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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렌 공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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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렌 공국은 로타르 2세가 지배하던 로타링기아 왕국에서 유래되었으며, 프랑스와 독일 간의 영토 분쟁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959년 상하 로렌으로 분할되었으며, 상 로렌은 모젤 공국으로 불리다가 15세기 이후 로렌으로 불렸다. 1766년 프랑스에 병합되었으며, 이후 알자스-로렌 지역과 함께 독일과 프랑스 간의 귀속 분쟁을 겪었다. 로렌 공국 지역에는 로렌프랑코니아어와 로렌어가 사용되었으며, 클로드 로렌 등 많은 예술가를 배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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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자스-로렌은 프랑스 북동부에 위치한 역사적 지역으로, 신성 로마 제국, 프랑스, 독일 제국 등을 거쳐 현재는 프랑스 영토이며, 유럽 의회 본부가 있는 지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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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렌 공국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공식 명칭로렌 공국
현지 명칭

표어("모든 것을 위한 하나" 또는 "모두를 위한 하나")
국가공국
1400년경 신성 로마 제국 내의 로렌 공국 (파란색)
1400년경 신성 로마 제국 내의 로렌 공국 (파란색)
수도낭시
데모님로렌인
종교로마 가톨릭교회
역사
성립로타링기아 왕국 분할 (959년)
동프랑크 왕국의 일부 (959년–962년)
신성 로마 제국의 제국령 (962년–1766년)
사건오버라인 관구(:en:Upper Rhenish Circle) 가입 (1500년)
프랑스의 침공 및 로렌 공국 점령 (1643년)
프랑스의 침공 및 30년간 점령 (1670년)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중 프랑스의 침공 (1702년)
해체프랑스 왕국에 합병 (1766년)
정치
정치 체제공국
공작초대: 프레데리크 1세 드 바르 (959년–978년)
마지막: 스타니스와프 레슈친스키 (1737년–1766년)
현재
현재 국가벨기에
프랑스
독일
룩셈부르크
깃발 및 문장
로렌의 깃발 (1300–1766)
로렌의 깃발 (1300–1766)
로렌 가문의 문장 (1300–1766)
로렌 가문의 문장 (1300–1766)

2. 역사

로렌 공국의 역사는 복잡하고 다양한 변화를 겪었다.

마지막 로렌 공작 프란츠 슈테판의 초상화, 은화 10 파올리, 그는 토스카나 대공국을 상속받았다.

  • 로타링기아 왕국: 로렌 공국의 전신인 로타링기아 왕국은 카롤링거 왕조의 독립 왕국이었다. 843년 베르됭 조약으로 중프랑크 왕국이 세워졌고, 855년 로타르 1세가 사망하면서 그의 아들 로타르 2세가 북쪽 지역을 차지하여 로타링기아 왕국이 되었다. 이 왕국은 남쪽 부르고뉴 백국에서 북해까지 이르는 넓은 영토였다. 프랑스에서는 로렌, 독일에서는 로트링겐으로 알려졌는데, 이는 "로타르에게 속하는 땅"이라는 의미이다. 로타르 2세 사후, 영토는 메르센 조약(870년)과 리베몽 조약(880년)을 거쳐 동프랑크 왕국에 속하게 되었다. 911년 동프랑크 카롤링거 왕조가 단절되면서 서프랑크 왕국에 속했다가, 925년 독일 왕국 하인리히 1세에게 정복되었다. 942년 루이 4세는 로타링기아 왕국에 대한 권리를 포기했다.

  • 오버로트링겐 공국 (상로렌 공국): 953년 오토 1세는 그의 형제 브룬 대공을 로타링기아 공작으로 임명했다. 959년 브룬은 공국을 하(下) 로트링겐과 상(上) 로트링겐으로 나누었고, 이 분할은 965년 그의 죽음으로 영구적이 되었다. 상 로트링겐은 모젤 공국으로도 불렸으며, 초대 공작은 프리드리히 1세였다.


1000년 경 분열된 로타링기아 왕국
파란색: 알자스를 925년에 수에비에게 넘겨주었다
오렌지색: 오버로트링겐은 928년 이후
초록색: 니더로트링겐은 977년 이후

  • 분열과 통합: 하(下) 로트링겐은 여러 소규모 지역으로 분열되었고, 브라반트가 "로티에르 공작" 칭호를 유지했다. 르네 당주가 모젤 공국을 소유하면서 "로트링겐 공국"이 다시 사용되었고, 이전의 상 로트링겐은 "오버로트링겐 공국"으로 불렸다. 룩셈부르크 백국, 트리어 대주교국, 바르 백국, 베르됭, 메츠, 툴 (삼 주교국) 등 여러 영토가 이미 분리된 상태였다.[5]


1618-1648년 로렌


로트링겐 공국의 지도(1756년), 현재 행정 구역에 따른 코뮌들을 보여주고 있다.


오늘날의 프로뱅스를 포함한 로렌의 지도(1756년).

  • 프랑스의 지배와 독립: 17세기 프랑스는 로트링겐을 탐내기 시작했다. 30년 전쟁 중 리슐리외 추기경은 1641년 로트링겐을 차지했다.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 프랑스는 로트링겐에서 손을 뗐지만, 알자스 일부를 차지했다. 1670년 프랑스는 다시 침략하여 카를 5세를 망명하게 했다. 프랑스는 30년간 지배했으나 1697년 레이스베이크 조약으로 로트링겐을 포기했다.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동안 낭시 등 일부가 점령되었지만 레오폴트 1세는 뤼네빌 성에서 통치를 이어갔다.[5]




로트링겐 공국의 문장 (1697년)

2. 1. 로타링기아 왕국

로트링겐 공국의 전신인 로타링기아 왕국은 로타르 2세가 지배하던 카롤링거계의 독립 왕국이었다. 이 영역은 카롤링거 제국이 경견왕 루트비히의 세 아들들에게 분할된 베르됭 조약을 통해 843년에 세워진 중프랑크 왕국의 일부였다. 중프랑크 왕국은 로타르 1세에게 할당되었다. 855년 그의 죽음으로, 왕국은 세 개의 지역으로 더 분열되었고 그 중 하나는 그의 아들인 로타르 2세가 북쪽 지역을 차지했다. 그의 왕국은 남쪽으로는 부르고뉴 백국에서 북해까지 뻗어있는 거대한 영토를 이루게 되었다. 프랑스에서 이 지역을 로렌이라고 아는 반면에 독일에서는 로트링겐(Lothringen)이라고 알려지게 되었다. 한때 로렌에서 사용된 알레만어에서 접미사 잉겐(-ingen)은 땅을 의미하며, 비유적인 의미에서 로트링겐은 "로타르에게 속하는 땅"이라고 해석된다.

로타르 2세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면서, 그의 영토는 870년 메르센 조약으로 동프랑크 왕국서프랑크 왕국으로 나뉘었고 마침내 880년 리베몽 조약으로 동프랑크 왕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911년 루트비히 유아왕의 죽음으로 동프랑크 카롤링거 왕조가 단절되면서 로타링기아 왕국은 다시 한번 서프랑크 왕국에 속하게 되었지만 925년 독일 왕국하인리히 1세에 의해 정복되었다. 942년에 루이 4세는 그의 경쟁 상대 위그 르 그랑과의 분쟁 악화로 로타링기아 왕국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하였다.

2. 2. 오버로트링겐 공국 (상로렌 공국)

953년, 오토 1세는 그의 형제 브룬 대공을 로타링기아 공작으로 임명하였다. 959년 브룬은 공국을 상(上) 로트링겐과 하(下) 로트링겐으로 나누었으며, 이 분할은 965년 그의 죽음으로 영구적이게 되었다. 오버로트링겐 공국은 하(下) 로트링겐 보다 강 상류에 있었고, 내륙이자 남쪽에 위치했었다. 오버로트링겐 공국은 처음에는 헌장과 서술 자료에서 '''모젤 공국'''이라고 표기되었으며, 이곳의 공작도 모젤 공작(''dux Mosellanorum'')이었다. 공식적 기록에서 상로타링기아(Lotharingia Superioris)라는 말의 사용은 15세기 인근 이후에 시작되었다. 초대 공작이자 브룬의 대리인은 브룬의 자매 하드비히 폰 작센의 사위 프리드리히 1세였다.

니더로트링겐 공국은 몇개의 소규모 지역들로 분열되었고 브라반트 공작이 지녔던 "로티에르 공작"이라는 칭호만이 남게 되었다. 모젤 공국이 르네 당주의 소유로 넘어간 후, 다시 한번 "로트링겐 공국"이 채택되었으며, 회고적으로 "오버로트링겐 공국"이라 불렸다. 이 시기 일부 영토들은 룩셈부르크 백국, 트리어 대주교국, 바르 백국, 베르됭과 메츠, 툴 주교국의 삼 주교국등으로 이미 나뉜 상태였다.

신성 로마 제국프랑스 왕국 사이의 국경은 중세 내내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곳으로 남았었다. 1301년 앙리 3세 드 바르가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에게서 그의 영지(바루아 무방, Barrois mouvant)의 서쪽을 받게 되었다. 1475년 부르고뉴 공작 용담공 샤를이 로트링겐 공국에 전쟁을 벌였지만 결국엔 패배당하고 1477년 낭시 전투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1552년 샹보르 조약에서 반란에 가담한 개신교 제후 중 하나인 작센 선제후 모리츠 폰 작센은 그를 지원해준 대가로 프랑스 국왕 앙리 2세에게 삼 주교국을 넘겨주었다.

17세기 프랑스 국왕은 로트링겐을 탐내기 시작했다. 30년 전쟁 동안 신성 로마 제국의 권위가 하락하는 와중에, 프랑스의 수상 리슐리외 추기경은 1641년에 로트링겐을 차지하라 설득했다. 프랑스는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 다시 로트링겐에서 손을 땠지만, 로트링겐 동부에 위치한 알자스의 일부 지역들을 차지했다. 1670년에 프랑스는 침략을 재개하여, 로트링겐 공작 카를 5세를 빈으로 망명가게 했다. 카를은 그곳에서 합스부르크 가문과 깊은 연을 맺게 되었다. 프랑스는 30년간 지배를 해왔으나 1697년9년 전쟁을 종식시킨 레이스베이크 조약을 통해 로트링겐을 포기하고 만다.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동안 수도 낭시를 포함한 로트링겐의 일부가 프랑스에 점령됐지만 로트링겐 공작 레오폴트 1세가 뤼네빌 성에서 통치를 이어갔다.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 이후인 1737년 로트링겐은 합스부르크 가문과 보데몽의 로트링겐 가문과 프랑스 사이의 동의 일부였다. 로트링겐은 프랑스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에서 러시아와 오스트리아의 지원을 받는 계승자에게 패배한 옛 폴란드의 군주이자 루이 15세의 장인 스타니스와프 레슈친스키에게 주어졌다. 로트링겐 공작 프란츠 슈테판은 황제의 딸 마리아 테레지아와 약혼을 하여, 최근 후계자를 두지 못하여 대가 끊긴 메디치 가문이 통치하던 토스카나 대공국이 주어졌다. 프랑스는 또한 1713년 국사조칙하에서 마리아 테레지아의 합스부르크 가문 상속을 지원하기로 약속했다. 레슈친스키는 그가 사망시에 로트링겐을 프랑스에 주기로 약속한 뒤에 이곳을 받았다. 1766년 2월 23일에 스타니스와프가 사망하자, 로트링겐은 프랑스에 합병되어 프랑스 정부에 의해 행정 구역으로 개편되었다.

2. 3. 근세와 현대

959년 브루노 대공은 로트링겐 공국을 상(上) 로트링겐과 하(下)로트링겐으로 나누었고, 이 분할은 965년 그의 죽음으로 영구적이 되었다. 상 로트링겐은 강 상류 지역으로, 내륙이자 남쪽에 위치했다. 상 로렌은 처음에는 모젤 공작령으로 명명되었으며, 공작은 ''dux Mosellanorum''이었다.[5]

하 로트링겐은 여러 작은 영토로 분열되었고, 브라반트가 소유한 "로티에 공작" 칭호만 남았다. 상 로렌이 앙주 르네의 소유가 되었을 때, 룩셈부르크 백국, 트리어 대주교국, 바르 백국, 베르됭, 메츠 및 툴의 "세 주교령" 등 여러 영토가 이미 분리된 상태였다.[5]

신성 로마 제국프랑스 왕국 사이의 국경은 중세 내내 비교적 안정적이었다. 1301년, 앙리 3세 드 바르는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에게서 자신의 영토 서부(''Barrois mouvant'')를 봉토로 받았다. 1475년, 부르고뉴 공작 용담공 샤를이 로트링겐 공국을 공격했으나, 1477년 낭시 전투에서 패배하여 사망했다. 1552년 샹보르 조약에서, 작센 선제후 모리스 등 반란을 일으킨 프로테스탄트 제후들은 프랑스 국왕 앙리 2세에게 세 주교령을 할양했다.[5]

30년 전쟁 (1618-1648) 동안 제국의 권위가 약화되자, 프랑스는 1634년에 로트링겐 공작령을 점령했고, 로렌 공작 샤를 4세가 복위된 1661년까지 유지했다. 1670년, 프랑스는 다시 침략하여 샤를을 망명시켰고, 그의 조카이자 상속자인 로렌 공작 샤를 5세 (1643–1690)는 합스부르크 가문을 위해 평생을 헌신했다. 프랑스는 9년 전쟁을 종결하는 1697년 레이스베이크 조약에서 공작령을 반환했고, 샤를의 아들 로렌 공작 레오폴드 (1679–1729)가 공작이 되어 '레오폴드 선왕'으로 알려졌다. 1701–1714년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서 낭시를 포함한 로렌의 일부는 다시 프랑스에 점령되었지만, 레오폴드는 뤼네빌 성에서 통치를 이어갔다.[5]

1737년,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 이후, 프랑스, 합스부르크 가문, 로렌-바데몽 가문 간의 협약에 따라 로트링겐 공작령은 스타니스와프 레슈친스키에게 할당되었다. 그는 폴란드의 전 국왕이자 프랑스 국왕 루이 15세의 장인이었고, 러시아오스트리아의 지원을 받는 아우구스투스 3세에게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에서 패배했다. 로렌 공작 프란츠 1세는 황제의 딸인 마리아 테레지아와 결혼할 예정이었으며, 후계자 없이 사망한 메디치 가문의 토스카나 대공국으로 보상받았다. 프랑스는 1713년 국사조칙에 따라 합스부르크 가문의 상속자로서 마리아 테레지아를 지지할 것을 약속했다. 레슈친스키는 사망 시 프랑스 왕실로 귀속된다는 조건으로 로렌을 받았다. ''로렌 공작'' 칭호는 스타니스와프에게 주어졌지만, 프란츠 스테판도 유지했으며, 그의 후계자들(합스부르크-로렌 가문)의 칭호에 나타났다. 1766년 2월 23일 스타니스와프가 사망하자, 로렌은 프랑스에 병합되었고, 레지옹으로 재편되었다.[5]

2. 4. 프랑스와 독일 사이의 분쟁

953년, 독일 왕 오토 1세는 그의 동생 브룬 대공을 로타링기아 공작으로 임명하였다. 959년 브룬은 공국을 상(上) 로트링겐과 하(下)로트링겐으로 나누었으며, 이 분할은 965년 그의 죽음으로 영구적이게 되었다. 상(上) 로트링겐 공국은 강 상류, 즉 내륙이자 남쪽에 위치했다. 상 로트링겐 공국은 처음에는 헌장과 서술 자료에서 '''모젤 공국'''으로 표기되었으며, 이곳의 공작도 모젤 공작(''dux Mosellanorum'')이었다.

하(下) 로트링겐 공국은 몇 개의 소규모 지역들로 분열되었고 브라반트 공작이 지녔던 "로티에르 공작"이라는 칭호만이 남게 되었다. 모젤 공국이 르네 당주의 소유로 넘어간 후, 다시 한번 "로트링겐 공국"이 채택되었으며, 회고적으로 "오버로트링겐 공국"이라 불렸다. 이 시기 룩셈부르크 백국, 트리어 대주교국, 바르 백국, 베르됭과 메츠, 툴 주교국의 삼 주교국등 일부 영토들은 이미 나뉜 상태였다.

신성 로마 제국프랑스 왕국 사이의 국경은 중세 내내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곳으로 남았었다. 1301년 앙리 3세 드 바르가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에게서 그의 영지(바루아 무방, Barrois mouvant)의 서쪽을 받게 되었다. 1475년 부르고뉴 공작 용담공 샤를이 로트링겐 공국에 전쟁을 벌였지만 결국엔 패배당하고 1477년 낭시 전투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1552년 샹보르 조약에서 반란에 가담한 개신교 제후 중 하나인 작센 선제후 모리츠 폰 작센은 그를 지원해준 대가로 프랑스 국왕 앙리 2세에게 삼 주교국을 넘겨주었다.

17세기 프랑스 국왕은 로트링겐을 탐내기 시작했다. 30년 전쟁 동안 신성 로마 제국의 권위가 하락하는 와중에, 프랑스의 수상 리슐리외 추기경은 1641년에 로트링겐을 차지하라 설득했다. 프랑스는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 다시 로트링겐에서 손을 땠지만, 로트링겐 동부에 위치한 알자스의 일부 지역들을 차지했다. 1670년에 프랑스는 침략을 재개하여, 로트링겐 공작 카를 5세를 빈으로 망명가게 했다. 카를은 그곳에서 합스부르크 가문과 깊은 연을 맺게 되었다. 프랑스는 30년간 지배를 해왔으나 1697년에 9년 전쟁을 종식시킨 레이스베이크 조약을 통해 로트링겐을 포기하고 만다.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동안 수도 낭시를 포함한 로트링겐의 일부가 프랑스에 점령됐지만 로트링겐 공작 레오폴트 1세가 뤼네빌 성에서 통치를 이어갔다.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 이후인 1737년 로트링겐은 합스부르크 가문과 보데몽의 로트링겐 가문과 프랑스 사이의 동의 일부였다. 로트링겐은 프랑스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에서 러시아와 오스트리아의 지원을 받는 계승자에게 패배한 옛 폴란드의 군주이자 루이 15세의 장인 스타니스와프 레슈친스키에게 주어졌다. 로트링겐 공작 프란츠 슈테판은 황제의 딸 마리아 테레지아와 약혼을 하여, 최근 후계자를 두지 못하여 대가 끊긴 메디치 가문이 통치하던 토스카나 대공국이 주어졌다. 프랑스는 또한 1713년 국사조칙하에서 마리아 테레지아의 합스부르크 가문 상속을 지원하기로 약속했다. 레슈친스키는 그가 사망시에 로트링겐을 프랑스에 주기로 약속한 뒤에 이곳을 받았다. 1766년 2월 23일에 스타니스와프가 사망하자, 로트링겐은 프랑스에 합병되어 프랑스 정부에 의해 행정 구역으로 개편되었다.

3. 문화

이 지역에는 2개의 지역어가 남아 있다.

로렌 프랑코니아어는 프랑스어로 ''francique프랑스어'' 또는 ''platt (lorrain)프랑스어''로 알려져 있으며, 이 지역 북부의 소수 민족이 사용하는 서중부 독일어 방언이다. 이는 이웃한 알자스어와는 다르지만, 종종 혼동되기도 한다. 두 언어 모두 공식적인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

로렌어는 그 지역 남부의 소수민족이 사용하는 로망스 방언이다.

이 공국은 클로드 로랭, 조르주 드 라 투르, 장 르클레르를 포함한 많은 중요한 화가들을 배출했다.

프랑스의 언어(브르타뉴어, 아르피탄어, 옥시타니아어, 알자스어, 카탈루냐어, 바스크어, 플라망어)와 마찬가지로 로렌어와 로렌 프랑코니아어는 19세기와 20세기에 의무 교육이 도입되면서 프랑스어에 의해 대부분 대체되었다.

음식과 요리는 키슈, 미라벨 자두, 바바 오 럼, 베르가모트, 마카롱, 마들렌을 포함하는 로렌과 관련이 있다.

참조

[1] 서적 Histoire de Lorraine Leseur 1745
[2] 서적 Erneuertes und vermehrtes Wappenbuch... Adolph Johann Helmers
[3] 서적 Erneuertes und vermehrtes Wappenbuch... Adolph Johann Helmers
[4] 서적 Histoire de Lorraine Leseur 1745
[5] 서적 Erneuertes und vermehrtes Wappenbuch... Adolph Johann Helm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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