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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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진승은 기원전 209년 오광과 함께 진나라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킨 인물이다. 그는 흉노에 대항하라는 명령을 받고 유양으로 향하던 중 폭풍으로 기한 내에 도착하지 못할 것을 우려하여 반란을 결심했다. 진승은 스스로를 초나라 왕으로 칭하며 진나라의 억압에 시달리던 백성들의 지지를 얻어 세력을 확장했지만, 장군들의 이탈과 배신, 잦은 패배로 인해 결국 암살당했다. 그의 반란은 실패로 끝났지만, 진나라 멸망의 불씨가 되었고, 이후 항량, 항우, 유방 등에게 영향을 미쳤다. 진승은 농민 반란의 선구자로 평가받으며, "왕후장상이 씨가 있느냐"와 같은 명언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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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승 | |
---|---|
기본 정보 | |
휘 | 진승 |
자 | 섭 |
시호 | 은왕 (유방에 의해 추증됨) |
이명 | 진섭 |
생애 | |
즉위 | 기원전 209년 |
사망 | 기원전 208년 |
정치 | |
왕조 | 장초 |
수도 | 진성 |
기타 | |
관련 | 진승·오광의 난 |
2. 생애
진승은 양성(陽城) 출신으로, 매우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젊어서는 남의 밭을 갈아주며 살았는데, 항상 가난한 것을 한으로 여겨 부귀해지기를 꿈꿨다. 고용주가 그 말을 듣고 비웃자, 진승은 "아아, 제비나 참새가 어찌 기러기나 고니의 뜻을 알리요?"라고 탄식하였다. 여기서 '연작안지홍곡지지'(燕雀安知鴻鵠之志)라는 말이 나왔다.[10] 그는 남양군 양현(한(漢)나라의 도양현) 출신으로, 젊은 시절 일용직 농부로 일했다.
진 이세황제 원년 7월, 진승은 오광과 함께 900명의 병사를 이끌고 유양군 (漁陽, 현재의 베이징 미윈현 남서쪽)으로 가서 흉노에 대항하여 북쪽 국경을 방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폭풍으로 인해 기한 내에 유양에 도착할 수 없었고, 진나라 법에 따르면 병사들이 제때에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면 처형될 것이었다. 진승과 오광은 자신들의 운명이 다했다고 판단하여 병사들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억울하게 자결하도록 강요받은 진나라의 태자 부소, 그리고 초나라의 장군 항연이 죽지 않고 그들의 대의에 동참했다고 발표했다. 또한 초나라의 재건을 선언했다. 이때 진승이 한 말에서 “왕후장상이 씨가 있느냐?”라는 말이 유래했다.[10]
진승의 반란군은 순식간에 팽창하여 구 초의 수도 진성을 점령했다. 진승은 스스로를 "장초왕"()이라고 선언하고, 여러 장수에게 진나라 영토를 정복하기 위해 사방으로 진격하도록 지시했다. 무신에게는 옛 조나라 영토로 북쪽으로, 주부에게는 옛 위나라 영토로 북동쪽으로 향하도록 하는 등 여러 장수들을 파견했으나, 이들은 대부분 초나라에서 독립하여 진승에게 돌아오지 않았다.[10]
진승은 부하들을 의심하여 중상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처형했다. 주문의 패배와 무신 등의 독립으로 권력이 약화되었다. 일용직 인부 시절의 동료가 진승을 찾아왔으나, 진승의 위엄을 손상시키는 옛날이야기를 하자 그를 처형했다. 그 결과, 초창기부터 진승을 따르던 자들은 실망하여 그에게서 떠나갔다.[10]
이세 2년(기원전 208년) 12월,[8] 진승은 장한이 이끄는 진나라 군대에 패배했고, 마부 장가에게 배신당해 살해되었다.
2. 1. 진승·오광의 난 이전
진승은 양성(陽城) 출신으로, 사마천의 주장에 따르면 매우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젊어서는 남의 밭을 갈아주며 살았는데, 항상 가난한 것을 한으로 여겨 부귀해지기를 꿈꿨다. 고용주가 그 말을 듣고 비웃자, 진승은 "아아, 제비나 참새가 어찌 기러기나 고니의 뜻을 알리요?"라고 탄식하였다. 여기서 '연작안지홍곡지지'(燕雀安知鴻鵠之志)라는 말이 나왔다.[10] 그는 남양군 양현(한(漢)나라의 도양현) 출신으로, 젊은 시절 일용직 농부로 일했다.2. 2. 반란의 시작
진 이세황제 원년 7월, 여좌에서 출발해 어양에서 수자리를 지내기 위해 9백 명이 대택향에 둔쳤고, 진승은 같은 농민 출신인 오광과 함께 둔장(屯長)으로서 무리를 인솔했다. 마침 큰 비가 내려 나아가지 못해 기한을 지키지 못했는데, 진나라의 법에 따르면 기한을 지키지 못하면 참형에 처해지도록 되었다. 어차피 죽게 된 처지라 진승은 오광과 함께 반란을 모의했고, 부소와 항연을 사칭하면 호응하는 사람들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 했다. 오광은 이에 동의하고 먼저 점을 쳤는데, 점치는 사람이 “일에 성공하여 공을 세울 것이나, 먼저 귀신에게 점을 치라.”라고 했다. 진승과 오광은 기뻐하고, 귀신에 대해 생각하다가 꾀를 내 상서로운 징조를 조작했다. 물고기 뱃속에 '진승왕'이라고 쓴 비단을 넣어 수졸들이 물고기를 먹다가 이를 봤고, 오광이 총사 곁에서 밤중에 여우인 체 하고 '대초가 일어나고, 진승이 왕이 된다'라고 외쳤다. 수졸들은 점차 진승을 주목했다. 마침내 오광이 일어나 장위(將尉)[11]를 죽이자 진승도 도와 함께 두 장위를 죽였고, 수졸들에게 어차피 기한에 늦어 죽게 된 목숨이니 함께 반란을 일으키자고 호소했다. 이때 진승이 한 말에서 “왕후장상이 씨가 있느냐?”라는 말이 유래했다.[10]무리들은 모두 진승에게 호응했다. 반란군은 나라 이름을 장초(張楚)라 하였으며 항연과 부소를 사칭하여 민중들의 마음을 얻었다. 단을 쌓고 맹세하고 장위들의 머리로 제사를 지냈으며, 진승은 장군을 일컫고 오광은 도위가 되었다.
2. 3. 장초(張楚) 건국과 세력 확장
기원전 209년 8월 또는 9월,[4] 진승은 오광과 함께 900명의 병사를 이끌고 유양군 (漁陽, 현재의 베이징 미윈현 남서쪽)으로 가서 흉노에 대항하여 북쪽 국경을 방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폭풍으로 인해 기한 내에 유양에 도착할 수 없게 되었고, 진나라 법에 따르면 병사들이 제때에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면 처형될 것이었다. 진승과 오광은 자신들의 운명이 다했다고 판단하여 병사들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억울하게 자결하도록 강요받은 진나라의 태자 부소, 그리고 초나라의 장군 항연이 죽지 않고 그들의 대의에 동참했다고 발표했다. 또한 초나라의 재건을 선언했다.900명의 병사로 제국에 저항하는 것은 자살 행위처럼 보였지만, 진나라 정권에 깊이 억압받던 백성들은 진승과 오광의 대의에 빠르게 동참했다. 2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합류했다. 곧 사람들은 진승에게 스스로를 "초나라 왕"으로 선언하라고 요구했다. 장이와 진유의 조언에 반하여 진승은 스스로를 "장초왕"()이라고 선언했다.
진승은 수도를 진현(陳縣, 현재의 허난성 화이양현)에 정하고 다양한 장군들에게 진나라 영토를 정복하기 위해 사방으로 진격하도록 지시했다. 그는 오광을 초나라 왕 대행으로 임명했고, 주문(周文중국어)에게는 진나라 본토로 서쪽으로 향하도록 명령했으며, 그의 친구 무신(武臣중국어)에게는 옛 조나라 영토로 북쪽으로 향하도록 명령했으며, 주부(周敷중국어)에게는 옛 위나라 영토로 북동쪽으로 향하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이 장군들 중 누구도 돌아오지 못했다. 초기의 패배 이후, 진나라 군대는 장한 장군 아래에서 재편성되었다. 오광은 그의 부하 장군들에게 암살당했고, 주문은 진나라 군대에게 패배했으며, 무신은 처음에는 성공했지만 스스로를 조나라 왕으로 선언하고 초나라에서 독립했으며, 주부는 위나라 왕족의 후손을 위나라 왕으로 옹립하여 또한 초나라에서 독립했다.
이세 원년(기원전 209년) 7월, 진승은 동료 오광과 함께 반란을 결의하고, 반란을 성공시키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요리하는 생선 뱃속에 "진승이 왕이 된다"라고 쓴 천을 넣고, 밤에 불을 지피며 여우와 같은 목소리로 "진승이 왕이 된다"라고 말하여, 진승에게 신기한 힘이 있는 것처럼 인부들에게 생각하게 했다.
그리고 오광이 "나는 도망가겠다"라고 소란을 피우자 지휘관이 화를 내며 오광을 매질했다. 그 모습에 인부들의 반감이 높아진 틈을 타, 진승이 틈을 노려 지휘관을 살해했다. 자신이 수령이 되어 반란을 일으켰다. 이때 진승은 "'''왕후장상 영유종야'''"(왕이나 제후, 장군, 재상이 되는 것이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것은 아니다. 즉, 누구든지 될 수 있다)라는 명언을 토했다. 반란 시 진승과 오광 두 사람은 백성들에게 인기가 있던 부소·항연이라고 사칭했다.
진승의 반란군은 순식간에 팽창하여 구 초의 수도 진성을 점령했다. 그 직후 현상 수배범으로 진나라에게 쫓기고 있던 장이와 진여가 부하가 되었다. 그리고 장이와 진여의 반대를 무릅쓰고, 초를 부흥했다는 명분으로 국호를 '''장초'''로 하고 왕위에 즉위했으며, 이에 호응하여 지방의 장군과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항량·항우·유방도 그중 한 명이었다.
2. 4. 수하들의 이탈과 배신
당시 여러 군현은 진나라의 이료들에게서 괴로움을 당하다가, 이료들을 죽이고 장초에 호응했다. 진승은 진여의 진언을 받아들여 진여와 장이와 무신에게 옛 조나라 땅을 평정하도록 맡겼다. 진승은 여러 장수에게 진나라 영토를 정복하기 위해 사방으로 진격하도록 지시했는데, 무신에게는 옛 조나라 영토로 북쪽으로 향하도록 명령했으며, 주부에게는 옛 위나라 영토로 북동쪽으로 향하도록 하는 등이 있었다. 그러나 이 장군들 중 누구도 돌아오지 못했다.[10]무신이 이끄는 군대는 10여 성을 함락하고 괴철의 계책으로 30여 성을 싸움 없이 얻었으나, 진승에게 불만이 있던 장이와 진여가 무신에게 권하여 조나라 왕으로 자립하게 했다. 진승은 분노해 무신 등의 가족을 모두 체포하게 했으나, 상주국 채사가 조나라를 적으로 돌리지 않도록 만류해 장이의 아들 장오를 성도군에 봉하는 등 무신 등의 가족을 후히 대하면서 조나라에 진나라를 공격하도록 명령했다. 무신은 이를 무시하고 자기 부하 한광에게 옛 연나라 지역을 공격하게 했고, 한광은 연나라 지역을 평정한 후 연나라 왕으로 자립했다.[10]
주불은 위나라 땅을 평정하고 옛 제나라 땅인 적(狄)까지 진격했으나, 이 지역의 호족인 전담이 적의 현령을 죽이고 자립해 주불을 무찔렀다. 주불은 위나라로 돌아와 진승에게 당시 진승 곁에 있던 옛 위나라의 영릉군 위구를 위나라 왕으로 삼아달라고 청했고, 진승은 이를 승인했다.[10]
진승은 부하들을 의심하여 중상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죽였다고 전해진다. 주문의 패배와 맞물려 조를 평정한 무신 등이 독립하는 등 권력이 약화되었다. 일용직 인부 시절의 동료가 진승이 훌륭하게 된 모습을 보러 와 성을 구경시켜 주었으나, 진승의 위엄을 손상시키는 내용의 옛날이야기를 시작했기 때문에 손을 써서 죽였다. 그 결과, 처음부터 따르던 자들은 실망하여 진승에게서 떠나갔다.
이세 2년(기원전 208년) 12월[8], 진승 자신도 대군을 이끌고 장한과 회전했지만 대패했고, 형세가 악화되었다고 본 마부 장가에게 배신당해 살해되었다.
2. 5. 진승의 죽음
진승은 부하들을 의심하여 중상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이들을 처형했다. 이 소식과 주문의 패배가 맞물려, 조를 평정한 무신 등이 독립하는 등 권력이 약화되었다. 또한, 일용직 인부 시절의 동료가 진승이 훌륭하게 된 모습을 보러 왔을 때 성을 구경시켜 주었으나, 진승의 위엄을 손상시키는 옛날이야기를 꺼내자 그를 처형했다. 그 결과, 초창기부터 진승을 따르던 자들은 실망하여 그에게서 떠나갔다.[10]주문이 패배했을 무렵, 주력인 오광군은 장한이 이끄는 진나라 군에게 밀리기 시작했다. 오광은 형양을 포위하고 있었지만, 농민 출신이라 군 지휘 능력이 부족하다고 판단한 전장이 쿠데타를 일으켜 오광을 살해하고, 그 머리를 진승에게 보냈다. 진승은 어쩔 수 없이 오광 살해를 추인하고, 전장을 영윤(재상) 겸 상장으로 임명했다.[10]
그러나, 전장이 이끄는 군대도 장한군에게 궤멸당했고, 전장은 전사했다.[10]
이세 2년(기원전 208년) 12월,[8] 진승 자신도 대군을 이끌고 장한과 회전했지만 대패했고, 형세가 악화되었다고 판단한 마부 장가에게 배신당해 살해되었다. 이후, 장가는 진승의 부하였던 여신에게 살해된다.[10]
3. 평가 및 영향
진승은 중국 역사학자들에 의해 진나라의 억압에 맞선 농민들의 위대한 지도자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은 현실과 다르다는 평가가 있다. 송나라 역사가 사마광은 ''자치통감''에서 진승이 사리사욕과 허황된 우월감에 좌우되어 좋은 조언을 따르지 못했다고 평가했다.[6]
사마광에 따르면, 진승은 처음 초나라 왕이 되었을 때, 그의 장인은 진승이 자신에게 평범한 손님처럼 대하고 무릎을 꿇지 않자 화를 내며 떠나려 했다. 진승이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했지만 장인은 그를 무시했다. 이후 진승은 자신의 이미지를 훼손한다는 이유로 옛 친구들을 상당수 처형했고, 그 결과 친구들이 그를 떠나게 되었다. 또한, 진승은 자신의 측근들을 시켜 장군들의 명령이나 행위를 비판하고 트집 잡게 했으며, 엄격한 사람들을 가장 충실한 사람으로 여겼다. 이 때문에 장군들은 진승에게 애정을 느끼지 않았고, 이것이 그의 몰락으로 이어졌다고 한다.[6]
중국 역사가들은 사마광의 진승 묘사에 대해 사소한 논쟁을 벌일 수도 있지만, 대체로 정확하다고 평가한다. 진승은 반란을 시작한 지 몇 달 만에 왕의 칭호를 얻었지만, 정복한 영토를 확고하게 유지하지 못했다. 이는 그 지역 사람들이 그에게 큰 애정을 느끼지 않았기 때문이다.[6]
''사기''에 따르면,[6] 진승은 "어찌 작은 새가 큰 기러기의 뜻을 알겠는가!"라는 속담(연작안지홍곡지지)을 만든 사람이며, 이 속담은 ''삼국지연의''에 자주 등장한다.[7]
진승은 때때로 중국 사찰과 도교 사찰에서 문지기 신으로 등장하며, 보통 오광과 짝을 이룬다.
진승이 세운 패턴은 원나라 말기에 한산동과 유복통이 면밀히 따랐다. 진승과 오광이 일으킨 중국 역사상 최초의 농민 반란은 실패로 끝났지만, 후세에 일의 선구자를 나타내는 말로 '''진승오광'''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또한 진승이 남긴 "연작안지홍곡지지재(燕雀安知鴻鵠之志哉)"와 "왕후장상녕유종야(王侯將相寧有種也)"는 각각 "연작(燕雀)이 어찌 홍곡(鴻鵠)의 뜻을 알겠는가", "왕후장상(王侯將相)이 어찌 씨가 있겠는가"라는 속담으로 남아 있다.
4. 일화
진승이 왕이 되자, 예전에 같이 머슴살이를 하던 친구가 찾아왔다. 진승은 처음에는 친구를 환대했으나, 친구가 진승의 옛 일을 자꾸 말하자 어떤 사람이 진승에게 다음과 같이 간하였다.
이에 진승이 그 친구를 참수하니, 진승의 다른 친구들은 차례로 떠나 모두 사라졌다. 그리고 진승은 주방(朱房)을 중정(中正)에, 호무(胡武)를 사과(司過)에 임명하여 군신들을 감찰하게 하였는데, 이들은 장초의 장수들의 사소한 잘못까지도 낱낱이 추궁했고 법을 무시하고 임의로 장수들을 논죄했다. 진승은 이들을 점차 신임했고, 그래서 장수들은 진승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다.[10]
진승은 중국 역사학자들에 의해 끔찍한 진나라 귀족과 부르주아의 억압에 맞선 농민들의 위대한 지도자로 이상화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은 현실과는 다르다. 진승의 결정은 진나라를 전복하려는 그의 욕망에 의해 동기 부여되었지만, 종종 사리사욕과 허황된 우월감에 의해 좌우되었고, 그 결과 종종 좋은 조언을 따르지 못했다. 송나라 역사가 사마광은 ''자치통감''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중국 역사가들은 사마광의 진승 묘사에 대해 사소한 논쟁을 벌일 수도 있지만, 그것은 꽤 정확해 보인다. 그는 반란을 시작한 지 몇 달 만에 충분한 기반도 없이 왕의 칭호를 얻었다. 그 후 그는 사실상 진현에 갇혔고 정복된 영토를 확고하게 유지할 수 없었는데, 그 지역의 사람들이 그에게 큰 애정을 느끼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기''에 따르면,[6] 진승은 "어찌 작은 새가 큰 기러기의 뜻을 알겠는가!"라는 속담(燕雀安知鴻鵠志)을 만든 사람이며, 이 속담은 ''삼국지연의''에 자주 등장한다.[7]
그는 때때로 중국 사찰과 도교 사찰에서 문지기 신으로 등장하며, 보통 오광과 짝을 이룬다.
진승이 세운 사칭자와 그의 장군의 패턴은 원나라 말기에 한산동과 유복통이 면밀히 따랐다.
참조
[1]
서적
Records of the Grand Historian
[2]
서적
Shiji
[3]
서적
Shiji
[4]
서적
Records of the Grand Historian
[5]
서적
Zizhi Tongjian
[6]
서적
Records of the Grand Historian
[7]
서적
Romance of the Three Kingdoms
[8]
문서
[9]
서적
한서
[10]
서적
사기
[11]
문서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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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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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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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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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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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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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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