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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타 (칠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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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타는 칠레 비오비오주에 위치한 도시로, 1662년 스페인 정착 이후 19세기 석탄 채굴 산업의 발달로 성장했다. 1875년 도시로, 1881년 시로 승격되었으며, '작은 땅 조각'을 의미하는 마푸둥군 단어에서 이름이 유래되었다. 20세기 대부분 동안 칠레 공산당의 거점이었으며, 1971년 살바도르 아옌데에 의해 탄광이 국유화되었으나, 군사 독재 시기에는 노동 운동이 탄압받았다. 석탄 산업의 쇠퇴 이후 관광, 임업, 어업 등으로 경제 구조가 변화하였고, 2002년 인구는 약 49,000명으로 집계되었다. 주요 관광 명소로는 콜쿠라 해변, 치빌린고 수력 발전소, 엘 치플론 델 디아블로가 있으며, 4년마다 선출되는 알칼데가 이끄는 시의회에서 행정을 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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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타 (칠레) - [지명]에 관한 문서
지도 정보
기본 정보
로타의 석양
로타의 석양
공식 명칭로타
국가칠레
종류도시 및 코무나
위치비오비오 주 콘셉시온 현
건립1662년
옛 이름산타 마리아 데 과달루페
면적135.8 km²
고도82 m
시간대CLT
UTC 오프셋-4
시간대 (DST)CLST
UTC 오프셋 (DST)-3
우편 번호4210000
지역 번호56 + 41
웹사이트공식 웹사이트
인구 정보
총 인구 (2012년)47,339명
도시 인구48,975명
농촌 인구114명
남성 인구23,944명
여성 인구25,145명
정치
정부 형태기초자치단체
시장하이메 바스케스 카스티요
시장 정당ChV (정당 정보 확인 필요)

2. 역사

이 지역에 스페인인들이 처음 정착한 곳은 1662년 10월 12일 총독 앙헬 데 페레도에 의해 세워진 ''산타 마리아 데 과달루페''였지만, 아라우코 전쟁의 적대 행위 속에서 오래 존속하지 못했다. 현대 도시는 19세기에 시작된 석탄 채굴 산업과 관련이 있다. 처음 개발된 석탄층은 지표면과 거의 같은 높이에 있어 작업하기 쉬웠다. 석탄 채굴은 증기선탈카우아노 항구에 도착한 후 시작되었다. 주로 영국에서 온 이 증기선들은 처음에는 석탄을 매우 싸게 사들였다.[6] 사업가 마티아스 쿠시뇨는 1852년 로타에서 광산 사업을 시작했다.[5] 석탄 채굴은 19세기 중반 인구가 희박한 변경 지역이었던 로타를 20세기까지 칠레 전역에서 이민자를 끌어들이는 대규모 산업 중심지로 변화시켰다.[6]

로타는 1875년 1월 5일에 공식적으로 도시로 지정되었고, 1881년 11월 30일에는 시로 승격되었다. '로타'라는 이름은 마푸둥군 단어 'Louta'에서 유래된 것으로, '작은 땅 조각'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7]

1960년 광부들과 그 가족들은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총파업을 시작했다. 시위대가 콘셉시온으로 행진하는 동안 1960년 콘셉시온 지진이 이 지역을 강타하여 파업이 종료되었다.[9] 20세기 대부분 동안 이 도시는 칠레 공산당의 거점이었다. 이 도시의 탄광은 1971년 살바도르 아옌데에 의해 국유화되었으며, 이는 광부들에게 환영받았다. 아우구스토 피노체트가 주도한 군사 독재가 수립되자, 로타의 정당과 강력한 노동 조합은 금지되었다. 이 조직에서 활동하던 사람들은 박해를 받았고, 일부는 군부에 의해 살해되었다. 지역 언론의 상당수는 노동 조합이나 정당과 연관되어 있어 탄압을 받았다.[9]

20세기 후반에 로타의 석탄 산업은 금속 용광로, 해운 산업 및 기차가 다른 에너지원으로 전환되면서 시장을 확보하는 데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다. 1920년대 초부터 석탄 의존적인 지역 경제의 취약성에 대한 우려가 있었다.[9] 로타의 석탄 산업의 문제 중 하나는 석탄층이 얇고 많은 지질 단층에 의해 변위되어 기계화에 어려움을 겪었다는 것이다.[8] 또한 나무 광산 지지대가 더 비싸지고, 접근하기 쉬운 석탄층이 고갈되고, 채굴이 해저에서 이루어져야 하면서 비용이 증가했다.[9] 로타의 석탄 자원에 대한 수요가 줄어들고 더 저렴한 콜롬비아 석탄이 시장에 등장하면서 1990년대에 광산이 폐쇄되어 로타 주민들은 빈곤에 빠졌다.[9] 1997년 국가 석탄 회사가 광산을 폐쇄하고 산업 장비를 매각하면서 종말을 맞이했다. 그 후, 광산은 물에 잠겼다.[9]

관광, 임업, 수공업 어업 및 소규모 기업가 정신이 석탄 채굴을 대체하여 고용의 원천이 되었지만, 나이든 광부들은 적응하기 어려움을 겪었다.[9] 석탄 산업의 쇠퇴에도 불구하고, 로타 공동체는 계속해서 그것과 동일시한다.[6] 1960년대와 1970년대에 비해 이 도시는 매우 탈정치화되었다. 이에 대한 증거는 일부 복음주의 교회가 정당 사무실보다 더 많은 신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9]

2. 1. 초기 역사

스페인인들은 1662년 10월 12일 총독 앙헬 데 페레도에 의해 ''산타 마리아 데 과달루페''를 건설했지만, 아라우코 전쟁의 와중에 오래 존속하지 못했다.[9] 현대 도시는 19세기에 시작된 석탄 채굴 산업과 관련이 있다. 처음 개발된 석탄층은 지표면과 거의 같은 높이에 있어 작업하기 쉬웠다. 석탄 채굴은 증기선탈카우아노 항구에 도착한 후 시작되었으며, 주로 영국에서 온 증기선들은 처음에는 석탄을 매우 싸게 사들였다.[6] 사업가 마티아스 쿠시뇨는 1852년 로타에서 광산 사업을 시작했다.[5] 석탄 채굴은 19세기 중반 인구가 희박한 변경 지역이었던 로타를 20세기까지 칠레 전역에서 이민자를 끌어들이는 대규모 산업 중심지로 변화시켰다.[6]

로타는 1875년 1월 5일에 공식적으로 도시로 지정되었고, 1881년 11월 30일에는 시로 승격되었다.[7] '로타'라는 이름은 마푸둥군 단어 'Louta'에서 유래된 것으로, '작은 땅 조각'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7]

1960년 광부들과 그 가족들은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총파업을 시작했다. 시위대가 콘셉시온으로 행진하는 동안 1960년 콘셉시온 지진이 이 지역을 강타하여 파업이 종료되었다.[9] 20세기 대부분 동안 이 도시는 칠레 공산당의 거점이었다. 이 도시의 탄광은 1971년 살바도르 아옌데에 의해 국유화되었으며, 이는 광부들에게 환영받았다. 아옌데가 전복되고 군사 독재가 수립되자, 로타의 정당과 강력한 노동 조합은 금지되었다. 이 조직에서 활동하던 사람들은 박해를 받았고, 일부는 군부에 의해 살해되었다. 지역 언론의 상당수는 노동 조합이나 정당과 연관되어 있어 탄압을 받았다.[9]

2. 2. 석탄 산업의 번성과 쇠퇴

로타는 19세기 석탄 채굴 산업과 함께 성장한 도시이다. 증기선탈카우아노 항구에 도착하면서 석탄 수요가 발생했고, 사업가 마티아스 쿠시뇨가 1852년 로타에서 광산 사업을 시작하면서 본격적인 개발이 시작되었다.[5] 석탄 채굴은 인구가 희박했던 로타를 20세기까지 칠레 전역에서 이민자를 끌어들이는 대규모 산업 중심지로 변화시켰다.[6] 1875년 1월 5일에는 도시로, 1881년 11월 30일에는 시로 승격되었다.[7]

1960년, 광부들과 그 가족들은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총파업을 벌였으나, 1960년 콘셉시온 지진으로 인해 파업이 종료되었다.[9] 20세기 대부분 동안 칠레 공산당의 거점이었던 로타의 탄광은 1971년 살바도르 아옌데에 의해 국유화되었다.[9] 그러나 군사 독재 시기에는 정당과 노동 조합이 금지되고, 관련자들은 박해를 받거나 살해되었다.[9]

20세기 후반, 로타의 석탄 산업은 금속 용광로, 해운 산업, 기차 등이 다른 에너지원으로 전환하면서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다.[9] 얇은 석탄층과 지질 단층으로 인한 기계화의 어려움, 나무 광산 지지대 가격 상승, 접근 가능한 석탄층 고갈, 해저 채굴로 인한 비용 증가 등의 문제도 있었다.[8][9] 결국 1990년대에 콜롬비아 석탄과의 경쟁에서 밀려 광산이 폐쇄되었고, 1997년 국가 석탄 회사가 광산을 폐쇄하고 장비를 매각하면서 로타의 석탄 산업은 종말을 맞았다.[9]

이후 관광, 임업, 수공업 어업 등이 석탄 채굴을 대체하고 있지만, 나이든 광부들은 적응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9] 석탄 산업의 쇠퇴에도 불구하고, 로타 공동체는 여전히 석탄 산업과 자신들을 동일시하고 있다.[6]

2. 3. 현대

현대 도시는 19세기에 시작된 석탄 채굴 산업과 관련이 있다. 처음 개발된 석탄층은 지표면과 거의 같은 높이에 있어 작업하기 쉬웠으며, 증기선탈카우아노 항구에 도착한 후 석탄 채굴이 시작되었다. 주로 영국에서 온 이 증기선들은 처음에는 석탄을 매우 싸게 사들였다.[6] 사업가 마티아스 쿠시뇨는 1852년 로타에서 광산 사업을 시작했다.[5] 석탄 채굴은 19세기 중반 인구가 희박한 변경 지역이었던 로타를 20세기까지 칠레 전역에서 이민자를 끌어들이는 대규모 산업 중심지로 변화시켰다.[6] 로타는 1875년 1월 5일에 공식적으로 도시로 지정되었고, 1881년 11월 30일에는 시로 승격되었다. '로타'라는 이름은 마푸둥군 단어 'Louta'에서 유래된 것으로, '작은 땅 조각'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7]

1960년 광부들과 그 가족들은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총파업을 시작했다. 시위대가 콘셉시온으로 행진하는 동안 1960년 콘셉시온 지진이 이 지역을 강타하여 파업이 종료되었다.[9] 20세기 대부분 동안 이 도시는 칠레 공산당의 거점이었다. 1971년 살바도르 아옌데에 의해 탄광은 국유화되었으며, 이는 광부들에게 환영받았다. 아옌데가 전복되고 군사 독재가 수립되자, 로타의 정당과 강력한 노동 조합은 금지되었다. 이 조직에서 활동하던 사람들은 박해를 받았고, 일부는 군부에 의해 살해되었다. 지역 언론의 상당수는 노동 조합이나 정당과 연관되어 있어 탄압을 받았다.[9]

20세기 후반에 로타의 석탄 산업은 금속 용광로, 해운 산업 및 기차가 다른 에너지원으로 전환되면서 시장을 확보하는 데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다. 1920년대 초부터 석탄 의존적인 지역 경제의 취약성에 대한 우려가 있었다.[9] 로타의 석탄 산업의 문제 중 하나는 석탄층이 얇고 많은 지질 단층에 의해 변위되어 기계화에 어려움을 겪었다는 것이다.[8] 또한 나무 광산 지지대가 더 비싸지고, 접근하기 쉬운 석탄층이 고갈되고, 채굴이 해저에서 이루어져야 하면서 비용이 증가했다.[9] 로타의 석탄 자원에 대한 수요가 줄어들고 더 저렴한 콜롬비아 석탄이 시장에 등장하면서 1990년대에 광산이 폐쇄되어 로타 주민들은 빈곤에 빠졌다.[9] 1997년 국가 석탄 회사가 광산을 폐쇄하고 산업 장비를 매각하면서 종말을 맞이했다. 그 후, 광산은 물에 잠겼다.[9]

관광, 임업, 수공업 어업 및 소규모 기업가 정신이 석탄 채굴을 대체하여 고용의 원천이 되었지만, 나이든 광부들은 적응하기 어려움을 겪었다.[9] 석탄 산업의 쇠퇴에도 불구하고, 로타 공동체는 계속해서 그것과 동일시한다.[6] 1960년대와 1970년대에 비해 이 도시는 매우 탈정치화되었다. 이에 대한 증거는 일부 복음주의 교회가 정당 사무실보다 더 많은 신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9]

3. 주요 시설 및 관광 명소


  • 콜쿠라 해변
  • 치빌린고 수력 발전소
  • 엘 치플론 델 디아블로

로타에는 콜쿠라 해변과 엘 치플론 델 디아블로 광산 외에 치빌린고 수력 발전소가 있다.

엘 치플론 델 디아블로는 로타에 있는 관광 명소이다.

3. 1. 치빌링고 수력 발전소

로타에는 콜쿠라 해변과 엘 치플론 델 디아블로 광산 외에 치빌린고 수력 발전소가 있다.

3. 2. 엘 치플론 델 디아블로 (El Chiflón del Diablo)

엘 치플론 델 디아블로는 로타에 있는 관광 명소이다.

3. 3. 기타


  • 콜쿠라 해변
  • 치빌린고 수력 발전소
  • 엘 치플론 델 디아블로

4. 행정

로타는 칠레의 행정 구역 중 3단계 행정 구역인 코무나이며, 4년마다 직접 선출되는 알칼데가 이끄는 시의회에서 관할한다.[1][2][10][11] 2008년부터 2012년까지의 알칼데는 파트리시오 마르찬트 울로아(PDC)였다. 현재 시장은 파트리시오 마르찬트 우요아(무소속)이다.

칠레의 선거구 내에서 로타는 46선거구의 일부로서 하원에서 마누엘 몬살베(PS)와 이반 노람부에나(UDI)에 의해 대표된다. 이 코무나는 상원에서 빅토르 페레스 바렐라(UDI)와 마리아노 루이스 - 에스키데 하라(PDC)에 의해 13선거구(비오비오 해안)의 일부로서 대표된다. 46선거구에는 로타 외에도 레부, 아라우코, 쿠라닐라에, 로스 알라모스, 카예테, 콘툴모, 티루아가 포함된다.

5. 인구 통계

2002년 국립 통계 연구소의 인구 조사에 따르면, 로타의 면적은 135.8제곱킬로미터이며 인구는 49,089명(남성 23,944명, 여성 25,145명)이다. 이 중 48,975명(99.8%)은 도시 지역에, 114명(0.2%)은 농촌 지역에 거주했다. 1992년과 2002년 인구 조사 사이에서 인구는 2.3%(1167명) 감소했다. 2000년대 후반에는 인구가 4만 명 이하로 떨어졌는데, 이는 1980년대 약 8만 명이었던 인구가 절반으로 줄어든 것을 의미한다.[9]

참조

[1] 웹사이트 Asociación Chilena de Municipalidades http://www.lota.cl/ 2011-02-23
[2] 웹사이트 Municipality of Lota http://www.lota.cl/ 2011-02-23
[3] 웹사이트 National Statistics Institute http://www.ine.cl/ca[...] 2010-12-13
[4] 웹사이트 Código postal Lota http://codigopost.co[...] 2016-08-31
[5] 간행물 Breves recuerdos de algunas actividades mineras del carbón Departamento de Geociencias, Facultad de Ciencias, [[Universidad de Concepción]] 1990
[6] 논문 Inmigración y sectores populares en las minas de carbón de Lota y Coronel (Chile 1850-1900) http://www.scielo.cl[...] 2010
[7] 웹사이트 Etimología de LOTA http://etimologias.d[...] 2017-01-27
[8] 뉴스 Carbón mantiene su sitial en Chile http://www.mch.cl/re[...]
[9] 논문 El sufrimiento colectivo de una ciudad minera en declinación. El caso de Lota, Chile http://www.scielo.br[...] 2014
[10] 웹사이트 Asociación Chilena de Municipalidades http://www.lota.cl/ 2011-02-23
[11] 웹사이트 Municipality of Lota http://www.lota.cl/ 2011-02-23
[12] 웹사이트 National Statistics Institute http://www.ine.cl/ca[...] 2010-12-13
[13] 뉴스 Chile's Leader Remains Socialist but Acts Like Pragmatist http://csallen.myweb[...] The New York Times Company 2001-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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