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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베몽 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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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리베몽 조약은 880년 2월 서프랑크의 루이 3세와 카를로만 2세, 동프랑크의 루트비히 3세가 아시네의 리베몽에서 체결한 조약이다. 이 조약은 메르센 조약 이후 분할된 로타링기아의 소유권을 동프랑크에 귀속시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서프랑크는 로트링겐 서부를 포기하고, 동프랑크가 이를 영유하게 되었다. 이 조약으로 서프랑크는 프로방스의 보소 5세를 상대할 수 있게 되었고, 독일과 프랑스 사이의 국경선이 형성되어 중세 시대까지 유지되었다. 리베몽 조약은 서프랑크와 동프랑크 간의 영토 분쟁을 해결하고 중세 유럽의 정치적 안정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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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베몽 조약
조약 정보
명칭리베몽 조약
원어 명칭Vertrag von Ribemont (독일어)
Traité de Ribemont (프랑스어)
관련 국가동프랑크 왕국
서프랑크 왕국
장소리베몽
날짜880년
결과로타링기아 전체가 동프랑크 왕국에 양도됨
교전 당사자
동프랑크 왕국루트비히 3세
서프랑크 왕국루이 3세
카를로만 2세

2. 배경

869년 메르센 조약으로 로타링기아가 분할된 뒤, 875년 서프랑크의 대머리왕 카를 2세는 로타링기아 동부 지역을 차지하려 했다. 그러나 876년 안더나흐 전투에서 동프랑크의 독일인 루트비히에게 패배하면서 이 시도는 실패했고, 이후 로타링기아는 분쟁지역으로 남게 되었다.[4]

878년 11월, 동프랑크의 청년 루트비히 3세는 서프랑크의 말더듬이 루이 2세와 푀논(Fourons)에서 푀논 조약을 체결하여 서로의 아들을 후계자로 인정하기로 약속했다.[8] 그러나 879년 4월 루이 2세가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조약에 문제가 생겼다.[8]

2. 1. 원인

869년 메르센 조약으로 로타링기아가 분할된 뒤, 875년 서프랑크의 대머리왕 카를 2세는 로타링기아 동부 지역을 차지하려 했다. 그러나 876년 안더나흐 전투에서 동프랑크의 독일인 루트비히에게 패배하면서 이 시도는 실패했고, 이후 로타링기아는 분쟁지역으로 남게 되었다.[4]

2. 2. 전개

878년 11월, 동프랑크의 청년 루트비히 3세는 서프랑크의 말더듬이 루이 2세와 푀논(Fourons)에서 푀논 조약을 체결하여 서로의 아들을 후계자로 인정하기로 약속했다.[8] 그러나 879년 4월 루이 2세가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조약에 문제가 생겼다.[8] 노르만족(바이킹)이 해안가를 통해 약탈을 하자 파리 주교 고즐린(Gauzlin)은 도시의 보호자로 청년 루트비히 3세를 지명하고 그를 서프랑크 왕국으로 초청했다. 청년 루트비히 3세는 작센과 프랑켄에서 군대를 일으켜 서프랑크를 침공했고, 베르덩에 도착하자 서프랑크의 루이 3세와 샤를로망 3세는 로타링기아를 청년 루트비히에게 주겠다고 약속했다. 서프랑크 사신으로부터 이 소식을 들은 청년 루트비히는 군대를 돌려 귀환했다.

당시 서프랑크 왕국은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879년 10월에는 서프랑크의 유력 귀족이자 리첼다의 남동생인 프로방스보소 5세가 스스로 프로방스와 부르군트의 왕으로 선언했고[8], 바이킹의 공격도 다시 시작되었다. 이러한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서프랑크의 루이 3세와 샤를로망 3세, 동프랑크의 청년 루트비히는 전쟁을 중단하고 공동 대응하기로 결정했다. 880년 2월 서프랑크의 루이 3세와 샤를로망 3세, 동프랑크의 청년 루트비히, 알레만의 카를 3세는 아시네의 리베몽에서 만났다. 이 조약에서 루이 3세와 샤를로망 3세는 메르센 조약 이후 분할된 로타링기아의 소유권이 동프랑크의 청년 루트비히에게 있음을 다시 확인했다. 이러한 동맹을 통해 서프랑크의 루이 3세와 샤를로망 3세는 프로방스의 보소 5세를 상대로 거래를 할 수 있게 되었다.

879년 서프랑크 왕 루이 2세가 사망하고[4], 그의 장남과 차남인 루이 3세와 카를로만 2세가 공동으로 왕위를 계승했다.[5] 로트링겐 (로렌) 지방 서부 (구 로타링기아의 일부)는 루이 3세의 몫이었지만, 880년 2월에 체결된 이 조약에서 서프랑크 왕국의 루이 3세는 로트링겐 서부를 포기하고, 대신 동프랑크가 영유하게 되었다.[6] 서프랑크 제후들의 반항과, 동프랑크 왕 루트비히 3세의 불안정한 움직임이 이러한 영토 할양의 이유로 여겨진다.[7]

3. 조약 체결

880년 2월 서프랑크의 루이 3세와 샤를로망 3세, 동프랑크의 청년 루트비히는 아시네의 리베몽에서 만나 조약을 체결했다.[8] 이 조약에서 루이 3세와 샤를로망 3세는 메르센 조약 이후 분할된 로타링기아의 소유권이 동프랑크의 청년 루트비히에게 있음을 재확인했다.[8] 서프랑크는 로트링겐 서부를 포기하고, 대신 동프랑크가 영유하기로 결정했다.[6]

서프랑크 제후들의 반항과, 동프랑크 왕 루트비히 3세가 불안정한 움직임을 보인 것이 할양의 이유로 여겨진다.[7] 삼자 동맹을 맺은 뒤 서프랑크 왕국의 루이 3세와 샤를로망 3세는 프로방스보소 5세를 상대로 거래, 요구를 할 수 있게 되었다.[8]

4. 조약의 영향

서프랑크의 루이 3세와 카를로만 2세는 리베몽 조약 체결 후인 880년부터 881년에 걸쳐 프로방스 왕 보소를 진압하는 데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7] 이 조약으로 독일프랑스 사이의 국경선이 형성되었고, 이 국경선은 중세 시대까지 유지되었다. 그 뒤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을 통해 현재의 독일-오스트리아, 이탈리아의 국경이 확정되었다.

참조

[1] 서적 The Causes of War: Volume 1: 3000 BCE to 1000 CE https://books.google[...] Bloomsbury Publishing 2013-10-16
[2] 서적 History and politics in late Carolingian and Ottonian Europe: The Chronicle of Regino of Prüm and Adalbert of Magdeburg https://books.google[...] Manchester University Press 2013-01-01
[3] 서적 The Encyclopedia of Diplomacy, 4 Volume Set https://books.google[...] John Wiley & Sons 2018-04-30
[4] 간행물 2023-05-20
[5] 간행물 2023-05-20
[6] 간행물 2023-05-20
[7] 간행물 2023-05-20
[8] 문서 보소 5세의 자립은 그의 장모이자 이탈리아인 루트비히 2세의 처 엔젤베르가의 지지 역시 작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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