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칠리아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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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시칠리아 왕국은 1130년 로제르 2세에 의해 건국된 노르만 왕국으로, 이탈리아 남부 시칠리아 섬과 주변 지역을 통치했다. 노르만 왕조는 중앙 집권적 통치를 강화하고 지중해 무역을 통해 번영을 누렸지만, 1194년 호엔슈타우펜 왕가에 의해 멸망했다. 이후 호엔슈타우펜 왕조, 앙주 왕조, 아라곤 왕국, 스페인, 사보이아 왕가를 거쳐 부르봉 왕조가 시칠리아를 통치했으며, 1816년 나폴리 왕국과 통합되어 두 시칠리아 왕국을 형성했다. 시칠리아 왕국은 다양한 문화와 종교가 공존했으며, 봉건제와 절대 군주제를 거치며 유럽 역사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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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칠리아 왕국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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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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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어 | 아니무스 투우스 도미누스 (Animus Tuus Dominus) |
표어 (번역) | 용기가 그대의 주인이로다 |
수도 | 팔레르모 |
공용어 | 시칠리아어 이탈리아어 라틴어 (관료) |
종교 | 로마 가톨릭교회 (국교) |
데모님 | 시칠리아인 |
좌표 | 38°35′31″N 16°04′44″E |
역사 | |
시작 사건 | 루제루 2세의 왕위 수여 |
시작 연도 | 1130년 |
종료 사건 | 양시칠리아 왕국 |
종료 연도 | 1816년 |
주요 사건 | 시칠리아 만종 사건 |
주요 사건 연도 | 1282년 |
이전 국가 | 시칠리아 백국 아풀리아 칼라브리아 백국 |
이후 국가 | 양시칠리아 왕국 |
정치 | |
정치 체제 | 봉건 군주제 |
국왕 (초대) | 루제루 2세 |
국왕 (초대) 재위 기간 | 1130년–1154년 |
국왕 (앙주 가문) | 카를루 1세 |
국왕 (앙주 가문) 재위 기간 | 1266년–1282년 |
국왕 (마지막) | 페르디난도 3세 |
국왕 (마지막) 재위 기간 | 1759년–1816년 |
의회 | 시칠리아 의회 |
기타 정보 | |
현재 국가 | 이탈리아 몰타 |
상태 | 주권 국가 (1130년–1409년, 1806년–1816년) 아라곤 왕관령 (1409년–1713년) 사보이 공국과의 동군 연합 (1713년–1720년) 합스부르크 군주국 통치 하 (1720년–1735년) 나폴리 왕국과의 동군 연합 (1735년–1806년) |
2. 역사
시칠리아 왕국의 역사는 11세기 남부 이탈리아를 정복한 노르만족으로부터 시작된다. 1130년, 시칠리아의 로제르 2세는 교황 인노켄티우스 2세의 동의를 얻어 시칠리아 왕국을 건국하고, 시칠리아 백작령, 아풀리아 공국, 말타 제도 등을 통합했다.[8][9] 그는 대립교황 아나클레투스 2세를 지지하여 왕위에 올랐다.[9]
로제르 2세는 아리아노 법령을 통해 중앙집권화를 추진하고, 여러 차례의 침략과 반란을 진압했다. 그의 제독 안티오키아의 조르주는 이프리키야 해안을 정복하여 "아프리카의 왕"이라는 칭호를 얻게 했으며, 비잔티움 제국을 공격하여 시칠리아를 지중해의 주요 해양 강국으로 만들었다.[9]
로제르 2세의 아들 시칠리아의 빌헬름 1세는 귀족 반란을 지지했던 연대기 작가들 사이에서 인기가 없어 "악당 빌헬름"으로 불렸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북아프리카 영토 대부분을 상실했고, 1160년 알모하드 왕조에게 마지막 거점인 마흐디야를 빼앗겼다. 그의 아들 시칠리아의 빌헬름 2세는 "선왕"으로 불리며 20년간 평화와 번영을 이끌었지만, 자녀가 없어 계승 위기가 발생했다.
1189년 빌헬름 2세 사후, 하인리히 6세의 왕비이자 빌헬름 2세의 이모인 콘스탄차와 빌헬름 2세의 삼촌의 서자인 탄크레드가 왕위를 다투었다. 귀족들의 지지를 받은 탄크레드가 왕위에 올랐으나, 1194년 탄크레드 사후 하인리히 6세가 팔레르모를 함락하면서 호엔슈타우펜 왕조가 시작되었다.[11]
1197년 하인리히 6세가 사망하고 어린 프리드리히 2세가 왕위에 올랐으나, 권력 공백으로 인해 혼란이 발생했다.[12] 프리드리히 2세는 멜피 헌장(1231)을 통해 중앙집권적인 절대 군주제를 확립하고, 나폴리 대학교를 설립하는 등 개혁을 추진했다.[10][13][14]
프리드리히 2세 사후, 앙주-시칠리아 가문의 샤를 1세가 시칠리아를 정복했다. 그러나 프랑스 관료와 세금에 대한 반발, 아라곤 왕관과 동로마 제국의 선동으로 1282년 시칠리아 만종 사건이 발생했고, 아라곤의 페드로 3세가 시칠리아 섬을 차지하면서 왕국은 시칠리아 섬과 나폴리 왕국으로 분열되었다.
1409년 시칠리아의 마르티노 1세와 그의 아버지 아라곤의 마르틴 1세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면서, 1412년 카스페 타협을 통해 트라스타마라 가문의 페르난도 1세가 아라곤과 시칠리아의 왕이 되었다.[19] 그의 손자 페르난도 2세는 카스티야 왕국과의 연합을 통해 스페인 왕국을 성립시키고, 나폴리 왕국도 재정복했다.[19]
1530년 카를 5세는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로마를 보호하기 위해 몰타와 고조 섬을 성 요한 기사단에게 영구 봉토로 주었다.[20]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이후 1713년 우트레히트 조약에 따라 시칠리아 왕국은 사보이아 왕가의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에게 넘어갔으나, 사중 동맹 전쟁의 결과 1720년 헤이그 조약에 따라 오스트리아의 카를 6세에게 넘겨졌다.[21]
1734년,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의 결과, 스페인의 펠리페 5세의 아들 카를로가 나폴리 왕 카를로 7세이자 시칠리아 왕 카를로 5세로 즉위하면서 부르봉 왕가의 통치가 시작되었다.[21]
1799년 나폴레옹에게 나폴리를 빼앗긴 페르디난도 왕은 시칠리아로 피신했고, 시칠리아는 윌리엄 벤팅크 경이 이끄는 영국군의 영향으로 입헌 군주제를 도입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21] 1815년 나폴레옹 몰락 후, 페르디난도는 1816년 나폴리를 수도로 하는 두 시칠리아 왕국을 건설했다. 시칠리아 주민들은 이에 반발하여 1820년과 1848년에 봉기했으나 진압되었다.
2. 1. 노르만 왕조 (1130년-1194년)
1130년 노르만인 로제르 2세가 교황 인노켄티우스 2세의 동의를 얻어 시칠리아 왕국을 건국했다.[8] 로제르 2세는 아버지 로제르 1세로부터 상속받은 시칠리아 백작령, 1127년 사촌 빌헬름 2세가 사망할 때까지 소유했던 아풀리아 공국, 말타 제도 등 영토를 통합했다. 로제르는 대립교황 아나클레투스 2세를 지지하여 1130년 크리스마스에 시칠리아 왕으로 즉위했다.[9]1136년, 아나클레투스의 라이벌인 교황 인노켄티우스 2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로타르 3세를 설득하여 비잔티움 황제 요한 2세 콤네누스의 도움을 받아 시칠리아 왕국을 공격하게 했다. 로타르가 이끄는 군대와 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10세가 이끄는 군대가 시칠리아를 침공했다. 트론토 강에서 로리텔로의 빌헬름은 로타르에게 항복하고 그에게 테르몰리의 성문을 열었다.[11] 이어서 몰리제 백작 위그 2세가 뒤따랐다. 두 군대는 바리에서 합류하여 1137년에 전역을 계속했다. 로제르는 아풀리아를 제국에 봉토로 줄 것을 제안했지만 인노켄티우스의 압력을 받은 로타르는 거절했다. 같은 시기에 로타르의 군대는 반란을 일으켰다.[9][10]
시칠리아 완전 정복을 기대했던 로타르는 시칠리아 왕국에서 카푸아와 아풀리아를 로제르의 적들에게 주었다. 인노켄티우스는 아풀리아가 교황의 주장에 따라야 한다고 항의했다. 로타르는 북쪽으로 돌아섰지만 1137년 12월 4일 알프스를 건너는 도중 사망했다. 1139년 4월 라테라노 공의회 제2차 회의에서 인노켄티우스는 분열적인 태도를 유지한 로제르를 파문했다. 1139년 3월 22일 갈루치오에서 로제르의 아들 아풀리아 공작 로제르 3세는 1000명의 기사들과 교황군을 매복하여 교황을 사로잡았다.[10] 1139년 3월 25일 인노켄티우스는 미냐노 조약에 따라 로제르의 왕위와 소유물을 인정하도록 강요당했다.[9][10]
로제르는 그의 대관식부터 아리아노 법령으로 끝나는 10년 동안 대부분의 시간을 정부를 중앙 집중화하려는 의도로 일련의 법률을 제정하는 데 보냈다. 그는 또한 여러 차례의 침략을 막아내고 그의 주요 봉신들인 바리의 그리몰드, 카푸아의 로베르토 2세, 알리페의 란울프, 나폴리의 세르지우스 7세 등의 반란을 진압했다.
그의 제독 안티오키아의 조르주를 통해 로제르는 지리드 왕조로부터 이프리키야의 해안을 정복하고 비공식적인 칭호인 "아프리카의 왕"을 얻어 아프리카 노르만 왕국의 기초를 마련했다. 동시에 로제르의 함대는 비잔티움 제국을 공격하여 시칠리아를 거의 한 세기 동안 지중해의 주요 해양 강국으로 만들었다.[9]
로제르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시칠리아의 빌헬름 1세는 "악당 빌헬름"으로 알려졌는데, 이는 귀족 반란을 지지했던 연대기 작가들 사이에서의 인기 부족 때문이었다. 1150년대 중반, 빌헬름은 북아프리카 영토 대부분을 잃었다. 1160년 마지막 노르만 아프리카 거점인 마흐디야가 알모하드 왕조에게 함락되었다. 그의 통치는 1166년 평화롭게 끝났다. 그의 장남인 아풀리아 공작 로제르 4세는 이전 반란에서 사망했고, 아들 빌헬름 2세는 미성년자였다. 어머니 나바라의 마르가레타의 섭정이 1172년에 끝날 때까지 왕국 내 혼란은 통치 가문을 거의 몰락시킬 뻔했다. 빌헬름 2세의 통치는 거의 끊임없는 평화와 번영의 20년으로 기억된다. 이 때문에 그는 "선왕"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러나 그는 자녀가 없었고, 이는 계승 위기를 초래했다. 로제르 2세의 딸이자 왕위 계승자였던 이모 시칠리아의 콘스탄스는 "결혼이 시칠리아를 파괴할 것"이라는 예언 때문에 수녀원에 갇혀 있었다.
1189년, 빌헬름 2세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자, 로마 황제 하인리히 6세의 왕비이자 그의 이모인 콘스탄차와, 그의 삼촌의 서자인 레체 백작 탄크레드가 왕위를 다투었다. 외국 지배를 싫어하는 여러 귀족들의 지지를 얻은 탄크레드가 왕위에 올랐다.
1184년 콘스탄스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의 장남이자 미래의 황제 하인리히 6세와 약혼했다. 빌헬름은 콘스탄스와 하인리히를 왕위 계승자로 임명했지만, 관리들은 독일인의 통치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1189년 빌헬름의 죽음은 왕국의 몰락으로 이어졌다.[11]
관리들의 지원을 받아 레체의 탄크레드가 왕위를 찬탈했다. 같은 해 그는 먼 사촌인 안드리아의 로제르의 반란(하인리히와 콘스탄스를 지지했지만 1190년 사형당했다)과 1191년부터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된 독일 왕 하인리히의 침공(부인을 위해 침공)에 대처해야 했다. 하인리히는 공격이 실패한 후 후퇴해야 했고, 황후 콘스탄스는 포로로 잡혔다가 교황의 압력으로 석방되었다.
1194년 탄크레드 사후, 그의 어린 아들 빌헬름 3세가 왕위에 올랐으나, 침공해 온 하인리히 6세에게 팔레르모를 함락당하며 호엔슈타우펜 왕조는 멸망했다. 콘스탄스와 하인리히가 승리하여 왕국은 호엔슈타우펜 가문에게 함락되었다. 시칠리아의 빌헬름 3세는 폐위되었고, 하인리히와 콘스탄스는 국왕과 여왕으로 즉위했다. 오트빌 가문의 피는 콘스탄스를 통해 프리드리히에게 전해졌고, 그는 시칠리아에서 프리드리히 1세로 통치했다.[11]
2. 1. 1. 남부 이탈리아 노르만 정복
11세기가 되자, 남부 이탈리아 본토의 롬바르드 세력과 비잔티움 세력은 북부 프랑스의 바이킹 후손인 노르만 용병들을 고용했다. 로제르 1세 지휘하의 노르만인들이 시칠리아를 정복하여 시칠리아 무슬림으로부터 빼앗았다. 아풀리아와 칼라브리아를 점령한 후, 로제르는 700명의 기사로 이루어진 군대를 이끌고 메시나를 점령했다. 1068년, 로제르 1세와 그의 군대는 미실메리에서 무슬림을 물리쳤지만, 가장 중요한 전투는 팔레르모 공성전이었으며, 이 전투로 1091년 시칠리아 전체가 노르만의 지배하에 들어갔다.[7]2. 1. 2. 시칠리아 왕국 건국
1130년 노르만인 로제르 2세가 교황 인노켄티우스 2세의 동의를 얻어 시칠리아 왕국을 건국했다.[8] 로제르 2세는 아버지 로제르 1세로부터 상속받은 시칠리아 백작령, 1127년 사촌 빌헬름 2세가 사망할 때까지 소유했던 아풀리아 공국, 말타 제도 등 영토를 통합했다. 로제르는 대립교황 아나클레투스 2세를 지지하여 1130년 크리스마스에 시칠리아 왕으로 즉위했다.[9]
11세기 중반, 프랑스 노르망디 출신 노르망인 기사 로베르토 기스카르도는 동로마 제국 영토였던 남이탈리아를 정복했다. 1071년 그의 동생 루제로 1세는 시칠리아를 정복하고 로베르토로부터 시칠리아 백작령을 받았다.
1130년 루제로 1세의 아들 루제로 2세는 아나클레투스 2세로부터 왕위를 얻어, 호엔슈타우펜 왕조(노르망 왕조) 시칠리아 왕국이 성립되었다.
2. 1. 3. 노르만 왕조의 번영과 몰락
1130년 크리스마스, 로제르 2세는 교황 인노켄티우스 2세의 동의를 얻어 노르만인 왕국을 건국했다.[8] 로제르 2세는 로제르 1세로부터 상속받은 영토와 아풀리아 공국 및 시칠리아 백작령을 통합했다. 말타 제도는 시칠리아 에미르국 아랍인들로부터 정복한 영토였다. 로제르는 대립교황 아나클레투스 2세를 지지하여 1130년 크리스마스에 시칠리아 왕으로 즉위했다.[9]
1136년, 교황 인노켄티우스 2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로타르 3세를 설득, 비잔티움 황제 요한 2세 콤네누스의 도움을 받아 시칠리아 왕국을 공격하게 했다. 로타르와 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10세의 군대가 시칠리아를 침공, 트론토 강에서 로리텔로의 빌헬름이 항복하고 테르몰리 성문을 열었다.[11] 몰리제 백작 위그 2세도 항복했다. 두 군대는 바리에서 합류, 1137년에 전역을 계속했다. 로제르는 아풀리아를 제국 봉토로 제안했으나 인노켄티우스의 압력으로 로타르는 거절했다. 같은 시기 로타르의 군대는 반란을 일으켰다.[9][10]
로타르는 카푸아와 아풀리아를 로제르의 적들에게 주었다. 인노켄티우스는 아풀리아가 교황령이라고 주장했다. 로타르는 북쪽으로 돌아갔으나 1137년 12월 4일 알프스에서 사망했다. 1139년 4월 라테라노 공의회 제2차 회의에서 인노켄티우스는 로제르를 파문했다. 1139년 3월 22일, 로제르의 아들 아풀리아 공작 로제르 3세는 1000명의 기사로 교황군을 매복, 교황을 사로잡았다.[10] 1139년 3월 25일, 인노켄티우스는 미냐노 조약으로 로제르의 왕위와 소유물을 인정했다.[9][10]
로제르는 아리아노 법령을 통해 정부를 중앙집권화하고, 바리의 그리몰드, 카푸아의 로베르토 2세, 알리페의 란울프, 나폴리의 세르지우스 7세 등의 반란을 진압했다.
안티오키아의 조르주를 통해 로제르는 지리드 왕조로부터 이프리키야 해안을 정복, "아프리카의 왕" 칭호를 얻고 아프리카 노르만 왕국의 기초를 마련했다. 로제르의 함대는 비잔티움 제국을 공격, 시칠리아를 지중해 주요 해양 강국으로 만들었다.[9]
로제르의 아들 시칠리아의 빌헬름 1세는 "악당 빌헬름"으로 알려졌는데, 이는 귀족 반란을 지지했던 연대기 작가들 사이에서의 인기 부족 때문이었다. 1150년대 중반, 빌헬름은 북아프리카 영토 대부분을 잃었다. 1160년, 알모하드 왕조에게 마지막 노르만 아프리카 거점인 마흐디야가 함락되었다. 그의 통치는 1166년 평화롭게 끝났다. 아풀리아 공작 로제르 4세는 이전 반란에서 사망했고, 빌헬름 2세는 미성년자였다. 나바라의 마르가레타의 섭정이 1172년에 끝날 때까지 왕국은 혼란스러웠다. 빌헬름 2세의 통치는 20년간 평화와 번영을 누려 "선왕"으로 불렸다. 그러나 그는 자녀가 없어 계승 위기가 발생했다. 시칠리아의 콘스탄스는 "결혼이 시칠리아를 파괴할 것"이라는 예언 때문에 수녀원에 갇혀 있었다. 1184년, 그녀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의 아들 하인리히 6세와 약혼했다. 빌헬름은 콘스탄스와 하인리히를 왕위 계승자로 임명했지만, 관리들은 독일인 통치를 원치 않아 1189년 빌헬름의 죽음은 왕국 몰락으로 이어졌다.[11]
관리들의 지원으로 레체의 탄크레드가 왕위를 찬탈했다. 그는 안드리아의 로제르의 반란과 하인리히의 침공에 대처해야 했다. 하인리히는 후퇴했고, 콘스탄스는 포로로 잡혔다가 교황 압력으로 석방되었다. 탄크레드는 1194년에 죽었고, 콘스탄스와 하인리히가 승리, 1194년 왕국은 호엔슈타우펜 가문에게 함락되었다. 시칠리아의 빌헬름 3세는 폐위되었고, 하인리히와 콘스탄스는 국왕과 여왕으로 즉위했다. 오트빌 가문의 피는 콘스탄스를 통해 프리드리히에게 전해졌고, 그는 시칠리아에서 프리드리히 1세로 통치했다.[11]
2. 2. 호엔슈타우펜 왕조 (1194년-1266년)
시칠리아의 콘스탄스 왕비가 오트빌 가문의 루제로 2세의 딸이었기에 시칠리아 왕위는 호엔슈타우펜 왕가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6세에게 넘어갔다. 1197년 하인리히 6세가 사망하고, 어린 프리드리히 2세(페데리코)가 왕이 되었으나, 콘스탄체 또한 이듬해 세상을 떠났다.1220년, 페데리코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시칠리아 왕으로서는 페데리코 1세)가 되었지만, 시칠리아 출생인 페데리코는 로마 왕이라기보다는 시칠리아 왕이었고, 노르만 왕조의 계승자였다. 페데리코는 이탈리아 반도 지배에 나섰기 때문에 교황과 격렬하게 대립하여 여러 차례 파문을 당하고 대립왕이 세워졌다.
프리드리히 2세 사후, 시칠리아 왕국은 그의 아들들이 계승했으나, 프랑스 왕 루이 9세의 동생이자 앙주-시칠리아 가문의 시조가 되는 샤를 1세(칼로 1세)가 교황의 요청을 받고 정복했다.
2. 2. 1. 하인리히 6세와 콘스탄체의 통치
1194년 하인리히 6세의 군대가 살레르노를 공격하고, 하인리히 6세가 팔레르모에 입성하였다.[12]
1197년 하인리히 6세가 사망하고,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가 되는 어린 프리드리히가 왕위에 올랐다. 어린 왕의 즉위는 시칠리아에 심각한 권력 공백을 야기했다.[12] 그의 삼촌 필리프 슈바벤은 1198년 마르크바르트 폰 안바일러를 섭정으로 임명하여 프리드리히의 상속권을 확보하려 했다. 한편,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는 시칠리아에서 교황의 권위를 재확립했지만 프리드리히의 권리를 인정했다. 이후 10년 동안 교황의 권력은 꾸준히 감소했고, 교황은 어느 편을 들어야 할지 확신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12]
호엔슈타우펜 가문의 권력 장악은 안전하지 않았다. 발터 3세 드 브리엔느는 시칠리아의 탄크레드의 딸이자 폐위된 시칠리아 왕 빌헬름 3세의 여동생과 결혼했다. 1201년 빌헬름은 왕국을 요구하기로 결정했다. 1202년, 총리 발터 폰 팔레아리아와 디폴트 폰 포흐부르크가 이끄는 군대는 발터 3세 드 브리엔느에게 패배했다. 마르크바르트가 사망했고, 프리드리히는 피사 공화국 세력과 동맹을 맺은 빌헬름 폰 카파로네의 통제하에 놓였다. 디폴트는 1205년 왕위 계승자의 죽음까지 본토에서 발터와 전쟁을 계속했다. 디폴트는 마침내 1206년 카파로네로부터 프리드리히를 빼앗아 총리 발터 폰 팔레아리아의 후견 아래 맡겼다. 그러나 발터와 디폴트는 불화를 겪었고, 디폴트는 왕궁을 점령했으며, 1207년 발터에게 포위되어 사로잡혔다. 10년 후, 섭정과 왕위를 둘러싼 전쟁은 끝났다.[11]
2. 2. 2. 프리드리히 2세의 통치
1197년, 훗날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가 되는 어린 프리드리히의 즉위는 시칠리아의 미래에 큰 영향을 미쳤다. 중앙집권적인 왕권에 익숙해진 시칠리아에서 어린 왕의 나이는 심각한 권력 공백을 야기했다. 그의 삼촌 필리프 슈바벤은 1198년 마르크바르트 폰 안바일러를 섭정으로 임명하여 프리드리히의 상속권을 확보하려 했다. 한편,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는 시칠리아에서 교황의 권위를 재확립했지만 프리드리히의 권리를 인정했다. 교황은 이후 10년 동안 교황의 권력이 꾸준히 감소하는 것을 보았고, 많은 경우 어느 편을 들어야 할지 확신하지 못했다.[12]하지만 호엔슈타우펜 가문의 권력 장악은 안전하지 않았다. 발터 3세 드 브리엔느는 시칠리아의 탄크레드의 딸과 결혼하여 1201년 왕국을 요구하기로 결정했다. 1202년, 총리 발터 폰 팔레아리아와 디폴트 폰 포흐부르크가 이끄는 군대는 발터 3세 드 브리엔느에게 패배했다. 마르크바르트가 사망했고, 프리드리히는 피사 공화국 세력과 동맹을 맺은 빌헬름 폰 카파로네의 통제하에 놓였다. 디폴트는 1205년 왕위 계승자의 죽음까지 본토에서 발터와 전쟁을 계속했다. 디폴트는 마침내 1206년 카파로네로부터 프리드리히를 빼앗아 발터 폰 팔레아리아의 후견 아래 맡겼다. 그러나 발터와 디폴트는 불화를 겪었고, 디폴트는 왕궁을 점령했으며, 1207년 발터에게 포위되어 사로잡혔다. 10년 후, 섭정과 왕위를 둘러싼 전쟁은 끝났다.[11]
프리드리히 2세는 아리아노 조약으로 시작된 법 개혁을 카푸아 조약(1220)과 멜피 헌장(1231, ''리베르 아우구스타리스''로도 알려짐) 공포를 통해 계속했다. 멜피 헌장은 중앙 집권 국가를 수립하기 위해 만들어졌으며, 당시로서는 놀라운 일이었다.[12] 예를 들어, 시민들은 왕명을 받지 않는 한 공공장소에서 무기를 휴대하거나 갑옷을 착용할 수 없었다.[12] 그 결과 반란이 감소했다. 멜피 헌장은 시칠리아 왕국을 절대 군주제로 만들었는데, 이는 유럽에서 봉건 제도에서 등장한 최초의 중앙 집권 주권 국가이자 성문법의 우위에 대한 선례를 세웠다.[10] 비교적 작은 수정을 거쳐 ''리베르 아우구스타리스''는 1819년까지 시칠리아 법의 기초로 남아 있었다.[13] 이 기간 동안 그는 카스텔 델 몬테를 건설했고, 1224년에는 나폴리 대학교(현재 나폴리 페데리코 2세 대학교)를 설립했다.[14]
프리드리히는 열쇠 전쟁(1228~1230)에서 교황의 시칠리아 침공을 격퇴해야 했다.[15]
2. 2. 3. 호엔슈타우펜 왕조의 몰락
1197년, 훗날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가 되는 어린 프리드리히가 왕위에 오르면서 시칠리아는 큰 변화를 맞게 되었다. 중앙 집권적인 왕권에 익숙했던 시칠리아에서 어린 왕의 즉위는 심각한 권력 공백을 초래했다. 그의 삼촌 필리프 슈바벤은 1198년 마르크바르트 폰 안바일러를 섭정으로 임명하여 프리드리히의 상속권을 확보하려 했다. 한편,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는 시칠리아에서 교황의 권위를 재확립했지만 프리드리히의 권리를 인정했다. 이후 10년 동안 교황의 권력은 꾸준히 감소했고, 교황은 어느 편을 들어야 할지 확신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12]하지만 호엔슈타우펜 가문의 권력 장악은 순탄치 않았다. 발터 3세 드 브리엔느는 시칠리아의 탄크레드의 딸이자 폐위된 시칠리아 왕 빌헬름 3세의 여동생과 결혼하여 1201년 왕국을 요구하기로 결정했다. 1202년, 총리 발터 폰 팔레아리아와 디폴트 폰 포흐부르크가 이끄는 군대는 발터 3세에게 패배했다. 마르크바르트가 사망했고, 프리드리히는 피사 공화국 세력과 동맹을 맺은 빌헬름 폰 카파로네의 통제하에 놓였다. 디폴트는 1205년 왕위 계승자가 사망할 때까지 본토에서 발터와 전쟁을 계속했다. 디폴트는 마침내 1206년 카파로네로부터 프리드리히를 빼앗아 총리 발터 폰 팔레아리아의 후견 아래 맡겼다. 그러나 발터와 디폴트는 불화를 겪었고, 디폴트는 왕궁을 점령했으며, 1207년 발터에게 포위되어 사로잡혔다. 10년 후, 섭정과 왕위를 둘러싼 전쟁은 끝났다.[11]
법 개혁은 1140년 시칠리아의 로제르 2세에 의해 아리아노 조약으로 시작되었다. 프리드리히 2세는 카푸아 조약(1220)과 멜피 헌장(1231, ''리베르 아우구스타리스''로도 알려짐)을 통해 개혁을 이어갔다. 멜피 헌장은 중앙 집권 국가를 수립하기 위해 만들어졌으며, 시민들은 왕명을 받지 않는 한 공공장소에서 무기를 휴대하거나 갑옷을 착용할 수 없었다.[12] 그 결과 반란이 감소했다. 멜피 헌장은 시칠리아 왕국을 절대 군주제로 만들었는데, 이는 유럽에서 봉건 제도에서 등장한 최초의 중앙 집권 주권 국가이자 성문법의 우위에 대한 선례를 세웠다.[10] 비교적 작은 수정을 거쳐 ''리베르 아우구스타리스''는 1819년까지 시칠리아 법의 기초로 남아 있었다.[13] 이 기간 동안 그는 카스텔 델 몬테를 건설했고, 1224년에는 나폴리 대학교(현재 나폴리 페데리코 2세 대학교)를 설립했다.[14]
프리드리히는 열쇠 전쟁(1228~1230)에서 교황의 시칠리아 침공을 격퇴해야 했다.[15] 그의 사망 후 왕국은 독일의 콘라트 4세가 통치했다. 다음 합법적인 상속자는 콘라딘이었지만, 그는 당시 통치하기에는 너무 어렸다. 프리드리히의 사생아인 시칠리아의 만프레드가 권력을 장악하여 다른 호엔슈타우펜 상속자들이 독일의 여러 지역을 통치하는 동안 15년 동안 왕국을 통치했다.[12] 교황령과의 오랜 전쟁 후, 왕국은 영토를 방어하는 데 성공했지만, 교황청은 호엔슈타우펜 가문의 불충성으로 왕국이 몰수되었다고 선포했다.[16] 이런 구실 아래 만프레드는 프랑스 국왕 루이 9세와 합의에 이르렀다. 루이의 동생인 앙주 백작 샤를이 시칠리아 왕이 될 것이었다. 그 대가로 샤를은 왕국에서 교황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교황의 빚의 일부를 지불하고, 교황령에 연례 조공인 키네아를 지불하기로 동의했다.[16][17]
1251년 귀족 가문인 미오시 가문은 교황 인노켄티우스 4세로부터 시칠리아 왕국을 관리하라는 임무를 받았다.[18] 1266년 앙주 왕가의 침략과 1268년 호엔슈타우펜 가문의 마지막 남성 상속자인 콘라딘의 사망으로 시칠리아의 호엔슈타우펜 통치는 끝났다.[17]
2. 3. 앙주 왕조 (1266년-1282년)
1266년, 호엔슈타우펜 가문과 교황청 사이의 갈등으로 시칠리아는 샤를 1세 앙주 공작에 의해 정복되었다. 1258년 만프레드가 콘라딘으로부터 시칠리아 왕위를 찬탈하면서 교황청과 호엔슈타우펜 가문의 관계는 다시 변화했다. 알프스 산맥 너머 안전하게 격리된 소년 콘라딘 대신, 교황청은 1260년 몬타페르티 전투에서 기벨린 세력을 크게 지원했던 능력 있는 군 지도자를 상대하게 되었다. 1262년 만프레드와의 협상이 결렬되자 우르반 4세는 다시 호엔슈타우펜 가문으로부터 왕국을 몰수하는 계획을 세우고 왕관을 샤를에게 제안했다. 교황과 기벨린의 지지를 받은 샤를은 이탈리아로 내려가 1266년 베네벤토 전투에서 만프레드를, 1268년 타글리아코초 전투에서 콘라딘을 패배시켰다.프랑스 관료와 세금에 대한 반대, 아라곤 왕관과 동로마 제국의 대리인들에 의한 반란 선동이 결합되어 시칠리아 만종 봉기가 일어났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섹션을 참조하라.
왕국의 분열은 1372년 빌뇌브 조약으로 영구화되었다. 아라곤 왕은 16세기에 두 왕관을 모두 차지했지만, 시칠리아 왕국의 두 부분의 행정은 1816년 두 시칠리아 왕국에서 재통합될 때까지 분리되어 있었다.
2. 3. 1. 시칠리아 만종 사건

1266년, 호엔슈타우펜 가문과 교황청 사이의 갈등으로 샤를 1세 앙주 공작이 시칠리아를 정복했다. 1258년 만프레드가 콘라딘으로부터 시칠리아 왕위를 찬탈하면서 교황청과 호엔슈타우펜 가문의 관계는 다시 변화했다. 알프스 산맥 너머 안전하게 격리된 소년 콘라딘 대신, 교황청은 1260년 몬타페르티 전투에서 기벨린 세력을 크게 지원했던 능력 있는 군 지도자를 상대하게 되었다. 1262년 만프레드와의 협상이 결렬되자 우르반 4세는 다시 호엔슈타우펜 가문으로부터 왕국을 몰수하는 계획을 세우고 왕관을 앙주 백작 샤를에게 제안했다. 교황과 기벨린의 지지를 받은 샤를은 이탈리아로 내려가 1266년 베네벤토 전투에서 만프레드를, 1268년 타글리아코초 전투에서 콘라딘을 패배시켰다.
프랑스 관료와 세금에 대한 반대, 아라곤 왕관과 동로마 제국의 대리인들에 의한 반란 선동이 결합되어 시칠리아 만종 봉기가 일어났고, 1282년 아라곤의 페드로 3세 왕이 개입했다. 그 결과 시칠리아 만종 전쟁이 발발하여 1302년 칼타벨로타 조약이 체결될 때까지 지속되었고, 옛 시칠리아 왕국은 두 개로 분열되었다. "등대 너머의 시칠리아 왕국" 또는 트리나크리아 왕국이라 불리는 시칠리아 섬은 프리드리히 3세 (바르셀로나 가문)에게 돌아갔다. 반도 지역(메조조르노)은 당시 시칠리아 왕국이라고 불렸지만 현대 학문에서는 나폴리 왕국이라고 불리는 곳으로, 샤를 2세 (앙주 가문)가 통치했다. 따라서 이 평화는 불안정한 현상 유지를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이었다.[17]
2. 4. 시칠리아 섬의 아라곤-스페인 왕조 (1282년-1713년)
1282년 시칠리아 만종 사건 이후 시칠리아 섬은 아라곤 왕국의 페드로 3세가 차지하면서, 시칠리아 왕국은 시칠리아 섬과 나폴리 왕국으로 분열되었다. 페드로 3세의 아들들에게 아라곤과 시칠리아 왕위가 분할 상속되었다. 1302년 카르타베로타 조약으로 시칠리아 섬은 트리나크리아 왕국으로 불리게 되었고, 페데리코 2세는 교황과 나폴리의 시칠리아 병합 시도를 막았다.1409년 시칠리아의 마르티노 1세와 그의 아버지 아라곤의 마르틴 1세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자, 1412년 카스페 타협을 통해 트라스타마라 가문의 페르난도 1세가 아라곤과 시칠리아의 왕이 되었으나, 시칠리아에는 총독을 두었다. 그의 손자 페르난도 2세 때 아라곤과 카스티야 왕국이 연합하여 스페인 왕국이 성립되었고, 페르난도 2세는 나폴리 왕국도 다시 차지했다.
나폴리 왕국은 앙주 가문의 르네 2세가 다스렸으나, 1443년 아라곤의 알폰소 5세가 나폴리 공성전에서 승리하여 두 왕국을 통합했다. 알폰소 5세는 통치 기간 동안 두 왕국을 분할하여, 나폴리는 사생아 나폴리의 페르디난도 1세에게, 아라곤 연합왕국과 시칠리아는 형제 아라곤의 후안 2세에게 주었다. 1494년부터 1503년까지 프랑스 왕 샤를 8세와 루이 12세가 나폴리 정복을 시도했으나 실패했고(이탈리아 전쟁 참조), 결국 나폴리 왕국은 아라곤 연합왕국과 다시 통합되었다.
1530년 카를 5세는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로마를 보호하기 위해 몰타와 고조 섬을 성 요한 기사단에게 영구 봉토로 주었고, 기사단은 만성절에 시칠리아 총독에게 몰타 매 두 마리를 바쳤다.[20] 몰타 제도는 1091년부터 시칠리아 왕국의 일부였으며, 이 봉건 관계는 1798년 몰타 프랑스 점령까지 지속되었다.[20]
1700년 스페인 합스부르크 가문이 단절될 때까지 아라곤 국왕과 스페인 왕국이 시칠리아를 통치했다.
2. 4. 1. 아라곤 왕국의 지배
1409년까지 시칠리아는 아라곤 왕가의 친족이나 분가가 독립 왕국으로 통치했고, 그 이후로는 아라곤 연합왕국의 일부가 되었다. 1282년 시칠리아 만종 사건으로 앙주가의 카를로 1세가 시칠리아 섬에서 축출된 후, 시칠리아 섬은 바르셀로나 가문 출신의 아라곤 왕 페드로 3세가 차지하였다. 이로 인해 시칠리아 왕국은 시칠리아 섬의 영토와 반도 쪽의 나폴리 왕국으로 분열되었고, 페드로 3세의 아들들 사이에서 아라곤과 시칠리아의 왕위는 분할 상속되었다.[19]1302년, 분열 상태에 있던 두 나라에 카르타베로타 조약이 체결되었고, 시칠리아 섬 쪽은 트리나크리아 왕국이라 칭하게 되었다. 페데리코 2세는 로마 교황과 나폴리 왕국에 의한 시칠리아 병합 음모를 저지했다.[19]

1409년 마르티노 1세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고, 그의 아버지이자 아라곤 왕 마르틴 1세도 1410년에 후계자 없이 사망하면서, 트라스타마라 가문의 페르난도 1세가 1412년 카스페 타협으로 아라곤과 시칠리아의 왕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페르난도는 시칠리아에 총독을 두었다. 그의 손자 페르난도 2세 시대에 아라곤과 카스티야 왕국이 연합하여 스페인 왕국이 사실상 성립되었고, 페르난도 2세는 시칠리아뿐만 아니라, 이미 트라스타마라 가문의 지류가 지배하고 있던 나폴리 왕국도 재정복했다.[19]
이후,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Habsburg)가 스페인을 통치한 시대까지 시칠리아는 스페인의 지배하에 있었다.
2. 4. 2. 스페인 지배 하의 시칠리아
1409년까지 시칠리아는 아라곤 왕국 왕가의 친족이나 분가가 독립 왕국으로 통치했고, 그 이후로는 아라곤 연합왕국의 일부가 되었다. 1700년 스페인 지파의 합스부르크가가 종식될 때까지 아라곤 연합왕국의 아라곤 국왕과 스페인 왕국이 이 직함을 보유했다.
1530년, 남쪽에서 오는 오스만 제국의 침략으로부터 로마를 보호하기 위해 카를 5세는 스페인과 시칠리아의 국왕으로서 몰타와 고조 섬을 성 요한 기사단에게 영구적인 봉토로 주었는데, 이는 만성절에 시칠리아의 총독에게 몰타 매 두 마리의 연례 공물을 보내는 것과 교환 조건이었다.[20] 몰타 제도는 1091년부터 시칠리아 백국, 그리고 나중에는 시칠리아 왕국의 일부를 형성했다. 몰타와 시칠리아 왕국 사이의 봉건적 관계는 1798년 몰타 프랑스 점령까지 기사단의 통치 내내 계속되었다.[20]
1302년, 분열 상태에 있던 두 나라에 카르타베로타 조약이 체결되었고, 시칠리아 섬 쪽은 트리나크리아 왕국이라 칭하게 되었다. 페데리코 2세는 로마 교황과 나폴리 왕국에 의한 시칠리아 병합 음모를 저지했다.
1409년 마르티노 1세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고, 그의 아버지이자 아라곤 왕 마르틴 1세도 1410년에 후계자 없이 사망한 후, 트라스타마라 가문의 페르난도 1세가 1412년 카스페 타협으로 아라곤과 시칠리아의 왕으로 선출되었으나, 페르난도는 시칠리아에는 총독을 두었다. 그의 손자 페르난도 2세 시대에 아라곤과 카스티야 왕국이 연합하여 스페인 왕국이 사실상 성립되었지만, 페르난도 2세는 시칠리아뿐만 아니라, 이미 트라스타마라 가문의 지류가 지배하고 있던 나폴리 왕국도 재정복했다.
그 후,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가 스페인을 통치한 시대까지 시칠리아는 스페인의 지배하에 있었다.
2. 5. 나폴리 왕국의 앙주-스페인 왕조 (1282년-1735년)
1409년 시칠리아 왕국은 아라곤 왕가의 친족이나 분가가 독립적으로 통치하다가 이후 아라곤 연합왕국의 일부가 되었다. 나폴리 왕국은 앙주 가문의 르네 2세가 통치했지만, 1443년 나폴리 공성전에서 아라곤의 알폰소 5세가 르네를 패배시키면서 두 왕국은 재통합되었다.[19] 알폰소 5세는 통치 기간 동안 두 왕국을 분할하여, 나폴리는 사생아 나폴리의 페르디난도 1세에게(1458년-1494년 통치), 아라곤 연합왕국과 시칠리아는 형제 아라곤의 후안 2세에게 넘겨주었다. 1494년부터 1503년까지 프랑스 왕 샤를 8세와 루이 12세가 나폴리 정복을 시도했으나 실패했고(이탈리아 전쟁 참조), 결국 나폴리 왕국은 아라곤 연합왕국과 다시 통합되었다. 1700년 스페인 합스부르크가가 단절될 때까지 아라곤 국왕과 스페인 왕국이 이 칭호를 보유했다.1409년 마르티노 1세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고, 그의 아버지이자 아라곤 왕 마르틴 1세도 1410년에 후계자 없이 사망한 후, 트라스타마라 가문의 페르난도 1세가 1412년 카스페 타협으로 아라곤과 시칠리아의 왕으로 선출되었으나, 페르난도는 시칠리아에 총독을 두었다. 그의 손자 페르난도 2세 시대에 아라곤과 카스티야 왕국이 연합하여 사실상 스페인 왕국이 성립되었지만, 페르난도 2세는 시칠리아뿐만 아니라, 이미 트라스타마라 가문의 지류가 지배하고 있던 나폴리 왕국도 재정복했다.
1530년, 카를 5세는 남쪽에서 오는 오스만 제국의 침략으로부터 로마를 보호하기 위해 스페인과 시칠리아의 국왕으로서 몰타와 고조 섬을 성 요한 기사단에게 영구적인 봉토로 주었는데, 이는 만성절에 시칠리아의 총독에게 몰타 매 두 마리의 연례 공물을 보내는 것과 교환 조건이었다.[20] 몰타 제도는 1091년부터 시칠리아 백국, 그리고 나중에는 시칠리아 왕국의 일부를 형성했다. 몰타와 시칠리아 왕국 사이의 봉건적 관계는 1798년 몰타 프랑스 점령까지 기사단의 통치 내내 계속되었다.[20]
2. 5. 1. 앙주 왕조의 통치
샤를은 카를로 1세로서 시칠리아 왕위에 올랐으나, 시칠리아 백성들에게 인기가 없어 1282년 시칠리아 만종 사건이 발생하자 시칠리아 섬을 탈출했다.[1] 그 후 시칠리아 만종 전쟁을 거쳐 시칠리아 섬은 바르셀로나 가문의 아라곤 왕 페드로 3세가 차지하였고, 시칠리아 왕국은 시칠리아 섬의 영토와 반도 쪽의 나폴리 왕국으로 분열되었다.[1] 페드로 3세의 아들들 사이에서 아라곤과 시칠리아의 왕위는 분할 상속되었다.[1]1302년, 분열 상태에 있던 두 나라에 카르타베로타 조약이 체결되었고, 시칠리아 섬 쪽은 트리나크리아 왕국이라 칭하게 되었다.[1] 페데리코 2세는 로마 교황과 나폴리 왕국에 의한 시칠리아 병합 음모를 저지했다.[1]
2. 5. 2. 스페인 지배 하의 나폴리
1409년까지 시칠리아는 아라곤 왕가의 친족이나 분가가 독립 왕국으로 통치했고, 그 이후로는 아라곤 연합왕국의 일부가 되었다. 나폴리 왕국은 앙주가의 통치자 르네 2세가 다스렸으나, 1443년 6월 6일 나폴리 공성전에서 르네를 패배시킨 후 아라곤의 알폰소 5세에 의해 두 왕좌가 재통합되었다.[19] 아라곤의 알폰소는 자신의 통치 기간 동안 두 왕국을 분할했다. 그는 나폴리의 통치권을 사생아인 나폴리의 페르디난도 1세에게 주었는데, 그는 1458년부터 1494년까지 통치했고, 나머지 아라곤 연합왕국과 시칠리아는 그의 형제인 아라곤의 후안 2세에게 주었다. 1494년부터 1503년까지 앙주의 상속자인 프랑스의 잇따른 국왕인 샤를 8세와 루이 12세가 나폴리를 정복하려고 시도했지만 실패했다(이탈리아 전쟁 참조). 결국 나폴리 왕국은 아라곤 연합왕국과 재통합되었다. 1700년 스페인 지파의 합스부르크가가 종식될 때까지 아라곤 연합왕국의 아라곤 국왕과 스페인 왕국이 이 직함을 보유했다.이후, 합스부르크 왕가가 스페인을 통치한 시대까지 시칠리아는 스페인의 지배하에 있었다.
2. 6. 사보이아 왕조와 합스부르크 왕조 (1713년-1735년)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이후 1713년 우트레히트 조약에 따라 시칠리아 왕국은 사보이아 왕가의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에게 넘어갔다. 그러나 1718년 스페인이 시칠리아를 침공하면서 사중 동맹 전쟁이 발발했다. 전쟁 결과, 1720년 헤이그 조약에 따라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는 시칠리아 왕국을 오스트리아의 카를 6세에게 넘겨주고, 대신 사르데냐 왕국을 받았다. 이로써 나폴리와 시칠리아는 다시 같은 통치자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21]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는 3년 동안 이 결정에 항의했고, 1723년에야 교환을 인정하고 시칠리아 국왕 칭호와 키프로스, 예루살렘 국왕 등의 부수적인 칭호를 사용하지 않기로 결정했다.2. 6. 1.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1713년부터 1720년까지 시칠리아 왕국은 사보이아 왕가의 통치를 잠시 받았다. 사보이아 왕가는 우트레히트 조약에 따라 시칠리아 왕국을 얻었는데, 이 조약은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을 끝냈다. 시칠리아 왕국은 사보이아 왕가에게 주어진 보상이었으며, 이를 통해 그들은 왕족 지위에 올랐다. 새로운 국왕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는 1713년에 시칠리아를 방문하여 1년간 머문 후 본토 수도인 토리노로 돌아갔다. 그의 아들 피에몬테 공자 비토리오 아메데오가 섭정으로 있었다.[21]스페인에서는 전쟁 결과가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 결과 사중 동맹 전쟁이 발발했다. 1718년 시칠리아는 스페인에 점령되었다. 사보이아 왕가가 시칠리아처럼 먼 나라를 방어할 힘이 없다는 것이 명백해지자 오스트리아가 개입하여 그들의 사르데냐 왕국을 시칠리아와 교환했다.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는 이 교환에 항의했는데, 시칠리아는 백만 명이 넘는 인구를 가진 부유한 나라이지만, 사르데냐는 수십만 명의 인구를 가진 가난한 나라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동맹국"들에게 저항할 수 없었다. 1720년 스페인이 마침내 패배했고, 헤이그 조약은 이러한 변경을 비준했다. 시칠리아는 이미 나폴리를 통치하고 있던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의 소유가 되었다.[21]
2. 7. 부르봉 왕조 (1735년-1816년)
1734년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의 결과, 스페인의 펠리페 5세의 아들인 파르마 공 카를로가 나폴리 왕 카를로 7세이자 시칠리아 왕 카를로 5세로 즉위하면서 부르봉 왕가의 통치가 시작되었다. 1759년 카를로가 스페인 왕 카를로스 3세로 즉위하면서 그의 셋째 아들 페르디난도에게 왕위를 물려주었고, 페르디난도는 나폴리 왕 페르디난도 4세이자 시칠리아 왕 페르디난도 3세로 즉위했다.1799년 나폴레옹에게 나폴리를 빼앗긴 페르디난도 왕과 왕실은 호레이쇼 넬슨이 이끄는 영국 함대의 보호를 받으며 시칠리아로 피신했다. 시칠리아는 윌리엄 벤팅크 경이 이끄는 영국군의 영향으로 입헌 군주제를 도입하려는 움직임이 있었고, 양원제 의회가 구성되고 봉건제도가 폐지되었다.[21] 시칠리아는 1806년부터 1814년까지 영국의 점령하에 있었다.[22]
1815년 나폴레옹이 몰락한 후, 페르디난도는 시칠리아 왕국의 모든 개혁을 폐지하고 1816년 나폴리를 수도로 하는 두 시칠리아 왕국을 건설했다. 이에 시칠리아 주민들은 반발하여 1820년 봉기하였으나 나폴리와 오스트리아 군대에 의해 진압되었다. 1848년에서 1849년 사이에 다시 시칠리아 독립 혁명이 일어났으나, 메시나를 5일 동안 폭격하여 '폭탄왕'이라는 별명을 얻은 페르디난도 2세에 의해 진압되었다.
2. 7. 1. 부르봉 왕조의 통치
1734년,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 이후, 나폴리 왕국은 스페인 부르봉 왕가 출신인 펠리페 5세의 차남 파르마 공작 샤를이 나폴리 왕 샤를 7세로 즉위하며 부르봉 왕가의 방계가 시작되었다. 그는 오스트리아가 파르마 공국과 토스카나 대공국을 시칠리아와 교환한 다음 해, 시칠리아 왕 샤를 5세로서 시칠리아 왕위에도 올랐다. 이러한 권력 이동은 왕이 직접 시작하거나 영감을 준 많은 공공 사업과 문화 사업과 함께 경제적 번영과 사회·정치 개혁의 시대를 열었다. 그는 1759년 스페인 왕 샤를 3세로 즉위할 때까지 시칠리아 왕으로 남아 있었는데, 오스트리아와의 비엔나 조약(1738년)은 이탈리아 영토와 스페인 왕관의 통합을 금지했다.[21]샤를 3세는 그의 셋째 아들인 페르디난도에게 왕위를 양위했고, 페르디난도는 나폴리 왕 페르디난도 4세이자 시칠리아 왕 페르디난도 3세로 즉위했다. 미성년자였던 페르디난도는 쾌락과 여가 속에서 성장했고, 실질적인 권력은 섭정 평의회 의장 베르나르도 타누치가 장악했다. 이 기간 동안 샤를이 시작한 대부분의 개혁 과정은 중단되었고, 왕은 주로 국가 문제에 무관심했으며, 마리아 카롤리나 왕비와 타누치(1777년까지) 및 존 액턴 총리들이 정치적 지휘봉을 잡았다. 존 액턴은 나폴리와 시칠리아를 스페인과 오스트리아의 영향으로부터 멀리하고, 당시 대사 윌리엄 해밀턴이 대표하는 대영제국에 더 가깝게 하려고 했다. 그랜드 투어 시대에 시칠리아는 많은 자연 및 역사적 명소로 인해 유럽 전역의 많은 지식인들이 방문하여 계몽주의의 바람을 섬에 가져왔고, 대륙에 그 아름다움을 널리 알렸다.
1799년 나폴레옹이 나폴리를 정복하여 페르디난도 왕과 궁정은 호레이쇼 넬슨의 지휘하에 있는 영국 함대의 보호 아래 시칠리아로 피신했다. 나폴리는 프랑스의 지원으로 파르테노페 공화국이 되었다가, 나중에 프랑스의 보호와 영향력 하에 나폴리 왕국으로 재편되었다. 한편 시칠리아는 나폴레옹에 대항한 장기간의 투쟁에서 지중해의 영국 작전 기지가 되었다. 특히 시칠리아 주둔 영국군 사령관 윌리엄 벤팅크 경의 지도 아래, 시칠리아는 헌법 장치를 현대화하려고 노력했고, 왕은 영국식 시스템을 본뜬 헌법을 비준하도록 강요했다.[21] 섬은 1806년부터 1814년까지 영국의 점령 하에 있었다.[22] 새 시스템의 주요 특징은 기존의 삼원제 대신 양원제 의회가 구성되었다는 점이었다. 의회의 구성은 왕국에서 봉건제의 종식을 가져왔다.
1815년 나폴레옹의 패배 후, 페르디난도는 모든 개혁을 폐지했고, 800년 역사의 시칠리아 왕국을 지도에서 지우고 1816년 나폴리를 수도로 하는 두 시칠리아 왕국을 건설했다. 시칠리아 주민들은 수세기 동안 이어져 온 칙령(페르디난도를 포함한 모든 왕들이 존중할 것을 맹세했던)에 대한 위반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지만, 1820년 나폴리와 오스트리아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1848년에서 1849년 사이에 또 다른 시칠리아 독립 혁명이 발생했는데, 이는 메시나 5일간의 폭격 이후 '폭탄왕'이라는 별명을 얻은 페르디난도 2세에 의해 진압되었다. 시칠리아 주민과 엘리트들의 나폴리와 부르봉 왕조에 대한 적대감이 증가하면서 매우 불안정한 균형이 조성되었고, 점점 더 억압적인 경찰 국가, 정치적 처형 및 추방으로만 통제될 수 있었다.
2. 7. 2. 페르디난도 1세와 두 시칠리아 왕국
1735년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의 결과, 펠리페 5세의 아들이자 파르마 공이었던 카를로가 나폴리 왕국과 시칠리아 왕국의 왕위에 올라 각각 나폴리 왕 카를로 7세와 시칠리아 왕 카를로 5세로 즉위하였다. 1759년 그가 스페인 왕 카를로스 3세로 즉위하면서, 그의 셋째 아들 페르디난도에게 나폴리와 시칠리아의 왕위를 물려주었다. 페르디난도는 나폴리 왕 페르디난도 4세이자 시칠리아 왕 페르디난도 3세로 즉위하였다.1799년, 나폴레옹 세력이 나폴리 왕국을 점령하자, 페르디난도 3세는 영국의 보호 아래 시칠리아로 피신하였다. 나폴리는 프랑스에 의해 파르테노페이 공화국이 되었으나 단명했고, 곧 부르봉 왕조의 나폴리 왕국으로 복귀하였다. 시칠리아는 윌리엄 벤팅크 경이 이끄는 영국군의 영향 아래 지중해에서 나폴레옹에 대항하는 기지가 되었고, 정치적으로도 영국의 입헌 군주제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21] 1806년부터 1814년까지 영국의 점령하에 있었다.[22] 이 시기에 의회는 양원제를 채택하였고, 왕국의 봉건제도는 막을 내렸다.
1815년 나폴레옹이 패배하자, 페르디난도 3세는 시칠리아 왕국의 역사와 개혁을 모두 폐지하였다. 1816년 나폴리와 시칠리아 왕국을 통합하여 두 시칠리아 왕국을 건설하고, 수도를 나폴리로 정한 뒤, 두 시칠리아 왕 페르디난도 1세가 되었다. 시칠리아 주민들은 수세기 동안 이어져 온 왕국의 전통이 유린당한 것에 반발하여 저항하였으나, 1820년 나폴리군과 오스트리아 연합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1848년-1849년에 다시 시칠리아 혁명이 일어났으나, 두 시칠리아 왕 페르디난도 2세에 의해 진압되었다. 페르디난도 2세는 메시나를 5일간 폭격하여 "폭탄 왕"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하였다. 시칠리아 시민과 지도층은 나폴리와 부르봉가에 강한 반감을 품었고, 그 결과 시칠리아의 압정은 더욱 심해졌다.
2. 7. 3. 두 시칠리아 왕국의 멸망
1815년 나폴레옹이 패배하자, 페르디난도 1세는 시칠리아 왕국의 역사와 그 이후의 개혁을 모두 폐지하였다. 1816년에 나폴리와 시칠리아 왕국을 통합하여, 나폴리를 수도로 하는 두 시칠리아 왕국을 건설하였다. 시칠리아 주민들은 수세기 동안 이어져 온 왕국 전통이 유린당한 것에 반발하여 저항하였으나, 1820년에 나폴리군과 오스트리아 연합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이후 시칠리아에는 왕궁이 설치되지 않았다. 1848년-1849년에 다시 시칠리아 혁명이 일어났으나, 메시나를 5일간 폭격하여 "폭탄 왕"이라는 별명을 얻은 페르디난도 2세에 의해 진압되었다. 시칠리아 시민과 지도층은 나폴리와 부르봉가에 강한 반감을 품었고, 그 결과 시칠리아의 압정은 더욱 심해졌다.[21]1860년 4월, 왕가에 대한 새로운 반란이 발발했다. 카브르의 지원을 받은 주세페 가리발디는 붉은 셔츠단을 지휘하여 5월 마르살라에 상륙하여 이 반란을 지원했다. 가리발디는 사르데냐 왕국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국왕의 이름으로 시칠리아에서 실권을 장악했다고 선언했다. 카라타피미-세게스타 전투에서 붉은 셔츠단은 팔레르모를 확보했다. 프란체스코 2세가 세력을 유지하려고 했지만 가리발디에게 실권을 빼앗겼고, 6월 25일 프란체스코 2세는 입헌군주제로 전환을 시도하여 입헌 정부를 발족시켰으며, 이때 적백녹 삼색기를 국기로 받아들였다.[38] 10월 21일 이탈리아 통일에 관한 국민투표가 실시되어 99%의 찬성으로 가결되었다.
3. 사회
노르만 시칠리아 왕국 시대에는 지역 사회들이 그들의 특권을 유지했다. 호엔슈타우펜 왕국의 통치자들은 지역 귀족들을 북부 이탈리아 출신의 영주들로 대체하여 많은 도시와 농촌 공동체에서 새로운 귀족들에 대한 충돌과 반란을 야기했다. 이러한 반란은 많은 농업 지역의 파괴와 중산층 민족주의의 부상으로 이어졌고, 결국 도시 거주자들이 아라곤 세력과 동맹을 맺게 되었다.[12] 이러한 상황은 시칠리아 섬령(베스퍼스) 기간 동안 앙주 왕조의 짧은 통치 기간 동안 계속되었는데, 앙주 왕조는 고등 사법권을 부여함으로써 귀족의 권력을 증대시키며 국가의 봉건화를 시작했다.[23]
같은 시기에 시칠리아 왕국의 봉건화는 신민들 사이의 봉건적 유대와 관계의 강화를 통해 심화되었다. 1669년 에트나 화산 폭발로 카타니아가 파괴되었다. 1693년에는 지진으로 왕국 인구의 5%가 사망했다. 그 기간 동안에는 전염병 발생도 있었다. 17세기와 18세기는 왕국의 쇠퇴 시대였다. 사회 상류층과 중산층 사이에는 부패가 만연했다. 봉건 영주들에 의한 광범위한 부패와 하층민에 대한 학대는 귀족을 공격하고 그들의 영지를 파괴하는 산적떼의 출현으로 이어졌다.[21] 자칭 "마피아"라고 불렀던 이러한 집단은 현대 시칠리아 마피아의 기초가 되었다. 군주제에 대한 반란의 고조는 결국 이탈리아 통일로 이어졌다.[24]
이 왕국은 1097년부터 시칠리아 의회를 가지고 있었으며, 1812년 시칠리아 헌법이 제정될 때까지 왕국의 역사 전반에 걸쳐 계속해서 존재했다.
4. 경제
노르만 왕조 시대에는 높은 토지 생산성을 바탕으로 인근 지역 이주민을 불러들이거나 경작지에 농부를 재정착시켜 농업 생산량이 증가했다. 당시 시칠리아 왕국의 주요 수입원은 나폴리, 아말피 등 해안 도시에서 수출되는 상품이었다. 주요 수출품은 듀럼밀이었고, 그 외에 견과류, 목재, 올리브 오일, 베이컨, 치즈, 모피, 가죽, 삼베, 직물 등이 있었다.[11] 곡물 및 기타 건조품은 살메(salme) 단위로 측정되었는데, 왕국 서부 지역에서는 275.08리터, 동부 지역에서는 300.3리터에 해당했다. 살마는 16 투몰리(tumoli)로 나뉘었고, 1 투몰리는 17,193 리터에 해당했다. 무게는 칸타로(cantari) 단위로 측정되었는데, 1 칸타로는 79.35kg에 해당하며 100 로톨리(rottoli)로 나뉘었다. 직물은 칸네(canne) 단위로 측정되었는데, 1 칸네는 2.06미터였다.[6] 12세기 말에는 남부의 메시나도 주요 상업 도시 중 하나로 발전했다.
왕국 시대에 시칠리아의 상품은 제노바, 피사, 비잔티움 제국, 이집트(파티마 왕조) 등 여러 지역으로 수출되었다. 특히 12세기 동안 시칠리아는 제노바와 같은 북이탈리아 도시들에게 중요한 원자재 공급지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이러한 경제적 관계는 시칠리아에게 덜 유리해졌고, 일부 현대 학자들은 이를 착취적인 관계로 보기도 한다.[28] 시칠리아의 경제 쇠퇴 시기에 대해서는 의견이 일치하지 않지만, 클리포드 백맨은 프리드리히 3세 통치 후반기에 쇠퇴가 시작되었다고 주장한다.[29] 반면, 스티븐 엡스타인은 시칠리아 사회가 15세기에 부흥을 경험했다고 주장한다.[30]
제노바와의 여러 조약들은 시칠리아의 상업력을 확보하고 강화했다.[11]
앙주 왕조 시대의 봉건화는 왕실의 부와 재정을 감소시켰다. 앙주 왕조가 피렌체 은행가 등 북이탈리아 상업에 의존한 것도 왕국의 경제 쇠퇴를 가져온 주요 요인이었다.[23] 경제 쇠퇴와 더불어 인구 증가 및 도시화는 농업 생산량 감소로 이어졌다.
1800년에는 사용 가능한 농작물의 3분의 1이 구식 방법으로 경작되어 문제를 악화시켰다. 스페인 통치 후기에는 수출에 대한 높은 세금과 가격을 완전히 통제하는 독점 기업들 때문에 무역 시스템이 이전 시대에 비해 비효율적이었다.[31]
5. 종교
노르만 왕조 시대 시칠리아 왕국에는 라틴 가톨릭, 그리스 전례 가톨릭, 이슬람교도, 유대교도 등 여러 종교 공동체가 공존했다. 현지 종교 관습은 방해받지 않았지만, 라틴 가톨릭이 지배권을 쥐었기에 라틴 가톨릭(로마 가톨릭)이 우세했다. 그리스 전례 주교들은 시칠리아에서 라틴 교회의 주장을 인정해야 했고, 무슬림 공동체는 더 이상 현지 에미르(emir)의 통치를 받지 않았다.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기독교인, 라틴어를 사용하는 기독교인, 무슬림들은 정기적으로 상호 작용하며 경제적, 언어적, 문화적으로 서로의 삶에 관여했다. 서로 결혼하는 경우도 있었다. 아랍어 사용 지역에 사는 가톨릭 신자들은 아랍어 이름이나 심지어 무슬림식 이름을 채택하기도 했다.[33] 많은 도시에서 각 종교 공동체는 자체 행정 및 사법 질서를 가지고 있었다. 팔레르모에서는 무슬림들이 사원에서 공개적으로 기도를 요청할 수 있었고, 그들의 법적 문제는 이슬람법에 따라 판결하는 카디(qadi) 판사에 의해 해결되었다.[11] 12세기부터 시칠리아 왕국은 기독교를 국교로 인정했다.[34]
호엔슈타우펜 가문의 권력이 확립된 후,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가톨릭 신자들은 그들의 특권을 유지했지만, 무슬림 인구는 점점 탄압받았다. 북부 이탈리아에서 온 이탈리아인들이 (무슬림의 재산을 차지하기 위해) 정착하면서 많은 무슬림 공동체가 반란을 일으키거나 시칠리아의 산악 지역으로 재정착했다.[35] 이러한 반란은 폭력 사태를 야기했고, 결국 프리드리히 2세 치하에서 무슬림들의 추방이 시작되었다. 결국 정부는 무슬림 전체 인구를 아풀리아의 루체라와 칼라브리아의 지리팔코로 이주시켰고, 그들은 세금을 내고 농업 노동자, 장인, 석궁병으로 일하며 왕에게 이익을 가져다주었다. 루체라의 식민지는 샤를 2세 치하인 1300년에 최종적으로 해산되었고, 주민 상당수가 노예로 팔렸다.[35] 유대인 공동체는 1493년부터 1513년까지 시칠리아에서 스페인 종교재판이 설립된 후 추방되었다. 남은 유대인들은 점차 동화되었고, 대부분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했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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