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차라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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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루차라 전투는 1702년 이탈리아 북부에서 일어난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중의 전투로, 방돔 공작이 이끄는 프랑스군과 사보이 공작 외젠이 지휘하는 오스트리아군 간의 격돌이었다. 전투는 프랑스군의 유리한 위치에서 시작되었으나, 양측 모두 2,000명에서 4,000명에 이르는 사상자를 내며 결정적인 승리 없이 무승부로 끝났다. 루차라 전투 이후, 이탈리아 전선은 교착 상태에 빠졌으며, 외젠 공은 전장을 장악했다는 이유로 승리를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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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차라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
| 전투 개요 | |
| 전투명 | 루차라 전투 |
| 부분전 |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
![]() | |
| 날짜 | 1702년 8월 15일 |
| 장소 | 이탈리아, 롬바르디아, 루차라 |
| 결과 | 결론 없음 |
| 교전 세력 | |
| 교전국 1 | 신성 로마 제국 |
| 교전국 2 | 프랑스 왕국 사보이 |
| 지휘관 및 지도자 | |
| 지휘관 1 | 프린츠 오이겐 프린스 보데몽 비스콘티 프린스 코메르시 |
| 지휘관 2 | 방돔 펠리페 5세 만토바 공작 비토리오 아메데오 |
| 병력 규모 | |
| 병력 1 | 26,000명 |
| 병력 2 | 30,000 – 35,000명 |
| 피해 규모 | |
| 사상자 1 | 2,000–2,700명 |
| 사상자 2 | 3,500–4,000명 |
2. 배경
1702년 여름 구아스탈라를 점령한 방돔 공작 루이조제프 드 부르봉 휘하의 프랑스군은 북쪽으로 방향을 돌려 보르고포르테를 포위할 목적으로 공격했다. 이 와중에 프랑스군은 포강의 강둑 오른쪽에 있는 루차라 근처에 진영을 설치했다.
1702년 8월 15일, 사부아 공자 외젠이 이끄는 오스트리아군은 포강을 건너 루차라 근처에 주둔한 프랑스군을 기습 공격했다. 방돔 공작 루이조제프 드 부르봉 휘하의 프랑스군은 방어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사보이아 공자 외젠이 이 소식을 들었을 때, 그는 만토바를 공격하던 중이었다. 그는 공성을 포기하고 사용가능한 모든 부대를 조직하여 방돔을 방해하려 하였다.
루차라 근처에 도착한 외젠은 그의 사령부를 리바(Riva)의 마을 근처 북쪽 몇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사령부를 설치했다.
1700년 11월, 자녀가 없던 스페인의 샤를 2세의 죽음으로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발발했다. 그는 자신의 상속자로 프랑스의 루이 14세의 손자인 앙주 공 필리프를 지명했고, 1700년 11월 16일 그는 스페인 제국의 국왕이 되었다. 본토 스페인 외에도 이 제국에는 네덜란드령 스페인과 이탈리아의 광대한 지역, 그리고 중앙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의 상당 부분이 포함되었다. 1701년, 영토 및 상업적 권리에 대한 분쟁은 프랑스와 스페인, 그리고 후보자로 카를( 신성 로마 황제 레오폴트 1세의 차남)을 지지한 대동맹 사이에 전쟁으로 이어졌다.
이탈리아 북부에서의 전쟁은 스페인이 지배하던 밀라노와 만토바 공국에 집중되었는데, 이 공국들은 오스트리아의 남부 국경 안보에 필수적이라고 여겨졌다. 1701년 3월, 프랑스군은 두 도시를 점령했고,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 사보이아 공작은 그의 딸인 마리아 루이자가 필리프 5세와 결혼하는 대가로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다.
그 후 12개월 동안, 제국군 사령관 외젠 공은 프랑스 사령관 빌르루아를 연파하여 아다 강 이후로 후퇴하도록 강요했다. 레오폴트가 다른 곳의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이탈리아에서 자원을 돌렸기 때문에 그는 이 성공을 완전히 활용할 수 없었다. 대신 그는 임기응변으로 1702년 2월 크레모나에서 빌르루아를 기습하여 포로로 잡은 후 모데나를 포위 공격했다. 이 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유지하기로 결심한 루이는 방돔을 상당한 증원군과 함께 빌르루아를 대신하여 파견했다.
필리프 5세는 1702년 7월 12일 나폴리, 시칠리아, 밀라노를 포함한 이탈리아의 스페인령을 방문한 후 방돔에 합류했다. 이로써 그들의 연합군은 1만 명의 사보이아 군과 아일랜드 여단 5개 연대를 포함하여 3만~3만 5천 명으로 증가했다. 같은 해 7월, 방돔은 모데나를 점령한 다음 북쪽으로 돌아 과스타야를 점령했고, 7월 26일 산타 비토리아에서 비스콘티 휘하의 제국 기병대와 충돌했다.
8월 초, 방돔 휘하의 분견대는 포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통제하는 500명의 오스트리아 수비대가 주둔한 작은 마을 루차라를 포위 공격했다. 외젠 공은 이제 미란돌라에 있는 그의 보급 기지에서 끊길 위기에 처했고, 그는 만토바에 대한 봉쇄를 포기하고 루차라로 진군하여 총독에게 자신이 도착할 때까지 버티라고 명령했다. 그의 많은 병력은 미란돌라, 베르셀로, 보르고포르테의 수비대에 묶여 있어 2만 6천 명의 야전군만 남았다. 8월 14일, 그는 루차라 북쪽의 마을 리바에 도착했고, 거기서 그는 이미 마을이 함락되었고 방돔의 나머지 군대가 바로 밖에 있는 진영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3. 전투의 경과
오후 5시경, 오이겐은 총공격을 명령했다. 오스트리아군 우익은 네 번이나 격퇴되었고, 양측 모두 큰 손실을 입었다. 특히 아일랜드 부대와 프랑스 좌익의 알베말 연대가 격렬하게 싸웠다. 콩메르시 공작과 덴마크 보병대는 여러 차례 돌파 직전까지 갔지만, 콩메르시를 포함한 여러 지휘관들이 전사했다.
고르지 않은 지형 때문에 기병은 거의 활약하지 못했고, 전투는 주로 보병 간의 격렬한 싸움으로 진행되었다. 밤이 되면서 전투는 끝났고, 양측 모두 다음 날 공격을 재개할 수 없을 정도로 지친 상태였다.
전투 후, 양군은 1702년 11월 4일 프랑스군이 먼저 철군할 때까지 대치 상태를 유지했다.
3. 1. 초기 배치
1702년 여름 구아스탈라를 점령한 방돔 공작 루이조제프 드 부르봉 휘하의 프랑스군은 북쪽으로 방향을 돌려 보르고포르테를 포위할 목적으로 공격했다. 이 와중에 프랑스군은 포강의 강둑 오른쪽에 있는 루차라 근처에 진영을 설치했다.
사부아 공자 외젠은 만토바를 공격하던 중 이 소식을 듣고 공성을 포기하고 사용 가능한 모든 부대를 조직하여 방돔을 방해하려 하였다.
루차라 근처에 도착한 외젠은 그의 사령부를 리바(Riva) 마을 근처 북쪽 몇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설치했다.
루차라와 포 강 사이에는 강물이 범람하는 것을 막기 위해 축조된 두 개의 제방이 있었다. 하나는 마을 바로 외곽에 있는 높은 제방이고, 다른 하나는 강 근처에 있는 작은 제방이다(지도 참조). 외젠은 자신의 군대를 이 제방 뒤에 숨긴 채 프랑스-사보이아 군대를 기습할 계획이었다. 프랑스-사보이아 군대의 첫 번째 임무가 사료를 수집하고 말에게 물을 먹이는 것이 될 것이므로, 무장하지 않은 상태로 그들을 잡을 수 있기를 바랐다. 그는 자신의 군대를 두 개의 전열로 나누었다. 좌익은 비스콘티와 콩메르시 공작이, 우익은 보드몽 공작이 지휘했고, 그는 중앙을 지휘했다.
8월 15일 오전과 오후 초, 오스트리아군은 포 강을 건너 위치를 점령했지만 프랑스 정찰대에 발각되었다.
3. 2. 전투 시작
방돔은 오른쪽에 오스트리아군과 대치하고 왼쪽에는 포강이 있어 유리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고, 계속 방어를 준비하고 있었다. 지세를 살펴보면 개방된 평야에 여러 수로, 울타리와 큰 관목들이 널려있었다.
오스트리아군은 다운, 보데몽, 헤센-다름슈타트의 게오르크 공작과 구이도 슈타렘베르크와 같은 숙련된 장군들과 병사들이 있었다.
루차라와 포 강 사이에는 강물이 시골 지역으로 범람하는 것을 막기 위해 축조된 두 개의 제방이 있었다. 하나는 마을 바로 외곽에 있는 높은 제방이고, 다른 하나는 강 근처에 있는 작은 제방이다(지도 참조). 오이겐 왕자는 자신의 군대를 이 제방 뒤에 숨긴 채 프랑스-사보이아 군대를 기습할 계획이었다. 프랑스-사보이아 군대의 첫 번째 임무가 사료를 수집하고 말에게 물을 먹이는 것이 될 것이므로, 무장하지 않은 상태로 그들을 잡을 수 있기를 바랐다. 그는 자신의 군대를 두 개의 전열로 나누었다. 좌익은 비스콘티와 콩메르시 공작이, 우익은 보드몽 공작이 지휘했고, 그는 중앙을 지휘했다.
8월 15일 아침, 외젠은 자신의 군대가 충분히 쉴 때까지 기다리다 그들을 급박하게 소집하여 전선에 도착하였다. 약 오후 5시쯤, 그의 계획은 강쪽으로 적을 분산시켜 그들을 포위하는 것이었다. 그는 몇 번 공격을 계속했으나 프랑스군의 강한 저항으로 효율적인 결과를 얻지 못했다.
8월 15일 오전과 오후 초, 오스트리아군은 포 강을 건너 위치를 점령했지만 프랑스 정찰대에 발각되었다. 그들은 신속하게 전열을 갖추었고, 오후 5시경 오이겐 왕자는 총공격을 명령했다. 그의 우익은 네 번이나 격퇴되었고, 양측 모두 특히 아일랜드 부대와 프랑스 좌익을 사수하고 있던 알베말 연대에서 큰 손실을 입었다. 다른 측면의 싸움도 마찬가지로 격렬했다. 콩메르시와 그의 덴마크 보병들은 여러 차례 돌파 직전까지 갔지만, 그와 여러 고위 지휘관들이 전사했다.
지형이 고르지 않아 기병이 전투에서 거의 역할을 하지 못했고, 그 결과 실제로 참전한 병력 수에 비해 사상자가 훨씬 더 많았다. 프랑스군은 기진맥진하고 어둠이 싸움을 끝낼 때까지(자정 무렵) 전열을 유지했고, 어느 쪽 군대도 아침에 공격을 재개할 수 없었다.
3. 3. 격렬한 전투
방돔은 오른쪽에 오스트리아군과 대치하고 왼쪽에는 포강이 있어 유리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고, 계속 방어를 준비하고 있었다. 지형은 개방된 평야에 여러 수로, 울타리와 큰 관목들이 널려있는 형태였다.
오스트리아군은 다운, 보데몽, 헤센-다름슈타트의 게오르크 공작과 구이도 슈타렘베르크와 같은 숙련된 장군들과 병사들이 있었다.
8월 15일 아침, 외젠은 자신의 군대가 충분히 쉴 때까지 기다리다 그들을 급박하게 소집하여 전선에 도착하였다. 약 오후 5시쯤, 그의 계획은 강쪽으로 적을 분산시켜 그들을 포위하는 것이었다. 그는 몇 번 공격을 계속했으나 프랑스군의 강한 저항으로 효율적인 결과를 얻지 못했다.
전투는 어두워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루차라와 포 강 사이에는 강물이 범람하는 것을 막기 위해 축조된 두 개의 제방이 있었다. 하나는 마을 바로 외곽에 있는 높은 제방이고, 다른 하나는 강 근처에 있는 작은 제방이었다(지도 참조). 오이겐 왕자는 자신의 군대를 이 제방 뒤에 숨긴 채 프랑스-사보이아 군대를 기습할 계획이었다. 그는 자신의 군대를 두 개의 전열로 나누었다. 좌익은 비스콘티와 콩메르시 공작이, 우익은 보드몽 공작이 지휘했고, 그는 중앙을 지휘했다.
8월 15일 오전과 오후 초, 오스트리아군은 포 강을 건너 위치를 점령했지만 프랑스 정찰대에 발각되었다. 그들은 신속하게 전열을 갖추었고, 오후 5시경 오이겐 왕자는 총공격을 명령했다. 그의 우익은 네 번이나 격퇴되었고, 양측 모두 특히 아일랜드 부대와 프랑스 좌익을 사수하고 있던 알베말 연대에서 큰 손실을 입었다. 다른 측면의 싸움도 마찬가지로 격렬했다. 콩메르시와 그의 덴마크 보병들은 여러 차례 돌파 직전까지 갔지만, 그와 여러 고위 지휘관들이 전사했다.
지형이 고르지 않아 기병은 전투에서 거의 역할을 하지 못했고, 그 결과 실제로 참전한 병력 수에 비해 사상자가 훨씬 더 많았다. 프랑스군은 기진맥진하고 어둠이 싸움을 끝낼 때까지(자정 무렵) 전열을 유지했고, 어느 쪽 군대도 아침에 공격을 재개할 수 없었다. 오이겐 왕자는 전장을 장악한 상태였기 때문에 당시 관례에 따라 승리했다고 선언했다.
3. 4. 전투 결과
루차라 전투는 양측 모두에게 큰 피해를 입힌 격렬한 전투였다. 오스트리아군은 2,000명의 사상자를 냈고, 프랑스군은 그 두 배인 4,000명의 사상자를 냈다. 전투는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계속되었고, 양측 모두 상당한 피해를 입어 전투를 계속하기 어려웠다.
오이겐은 전장을 장악했기 때문에 당시 관례에 따라 승리를 선언했다. 그러나 프랑스군을 루차라에서 몰아내지 못했고, 방돔 역시 큰 피해를 입어 전투를 계속할 수 없었다. 결국 양측 모두 손해를 본 채 이탈리아 전선은 침체되었다.
전투 이후 양군은 1702년 11월 4일 프랑스군이 먼저 철수할 때까지 대치 상태를 유지했다.
4. 전투의 영향
뱅돔 측은 4,000명의 사상자를 냈지만, 황제군의 손실은 2,000명이었다. 대부분의 분석가들은 이 전투를 무승부로 간주한다. 비록 이 전투로 프랑스군의 공세가 끝났지만, 양측 군대는 다음 달까지 서로 대치하며, 때때로 포격을 가했다. 이로 인해 외젠 공은 양측이 동계 주둔지로 이동할 때까지 버틸 수 있었지만, 프랑스-사보이아 연합군은 지난 12개월 동안 잃었던 모든 지역을 되찾았다.
전투 이틀 후, 필립은 마드리드로 돌아갔다. 1703년 1월, 외젠 공은 빈으로 소환되어 황제 전쟁평의회 의장직을 맡았고, 이탈리아의 사령관직은 스타르헴베르크가 대신했다. 1703년 이탈리아 전선은 고요했다. 스타르헴베르크는 수적으로 열세였고, 뱅돔은 대부분의 시간을 바이에른의 막시밀리안이 티롤을 통해 무익한 공세를 펼치는 것을 지원하는 데 보냈다. 1703년 10월,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는 연합군에 가담했다. 그 후 2년 동안 뱅돔은 점차 롬바르디아 대부분을 정복했다.
1708년, 외젠 공은 네덜란드 화가 후히텐부르크에게 자신의 승리를 기록하는 일련의 그림을 의뢰했는데, 여기에는 루차라 전투도 포함되었다.
4. 1. 오이겐 공의 귀환과 군사 개혁

외젠 공이 이끄는 황제군은 2,000명의 사상자를 냈고, 뱅돔이 이끄는 프랑스군은 4,000명의 사상자를 냈다. 대부분의 분석가들은 이 전투를 무승부로 간주한다. 비록 이 전투로 프랑스군의 공세가 끝났지만, 양측 군대는 다음 달까지 서로 대치하며, 때때로 포격을 가했다. 이로 인해 외젠 공은 양측이 동계 주둔지로 이동할 때까지 버틸 수 있었지만, 프랑스-사보이아 연합군은 지난 12개월 동안 잃었던 모든 지역을 되찾았다.
전투 이틀 후, 필립은 마드리드로 돌아갔다. 1703년 1월, 외젠 공은 빈으로 소환되어 황제 전쟁평의회 의장직을 맡았고, 이탈리아의 사령관직은 스타르헴베르크가 대신했다. 1703년 이탈리아 전선은 고요했다. 스타르헴베르크는 수적으로 열세였고, 뱅돔은 대부분의 시간을 바이에른의 막시밀리안이 티롤을 통해 무익한 공세를 펼치는 것을 지원하는 데 보냈다. 1703년 10월,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는 연합군에 가담했다. 그 후 2년 동안 뱅돔은 점차 롬바르디아 대부분을 정복했다.
1708년, 외젠 공은 네덜란드 화가 얀 판 후히텐부르크에게 자신의 승리를 기록하는 일련의 그림을 의뢰했는데, 여기에는 루차라 전투도 포함되었다.
1702년 프랑스군 사령관에 취임한 루이 조제프 드 부르봉 공작은 구아스탈라에서 북상하여 오스트리아군이 주둔하고 있는 만토바 공국 포위를 기도했다. 한편, 오스트리아군은 정부로부터 지원이 전혀 오지 않아 병사들이 약탈을 일삼고, 주민들이 보복으로 게릴라를 일으키는 악순환에 시달렸다.
오이겐은 상황 타개를 위해 루차라의 프랑스군 야영지를 기습 공격했고, 랑돔도 응전했다. 전투는 밤까지 계속되었고, 양군 모두 철수했다. 오스트리아군의 피해는 2,000명, 프랑스군은 그 배인 4,000명에 달했지만, 오이겐은 프랑스군을 루차라에서 몰아내지 못했고, 랑돔도 큰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전투를 계속할 수 없어 양군 모두 손해를 보는 형태로 이탈리아 전선은 침체되었다.
전후, 본국으로부터 지원이 오지 않는 것에 지친 오이겐은 12월 말 이탈리아 원정군을 구이도 폰 슈타렌베르크에게 맡기고, 지원 요청을 위해 오스트리아로 귀국했다. 그러나 독일에서 바이에른 선제후 막시밀리안 2세가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에, 오이겐은 1703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레오폴트 1세로부터 오스트리아군의 전권을 위임받아 1704년 독일로 출진했다.
4. 2. 바이에른의 반란과 블렌하임 전투
본국으로부터 지원이 오지 않는 것에 지친 오이겐(오이겐 폰 사보이엔)은 1702년 12월 말 이탈리아 원정군을 구이도 폰 슈타렌베르크에게 맡기고, 지원 요청을 위해 오스트리아로 귀국했다. 그러나 독일에서 바이에른 선제후 막시밀리안 2세가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에, 1703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레오폴트 1세로부터 오스트리아군의 전권을 위임받아 1704년 독일에 출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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