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스 압 그리퍼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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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러스 압 그리피드는 12세기 데허이바르스 왕국의 지배자였다. 그는 1132년에 태어나 1197년에 사망했으며, 데허이바르스 왕국의 재건과 웨일스 문화 발전에 기여했다. 1146년 란스테판 성 전투에 참여하며 군사적 경험을 쌓았고, 1155년 데허이바르스의 통치자가 되었다. 1164년 웨일스 봉기에 참여하여 잉글랜드에 대항했으며, 헨리 2세와 평화를 맺기도 했다. 그는 여러 성을 건설하고 에스테드포드를 개최하는 등 문화 활동을 지원했다. 말년에는 아들들의 반란으로 어려움을 겪었으며, 1197년 사망하여 성 다윗 대성당에 묻혔다. 그의 자녀들은 웨일스의 여러 지역을 통치했으며, 튜더 왕가와 윈저 왕가의 조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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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스 압 그리퍼드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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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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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러스 압 그리피드 (Rhys ap Gruffydd) |
별칭 | (주군 러스, the Lord Rhys) |
출생 | 1132년경 |
출생지 | 카에오, 칸트레프 마우르, 데허이바르스 |
사망 | 1197년 4월 28일 (65세 추정) |
매장지 | 세인트 데이비드 대성당, 펨브로크셔, 웨일스 |
가문 | 디네부르 |
통치 | |
데허이바르스 공 | 1155년–1197년 |
이전 통치자 | 마레디드 압 그리피드 |
후임 통치자 | 그리피드 압 러스 2세 |
가족 관계 | |
아버지 | 그리피드 압 러스 |
어머니 | 구엔리안 베르흐 그리피드 |
배우자 | 구엔리안 베르흐 마도그 |
자녀 | 그리피드 압 러스 2세 마엘군 압 러스 러스 그러그 외 다수 |
2. 가계와 초기 생애
리스 압 테우두르의 손자이자 그루피드 압 리스의 아들인 리스 압 그리피드는 1132년 웨일스 남서부 데허이바르스 왕국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그위네드 왕국의 왕 그루피드 압 키난의 딸 그웬리안 페르치 그루피드였다.[4] 리스의 할아버지 리스 압 테우두르는 1093년 노르만족과의 전투에서 사망했고, 데허이바르스 왕국은 대부분 노르만 영주들에게 넘어갔다.[8] 아버지 그루피드 압 리스는 아일랜드로 피신했다가[8] 데허이바르스로 돌아와 왕국의 일부를 통치했지만, 1127년 다시 아일랜드로 피신해야 했다.[9] 리스가 태어날 당시, 그의 아버지는 칸트레프 마워의 코모테인 카이오만을 소유하고 있었다.[9]
1136년 잉글랜드 왕 헨리 1세가 사망하고, 스테판과 마틸다의 왕위 계승 분쟁으로 인한 무정부 시대가 시작되자, 웨일스인들은 노르만족에 대항할 기회를 얻었다.[10] 같은 해 남웨일스 전역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그루피드 압 리스는 로호르 근처 전투에서 노르만족을 격파했다.[10] 이후 그루피드는 장인인 그루피드 압 키난의 도움을 받기 위해 그위네드로 떠났고,[10] 그의 아내 그웬리안은 키드웰리 공격을 이끌었으나 패배하여 사망했다.[11]
오와인 그위네드와 카드왈라드르 압 그루피드는 크루그 마워 전투에서 노르만족에게 승리하고 세레디기온을 되찾았지만, 그위네드에 합병되었다.[12] 1137년 그루피드 압 리스는 사망했고, 리스의 이복형 아나라우드가 가족의 지도자가 되었다. 1143년 아나라우드는 오와인 그위네드의 형제 카드왈라드르 압 그루피드에게 살해당했다.[12]
2. 1. 초기 전투 (1146–1155)
리스는 1146년에 형제들인 카델, 마레두드와 함께 란스테판 성을 공격하여 점령하면서 첫 군사 경험을 쌓았다.[13] 이후 1147년에는 위스턴, 1150년에는 카마던, 1151년에는 로거를 점령했다. 1151년, 카델은 텐비에서 사냥을 하던 중 노르만 및 플랑드르 기사단에게 공격받아 죽을 뻔했다. 그는 살아남았지만, 부상으로 인해 적극적인 역할을 할 수 없게 되었고, 1153년에는 로마로 순례를 떠났다.[14]마레두드는 데헤우바르스의 통치자가 되어 1136년부터 기네드가 점령하고 있던 세레디지온을 되찾기 위한 작전을 1150년부터 계속했다. 마레두드와 리스는 1153년까지 하웰 압 오와인 기네드를 세레디지온에서 몰아냈다. 같은 해에 리스는 독립적인 지휘관으로 처음 기록되었으며, 군대를 이끌고 노르만 성인 세인트 클리어스를 점령했다.[15] 마레두드와 리스는 또한 그 해에 텐비와 아베라본의 성을 파괴했다. 마레두드는 1155년 25세의 나이로 사망했고, 리스는 데헤우바르스의 통치자가 되었다. 이 무렵 그는 포위스 왕국의 왕자 마도그 압 마레두드의 딸인 웬리안 페르치 마도그와 결혼했다.[16]
3. 통치 초기
러스 압 그리퍼드는 즉위 초기에 여러 차례 영토 분쟁과 정치적 격변을 겪었다. 1154년 잉글랜드 국왕 스티븐이 사망하고 잉글랜드 국왕 헨리 2세가 즉위하면서 웨일스 지역에 대한 잉글랜드의 간섭이 강화되기 시작했다.
1156년, 리스는 오와인 기네드의 침략 위협에 대비하여 아버디피에 성을 건설했지만, 실제 침략은 발생하지 않았다.[17][18] 1157년 헨리 2세는 기네드를 침공하여 오와인 기네드가 웨일스 북동부 일부 영토를 포기하도록 했다.[19]
1158년, 헨리 2세는 데헤우바르스를 침공할 준비를 했고, 리스는 저항하려 했으나 의회의 설득으로 평화 협상에 나섰다. 그러나 협상 조건은 가혹하여 리스는 칸트레프 마워를 제외한 모든 영토를 빼앗겼다.[20] 이후 월터 드 클리포드가 리스의 영토를 침략하자, 리스는 무력으로 란도버리 성을 점령하고 세레디지온을 탈환했다. 헨리 2세는 다시 침략을 준비했고, 리스는 항복하며 아들 하웰을 인질로 넘겨야 했다.[21]
1162년, 리스는 다시 빼앗긴 영토를 되찾기 위해 란도버리 성을 점령했다. 1163년 헨리 2세는 데헤우바르스를 다시 침략할 준비를 했고, 리스는 왕과 협상하여 또 다른 아들 마레두드를 인질로 넘겨야 했다. 리스는 체포되어 잉글랜드로 끌려갔으나, 헨리 2세는 그를 석방하고 칸트레프 마워를 통치하도록 허용했다. 이후 리스는 오와인 기네드, 스코틀랜드 국왕 말콤 4세와 함께 헨리 2세에게 경의를 표했다.[24]
1164년, 웨일스 공작들이 연합하여 봉기를 일으켰다. 리스는 조카 아이니온 압 아나라우드가 로저 드 클레어에게 살해당하자 봉기에 참여하여 세레디기온을 탈환했다.[26] 1165년, 헨리 2세는 다시 웨일스를 침공했지만, 베르윈 언덕에서 오와인 기네드가 이끄는 웨일스 연합군과 대치했다. 폭우로 인해 헨리 2세는 후퇴했고, 분노하여 인질들의 눈을 멀게 했다. 리스의 아들 마레두드의 눈도 멀게 되었으나, 다른 아들 하웰은 희생되지 않았다.[29] 리스는 데헤우바르스로 돌아가 카디건 성을 점령하고 불태웠으며, 성주 로버트 피츠-스테판을 포로로 잡았다. 얼마 후 리스는 실게르간 성을 점령했다.[29]
1167년, 리스는 오와인 기네드와 함께 남부 포위스의 오와인 키페일리오그를 공격했고, 3주 동안 오와인이 러들란 성을 포위하는 것을 도왔다.[30] 1168년에는 바일스에서 노르만족을 공격하여 성을 파괴했다.
1169년과 1170년, 노르만족의 아일랜드 침공이 일어났고, 리스는 이 침공에서 이득을 얻었다. 레인스터의 왕 디아르마이트 맥 머치다는 리스에게 로버트 피츠-스테판을 석방하여 아일랜드 원정에 참여하도록 요청했다. 리스는 이듬해 그를 석방했고 피츠-스테판은 웨스퍼드에 상륙한 노르만 군대의 선봉을 이끌었다. 1170년 말, 오와인 기네드의 죽음으로 리스는 웨일스 공작들의 인정받는 지도자가 되었다.[32]
3. 1. 영토 상실 (1155–1163)
리스는 오와인 기네드가 기네드를 위해 세레디지온을 되찾기 위해 침략할 계획이라는 소문을 들었다. 리스는 1156년 아버디피에 성을 건설하여 대응했다.[17] 그러나 위협받던 침략은 일어나지 않았다.[18]잉글랜드 국왕 스티븐은 1154년 10월에 사망하여 잉글랜드 국왕 헨리 2세가 웨일스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1157년 헨리 2세는 기네드를 침략하여 오와인 기네드가 웨일스 북동부의 일부 영토를 포기하도록 하였다.[19]
1158년 헨리 2세는 데헤우바르스를 침략할 준비를 했다. 리스는 저항할 계획을 세웠지만, 의회는 평화 조건을 논의하기 위해 왕을 만날 것을 설득했다. 조건은 가혹했다. 리스는 칸트레프 마워를 제외한 모든 재산을 빼앗겼다.[20]
월터 드 클리포드는 칸트레프 비찬을 되찾은 후 칸트레프 마워에 있는 리스의 영토를 침략했다. 왕에게 항소했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고, 리스는 무력을 사용하여 란도버리 성을 점령한 다음 세레디지온을 점령했다. 헨리 왕은 또 다른 침략을 준비하여 대응했고, 리스는 저항 없이 항복했다. 그는 아들 하웰을 포함하여 인질을 넘겨야 했다.[21]
1162년, 리스는 다시 빼앗긴 영토를 되찾으려 시도하여 란도버리 성을 점령했다. 1163년 헨리 2세는 데헤우바르스를 다시 침략할 준비를 했다. 리스는 왕을 만나 조건을 논의했고, 또 다른 아들 마레두드를 포함하여 더 많은 인질을 넘겨야 했다. 그는 체포되어 포로로 잉글랜드로 끌려갔다.[23] 헨리는 리스를 석방하고 칸트레프 마워를 통치하도록 허용하기로 결정했다. 리스는 오와인 기네드, 스코틀랜드 국왕 말콤 4세와 함께 우드스톡에 나타나 헨리 앞에서 경의를 표하도록 소환되었다.[24]
3. 2. 웨일스 봉기 (1164–1170)
1164년, 모든 웨일스 공작들이 연합하여 봉기를 일으켰다. 리스는 잉글랜드에서 데헤우바르스로 돌아와 인근 노르만 영주들이 칸트레프 마워를 위협하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의 조카 아이니온 압 아나라우드가 로저 드 클레어의 사주로 살해당하자 반란을 일으켰다. 리스는 세레디기온을 침략하여 카디건 마을과 성을 제외한 모든 곳을 탈환했다.[26]1165년 헨리 왕은 웨일스를 재침공했지만, 베르윈 언덕을 넘어가는 경로를 택했다. 그는 오와인 기네드가 이끄는 웨일스 연합군과 만났으며, 리스도 포함되었다. ''브루트 어 티위소기온''에 따르면, 헨리 왕은 잉글랜드, 노르망디 등에서 군대를 모았고, 이에 맞서 오와인과 카드왈라드는 기네드의 모든 군대, 리스 압 그리피드는 데헤우바르스의 모든 군대, 이오르워스 더 레드는 포위스의 모든 군대와 함께 왔다.[27][28] 폭우로 인해 헨리의 군대는 후퇴했고, 헨리는 분노하여 인질들의 눈을 멀게 했다. 리스의 아들 마레두드의 눈도 멀게 되었으나, 다른 아들 하웰은 희생되지 않았다.[29]
리스는 데헤우바르스로 돌아가 카디건 성을 점령하고 불태웠다. 그는 주둔군을 떠나도록 허용했지만, 성주 로버트 피츠-스테판을 포로로 잡았다. 얼마 후 리스는 실게르간 성을 점령했다.[29]
1167년, 리스는 오와인 기네드와 함께 남부 포위스의 오와인 키페일리오그를 공격했고, 3주 동안 오와인이 러들란 성의 노르만 성을 포위하는 것을 도왔다.[30] 1168년에는 바일스에서 노르만족을 공격하여 성을 파괴했다.
1169년과 1170년, 노르만족의 아일랜드 침공은 주로 남부 웨일스의 캄브로-노르만 영주들이 이끌었는데, 리스는 이 침공에서 이득을 얻었다. 1167년 자신의 왕국에서 쫓겨난 레인스터의 왕 디아르마이트 맥 머치다는 리스에게 로버트 피츠-스테판을 석방하여 아일랜드 원정에 참여하도록 요청했다. 리스는 처음에는 강요하지 않았지만, 이듬해 그를 석방했고 1169년 피츠-스테판은 웨스퍼드에 상륙한 노르만 군대의 선봉을 이끌었다. 노르만 군대의 지도자 리차드 드 클레어("스트롱보우")는 1170년에 뒤따랐다. 1170년 말, 오와인 기네드의 죽음으로 리스는 웨일스 공작들의 인정받는 지도자가 되었다.[32]
4. 통치 후기
헨리 2세와 러스 압 그리퍼드는 1171년 헨리 2세가 아일랜드 문제로 인해 평화를 맺으면서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헨리 2세는 리처드 드 클레어가 아일랜드에 독립적인 노르만 왕국을 세우는 것을 막고자 했다.[34] 러스는 헨리 2세와 뉴넘에서 만나 많은 공물을 바치기로 하고, 빼앗은 토지를 소유하는 것을 확정받았다.[35] 1172년, 러스는 라펀에서 헨리 2세를 다시 만났고, 헨리 2세는 그를 "모든 데헤우바르스에서 그의 대리인"으로 임명했다.[36] 이는 러스가 단순한 웨일스 통치자를 넘어 앙주 제국의 위대한 봉건 영주 중 한 명이 되었음을 의미한다.[37][38]
헨리 2세와 러스의 합의는 1189년 헨리 2세가 죽을 때까지 지속되었다. 1173년 헨리 2세의 아들들이 반역했을 때 러스는 아들을 보내 왕을 도왔고, 1174년에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터트버리 포위를 도왔다.[39] 1175년 글로스터 회의에서 러스는 다른 웨일스 군주들과 함께 평화 유지를 위한 상호 지원 협약에 서명했다.[40] 1177년 옥스퍼드 회의에서 헨리 2세는 러스에게 메이리온니드를 주었다.[41]
러스는 카드건 성을 시작으로 여러 석조 성을 지었고, 카레그 케넨 성도 지었다.[42] 그는 1176년 크리스마스에 카드건에서 시와 노래 축제를 열었는데, 이는 최초로 기록된 에이스테드포드로 여겨진다.[43] 러스는 탈리 수도원과 란릴르 수녀원을 설립하고, 휘틀랜드와 스트라타 플로리다를 후원했다.[46][47]
1189년 헨리 2세가 사망하고 리처드 1세가 왕위를 계승하자, 러스는 노르만 영주들을 공격하여 여러 성을 점령했다.[49] 리처드의 동생 존 왕자가 평화를 시도했지만, 리처드 1세는 러스와 만나지 않았고 적대 행위는 계속되었다.[50]
만년에 러스는 아들들, 특히 마엘건과 그루피드를 통제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아들들 간의 갈등으로 인해 러스는 네번 성에 투옥되기도 했다.[53] 1196년, 러스는 노르만족에 대한 마지막 군사 작전을 시작하여 여러 성을 점령하고 래드너 근처에서 승리했다.[55]
러스는 1197년 4월 28일[57] 사망하여 성 다윗 대성당에 묻혔다.[58] 러스는 성 다윗 주교와 다툰 후 파문당한 채 사망했기 때문에, 대성당에 묻히기 전에 그의 시신은 채찍질을 당했다.[60] 러스는 적자 장남 그루피드를 후계자로 지명했지만, 사생아였던 마엘군이 이를 거부하면서 갈등이 발생했다.[61]
4. 1. 헨리 2세와의 평화 (1171–1188)
1171년 헨리 2세는 아일랜드 문제로 인해 리스와 평화를 맺고자 했다. 헨리 2세는 다이르마이트의 딸과 결혼하여 레인스터의 상속자가 된 리처드 드 클레어가 아일랜드에 독립적인 노르만 왕국을 세우는 것을 막고자 했다.[34] 헨리 2세는 리스와 만나기 위해 뉴넘으로 갔고, 리스는 말 300마리와 소 4,000마리의 공물을 바치기로 했지만, 노르만 영주로부터 빼앗은 모든 토지를 소유하는 것을 확정받았다.[35] 그들은 헨리 2세가 아일랜드로 건너가기를 기다리는 동안 그해 10월 펨브로크에서 다시 만났다. 리스는 말 300마리 중 86마리를 모았지만 헨리 2세는 그중 36마리만 받기로 동의하고 아일랜드에서 돌아온 후에 나머지 공물을 면제했다. 수년 동안 인질로 잡혀 있던 리스의 아들 하웰이 그에게 돌려보내졌다.[36]1172년 헨리 2세가 아일랜드에서 돌아왔을 때 라펀에서 다시 만났고, 곧 헨리 2세는 리스를 "모든 데헤우바르스에서 그의 대리인"으로 임명했다.[36] A. D. Carr에 따르면, 이는 왕이 동료 웨일스 통치자에게 주장할 수 있는 모든 권한을 리스에게 위임한다는 것을 의미했으며, 왕의 앵글로-노르만 신민에 대한 권한도 포함했을 수 있다. 리스는 단순한 웨일스 통치자 이상으로, 앙주 제국의 위대한 봉건 영주 중 한 명이었다.[37][38]
헨리 2세와 리스 사이의 합의는 1189년 헨리 2세가 죽을 때까지 지속되었다. 1173년 헨리 2세의 아들들이 그에게 반역했을 때 리스는 그의 아들 하웰 세이스를 노르망디로 보내 왕을 도왔고, 1174년에는 반역자 윌리엄 드 페러스 백작의 요새 포위를 돕기 위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스태퍼드셔의 터트버리로 갔다.[39] 리스가 터트버리의 함락 후 웨일스로 돌아왔을 때 그는 노르망디에서 복무하기 위해 1,000명의 병사를 왕에게 남겨두었다. 1175년 헨리 왕은 글로스터에서 회의를 열었고, 리스를 포함한 많은 웨일스 군주들이 참석하여 웨일스에서의 평화와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상호 지원 협약에 서명했다.[40] 1177년, 기네드의 주요 세력으로 떠오른 다피드 압 오와인과 륑 그위 아 하프렌 출신인 카드왈론 압 마도그는 옥스퍼드에서 열린 회의에서 헨리 2세에게 충성과 복종을 맹세했다. 이 회의에서 왕은 기네드 왕국의 일부인 메이리온니드를 리스에게 주었다.[41]
리스는 여러 개의 석조 성을 지었는데, 그 시작은 웨일스에서 가장 초기에 기록된 토착 석조 성인 카드건 성이었다.[42] 그는 또한 란다일로 근처에 있는 카레그 케넨 성을 지었는데, 이 성은 산 정상의 멋진 위치에 자리 잡고 있다. 그는 1176년 크리스마스에 카드건의 궁정에서 시와 노래 축제를 열었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최초로 기록된 에이스테드포드로 여겨진다.[43] 축제는 웨일스 전역과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및 어쩌면 프랑스에서도 1년 전에 발표되었다. 시상으로 두 개의 의자가 수여되었는데, 하나는 최고의 시를, 다른 하나는 최고의 음악 공연을 위한 것이었다. J. E. Caerwyn Williams는 이 행사가 비슷한 프랑스 ''퓌''의 적응일 수 있다고 제안한다.[44] R.R. Davies는 전통적으로 하웰 다가 휘틀랜드에서 성문화한 웨일스 법의 텍스트가 리스의 후원 아래 처음으로 책 형태로 조립되었다고 제안한다.[45]
리스는 이 기간 동안 두 개의 종교 시설을 설립했다. 탈리 수도원은 웨일스 최초의 프레몽트레 수도원이었고, 란릴르는 시토회 수녀원이었는데, 웨일스에서 두 번째로 설립된 수녀원이자 번창한 최초의 수녀원이었다.[46] 그는 휘틀랜드와 스트라타 플로리다의 후원자가 되었고 두 시설 모두에 큰 보조금을 지급했다.[47]
4. 2. 마지막 전투 (1189–1196)
헨리 2세가 1189년에 사망하고 리처드 1세가 왕위를 계승하자, 리스는 더 이상 헨리 왕과의 합의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영토 주변의 노르만 영주들을 공격했다. 그는 펨브로크, 해버퍼드웨스트 및 고어를 황폐화시키고, 세인트 클리어 성, 래프런 및 란스테판을 점령했다.[49] 리처드의 동생인 존 왕자(훗날 존 왕)는 9월에 웨일스로 와서 평화를 시도했지만, 리처드 1세는 리스를 만나지 않았고 적대 행위는 계속되었다.[50]만년에 리스는 아들들, 특히 마엘건과 그루피드를 통제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1189년 그루피드는 리스를 설득하여 마엘건을 투옥시켰고, 마엘건은 그루피드의 장인인 윌리엄 드 브라오스에게 넘겨졌다. 1191년에는 그루피드가 아버지를 설득하여 케마이스 영지와 네번 성을 합병하도록 하였는데, 이는 제랄두스 캄브렌시스에게 비판받았다.[51] 1192년 리스는 마엘건을 석방했지만, 마엘건과 그루피드는 앙숙이 되었다. 1194년 리스는 마엘건과 하웰과의 전투에서 패배하여 네번 성에 투옥되었지만, 하웰은 나중에 마엘건의 동의 없이 아버지를 석방했다.[53] 1195년에 리스는 다른 두 아들인 리스 그리그와 마레두드가 라니머드브리 성과 디네부르 성을 점령하자, 그들을 투옥시켰다.[54]
1196년, 리스는 노르만족에 대한 마지막 군사 작전을 시작했다. 그는 카마던, 콜윈, 래드너 및 페인스캐슬을 포함한 여러 성을 점령하고, 로저 드 모티머와 휴 드 세이가 이끄는 군대를 래드너 근처에서 격파하여 40명의 기사를 죽였다. 이것이 리스의 마지막 전투였다.[55]
4. 3. 죽음과 유산 (1197)
리스는 1197년 4월 28일[57] 예상치 못하게 사망하여 성 다윗 대성당에 묻혔다. ''브루트 어 티위소기온''의 연대기 기록은 1197년에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58]
"... 영국 섬 전역에 큰 역병이 돌았습니다... 그리고 그 폭풍우는 무수한 사람들과 많은 귀족들과 많은 왕자들을 죽였고 아무도 남겨두지 않았습니다. 그 해, 5월 1일 전 4일, 데헤우바르스의 왕자이자 모든 웨일스의 정복되지 않은 수장인 Rhys ap Gruffydd가 사망했습니다."[59]
리스는 몇 년 전 주교의 말 일부를 훔친 것에 대해 성 다윗 주교 피터 드 레리아와 다툰 후 파문당한 채 사망했다. 그가 대성당에 묻히기 전에 주교는 사후 참회를 위해 그의 시신을 채찍질했다.[60]
리스는 적자 장남 그루피드 압 리스 2세를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했다. 그의 아버지 사망 직후 그루피드는 국사, 휴버트 월터 대주교를 국경에서 만나 상속자로 확정되었다. 장남이었지만 사생아였던 마엘군은 이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했고 파워스의 그웬위넌 압 오와인으로부터 군사적 지원을 받았다. 마엘군은 아베리스트위스의 마을과 성을 점령하고 그루피드를 포획하여 그웬위넌에게 넘겼다. 그웬위넌은 나중에 그를 왕에게 넘겼고, 왕은 그를 코르프 성에 감금했다.[61]
5. 성격 및 역사적 평가
지랄두스 캄브렌시스는 자신의 저술에서 리스를 "뛰어난 재치와 재치 있는 응답을 가진 사람"이라고 묘사했다.[62] 제럴드는 1186년 헤리퍼드에서 열린 연회에서 리스가 클레어 가문의 두 사람 사이에 앉았던 일화를 소개했다. 리스가 이전에 클레어 가문 소유였던 세레디기온의 토지를 점령했기 때문에 긴장감이 감돌 수 있었지만, 리스와 제럴드는 가족 관계에 대한 정중한 칭찬과 유쾌한 농담을 주고받으며 상황을 원만하게 해결했다.[63]
리스는 1188년 십자군을 위한 병력을 모집하기 위해 웨일스를 방문한 제럴드와 아치비숍 볼드윈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제럴드는 리스의 "친절함"을 여러 번 언급하며, 리스가 카디건에서 세레디기온 북부 국경까지 그들과 동행한 것을 두고 "이토록 훌륭한 왕자에게서 칭찬할 만한 관대함"이라고 표현했다.[64]
월터 맵은 리스를 "내가 보고 알고 증오하는 이 왕"이라고 묘사했지만, "나는 나의 증오가 그의 가치를 훼손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며, 질투를 통해 어떤 사람의 우수성을 억누르는 것을 결코 바라지 않는다"고 말했다.[66] 그는 리스가 포위되어 굶주림에 굴복하려는 적에게 식량을 제공한 일화를 소개하며, 리스가 승리를 늦추었지만 그 명성을 높였다고 평가했다.[67]
데이비스는 리스의 업적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68]
리스는 50년 넘게 웨일스 정치 무대에서 활약하며 데헤우바르트 왕국을 재건하고 최고의 웨일스 왕국으로 만들었다. 그는 "남부의 위엄"을 회복한 인물로 평가받는다.[69]
다만, 데이비스는 리스의 업적에 두 가지 결함이 있다고 지적한다. 첫째는 헨리 2세와의 개인적인 합의가 헨리 2세 사후에도 지속되지 못했다는 점이다. 둘째는 아들들을 통제하지 못하고 그들이 그루피드를 후계자로 받아들이도록 강요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70]
6. 자녀
러스는 적어도 아들 아홉 명과 딸 여덟 명을 두었다.[71] 세 아들의 이름은 마레두드였고, 두 딸의 이름은 웬리언이었다.
- 그루피드 압 러스 2세(1201년 사망)는 러스의 적법한 장남으로, 러스의 후계자로 지명되었다. 윌리엄 드 브라오즈와 모드 드 브라오즈의 딸인 모드 드 브라오즈와 결혼했다.[72]
- 마엘군 압 러스(1231년 사망)는 장남이었지만 사생아였다.
- 러스 그리그(1233년 사망)는 클레어 백작의 딸과 결혼했다.[73]
- 하웰 압 러스 (1231년 사망)
- 마레두드 압 러스 (1239년 사망)
- 또 다른 마레두드 (1227년 사망)는 카디건의 대주교가 되었다.[72]
- 러스의 딸 네스트 또는 아네스트 페르흐 러스는 로드리 압 오와인(기네드의 서부 지역의 왕자)와 결혼했다.
- 웬리언 (1178년경 ~ 1236년)은 에드니페드 휘찬(리웰린 더 그레이트 치하의 기네드의 집사)와 결혼했고, 그녀를 통해 러스는 튜더 왕가의 조상이 되었다. 튜더 왕가가 스튜어트 왕가와 혼인하면서 러스는 현재 영국 통치 왕가 및 유럽의 여러 통치 왕가의 조상이 되었다. 헨리 튜더가 1485년 웨일스 펨브로크셔에 상륙하여 왕위 찬탈을 시도했을 때, 러스와의 혈통은 그가 웨일스인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게 한 요인 중 하나였다(헨리는 보즈워스 전투에서 (웨일스) 용 깃발을 휘날렸다).[74]
- 앙하라드 페르흐 러스는 케마이스의 영주인 윌리엄 피츠마틴과 결혼했다.
- 다른 딸들은 구르테르니온과 엘파엘의 웨일스 통치자들과 결혼했다.[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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