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근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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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류근철은 한의사이자 의공학자이며, 교육자이자 사회사업가로, 1926년 충청남도 천안에서 태어나 2012년 사망했다. 경희대학교에서 한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러시아 모스크바 물리공과대학교에서 명예 의공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침술 마취 맹장수술 성공으로 명성을 얻었으며, 1976년 한국한의사협회 초대 회장을 역임했다. 2008년 KAIST에 578억 원을 기부하여 개인 기부 최고액을 기록했으며, KAIST는 그의 업적을 기려 시설과 캠퍼스에 그의 이름을 명명했다. 류근철은 과학기술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과학기술훈장 창조장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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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는 대한민국의 시인이자 사회운동가로, 1970년 부패 권력 비판으로 필화 사건을 겪고, 1974년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석방 후 생명 운동을 전개했으며, 1991년에는 분신 정국을 비판하여 변절 논란에 휩싸였다.
| 류근철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 이름 | 류근철 |
| 원래 이름 | 柳根哲 |
| 출생일 | 1926년 12월 21일 |
| 출생지 | 일제 강점기 충청남도 천안군 동면 |
| 사망일 | 2011년 3월 8일 |
| 사망지 | 서울 (뇌경색으로 병사) |
| 거주지 | 충청남도 천안 동면 대전(前) 충청남도 연기(前) 서울(前) |
| 학력 | |
| 학력 | 경희대 한의과대학원 한의학 박사 |
| 경력 | |
| 정당 | 신민주공화당 한의과학기술교육행정특보위원 (1988년) |
| 정당 | 자유민주연합 한의과학기술교육행정특임고문 (1995년) |
| 직책 | 前 대한민국 과학기술처 의공과학행정특보위원 |
| 재임 기간 | |
| 임기 시작 | 1984년 5월 31일 |
| 임기 종료 | 1985년 1월 31일 |
| 대통령 | 전두환 |
| 국무총리 | 진의종 |
| 장관 | 이정오 (대한민국 과학기술처 장관) |
| 차관 | 조경목 (대한민국 과학기술처 차관) |
| 기타 정보 | |
| 서훈 | 대한민국 과학기술훈장 1등급 ‘창조장’ 수훈 |
| 종교 | (정보 없음) |
| 배우자 | (정보 없음) |
| 자녀 | 슬하 2남 3녀 |
| 부모 | (정보 없음) |
| 웹사이트 | (정보 없음) |
2. 이력
류근철은 1926년 충청남도 천안군 동면(天安郡 東面)에서 태어나 1976년 경희대학교에서 국내 최초로 한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모스크바 국립공대 의공학 박사, KAIST 명예 이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경희한방의료원 부원장, 러시아 모스크바 국립공대 교수 등을 역임하며 평생 한의사의 길을 걸었다. 1972년 세계 최초로 침 마취 맹장 수술에 성공하는 등 국내외에서 특허를 취득했다.[1]
柳根哲중국어은 1926년 충청남도 천안군 동면(天安郡 東面)에서 태어났다. 2008년 KAIST에 5780억원 상당의 부동산을 기부했는데, 이는 2012년 12월까지 국내 개인 기부 기록으로 남아있다. KAIST는 이에 대한 감사로 스포츠 컴플렉스 시설에 고인의 이름을 붙였고, 세종시에 들어설 새 캠퍼스도 '류근철 캠퍼스'로 명명할 예정이다.[1] 유족으로는 연세대학교 철학과 교수인 아들 인희, 광희 씨와 딸 영희, 선희, 정희 씨 등 2남 3녀가 있다.[1]
2008년 KAIST에 5780억원 상당의 부동산을 기부했는데, 이는 2012년 12월까지 국내 개인 기부 기록으로 최고액이었다. KAIST는 감사의 뜻으로 스포츠 컴플렉스 시설에 고인의 이름을 붙였고, 향후 세종시에 들어설 새 캠퍼스의 이름도 '류근철 캠퍼스'로 명명할 예정이다. 2009년부터 KAIST 인재ㆍ우주인 건강연구센터를 설립해 직접 학생들의 건강을 돌보기도 했다. 유족으로는 인희(연세대 철학과 교수), 광희 씨와 영희, 선희, 정희 씨 등 2남 3녀가 있다.[1]
3. 약력
3. 1. 학력
3. 2. 경력
柳根哲중국어은 1976년 경희대학교에서 국내 최초로 한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모스크바국립공대 의공학 박사, KAIST 명예이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경희한방의료원 부원장, 러시아 모스크바국립공대 교수 등을 거치며 평생 한의사의 길을 걸었다.[1] 1972년 세계 최초로 침 마취 맹장수술에 성공하는 등 국내외에서 특허도 취득했다.[1] 2009년부터 KAIST 인재ㆍ우주인 건강연구센터를 설립해 직접 학생들의 건강을 돌보기도 했다.[1]4. 생애
류근철은 일제강점기 충청남도 천안시에서 태어나 힘든 어린 시절을 보냈다. 3.1 운동에 부모가 참가하여 일본 헌병들의 감시가 심해 다섯 살 때 천안에서 쫓겨났다. 특히 어머니는 고문을 심하게 당해 조현병을 앓기도 하였다. 이후 천안에서 충청북도 충주시 노은면으로 옮겨가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까지 숨어 지냈다.[1]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중학교에 진학할 형편이 되지 않아 일본으로 가 제철회사에 취직하였다. 1년 반 정도 일본에서 머물며 중·고교 과정을 독학하였고, 스무 살이 되던 1945년에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며 의학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서울에서 의사 공부를 하는 동안 하루에 한 끼만 먹고, 물로 배를 채우는 생활을 하였다. 서른 살이 되던 해, 고생 끝에 한의대를 졸업하였다.[1]
1973년 경희의료원에서 개최된 제3차 세계침구학술대회에서 무약물 무통 침술법을 이용한 침술 마취 맹장수술에 성공하며 유명세를 타게 되었다. 이는 무약물 침술 마취수술에 있어 세계최초로 성공한 사례였으며, 한국이 중국보다 먼저 무약물 침술 마취에 대한 특허를 선점하는 등의 결과를 이끌어 내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하였다. 또한 ‘동서의학중풍센터’를 만들어 양방과 한방의 협진을 처음 시도했다.[1]
경희의료원에서 퇴직한 후 병원을 개원하였다. 침 마취로 자궁근종 수술을 성공시키는 등 침술마취법으로 얻은 명성을 통하여 개원 후 한의학자로서 승승장구하게 된다. 병원 자리로 구입한 땅값이 크게 오르면서 많은 부를 가지게 되었고, 그때부터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나눠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의료봉사현장에서 활발히 활동하던 도중 1996년 러시아로 떠났다. 모스크바 국립공과대학교에서 재활의학과 의공학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아 한의학자로는 처음으로 의공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으며,[1] 이후 모스크바 국립공과대학교의 의공학과 정교수로 발탁되었다.[1]
2008년 KAIST에 578억원 상당의 부동산을 기부했는데, 이는 2012년 12월까지 국내 개인 기부 기록으로 남아 있었다. KAIST는 이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스포츠 컴플렉스 시설에 그의 이름을 붙였고, 세종특별자치시에 들어설 새 캠퍼스 이름도 '류근철 캠퍼스'로 명명할 예정이었다. 2009년부터는 KAIST 인재ㆍ우주인 건강연구센터를 설립해 직접 학생들의 건강을 돌보기도 했다.[1]
그는 한 번 주머니에 들어온 돈은 절대 꺼내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돈을 모았으며, 은행에 저축하면 꺼내지 않았다고 한다. 병원 개업 후 1972년 최초로 침술을 이용한 제왕절개 수술 마취에 성공했고, 이후 번 돈으로 빌딩을 샀다. 빌딩 수요가 늘면서 재산이 불어났고, 그때부터 '이 돈은 내 돈이 아니구나'라는 생각에 10여 년 전부터 기부할 생각을 했다고 한다.[1]
기부할 곳을 찾던 중, 한의학이 존재하는 것도 조국이 있기 때문이며, 국력은 과학 기술 수준이라는 생각에 자신의 돈이 과학 수준을 높이는 데 밑거름이 되길 바랐다고 한다. 2008년 개인 기부 사상 최고액인 578억원을 KAIST에 기부하며 전 재산을 내놓았고, 이후 KAIST에서 생활하며 ‘닥터류 헬스클리닉’을 열어 ‘재능기부’도 했다. 2012년 1월 중순 뇌경색 진단을 받고 치료를 받다가 3월 8일 향년 85세로 별세하였다.[1]
4. 1. 유년기
류근철은 일제강점기 충청남도 천안에서 태어나 힘든 어린 시절을 보냈다. 3.1 운동에 부모가 참가하여 일본 헌병들의 감시가 심해 다섯 살 때 천안에서 쫓겨났다. 특히 어머니는 고문을 심하게 당해 조현증을 앓기도 하였다. 이후 천안에서 충청북도 충주 노은면으로 옮겨가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까지 숨어 지냈다.[1]숨어 지내야 했기에 학교에 보낼 형편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열한 살 때 무작정 가까운 초등학교에 찾아가 “공부 좀 시켜 달라”고 간청하여 그해 ‘늦깎이 1학년’이 되었다.[1]
유년 시절 공부를 무척 좋아했으며, 리더십도 강한 편이었다. 당시 주워온 사과 궤짝으로 책상을 만들고 남포등 두 개를 천장에 매달아 불을 밝혀 집에 공부방을 꾸몄다. 그 공부방에서 30여 명의 동네 아이들과 함께 공부하였고, 때로는 상급생들과 공부방 회장 자리를 두고 다투기도 하였다. 헌 양은그릇이나 깨진 솥, 다 해진 고무신 같은 것을 주워 고물장수에게 팔아 그 돈으로 초등학생 때부터 일본에 책을 주문하였는데, 주로 교과와 관련된 책이나 학술 잡지 등을 보았다.[1]
어려서부터 만들기를 좋아하여 함석을 오려 만든 자동차나 철사를 꼬아 만든 스케이트 등을 만들어냈다. 4학년 때부턴 ‘장인 공(工)’ 자를 함석으로 오려 가슴에 붙이고 다녔다. 선생들은 핀잔을 줬지만 “난 공학박사가 될 거예요!” 하면서 고집을 피웠다고 한다.[1]
4. 2. 청년기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중학교에 진학할 형편이 되지 않아 일본으로 가 제철회사에 취직하였다. 1년 반 정도 일본에서 머물며 중·고교 과정을 독학하였고, 스무 살이 되던 1945년에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며 의학계에 발을 들여놓았다.[1] 서울에서 의사 공부를 하는 동안 하루에 한 끼만 먹고, 물로 배를 채우는 생활을 하였다.[1] 서른 살이 되던 해, 고생 끝에 한의대를 졸업하였다.[1]4. 3. 장년기
1973년 경희의료원에서 개최된 제3차 세계침구학술대회에서 무약물 무통 침술법을 이용한 침술 마취 맹장수술에 성공하며 유명세를 타게 되었다.[1] 이는 무약물 침술 마취수술에 있어 세계최초로 성공한 사례였으며, 한국이 중국보다 먼저 무약물 침술 마취에 대한 특허를 선점하는 등의 결과를 이끌어 내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하였다.[1] 또한 ‘동서의학중풍센터’를 만들어 양방과 한방의 협진을 처음 시도했다.[1]경희의료원에서 퇴직한 후 병원을 개원하였다.[1] 침 마취로 자궁근종 수술을 성공시키는 등 침술마취법으로 얻은 명성을 통하여 개원 후 한의학자로서 승승장구하게 된다.[1] 병원 자리로 구입한 땅이 천정부지로 값이 뛰기 시작하면서 많은 부를 가지게 되었고, 그때부터 그는 본격적으로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나눠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1] 의료봉사현장에서 활발히 활동하던 도중 1996년 러시아로 떠났다.[1] 모스크바 국립공과대학교에서 재활의학과 의공학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아 한의학자로는 처음으로 의공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으며,[1] 이후 모스크바 국립공과대학교의 의공학과 정교수로 발탁되었다.[1]
4. 4. 노년기
류근철은 2008년 KAIST에 578억원 상당의 부동산을 기부했는데, 이는 2012년 12월까지 국내 개인 기부 기록으로 남아 있었다. KAIST는 이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스포츠 컴플렉스 시설에 그의 이름을 붙였고, 세종시에 들어설 새 캠퍼스 이름도 '류근철 캠퍼스'로 명명할 예정이었다.[1] 2009년부터는 KAIST 인재ㆍ우주인 건강연구센터를 설립해 직접 학생들의 건강을 돌보기도 했다.[1]그는 한 번 주머니에 들어온 돈은 절대 꺼내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돈을 모았으며, 은행에 저축하면 꺼내지 않았다고 한다. 병원 개업 후 1972년 최초로 침술을 이용한 제왕절개 수술 마취에 성공했고, 이후 번 돈으로 빌딩을 샀다. 빌딩 수요가 늘면서 재산이 불어났고, 그때부터 '이 돈은 내 돈이 아니구나'라는 생각에 10여 년 전부터 기부할 생각을 했다고 한다.[1]
기부할 곳을 찾던 중, 한의학이 존재하는 것도 조국이 있기 때문이며, 국력은 과학 기술 수준이라는 생각에 자신의 돈이 과학 수준을 높이는 데 밑거름이 되길 바랐다고 한다. 2008년 개인 기부 사상 최고액인 578억원을 KAIST에 기부하며 전 재산을 내놓았고, 이후 KAIST에서 생활하며 ‘닥터류 헬스클리닉’을 열어 ‘재능기부’도 했다.[1] 2012년 1월 중순 뇌경색 진단을 받고 치료를 받다가 3월 8일 향년 85세로 별세하였다.[1]
5. 기부 현황
류근철은 2008년 8월 국내 개인 기부로는 사상 최고액인 5780억원을 KAIST에 기부하였다. 그는 "2008년 KAIST를 방문했을 당시 면학에 열중해 있는 학생들을 보며 한국의 미래가 여기에 있구나 하는 확신을 가졌으며, 우리나라가 선진국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과학기술 발전이 필수적이고, 그 역할을 선도적으로 이끌어갈 수 있는 곳이 바로 KAIST라고 생각했다"고 기부 이유를 밝혔다. 기부 재산은 서울 중구의 빌딩(평가액 5000억원)과 경북 영양의 산 10만여 평 등 부동산을 비롯해 벼루, 동양화 등 골동품을 포함한다.[1]
그는 기부 이후에도 KAIST의 8평짜리 교수 기숙사에 거주하며 재산뿐 아니라 '지식'까지도 기부하고 싶다며 2009년 3월 'KAIST 인재·우주인건강 연구센터'와 '닥터류 헬스클리닉'을 개소하고, 고령임에도 병으로 쓰러지기 전날까지 학생들을 돌보며 무료 진료를 하는 등 청년 같은 열정을 보였다.
1990년대 후반에는 모스크바 국립공대 교수로 재직하면서도 의료 시설이 부족한 국내 지방 각지를 돌면서 무료 진료 활동을 펼쳤으며, 이러한 공로로 충남 천안, 경남 산청시, 대전시로부터 명예시민증을 받았다. 2007년에는 고향인 충남 천안 천동초등학교에 4.5억원을 기부해 다목적체육관, 실내골프연습장 등을 건립하도록 했다.
6. 성과
류근철은 1976년 경희대학교에서 국내 최초로 한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모스크바 국립공대 의공학 박사, KAIST 명예이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경희한방의료원 부원장, 러시아 모스크바 국립공대 교수 등을 역임하며 평생 한의학자의 길을 걸었다. 1972년 세계 최초로 침 마취 맹장수술에 성공하는 등 국내외에서 특허를 취득했다.
2008년 KAIST에 5780억원 상당의 부동산을 기부했는데, 이는 2012년 12월까지 국내 개인 기부 기록 중 최고액이었다. KAIST는 감사의 뜻으로 스포츠 컴플렉스 시설에 그의 이름을 붙였고, 세종시에 들어설 새 캠퍼스도 '류근철 캠퍼스'로 명명할 예정이다. 2009년부터 KAIST 인재ㆍ우주인 건강연구센터를 설립해 직접 학생들의 건강을 돌보기도 했다.
6. 1. 한의사로서의 성과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 졸업 후, 경희대학교 의과대학 부교수 및 경희대학교 한방병원 부원장을 역임하였다. 1973년 경희의료원에서 개최된 제3차 세계침구학술대회에서 무약물 무통 침술법을 이용한 침술 마취 맹장수술에 성공하며 세계적인 유명세를 얻었다.[1] 이는 세계 최초의 무약물 침술 마취 수술 성공 사례로, 한국이 중국보다 먼저 무약물 침술 마취 특허를 획득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1] 또한 '동서의학중풍센터'를 설립하여 양방과 한방의 협진을 국내 최초로 시도하였다.[1]퇴직 후 개원한 병원에서도 침 마취를 이용한 자궁근종 수술을 성공시키는 등 침술 마취 분야에서 명성을 이어갔다.[1] 이후 의료봉사 활동 중 1996년 러시아로 건너가 모스크바 국립공과대학교에서 재활의학과 의공학을 전공하여 박사 학위를 취득, 한의학자 최초로 의공학 박사가 되었으며,[1] 모스크바 국립공과대학교 의공학과 정교수로 임용되었다.[1]
1973년 9월 25일 경희의료원에서 열린 제3차 세계침구학술대회에는 25개국 750여 명의 석학들이 참석했다. 이 대회에서 류근철은 무약물 무통 침술법을 이용한 맹장 수술을 공개 시연하여 성공함으로써, 한국은 세계 최초로 무약물 침 마취 수술에 성공한 국가가 되었다. 이는 한의학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린 기념비적인 사건으로, 당시 대한뉴스에서도 주요 뉴스로 다뤄질 만큼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후에도 류근철은 허창회, 김창환, 채우석 교수 등의 도움을 받아 자궁근종 절제 수술, 제왕절개 수술 등을 무약물 침술 마취로 성공시키며 한의학의 발전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1962년 국내 최초로 무통 침 치료기를 개발했으며, 1972년에는 세계 최초로 침술을 이용한 제왕절개 수술 마취에 성공했다. 1973년 경희대학교 한방의료원 부원장 재직 시절 '동서의학중풍센터' 설립을 주도하여 양방과 한방의 협진을 처음으로 시도하는 등 한의학 발전에 공헌했다. 또한 한의학에 공학을 접목한 '중풍 후유증 치료기'를 개발, 1996년 4월 모스크바 국립공과대학교에서 한의학자 최초로 의공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여 한의학 분야를 과학기술 분야로 확장하는 데 힘썼다.
6. 2. 의공학자로서의 성과
1973년 경희의료원에서 개최된 제3차 세계침구학술대회에서 무약물 무통 침술법을 이용한 침술 마취 맹장수술에 성공하며 유명세를 탔다. 이는 세계 최초의 무약물 침술 마취수술 성공 사례로, 한국이 중국보다 먼저 무약물 침술 마취 특허를 선점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1] 또한 '동서의학중풍센터'를 설립하여 양방과 한방의 협진을 처음으로 시도하였다.[1]1996년 러시아로 건너가 모스크바 국립공과대학교에서 재활의학과 의공학을 주제로 박사 학위를 취득, 한의학자 최초로 의공학 박사가 되었다.[1] 이후 모스크바 국립공과대학교 의공학과 정교수로 임용되었다.[1]
'류박사 건강 증진기', '추간판 및 관절 교정기구' 등을 개발하여 4개의 특허를 획득했으며, 2개의 특허가 심사 계류 중이다.[1]
특허
| 특허명 | 등록번호 | 등록일자 |
|---|---|---|
| 추간판관절유격조절운동기 | 2000455520000 | 1990년 2월 14일 |
| 추간판관절유격조절운동기의편측높이조절장치 | 2000455510000 | 1990년 2월 14일 |
| 신체교정용 장치, 신체교정용 장치의 제어기 및 제어 방법 | 1011633420000 | 2012년 6월 29일 |
| 신체교정용 장치 및 그의 확장프레임 | 1011132420000 | 2012년 1월 31일 |
심사 계류 중인 특허
| 특허명 | 출원번호 | 출원일자 |
|---|---|---|
| 근육이완기 | 10-2010-0045311 | 2010년 5월 14일 |
| 치료용 침대 및 의자 겸용 장치 | 10-2009-0119509 | 2009년 12월 4일 |
6. 3. 과학홍보대사로서의 성과
류근철은 기부 이후 강연 활동과 각종 언론 인터뷰 등을 통해 과학기술 홍보대사를 자처했다. KAIST, 서울여대, 충남대, 대전시 등에서 연사로 초청되어 과학기술 발전의 필요성에 대하여 이야기하였으며 과학기술에 대한 국민적 관심과 지지를 이끌어냈다.또한 류근철은 우리나라 기부 문화에 대한 인식을 제고시켰으며, 이는 그의 기부 이후 과학기술 발전을 목적으로 한 개인 기부자가 늘어난 것을 통해서도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류근철은 이와 같은 활동으로 기부와 과학기술에 관한 국민적 관심을 증진시킨 공로로 제43회 과학의 날에 과학기술훈장 ‘창조장’을 수상했으며, 2010년 MBC사회봉사대상 특별상, 2010년 충청향우회 ‘자랑스러운 충청인상’ 등을 수상했다.
7. 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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