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자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태자는 왕위 계승자를 의미하며, 황태자와 왕태자를 아울러 지칭하는 용어이다. 중국에서 유래하여 황제의 후계자를 황태자로, 제후국의 후계자를 왕세자로 불렀다. 한국에서는 고조선부터 고려 중기까지 사용되었으며, 고려 시대에는 원 간섭기 이후 왕세자로 격하되었다. 조선 시대에는 중국의 제후국을 자처하며 왕세자 칭호를 사용하다가, 대한제국 시기에 황태자 칭호가 복권되었다. 서양에서는 황태자와 왕태자를 구분하지 않으며, 법정 추정 상속인에게는 실질적인 작위가 부여되기도 한다. 현대에는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사우디아라비아 등에서 황태자 칭호를 사용하며, 성별에 관계없이 장자 상속을 원칙으로 하는 국가가 늘어나면서 여성 황태자도 증가하는 추세이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태자 |
---|
2. 역사
한국에서는 위만조선부터 고려 중기까지 태자 칭호를 사용하였다. 고려는 원나라 간섭기 이후부터 왕세자 칭호를 사용하였고, 1894년부터 왕태자 칭호를 복권했다.[99] 대한제국 시기에는 황태자로 칭호가 바뀌었으며, 한국사에서 마지막으로 정식 책봉된 황태자는 순종의 이복동생 의민태자 이은이다.
서양에서는 황태자와 왕세자의 경칭을 구분하지 않으며, 부인은 황태자비, 왕태자비 등으로 불린다. 중국에서는 차기 왕위 계승자를 태자, 왕태자라 불렀고, 진나라 통일 이후 황제 칭호가 도입되면서 황태자로 바뀌었다. 황후 소생 적장자 책봉이 관례였으나, 항상 지켜지지는 않았다. 한나라 이후 제후왕 후계자는 세자로 불렸고, 태자가 세자보다 높은 의미를 가졌기에 독립 왕국이나 황제국에 버금가는 왕국은 왕태자를 사용했다. 영국 왕위계승자는 왕태자로 번역하는 것이 맞지만, 조선은 중국 제후국이었기에 왕세자로 낮춰 불렀다.
'황태자'라는 말과 개념의 성립 시기, 최초의 황태자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일본서기』에는 진무 천황기에 처음 등장한다.
에도 시대 국학자 모토오리 노리나가는 『고지키』 중 게이코 천황 관련 기술에서, 중국 황태자와 달리 일본의 "히츠기노미코(日嗣御子)"가 한 명으로 한정되지 않았음을 강조했다.[35] 히츠기노미코의 요건은 황자들의 장유 서열이 아닌, 천황의 "대어심(大御心)"에 맞는 것이었다.[36]
제2차 세계 대전 전 이에나가 사부로의 논문은 후대 연구의 기초가 되었지만,[37] 당시 황실전범 정당화라는 시대적 제약이 있었다.[38] 쇼토쿠 태자가 『일본 서기』에서 "섭정"으로 칭해진 것은 후대 섭정과 달리 독립된 권능이 아닌, "황태자로서 지위의 속성"이었다.[39] 스이코 천황 시대에 '''"황태자 섭정"'''이라는 정치 형태가 생겨났고,[40] 호류지 금당 약사여래상 광배명의 "태자", "도궁성왕(東宮聖王)" 기재로 쇼토쿠 태자가 "입태자(立太子)가 확증된" 최초의 예라고 결론 내렸다.[40] 황태자 섭정은 이후에도 전개되었다.[41]
전후 이노우에 미쓰사다는 율령제 이전 왕위 계승 원리로 '''"오오에(大兄)제"'''를 제창했지만,[42] 논쟁이 있다. "오오에"는 "장자"의 뜻이지만, 황태자제의 선구적 제도로 생각되었다.[43] 그러나 이노우에가 제시한 예 중 즉위한 것은 3가지뿐이라는 비판도 있다.[44]
제15대 응신 천황에서 제16대 닌토쿠 천황 시기에는 이복 형제들이 살해되거나 자살한 후 황위가 계승되었다.[45]
제17대 리추 천황, 제18대 한제이 천황, 제19대 잉교 천황은 형제 계승 시대였다.[46] 스미요시노나카노미코의 반란은 '장자'가 즉위 절대 조건이 아니었음을 시사한다.[46] 오쿠사카노미코보다 연장자인 오아사츠마와카고노스쿠네노미코가 잉교 천황으로 즉위했다.[47]
기노카루노미코는 소행 문제로 비난받아 안코 천황이 추대되었고, 자살하거나 유배되었다. 안코 천황이 마유와노미코에게 살해된 후, 오하쓰세노와카타케노미코는 형제들을 숙청하고 유랴쿠 천황으로 즉위했다. 세이네이 천황 즉위 시 이복 형 호시카와노와카미야노미코가 반란을 일으켰다.
세이네이 천황 붕어 후, 겐소 천황과 닌켄 천황 형제가 서로 왕위를 양보했다. 겐소 천황에게 후사가 없어, 부레쓰 천황이 즉위했다. "응신→닌토쿠→리추→이치노베노오시와노미코→닌켄→부레쓰"라는 "장자를 요건으로 한 황통"이 나타난다.[48]
제26대 게이타이 천황 이후, 동복 형제 간 살육은 없었고, 형제 계승은 안칸 천황 → 센카 천황, 덴지 천황 → 덴무 천황뿐이었다.[49] 이 형제 계승은 내란을 동반했지만,[50] 고분 시대와는 달라 황위 계승의 부활은 아니었다.[50] 이복 형제 계승으로의 이행은 황위 계승 불안정성 회피 목적이었다.[51] "직계 상속"은 미성숙했고, 장자 우선 원칙도 절대 기준이 아니었다.[51]
여성 천황도 출현했지만, 직계 상속 유지를 위한 중간 계승으로, 원리를 뒤엎지는 못했다.[51]
645년 7월 10일, 나카노오에 황자는 을사의 변으로 소가가 이루카를 암살했다. 고교쿠 천황은 양위를 꾀했지만, 후루히토오에 황자와 가루 황자 때문에 고토쿠 천황이 즉위했다.[52] 고토쿠 천황은 후루히토오에 황자를 이유로 즉위를 사양했고,[53] 즉위 이유는 불안정했다.[54]
나카노오에 황자는 후루히토오에 황자와 아리마 황자를 살해하고, 칭제를 거쳐 덴지 천황으로 즉위했다.[55]
671년, 덴지 천황은 오토모 황자를 태정대신에 임명했다. 이는 어머니 신분이 낮은 오토모 황자의 체제 강화를 위한 조치였다.[56] 유력자가 태정대신 지위로 천황위에 오르는 점에서 이전과 달랐다.[57] 하야카와 쇼하치는 "오미 령에 기초한 관제가 아닌, 덴지가 낸 단행법"이라고 했다.[58] 이에나가 사부로는 태정대신 직권이 "황태자 임무였던 만기 섭행"이라며, 황태자와 양립할 수 없다고 했다.[59] 『회풍조』에서 오토모 황자는 황태자, 태정대신에 임명되었다.
671년 9월, 덴지 천황이 오아마 황자에게 후사를 부탁하려 했지만, 오아마 황자는 야마토히메노미코토와 오토모 황자 섭정을 권하고 출가했다. 아라키 도시오는 군주 권력 대행은 황태자 임무라고 했다.[61] 오아마 황자 "입태자"는 부정적 견해가 있다.[62]
덴지 천황 붕어 후, 임신난 결과 덴무 천황이 즉위했다.
683년, 오쓰 황자가 "청조정"을 시작했지만, 태정대신 취임은 아니었다.[63] "제도로서의 태정대신" 지위는 없었다.[57]
685년 1월, 쿠사카베 황자는 정광일위에 서임되어, 황족 서열화와 아스카 기요미하라 령 성립 과정에서 황태자제가 나타났다.[65]
쿠사카베 황자 훙거 후, 다카이치 황자가 태정대신이 되었고, 696년 7월 10일 훙거했다. "황태자 섭정" 개념에서 다카이치 황자는 황태자와 태정대신을 겸했고, "태정대신 관제 출현에 의해 극복"되었다.[59] 나가야 왕을 "친왕"이라 적은 목간,[66] "후 황자 존" 칭호로 보아, 다카이치 황자 지위에 대한 여러 설이 있다.
다카이치 황자 훙거로 후계 분쟁이 일어났고,[65] 황태자위를 둘러싼 최초의 분쟁이었다.[65] 697년 2월 16일, 카루 황자가 입태자되었고, 8월 1일 몬무 천황으로 즉위했다. 최초로 황태자를 거쳐 즉위한 천황이며,[67] 후대 황위 계승을 규정했다.[68] 쇼무 천황은 황위 계승자로서 차별화되었고, 율령제 하 황태자제 확립이 과제가 되었다.[68]
707년 몬무 천황 붕어 후, 겐메이 천황과 겐쇼 천황이 즉위했다. 겐메이 천황 재위 중 오비토 황자가 입태자되었지만, 즉위는 미뤄졌다. 황태자 지위가 차기 천황 필수 지위로 인식되지 않았다.[69] 기 황자는 생후 32일 만에 입태자되었다.[70]
나가야 왕의 변 후, 고묘시 입후가 실현되었고, 최초의 황족 출신 외 황후였다. 쇼무 천황은 "황태자의 어머니"임을 이유로 선언했다.[71]
738년 아베 내친왕이 황태자가 되었다. 겐쇼 천황은 황위 계승 이유가 없었지만,[65] 아베 내친왕은 입태자를 거쳐 즉위했고, 황태자가 차기 천황이라는 인식이 확립되었다.[65] 입태자례도 정비되었다.[65] 후지와라 히로쓰구의 난과 다치바나 나라마로의 난의 원인이 되었다.
2014년 2월, "두 사람 황"과 "태자"가 쓰인 목간 조각이 발견되었다. "황태자"는 쇼무 천황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72][73]
776년, 야마베 친왕을 위해 다치바사토네리가 배치되었다.
7세기 후반, 황자 거처는 "지명+궁" 등으로 표기되었고, "황자궁"은 일반적 거주 형태였다. 토네리 역할이 컸고, 덴무 천황은 신종 강화를 꾀했다.[74] 지토 천황은 황족에게 도심 내 택지를 강제했다.[75] 거주제 변경과 신종 강화가 목적이었다.[76] 황자 거처는 "집" 등으로 칭해졌고, "궁"은 존칭으로 변화했다.[77]
8세기 중반, 요로 율령에서 황태자 가정 기관 춘궁방은 태정관 통제를 받았다.[78] "동궁" 훈은 "미코노미야"였다.[79] 황자궁 퇴전으로 동궁 기구가 성립했다.[80]
후대 황태자는 '''동궁''', '''춘궁'''으로 표기되었고, "토구" 등으로 읽혔다. "황태자가 거주하는 궁전" 뜻이다.
제46대 고켄 천황부터 제54대 닌묘 천황까지 "폐태자"가 5건 발생했다. 천황 즉위와 가까운 시기에 입태자가 이루어졌다.[81] 권력 투쟁 방지 목적이었다.[82]
도소오가 동성애 등으로 폐태자된 후,[83] 황태자위 폐출 단계가 도래했다.[84]
헤이안 시대 초기 다카오카 친왕 이후, 폐태자 유폐, 처형은 없었다. 폐태자는 일반 친왕으로 취급받았다.[86]
남북조 시대부터 에도 시대 중기, 황실 재정난으로 입태자례를 거행할 수 없어 "황태자"가 아닌 '''"저군"'''으로 불렸다.
남조는 입태자례가 행해졌지만, 북조는 고곤겐 천황부터 레이겐 천황까지 300년 이상 저군이 황위에 올랐다. 저군 지정이 차기 황위 계승자 결정이었다.
2019년 5월 1일 현재, 황태자 외 황사가 황위를 계승한 것은 1779년 고모모조노 천황 붕어 후 칸인노미야에서 즉위한 고카쿠 천황이 마지막이다.
닌코 천황부터 제126대 도쿠히토까지 황태자에 의해 황위가 계승되었다.[88]
2. 1. 동아시아
동아시아에서 '태자'라는 칭호는 다양한 역사적, 문화적 맥락을 가진다.국가 | 내용 |
---|---|
중국 | 차기 왕위 계승자를 태자 또는 왕태자라 불렀다. 진 통일 이후 군주 칭호가 황제가 되면서 차기 제위 계승자는 자연스럽게 황태자로 불렸다. 황후 소생의 적장자를 태자로 책봉하는 것이 관례였으나, 항상 지켜지지는 않았다.[99] |
일본 | 황실전범 제8조에 따라 황위를 이을 황자를 황태자라 한다. 황제의 아들이 아닌 황족(예: 동생)이 황위를 계승할 경우에는 황태자가 아닌 다른 칭호를 사용한다. |
한국 | 위만조선부터 고려 중기까지 태자 칭호를 사용했다. 고려는 원나라 간섭기 이후 왕세자 칭호를 사용했고, 1894년 갑오개혁 이후 왕태자 칭호를 복권했다가 대한제국 시기에는 황태자로 불렀다. 일제강점기에는 다시 왕세자로 격하되었다. |
중국어 '황태자'(皇太子)는 '위대한 황제의 아들'을 의미하며, 황제의 아들인 경우에 사용된다. 황제의 손자는 '황태손'(皇太孫)이라고 불렀다. 황태자는 때때로 거처하는 궁궐 위치 때문에 '동궁'(東宮, 동쪽 궁궐)이라고도 불렸다. 황태자가 반드시 장남일 필요는 없었다. 조선 시대에는 황태자를 흔히 동궁(東宮) 또는 왕세자라고 불렀으며, 장남은 원자(元子)라고 불렀다.
2. 1. 1. 한국
한국에서는 위만조선부터 고려 중기까지 태자라는 칭호를 사용하였다. 고려 초기에는 제위 계승권과는 거리가 먼 일반 왕자에게도 태자 칭호가 주어지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예: 원장태자, 효은태자, 효성태자, 원녕태자 등) 심지어 왕자의 아들에게도 태자 칭호가 주어지는 사례도 있었다. (예: 원녕태자의 아들 효당태자 등)[99]고려는 원나라 간섭기 이후부터 태자 대신 왕세자라는 칭호를 사용하였다. 1894년부터 왕태자 칭호를 복권시켰다. 처음에는 대조선국 대군주 폐하와 왕태자 전하였다가, 대한제국이 성립되면서 황제 폐하와 황태자 전하로 바뀌었다. 한국사에서 마지막으로 정식 책봉을 받은 황태자는 순종의 이복동생 의민태자 이은이다.
한반도에서는 고려의 몽골 간섭기부터 조선 후기까지 오랫동안 타국의 책봉 체제 하에 있었기 때문에, 태자 칭호를 사용할 수 없어 국왕의 계승자는 "왕세자"로 불렸다. 청일 전쟁의 결과, 시모노세키 조약이 체결됨으로써 청의 책봉에서 벗어나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개정했을 때 "황태자"를 사용하게 되었다(국왕도 대한제국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한일 병합으로 인해 조선은 일본 제국의 영토가 되었고, 구 황실은 일본의 왕족이 되었으며, 구 황태자는 왕세자가 되었다.
2. 1. 2. 중국
중국에서는 차기 왕위 계승자를 태자, 왕태자라고 불렀다. 진나라 통일 이후 군주의 칭호가 황제가 되면서 차기 제위 계승자의 칭호도 자연스럽게 황태자로 바뀌었다. 원래 황후 소생의 적장자를 태자로 책봉하는 것이 관례였으나, 실제로는 지켜지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99]몽골 제국 시대에는 유목민의 관습에 따라 황제가 황태자를 세우지 않고 쿠릴타이라고 불리는 제후들의 회의에서 후계자가 결정되었다. 그러나 몽골이 원으로 개칭하고 중국의 정치 제도를 적극적으로 도입하면서 황태자제가 도입되었다.
기본적으로 황후의 첫째 아들을 태자로 세운다. 공적이 뛰어난 황자를 태자로 세우는 경우도 있었고, 이 때문에 파벌 항쟁이 일어나는 경우도 있었다. 적자(황후의 아들)가 태어나지 않은 경우, 후궁 소생의 첫째 아들을 태자로 세우지만, 그 지위가 불안정하여 후계자 쟁탈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황태자가 지위에 안주하여 간신을 가까이하고 수양을 게을리하는 등의 폐단이 때때로 나타났다. 하지만 황제가 막강한 권력을 가진 중국에서 황태자를 지명하지 않는 것은 파벌 항쟁의 격화를 초래했기 때문에 황태자 제도는 지속되었다. 청나라 옹정제는 이러한 폐단을 바로잡기 위해 태자밀건 제도를 도입하여, 비밀리에 황태자를 지명하고 황제 사후에 공개하도록 했다.
2. 1. 3. 일본
일본에서는 황실전범 제8조에 '황사인 황자'를 '''황태자'''로, 황태자가 없을 때는 '황사인 황손'을 '''황태손'''으로 정의한다.[31]2019년 5월 1일 제126대 천황으로 즉위한 나루히토에게는 황자가 없다. 황위 계승자인 아키시노노미야 후미히토 친왕은 나루히토의 동생이므로 황태자가 아니다. 따라서 현재 황태자 칭호를 받는 황족은 없다.[31]
1889년 황실 가내법인 구 황실 전범은 '''저사(儲嗣)인 황자'''를 황태자로 규정했다. 1947년 법률로 정해진 현행 황실 전범 제8조는 '''황사(皇嗣)인 황자'''를 황태자로 규정한다. 저사(儲嗣) 또는 황사(皇嗣)는 모두 황위 계승 순위 제1위인 자를 가리키며, 황자는 천황의 아들로 남자를 의미한다.
황태자는 섭정 취임 순위 제1위이며, 1921년부터 1926년 다이쇼 천황 붕어까지 황태자 히로히토 친왕이 섭정을 맡은 예가 있다.
황태자, 황태자비, 황태손, 황태손비 및 내정에 있는 기타 황족의 일상 비용은 '''내정비'''로 충당되며(황실 경제법 제4조), 2019년도 일반 회계 예산 기준 정액은 3억 2,400만 엔이다.[32]
황태자 관련 사무는 궁내청의 '''동궁직'''에서 담당한다(궁내청법 제6조). 동궁직은 황태자, 황태자비, 그 미혼 자녀의 가정을 담당하며, 직원은 약 50명, 요리사, 운전수 등 관리부 직원을 합하면 60여 명이다.[33]
황태자·황태자비는 천황·황후와 달리 원칙적으로 단체의 명예 총재에는 취임하지 않지만, 일본 적십자사 명예 부총재 등에는 취임한다. 황태자와 황태손은 황족 신분을 떠날 수 없다.
역사적으로 '''동궁''', '''춘궁''', '''청궁''', '''일사의 어자''', '''저궁''', '''저군''', '''저왕''', '''제저''', '''황저''', '''황계''', '''원자''', '''태자''' 등으로 불렸다.
여성에게 '태자'가 사용된 예는 아베 내친왕(여성 천황 중 한 명)이 유일하다.
황태자의 주요 역할은 다음과 같다.[34]
- 의례·행사
- 임석(개회식·연구 센터·정상 회담)
- 현소 어신악의
- 국빈·공빈 등 외국 귀빈 관련 행사
- 회석(근로 봉사단·인사 이동자)
- 원유회
- 접견
- 관람·감상(기념전·연주회·미술관)
- 청취·오찬·만찬·다회·점심
- 강의(대학 수업)
- 외국 방문(국제 친선·결혼식·즉위식·대관식·장례식 등)
- 시찰·행행(지방 사정·기업·박물관·연구소)
- 국사 행위 임시 대행
- 진강
- 연구 활동
2. 2. 서양
서양에서는 황태자와 왕세자의 경칭을 구분하지 않으며, 영어로는 Crown Prince, 독일어로는 Kronprinz 등으로 표현한다.[99] 유럽에서는 장자 상속이 일반적이었으나, 중동 등 일부 지역에서는 장자 상속이 왕위 계승의 결정적인 요소가 아니었다.스칸디나비아 왕국에서는 왕위 추정 상속인이 왕세자와 다른 칭호를 가질 수 있는데, 이는 세습 공자(독일어: ''Erbprinz'', 프랑스어: ''prince héréditaire'')이다. 이는 리히텐슈타인의 왕위 계승자가 사용하는 칭호이며, 모나코의 왕위 계승자 또는 추정 상속인도 사용한다. 룩셈부르크에서 왕위 계승자는 세습 대공 칭호를 사용한다(독일어: ''Erbgroßherzog'', 룩셈부르크어: ''ierfgroussherzog'').
러시아 제국에서는 황태자에게 "황제(차르)의 아들"이라는 의미의 단어인 "차레비치(царевич)", "체사레비치(цесаревич)"라는 호칭이 사용되었다. 영국에서는 법정 추정 상속인에게 '''웨일스 공]'''(Prince of Wales)의 칭호가 주어졌으며, 혁명 이전
2. 2. 1. 실질적인 작위
많은 군주국가들은 역사적인 기원을 가진 실질적인 작위를 왕위 계승자에게 사용하거나 사용했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다.국가 | 작위 | 비고 |
---|---|---|
프랑스 왕국 | 도팽 | |
벨기에 | 브라반트 공작 | |
포르투갈 왕국 | 브라간사 공작 | |
잉글랜드 왕국 | 콘월 공작 | 현재 웨일스 공의 작위 중 하나 |
스코틀랜드 왕국 | 로테세이 공작 | 현재 웨일스 공이 스코틀랜드에서 웨일스 작위 대신 사용하는 작위 |
스코틀랜드 왕국 | 캐릭 백작 | 현재 웨일스 공의 스코틀랜드 체류 시 작위 중 하나 |
스코틀랜드 왕국 | 아일스 영주 | 현재 웨일스 공의 스코틀랜드 체류 시 작위 중 하나 |
토스카나 대공국 | 토스카나 대공 | |
보헤미아 왕국 | 모라바 변경백 | |
카스티야 & 스페인 | 아스투리아스 공 | 상속 예정자도 사용 |
아라곤 & 스페인 | 헤로나 공 | |
프랑스 제국 | 프랑스 제국의 황태자 또는 나폴레옹 공 | |
브라질 제국 | 브라질 제국의 황태자 | |
멕시코 제국 | 멕시코 제국의 황태자 | |
네덜란드 | 오렌지 공 | 이와 동등한 작위를 작위 소유자의 배우자가 보유하는지 여부는 네덜란드 의회에서 결정 |
사르데냐 왕국, 이후 이탈리아 왕국 | 피에몬테 공 | 나폴리 공과 번갈아 사용, 조제프 보나파르트 국왕이 한때 수여함 |
프랑스 (1789-1791년 및 7월 왕정, 그리고 1815년부터 포르투갈) | 왕자 | |
불가리아 왕국 | 터르노보 공 | |
나바라 & 스페인 | 비아나 공 | |
헝가리 왕국 | 렉스 유니어(Rex iunior) | 문자 그대로 "주니어 왕"으로, 현직 국왕의 생전에 즉위했기 때문 |
튀니지 왕국 | 마할라 베이 | |
이집트 왕국 | 사이드 공 |
2. 2. 2. 현대의 칭호
유럽에서는 교황과 안도라를 제외한 모든 군주국에서 장자 상속제를 따르기 때문에, 현 군주의 장남 또는 장녀가 왕세자 또는 왕세녀가 된다. 최근에는 벨기에, 덴마크, 룩셈부르크, 노르웨이, 스웨덴, 네덜란드, 영국 등에서 남성 우선 상속법이 폐지되었다.일부 중동 국가에서는 장자 상속이 왕위 계승의 유일한 요소가 아니므로, 왕세자 칭호나 지위가 출생과 함께 주어지지 않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요르단의 하산 빈 탈랄 왕자는 다른 법적 또는 전통적 근거에 따라 왕세자로 지정되었다가 지위를 잃기도 했다.
현재 "태자"(또는 "태녀") 칭호를 사용하는 군주국은 다음과 같다:
국가 | 모국어 칭호 | 현재 계승자 |
---|---|---|
아부다비 (아랍에미리트) | ولي العهد|Walī al-ʻAhdar | 할레드 빈 모하메드 알 나흐얀 |
아프로-볼리비아 (볼리비아) | El Príncipe herederoes | 롤란도 피네도 라레아 |
아지만 (아랍에미리트) | ولي العهد|Walī al-ʻAhdar | 아마르 빈 후마이드 알 누아이미 |
바레인 | ولي العهد|Walī al-ʻAhdar | 살만 빈 하마드 알 할리파 |
브루나이 | Pengiran Muda Mahkotams | 알-무타디 빌라 |
덴마크 | Kronprinsda | 프레데릭 |
두바이 (아랍에미리트) | ولي العهد|Walī al-ʻAhdar | 함단 빈 모하메드 알 막툼 |
푸자이라 (아랍에미리트) | ولي العهد|Walī al-ʻAhdar | 모하메드 빈 하마드 빈 모하메드 알 샤르키 |
일본 | 皇太子|Kōdaishi일본어 | 후미히토 |
조호르 (말레이시아) | Tunku Mahkotams | 틍쿠 이스마일 이드리스 |
요르단 | ولي العهد|Walī al-ʻAhdar | 후세인 빈 압둘라 |
케다 (말레이시아) | Raja Mudams | 틍쿠 사라푸딘 바드샤 |
켈란탄 (말레이시아) | Tengku Mahkotams | 틍쿠 무하마드 파흐리 페트라 |
쿠웨이트 | ولي العهد|Walī al-ʻAhdar | 사바 알-칼리드 알-사바 |
모로코 | ولي العهد|Walī al-ʻAhdar | 물레이 하산 |
노르웨이 | Kronprinsno | 호콘 |
오만 | ولي العهد|Walī al-ʻAhdar | 데이 야젠 빈 하이탐 |
파항 (말레이시아) | Tengku Mahkotams | 틍쿠 하사날 이브라힘 알람 샤 |
페락 (말레이시아) | Raja Mudams | 라자 자파르 |
펄리스 (말레이시아) | Raja Mudams | 틍쿠 사이드 파이즈딘 푸트라 자말루라일 |
라스알카이마 (아랍에미리트) | ولي العهد|Walī al-ʻAhdar | 모하메드 빈 사우드 알 카시미 |
사우디아라비아 | ولي العهد|Walī al-ʻAhdar | 무함마드 빈 살만 |
셀랑고르 (말레이시아) | Raja Mudams | 틍쿠 아미르 샤 |
샤르자 (아랍에미리트) | ولي العهد|Walī al-ʻAhdar | 술탄 빈 모하메드 빈 술탄 알 카시미 |
스웨덴 | Kronprinssv 또는 Kronprinsessasv | 빅토리아 |
트렝가누 (말레이시아) | Yang di-Pertuan Mudams | 틍쿠 무하마드 이스마일 |
태국 | สยามมกุฎราชกุมาร|Sayammakutratchakumanth | 공석 |
통가 | Pilinisi Kalauni통가어 | 투푸우토아 우루칼라 |
움알쿠와인 (아랍에미리트) | ولي العهد|Walī al-ʻAhdar | 라시드 빈 사우드 알 무알라 |
족자카르타 (인도네시아) | Gusti Kanjeng Ratu Mangkubumiid | 망쿠부미 공주 |
폐위된 군주국의 상속자들도 국제적인 예우로 인해 이전 칭호를 계속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
- 파블로스, 그리스 태자
- 레자 팔라비, 이란 태자
- 파라스 샤, 네팔 태자
- 알렉산더, 유고슬라비아 태자
최근 유럽 국가에서는 후계자 문제와 여성의 지위 향상 등으로 인해 계승 순위를 남녀에 관계없이 장자 우선으로 전환하는 국가가 많아졌으며, 이에 따라 여성 태자(태녀)도 증가했다. 2019년 5월 현재,
4명이 있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일부다처제로 인해 초대 국왕 압둘아지즈 이븐 사우드에게 왕위 계승권을 가진 남자가 많아, 국왕의 형제 또는 조카가 왕세자가 되는 경우가 있었다. 그러나 2017년 무함마드 빈 살만이 왕세자로 임명되면서, 1933년 이후 84년 만에 국왕의 친아들이 왕세자를 맡게 되었다.
3. 황태제, 황태손, 황태녀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해 황제의 동생을 황위 계승자로 삼는 경우 '''황태제'''(皇太弟)라고 부른다. 또한 황제의 손자 또는 손녀가 황위 계승자가 된 사람은 '''황태손'''(皇太孫)이라 부른다. 고대 한자문화권 황실에서 황제의 딸이 제위를 계승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면서 제위 계승 서열 1위인 여성은 '''황태녀'''(皇太女) 또는 줄여서 '''태녀'''(太女)라고 불렀는데, 이는 중국의 안락공주, 일본의 고켄 천황, 베트남 리 왕조의 리 소황에게 사용되었다.[6]
동아시아 전통에서 황위 계승자를 나타내는 용어는 다음과 같다.
왕위 계승자가: | 아들 | 손자 |
---|---|---|
중국어 | 황태자 | 황태손 |
일본어 | 고타이시 | 고타이손 |
한국어 | 황태자 | 황태손 |
베트남어 | 호앙 타이 뜨 | 호앙 타이 톤 |
일본 원정 시대에는 황태자의 칭호는 부권의 존재를 의미했다. 지금경에는 제75대 스토쿠 천황이 아버지인 도바 상황에게 양위를 요청받은 것에 따라 동생인 테히토 친왕(훗날 제76대 고노에 천황)을 후계자로 세웠지만, 입태자 시에 테히토 친왕이 황태자가 아닌 "황태제"의 입장에서 세워졌기 때문에, 양위 후의 스토쿠 상황이 고노에 천황에 대한 부권을 행사할 수 없어 원정을 할 수 없었다는 기술이 있다.[89]
에도 시대까지는 차기 황위 계승자가 확정된 시점 등에서 입태자의 예를 거행하고, 그 사람에게 황태자의 신분을 부여하는 것이 통례였으며, 칭호에 관해서는 지금 천황의 아들인 경우뿐만 아니라 형제나 기타 친족인 경우에도 "황태자"라고 칭해지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또한, 동생 궁이 차기 황위 계승자로 지정된 예는 18예가 있지만, 이 중 천황에 의해 칭호가 "황태제"로 정해진 것이 명확한 예는 3예뿐이라고 한다.[90]
4. 법적 추정 상속인
'''법정 추정 상속인'''(法定推定相続人)은 군주위나 작위의 계승에 있어서, 장래 자신보다 상위의 계승권을 가진 인물이 태어날 가능성이 없는 계승권 제1위의 인물을 말한다. 전형적인 예로, 장자 상속제 및 남자 우선 장자 상속제에서의 장남, 혹은 장자 상속제에서의 첫째 아이가 있다. 계승권 제1위가 확정되어 있다는 점에서는 황태자(왕태자)와 공통되지만, "법정 추정 상속인"이라는 단어는 칭호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계보학적인 용어이므로, 본인에게 호칭 등으로 사용되지 않는다.[32]
5. 현대의 황태자/왕세자
현대에는 많은 국가에서 성별에 관계없이 장자 상속을 원칙으로 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여성 황태자/왕세자의 수도 증가하고 있다.[16] 유럽에서는 교황과 안도라를 제외한 모든 군주국에서 장자 상속이 왕위 계승을 규정하며, 현 군주의 장남 또는 장녀가 왕세자 또는 공주 역할을 수행한다. 남성 우선주의는 벨기에, 덴마크, 룩셈부르크, 노르웨이, 스웨덴, 네덜란드, 영국 등에서 폐지되었다.
1990년(헤이세이 2년) 11월 12일, 즉위례정전의에서
일본의 경우, 황실전범 제8조에 따라 '''황사(皇嗣)인 황자'''를 '''황태자'''라고 하며, 황태자가 없을 때는 '''황사(皇嗣)인 황손'''을 '''황태손'''이라고 한다. 2019년 5월 1일, 나루히토 천황 즉위 이후 황자인 황손이 없고, 황위 계승자인 아키시노노미야 후미히토 친왕은 나루히토 천황의 동생이므로, 현재 황태자 칭호를 받는 황족은 없다.
참조
[1]
웹사이트
crown prince (noun)
https://www.britanni[...]
2024-11-03
[2]
웹사이트
crown princess (noun)
https://www.britanni[...]
2024-11-03
[3]
서적
The Role of Monarchy in Modern Democracy: European Monarchies Compared
Bloomsbury Publishing
2020
[4]
문서
荒木 1985
[5]
웹사이트
報道発表「ヴィクトリア・スウェーデン王国皇太子殿下の訪日について」
https://www.mofa.go.[...]
外務省
2005-04-05
[6]
문서
遠山 2010
[7]
문서
荒木 1985
[8]
문서
荒木 1985
[9]
문서
荒木 1985
[10]
문서
荒木 1985
[11]
문서
荒木 1985
[12]
문서
荒木 1985
[13]
문서
懐風藻』大津皇子伝
[14]
문서
荒木 1985
[15]
웹사이트
報道発表「ギヨーム・ルクセンブルク大公国皇太子殿下の来日」
https://www.mofa.go.[...]
外務省
2011-05-12
[16]
문서
続日本紀』天平10年1月13日条「立阿倍内親王為皇太子」、天平勝宝元年7月2日「皇太子受禅即位於大極殿」等
[17]
문서
遠山 2010
[18]
문서
大友 2019
[19]
문서
続日本紀』天平十五年五月癸卯条
[20]
문서
遠山 2010
[21]
문서
遠山 2010
[22]
문서
大友 2019
[23]
문서
大友 2019
[24]
문서
大友 2019
[25]
문서
大友 2019
[26]
문서
続日本紀』天平十七年八月癸丑条
[27]
문서
大友 2019
[28]
문서
遠山 2010
[29]
웹사이트
皇室典範に関する有識者会議報告書 平成17年11月24日
https://www.kantei.g[...]
総理大臣官邸
[30]
문서
大友 2019
[31]
뉴스
秋篠宮さま、皇位継承1位の「皇嗣」に 皇太子は空位
https://www.nikkei.c[...]
2019-05-01
[32]
웹사이트
宮内庁 予算
https://www.kunaicho[...]
[33]
웹사이트
宮内庁が密かに頭を悩ます 浩宮が即位したら、「皇太子」がいなくなる 秋篠宮も愛子さまも悠仁さまも、皇太子にはなれない
https://gendai.media[...]
[34]
웹사이트
皇太子同妃両殿下のご日程
https://www.kunaicho[...]
[35]
문서
荒木 1985
[36]
서적
荒木 1985
[37]
서적
荒木 1985
[38]
서적
荒木 1985
[39]
서적
荒木 1985
[40]
서적
荒木 1985
[41]
서적
荒木 1985
[42]
서적
荒木 1985
[43]
서적
荒木 1985
[44]
서적
荒木 1985
[45]
서적
荒木 1985
[46]
서적
荒木 1985
[47]
서적
荒木 1985
[48]
서적
荒木 1985
[49]
서적
荒木 1985
[50]
서적
荒木 1985
[51]
서적
荒木 1985
[52]
서적
日本書紀巻第25孝徳天皇記
[53]
서적
荒木 1985
[54]
서적
荒木 1985
[55]
서적
荒木 1985
[56]
서적
荒木 1985
[57]
서적
荒木 1985
[58]
서적
荒木 1985
[59]
서적
荒木 1985
[60]
서적
荒木 1985
[61]
서적
荒木 1985
[62]
서적
荒木 1985
[63]
서적
荒木 1985
[64]
서적
荒木 1985
[65]
서적
荒木 1985
[66]
문서
詳細は長屋王を参照。
[67]
서적
遠山 2010
[68]
서적
荒木 1985
[69]
서적
荒木 1985
[70]
서적
遠山 2010
[71]
문서
遠山 2010
[72]
뉴스
平城京跡の木簡に「皇太子」 全国初出土、即位前の聖武天皇か 奈文研
https://www.sankei.c[...]
産経ニュース
2015-07-10
[73]
뉴스
平城京跡の削りくずに「皇太子」 年輪年代測定で裏付け
http://www.asahi.com[...]
朝日新聞デジタル
2017-07-04
[74]
문서
荒木 1985
[75]
문서
荒木 1985
[76]
문서
荒木 1985
[77]
문서
荒木 1985
[78]
문서
荒木 1985
[79]
문서
荒木 1985
[80]
문서
荒木 1985
[81]
문서
荒木 1985
[82]
문서
荒木 1985
[83]
문서
遠山 2010
[84]
문서
荒木 1985
[85]
서적
平城天皇
吉川弘文館
[86]
간행물
平安時代における親王の身分と身体
同成社
2021
[87]
문서
後桃園天皇の皇女欣子内親王は、光格天皇の中宮として温仁親王と悦仁親王を儲けるが、何も幼くして薨去した。これにより中御門天皇からの皇統は途絶えてしまう。
[88]
문서
父帝から見て続柄が長男にあたる皇太子によって皇位が継承(いわゆる長子相続)されたのは第124代昭和天皇(大正天皇第一皇子)・第125代天皇明仁(昭和天皇第一皇子)・第126代天皇徳仁(明仁第一皇子)のみである。仁孝天皇から大正天皇までは、いずれも兄弟が幼くして薨去したことにより、自身が立太子された。
[89]
논문
"<論説>「今鏡」研究の新視点"
http://hdl.handle.ne[...]
立正大学文学部
1994
[90]
웹사이트
平成29年4月21日 天皇の公務の負担軽減等に関する有識者会議 最終報告
https://www.kantei.g[...]
[91]
문서
2017 原
[92]
문서
2017 原
[93]
문서
2017 原
[94]
서적
日本史小百科 天皇
東京堂出版
1981
[95]
문서
沖縄大百科事典(下) 1983
[96]
뉴스
国内で高い人気を誇る「スウェーデン王室」」欧州王室改革のモデル
読売新聞
2000-05-31
[97]
뉴스
[追悼抄]3月 ベアトリックス女王の母・ユリアナ前女王
読売新聞
2004-04-18
[98]
웹사이트
外務省 スルタン・サウジアラビア王国皇太子薨去に際しての弔意メッセージの発出
https://www.mofa.go.[...]
[99]
웹사이트
《조선왕조실록》1894년(고종 31년) 12월 17일 1번째 기사
http://sillok.histor[...]
관련 사건 타임라인
( 최근 20개의 뉴스만 표기 됩니다. )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