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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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종필은 1926년 충남 부여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을 졸업하고 육군사관학교를 거쳐 군 정보 장교로 활동했다. 5·16 군사 정변을 주도하고 중앙정보부 초대 부장을 역임하며 박정희 정권의 핵심 인물로 활동했고, 이후 9선 국회의원, 국무총리를 두 차례 지냈다. 한일 국교 정상화에 기여했으나, 5·16 군사 정변 관련 인권 침해와 지역주의 조장 등의 비판을 받았다. 2004년 정계 은퇴 후 2018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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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필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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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존경 접두사 | 각하 |
이름 | 김종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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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명 | JP |
출생일 | 1926년 1월 7일 |
출생지 | 일제강점기 조선 충청남도 부여군 외산면 (현재 대한민국 충청남도 부여군) |
사망일 | 2018년 6월 23일 |
사망지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
배우자 | 박영옥 (1951년 결혼, 2015년 사망) |
자녀 | 2명 |
학력 | 공주교육대학교 졸업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 졸업 미국 육군 보병학교 졸업 대한민국 육군 보병학교 졸업 |
정당 | 자유한국당 |
다른 정당 | 자유민주연합 (1995–2006) 민주자유당 (1990–1995) 신민주공화당 (1987–1990) 민주공화당 (1963–1980) |
군사 복무 | 대한민국 육군 |
복무 기간 | 1949–1961 |
계급 | 준장 |
한글 이름 | 김종필 |
로마자 표기 | Gim Jong-pil |
매큔-라이샤워 표기 | Kim Chongp'il |
아호 | 운정 |
아호 로마자 표기 | Unjeong |
아호 매큔-라이샤워 표기 | Unjŏng |
주요 직책 | |
직책 | 대한민국 국무총리 |
임기 시작 | 1971년 6월 4일 |
임기 시작 2 | 1998년 3월 3일 |
임기 종료 | 1975년 12월 18일 |
임기 종료 2 | 2000년 1월 12일 |
대통령 | 박정희 |
대통령 2 | 김대중 |
이전 총리 | 백두진 |
이전 총리 2 | 고건 |
다음 총리 | 최규하 |
다음 총리 2 | 박태준 |
추가 정보 | |
가족 관계 | 김상배(부), 이정훈(모), 7남 중 6남, 형 김종익 |
종교 | 개신교(감리회) |
웹사이트 | 공식 홈페이지 |
군 복무 정보 | |
복무 | 대한민국 국군 |
소속 | 대한민국 육군 중앙정보부 |
근무 | 육군본부 중앙정보부 |
지휘 | 육군본부 정보참모부 기획과 과장 육군본부 정보참모부 정보처 처장 육군본부 정보국 행정처 처장 중앙정보부 부장 |
참전 | 한국 전쟁 |
2. 생애
== 생애 ==
김종필은 1926년 1월 7일 충청남도 부여군 외산면 반교리에서 태어났다. 부여초등학교, 공주중학교, 공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교육학과를 졸업했다. 어린 시절 독서광이었던 그는 특히 키쿠치 칸의 소설을 즐겨 읽었다고 한다. 1944년 일본 중앙대학교 진학을 희망해 일본으로 건너갔으나, 전쟁으로 인한 식량난을 겪고 귀국하여 서울대학교에 진학했다.
총리 시절부터 친일파로 알려진 그는 한일의원연맹 간부를 역임하며 한일 관계 개선에 힘썼다. 한일기본조약 체결 당시 반대 운동을 펼치는 학생들과 직접 대화하며 설득했다는 일화도 있지만, 대일 청구권 포기 문제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김대중 납치 사건 당시 일본에서 사과했으나 진상 규명 협력은 거부했다. 은퇴 후에는 "좋아하는 일본"이라는 발언으로 논란을 일으켰지만, 동시에 일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비판하기도 했다. 재일 한국·조선인 문제에 대해서는 "2세, 3세는 일본 국적을 취득해야 한다"는 발언으로 논란을 빚었다. 아오야마가쿠인대학 명예 박사 학위(국제정치학)를 받았다.
2004년 총선 낙선 후 정계를 은퇴했으나, 2007년 이명박 후보 지지를 선언하고 한나라당에 입당했다. 2008년 뇌졸중으로 입원했고, 2012년 새누리당을 탈당했다. 2015년에는 학창 시절 위안부 강제 연행을 목격했다고 증언했고, 2016년 육군사관학교 "올해의 자랑스러운 육군사관학교인상"을 수상했다. 2018년 6월 23일 사망했다.
2. 1. 생애 초기
김종필은 1926년 1월 7일 일제강점기 충청남도 부여군 외산면 반교리에서 태어났다.[15]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에 진학했으나, 1949년 육군사관학교 8기를 졸업했다.[1] 1951년 9월부터 1952년 3월까지는 미국 조지아주 포트 베닝에 있는 미국 보병학교에서 수학했다.[1] 한국 전쟁 당시에는 대한민국 육군 정보 장교로 참전했으며, 준장으로 예편했다. 그는 1944년 공주공립중학교(현 공주중학교·공주고등학교)를 졸업했다.[37] 1947년에는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교육학과를 졸업했다. 이후 육군본부 정보국에서 근무하며, 1950년 6월에는 북한반장, 1951년에는 작전정보과장을 역임했다. 1952년 10월 30일에는 제6보병사단 제19연대 정보참모 겸 탐색중대장으로 복무하기도 했다.[38] 1958년에는 육군 정보참모부 기획과장을 지냈다.2. 1. 1. 출생과 가계
김종필은 1926년 1월 7일 충청남도 부여에서 7남 중 5남으로 태어났다. 김해 김씨 안경공파 16세손이며, 12대조 김예직은 광해군의 외숙부이자 삼도수군절도사를 지냈다. 7대조 김기서는 진천현감을 역임했고, 그의 할아버지 김현택은 충청도 청양에서 부여로 이사하여 쌀 2000섬 지기의 부유한 갑부가 되었으며, 철종 때 선릉참봉을 지냈다. 아버지 김상배는 토지측량사를 지내며 토지등록 분규 해결 등으로 신망을 얻었고, 규암면장과 부여면장을 역임하며 지역사회 유지였다. 어머니 이정훈은 전주 이씨 출신으로 아버지보다 12살 연하였다. 김상배는 항일 독립운동가들을 숨겨주고 돌봐주었으며, 의열단 단원 유석현 등이 1921년 일본 경찰을 피해 그의 집에 피신하기도 했다.[52] 그의 형제로는 큰형 종호(서울 종로구청 주사 역임, 중앙곡물협회 회장 역임), 둘째 형 김종익(민주공화당 국회의원 역임), 그리고 막내동생 종식(한국 전쟁 중 실종)이 있다. 김종필은 오랫동안 실종된 막내동생을 찾으려 했으나 끝내 찾지 못했다.[52] 김종필은 육군사관학교(KMA) 8기 졸업(1949년) 후 한국 전쟁 당시 대한민국 육군 정보 장교로 참전하였고, 준장으로 예편했다. 그는 1623년 인조반정에 참여했던 무관 김예직의 12대손이기도 하다.[7] 2001년 인도 방문 당시, 그는 자신이 가락국의 수로왕 김수로의 72대손이라고 언급하였다.[7]2. 1. 2. 유년 시절
김종필은 충청남도 부여군 출신으로, 부여보통학교 6학년 때 기쿠치 간의 연애소설 <두 번째 키스>를 읽다가 하루 종일 두들겨 맞는 등, 유년 시절부터 반항적인 면모를 보였다. 공주중학교에 진학해서는 동맹휴학을 주도하여 공주경찰서 사상계에까지 연행되었으나, 면장이었던 아버지의 간청으로 겨우 풀려났다. 학교에서는 급장과 검도부장을 역임했고, 검도 외에도 승마와 그림을 즐기는 등 다재다능한 모습을 보였다.[1]2. 1. 3. 청년기
일본 도쿄의 주오대학교 예과 독법학과에 입학했으나, 일본인 선배와의 갈등 끝에 자퇴하고 귀국하여 대전사범학교를 1945년 3월에 졸업했다. 교사 생활 중에도 일본인 교감과의 마찰로 인해 산간벽지 학교로 발령받았으나, 2개월 만에 사퇴했다. 광복 후인 1946년에는 경성사범학교 사회교육과에 입학했다. 그러나 좌익 단체 활동을 했던 형 김종익과 관련하여 서북청년단의 습격을 받았고, 아버지는 이 사건으로 사망하고 가족은 재산을 빼앗기는 비극을 겪었다. 이러한 가족사는 김종필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정된다.[1]2. 2. 군인 생활
김종필은 1949년 육군사관학교 8기를 졸업하고, 한국전쟁 중이던 1950년 6월 육군본부 정보국 작전정보과 북한반장으로 임무를 수행했다. 이후 1951년에는 작전정보과장으로 승진했으며, 1952년 10월 30일에는 제6보병사단 제19연대 정보참모 겸 탐색중대장을 역임했다. [38] 1958년에는 육군 정보참모부 기획과장을 지냈다. 1961년에는 박정희와 함께 5·16 군사정변을 주도하여, 대한민국 초대 중앙정보부장에 임명되었다. 이후 1963년 육군 준장으로 예편하여 정계에 입문했다.2. 2. 1. 항명 파동과 강제 예편
그는 군 생활 대부분을 정보 관련 업무에 종사했으며, 소령을 거쳐 1958년 육군본부 정보참모부 기획과장으로 부임했다. 기획과장 재직 중 중령으로 진급했으나, 다른 기수보다 8년이나 늦은 진급으로 인해 동기들 사이에 군 운영 체계에 대한 불만이 쌓였다. 이후 육군본부 정보참모부 정보처 처장을 거쳐 1960년 육군본부 정보국 행정처 처장에 임명되었다.1960년 8월 24일, 김종필과 석정선은 미사 중이던 장면 국무총리를 찾아가 서면으로 정군을 요구했지만, 서면은 전달되지 않았다. 이 사건은 그가 이후 항명 파동에 연루되는 계기가 되었다. 장면 내각의 숙군 움직임 속에서 김종필은 석정선과 함께 모든 책임을 지고 예편했다. 예편 후, 정계 입문을 결심하게 된다.
1961년 4월 19일, 4·19 혁명 1주년 기념 시위를 거사일로 정하고 박정희와 함께 군사 정변을 모의했으나, 장면 정권의 시국정화단이 학생 시위대를 매수하여 거사는 실패했다. 같은 해 5월, 다시 거사를 계획한다.
2. 2. 2. 5·16 군사 쿠테타
1961년 박정희 소장이 이끈 5·16 군사정변은 김종필과 그의 육사 8기 동기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5·16 군사정변 직후, 김종필은 중앙정보부를 설립하고 초대 부장에 취임했다.[2] 중앙정보부는 박정희의 권위주의적 통치를 지원하며, 정적들을 자의적으로 체포, 고문, 박해하는 등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했다.[13] 이러한 중앙정보부의 활동은 당시 사회에 엄청난 공포를 불러일으켰고, 민주주의 발전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김종필은 이후 한국과 일본의 국교 정상화를 위한 노력을 주도했으며,[2] 1962년 일본을 방문하여 이케다 하야토 총리와 회담을 가졌지만, 당시 협상은 난항을 겪었다.[2] 결국 1965년 국교 정상화가 이루어졌고,[2] 이 과정에서 체결된 "김-오히라 메모"는 한국의 대일 청구권 포기 대신 일본으로부터 상당한 경제적 지원을 받는 내용을 담고 있어 논란이 되었다.[3] 1963년, 김종필은 민주공화당을 창당하여 박정희 정권의 권력 강화를 지원했다. 이후 1971년부터 1975년까지 국무총리를 역임했으며, 김대중 대통령 시절에는 DJP 연합을 통해 다시 국무총리직을 수행했다.2. 2. 3. 예편과 정계 입문
중앙정보부장 재직 중 육군 준장으로 진급한 김종필은 1962년 10월부터 11월까지 미국을 방문, 더글러스 맥아더를 예방하였다. 맥아더는 김종필에게 한국의 하루빨리 통일을 희망하며, 통일이 될 때까지 죽을 수 없다고 말했다.[65] 또한 한국전쟁 승리를 위해 만주 폭격을 주장했고, 휴전에 있어 미국의 잘못과 북진 통일의 실패가 인도네시아 사태의 원인이라고 주장하며, 이승만 박사에 대한 감정을 완화하여 귀국시키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언급했다.[65]1963년 1월, 김종필은 육군 준장에서 예편하고 중앙정보부장직에서 사퇴했다. 이후 민주공화당의 사전조직인 재건당을 창당하고, 윤일선, 임영신, 여운홍, 임병직, 윤치영, 정구영 등을 직접 찾아다니며 신당 창당에 협력을 요청했다. 장면 내각을 비판적으로 보던 윤치영, 여운홍 등은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같은 해 2월에는 정구영, 윤치영 등과 함께 민주공화당 창당에 참여했다.
2. 3. 정치 활동
김종필은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 당선되어 정계에 입문, 9선 의원을 지냈다. 이는 김영삼, 박준규와 함께 최다선 기록이다. 그는 1961년 5·16 군사정변을 주도한 박정희의 핵심 인물로, 초대 중앙정보부장을 역임하며 박정희 정권의 권위주의적 통치를 지원했다.[2] 중앙정보부는 박정희 정권의 탄압 도구로 활용되며, 정적들의 체포, 고문, 박해를 자행했다.[13] 한일 국교 정상화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1962년 이케다 하야토 일본 총리와 만나 협상을 진행했고,[2] 1965년 정상화를 이끌었다.[2] 하지만, 이 과정에서 체결된 김-오히라 메모는 한국이 일본의 전쟁범죄 피해자에 대한 추가 보상을 포기하는 대신 경제 원조를 받기로 한 내용을 담고 있어 논란이 있다.[3]1963년 민주공화당 창당에 참여, 박정희의 권력 강화와 여당의 압도적 의석 확보에 기여했다. 1971년부터 1975년까지, 그리고 김대중 대통령 시절인 1998년부터 2000년까지 두 차례 국무총리를 역임했다. 1987년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하여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고, 1990년 3당 합당으로 민주자유당을 창당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김영삼 대통령 당선에 기여했지만, 이후 세대교체론에 반발하여 1995년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했다. 1997년 대선에서는 김대중과 DJP 연합을 통해 김대중의 당선에 기여하고, 다시 국무총리가 되었다.[5] 그러나 박정희 정권의 핵심 인물이었다는 부정적 이미지와 충청 지역의 제한된 지지 기반으로 인해 정치적 입지가 흔들리기도 했다.[4] 2004년 제17대 총선에서 낙선하고 정계를 은퇴했다. 김영삼, 김대중과 함께 "3김 시대"를 풍미했지만, 끝내 대통령 자리에는 오르지 못하고 "영원한 2인자"로 남았다.
2. 3. 1. 3공 시절
1961년 박정희가 주도한 5·16 군사정변을 통해 권력을 잡은 후, 김종필은 중앙정보부(KCIA)를 설립하고 초대 부장으로 임명되었다. [2] 중앙정보부는 박정희 정권의 권위주의적 통치를 뒷받침하며, 정적들을 자의적으로 체포하고 고문하는 등 인권 탄압을 자행했다. [13] 이는 3공화국 시대의 어두운 면으로 평가된다.이후 김종필은 한국과 일본의 국교 정상화를 위한 핵심 인물로 활동했다. [2] 1962년 이케다 하야토 일본 총리를 만나 양국 관계의 즉각적인 정상화를 촉구했으나, 당시 일본 측은 더 많은 준비를 요구했다. [2] 결국 1965년 한일기본조약이 체결되었는데, 이 과정에서의 김종필의 역할에 대한 평가는 분분하다. "김-오히라 메모"에 따르면 한국은 일본으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받는 대신 일본의 전쟁범죄 피해자에 대한 추가 보상을 포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3] 이는 여전히 논란의 여지가 있는 부분이다.
1963년 김종필은 민주공화당을 창당하여 박정희 정권의 권력 강화와 입법부 장악에 기여했다. 박정희 정권 유지를 위한 그의 역할은 당시 사회적 갈등과 민주주의 억압에 대한 비판과 함께 평가되어야 한다. 1971년부터 1975년까지 국무총리를 역임하며, 박정희 정권의 핵심 인물로 활동하였다.
2. 3. 2. 3선 개헌 전후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된 김종필은 민주공화당 내에서 지지세력을 형성하며 1971년 대선에서 박정희의 후계를 노리는 세력으로 부상했다. 그러나 박정희는 1968년 5월 '국민복지회 사건'을 계기로 김종필 지지세력을 공화당에서 제명하며 김종필을 압박했다. [70] 김용태 의원 등 김종필 측근들이 중앙정보부의 고문을 받는 등 탄압이 심해지자,[71] 김종필은 같은 해 5월 30일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72] 국민복지회는 3선 개헌 반대와 김종필 대선 후보 추대를 목표로 했지만, 박정희 정권은 이를 '농촌 근대화 운동'이라는 명분으로 덮어버렸다.[73]정계 은퇴 후 부인의 치료를 위해 일본에 머물렀던 김종필은 1970년 4월 귀국 후 삼선 개헌을 지지하며 정계에 복귀했다. 1970년 12월 민주공화당 총재 수석상임고문, 1971년 3월에는 부총재를 역임하며 박정희 정권 내 영향력을 유지했다.
2. 3. 3. 유신 시대
유신 시대 동안 김종필은 박정희 정권의 핵심 인물로서 국무총리직을 역임하며, 권위주의적 통치에 협력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5·16 군사정변 이후 중앙정보부 초대 부장으로 임명되어, 박정희 정권의 권력 강화와 정적 탄압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13] 중앙정보부는 박정희의 권위주의적 통치를 지원하며 무제한적이고 견제받지 않는 권력을 행사하여 그의 정적들을 자의적으로 체포, 고문, 박해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13] 또한, 그는 한국과 일본의 국교 정상화를 위한 협상을 주도했으나,[2] "김-오히라 메모" 논란 등을 통해 일본으로부터의 경제적 이득만을 추구하고 전쟁범죄 피해자에 대한 보상 문제를 외면했다는 비판도 존재한다.[3] 1963년에는 민주공화당을 창당하여 박정희의 권력 강화와 여당의 압도적 의석 확보에 기여했으며,[2] 1971년부터 1975년까지 국무총리로서 유신 체제의 주요 정책들을 추진하였다. 이러한 행보는 박정희 정권의 권위주의적 통치를 강화하는 데 일조했다는 비판과 함께, 당시 사회 상황을 고려할 때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는 평가도 공존한다. 하지만, 그의 행동은 민주주의 발전에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그의 행적은 오늘날까지도 논란의 대상이며,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와 권위주의 사이의 긴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평가된다.2. 3. 4. 정치 금지와 복귀
1980년 5·17 쿠데타 이후 정치 활동이 정지된 김종필은 1987년까지 야인 생활을 했다.[74] 1987년 10월, 그는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하고 총재에 추대되었으며, 이후 구 민주공화당과 국민당을 흡수했다. 같은 해 8월에는 신민주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1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나, 4위로 낙선했다.[80] 선거에서 그는 전두환 정권에 의해 해직된 공무원들의 복직을 공약으로 내세웠다.[80] 하지만 노태우 정부의 5공 청산에 대한 비호감을 가진 일부 세력의 지지를 얻어, 1988년 4월 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되었다.2. 4. 공동 여당 창립
1990년 1월, 김종필은 당시 여당이었던 노태우 대통령의 민주정의당과 김영삼의 야당인 통일민주당과의 3당 합당을 주도하여 민주자유당을 창당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이 합당은 당시 한국 정치 지형을 크게 바꾼 사건으로 평가되며, 김종필은 새롭게 출범한 민주자유당의 상임고문을 맡았습니다. 이후 김영삼은 민주자유당의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여 1992년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하였고, 이는 김종필의 정치적 영향력을 다시 한번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김종필의 정치적 입지가 어떻게 변화했는지, 그리고 그가 3당 합당 과정에서 어떤 전략과 계산을 했는지는 다양한 해석이 존재합니다. 특히, 보수 정당과의 연합을 통해 얻은 정치적 이득과 그로 인한 비판 여론 등에 대한 균형적인 시각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2] [3] [4] [5]2. 4. 1. 삼당 합당과 탈퇴
김종필은 1990년 3당 합당을 통해 민주자유당에 참여하여 최고위원(1990년 2월) 및 대표위원(1992년 3월)을 역임했다. 그러나 내각제 개헌을 주장하는 김종필과 대통령 중심제를 고수하는 김영삼 대통령 사이의 견해 차이는 갈등으로 이어졌다. 특히 김영삼 정부의 전두환 계열 숙청 과정에서 당내 군부 세력 제거를 둘러싼 김영삼과의 불화는 심화되었고, 결국 민주계는 그의 퇴진을 요구했다. 이러한 갈등 속에서 김종필은 1995년 2월 9일 민주자유당을 탈당하고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했다. 이후 영남권 인사 포섭과 박정희, 전두환 정권 출신 인사 및 지지층 공략을 시도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김영삼과의 불화는 김종필의 정치적 야망에 큰 걸림돌이 되었고, 결국 그는 대선에서의 기회를 놓치고 야당으로 돌아서게 된다. 이는 보수 정당의 이미지 문제, 즉 윤리적 결함이 있는 구 정치인들과 관련된 이미지 문제로 악화되었다. [4]2. 4. 2. DJP연합과 국민의 정부 출범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종필은 이념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김대중 후보와 손을 잡아 DJP연합을 결성하고, 김대중 후보의 당선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이후 그는 자유민주연합 명예총재가 되었고, 국민의 정부의 첫 국무총리 서리로 5개월간 활동한 뒤 국무총리로 임명되었다. 보수주의 세력은 DJP연합을 강하게 비난했지만, 김종필은 총리를 포함한 일부 각료 인사권을 행사하고, '국민연금' 등 주요 정책에 영향력을 행사했다.그러나 내각제 개헌과 대북 관계 등을 둘러싸고 김대중 대통령과 갈등이 심화되었고, 결국 2001년 DJP연합은 붕괴되었다. 대한민국 제16대 총선에서 자민련은 17석을 획득하는데 그쳐 원내교섭단체 구성에 실패했고, 국회에서 임동원 통일부 장관 해임안이 가결된 것을 계기로 김대중 정부와 완전히 결별하게 되었다. 이후 김종필은 소수 야당의 총재로 남았다.
2. 5. 제16대 대통령 선거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김종필은 1월 15일, 내각제를 핵심 공약으로 내세우며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81] 하지만 충청권 이외 지역에서의 지지율 부진으로 독자 출마를 포기했다. 선거 기간 동안 그는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와 새천년민주당 노무현 후보 모두 지지하지 않고 중립을 유지했다. 두 후보 모두 '삼김 정치' 청산을 공약으로 내세웠는데, 이는 삼김 시대의 정치적 영향력이 2000년대 들어 약화되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2005년 정계 은퇴 후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김종필은 2000년 이회창에게 20석 미만의 자민련도 교섭단체 지위를 부여하겠다는 약속을 받았으나 이회창이 나중에 이를 부인한 것을 이유로 그를 지지하지 않았다고 밝혔다.[82] 노무현 정부 출범 이후 자민련의 정치적 영향력은 더욱 감소했고, 김종필은 소수 야당 총재로서 정치 활동을 이어갔다.2. 6.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와 정계은퇴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추 당시, 김종필은 처음에는 탄핵에 반대했으나, 이후 의원들의 자유 의사에 맡기며 사실상 중립을 선언하고 탄핵안 표결에는 불참했다.[83] 그러나 자민련은 탄핵 역풍을 극복하지 못하고,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참패했다. 지역구 4석 획득에 그치며 교섭단체 구성에도 실패했고, 비례대표는 15명 전원 낙선했다.[84] 10선에 실패한 김종필은 총재직을 사퇴하고 정계 은퇴를 선언, 43년 만에 정치 생활을 마무리 지었다. 삼김 시대의 종말을 알리는 사건이었다.정계 은퇴 후 김종필은 충청권 지역 정당의 활동에는 참여하지 않았으며, 2007년 대선에서는 이명박 후보를 지지했다. 2008년 3월에는 김영삼 전 대통령과 회동하여 한나라당 공천의 편파성을 비판하고 이명박 대통령을 강하게 성토했다.[85] 2000년대 이후에는 한성디지털대학교 명예 석좌교수로 위촉되기도 했다.
2008년 12월 뇌졸중으로 쓰러져 입원했으나,[86] 집중적인 재활을 통해 2010년 경에는 거의 건강을 회복했다.[87]
3. 사망
정계 은퇴 후 2008년 뇌졸중을 겪은 김종필은 이후 지속적인 치료와 재활을 받았으나, 2018년 5월경부터는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어 음식을 제대로 섭취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2018년 6월 23일, 서울 신당동 자택에서 호흡곤란 증세를 보여 순천향대병원으로 이송되었지만, 병원 도착 전 사망했다. 향년 92세였으며, 사인은 노환으로 알려졌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되었고, 장례는 5일간 가족장으로 조용히 치러졌다. 6월 27일 영결식 및 발인식을 거행한 후, 유해는 충청남도 부여군 종중묘역에 안장되었다.
4. 가족 관계
김종필의 할아버지는 김현택(金顯澤, 1846년~1936년, 철종 선릉 참봉)이고, 할머니는 밀양 박씨(密城 朴氏, 1845년~1917년)이다. 아버지는 김상배(金相培, 1887년~1962년), 어머니는 이정훈(李貞薰, 1899년~1978년)이다. 형제로는 김종호(金鍾浩, 1917년~1998년, 서울특별시 종로구청 주사, 중앙곡물협회 회장 역임), 김종익(金鍾翊, 1918년 6월 27일~2000년 12월 20일, 전 민주공화당 (대한민국) 의원), 김종락(金鍾珞, 1920년 5월 16일~2013년 8월 22일, 대한야구협회 상임고문 역임), 김종소(金鍾韶, 1925년~2001년), 김종관(金鍾寬, 1930년~2010년)이 있다. 김종필의 배우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조카인 박영옥 (1929년)(朴榮玉, 1929년 10월 30일~2015년 2월 21일)이다. 자녀로는 딸 김예리 (1951년)(金禮利, 1951년 12월 27일~)와 아들 김진(金進, 1961년 9월 3일 ~ 2023년 12월 4일)이 있다. 김진의 배우자는 미국 국적 과테말라 출신인 리디아(1962년 ~)이다. 김종필의 장인은 박상희(朴相熙, 박정희 대통령의 셋째 형, 1905년 9월 10일~1946년 10월 6일)이고, 장모는 조귀분(趙貴紛, 1908년 12월 16일~1992년 11월 14일)이다. 1951년 2월 15일, 김종필은 박영옥과 결혼하여 박정희 전 대통령과 인척 관계를 맺게 되었다.[10] 김종필의 형제, 조카, 조카들의 배우자에 대한 상세한 정보는 위에 나열되어 있다.
5. 경력
1949년 육군사관학교 8기로 임관하여 군 생활을 시작했다. 1952년부터 1953년까지 6사단 19연대 수색중대장을 역임했다. 1961년 5월 16일 군사정변 이후 초대 중앙정보부장에 임명되어 박정희 정권의 핵심 인물로 활동했다. 중앙정보부장 재임 시절, 정권 유지를 위해 정적들을 자의적으로 체포, 고문, 박해하는 등 인권 탄압에 가담했다는 비판을 받는다.[13] 1963년 민주공화당 창당위원장을 역임했으며, 같은 해 충남 부여군에서 제6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이후 제7대, 제8대, 제9대, 제10대 국회의원을 역임하며 정치 경력을 쌓았다. 1971년 6월부터 1975년 12월까지 제11대 국무총리로서 박정희 정부의 핵심 실세로 활동했다. 1976년에는 한일의원연맹 회장을 역임했다. 1979년 11월 박정희 대통령 암살 이후에는 민주공화당 총재에 올랐다. 1980년 5·18 민주화 운동 당시 신군부에 의해 연행되었으나 7월 2일 석방되었다. 1987년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하여 제1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1990년 3당 합당을 통해 민주자유당 최고위원을 지냈고, 1995년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하여 총재를 역임했다. 1998년 3월부터 2000년 1월까지 김대중 정부의 제31대 국무총리를 지냈다. 이는 김대중 대통령과의 DJP 연합의 결과였다.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하고 정계를 은퇴했다. 2007년에는 제17대 대통령 선거에서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의 선대위원회 명예고문을 맡았다. 2012년 새누리당을 탈당했고, 2018년 6월 23일 사망했다.
6. 상훈
김종필은 국내외에서 다양한 훈장과 명예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가 받은 주요 훈장은 다음과 같다. 1954년 9월 동성 훈장(미국), 1955년 1월 은성 충무무공 훈장, 1961년 10월 대수보정 훈장(중화민국), 1963년 1월 일등 보국 훈장 통일장, 1966년 10월 공로 대훈장(파라과이), 1966년 7월 로훈장(이탈리아), 1966년 10월 보국 일등 훈장(베트남), 1971년 12월 청조 근정 훈장, 1971년 6월 수교훈장 광화장, 1973년 6월 훈일등욱일대훈장(일본), 1974년 11월 수교훈장 광화대장, 1975년 10월 아프리카 가봉 대훈장, 1975년 10월 적십자대장 태극장, 1975년 10월 칠레 대훈장, 1977년 10월 아르헨티나 대십자훈장, 1977년 10월 중화민국 대수보훈장, 1978년 2월 대훈장(아르헨티나), 1998년 10월 압둘아지르왕 훈장(사우디아라비아), 그리고 2018년 6월에는 국민훈장 무궁화장(추서)을 받았다. 1969년 6월 6일까지 대한스카우트연맹 총재를 역임했으며, 1967년에는 일본스카우트협회의 최고 영예인 황금꿩 훈장(Golden Pheasant Award)을 수상하기도 했다.[6] 또한, 그는 1999년 6월 한국미술협회 제1회 자랑스런 미술인상을 수상했고, 2000년 1월 서울경제신문 주최 명사미술전에 휘호를 출품하기도 했다.
7. 학력
김종필은 1940년 부여공립보통학교(현 부여초등학교)를 졸업하고, 1944년 공주고등학교(당시 공주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이후 주오 대학교 예비과정에 진학하였으나 중퇴하고, 1945년 공주교육대학교를 졸업하였다. 1948년에는 서울대학교 교육학과를 수료하였으며, 1949년에는 육군사관학교 8기를 졸업하였다. 군 복무 중에는 1952년 미국 육군보병학교와 1956년 대한민국 육군보병학교를 졸업하였다. 1958년에는 대한민국 국방대학교 행정학사 과정 3기를 수료하였다.
7. 1. 명예 박사 학위
김종필은 국내외 여러 대학에서 명예 박사 학위를 받았다. 주요 수상 내역은 다음과 같다.- 1963년 페얼레이 디킨슨 대학교 명예 법학박사
- 1964년 롱아일랜드 대학교 명예 법학박사
- 1966년 중앙대학교 명예 법학박사
- 1966년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명예 문학박사
- 1974년 홍익대학교 명예 철학박사
- 1992년 유타대학교 명예 정치학 박사
- 1995년 오리건 주립 대학교 명예 이학박사
- 1998년 동의대학교 명예 경제학 박사
- 1998년 명지대학교 명예 법학박사
- 1998년 공주대학교 명예 교육학 박사
- 1998년 규슈 대학교 명예 철학박사
- 2002년 광주대학교 명예 행정학 박사
- 2007년 아오야마가쿠인 대학 명예 정치학 박사
8. 평가
== 평가 ==
김종필에 대한 평가는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이 공존한다. 긍정적으로 평가되는 부분은 그의 외교적 노력과 정치적 협상력이다. 그는 한국과 일본의 국교 정상화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여러 차례의 정치적 연합을 통해 정국 운영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특히 1997년 DJP 연합을 통해 김대중 정부 출범에 기여한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하지만 그의 정치적 행보를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 5·16 군사정변의 주도자로서 권위주의 정권에 기여한 점과 중앙정보부 초대 부장으로서 자행된 인권 침해 행위에 대한 책임을 묻는 목소리가 있다. 또한, 지역주의를 조장하고 정치적 계산에 치중했다는 비판도 끊이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김종필은 한국 현대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지만, 그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엇갈리고 있다. 그의 정치적 유산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존재하며, 시대적 상황과 관점에 따라 평가가 달라질 수 있다. 그의 긍정적, 부정적 면모를 모두 고려하여 균형 있게 평가해야 할 것이다. [2][13][4][5]
8. 1. 긍정적 평가
김종필은 삼김 시대를 풍미한 거물급 정치인으로, 그의 정치적 행보에는 긍정적 평가와 부정적 평가가 공존한다. 5·16 군사정변을 통해 헌정을 붕괴시킨 과오에도 불구하고, 그는 안정적인 권력 장악에 기여하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훗날 국가정보원이 되는 중앙정보부의 설립을 주도하여 공안 정보 기관의 기틀을 마련하였고, 제1차 경제개발계획 수립에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이는 대한민국 경제 발전의 초석을 다진 긍정적 업적으로 평가받을 수 있다. 또한 한국과 일본의 국교 정상화를 위한 노력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1965년 국교 정상화에 기여하였다. [2] 비록 "김-오히라 메모"를 통해 전쟁범죄 피해자에 대한 추가 보상을 포기하는 결정을 내렸다는 비판도 존재하지만, [3] 당시 시대적 상황과 외교적 압력을 고려한다면 그의 외교적 노력은 긍정적으로 평가될 수 있다. 1971년부터 1975년까지 그리고 김대중 대통령 시절인 1998년부터 2000년까지 국무총리를 역임하며 행정부의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했으며, 정치적 연합을 통해 여러 정치적 역경을 극복하고 정치적 입지를 굳히는 노련함을 보여주었다. [5] 이러한 정치적 수완은 김대중 정부의 DJP 연합을 통해 잘 드러난다. 비록 그의 정치적 행보가 항상 긍정적으로 평가받는 것은 아니지만, 대한민국 정치와 경제 발전에 기여한 그의 역할 또한 무시할 수 없다.8. 2. 부정적 평가
5·16 군사정변 주도자로서 박정희 정권에 부역한 점은 김종필에 대한 부정적 평가의 주요 근거다. [2] 특히, 권위주의적 통치를 지원한 중앙정보부 초대 부장으로서 자의적인 체포, 고문, 박해를 통해 정적들을 제거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13] 또한, ''삼김 시대''의 일원으로서 김영삼, 김대중과 함께 지역주의를 조장하고 지역 갈등을 심화시켰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1998년 DJP연합을 통해 정권 교체에 기여했지만, 보수 진영에서는 이를 부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이는 그의 정치적 행보가 일관성 없고, 오히려 권력 유지를 위한 계산적인 행동이었다는 인식과 맞닿아 있다. 특히 충청 지역을 기반으로 한 그의 정치적 영향력은 지역주의를 고착화시키는 부정적 측면으로 해석될 수 있다. 박정희 정권 시절의 행적과 지역주의 조장, 그리고 정치적 계산에 치중한 모습은 그의 부정적 평가에 무게를 더한다. [4]9. 일화
김종필의 아들 김진은 미국 유타 대학교 유학 중 과테말라 여성과 결혼했는데, 당시 김종필은 이미 결정된 사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고려대학교 출신인 김진은 아버지의 정치적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길을 걸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88]
김종필은 박정희 정권 초기에 워커힐 건립을 주도했다. 외래 관광객 및 주한 유엔군 휴가 장병 유치를 위한 시설로서, 김종필은 그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직접 호텔 건립을 추진했다. 이는 김종필의 정치적 역량뿐 아니라 호텔 산업에 대한 그의 관심을 보여주는 사례이다.[89]
또한, 김종필은 세종문화회관 건축 당시 설계에 없던 파이프 오르간 설치를 지시했다. 당시 동양 최대 규모였던 이 오르간은 세종문화회관의 위상을 높이는 데 기여했으며, 김종필의 문화예술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는 사례이다.[89]
김종필은 박정희와 5·16 군사 쿠데타를 함께 주도하고 여러 요직을 역임했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항상 순탄치 않았다. 박정희는 김종필의 권력을 견제했고, 이는 두 사람 사이의 긴장 관계를 보여준다.[43] 김종필은 박근혜와도 불편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2007년 대선에서는 박근혜 대신 이명박을 지지했다. 이는 김종필의 정치적 판단과 선택의 독자성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김종필의 형 김종익 또한 국회의원을 지냈다.[44] 김종필의 장녀는 실업가 이원만의 차남과 결혼했으나 이혼했다.[45]
김종필은 자신의 처 박영옥의 출산 당시, 육영수가 산모의 식사를 준비하지 않은 것에 대해 강하게 항의했다는 일화가 있다. 이는 육영수에 대한 김종필의 부정적인 평가와 그의 강직한 성격을 보여주는 대목이다.[46]
한일 청구권 협상 과정에서 김종필은 일본 정계 인사들과의 만남을 가졌는데, 와타나베 츠네오와의 만남에서 벌어진 해프닝은 김종필의 소탈한 면모를 보여준다.[47] 2016년 최순실 국정 개입 사태 당시 김종필은 박근혜 대통령의 고집스러운 성격을 예측하며 하야하지 않을 것이라고 예언했고, 그의 예언은 현실이 되었다.[48]
김종필은 박정희, 김영삼, 김대중 정권 모두에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정작 대통령 자리에는 오르지 못했다. "영원한 2인자", "킹메이커"로 불렸던 그는, 각 정권의 몰락과 함께 자신의 정치적 한계를 맞이했다.[49] 충청 지역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김종필은 "충청의 맹주"로 불렸으나, 2000년대 이후 충청 지역의 캐스팅 보트 성격은 약화되었다. 2015년 모교인 공주고등학교에서 그의 흉상 제막식이 논란 끝에 취소된 것은, 그의 정치적 유산에 대한 재평가 필요성을 시사한다.[50][51]
10. 저서
== 저서 ==
김종필이 저술한 책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11. 기타
김종필은 1992년 12월 한국소설가협회 명예회원이 되었고, 1993년 6월에는 한국 펜클럽 평생회원이 되었다. 좌우명에 대한 정보는 제공되지 않았다.
11. 1. 좌우명
김종필의 좌우명은 ''일일신 우일신(日日新 又日新)''과 ''상선여수(上善如水)''이다.[12][13][14] 그는 정치를 "허업"이라 칭하며, 정치인은 그 결실을 국민에게 돌려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치인이 자신의 이익을 취한다면 그 결과는 감옥이라고 냉철하게 지적했다. 또한, 2015년 아내의 죽음 이후 자신의 묘비명을 준비하며 "인간의 죽음은 진실이지만, 모든 사람이 죽음을 준비하지는 않는다"는 말을 남겼다. 그의 삶의 태도를 보여주는 "자의반 타의반(자의반 타의반)" 또한 그의 좌우명과 같이 그의 삶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12. TV 프로그램
== TV 프로그램 ==
김종필이 출연했던 대표적인 TV 프로그램으로는 1998년 KBS2 《TV는 사랑을 싣고》가 있다. 다만, 김종필을 다룬 드라마는 여러 편 제작되었으나, 당시 시대 상황과 제작 환경의 영향으로 객관적인 묘사보다는 특정 시각을 반영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이정길 배우는 MBC의 제2공화국, 제3공화국, 제5공화국과 SBS의 코리아게이트에서 김종필 역을 맡아 그의 이미지 구축에 영향을 미쳤다. 그 외에도 김종필을 다룬 드라마로는 MBC의 제4공화국(한인수), SBS의 삼김시대(정동환), SBS의 야인시대(한창호), MBC의 영웅시대(정재곤) 등이 있다.
13. 대중 매체
김종필을 다룬 드라마에서 김종필 역을 맡은 배우는 다음과 같다. 드라마 ''정치''에서는 배우 이순재가 김종필 역을 맡았다. 이 드라마는 김종필의 삶과 정치 활동을 중심으로 전개되며, 그의 정치적 입장과 행보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보여준다. 특히, 이 드라마는 김종필의 민주화 운동 참여 및 정치 개혁 노력을 조명하여, 그의 긍정적인 면모를 부각하는 경향이 있다. (소스 필요)
13. 1. TV 드라마
김종필을 다룬 TV 드라마는 다음과 같다.- '''MBC 1989년''' 제2공화국: 이정길
- '''MBC 1993년''' 제3공화국: 이정길
- '''SBS 1995년''' 코리아게이트: 이정길
- '''MBC 1995년''' 제4공화국: 한인수
- '''SBS 1998년''' 삼김시대: 정동환
- '''SBS 2003년''' 야인시대: 한창호
- '''MBC 2004년''' 영웅시대: 정재곤
- '''MBC 2005년''' 제5공화국: 이정길
특히, 이정길 배우는 여러 작품에서 김종필 역을 맡아 그의 이미지를 구축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다만, 이러한 드라마들은 당시 시대적 상황과 제작 환경을 반영하여, 김종필에 대한 객관적인 묘사보다는 특정 시각을 반영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14. 역대 선거 결과
선거 ! 선거 종류 ! 회차 ! 직책 ! 선거구 ! 정당 ! 득표수 ! 득표율 ! 순위 ! 당락 |
---|
대한민국 제6대 국회의원 선거 (1963) | 총선 | 6대 | 대한민국의 국회의원 | 충남 부여군 | 민주공화당 | 45,999표 | 68.15% | 1위 | 당선 |
대한민국 제7대 국회의원 선거 (1967) | 총선 | 7대 | 대한민국의 국회의원 | 충남 부여군 | 민주공화당 | 58,156표 | 91.06% | 1위 | 당선 |
대한민국 제8대 국회의원 선거 (1971) | 총선 | 8대 | 대한민국의 국회의원 | 전국구 | 민주공화당 | 6,254,921표 | 48.8% | 전국구 1번 | 당선 |
대한민국 제9대 국회의원 선거 (1973) | 총선 | 9대 | 대한민국의 국회의원 | | 유신정우회 (통일주체국민회의) | | | 지명 | 당선 |
대한민국 제10대 국회의원 선거 (1978) | 총선 | 10대 | 대한민국의 국회의원 | 부여군·서천군·보령군 | 민주공화당 | 42,946표 | 66.63% | 1위 | 당선 |
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 선거 (1987) | 대선 | 13대 | 대한민국의 대통령 | 대한민국 | 신민주공화당 | 1,823,067표 | 8.06% | 4위 | 낙선 |
대한민국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1988) | 총선 | 13대 | 대한민국의 국회의원 | 충남 부여군 | 신민주공화당 | 53,967표 | 81.88% | 1위 | 당선 |
대한민국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1992) | 총선 | 14대 | 대한민국의 국회의원 | 충남 부여군 | 민주자유당 | 42,358표 | 72.53% | 1위 | 당선 |
대한민국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1996) | 총선 | 15대 | 대한민국의 국회의원 | 충남 부여군 | 자유민주연합 | 35,292표 | 66.35% | 1위 | 당선 |
대한민국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2000) | 총선 | 16대 | 대한민국의 국회의원 | 비례대표 | 자유민주연합 | 1,859,331표 | 9.8% | 비례대표 1번 | 당선 |
대한민국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2004) | 총선 | 17대 | 대한민국의 국회의원 | 비례대표 | 자유민주연합 | 569,083표 | 2.82% | 비례대표 1번 | 낙선 |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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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th Korea seeks ties with Ayodhya-72nd generation descendant of the King Kim Suro of t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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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fe of former PM Kim Jong-pil dies
http://m.Korea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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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litical heavyweights pay respects to late former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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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Former Prime Minister Kim Jong-pil d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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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Former South Korean Prime Minister and spy agency founder Kim Jong-pil dies | the Straits 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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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mer South Korean Prime Minister Kim Jong-pil d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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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과 오욕의 한국현대사를 체현’···JP의 파란만장한 역사(「栄光と汚辱の韓国現代史を体現」…JPの波乱万丈な歴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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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鍾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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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大百科全書
2022-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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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国の金鍾泌元首相が死去 92歳 日韓国交正常化の立役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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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헌정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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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적 아무도 쓰지 않았던 金鍾泌과 일곱 형제들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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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조선
2010-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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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필, 전 국무총리 별세...김대중, 김영삼 전 대통령과 함께 '3김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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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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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韓国写真ニュース
株式会社韓国写真ニュース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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あなたはどうして韓国へ来たんです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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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国危う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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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BBK 수사 발표 이후 대선 후보들은?(BBK捜査発表以後大選候補たち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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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金鍾泌元自民連総裁、初の李明博候補支持遊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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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김종필 전 총재 뇌졸중 증세로 입원 (金鍾泌前総裁脳卒中の症状で入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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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뇌졸중 김종필 전 총재 퇴원 (脳卒中金鍾泌前総裁退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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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金鍾泌氏 セヌリ党離党の意向表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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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위안부 속여서 끌고가는 것 직접 봤는데 꾸며낸 일이라고?” … “사설 쓴 논설위원들 다 불러라” … JP, 와타나베 사장 호통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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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鍾泌元首相「老兵は死なず、ただ消え去るの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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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표 김종필 전 국무총리의 92년 인생(年表 金鍾泌元首相の92年の人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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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중에 미국 유학 … 길 가득 메운 자동차 '미국의 힘' 느껴 … 1년 만에 전투 복귀 … "남편과 죽겠다" JP 찾아온 전선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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今日の歴史(3月6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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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연구소 아시아동향연보 브라우징 대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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写真 金鍾泌元首相が死去 日本と太いパイ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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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필 전 국무총리 별세…향년 9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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疑心あるいは無視…金鍾泌-朴正煕・朴槿恵、代を引き継ぐ“愛憎関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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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회정치 60년, 선량들이 낳은 진기록|신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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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 한국의 가벌] #26. 김종필·정일권·이효상 등 정계 거물과 사돈 맺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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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鍾泌元首相、「朴大統領は5千万人が押し寄せても下野しないだろ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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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鍾泌氏、朴大統領は「死んでも辞任しな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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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永遠のナンバーツー」金鍾泌元首相永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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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와 5.16 쿠데타' 김종필 흉상, 학교에 세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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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고, '5·16 주역' 김종필 흉상 설치 무기한 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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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선열에 대한 묵념은 하면서 생존유공자엔 무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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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과시민대토론회>11. 김종필 자유민주연합 총재 - 질의.답변 요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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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성 정객들 정치 참여 망상 : 낡은 세대 진출 막으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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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의릉 옛 중앙정보부 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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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한 전까지 죽을 수 없다, 인사태는 한국전 실패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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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후선 김종필·오히라, 결단은 박정희·이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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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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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비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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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한일회담에 대한 미·일의 구도와 대응
역사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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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한국 현대정치사의 이해
오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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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복지회사건
한국사사전편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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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의 부장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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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김종필, 알프레도 산체스 벨라, 루이스 카레로 블랑코, 심흥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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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총리 내일 빠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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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필,피엘·메스메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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共和總裁에 金鍾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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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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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金鍾泌 前共和總裁등 9명 議員辭退書 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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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김종필 위원장 회견, 80년 해직 공무원 전원 복직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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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김종필 총재 대선출마 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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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2002-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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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나는 김대중에게 속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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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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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총람
# 출판사 정보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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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김종필' 회동, '이명박에 배신당했다' 맹성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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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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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김종필, 병세 호전돼 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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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시스
2009-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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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김종필 전 국무총리 “無恒産 無恒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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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2013-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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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김종필이 워커힐호텔 짓자고 박정희 설득했던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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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집고
2020-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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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서은영의 독무대]불혹에 이른 세종문화회관 파이프 오르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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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경제
2017-04-11
관련 사건 타임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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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힘도 김민석 총리 동의해야 [성한용 칼럼]
이정무 전 자민련 원내총무 별세
내일부터 사전 투표…"절박"·"대역전"·"탄력"
“볼셰비키 20년, 파시스트 30년”…민주, ‘김문수 네거티브’ 공세
민주, '진짜 보수' 선언식…이재명 "합리적 보수 역할까지"
통계로 보는 6·3 대선 세 가지 관찰 포인트
민주 "국힘 대선후보 '김문수'…대한민국 최극우 후보"
막판 한달 요동쳤던 역대 대선…단일화부터 돌발 악재까지
이재명이 가려는 길 ‘김대중 모델’…윤여준 손잡고 반도체 챙기고
이재명, 국립현충원 찾아 '박태준 묘역' 참배…중도 확장 본격
권성동 “반이재명 모든 애국 민주세력과 힘 모을 것”
김문수, ‘반이재명 빅텐트론’에 “이재명 이기려면 어떤 경우든 힘 합쳐야”
[Column] A country free from the threat of military coup d’etats
한국 민주주의가 군사 쿠데타의 위협에서 벗어난 과정을 설명하며, 윤석열 대통령의 계엄령 시도를 통해 민주주의가 위협받는 상황을 겪었지만, 헌법적 절차에 따라 극복했음을 이야기한다.
[재산공개] MB 서예품 · 해외 아파트…공직자 이색 재산 신고
부여군수, ‘윤석열 파면’ 펼침막 내걸었다가 하루 만에 내린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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