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반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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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레반흥은 1933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서 태어난 베트남 공화국의 군인이다. 1954년 투득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베트남 공화국 육군에서 복무했으며, 1972년 안록 전투에서 북베트남군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내 '안록의 영웅'으로 불렸다. 1975년 사이공 함락 이후 베트남 공화국의 패배가 결정되자 부하들과 가족에게 작별을 고하고 자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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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반흥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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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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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일 | 1933년 3월 27일 |
출생지 | 호크몬, 자딘 성,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현재의 호치민시 호크몬) |
사망일 | 1975년 4월 30일 |
사망지 | 껀터, 남베트남 |
별명 | 안록의 영웅 |
군사 경력 | |
소속 | 베트남 국가군, 남베트남군 |
복무 기간 | 1954년–1975년 |
최종 계급 | 준장 (Chuẩn Tướng) |
주요 지휘 | 제2대대 31보병연대 (1966–1969) 제5보병사단 (1971–1972) MR3 부사령관 (군사 지역 3) (1972) 제21보병사단 (1973) IV 군단 부사령관 (1974–1975) |
참전 전투 | 베트남 전쟁 |
기타 정보 | |
자녀 | 3명 |
기타 경력 | 퐁딘 성 장관 (1970) |
2. 초기 생애
레반흥은 1933년 3월 27일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메콩 삼각주 호크몬 현(혹몬)에서 태어났다. 그는 미망인이었던 어머니 쯔엉 티 덕과 의붓아버지 쩐 반 끼엔의 손에서 자랐다. 1952년 휸 크엉 닌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사이공에 있는 프랑스 회사에서 일했다.
1954년 레반흥은 육군에 입대하여 1955년 2월 1일 투득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했다. 그는 베트남 공화국 육군(ARVN)에서 중대, 대대, 연대, 사단 등 다양한 지휘를 맡았다.
3. 군 경력
1959년 떠이닌 성 짱삽의 제32보병연대 주둔지가 베트콩의 기습 공격을 받았을 때, 당시 제31연대 소속이었던 그는 연대 본부와 무기 장비를 보호하기 위해 소수의 병사를 이끌고 과감하게 저항했다.[3]
1961년 초, 빈빈 경찰 중대장으로 행정 분야에 파견되었다. 1962년 중반, 빈빈성 트라온 지구의 시장으로 임명되었다. 1964년 대위로 진급했고, 같은 해 12월에는 제2대대장으로 임명되었다. 1966년 말, 제31연대 연대장으로 임명되었다.
1970년 7월 중반, 군정으로 다시 파견되어 풍딘 부지역(껀터시)의 주지사이자 책임자로 임명되었고, 준장으로 진급했다. 1971년 6월 중반, 풍딘 부사단 주지사직을 쯔엉 즈엔 꽌 대령(전 제21보병사단장)에게 넘겨주라는 명령을 받았다.
1975년 4월, 베트남 인민군이 남베트남에 대한 최종 공격인 "호치민 작전"을 감행했을 때, 즈엉 반 민 대통령의 항복 명령을 듣기 전에, 레반흥은 사이공 함락 이후 베트콩 부대에 대한 반격을 계속할 남은 ARVN 군인과 장교를 정글과 군사 기지로 보내는 비밀 작전을 계획했다.[3]
3. 1. 주요 전투 및 지휘
1971년 4월, 레반흥은 응우옌 반 히에우 장군으로부터 손상된 제5사단을 인수받았다. 응우옌 반 히에우의 부대는 스누올 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었고, 베트남 II 야전군 사령관 마이클 S. 데이비슨에 따르면 그의 군대는 반란 직전이었다. 그러나 레반흥은 미국 고문들이 특별히 반대했던 베트남 공화국 육군(ARVN) 장교였다.[1]
1972년 안록 전투에서 레반흥은 거의 3개월 동안 작은 지하 벙커에서 생활하면서 제5사단, 제81공수 레인저 대대, 제11공수 여단, 제21사단과 빈롱 성의 지방군을 지휘했다. 그의 부대는 T-54 전차의 지원을 받는 베트남 인민군(PAVN) 보병의 수많은 공격을 격퇴했다. 레반흥은 "내가 살아 있다면 안록은 여전히 존재할 것이다"라고 맹세했다.[2]
이러한 레반흥의 노력과 베트남 공화국군 장병들의 투지에 힘입어 북베트남군은 안록 확보를 포기하게 되었다. 이 전투에서의 공로로 레반흥은 야전에서 장군으로 진급했다.[2]
하지만 미국 고문들은 레반흥이 "질식"했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보고했으며, (사적으로) 안록에서 그의 부사단장을 쏘겠다고 위협했다.[1] 존 R. 맥기퍼트 II 준장에 따르면, 안록은 미국 고문들의 공습 지휘와 지역 지도부 지원 없이는 결코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1]
레반흥은 장군으로 진급한 후 제21사단을 지휘한 후 제4군사지역(MR4) 부사령관이 되었다.
4. 1975년 봄 공세와 죽음
1975년 4월, 북베트남군이 호치민 작전으로 알려진 대공세를 시작하면서 수도 사이공이 함락되고 베트남 공화국의 패배가 확실해졌다. 4월 30일, 즈엉 반 민 대통령으로부터 항복 명령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레반흥과 Nguyen Khoa Nam|응우옌 코아 남영어 제4군관구 사령관은 끝까지 싸우고자 했다. 하지만 껀터시 시민 대표단이 레반흥을 찾아와 전투로 인한 피해와 희생을 막기 위해 더 이상 싸우지 말 것을 간청했다.
이 간청으로 인해 저항을 포기한 레반흥은 부하와 가족에게 작별을 고하고, 1975년 4월 30일 오후 8시 45분에 .45구경 권총으로 자결했다. 그는 베트남 공화국 항복의 날에 자결한 5명의 장군 중 한 명이었다. 레반흥은 참모, 병사, 가족을 불러 작별 인사를 한 뒤, 자택에서 권총으로 가슴에 총을 쏴 자살했다.[1] 그의 부관인 응우옌 코아 남 소장도 1975년 5월 1일 새벽에 자결했다.[1] 두 사람은 껀터 군인 묘지에 묻혔다.[1]
5. 사생활
레반흥은 응우옌쑤언마이와 결혼하여 딸 레아잉투엣을 낳았으나, 이후 이혼했다.[4] 그의 두 번째 아내는 팜티킴호앙이었으며, 둘 사이에는 두 번째 딸 레티엔하와 아들 레꿕하이가 있었다.[4]
흥 장군이 자살한 후, 그의 아내 팜티킴호앙과 자녀들은 껀터에서 사이공으로 이사했다. 이후 그들은 보트를 타고 필리핀을 거쳐 미국으로 이주했다.
6. 평가
레 반 흥 장군은 안록 공방전에서 보여준 활약으로 "'''안록의 영웅'''"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1] 1972년, 베트남 인민군의 안록 대공세에 맞서 제5보병사단장으로서 안록 시가지 방어전을 지휘했다.[1]
그는 3개월 가까이 지하 벙커에서 제5사단, 제81공수연대, 제11공수여단, 제21사단 및 빈푹 성 군부대를 이끌며 소련제 T-54 전차의 지원을 받는 북베트남군의 파상 공세를 막아냈다.[1]
"내가 살아있는 한, 안록은 계속 싸울 것이다"라는 그의 선언처럼, 안록을 사수하겠다는 굳은 의지와 공화국군 장병들의 투혼으로 북베트남군은 안록 점령을 포기했다.[1] 이후 야전 승진으로 대장이 되었고, 제21사단장 및 제4군관구 부사령관을 역임했다.[1]
1975년 호치민 작전으로 수도 사이공이 함락되고 베트남 공화국의 패배가 짙어진 상황에서도, 그는 즈엉 반 민 대통령의 항복 명령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항전하고자 했다.[1] 그러나 껀터 시민 대표단의 간청으로 더 이상의 전투를 단념하고 1975년4월 30일 자결했다.[1] 그는 베트남 공화국 항복의 날에 자결한 5명의 장군 중 한 명이었다.[1]
참조
[1]
서적
The U.S. Army in Vietnam Advice and Support: The Final Years, 1965–1973
https://history.army[...]
U.S. Army Center of Military History
[2]
서적
Indochina Monographs – The Easter Offensive of 1972
https://apps.dtic.mi[...]
[3]
웹사이트
Holdouts
https://www.warnever[...]
2018-04-30
[4]
웹사이트
The Final Day of My Husband's Life
http://www.bcdlld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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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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