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만선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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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두만선우는 진나라의 만리장성 축조 이후 흉노의 지도자로서 오르도스 지역을 회복하고 세력을 확장했다. 그는 맏아들 묵돌 대신 후궁의 아들을 후계자로 세우려 묵돌을 월지에 인질로 보냈으나, 묵돌이 탈출하여 1만 기병을 지휘하게 했다. 이후 묵돌은 기원전 209년 사냥터에서 반란을 일으켜 두만을 암살하고 선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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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원전 209년 사망 - 진승
진승은 진나라 말기에 오광과 함께 반란을 일으킨 지도자로서, '왕후장상이 어찌 씨가 있겠는가'라는 말로 유명하며 진나라 멸망의 도화선이 된 최초의 농민 반란을 주도한 인물이다. - 기원전 209년 사망 - 항량
항량은 초나라 명장 항연의 아들로, 진나라 말기 진승·오광의 난 때 거병하여 조카 항우와 함께 반진 세력을 이끌었으나 정도 전투에서 장한에게 패해 전사했고, 그의 죽음은 항우의 복수와 초한쟁패의 배경이 되었다. - 흉노의 선우 - 호한야선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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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만선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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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칭호 | 선우 |
재위 기간 | 기원전 220년경 – 기원전 209년 |
계승자 | 묵돌 |
개인 정보 | |
사망 년도 | 기원전 209년 |
2. 생애
진나라의 진시황이 만리장성을 쌓고 몽염에게 북방 수비를 맡겨 흉노에 대비하게 하였다. 진시황 사후 몽염도 권력 다툼으로 죽자, 흉노의 지도자 두만 선우는 오르도스 지역을 회복하고 다시 이 일대를 누비게 된다.[2]
두만은 진나라 군대에 대항할 수 없어 북쪽으로 물러나 10년 이상 버텼다.[3] 기원전 210년 몽염이 죽은 후, 두만은 흉노를 이끌고 황하를 건너 이전 영토를 되찾았다.[4]
두만에게는 맏아들 묵돌과 후궁이 낳은 어린 아들이 있었다. 두만은 묵돌 대신에 이 아들에게 뒤를 잇게 하기 위해 묵돌을 월지에 인질로 보낸 후, 월지와 전쟁을 일으켰다. 하지만 묵돌은 월지에게 살해당하지 않았고, 오히려 월지의 명마를 훔쳐 흉노로 도망쳐 왔다. 이에 두만은 묵돌에게 좌현왕의 작위를 내리고, 1만 명의 기병 대장으로 삼았다.
하지만 묵돌은 반란을 도모하였다. 묵돌은 소리나는 화살이라는 뜻의 명적(鳴鏑)을 가지고 자신의 휘하에 있는 1만 기병을 훈련시켰고, 기원전 209년 결국 사냥터에서 묵돌의 공격을 받아 활에 맞아 암살당했다.[2]
2. 1. 초기 활동과 주변 민족과의 관계
진나라의 진시황이 만리장성을 쌓고 몽염에게 북방 수비를 맡겨 흉노에 대비하게 하였다. 진시황 사후 몽염도 권력 다툼으로 죽자, 흉노의 지도자 두만 선우는 오르도스 지역을 회복하고 다시 이 일대를 누비게 된다.[2]두만은 진(秦)나라 군대에 대항할 수 없어 북쪽으로 물러나 10년 이상 버텼다.[3] 기원전 210년 몽염이 죽은 후, 두만은 흉노를 이끌고 황하를 건너 이전 영토를 되찾았다.[4]
두만에게는 맏아들 묵돌과 후궁이 낳은 어린 아들이 있었다. 두만은 묵돌 대신에 이 아들에게 뒤를 잇게 하기 위해 묵돌을 월지에 인질로 보낸 후, 월지와 전쟁을 일으켰다.[2] 하지만 묵돌은 월지에게 살해당하지 않았고, 오히려 월지의 명마를 훔쳐 흉노로 도망쳐 왔다. 이에 두만은 묵돌에게 좌현왕의 작위를 내리고, 1만 명의 기병 대장으로 삼았다.
하지만 묵돌은 반란을 도모하였다. 묵돌은 소리나는 화살이라는 뜻의 명적(鳴鏑)을 가지고, 자신의 휘하에 있는 1만 기병을 훈련시켰고 기원전 209년 결국 사냥터에서 묵돌의 공격을 받아 활에 맞아 암살당했다.[2]
한서 (94권 "상"편)는 두만의 삶의 종말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 單于有太子名冒頓|... 선우(두만)에게는 묵돌이라는 아들과 상속자가 있었다.중국어 그 후 그는 사랑하는 왕비를 얻었고, 그녀는 어린 아들을 낳았다. 두만은 어린 아들을 왕위에 앉히기 위해 묵돌을 제거하려 했다. 그는 묵돌을 인질로 월지에 보내는 데 성공했다. 묵돌이 인질이 되자, 두만은 재빨리 월지를 공격했다. 월지는 묵돌을 죽이려 했다. 묵돌은 그들의 좋은 말을 훔쳐 타고 달아나 집으로 돌아왔다. 두만은 이를 강함의 표시로 여겨 그에게 1만 명의 기병을 지휘하도록 명령했다. 묵돌은 휘파람 화살촉을 만들어 부하들에게 쏘는 훈련을 시켰다. 그는 명령을 내렸다. "휘파람 화살촉으로 쏜 것을 '항상' 쏘지 않는 자는 참수할 것이다." 그는 사냥을 했다. 그는 휘파람 화살촉으로 쏜 것을 쏘지 않은 자들을 현장에서 참수했다. 그 후 묵돌은 휘파람 화살촉으로 자신의 좋은 말 중 하나를 쏘았다. 그의 좌우에는 감히 쏘지 못하는 자들이 있었다. 묵돌은 그들을 즉시 참수했다. [다음으로] 그는 잠시 기다렸고, 다시 휘파람 화살촉으로 자신의 사랑하는 아내를 쏘았다. 그의 좌우에는 매우 두려워 감히 쏘지 못하는 자들이 있었고, 그는 다시 그들을 참수했다. 잠시 후 묵돌은 사냥을 나갔다. 휘파람 화살촉으로 선우의 좋은 말 중 하나를 쏘았다. 좌우의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쏘았다. 묵돌은 그의 좌우를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아버지인 선우 두만을 사냥하러 갔고, 휘파람 화살촉으로 두만을 쏘았다. 그의 좌우는 휘파람 화살촉을 따라 두만을 쏘아 죽였다. 그들은 그의 계모와 동생, 그리고 따르지 않고 함께하지 않은 몇몇 중요한 측근들까지 죽였다. 묵돌은 그 자리에서 스스로 선우가 되었다.
북방에서는 동호와 월지가 강력했던 시대에 선우(單于) 두만(頭曼)은 진(秦)에 이길 수 없어 북방으로 이동했다. 10년 남짓 지나 진나라 장군 몽념이 죽고, 제후들이 진나라에 반역하여 중국은 혼란에 빠졌으며, 진나라가 멀리 떨어진 곳으로 보낸 유배된 병사들은 모두 돌아갔다. 압박에서 벗어난 흉노는 다시 황하를 건너 그 남쪽 지역으로 들어가 옛 만리장성에서 중국과 국경을 접하게 되었다.
두만의 태자는 이름을 묵돌(冒頓)이라고 했는데, 후에 두만이 총애하는 연지(閼氏: 선우의 아내)가 막내아들을 낳자 두만은 묵돌을 폐하고 그 막내아들을 태자로 세우고 싶어 하여, 묵돌을 월지로 인질로 보냈다. 묵돌이 인질이 된 후, 두만은 갑자기 월지를 공격했다. 월지는 격노하여 묵돌을 죽이려 했지만, 묵돌은 말을 훔쳐 간신히 도망쳐 돌아왔다. 두만은 그의 용기에 감탄하여, 1만 명의 기병을 통솔하게 했다.
묵돌은 그 1만 명의 기병 중에서 자신의 명령에 충실한 자들만을 다시 선발하여, 두만과 사냥을 나갔을 때 묵돌의 지시에 따라 일제히 두만을 사살했다. 이로 인해 묵돌이 선우가 되어 주변 국가들을 병합하고 흉노 대제국을 건설하게 된다.
2. 2. 진나라와의 충돌과 북방 후퇴
진나라의 진시황은 만리장성을 쌓고, 몽염에게 북방 수비를 맡겨 흉노에 대비하게 하였다. 이후 진시황이 죽고 몽염도 권력 다툼의 와중에서 죽게 되자, 흉노의 지도자 두만 선우는 오르도스 지역을 회복하고 다시 이 일대를 누비게 되었다.[2]두만은 진나라 군대에 대항할 수 없어 북쪽으로 물러났고, 그곳에서 10년 이상 버텼다.[3] 기원전 210년 몽염이 죽은 후, 두만은 흉노를 이끌고 황하를 건너 이전 영토를 되찾았다.[4]
2. 3. 진나라 멸망 이후 세력 회복
진나라의 진시황이 몽염에게 북방 수비를 맡겨 흉노에 대비하게 하였으나, 진시황 사후 몽염이 권력 다툼으로 죽자, 흉노의 지도자 두만 선우는 오르도스 지역을 회복하였다.[2]두만은 맏아들 묵돌 대신 후궁이 낳은 어린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기 위해 묵돌을 월지에 인질로 보낸 후 월지를 공격했다. 하지만 묵돌은 월지에게 살해당하지 않고, 오히려 월지의 명마를 훔쳐 흉노로 도망쳐 왔다.[2] 이에 두만은 묵돌에게 1만 명의 기병을 지휘하게 했다.[4]
묵돌은 소리나는 화살인 명적(鳴鏑)을 이용하여 자신의 휘하 기병들을 훈련시켰고, 기원전 209년 사냥터에서 묵돌의 공격을 받아 활에 맞아 암살당했다.[2]
2. 4. 묵돌과의 갈등과 죽음
진나라의 진시황이 몽염에게 북방 수비를 맡겼으나, 이후 몽염이 권력 다툼으로 죽자 흉노의 지도자 두만 선우는 오르도스 지역을 회복했다.두만은 맏아들 묵돌 대신 후궁이 낳은 어린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기 위해 묵돌을 월지에 인질로 보낸 후 월지를 공격했다. 하지만 묵돌은 월지에서 탈출하여 흉노로 돌아왔고, 두만은 묵돌에게 1만 명의 기병을 지휘하게 했다.
그러나 묵돌은 반란을 일으켜, 기원전 209년 사냥터에서 소리나는 화살인 명적(鳴鏑)을 이용해 훈련시킨 기병들의 공격으로 두만을 활로 쏘아 죽였다.[2] 묵돌은 자신에게 복종하지 않는 자는 모두 죽이도록 명령했고, 결국 아버지 두만과 그 추종자들을 제거했다.[2]
참조
[1]
서적
The Empire of the Steppes
https://archive.org/[...]
Rutgers University Press
[2]
서적
[3]
서적
[4]
서적
Records of the Grand Historian
https://ctext.org/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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