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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우코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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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라우코 전쟁은 16세기부터 19세기에 걸쳐 스페인과 마푸체족 간에 벌어진 분쟁이다. 스페인은 비오비오강 이남 지역의 금광 개발과 마푸체족을 강제 노동에 동원하려 했고, 마푸체족은 이에 저항하며 무력 충돌이 발생했다. 페드로 데 발디비아의 칠레 정복 시기에는 산티아고 파괴와 같은 격렬한 전투가 있었고, 라우타로와 카오폴리칸과 같은 마푸체 지도자들이 스페인에 맞서 싸웠다. 17세기에는 예수회의 선교 활동과 마푸체족의 저항이 있었으며, 1598년 쿠랄라바 참사 이후 스페인 세력이 약화되었다. 이후 마푸체족은 여러 차례 봉기를 일으켰으며, 18세기에도 분쟁이 지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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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우코 전쟁 - [전쟁]에 관한 문서
전쟁 개요
18세기 아라우카니아 지도
18세기 아라우카니아 지도 (아라우코 전쟁이 벌어진 지역의 대부분을 보여줌)
일부 역사가들의 주장1546년 – 17세기 말; 그리고 간헐적으로 18세기
세르히오 비얄로보스의 주장1550–1662 (112년)
메모리아 칠레의 주장1550–1656 (106년)
장소아라우카니아 지역 및 칠레 총독령 주변 지역 (현재의 칠레)
결과1600년경 아라우카니아에 대한 스페인의 침공이 영구적으로 중단됨.
아라우카니아에서 스페인의 복음화 전략 실패.
17세기 중반 이후 국경 안정화, 마푸체-스페인 외교 및 무역 발전.
교전 세력
교전국 1스페인 제국
칠레 총독령
마푸체 동맹군
교전국 225px 마푸체족, 페우엔체족, 우일리체족, 쿤코족 및 기타 부족
지휘관 1페드로 데 발디비아
프란시스코 데 비야그라
가르시아 우르타도 데 멘도사, 카녜테 후작
로드리고 데 키로가
알론소 데 소토마요르
마르틴 가르시아 오녜스 데 로욜라
알론소 가르시아 데 라몬
알론소 데 리베라
프란시스코 라소 데 라 베가
페드로 포르테르 카사나테
가브리엘 카노 데 아폰테
기타
지휘관 225px 미치말로코
25px 아이나빌로
25px 라우타로
25px 카우폴리칸
25px 콜로콜로
25px 갈바리노
25px 미야렐모
25px 로블레
25px 펠란타루
25px 앙가나몬
25px 리엔투르
25px 부타피촌
25px 알레호
25px 빌루미야
25px 쿠리냥쿠
기타
병력 규모 1스페인군:
정복자 중대 (1546–1557)
지역 분견대 및 타 지역 모집병 (1557–1604)
아라우코 군대 (1604년 이후)
인디언 보조병:
야나코나족
인디오스 레이우노스족
병력 규모 2마푸체족, 페우엔체족, 우일리체족, 쿤코족 및 기타 전사
스페인 및 메스티소 배신자

2. 원인

초기에 스페인 측이 비오비오강 이남에서 확보하려 했던 주요 분쟁 지역은 나우엘부타 산맥 주변의 계곡이었다. 스페인은 이 지역의 사금을, 인근 인구 밀집 지역의 마푸체 (노예) 노동력을 이용하여 채굴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7] 스페인에서 금 채굴을 위해 봉사하는 것은 많은 마푸체인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치명적인 활동이었다.[8] 강제 노동과 같은 안데스 지역의 미타와 같은 전통이 없었던 마푸체인들은 스페인에 봉사하는 것을 대부분 거부했고, 이는 분쟁의 서막을 열었다.[8] 스페인 도착 전에 이미 잉카 제국 남쪽의 마푸체 땅에서 금 채굴이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이를 통해 스페인인들이 금이 있는 곳을 빠르게 식별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9]

반면, 특히 구 카스티야와 에스트레마두라 출신의 스페인인들은 극도로 폭력적인 사회에서 왔다.[10] 디에고 데 로살레스에 따르면, 17세기 마푸체 족장인 리엔투르는 "나쁜 평화 속에 죽는 것보다 전쟁 중에 죽는 것을 선호한다"라고 설명했을 것이다.[5] 1650년대 상황을 분석하면서, 산티아고 왕립 고등법원은 마푸체 노예화가 스페인과 마푸체 사이의 끊임없는 전쟁 상태의 이유 중 하나라고 의견을 제시했다.[11]

예수회는 마푸체인들을 기독교로 개종시켜 적대 행위를 줄이고 전쟁을 완전히 종식시키려 했다.[12][13] 그들은 일시적으로 방어 전쟁 (1612–1626) 정책을 시행하는 데 성공했지만, 그들의 개종 시도는 마푸체 지도자들의 마푸체 일부다처제에 대한 완강한 방어에 부딪혔는데, 이는 가톨릭 신앙에서 용납될 수 없는 것이었다.[14] 이러한 일부다처제에 대한 고집은 마푸체 족장들이 일부일처제 결혼보다 결혼을 통해 더 많은 동맹을 맺는 방법을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으로 설명된다.[14] 일부다처제는 또한 마푸체 남성 인구가 불안정했던 전쟁 시기에 중요한 인구 전략으로 여겨졌을 수도 있다.[14]

2. 1. 스페인의 금광 개발과 마푸체족 강제 노동

초기에 스페인 측이 비오비오강 이남에서 확보하려 했던 주요 분쟁 지역은 나우엘부타 산맥 주변의 계곡이었다. 스페인은 이 지역의 사금을, 인근 인구 밀집 지역의 마푸체 (노예) 노동력을 이용하여 채굴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7] 스페인에서 금 채굴을 위해 봉사하는 것은 많은 마푸체인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치명적인 활동이었다.[8] 강제 노동과 같은 안데스 지역의 미타와 같은 전통이 없었던 마푸체인들은 스페인에 봉사하는 것을 대부분 거부했고, 이는 분쟁의 서막을 열었다.[8] 스페인 도착 전에 이미 잉카 제국 남쪽의 마푸체 땅에서 금 채굴이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이를 통해 스페인인들이 금이 있는 곳을 빠르게 식별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9]

반면, 특히 구 카스티야와 에스트레마두라 출신의 스페인인들은 극도로 폭력적인 사회에서 왔다.[10] 디에고 데 로살레스에 따르면, 17세기 마푸체 족장인 리엔투르는 "나쁜 평화 속에 죽는 것보다 전쟁 중에 죽는 것을 선호한다"라고 설명했을 것이다.[5] 1650년대 상황을 분석하면서, 산티아고 왕립 고등법원은 마푸체 노예화가 스페인과 마푸체 사이의 끊임없는 전쟁 상태의 이유 중 하나라고 의견을 제시했다.[11]

2. 2. 스페인의 폭력적인 문화

구 카스티야와 에스트레마두라 출신의 스페인인들은 극도로 폭력적인 사회에서 왔다.[10] 스페인은 나우엘부타 산맥 주변 계곡 지역의 사금을, 인근 마푸체족을 강제 노동을 시켜 채굴하려 했다.[7] 금 채굴은 많은 마푸체인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치명적인 활동이었다.[8] 미타와 같은 전통이 없었던 마푸체인들은 스페인에 봉사하는 것을 대부분 거부했다.[8] 17세기 마푸체 족장인 리엔투르는 "나쁜 평화 속에 죽는 것보다 전쟁 중에 죽는 것을 선호한다"라고 말했다.[5] 1650년대 산티아고 왕립 고등법원은 마푸체 노예화가 스페인과 마푸체 사이의 끊임없는 전쟁 상태의 이유 중 하나라고 보았다.[11]

2. 3. 예수회의 선교 활동과 마푸체족의 저항

초기에 스페인 측은 비오비오강 이남, 나우엘부타 산맥 주변 계곡의 사금을 인근 마푸체족의 노동력을 이용하여 채굴하려 했다.[7] 스페인의 금 채굴은 마푸체인들에게 가혹한 노동이었고,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다.[8] 강제 노동과 같은 미타 전통이 없던 마푸체인들은 스페인에 봉사하기를 거부했고, 이는 분쟁의 원인이 되었다.[8] 잉카 제국 시절부터 마푸체 땅에서 금 채굴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스페인인들이 금광 위치를 쉽게 파악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9]

구 카스티야와 에스트레마두라 출신 스페인인들은 폭력적인 사회에서 성장했다.[10] 디에고 데 로살레스에 따르면, 17세기 마푸체 족장 리엔투르는 "나쁜 평화 속에 죽는 것보다 전쟁 중에 죽는 것을 선호한다"라고 말했다.[5] 1650년대 산티아고 왕립 고등법원은 마푸체 노예화를 스페인-마푸체 간 끊임없는 전쟁의 한 원인으로 지목했다.[11]

예수회는 마푸체인들을 기독교로 개종시켜 전쟁을 종식시키려 했다.[12][13] 방어 전쟁 (1612–1626) 정책을 일시적으로 성공시켰으나, 마푸체 지도자들은 마푸체 일부다처제를 고수하며 가톨릭 신앙과 대립했다.[14] 일부다처제는 결혼 동맹과 전쟁 시기 인구 전략에 중요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14]

3. 스페인의 정복 활동 (1540-1553)

페드로 데 발디비아는 칠레 정복 초기 중앙 칠레를 확보하기 위해 9년간 군사 작전을 펼쳤다. 마포초 전투에서 스페인군은 미치말론코가 이끄는 마푸체군을 상대로 승리하였다. 미치말론코는 전술적 후퇴 후 병력을 모아 기습 공격을 시도했으나, 스페인군은 이를 간파하고 칠록스 전투에서 다시 승리하였다.

압도적인 승리에 자신감을 얻은 발디비아는 마포초강 계곡에 산티아고를 건설하고 식민지를 조직하기 시작했다. 몇 달 후, 발디비아는 파이다우엔 전투에서 미치말론코의 요새를 공격하여 마푸체족을 완전히 패배시키고 미치말론코를 포로로 잡았다. 미치말론코는 자유를 얻기 위해 마르가 마르가 금광 소유권을 제안했고, 이후 풀려난 미치말론코는 일부 가신들을 금광 채굴에 할당했다.

미치말론코의 형제 트란골론코는 반란을 일으켜 마르가 마르가에서 스페인군을 격파하고, 콩콘에서 스페인군을 격파한 후 건조 중이던 배를 불태웠다. 카차포알강, 마이포강 및 마포초 계곡의 원주민 추장들에게 사절을 보내 병력을 모아 미치말론코와 합류하여 스페인군을 몰아내려 했고, 약 16,000명의 전사를 모았다.

이네스 데 수아레스가 산티아고 시를 방어


1541년 9월 11일, 미치말론코는 산티아고 파괴를 감행했고, 소수의 스페인인만이 살아남았다. 이후 미치말론코는 스페인군에게 보급을 차단하는 “텅 빈 전쟁”을 펼쳤고, 스페인군과 마푸체군 사이에 일련의 교전이 벌어졌다.

1543년 말, 스페인군은 발디비아가 아콩카과강 안데스 산맥에 있는 미치말론코의 요새 세 곳을 정복하여 카차포알, 마이포, 아콩카과 계곡을 통제하게 되었고, 미치말론코의 군대는 북쪽으로 철수했다.

1544년, 미치말론코는 리마리강 계곡으로 이동하여 칠레와 페루 사이의 육상 교통을 차단했다. 디아기타 동맹군과 합류하여 세력을 강화한 미치말론코에 맞서, 발디비아는 직접 군대를 지휘하여 리마리 전투를 지원했고, 마푸체-디아기타군을 패배시킨 후 후안 보혼을 보내 엘키강 어귀에 라 세레나를 건설하게 했다.

같은 해, 후안 바티스타 파스테네가 지휘하는 해군 원정대가 마젤란 해협까지 남아메리카 남서 해안을 정찰했다. 원정대는 발파라이소에서 출항하여 콘셉시온 만에 들어갔고, 현재 콘셉시온, 발디비아로 알려진 곳에 상륙했다.

1546년, 발디비아는 기병 60명과 함께 이타타강을 건너 비오비오강 근처 킬라쿠라 전투에서 마푸체 전사들의 공격을 받았다. 발디비아는 제한된 병력으로 진격이 불가능함을 깨닫고 펜코에 새로운 도시 부지를 찾은 후 산티아고로 돌아갔고, 이곳이 콘셉시온의 첫 번째 부지가 되었다.

1550년, 파스테네가 이끄는 해군과 발디비아가 이끄는 200명의 기병과 보병, 그리고 다수의 마포체 보조병으로 구성된 새로운 원정이 시작되었다. 그들은 콘셉시온 만 해안에서 재회할 계획을 세웠다. 원정대는 이타타 강과 라하 강을 넘어 비오비오 강 해안까지 진격했다. 그들은 이 지역을 탐험하면서 여러 차례 마푸체와 전투를 벌였으며, 많은 수를 죽였지만 자신들의 피해는 거의 없었다. 그 지역에서 일주일 이상을 보내고 반대가 거세지자, 스페인군은 라하 강과 비오비오 강 계곡을 지나 펜코 해안을 향해 진군했다.[15][16] 안달리엔 강가에서 그들은 강과 호수 사이에서 이틀 동안 야영을 했는데, 그곳에서 토키 아이나빌로 휘하의 대규모 아라우카니아 군대의 공격을 받았다. 이 야습은 격렬한 전투 끝에 격퇴되었고, 스페인군은 1명이 사망하고 많은 병력과 특히 기마병들이 부상을 입었다. 부상 치료를 위해 하루를 보낸 후, 그들은 콘셉시온 만에서 만나기 위해 계속 나아갔다.[15][16]

2월 23일, 파스테네의 함대가 만에 정박하여 보급품과 증원군을 가져왔고, 요새를 완공할 자재를 제공했다.[15] 그 해 3월 1일, 발디비아는 이곳에 콘셉시온 델 누에보 엑스트레모 도시를 건설했다. 3월 3일, 요새가 완공되었고, 9일 후 펜코 전투에서 지금까지 목격된 가장 큰 규모의 마푸체 군대의 공격을 받았으나 격퇴되었다.[15][17] 발디비아는 페루 부왕에게 추가 병력 지원을 요청했다. 1551년 콘셉시온에서 증원된 후, 그는 임페리얼 강 강둑에 라 임페리얼 요새를 건설했다.[15][16][17]

발디비아는 군인 200명과 함께 임페리얼 요새 방향으로 출발했다. 그가 남쪽으로 가는 길에 헤로니모 데 알데레테에게 내륙으로 진격하여 요새를 건설하고 동쪽 측면을 확보하라고 명령했다. 알데렌테는 비야리카 호수에 도착하여 요새를 건설했다. 한편, 발디비아의 부대는 남쪽으로 진격하여 프란시스코 데 비야그라의 지휘하에 페루에서 파견된 증원군과 합류했다. 그곳에서 산타 마리아 라 블랑카 데 발디비아 도시가 건설되었다. 이 새로운 지역에 주둔군을 배치한 후, 발디비아는 1552년 콘셉시온 기지로 돌아왔다.[15][16][17]

3. 1. [[페드로 데 발디비아]]의 초기 원정 (1540-1546)

페드로 데 발디비아는 칠레 정복 초기 중앙 칠레를 확보하기 위해 9년간 군사 작전을 펼쳤다. 마포초 전투에서 스페인군은 미치말론코가 이끄는 마푸체군을 상대로 승리하였다. 미치말론코는 전술적 후퇴 후 병력을 모아 기습 공격을 시도했으나, 스페인군은 이를 간파하고 칠록스 전투에서 다시 승리하였다.

압도적인 승리에 자신감을 얻은 발디비아는 마포초강 계곡에 산티아고를 건설하고 식민지를 조직하기 시작했다. 몇 달 후, 발디비아는 파이다우엔 전투에서 미치말론코의 요새를 공격하여 마푸체족을 완전히 패배시키고 미치말론코를 포로로 잡았다. 미치말론코는 자유를 얻기 위해 마르가 마르가 금광 소유권을 제안했고, 이후 풀려난 미치말론코는 일부 가신들을 금광 채굴에 할당했다.

미치말론코의 형제 트란골론코는 반란을 일으켜 마르가 마르가에서 스페인군을 격파하고, 콩콘에서 스페인군을 격파한 후 건조 중이던 배를 불태웠다. 카차포알강, 마이포강 및 마포초 계곡의 원주민 추장들에게 사절을 보내 병력을 모아 미치말론코와 합류하여 스페인군을 몰아내려 했고, 약 16,000명의 전사를 모았다.

1541년 9월 11일, 미치말론코는 산티아고 파괴를 감행했고, 소수의 스페인인만이 살아남았다. 이후 미치말론코는 스페인군에게 보급을 차단하는 “텅 빈 전쟁”을 펼쳤고, 스페인군과 마푸체군 사이에 일련의 교전이 벌어졌다.

1543년 말, 스페인군은 발디비아가 아콩카과강 안데스 산맥에 있는 미치말론코의 요새 세 곳을 정복하여 카차포알, 마이포, 아콩카과 계곡을 통제하게 되었고, 미치말론코의 군대는 북쪽으로 철수했다.

1544년, 미치말론코는 리마리강 계곡으로 이동하여 칠레와 페루 사이의 육상 교통을 차단했다. 디아기타 동맹군과 합류하여 세력을 강화한 미치말론코에 맞서, 발디비아는 직접 군대를 지휘하여 리마리 전투를 지원했고, 마푸체-디아기타군을 패배시킨 후 후안 보혼을 보내 엘키강 어귀에 라 세레나를 건설하게 했다.

같은 해, 후안 바티스타 파스테네가 지휘하는 해군 원정대가 마젤란 해협까지 남아메리카 남서 해안을 정찰했다. 원정대는 발파라이소에서 출항하여 콘셉시온 만에 들어갔고, 현재 콘셉시온, 발디비아로 알려진 곳에 상륙했다.

1546년, 발디비아는 기병 60명과 함께 이타타강을 건너 비오비오강 근처 킬라쿠라 전투에서 마푸체 전사들의 공격을 받았다. 발디비아는 제한된 병력으로 진격이 불가능함을 깨닫고 펜코에 새로운 도시 부지를 찾은 후 산티아고로 돌아갔고, 이곳이 콘셉시온의 첫 번째 부지가 되었다.

3. 2. 콘셉시온, 임페리얼, 발디비아 건설 (1550-1552)

1550년, 파스테네가 이끄는 해군과 발디비아가 이끄는 200명의 기병과 보병, 그리고 다수의 마포체 보조병으로 구성된 새로운 원정이 시작되었다. 그들은 콘셉시온 만 해안에서 재회할 계획을 세웠다. 원정대는 이타타 강과 라하 강을 넘어 비오비오 강 해안까지 진격했다. 그들은 이 지역을 탐험하면서 여러 차례 마푸체와 전투를 벌였으며, 많은 수를 죽였지만 자신들의 피해는 거의 없었다. 그 지역에서 일주일 이상을 보내고 반대가 거세지자, 스페인군은 라하 강과 비오비오 강 계곡을 지나 펜코 해안을 향해 진군했다.[15][16] 안달리엔 강가에서 그들은 강과 호수 사이에서 이틀 동안 야영을 했는데, 그곳에서 토키 아이나빌로 휘하의 대규모 아라우카니아 군대의 공격을 받았다. 이 야습은 격렬한 전투 끝에 격퇴되었고, 스페인군은 1명이 사망하고 많은 병력과 특히 기마병들이 부상을 입었다. 부상 치료를 위해 하루를 보낸 후, 그들은 콘셉시온 만에서 만나기 위해 계속 나아갔다.[15][16]

2월 23일, 파스테네의 함대가 만에 정박하여 보급품과 증원군을 가져왔고, 요새를 완공할 자재를 제공했다.[15] 그 해 3월 1일, 발디비아는 이곳에 콘셉시온 델 누에보 엑스트레모 도시를 건설했다. 3월 3일, 요새가 완공되었고, 9일 후 펜코 전투에서 지금까지 목격된 가장 큰 규모의 마푸체 군대의 공격을 받았으나 격퇴되었다.[15][17] 발디비아는 페루 부왕에게 추가 병력 지원을 요청했다. 1551년 콘셉시온에서 증원된 후, 그는 임페리얼 강 강둑에 라 임페리얼 요새를 건설했다.[15][16][17]

발디비아는 군인 200명과 함께 임페리얼 요새 방향으로 출발했다. 그가 남쪽으로 가는 길에 헤로니모 데 알데레테에게 내륙으로 진격하여 요새를 건설하고 동쪽 측면을 확보하라고 명령했다. 알데렌테는 비야리카 호수에 도착하여 요새를 건설했다. 한편, 발디비아의 부대는 남쪽으로 진격하여 프란시스코 데 비야그라의 지휘하에 페루에서 파견된 증원군과 합류했다. 그곳에서 산타 마리아 라 블랑카 데 발디비아 도시가 건설되었다. 이 새로운 지역에 주둔군을 배치한 후, 발디비아는 1552년 콘셉시온 기지로 돌아왔다.[15][16][17]

4. 제1차 마푸체 대봉기 (1553)

라우타로는 남부 요새와의 통신선을 확보하려는 발디비아의 세 번째 원정으로 투카펠, 푸렌, 콘피네스, 아라우코에 요새가 건설되자, 이에 대항하기 위해 마푸체족을 규합했다. 마푸체족은 1553년 회의를 통해 스페인에 대항해 전쟁을 하기로 결의하고, 카우폴리칸을 "토키"(전쟁 지도자)로, 라우타로를 부토키로 선출했다.[18] 라우타로는 스페인 기병대 조력자로 복무한 경험을 바탕으로 최초의 마푸체 기병대를 창설하는 등 전투를 이끌었다.[18]

라우타로는 6천 명의 전사를 이끌고 투카펠 요새를 공격, 스페인 수비대를 푸렌으로 후퇴시키고 요새를 점령, 불태웠다.[18] 발디비아는 반격을 시도했으나 투카펠 전투에서 마푸체족에게 몰살당하고, 포로로 잡혀 처형되었다.[18] 이는 페드로 데 발디비아의 마지막 전투였다.[18]

4. 1. [[라우타로 (토키)|라우타로]]의 활약과 투카펠 전투 (1553)

남부 요새와의 통신선을 확보하기 위해 발디비아는 세 번째 원정을 시작하여 투카펠, 푸렌, 콘피네스, 그리고 아라우코에 요새를 건설했다.[18] 아라우칸족은 정복자들이 요새를 건설하는 동안 어떠한 저항도 하지 않았다.[18] 1553년 10월, 킬라코야 금광이 개장되었고, 많은 수의 마푸체족이 그곳에서 강제 노동을 해야 했다.[18]

1553년, 마푸체족은 회의를 열어 스페인 군대의 세력 확장에 따라 전쟁을 하기로 결의했다.[18] 그들은 "토키"(전쟁 지도자)로 매우 강력한 남자 카오폴리칸을, 부토키로는 스페인 기병대의 조력자로 복무했기에 정복자들과 싸우는 최적의 방법을 파악하고 있었던 라우타로를 선택했다.[18] 라우타로는 최초의 마푸체 기병대를 창설했다.[18]

6천 명의 전사를 지휘한 라우타로는 투카펠의 요새를 공격했다.[18] 스페인 수비대는 공격을 견뎌내지 못하고 푸렌으로 후퇴했다.[18] 라우타로는 요새를 점령하고 불태웠으며, 스페인군이 투카펠을 되찾으려 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군대를 준비했다.[18] 발디비아는 줄어든 병력으로 반격을 시도했지만, 곧 포위되었고 그의 군대는 투카펠 전투에서 마푸체족에 의해 몰살당했다.[18] 이 전투는 페드로 데 발디비아의 마지막 전투였다.[18] 그는 포로로 잡혔고, 패배를 인정하지 않아 결국 처형되었다.[18]

4. 2. 카오폴리칸과 라우타로의 작전 (1554-1557)

투카펠 전투의 패배 이후, 스페인은 병력을 재편성하여 임페리얼 요새를 방어하고 콘셉시온을 강화하기 위해 콘피네스와 아라우코를 포기했다. 그러나 아라우칸의 전통은 장기간의 승리 축하를 요구하여, 라우타로가 바라던 대로 스페인의 약점을 이용하지 못하게 했다.[19] 1554년 2월, 라우타로는 8,000명의 병력을 모아 프란시스코 데 비야그라가 지휘하는 징벌 원정과 마리후에뉴 전투에서 맞붙었다.[19]

이 새로운 승리에도 불구하고, 라우타로는 다시 한 번 자신의 백성들의 축하와 믿음 때문에 기회를 잡지 못했다. 그가 콘셉시온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버려진 상태였다.[19] 그는 콘셉시온을 불태운 후, 남은 병력으로 공세를 이어갈 수 없었고, 전사들이 해산하면서 작전은 종료되었다.

산티아고에서 비야그라는 병력을 재편성했고, 1554년에 다시 아라우코로 출발하여 임페리얼과 발디비아의 요새를 강화했다. 이를 통해 주둔군과 그들의 인도인 친구들은 주변 마푸체 정착지에 많은 습격을 가해 집과 밭을 불태우고 모든 사람을 살해했다. 그 결과 발생한 황폐화는 그 도시 주변의 적대적인 마푸체 사이에 기근전염병을 야기했다.[19] 한편, 1554년 북부에서는 라우타로의 승리 소식이 전해지자, 이전에 복종했던 프로마우케스가 마타키토 강 계곡에서, 피쿤체가 아콩카과 강 계곡에서 봉기를 일으켰으나 진압되었다.[20]

1555년, 리마의 레알 아우디엔시아는 비야그라에게 콘셉시온을 재건하도록 명령했고, 이는 알바라도 대위와 75명의 식민지 개척자들에 의해 수행되었다. 라우타로는 콘셉시온이 재건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4,000명의 전사들을 이끌고 다시 콘셉시온을 공격했다. 알바라도는 도시 밖에서 라우타로의 군대를 격파하려 했지만 실패했고, 라우타로 군대의 추격을 받아 도시로 도망쳤다. 단 38명의 스페인인만이 도시의 두 번째 파괴에서 바다를 통해 탈출할 수 있었다.[21] 1556년 이 승리 이후, 프로마우체스는 아라우코의 마푸체에게 식량을 약속하여 그들의 군대를 지원하고, 전사들을 모집하여 산티아고에서 스페인에 대항하는 전쟁에 참여할 것을 약속하는 메시지를 보냈다.[21]

남부에서의 승리와 북부로부터의 지원 약속에 고무된 라우타로는 산티아고 공격을 계획했다. 최근의 전염병 피해와 아직 마푸체 영토 내 도시를 점령하고 있는 스페인에 맞선 전투의 필요성 때문에 그는 북부로의 작전을 위해 마푸체 주력군으로부터 많은 병력을 차출할 수 없었다.[22] 그는 비오비오 강 북쪽의 피정복 마푸체인들과 이타타 강 북쪽의 프로마우카에스 사이에서 전사를 모집해야 했는데, 이들은 라우타로의 이전 성공에 영감을 받아 다시 반란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러나 산티아고의 지배를 받는 지역에 들어섰을 때, 그는 자신과 합류하기를 거부한 프로마우카에스인들에게 보복을 가하기 시작하여 큰 피해를 입히고 토지를 황폐화시켰다. 피난민들은 도움과 보호를 요청하며 도시로 도망쳤다.[23] 1556년 10월 그는 북쪽으로 행군하여 마타키토 강에 도달했다. 그곳에서 그는 산티아고를 상대로 한 작전 기지로서 테노 근처 페테로아라는 곳에 요새화된 야영지를 건설했다.[23] 라우타로는 산티아고에서 온 소규모 스페인 군대의 첫 번째 정찰대를 매복 공격했다. 나중에 페드로 데 비야그라가 이끄는 더 큰 군대가 며칠에 걸쳐 페테로아 요새를 공격했지만 점령하지 못하고 홍수로 인해 물러났다.[23] 그러나 불리한 손실과 더 많은 스페인 병사가 비야그라를 지원하면서 라우타로는 마울레 강으로 후퇴하여 그곳에 자리를 잡으려 했다. 하지만 후안 고디네스의 스페인 기병대가 마울레 강까지 추격하여 낙오병을 베어 버렸고, 라우타로의 부대 중 하나가 궤멸되었다. 라우타로의 군대는 그들을 따돌렸지만 이타타 강 너머로 물러나야 했다. 고디네스 대위는 이 추격에서 승리하고 프로마우카에스인들에게 그들의 가축, 밭, 집을 파괴하고 몇몇의 머리를 잘라 마푸체 군대를 부르거나 그들을 돕지 못하도록 하는 교훈을 주어 큰 공포를 심어주었다.[24]

1557년 1월, 프란시스코 데 비야그라는 카우폴리칸이 이끄는 마푸체 군대에 맞서 남은 도시들을 돕기 위해 남쪽으로 진격했다. 동맹국들로부터 산티아고가 상대적으로 무방비 상태라는 정보를 입수한 라우타로는 비야그라를 따돌리고 그가 남쪽으로 지나가도록 내버려두는 한편, 판이구알고 휘하의 동맹군을 포함한 새로운 군대를 이끌고 다시 산티아고를 향해 진군했다.[25] 그러나 라우타로가 물자를 확보하기 위해 위협받는 현지 원주민들을 학대한 것은 동맹군 사이에 불화를 일으켰다. 그의 동맹군은 라우타로가 스페인 사람처럼 행동한다고 비난한 칠란이라는 동맹 지도자와의 행동에 대한 논쟁 이후 로라의 마타키토 강에 군대가 도착한 후 그와 헤어졌다.[26] 그는 남은 군대를 강을 따라 1리그 이상 이동하여 숲이 우거진 언덕 기슭의 갈대밭 한가운데 마타키토 강에 다시 요새화된 야영지를 세웠다. 그러나 그 위치는 이전에 라우타로에게 학대받았던 현지 원주민들에 의해 프란시스코 데 비야그라에게 배신당했다.[26] 비야그라는 산티아고 근처의 후안 고디네스에게 서둘러 북쪽으로 오라고 연락을 보냈다. 스페인군은 라우타로가 경계하지 않은 상태에서 만나 카우네 언덕을 넘어 라우타로의 야영지를 내려다보는 마타키토 강둑의 언덕으로 기습 야간 행진을 했다. 4월 29일 새벽, 비야그라는 야영지에 대한 기습 공격으로 마타키토 전투를 시작하여 라우타로를 죽이고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으며, 그의 군대를 파괴하고 동맹군을 흩어지게 했다.[26]

5. 카오폴리칸과 가르시아 우르타도 데 멘도사의 작전 (1557-1561)

제레니모 데 알데레테가 파나마에서 사망한 후, 1557년에 가르시아 우르타도 데 멘도사가 칠레의 임시 총독으로 지명되었다.[27] 그는 이전보다 훨씬 강력한 병력(병사 600명, 포 6문, 말 1,000마리)을 이끌고 페루에서 남쪽으로 즉시 항해했다.[27] 그는 라 세레나에 상륙하여 총독직을 놓고 다투던 경쟁자, 프란시스코 데 비야그라와 프란시스코 데 아기레를 체포하여 페루로 보냈고, 자신의 부하들을 이 지역의 통제에 투입했다.[27] 기병대를 육로로 보낸 그는 겨울에 남쪽으로 항해하여 1557년 6월 초 콘셉시온 만 입구의 라 키리키나 섬에 상륙했다.[27] 그는 펜코에 상륙하여 콘셉시온 요새를 재건하라고 명령했다.[27] 마푸체 군대가 요새를 파괴하려 했지만, 포병과 총격으로 격퇴되었다.[27]

산티아고에서 육로로 기병대와 말들이 도착한 후 멘도사는 비오비오 남쪽으로 진격을 시작했고, 갈바리노를 포함한 또 다른 마푸체 군대가 라구나스 전투에서 정면으로 그들을 막으려 했지만, 치열한 전투 끝에 다시 패배했고, 그 결과 아라우코로 가는 관문인 안달리칸의 요새가 무방비 상태로 남아 전투 직후 함락되었다.[27] 카오폴리칸은 밀라라푸에 전투에서 매복으로 멘도사의 진격을 막으려 했지만 실패했다.[27] 투카펠의 파괴된 요새 근처에서 더 많은 전투를 벌인 후, 멘도사는 카녜테 데 라 프론테라 요새와 도시를 건설하고 남쪽으로 진격했다.[27] 그곳에서 그는 오소르노 도시를 건설하고 안쿠드만까지 남쪽으로 탐험했다.[27]

스페인 점령에서 벗어나려던 카오폴리칸은 요새 안의 배신자인 ''야나쿠나''가 문을 열어주기를 기대하며 카녜테 요새를 공격했지만, 대신 배신을 당했고 알론소 데 레이노소 대위에게 크게 패했다.[27] 그는 스페인 기병대가 추격할 시간이 없어서 이 마지막 전투 직후 즉시 탈출할 수 있었지만, 결국 페드로 데 아벤다뇨에게 배신당해 산에서 체포되었고, 알론소 데 레이노소에 의해 사형을 선고받아 카녜테에서 말뚝형으로 처형되었다.[27]

카오폴리칸이 죽은 후, 가르시아 우르타도 데 멘도사는 마푸체를 굴복시켰다고 생각했다.[27] 반대로, 카오폴리칸의 죽음은 마푸체에게 게릴라 전쟁을 계속하도록 영감을 주었고, 그 전쟁에서 야나코나나 엔코멘데로 중 몇 명이 마푸체의 손에 죽는 날이 없었다.[27] 실종되거나 사망한 사람이 400명의 야나코나와 10명의 스페인인에 달하자, 총독은 자신이 실수했음을 확신했다.[27] 키아포에서, 새로운 토키인 카오폴리칸 아래의 마푸체는 멘도사의 군대가 아라우코로 진격하여 그곳에 요새를 재건하는 것을 막기 위해 요새를 건설했다.[27] 멘도사는 카녜테에서 진격하여 키아포 전투에서 또 다른 마푸체 군대를 격파했다.[27] 전투 후, 우르타도 데 멘도사는 포로로 잡힌 마푸체 대부분을 처형했지만, 아라우코 지역의 중요한 카시케인 쿠요만케의 아들인 페테게우렌을 살렸다.[27] 그의 도움과 감사한 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그는 아라우코와 투카펠의 지도자들 대부분과 연락하여 아라우코 요새 재건 후 스페인 통치에 복종하게 할 수 있었다.[27] 멘도사는 또한 옛 콘피네스 요새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산 안드레스 데 앙골 또는 로스 인판테스 도시를 건설했다.[27]

1561년 2월, 펠리페 2세는 가르시아 우르타도 데 멘도사를 해임하고, 라우타로를 이긴 프란시스코 데 비야그라를 그의 후임 총독으로 임명했다.[27] 멘도사는 마푸체를 극복했다고 믿고 칠레를 떠났다.[27] 그는 전쟁에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둔 몇 안 되는 총독 중 한 명이었다.[27] 이러한 성공은 그가 가져온 이전 정복자들에게는 없었던 많은 수의 숙련된 병사, 장비, 무기 때문이었고, 마푸체는 라우타로와 같은 전략가가 없었기 때문이었다.[27]

마푸체는 평화를 가장했지만, 비밀리에 새로운 반란을 준비했다.[27] 키아포에서 패배한 직후, 생존한 지도자들이 모여 일랑굴리엔을 새로운 토키로 선출했다.[27]

5. 1. [[가르시아 우르타도 데 멘도사, 카녜테 후작 5세|가르시아 우르타도 데 멘도사]]의 원정

제레니모 데 알데레테가 파나마에서 사망한 후, 1557년에 가르시아 우르타도 데 멘도사가 칠레의 임시 총독으로 지명되었다.[27] 그는 이전보다 훨씬 강력한 병력(병사 600명, 포 6문, 말 1,000마리)을 이끌고 페루에서 남쪽으로 즉시 항해했다.[27] 그는 라 세레나에 상륙하여 총독직을 놓고 다투던 경쟁자, 프란시스코 데 비야그라와 프란시스코 데 아기레를 체포하여 페루로 보냈고, 자신의 부하들을 이 지역의 통제에 투입했다.[27] 기병대를 육로로 보낸 그는 겨울에 남쪽으로 항해하여 1557년 6월 초 콘셉시온 만 입구의 라 키리키나 섬에 상륙했다.[27] 그는 펜코에 상륙하여 콘셉시온 요새를 재건하라고 명령했다.[27] 마푸체 군대가 요새를 파괴하려 했지만, 포병과 총격으로 격퇴되었다.[27]

산티아고에서 육로로 기병대와 말들이 도착한 후 멘도사는 비오비오 남쪽으로 진격을 시작했고, 갈바리노를 포함한 또 다른 마푸체 군대가 라구나스 전투에서 정면으로 그들을 막으려 했지만, 치열한 전투 끝에 다시 패배했고, 그 결과 아라우코로 가는 관문인 안달리칸의 요새가 무방비 상태로 남아 전투 직후 함락되었다.[27] 카오폴리칸은 밀라라푸에 전투에서 매복으로 멘도사의 진격을 막으려 했지만 실패했다.[27] 투카펠의 파괴된 요새 근처에서 더 많은 전투를 벌인 후, 멘도사는 카녜테 데 라 프론테라 요새와 도시를 건설하고 남쪽으로 진격했다.[27] 그곳에서 그는 오소르노 도시를 건설하고 안쿠드만까지 남쪽으로 탐험했다.[27]

스페인 점령에서 벗어나려던 카오폴리칸은 요새 안의 배신자인 ''야나쿠나''가 문을 열어주기를 기대하며 카녜테 요새를 공격했지만, 대신 배신을 당했고 알론소 데 레이노소 대위에게 크게 패했다.[27] 그는 스페인 기병대가 추격할 시간이 없어서 이 마지막 전투 직후 즉시 탈출할 수 있었지만, 결국 페드로 데 아벤다뇨에게 배신당해 산에서 체포되었고, 알론소 데 레이노소에 의해 사형을 선고받아 카녜테에서 말뚝형으로 처형되었다.[27]

카오폴리칸이 죽은 후, 가르시아 우르타도 데 멘도사는 마푸체를 굴복시켰다고 생각했다.[27] 반대로, 카오폴리칸의 죽음은 마푸체에게 게릴라 전쟁을 계속하도록 영감을 주었고, 그 전쟁에서 야나코나나 엔코멘데로 중 몇 명이 마푸체의 손에 죽는 날이 없었다.[27] 실종되거나 사망한 사람이 400명의 야나코나와 10명의 스페인인에 달하자, 총독은 자신이 실수했음을 확신했다.[27] 키아포에서, 새로운 토키인 카오폴리칸 아래의 마푸체는 멘도사의 군대가 아라우코로 진격하여 그곳에 요새를 재건하는 것을 막기 위해 요새를 건설했다.[27] 멘도사는 카녜테에서 진격하여 키아포 전투에서 또 다른 마푸체 군대를 격파했다.[27] 전투 후, 우르타도 데 멘도사는 포로로 잡힌 마푸체 대부분을 처형했지만, 아라우코 지역의 중요한 카시케인 쿠요만케의 아들인 페테게우렌을 살렸다.[27] 그의 도움과 감사한 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그는 아라우코와 투카펠의 지도자들 대부분과 연락하여 아라우코 요새 재건 후 스페인 통치에 복종하게 할 수 있었다.[27] 멘도사는 또한 옛 콘피네스 요새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산 안드레스 데 앙골 또는 로스 인판테스 도시를 건설했다.[27]

1561년 2월, 펠리페 2세는 가르시아 우르타도 데 멘도사를 해임하고, 라우타로를 이긴 프란시스코 데 비야그라를 그의 후임 총독으로 임명했다.[27] 멘도사는 마푸체를 극복했다고 믿고 칠레를 떠났다.[27] 그는 전쟁에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둔 몇 안 되는 총독 중 한 명이었다.[27] 이러한 성공은 그가 가져온 이전 정복자들에게는 없었던 많은 수의 숙련된 병사, 장비, 무기 때문이었고, 마푸체는 라우타로와 같은 전략가가 없었기 때문이었다.[27]

마푸체는 평화를 가장했지만, 비밀리에 새로운 반란을 준비했다.[27] 키아포에서 패배한 직후, 생존한 지도자들이 모여 일랑굴리엔을 새로운 토키로 선출했다.[27]

6. 제2차 마푸체 대봉기 (1561)

프란시스코 데 비야그라가 멘도사를 대신하여 도착하면서 칠레 원주민 인구를 휩쓴 최초의 천연두 전염병과 함께 전쟁이 재개되었다.[28] 1561년 7월 로리고 데 키로가의 짧은 임시 총독 재임 기간 동안, 카예테(Cañete)의 코레히도르였던 페드로 데 아벤다뇨(Pedro de Avendaño)와 다른 두 명의 스페인 사람이 푸렌(Puren) 계곡에서 살해되면서 시작되었다. 앙골(Angol)과 라 임페리얼(La Imperial)에서 온 스페인 징벌 원정대는 반군들을 루마코(Lumaco) 습지의 피난처로 몰아냈으나, 살해 소식이 퍼져나가면서 이전보다 더 큰 봉기가 촉발되었다.

아라우코(Arauco) 지역의 토키인 밀라레엘모(Millalelmo)는 1562년 5월 20일부터 6월 30일까지 아라우코를 포위했다.[28] 1562년 말, 메우코(Meuco)라는 지도자 아래의 마푸체족은 로스 인판테스(Los Infantes) 도시에서 세 리그 떨어진 마레구아노(Mareguano) 지방에 푸카라(pucará)를 요새화했다.[29] 아리아스 파르도 말도나도는 푸카라를 파괴했지만, 대부분의 마푸체족이 탈출했다.

1563년, 마푸체족은 로스 인판테스 근처에 푸카라를 재건했지만, 페드로 데 비야그라(Pedro de Villagra)가 다시 파괴했다. 마푸체족은 다시 이를 재건했지만, 기병대가 접근하기 쉬운 부분으로 만들었고, 베테랑 스페인 사람들이 공격하여 많은 사람들이 구덩이에 빠졌다. 그곳에서 총독의 아들인 페드로 데 비야그라 "엘 모조"(Pedro de Villagra "el Mozo")와 다른 42명의 스페인 사람이 사망했고, 이 패배로 프란시스코 데 비야그라는 카예테 도시를 포기하게 되었고, 카예테의 포기 소식은 반란을 확산시켰다.

프란시스코 데 비야그라(Francisco de Villagra)는 아들의 죽음에 대한 소식을 듣고 병이 들어 콘셉시온(Concepcion)으로 떠났고, 사촌 페드로 데 비야그라(Pedro de Villagra)에게 작전을 맡겼다. 콜로콜로(Colocolo) 아래의 마푸체족은 로스 인판테스와 아라우코 요새를 상대로 두 전선에서 공격하여 포위했지만 점령하지 못했다. 페테구엘렌(Petegüelen)은 스페인 사람들에게 평화를 제안했고 비야그라(Villagra)는 이를 받아들였지만, 이는 마푸체족이 밭을 수확해야 했기 때문에 속임수였다.

1563년 4월, 마푸체족은 아라우코를 다시 포위했다. 이는 42일 동안 지속되었으며, 마푸체족은 이질로 인해 500명의 전사를 잃고 결국 물러났다. 그 직후, 프란시스코 데 비야그라(Francisco de Villagra)는 1563년 6월 22일 콘셉시온(Concepcion)에서 사망했으며, 사촌 페드로 데 비야그라(Pedro de Villagra)가 임시 총독으로 남았다. 그는 마푸체 영토 내 모든 거점을 지키면서 야전군을 유지하기에는 병력이 너무 적다고 판단하여, 1563년 7월 아라우코를 포기하라고 명령했다. 로렌초 베르날 델 메르카도 휘하의 수비대는 비가 쏟아지는 산과 범람한 강을 넘어 앙골로 행진했고, 마푸체는 수비대가 떠난 직후 요새를 파괴하고 행군을 방해했다.

페드로 데 비야그라가 원정 종료 직후 페루 부왕의 명령에 따라 1565년 임시 총독은 로드리고 데 키로가로 교체되었다. 키로가는 로렌소 베르날 델 메르카도가 조직한 새로운 원정을 시작하여 카예테를 재건하고 1566년 아라우코에 재정착했다. 그는 칠로에 섬 정복을 완수하여 마르틴 루이스 데 감보아를 보내 카스트로를 건설하고 그곳의 주민인 쿤코스를 평정했다. 키로가는 1567년 8월에 콘셉시온 왕립 아우디엔시아로 교체될 예정임을 알게 되었다. 1567년 9월, 국왕은 멜초르 브라보 데 사라비아 이 소토마요르를 칠레의 민정 및 군정을 맡도록 임명하고 총독 직함을 부여했으며, 그는 1568년 리마에서 도착했다.

6. 1. [[프란시스코 데 비야그라]]의 통치 (1561-1563)

프란시스코 데 비야그라가 멘도사를 대신하여 도착하면서 칠레 원주민 인구를 휩쓴 최초의 천연두 전염병과 함께 전쟁이 재개되었다.[28] 1561년 7월 로리고 데 키로가의 짧은 임시 총독 재임 기간 동안, 카예테(Cañete)의 코레히도르였던 페드로 데 아벤다뇨(Pedro de Avendaño)와 다른 두 명의 스페인 사람이 푸렌(Puren) 계곡에서 살해되면서 시작되었다. 앙골(Angol)과 라 임페리얼(La Imperial)에서 온 스페인 징벌 원정대는 반군들을 루마코(Lumaco) 습지의 피난처로 몰아냈으나, 살해 소식이 퍼져나가면서 이전보다 더 큰 봉기가 촉발되었다.

아라우코(Arauco) 지역의 토키인 밀라레엘모(Millalelmo)는 1562년 5월 20일부터 6월 30일까지 아라우코를 포위했다.[28] 1562년 말, 메우코(Meuco)라는 지도자 아래의 마푸체족은 로스 인판테스(Los Infantes) 도시에서 세 리그 떨어진 마레구아노(Mareguano) 지방에 푸카라(pucará)를 요새화했다.[29] 아리아스 파르도 말도나도는 푸카라를 파괴했지만, 대부분의 마푸체족이 탈출했다.

1563년, 마푸체족은 로스 인판테스 근처에 푸카라를 재건했지만, 페드로 데 비야그라(Pedro de Villagra)가 다시 파괴했다. 마푸체족은 다시 이를 재건했지만, 기병대가 접근하기 쉬운 부분으로 만들었고, 베테랑 스페인 사람들이 공격하여 많은 사람들이 구덩이에 빠졌다. 그곳에서 총독의 아들인 페드로 데 비야그라 "엘 모조"(Pedro de Villagra "el Mozo")와 다른 42명의 스페인 사람이 사망했고, 이 패배로 프란시스코 데 비야그라는 카예테 도시를 포기하게 되었고, 카예테의 포기 소식은 반란을 확산시켰다.

프란시스코 데 비야그라(Francisco de Villagra)는 아들의 죽음에 대한 소식을 듣고 병이 들어 콘셉시온(Concepcion)으로 떠났고, 사촌 페드로 데 비야그라(Pedro de Villagra)에게 작전을 맡겼다. 콜로콜로(Colocolo) 아래의 마푸체족은 로스 인판테스와 아라우코 요새를 상대로 두 전선에서 공격하여 포위했지만 점령하지 못했다. 페테구엘렌(Petegüelen)은 스페인 사람들에게 평화를 제안했고 비야그라(Villagra)는 이를 받아들였지만, 이는 마푸체족이 밭을 수확해야 했기 때문에 속임수였다.

1563년 4월, 마푸체족은 아라우코를 다시 포위했다. 이는 42일 동안 지속되었으며, 마푸체족은 이질로 인해 500명의 전사를 잃고 결국 물러났다. 그 직후, 프란시스코 데 비야그라(Francisco de Villagra)는 1563년 6월 22일 콘셉시온(Concepcion)에서 사망했으며, 사촌 페드로 데 비야그라(Pedro de Villagra)가 임시 총독으로 남았다. 그는 마푸체 영토 내 모든 거점을 지키면서 야전군을 유지하기에는 병력이 너무 적다고 판단하여, 1563년 7월 아라우코를 포기하라고 명령했다. 로렌초 베르날 델 메르카도 휘하의 수비대는 비가 쏟아지는 산과 범람한 강을 넘어 앙골로 행진했고, 마푸체는 수비대가 떠난 직후 요새를 파괴하고 행군을 방해했다.

6. 2. [[레알 아우디엔시아]]의 통치 (1567-1568)

페드로 데 비야그라가 원정 종료 직후 페루 부왕의 명령에 따라 1565년 임시 총독은 로드리고 데 키로가로 교체되었다. 키로가는 로렌소 베르날 델 메르카도가 조직한 새로운 원정을 시작하여 카예테를 재건하고 1566년 아라우코에 재정착했다. 그는 칠로에 섬 정복을 완수하여 마르틴 루이스 데 감보아를 보내 카스트로를 건설하고 그곳의 주민인 쿤코스를 평정했다. 키로가는 1567년 8월에 콘셉시온 왕립 아우디엔시아로 교체될 예정임을 알게 되었다. 1567년 9월, 국왕은 멜초르 브라보 데 사라비아 이 소토마요르를 칠레의 민정 및 군정을 맡도록 임명하고 총독 직함을 부여했으며, 그는 1568년 리마에서 도착했다.

7. 1568년 ~ 1598년 사이의 군사 작전

멜초르 브라보 데 사라비아 총독은 1568년 리마에서 도착하여 100명의 신병을 모집하고 산티아고 지방에서 식량을 모아 타볼레보 강 어귀 근처, 카티라이에서 군대와 합류하기 위해 남쪽으로 행군했다. 토키 량가나발의 지휘 아래 카티라이 전투가 벌어졌다. 1570년 콘셉시온 지진이 발생했다. 토키 파이아카르가 이끄는 푸렌 전투가 있었다. 이후 토키는 파이네냠쿠 또는 알론소 디아스가 맡았다.

로드리고 데 키로가 총독 시기인 1575년 발디비아 지진으로 인해 식민지 건설이 중단되고, 원주민 후안 데 레부가 이끄는 반란이 일어났다. 이후 마르틴 루이스 데 감보아 총독은 감보아 법령을 제정했다.

알론소 데 소토마요르 총독은 1583년 칠레에 도착하여 잉카인들의 노동으로 세금을 납부하는 것을 금지한 감보아 세율(Tasa de Gamboa)로 인해 인기가 없었던 전임자에 대한 심판을 진행했다. 소토마요르는 감보아를 면죄했지만, 감보아 세율을 폐지하고 산티얀 세율(Tasa de Santillán)을 부활시켜 잉카인들에 대한 엔코멘데로들의 과도한 행위를 막기 위해 노력했다.

1584년 알론소 디아스를 생포하는 등 초기에는 성공적인 작전을 펼쳤으나, 소토마요르는 칠레 정복을 확대하기 위해 서로를 보호하고 도시와 그 주변 토지를 보호하는 일련의 요새를 건설하는 전략을 택했다. 1584년 코엘레무(Coelemu)에 산 파비안 데 코누에오 요새를 건설하여 산티아고와 콘셉시온 사이의 통신을 확보했고, 1585년에는 카티라이, 과키 강이 비오 비오 강으로 합류하는 지점에 산토 아르볼 데 라 크루스, [타볼레보 강] 어귀 근처의 에스피리투 산토, 비오 비오 강 건너편에 있는 산티시마 트리니다드, 쿨렌코 강 상류에 있는 산 제로니모 데 밀라포아 요새를 건설했다. 또한 푸렌에 요새를 세우고 작은 수비대를 배치했다.

소토마요르의 정책에 반대한 토키 카얀카루는 아라우코 요새를 포위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1585년 그의 아들 난고니엘에게 직위를 양도했다. 난고니엘은 아라우코를 공격하여 스페인군의 보급을 막아 철수하게 만들었다. 이후 산티시마 트리니다드를 공격했지만 스페인군과 충돌하여 부상을 입고 살해당했다. 같은 날 카데구알라가 토키로 선포되어 앙골을 공격했으나 반격에 격퇴되었고, 다음 해 푸렌을 포위했다. 그는 기병대를 동원하여 구원군을 물리치고 수비대에 항복을 제안했지만 거절당했다. 이후 요새 사령관 알론소 가르시아 데 라몬과 일대일 결투를 벌여 패배하고 죽임을 당했다. 그의 군대는 포위를 풀었지만, 과노알카를 토키로 선출한 후 다시 돌아와 스페인군을 푸렌에서 몰아내고 1586년에 불태웠다.

한편, 소토마요르는 영국 해적 토마스 캐번디시의 공격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1587년 4월 9일, 킨테로에 정박한 캐번디시는 스페인군에게 패배하여 10명의 부하를 잃고 남아메리카 해안을 따라 항해했다.

소토마요르는 1589년에 푸렌을 재건하고 마리후에뉴 고지에 새로운 요새를 건설했다. 과노알카는 새로운 스페인 요새를 공격하려 했지만, 강력한 방어에 막혀 에스피리투 산토와 산티시마 트리니다드 요새로 목표를 변경했다.

7. 1. 멜초르 브라보 데 사라비아 총독의 군사 작전 (1568년 ~ 1575년)

멜초르 브라보 데 사라비아 총독은 1568년 리마에서 도착하여 100명의 신병을 모집하고 산티아고 지방에서 식량을 모아 타볼레보 강 어귀 근처, 카티라이에서 군대와 합류하기 위해 남쪽으로 행군했다.

토키 량가나발의 지휘 아래 카티라이 전투가 벌어졌다. 1570년 콘셉시온 지진이 발생했다.

토키 파이아카르가 이끄는 푸렌 전투가 있었다. 이후 토키는 파이네냠쿠 또는 알론소 디아스가 맡았다.

7. 2. 로드리고 데 키로가와 마르틴 루이스 데 감보아 총독의 군사 작전 (1575년 ~ 1583년)

로드리고 데 키로가 총독 시기인 1575년 발디비아 지진으로 인해 식민지 건설이 중단되고, 원주민 후안 데 레부가 이끄는 반란이 일어났다. 이후 마르틴 루이스 데 감보아 총독은 감보아 법령을 제정했다.

7. 3. 알론소 데 소토마요르 총독의 군사 작전 (1583년 ~ 1592년)

알론소 데 소토마요르 총독은 1583년 칠레에 도착하여 잉카인들의 노동으로 세금을 납부하는 것을 금지한 감보아 세율(Tasa de Gamboa)로 인해 인기가 없었던 전임자에 대한 심판을 진행했다. 소토마요르는 감보아를 면죄했지만, 감보아 세율을 폐지하고 산티얀 세율(Tasa de Santillán)을 부활시켜 잉카인들에 대한 엔코멘데로들의 과도한 행위를 막기 위해 노력했다.

1584년 알론소 디아스를 생포하는 등 초기에는 성공적인 작전을 펼쳤으나, 소토마요르는 칠레 정복을 확대하기 위해 서로를 보호하고 도시와 그 주변 토지를 보호하는 일련의 요새를 건설하는 전략을 택했다. 1584년 코엘레무(Coelemu)에 산 파비안 데 코누에오 요새를 건설하여 산티아고와 콘셉시온 사이의 통신을 확보했고, 1585년에는 카티라이, 과키 강이 비오 비오 강으로 합류하는 지점에 산토 아르볼 데 라 크루스, [타볼레보 강] 어귀 근처의 에스피리투 산토, 비오 비오 강 건너편에 있는 산티시마 트리니다드, 쿨렌코 강 상류에 있는 산 제로니모 데 밀라포아 요새를 건설했다. 또한 푸렌에 요새를 세우고 작은 수비대를 배치했다.

소토마요르의 정책에 반대한 토키 카얀카루는 아라우코 요새를 포위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1585년 그의 아들 난고니엘에게 직위를 양도했다. 난고니엘은 아라우코를 공격하여 스페인군의 보급을 막아 철수하게 만들었다. 이후 산티시마 트리니다드를 공격했지만 스페인군과 충돌하여 부상을 입고 살해당했다. 같은 날 카데구알라가 토키로 선포되어 앙골을 공격했으나 반격에 격퇴되었고, 다음 해 푸렌을 포위했다. 그는 기병대를 동원하여 구원군을 물리치고 수비대에 항복을 제안했지만 거절당했다. 이후 요새 사령관 알론소 가르시아 데 라몬과 일대일 결투를 벌여 패배하고 죽임을 당했다. 그의 군대는 포위를 풀었지만, 과노알카를 토키로 선출한 후 다시 돌아와 스페인군을 푸렌에서 몰아내고 1586년에 불태웠다.

한편, 소토마요르는 영국 해적 토마스 캐번디시의 공격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1587년 4월 9일, 킨테로에 정박한 캐번디시는 스페인군에게 패배하여 10명의 부하를 잃고 남아메리카 해안을 따라 항해했다.

소토마요르는 1589년에 푸렌을 재건하고 마리후에뉴 고지에 새로운 요새를 건설했다. 과노알카는 새로운 스페인 요새를 공격하려 했지만, 강력한 방어에 막혀 에스피리투 산토와 산티시마 트리니다드 요새로 목표를 변경했다.

8. 제3차 마푸체 대봉기 (1598)

마르틴 가르시아 오녜스 데 로욜라는 투팍 아마루를 생포한 것으로 유명하며, 펠리페 2세에 의해 직접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이는 그가 아라우코 전쟁을 끝낼 가장 유력한 인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로욜라는 파나마에서 직접 온 군대를 이끌고 마푸체 영토로 진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1594년 5월, 비오비오 강과 라하 강이 합류하는 지점 근처의 레레 강에 산타 크루스 데 오녜스 요새를 건설했다. 이 요새는 1595년에 도시로 승격되어 산타 크루스 데 코야라는 이름을 얻었다. 1598년 12월 21일, 오녜스 데 로욜라는 쿠랄라바 참사에서 펠란타로의 기습을 받아 사망하면서 마푸체족과의 전쟁에서 사망한 두 번째 칠레 총독이 되었다.

1598년 쿠랄라바 전투에서의 패배는 7개 도시 파괴로 알려진 일련의 사건들을 촉발시켰다. 이로 인해 비오비오강 남쪽의 스페인 정착촌들은 칠로에 제도를 제외하고 모두 파괴되었다. 급히 사망한 로욜라의 후임으로 프란시스코 데 키뇨네스가 임명되었으나, 상황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하고 병을 얻어 휴식을 요청했다.

이후 몇 년 동안 마푸체는 산타 크루스 데 코야(1599), 산타 마리아 라 블랑카 데 발디비아(1599), 산 안드레스 데 로스 인판테스(1599), 라 임페리알(1600), 산타 마리아 마달레나 데 비야 리카(1602), 산 마테오 데 오소르노(1603), 산 펠리페 데 아라우칸(1604) 등 비오비오 강 남쪽의 여러 도시와 정착촌을 파괴하거나 버려지게 만들었다.

8. 1. 마르틴 가르시아 오녜스 데 로욜라 총독의 군사 작전 (1592-1598)

마르틴 가르시아 오녜스 데 로욜라는 투팍 아마루를 생포한 것으로 유명하며, 펠리페 2세에 의해 직접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이는 그가 아라우코 전쟁을 끝낼 가장 유력한 인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로욜라는 파나마에서 직접 온 군대를 이끌고 마푸체 영토로 진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1594년 5월, 비오비오 강과 라하 강이 합류하는 지점 근처의 레레 강에 산타 크루스 데 오녜스 요새를 건설했다. 이 요새는 1595년에 도시로 승격되어 산타 크루스 데 코야라는 이름을 얻었다. 1598년 12월 21일, 오녜스 데 로욜라는 쿠랄라바 참사에서 펠란타로의 기습을 받아 사망하면서 마푸체족과의 전쟁에서 사망한 두 번째 칠레 총독이 되었다.

8. 2. 1598년 마푸체 봉기

1598년 쿠랄라바 전투에서의 패배는 7개 도시 파괴로 알려진 일련의 사건들을 촉발시켰다. 이로 인해 비오비오강 남쪽의 스페인 정착촌들은 칠로에 제도를 제외하고 모두 파괴되었다. 급히 사망한 로욜라의 후임으로 프란시스코 데 키뇨네스가 임명되었으나, 상황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하고 병을 얻어 휴식을 요청했다.

이후 몇 년 동안 마푸체는 산타 크루스 데 코야(1599), 산타 마리아 라 블랑카 데 발디비아(1599), 산 안드레스 데 로스 인판테스(1599), 라 임페리알(1600), 산타 마리아 마달레나 데 비야 리카(1602), 산 마테오 데 오소르노(1603), 산 펠리페 데 아라우칸(1604) 등 비오비오 강 남쪽의 여러 도시와 정착촌을 파괴하거나 버려지게 만들었다.

9. 17세기 이후의 전개

17세기 마푸체는 1655년 2월 14일에 클렌타루의 지휘 아래 스페인에 대항하여 마지막 주요 봉기를 일으켰다.[32][33] 이 봉기는 원주민 노예화에 대한 반발로 일어났으며, 마울레 강 남쪽에서 스페인인들이 대거 이주하는 결과를 초래했다.[34][35]

이후, 스페인은 예수회 선교사들이 제안한 "방어 전쟁"과 마푸체와의 합의를 위한 론코와의 의회 개최 등 다양한 전술을 사용했다. 이러한 의회 방식은 상업 성장을 촉진하고 혼혈 인구 증가를 가져왔다.

1655년의 봉기는 보로아 의회에 대한 보복으로, 스페인의 허가 없이는 마푸체가 무기를 휴대하는 것을 금지한 조항에 반발한 것이었다. 1608년 스페인은 1598년부터 시행된 원주민 노예화 금지 조치를 폐지하고, 반란을 일으킨 마푸체에 대한 노예화를 허용했다. 이는 교회의 지원을 받았지만, 이미 진행 중이던 마푸체 노예화를 합법화하여 스페인인들 사이에서 마푸체인들이 매매되는 결과를 낳았다.

10. 18세기

1723년 마푸체 봉기가 일어났다.[36]

11. 같이 보기


  • 마푸체족
  • 우일리체어
  • 마푸둥군어
  • 마푸체족의 기원
  • 칠레 정복
  • 마푸체족 노예화
  • 파타고니아의 아라우칸화
  • 1723년 마푸체족 봉기
  • 1766년 마푸체족 봉기
  • 구에라 아 무에르테
  • 칠레인의 길
  • 사막 원정 (1833–1834)
  • 아라우카니아 및 파타고니아 왕국
  • 사막 정복
  • 아라우카니아 점령
  • 1881년 마푸체족 봉기
  • 마푸체족 분쟁
  • 마울레 전투
  • 잉카 침략

참조

[1] 서적 El estado en el derecho indiano: época de fundación (1492–1570) Instituto de Investigaciones Histórico-Culturales, Facultad de Filosofía y Educación, Universidad de Chile 1951
[2] 서적 Vida fronteriza en la Araucanía: el mito de la Guerra de Arauco Editorial Andrés Bello 1995
[3] 웹사이트 La Guerra de Arauco (1550–1656) – Memoria Chilena http://www.memoriach[...]
[4] 간행물 ¿Un ejército profesional en Chile durante el siglo XVII? http://centroestudio[...] Centro de Estudios Históricos de la Universidad Bernardo O'Higgins 2019-08-24
[5] 간행물 Las cautivas de las Siete Ciudades: El cautiverio de mujeres hispanocriollas durante la Guerra de Arauco, en la perspectiva de cuatro cronistas (s. XVII)
[6] 문서
[7] 서적 The Teleoscopic Polity Springer 2014
[8] 문서 2003
[9] 간행물 Los mapuche de Concepción y la frontera inca: revisión de fuentes tempranas y nuevos datos https://scielo.conic[...]
[10] 문서 2003
[11] 문서 2000
[12] 간행물 Jesuitas, Franciscanos y Capuchinos italianos en la Araucanía (1600–1900)
[13] 간행물 Misioneros y mapuche (1600–1818) http://www.memoriach[...] Biblioteca Nacional de Chile 2014-01-30
[14] 뉴스 La poligamia pervive en las comunidades indígenas del sur de Chile https://www.lainform[...] 2021-01-20
[15] 문서 Carta 15 de octubre de 1550
[16] 문서 Crónica y relación copiosa y verdadera de los reinos de Chile, Historia, Crónica del Reino de Chile
[17] 문서 Crónica, Historia, Crónica
[18] 서적 Crónica y relación copiosa y verdadera de los reinos de Chile http://www.artehisto[...] 2009-01-04
[19] 문서
[20] 서적 Crónica y relación copiosa y verdadera de los reinos de Chile http://www.artehisto[...] 2009-01-18
[21] 서적 Crónica y relación copiosa y verdadera de los reinos de Chile http://www.artehisto[...] 2009-01-18
[22] 문서
[23] 서적 Crónica del Reino de Chile http://www.cervantes[...]
[24] 서적 Historia general de el Reyno de Chile: Flandes Indiano (1554–1625) https://books.google[...]
[25] 서적 Crónica del Reino de Chile http://www.cervantes[...]
[26] 서적 Historia general de el Reyno de Chile: Flandes Indiano (1554–1625) https://books.google[...]
[27] 서적 Crónica del Reino de Chile http://www.cervantes[...]
[28] 서적 Historia de Chile desde su descubrimiento hasta el año 1575 http://www.cervantes[...] 2009-01-18
[29] 서적 Crónica del Reino de Chile http://www.cervantes[...]
[30] 문서
[31] 문서 Historia General De Chile
[32] 서적 Chile: Its History and Development, Natural Features, Products, Commerce and Present Conditions https://books.google[...] C. Scribner's sons
[33] 서적 Historia general de España y América https://books.google[...] Ediciones Rialp
[34] 서적 Dictionary of Indian Tribes of the Americas https://books.google[...] American Indian Publishers, Inc. 1995-01-01
[35] 서적 Colonialism and Postcolonial Development: Spanish America in Comparative Perspective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0-02-15
[36] 서적 Descripcion Histórico Geografía del Reino de Chile, Tomo 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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