았다. 세종 시기에는 돌을 좀 더 네모반듯하게 다듬었으나, 돌과 돌 사이를 자연스럽게 맞추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숙종 또는 순조 시기에는 돌을 직사각형 형태로 규격화하여 정교하게 쌓았다.
3. 2. 철거와 복원
1907년(고종 44년) 6월, 이완용 등의 주장으로 도성 철거가 결정되었고[24], 같은 해 7월 30일에는 이를 위한 성벽처리위원회가 마련되었다.[25] 1907년 9월부터 숭례문 북쪽 성벽 철거와 남지 매립이 시작되었으며, 1908년 3월에는 흥인지문 좌우 성벽이 전차 선로 부설을 위해 헐렸다. 1908년 9월에는 소의문과 숭례문 좌우의 성벽 총 77칸이 파괴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일제가 도시 정비와 교통망 확충을 명목으로 성벽과 성문을 계획적으로 파괴하였다. 서대문과 청량리, 광화문과 용산 사이 전차 부설 과정에서 서대문과 동대문, 숭례문 부근 성벽이 철거되었다. 일제는 서울의 도시 경관을 소위 '현대화'한다는 명분 아래 서대문을 비롯한 성곽의 상당 부분을 철거하였고, 특히 평지에 있던 성곽은 대부분 이 시기에 헐렸다.[5] 이러한 파괴는 한국 전쟁을 거치며 더욱 심화되었다. 그러나 한국 전쟁 때까지 일부 평지 구간 성곽이 남아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1974년 박정희 대통령의 국방 유적 보존 및 정비 지시에 따라 당시 구자춘 서울특별시장이 본격적으로 복원 사업을 시작하였다. 1975년 광희문 문루 복원을 시작으로 훼손된 체성과 여장을 복원하고 주변 가옥을 매입하는 작업이 꾸준히 이루어졌다. 1975년부터 삼청지구(창의문~숙정문) 복원에 이어, 2012년 9월까지 인왕산 정상 구간 복원이 완료되어 총 길이 18,627m 중 69%인 12,771m가 복원되었다. 2013년 5월 4일 숭례문 복구 기념식과 함께 숭례문 남동측 광장 구간 성벽 복원도 마무리되었다. 앞으로 남산 구간, 시장 공관 구간 등이 추가로 복원될 예정이다.[26]
이러한 철거 과정을 거쳤음에도 서울의 종로구와 중구에는 상당 부분의 성곽이 대한민국의 사적으로 보존되어 있으며, 여전히 서울의 원 도심인 '서울 도심'을 구분하는 문화적 경계 역할을 하고 있다.[5][6]
4. 특징
한양도성은 시대에 따라 축조 방식이 변화하는 특징을 보인다. 초기에는 흙과 자연석을 주로 사용했으나, 세종 대에는 잘 다듬은 돌을 사용하였고, 숙종 대에는 더욱 크고 규격화된 석재를 활용하여 성벽을 보강했다.[7][8] 또한, 지형적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망루를 설치하거나 흥인지문과 광희문 사이처럼 성벽 구조를 변경하는 등 방어 시설을 강화했으며, 봉수 시스템을 통해 남산을 중심으로 전국적인 군사 정보를 신속하게 전달하는 체계를 갖추었다.[9][10]
4. 1. 성문
14세기 후반 서울 주변에는 4개의 주요 성문인 사대문(四大門)과 4개의 보조 성문인 사소문(四小門)이 건설되었다. 사대문은 동쪽의 흥인지문(興仁之門, 동대문), 서쪽의 돈의문(敦義門, 서대문), 남쪽의 숭례문(崇禮門, 남대문), 북쪽의 숙정문(肅靖門, 북대문)이다. 사소문은 사대문 사이에 위치했는데, 서남쪽의 소의문(昭義門, 서소문), 서북쪽의 창의문(彰義門, 북소문), 동북쪽의 혜화문(惠化門, 동소문), 동남쪽의 광희문(光熙門, 남소문)이다.현재 이 성문들 중 일부는 원형이 보존되거나 복원되었다. 특히 숭례문은 국보 제1호, 흥인지문은 보물 제1호로 지정되어 있다.
4. 2. 방어 시설
14세기 후반 처음 건설된 성벽은 진흙으로 중간 크기의 둥근 돌을 고정하여 만들었다. 15세기 중엽 세종 때에는 대규모 보수 공사를 통해 흙벽면을 직사각형 돌로 교체하는 작업이 이루어졌다.[7] 이후 1704년 숙종 때의 대대적인 복원 공사에서는 크고 균일한 돌판을 사용하여 성벽 일부를 재건축했는데, 이는 한양도성의 마지막 특징적인 모습이 되었다.[8]서울의 동쪽 지역은 다른 곳보다 지대가 낮아 외부 공격에 취약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성문 밖에 망루를 추가로 설치하여 방어력을 높였다. 특히 흥인지문과 광희문 사이 구간의 성벽 일부는 방어 목적을 위해 직사각형 형태로 바깥쪽으로 확장되었다.
방어 시스템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로 봉수대가 있었는데, 1394년에 처음 설치되어 1894년까지 운영되었다. 봉수대는 낮에는 연기, 밤에는 불을 피워 신호를 보냈으며, 전국 각지의 봉수대에서 보낸 신호는 남산 정상의 봉수대에서 최종적으로 수신되어 궁궐로 전달되었다. 봉수 신호의 개수에 따라 의미가 달랐는데, 봉수 하나는 평상시를 의미했고, 둘은 적의 출현, 셋은 적이 국경에 접근함, 넷은 적이 국경을 넘었음, 다섯은 국경에서 전투가 시작되었음을 알렸다.[9][10]
5.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 등재
2012년 11월 23일, 한양도성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에 등재되었다.[27] 세계 현존 수도 중 최장기간인 514년(1396~1910) 동안 도성 역할을 수행하였고, 내사산의 능선을 따라 자연 친화적으로 축조된 점 등이 세계유산적 가치로 평가받았다. 잠정목록에 오르면 1년 뒤부터 세계유산 등재 신청 자격이 부여된다.[27]
한양도성은 유네스코 등재 기준의 다음 항목에 부합한다.[28]
- (2) 오랜 시간 동안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지역 내에서 일어난 건축, 기술, 기념비적 예술, 도시계획 또는 조경 디자인의 발전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류를 보여주어야 한다.[29]
- (3) 문화적 전통 또는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명의 독보적이거나 적어도 특출한 증거가 되어야 한다.[29]
- (4) 인류 역사의 중요한 단계들을 예증하는 건조물의 유형, 건축적 또는 기술적 총체, 경관의 탁월한 사례여야 한다.[29]
- (6) 사건이나 살아있는 전통, 사상이나 신조, 뛰어난 보편성이 탁월한 예술 및 문학 작품과 직접 또는 가시적으로 연관되어야 한다.[29]
유네스코 등재 기준에 비춘 한양도성의 주요 가치는 다음과 같다.
- 첫째, 한양도성은 평양성과 개경도성의 연장선상에서 독창적인 한국식 도성 형식을 갖춘다. 평지성과 산성의 구조가 결합된 포곡식 성곽이며, 그 내부에 궁궐, 종묘, 사직단, 행정시설, 시장시설 및 주거지를 포함하고 있는 대규모의 도성 유산이다. (기준 2)
- 둘째, 축조 당시 조선 시대 도성 형식의 문루와 성곽의 원형이 잘 남아 있다. 현존하는 세계 수도의 성곽 유산 중 전체 길이가 18.627km로 규모가 가장 크며, 현재 10.8km의 구간이 원형 또는 복원된 상태로 보존되어 있다. 각 시기별로 축조 형태와 수리 기술의 역사적 증거가 기록과 함께 실물과 유적으로 남아있다. (기준 3)
- 셋째, 한반도의 지형 체계를 고려해 입지가 결정됐다. 내사산의 능선을 따라 석재로 축조된 성곽의 안쪽에 판축층을 조성하는 등 지형과 일체화된 축조 기술을 보여주는 특별한 성곽 유형이다. 성곽은 자연적인 지세를 따라 지형을 잘 활용하면서 축조되었기 때문에, 내사산의 굴곡과 도성의 안팎이 함께 조망되는 뛰어난 역사 도시 경관을 보여준다. (기준 4)
- 넷째, 전국 각 지역 백성들의 공역으로 성곽을 축조해, 구간마다 담당 장인의 실명이 새겨져 있다. 조선 왕조 500년 동안 문루와 성곽을 주제로 집필한 문학 작품과 도성 풍경을 묘사한 회화 작품이 많이 남아 있다. (기준 6)
6. 탐방 구간
한양도성의 탐방 구간은 서울특별시의 분류에 따르면 아래의 6구간으로 나뉜다.[30]
구간명 | 주요구간 | 거리 | 소요시간 |
---|---|---|---|
백악구간 | 창의문-창의문 안내소-백악 돌고래 쉼터-백악 쉼터-백악마루-1·21 사태 소나무-청운대-암문-백악 곡성-백악 촛대바위-숙정문-말바위 안내소-우수조망명소-와룡공원-암문-서울과학고등학교-경신고등학교-혜성교회-두산빌라-구 서울시장공관-혜화문 | 4.7km | 약 3시간 |
낙산구간 | 혜화문-한성대입구역 4번출구- 계단-가톨릭대학 뒷길-장수마을-암문-낙산공원 놀이마당-이화마을-한양도성박물관(서울디자인지원센터)-동대문성곽공원-흥인지문 | 2.1km | 약 1시간 |
흥인지문구간 | 흥인지문-오간수문 터-이간수문-동대문역사문화공원(옛 동대문운동장 터)-동대문역사관-광희문-백구 컴퓨터 크리닝-천주교 신당동교회-장충체육관 | 1.8km | 약 1시간 |
남산(목멱산)구간 | 장충체육관-장충체육관 뒷길(도성 바깥·안쪽 길)-우수조망명소(용산구 방향)-반얀트리클럽&스파서울-국립극장-나무계단길-남산공원 정류장-N서울타워-남산 팔각정-목멱산 봉수대 터-남산 케이블카 승강장-잠두봉 포토아일랜드-남산회현자락 발굴현장-안중근 의사 기념관-백범광장 | 4.2km | 약 3시간 |
숭례문구간 | 백범광장-남대문시장-숭례문-남지 터-대한·서울상공회의소-소의문 터-배재학당동관·배재공원-정동교회-이화여자고등학교-돈의문 터 | 1.8km | 약 1시간 |
인왕산구간 | 돈의문 터-경교장-월암근린공원-홍파동 홍난파 가옥-편의점(구 옥경이식품)-암문-인왕산 곡성-인왕산 범바위-인왕산 정상-윤동주 시인의 언덕-창의문 | 4km | 약 2시간 30분 |
서울시는 한양도성 순성길을 운영하고 있으며, 이 길은 다음과 같은 6개의 코스로 나뉘어져 있다.[12]
- 북악산 코스
- 낙산 코스
- 흥인지문 코스
- 남산(목멱산) 코스
- 숭례문 코스
- 인왕산 코스
6. 1. 백악 구간 (창의문 ~ 혜화문)
창의문부터 와룡공원까지 구간은 1968년 1.21 사태 이후 청와대 보안 문제로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되었다.[31] 1993년에 창의문이 개방되었고[31], 이후 단계적으로 개방이 확대되어 2006년 4월 1일에는 홍련사에서 촛대바위까지[32], 2007년 4월 5일에는 촛대바위에서 창의문까지 나머지 구간이 모두 공개되었다.[33]현재 창의문에서 말바위까지 구간은 군사 시설 보호 및 안전상의 이유로 출입 시간이 제한된다. 하절기(3월~10월)에는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까지, 동절기(11월~2월)에는 오전 10시부터 오후 3시까지만 입장이 가능하다.[34] 이 구간에서는 지정된 장소에서만 사진 촬영이 허용되며, 출입 시 신분증 원본을 제시해야 한다.[35]
백악 구간의 성곽은 과거 복원 및 보수 작업을 거쳤다.
구간 | 지구명 | 기간 | 내용 |
---|---|---|---|
창의문 ~ 숙정문 (2570m) | 삼청지구 | 1975년 9월 18일 ~ 1976년 10월 21일 | 성곽 1994m, 여장 1403m 해체·복원[36] |
숙정문 ~ 혜화문 (1429m) | 성북지구 | 1976년 10월 4일 ~ 1978년 3월 20일 | 성곽 보수 및 주변 건물 정비[36] |
일부 구간에서는 성곽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경신중·고등학교 동쪽 담장의 약 150m 아랫부분은 옛 성곽의 일부이다.[37] 혜화로6가길 43의 단독주택 담장 아래에도 성곽이 2~3단가량 남아 있는데, 일부는 방향이 달라 집을 지을 때 옮겨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38] 혜화로6길 72의 단독주택 담장 앞뒤 계단 쪽으로도 일부가 남아있다.[38] 성곽은 본격적으로 창경궁로35나길 50의 '두산빌라'부터 나타나며, 옛 서울시장 공관 담장은 여장이 소실된 성곽이다.[39]
2024년 7월 장마 기간 중 집중호우로 인해 북악산 백악쉼터 인근 성곽 약 30m 구간이 무너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국가유산청과 종로구청은 등산객의 신고를 받고 탐방로 입구 일대의 출입을 통제하고 복구 작업을 진행 중이다.[40]
6. 2. 낙산 구간 (혜화문 ~ 흥인지문)
혜화문에서 낙산 정상을 거쳐 흥인지문에 이르는 구간은 여러 차례 복원 및 정비가 이루어졌다.1979년 6월 1일부터 1980년 8월 12일까지 혜화문부터 낙산 정상까지 성곽 1037m와 여장 1033m를 삼선지구로 정하여 복원하였다.[36] 이어서 낙산 정상에서 흥인지문까지의 구간(동숭지구)은 두 단계로 나뉘어 복원되었다. 1980년 9월 30일부터 이듬해 8월 1일까지 543m의 성곽을 보수하였고,[44] 1981년 9월 19일부터 이듬해 6월 16일까지는 나머지 성곽 508m와 여장 520.5m 복원과 함께 2개의 암문을 새로 만들었다.[44]
2008년 말 경에는 삼선동 일대의 성곽 외벽을 따라 탐방로가 조성되었으며,[41] 2011년 1월 11일에는 낙산 북쪽과 창경궁로를 잇는 67m 길이의 구간이 추가로 개통되었다. 이 구간에는 7m 높이 차이를 극복하기 위한 계단이 포함되었다.[42]
현재 낙산공원 정상 일대에는 군 시설, 배드민턴장, 노인정이 성곽과 맞닿아 있다.[43] 이 구간은 서울시가 운영하는 한양도성 순성길 중 '낙산 코스'에 해당한다.[12]
6. 3. 흥인지문 구간 (흥인지문 ~ 광희문)

1752년 11월 어영청의 홍봉한이 청계천을 파내고 치성을 축조하자고 건의하였다.[49] 다음달에는 우의정 김상로의 주장에 따라 흥인지문과 광희문 사이에 치성 5개를 쌓기로 정하였다.[50] 이듬해인 1753년 5월 24일에는 치성 축조를 끝마쳐 홍봉한에게 상을 내렸다.[51] 그러나 실제 광희문 북쪽에 위치한 치성은 4개였던 것으로 보인다. 흥인지문 남쪽과 청계천 사이에 1개, 청계천과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사이에 1개, DDP 안에 1개, 한양공고 자리에 1개가 있었고, 광희문 남쪽에도 1개가 있었다.[52] 이 가운데 청계천 북쪽에 있던 치성은 1907년 오간수문을 헐며 같이 철거되었다.[52]
오간수문은 기단부가 발굴되었으나 복원되지 않았고, 축소 모형이 오간수교 옆에 만들어져 있다. 2008년 동대문디자인플라자를 짓기 위한 발굴 조사 중에 멸실된 것으로 추정되었던 이간수문과 일대 성곽이 드러났다.[45] 2009년 10월에 이간수문과 치성 1개를 포함하여 발굴된 142m를 복원하고, 멸실된 123m는 돌을 쌓아 성곽임을 드러내 공개하였다.[46]
광희문 남쪽 성곽은 광희지구로 지정되어 1976년 11월 22일부터 이듬해 2월 28일까지 여장을 복원하였으며[44], 2004년경 보수 공사가 진행되었다.[47]
현재에도 일부 성곽 흔적이 남아 있다. 퇴계로 347의 건물 오른쪽에 성곽 일부가 남아 있으며, 장충단로8길 38-15와 장충단로8길 54 사이에는 성곽 일부가 담장으로 쓰인다. 그 외 장충동 일대의 성곽은 대저택 마당 아래에 묻힌 것으로 보인다.[48]
6. 4. 남산(목멱산) 구간 (장충체육관 ~ 백범광장)
장충체육관에서 남산 동쪽까지 1053m 구간을 장충지구로, 남산 일대 1639m 구간을 남산지구로 지정하여 1977년 10월 4일부터 1978년 12월 31일까지 성벽과 여장을 복원하였다.[44]옛 타워호텔(현 반얀트리클럽호텔) 쪽의 성곽은 건축가 김수근이 설계한 자유센터(현 남산제이그랜하우스)를 건설할 때 건물의 축대로 옮겨 사용되었다. 이 때문에 반얀트리클럽호텔 내부 구간에는 성곽이 남아있지 않다. 2011년 1월 말, 호텔 측에서 자체적으로 조성한 450m 길이의 탐방로가 개방되었다.[53] 같은 해 1월 11일에는 신라호텔, 서울클럽( 110m ),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130m )를 지나는 성곽 안쪽 탐방로 1090m가 일반에 공개되었다.[42]
이후에도 남산 구간의 복원 작업은 계속되었다. 2010년 7월 29일에는 아동광장 부근 84m의 성곽과 함께 훼손되었던 본래 지형이 복원되었다.[54] 2012년 6월 9일에는 백범광장 부근 239m의 성곽과 지형이 복원되었다.[55] 2014년 8월 발굴 조사에서는 189m의 성곽 유구와 더불어 '내자육백척(柰字六百尺)'이라고 새겨진 각자(刻字), 그리고 일제강점기에 세워졌던 조선신궁 배전의 콘크리트 기초부가 함께 발견되기도 하였다.[56]
6. 5. 숭례문 구간 (백범광장 ~ 돈의문 터)
대한상공회의소 서쪽 담장은 발굴된 한양도성 주초 바로 위에 2005년 새로 쌓은 도성이지만[57], 여장이 복원되지 않아 단순한 담장처럼 보인다.[58] 복원된 성곽은 세종대로9길 41의 빌딩 담장으로 이어지며, 삼성공제회관에도 복원되지는 않았으나 약간 남아 있다.[58] 성곽은 이화여자고등학교 노천극장의 담장 아래를 지나며, 실제로 이곳에서는 성곽 돌이 일부 보인다. 창덕여자중학교 담장에는 '서대문 성벽의 옛터'라는 표지석 뒤로 성곽이 일부 남아 있으며, 발굴 결과 소실된 것으로 여겨졌던 기단부가 나오기도 하였다.[59] 정동길 8의 한성교회 안쪽 아카시아 나무 담장 밑으로 성돌이 보이는데, 이는 성곽의 진행 방향과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아 성곽이 헐린 뒤에 옮겨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6. 6. 인왕산 구간 (돈의문 터 ~ 창의문)
서울시복지재단 서쪽 담장 아래에는 성곽의 몸체인 체성(體城)이 여장(女墻, 성 위에 낮게 쌓은 담) 없이 일부 남아 있다. 월암근린공원 부근의 140m 구간은 복원을 거쳐 2011년 10월 2일에 시민들에게 개방되었다.[60] 한편, 송월1길 44-24 세원빌라부터 송월1길 44-30 홍파빌라까지의 건물 주차장 뒤편으로는 성곽의 일부가 남아 주택의 축대 역할을 하고 있다. 인왕산을 오르는 구간은 1968년 1.21 사태 이후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되었으나, 1993년에 다시 민간에 개방되었다.돈의문 터 북쪽에서 창의문까지 이어지는 1626m 구간은 '청운지구'로 지정되어 여러 차례 복원 및 보수 작업이 이루어졌다.
시기 | 내용 | 길이 | 비고 |
---|---|---|---|
1977년 12월 26일 ~ 1978년 7월 15일 | 청운지구 복원 | 203.5m | [61] |
1978년 4월 12일 ~ 1979년 6월 30일 | 청운지구 복원 | 1242.5m | [61] |
1979년 7월 1일 ~ 1980년 4월 30일 | 청운지구 복원 | 120m | [61] |
1996년 | 국사당과 치마바위 사이 보수 | 56m | [61] |
1997년 | 국사당과 치마바위 사이 보수 | 45m | [61] |
2007년 하반기 | 구간 복원 | 약 300m | [62][63] |
2008년 12월 | 인왕산 정상 서측 복원 | 283m | [64] |
2009년 | 인왕산 동측 일부 복원 | - | [64] |
2010년 12월 | 범바위 일대 치성(雉城) 등 복원 | - | [65] |
2011년 10월 2일 (개방) | 월암근린공원 부근 복원 | 140m | [60] |
7. 각자성석
각자성석(刻字城石)은 글자가 새겨진 성곽의 돌을 의미한다. 한양도성은 축성(築城)과 개수 당시 천자문의 글자로 각 지역마다 구간을 나눠 공사하게 하였으며[19], 이러한 구간 표시나 공사 책임자 등을 도성의 돌에 새겨 놓은 것이다.
1395년(태조 4년) 처음 성을 쌓을 때는 천자문 순서대로 공사 구간을 나누고 담당 지역을 표시했다.[19] 1422년(세종 4년) 성을 보수할 때에는 태조 때 설정했던 천자문 구간을 각 도별로 새로 나누어 할당했으며, 새기는 방식도 지역별로 차이가 있었다. 예를 들어 경기·강원·충청도는 군현의 이름만을 새겼고, 전라도나 경상도는 군현 이름과 함께 시작 지점을 표시했으며, 평안·황해도는 좀 더 상세한 내용을 기록했다.
숙종 때와 그 이후에도 성곽의 보수가 이루어졌으며, 이때에는 주로 성곽 보수 담당자의 이름과 직책, 공사 시기 등을 중심으로 각자성석이 새겨졌다.
7. 1. 연혁
1395년 (태조 4년) 한양 방위를 위한 도성 건설을 위해 도성축조도감(都城築造都監)을 설치하고, 정도전에게 성터 조사 및 측량을 명하였다.[18] 이듬해인 1396년 음력 1월 9일, 전국에서 징발된 장정 11만 8천 7백여 명을 동원하여 축성을 시작했다. 성벽의 길이는 9,970보(步), 높이는 40자 2치였으며, 전체를 97개 구간으로 나누어 각 구간에 천자문 순서대로 하늘 천(天) 자부터 조상할 조(弔) 자까지 번호를 매겼다.[19] 공사는 98일 만에 완료되어 북악산, 낙산, 남산, 인왕산 능선을 잇는 성벽이 완성되었다.[20]
같은 해 1396년 음력 9월 24일에는 성문 건설도 마무리되었다. 정북(正北)에는 숙청문(肅淸門), 동북(東北)에는 홍화문(弘化門), 정동(正東)에는 흥인문(興仁門), 동남(東南)에는 광희문, 정남(正南)에는 숭례문, 소북(小北)에는 소덕문(昭德門), 정서(正西)에는 돈의문, 서북(西北)에는 창의문 등 8개의 성문을 두었고, 수문 1곳도 설치하였다.[21][22]
1422년 (세종 4년)에는 기존의 흙으로 쌓았던 구간을 모두 돌로 다시 쌓는 대대적인 보수 공사가 진행되었다. 봉족(奉足)과 잡색(雜色) 32만 2천 4백 명을 동원하여 38일 만에 작업을 마쳤다. 이후 1451년 (문종 1년)에도 보수가 있었으나, 임진왜란 때 일부 성벽이 파괴되었다. 1616년 (광해군 8년)에 다시 개수했지만 병자호란으로 또다시 훼손되었다. 특히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와의 조약에 성벽 신축 및 보수를 금지하는 조항이 있어 한동안 파괴된 채 방치되기도 했다. 1704년 (숙종 30년) 이조판서 이유(李儒)의 건의로 5군문(五軍門)의 장정을 동원하여 1711년 (숙종 37년)까지 수축 작업이 이루어졌고, 1743년 (영조 19년)에도 다시 보수되었다. 그 외에도 효종, 현종, 영조, 순조 대에 부분적인 개수가 이루어졌다. 현재 남아있는 한양도성의 모습은 대체로 태조, 세종, 숙종, 순조 시대의 축성 및 개수 결과이다.[23]
시대별로 성벽을 쌓는 기법에도 차이가 있었다. 태조 시기에는 자연석을 거칠게 다듬어 사용했으며, 아래쪽에는 큰 돌을 놓고 위로 갈수록 작은 돌을 쌓았다. 세종 시기에는 돌을 좀 더 직사각형에 가깝게 다듬었으나, 돌과 돌 사이를 자연스럽게 맞추려고 노력했다. 숙종 또는 순조 시기에는 돌을 규격화된 직사각형 형태로 반듯하게 잘라 쌓았다.
각자성석(刻字城石)은 글자가 새겨진 성돌을 의미한다. 한양도성은 처음 쌓거나 보수할 때 공사 구간을 천자문 글자로 나누어 담당 지역을 할당했으며[19], 이러한 구간 표시나 담당자 정보를 성돌에 새겨 넣었다.
1395년 (태조 4년) 축성 당시의 구간 할당은 다음과 같다.
1422년 (세종 4년) 보수 공사 때에는, 태조 때 설정했던 천자문 구간을, 각 도별로 새로이 나누어 할당하였다. 이때 경기·강원·충청도는 “利川(이천)”과 같이 군현의 이름만을 새겼고, 전라도는 “同福始(동복시)”처럼, 경상도는 “河陽始面(하양시면)”처럼 새겼으며, 평안·황해도는 “龍崗下末熙川上來(용강하말 희천상래)”와 같이 상세히 새겼다. 할당한 내역은 아래와 같다.
숙종 때와 그 이후에도 성곽의 보수가 이루어졌으며, 이때에는 성곽 보수 담당자의 이름을 중심으로 각자성석이 새겨졌다.
7. 2. 현황
각자성석(刻字城石)은 글자가 새겨진 성곽의 돌을 의미한다. 한양도성은 축성(築城)과 개수 당시 천자문의 글자로 각 지역마다 구간을 나눠 공사하게 하였으며[19], 이러한 구간 표시나 공사 책임자 등을 도성의 돌에 새겨 놓은 것이다.1395년(태조 4년) 처음 성을 쌓을 때는 아래 표와 같이 천자문 순서대로 공사 구간을 나누고, 각 구간의 시작과 끝, 담당 지역 등을 돌에 새겼다.[19]
1422년(세종 4년) 성을 대대적으로 보수할 때는 태조 때 설정했던 천자문 구간을 각 도별로 새로 나누어 할당하였다. 이때 경기·강원·충청도는 ‘利川(이천)’과 같이 군현의 이름만을 새겼고, 전라도는 ‘同福始(동복시)’처럼, 경상도는 ‘河陽始面(하양시면)’처럼 새겼으며, 평안·황해도는 ‘龍崗下末熙川上來(용강하말 희천상래)’와 같이 비교적 상세히 새겼다. 할당한 내역은 아래 표와 같다.
숙종 때와 그 이후에도 성곽 보수가 이루어졌으며, 이때에는 주로 성곽 보수 담당자의 이름과 직책, 공사 시기 등을 중심으로 각자성석이 새겨졌다.
현존하는 각자성석의 예는 다음과 같다.
- 백악구간: 북악산 청운대(靑雲臺, 293m) 부근 성곽 여장(성 위에 낮게 쌓은 담)에는 1804년(순조 4년, 청나라 가경 9년[70]) 공사 내용과 책임자를 기록한 각자성석이 있다. ‘패장 오재민 감관 이동한 변수 용성휘(牌將 吳再敏 監官 李東翰 邊首 龍聖輝)’ 등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71]
- 낙산구간: 흥인지문 앞의 각자성석이 잘 알려져 있다. 1706년(숙종 32년, 청나라 강희 45년[72]) 4월에 훈련도감(훈국)에서 성곽을 고쳐 쌓으면서 책임자들의 이름과 직책을 새긴 것이다.[73] ‘훈국 책응겸독역장 십인 사 한필영 일패장 절충 성세각 이패장 절충 김수선 삼패장 사과 유제한 석수도변수 오유선 일패변수 양산호 이패변수 황승선 삼패변수 김정립 강희사십오년사월일개축(訓局 策應兼督役將 十人 使 韓弼榮 一牌將 折衝 成世珏 二牌將 折衝 金守善 三牌將 司果 劉濟漢 石手都邊首 吳有善 一牌邊首 梁山昊 二牌邊首 黃承善 三牌邊首 金廷立 康熙四十五年四月日改築)’이라고 새겨져 있다. 이 각자성석은 한양도성 복원 과정에서 잠시 위치가 옮겨졌다가, 2015년 흥인지문 북측 성곽 복원 시 본래 위치로 돌아왔다.
- 남산구간: 남산구간에는 각자성석이 비교적 잘 남아 있다.
- * 장충체육관부터 반얀트리클럽까지 성곽 바깥쪽에서 보이는 각자는 북쪽부터 차례로 해진시면(海珍始面), 함안시면(咸安始面), 생자육백척(生字六百尺), 의령시면(宜寧始面), 경산시면(慶山始面), 연일시면(延日始面), 흥해시면(興海始面), 순흥시면(順興始面), 하양시면(河陽始面), 기장시면(機張始面), 울산시면(蔚山始面), 수자육백척(水字六百尺), 예천시면(醴泉始面), 곤자육백척(崑字六百尺), 성주시면(星州始面), 선산시면(善山始面) 등이다.
- * 반얀트리클럽 본관 건물 후면 축대에는 검자육백척(劍字六百尺) 각자가 있다.
- * 자유센터 정문 안 축대에는 강자육백척(崗字六百尺) 각자가 있다.
- * 자유센터 담장에는 경주시(慶州始) 각자가 있다.
- * 2014년 8월에는 남산 회현자락에서 내자육백척(柰字六百尺) 각자가 발굴되기도 했다.[56]
- * 과거 기록에는 남소문 터와 남산 정상 사이에 기축년(己丑年, 1649년 또는 1709년)[74]과 경인년(庚寅年, 1650년 또는 1710년)[75]에 새겨진 감관과 변수의 이름이 적힌 각자(‘도청감관 조정원 오택 윤상후 변수 안중리 기축팔월일기축’, ‘금도청감관 이수지 오유준 석수변수 안중리 경인삼월경인’)가 있었다고 하나[73], 현재 남아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8. 순성 놀이
조선 시대에는 성곽을 따라 걸으면서 도성 안팎의 풍경을 감상하는 활동이 있었는데, 이를 ‘순성’(巡城)이라고 불렀다. 실학자 유득공은 그의 저서 《경도잡지》에서 순성을 “도성을 한 바퀴 빙 돌아서 도성 안팎의 풍경을 구경하는 멋있는 놀이”라고 소개했다. 그의 아들 유본예 역시 《한경지략》에 “봄과 여름이 되면 한양 사람들은 도성을 한 바퀴 돌면서 주변의 경치를 구경했는데 해가 떠서 질 때까지의 시간이 걸린다.”라고 기록하여 당시 순성의 모습을 전했다.
1901년 경의선 철로 부설을 위해 프랑스에서 초빙된 철도기사 에밀 부르다레 또한 그의 저서에서 한양도성 순성에 대해 언급했다. 그는 “서울의 이 장벽은 하루 만에 한 바퀴를 다 돌 수 있다. 상당히 잘 걷고 산을 잘 타는 사람에게는 아주 흥미로운 산책이 된다. 대단한 구경거리로서 비범한 파노라마가 펼쳐진다. 특히 좋은 계절에 소나무와 꽃이 우거진 남산 비탈을 따라갈 때, 흠잡을 데 없이 그림처럼 펼쳐지는 구석구석을 즐길 만하다.”라고 기록하며 순성의 매력을 높이 평가했다.[76]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현대에 들어 '순성놀이'라는 이름의 행사가 부활했다. 서울특별시와 시민단체 서울KYC는 2011년 9월 24일 ‘하루에 걷는 600년 서울, 순성놀이’라는 이름으로 행사를 시작했으며, 이 행사는 매년 9~10월에 열리고 있다. 또한, 연합뉴스 미디어랩에서는 3차원 인터랙티브 기술을 활용한 순성놀이를 체험할 수 있도록 제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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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맛비에 국가유산 피해 잇달아…한양도성 성벽 30m 무너져(종합2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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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리고 묻혔던 서울 성곽 18km 윤곽 찾았다
https://news.naver.c[...]
2008-12-24
[58]
논문
[59]
뉴스
정동 창덕여중 지하서 서울성곽 기초 확인
https://news.naver.c[...]
2010-10-19
[60]
뉴스
'조선시대 성곽변천사를 한눈에…'
https://news.naver.c[...]
2011-10-02
[61]
논문
[62]
뉴스
서울 옛 모습 찾는다
http://imnews.imbc.c[...]
2007-09-23
[63]
뉴스
인왕산 시민의 곁으로 돌아오다
https://news.naver.c[...]
2007-10-10
[64]
뉴스
[서울성곽 복원 현장] 공사 어디까지 진행됐나
http://www.seoul.co.[...]
2009-02-09
[65]
뉴스
´가장 완벽한 치성´ 인왕산 성벽 복원하다
http://www.dailian.c[...]
2011-01-02
[66]
일반
[67]
일반
[68]
일반
[69]
일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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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71]
서적
국민의 품으로 돌아온 북악산 서울성곽
문화재청
2007
[72]
텍스트
[73]
harvnb
2009
[74]
텍스트
[75]
텍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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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대한제국 최후의 숨결
글항아리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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