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스트팔렌 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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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베스트팔렌 조약은 1648년 30년 전쟁과 80년 전쟁의 종식을 위해 체결된 일련의 조약들을 통칭한다. 뮌스터와 오스나브뤼크에서 체결된 이 조약은 신성 로마 제국, 프랑스, 스웨덴을 비롯한 여러 국가가 참여했으며, 프랑스는 알자스 지역을 확보하고 스웨덴은 발트해 지역의 영향력을 강화했다. 베스트팔렌 조약은 각 제후의 종교 선택의 자유를 보장하고, 신성 로마 제국 내 영방의 주권을 인정함으로써 유럽의 정치 지형을 변화시켰다. 이로 인해 신성 로마 제국의 통일성은 약화되었으며, 근대 국제법의 기초가 마련되었다고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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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팔렌 조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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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조약 정보 | |
명칭 | 베스트팔렌 조약 (Treaties of Osnabrück and Münster) |
다른 이름 | 웨스트팔리아 조약 ヴェストファリア 조약 삼십년 전쟁 강화 조약 |
원어 명칭 | |
체결 장소 | 오스나브뤼크, 뮌스터 (베스트팔렌, 신성 로마 제국) |
체결일 | 1648년 10월 24일 |
조인 국가 수 | 109 |
사용 언어 | 라틴어 |
조약 내용 | |
주요 내용 | 30년 전쟁 종결 80년 전쟁 종결 |
조약 영향 | |
국제 관계 | 주권 국가 개념 확립 국제 관계, 외교, 대외 정책에 영향 |
역사적 의미 | 유럽 역사 및 국제 관계의 중요한 전환점 국가 간 관계의 새로운 질서 형성 |
추가 정보 | |
관련 링크 | 베스트팔렌 조약 전역 (역사 문서 번역 프로젝트) |
2. 조약 체결의 배경
유럽은 30년 전쟁과 겹치는 80년 전쟁으로 인해 막대한 인명 및 재정적 손실을 입었다.[6] 80년 전쟁은 개신교가 다수인 네덜란드 공화국이 독립을 위해 잉글랜드의 지원을 받아 가톨릭 세력이 우세한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맞선 전쟁이다.[6] 30년 전쟁은 신성 로마 제국을 중심으로 벌어진 유럽 종교 전쟁 중 가장 치명적인 전쟁이었다.[6] 4단계로 진행된 이 전쟁에는 가톨릭 동맹 또는 신교 동맹(후에 하일브론 동맹)에 가담한 많은 국내외 세력이 참여했다.[6] 프라하 조약(1635년)으로 전쟁의 종교적 측면이 대부분 종식되었고, 프랑스-합스부르크 라이벌 관계가 부각되었다.[6] 30년 전쟁에서만 450만 명에서 800만 명에 달하는 사망자가 발생하고 수십 년간 끊임없는 전쟁이 지속되면서 평화의 필요성이 점점 더 명확해졌다.[6]
2. 1. 30년 전쟁
2. 2. 80년 전쟁
3. 조약 체결 장소
프랑스와 합스부르크가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간의 평화 협상은 1636년 쾰른에서 시작되었으나, 프랑스의 리슐리외 추기경이 모든 동맹국을 포함시킬 것을 주장하여 막혔다.[7] 1641년 12월 함부르크에서 스웨덴, 프랑스, 신성 로마 제국은 예비 평화를 협상했다.[8] 주요 평화 협상은 베스트팔렌의 이웃 도시인 뮌스터와 오스나브뤼크에서 이루어졌으며, 두 도시 모두 중립지역이자 비무장지대로 유지되었다.[8]
뮌스터에서는 신성 로마 제국과 프랑스, 그리고 네덜란드 공화국과 스페인 간의 협상이 이루어졌다.[9] 1535년 재가톨릭화 이후 뮌스터는 엄격한 단일 종교 공동체로, 로마 가톨릭 예배만 허용되었고, 칼뱅주의와 루터교는 금지되었다. 1648년 1월 30일에는 80년 전쟁을 종식시키는 뮌스터 조약이 체결되었으나,[9] 이 조약은 베스트팔렌 조약의 일부가 아니었다.[10]
1636년 프랑스와 합스부르크 제국 사이 평화 협상은 쾰른에서 이루어질 예정이었으나 프랑스가 막았다.[46] 프랑스의 리슐리외는 신성로마제국내의 국가를 포함하여 자국 동맹들을 모두 협상에 끌어들이길 원했다.[46] 1641년 함부르크 조약에서 스웨덴, 프랑스, 신성 로마 제국은 예비 평화를 협상했다.[8] 신성로마제국과 스웨덴은 쾰른에서 예비 협상을 선언하고, 함부르크 조약이 전체 평화 협정의 예비 협상임을 알렸다.[46]
전체 평화 협정은 베스트팔렌의 뮌스터와 오스나브뤼크 시에서 진행되었다. 두 도시는 평화협상을 위해 중립 및 비무장 지역이 되었다.[46] 종교개혁이후 루터교회가 뿌리내린 스웨덴은 회담 장소로 오스나브뤼크를 선호하여, 양측의 각 동맹을 포함한 신성로마제국과의 평화 협상은 오스나브뤼크에서 열렸다.[46]
오스나브뤼크는 루터교회와 로마 가톨릭이 공존하는 도시였다.[46] 루터교회 시민과 루터교회만 참여한 시 의회 및 오스나브뤼크 주교령의 성직자와 로마 가톨릭 신자들이 다니는 교회가 루터교회와 로마 가톨릭에 각각 두 곳씩 있었다.[46] 1628년에서 1633년 사이 오스나브뤼크는 가톨릭 제후연맹과 가톨릭 주교령 바르텐베르크 백작 프란츠 빌헬름군의 지배하에 있었으며, 반종교개혁이 실시되어 여러 루터교회 시민들이 추방되었다.[46] 이후 스웨덴군에 점령되었는데, 이때 오스나브뤼크의 로마 가톨릭 신자들은 쫓겨나지 않았으나 스웨덴군에 군세(軍稅)로 크게 고통받았다.[46] 때문에 오스나브뤼크는 중립 및 비무장 지대로 선포되어 크게 안심하게 되었다.[46]
3. 1. 뮌스터
프랑스와 합스부르크가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간의 평화 협상은 1636년 쾰른에서 시작되었으나, 프랑스의 리슐리외 추기경이 모든 동맹국을 포함시킬 것을 주장하여 막혔다.[7] 1641년 12월 함부르크에서 스웨덴, 프랑스, 신성 로마 제국은 예비 평화를 협상했다.[8] 주요 평화 협상은 베스트팔렌의 이웃 도시인 뮌스터와 오스나브뤼크에서 이루어졌으며, 두 도시 모두 중립지역이자 비무장지대로 유지되었다.[8]뮌스터에서는 신성 로마 제국과 프랑스, 그리고 네덜란드 공화국과 스페인 간의 협상이 이루어졌다.[9] 1535년 재가톨릭화 이후 뮌스터는 엄격한 단일 종교 공동체로, 로마 가톨릭 예배만 허용되었고, 칼뱅주의와 루터교는 금지되었다. 1648년 1월 30일에는 80년 전쟁을 종식시키는 뮌스터 조약이 체결되었으나,[9] 이 조약은 베스트팔렌 조약의 일부가 아니었다.[10]
3. 2. 오스나브뤼크
1636년 프랑스와 합스부르크 제국 사이 평화 협상은 쾰른에서 이루어질 예정이었으나 프랑스가 막았다.[46] 프랑스의 리슐리외는 신성로마제국내의 국가를 포함하여 자국 동맹들을 모두 협상에 끌어들이길 원했다.[46] 1641년 12월 함부르크에서 스웨덴, 프랑스, 신성 로마 제국은 예비 평화를 협상했다.[8] 신성로마제국과 스웨덴은 쾰른에서 예비 협상을 선언하고, 함부르크 조약이 전체 평화 협정의 예비 협상임을 알렸다.[46]전체 평화 협정은 베스트팔렌의 뮌스터와 오스나브뤼크 시에서 진행되었다. 두 도시는 평화협상을 위해 중립 및 비무장 지역이 되었다.[46] 종교개혁이후 루터교회가 뿌리내린 스웨덴은 회담 장소로 오스나브뤼크를 선호하여, 양측의 각 동맹을 포함한 신성로마제국과의 평화 협상은 오스나브뤼크에서 열렸다.[46]
오스나브뤼크는 루터교회와 로마 가톨릭이 공존하는 도시였다.[46] 루터교회 시민과 루터교회만 참여한 시 의회 및 오스나브뤼크 주교령의 성직자와 로마 가톨릭 신자들이 다니는 교회가 루터교회와 로마 가톨릭에 각각 두 곳씩 있었다.[46] 1628년에서 1633년 사이 오스나브뤼크는 가톨릭 제후연맹과 가톨릭 주교령 바르텐베르크 백작 프란츠 빌헬름군의 지배하에 있었으며, 반종교개혁이 실시되어 여러 루터교회 시민들이 추방되었다.[46] 이후 스웨덴군에 점령되었는데, 이때 오스나브뤼크의 로마 가톨릭 신자들은 쫓겨나지 않았으나 스웨덴군에 군세(軍稅)로 크게 고통받았다.[46] 때문에 오스나브뤼크는 중립 및 비무장 지대로 선포되어 크게 안심하게 되었다.[46]
4. 외교 사절단
베스트팔렌 조약 협상에는 109개국 외교 사절단이 참여했지만, 이들이 한 번에 모인 적은 없었다. 1646년 1월에서 1647년 7월 사이에 가장 많은 외교관들이 모였다.[12] 16개 유럽 국가와 66개의 제국령에서 사절을 파견하여 총 140개 제국령을 대표했으며, 27개 이익 집단의 사절들은 총 38개 집단의 이익을 대변했다.[47][13]
프랑스 사절단은 앙리 2세 오를레앙 롱게비유 공이 이끌었으며, 외교관 클로드 다보와 아벨 세르비엥이 참여했다.[13] 스웨덴은 요한 옥센셰르나와 요한 아들레르 살비우스를 파견했다.[47] 신성 로마 제국 사절단장은 막시밀리안 폰 트라우트만스도르프 백작이었으며, 뮌스터에서는 요한 루트비히 폰 나사우-아데마르와 이삭 볼마르가, 오스나브뤼크에서는 요한 막시밀리안 폰 람베르크와 요한 크라네가 그를 보좌했다.[47]
스페인은 가스파르 데 브라카몬테 이 구스만을 필두로, 디에고 데 사아베드라 파하르도와 베르나르디노 데 레볼레도를 파견했다.[47] 교황 특사 파비오 치기와 베네치아 공화국 특사 알비세 콘타리니는 중재자로 활동했다.[47] 네덜란드 공화국은 아드리아안 파우 등 8명의 사절단을 보냈고,[47] 구스위스 연방은 요한 루돌프 베트슈타인을 대표로 파견했다.[47]
신성 로마 제국의 여러 제국령들도 사절단을 파견했다. 브란덴부르크는 요아힘 프리드리히 폰 블루멘탈 등 여러 대표가 있었고, 구 스위스 연방은 요한 루돌프 베트슈타인이 대표였다.[47]
전쟁의 주요 당사자 중 하나인 스페인은 프랑스와 주로 싸웠다.[35] 회의에 참여한 주권 국가는 12개국에 불과했다.[36] 네덜란드 공화국은 스페인과의 독립 전쟁을 치르면서 회의에 참여하여, 스페인과 뮌스터 조약을 맺고 독립을 인정받았다.[37]
유럽 여러 국가는 30년 전쟁에 참전하지 않은 국가를 포함하여 어떤 형태로든 회의에 참가했다.[34] 참가자 중 다수는 신성 로마 제국 내부의 영주, 유력 성직자, 도시로 구성된 제국 제후들이었다.[37] 베네치아 공화국과 로마 교황은 중재자로서 참가했다.[38] 회의에 사절을 파견하지 않은 유력 국가는 청교도 혁명 중이었던 잉글랜드 왕국, 종교가 달랐던 러시아 제국·오스만 제국뿐이었다.[39]
외교는 군주·의회 등 통치권을 가진 개인·단체의 자격으로 이루어졌으며,[34] 각국은 사절을 파견했고, 군주 등 본인은 참가하지 않았다.[34] 회의에 참여한 사절은 총 148명이었다.[40] 모든 참가국이 조약 서명에 참여한 것은 아니다.[41] 조약은 서명에 참여하지 않은 국가도 이행 의무를 지는 것으로 했다.[42]
프랑스와 스웨덴은 동맹이었지만, 강화 협상에서는 이익 분배를 둘러싼 라이벌이었다.[33] 신성 로마 황제는 두 나라를 대립시켜 희생을 최소화하려 했다.[33]
4. 1. 주요 참가국
베스트팔렌 조약 협상에는 109개국 외교 사절단이 참여했지만, 이들이 한 번에 모인 적은 없었다. 1646년 1월에서 1647년 7월 사이에 가장 많은 외교관들이 모였다.[12] 16개 유럽 국가와 66개의 제국령에서 사절을 파견하여 총 140개 제국령을 대표했으며, 27개 이익 집단의 사절들은 총 38개 집단의 이익을 대변했다.[47][13]프랑스 사절단은 앙리 2세 오를레앙 롱게비유 공이 이끌었으며, 외교관 클로드 다보와 아벨 세르비엥이 참여했다.[13] 스웨덴은 요한 옥센셰르나와 요한 아들레르 살비우스를 파견했다.[47] 신성 로마 제국 사절단장은 막시밀리안 폰 트라우트만스도르프 백작이었으며, 뮌스터에서는 요한 루트비히 폰 나사우-아데마르와 이삭 볼마르가, 오스나브뤼크에서는 요한 막시밀리안 폰 람베르크와 요한 크라네가 그를 보좌했다.[47]
스페인은 가스파르 데 브라카몬테 이 구스만을 필두로, 디에고 데 사아베드라 파하르도와 베르나르디노 데 레볼레도를 파견했다.[47] 교황 특사 파비오 치기와 베네치아 특사 알비세 콘타리니는 중재자로 활동했다.[47] 네덜란드 공화국은 아드리아안 파우 등 8명의 사절단을 보냈고,[47] 구스위스 연방은 요한 루돌프 베트슈타인을 대표로 파견했다.[47]
신성 로마 제국의 여러 제국령들도 사절단을 파견했다. 브란덴부르크는 요아힘 프리드리히 폰 블루멘탈 등 여러 대표가 있었고, 구 스위스 연방은 요한 루돌프 베트슈타인이 대표였다.[47]
전쟁의 주요 당사자 중 하나인 스페인은 프랑스와 주로 싸웠다.[35] 회의에 참여한 주권 국가는 12개국에 불과했다.[36] 네덜란드 연합 공화국은 스페인과의 독립 전쟁을 치르면서 회의에 참여하여, 스페인과 뮌스터 조약을 맺고 독립을 인정받았다.[37]
유럽 여러 국가는 30년 전쟁에 참전하지 않은 국가를 포함하여 어떤 형태로든 회의에 참가했다.[34] 참가자 중 다수는 신성 로마 제국 내부의 영주, 유력 성직자, 도시로 구성된 제국 제후들이었다.[37] 베네치아 공화국과 로마 교황은 중재자로서 참가했다.[38] 회의에 사절을 파견하지 않은 유력 국가는 청교도 혁명 중이었던 잉글랜드 왕국, 종교가 달랐던 러시아 제국·오스만 제국뿐이었다.[39]
외교는 군주·의회 등 통치권을 가진 개인·단체의 자격으로 이루어졌으며,[34] 각국은 사절을 파견했고, 군주 등 본인은 참가하지 않았다.[34] 회의에 참여한 사절은 총 148명이었다.[40] 모든 참가국이 조약 서명에 참여한 것은 아니다.[41] 조약은 서명에 참여하지 않은 국가도 이행 의무를 지는 것으로 했다.[42]
프랑스와 스웨덴은 동맹이었지만, 강화 협상에서는 이익 분배를 둘러싼 라이벌이었다.[33] 신성 로마 황제는 두 나라를 대립시켜 희생을 최소화하려 했다.[33]
5. 조약의 주요 내용
모든 진영은 각 제후에게 로마 가톨릭 교회, 루터교, 개혁교회 중 자신의 종교를 결정할 권리를 부여한 1555년의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를 인정한다.(''cuius regio, eius religio'' 원칙.)[46][49] 자기네 종파의 교회가 없는 공국에 사는 그리스도 교인은 할당된 시간 동안 그리고 사적으로 공적인 신앙 의식을 치를 수 있다.[50]
네덜란드는 스페인에서, 스위스는 신성 로마 제국에서 공식적으로 독립한다.[44]
조약에서 대부분의 조항들은 추기경 마자랭이 쓴 것에 따를 수 있다. 당시 마자랭은 프랑스의 실권자였다. (국왕 루이 14세는 아직 어린 아이였다) 프랑스는 전쟁에서 다른 나라보다 훨씬 유리한 위치에서 끝냈다. 프랑스는 메스, 툴루즈, 로렌 지방 근처의 베르됭의 주교령과 알자스의 열개의 동맹 도시(Décapole)를 확보했다.(그러나 스트라스부르 시, 스트라스부르 주교령 또는 뮐하우젠 제외)[43][44]
스웨덴은 서부 포메른(이때부터 스웨덴 포메른)과 비스마르 및 브레멘과 베르덴의 주교령을 지배함과 동시에 배상금을 받는다.[43][44] 따라서 스웨덴은 오데르, 엘베, 베저 강의 하구를 지배하게 되었으며, 독일 제국 의회의 제후 회의에서 3개 투표권을 얻는다. 스웨덴은 500만 타러(thaler)의 배상금을 받았는데, 주로 군대의 봉급 지급에 사용했다.[26]
바이에른은 선제후의 신성로마제국 황제 선거에 투표권을 계속 가지는데, 이것은 이미 1623년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의 칙령으로 승인을 받은 것이었다. 프리드리히의 아들인 선제후는 이제 8개의 투표권을 가지게 되었다.[27]
선제후령은 새로 승인된 칼 루트비히 1세의 영토와 바이에른의 막시밀리안 선제후 공작의 영토로 나누며, 이로써 개신교와 로마 가톨릭의 범위가 구분되었다. 칼 루트비히는 라인 강을 따라 상부 선제후령을 얻었고, 막시밀리안은 바이에른 북부의 상부 선제후령을 얻는다.[28]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이후 프로이센)은 동부 포메른 지역, 그리고 마그데부르크와 할버슈타트, 캄민, 민덴의 주교령을 얻는다.[43]
1609년에 죽은 윌리히-클레베스-베르크의 승계를 확실히 한다. 윌리히, 베르크, 라벤슈타인은 노이부르크 선제후 백작에게, 클레베스, 마르크, 라벤스베르크는 브란덴부르크에 넘긴다.
오스나브뤼크 주교령은 개신교와 로마 가톨릭이 공존하며, 브라운슈비크-뤼네부르크 가의 차남 이하의 자제 중에서 프로테스탄트 감독을 임명한다.
브레멘 시의 독립을 확인한다.
전란기에 생긴 무역 및 상업 장벽은 철폐되며, 라인 강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이 항행할 수 있다.[51]
5. 1. 뮌스터 조약 (Instrumentum Pacis Monasteriensis, IPM)
뮌스터 조약(Instrumentum Pacis Monasteriensis, IPM)은 신성 로마 제국과 프랑스 및 그 동맹국 간에 체결된 조약이다.[15][16] 1648년 10월 24일, 대부분의 유럽 열강이 참여한 가운데 현재 독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 뮌스터에서 체결되었다.[34]이 조약으로 프랑스 왕국은 알자스 지방과 로렌 지방(메스, 투르, 베르됭)을 획득하고, 신성 로마 제국으로부터의 분리를 확인했다.[43][44] 스위스 연방과 네덜란드 연합 공화국은 독립을 승인받았다.[44] 브란덴부르크 선제후는 동포메라니아 공위를 획득했다. 아우크스부르크 종교화의 내용을 재확인하고, 칼뱅파를 새롭게 용인했다.[43]
신성 로마 제국 내의 영방은 주권과 외교권을 인정받았고,[43][44] 신성 로마 황제는 법률 제정, 전쟁, 강화, 동맹 등에 대해 제국 의회의 승인을 얻어야 했다.[44] 제국 의회 및 법원에서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동등한 권리가 규정되었다.[43][44] 1623년 황제 페르디난트 2세가 결정한 팔츠 선제후의 선제후 지위 박탈 및 바이에른 공작에게 부여하는 칙령은 유효하게 되어, 바이에른 공작 막시밀리안 1세는 부여받은 선제후 지위를 그대로 인정받았다. 한편, 팔츠 선제후 카를 1세 루트비히에게는 새로운 선제후 지위가 부여되었다. 구 팔츠 영토는 양자 간에 분할되었고, 바이에른 선제후는 오버팔츠를 획득했다. 바이에른과 팔츠가 통합될 경우 팔츠의 선제후 지위는 소멸하는 것으로 규정되었다.
이 결과, 프랑스는 알자스-로렌으로의 세력 확장에 성공했다.[44]
5. 2. 오스나브뤼크 조약 (Instrumentum Pacis Osnabrugensis, IPO)
신성 로마 제국과 스웨덴 및 그 동맹국 간의 조약이다.[17][18]1648년 10월 24일, 대부분의 유럽 열강이 참여한 가운데 현재 독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뮌스터에서 조약이 체결되었다(오스나브뤼크 조약도 실제로는 뮌스터에서 체결됨).[34]
주요 합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스웨덴 왕국은 500만 라이히스탈러의 전쟁 배상금, 서포메라니아 공위(오데르 강 하구, 베저 강 하구 포함), 비스마르 시, 브레멘 공위(구 대주교령), 펠덴 공위(구 주교령) 등을 획득했다.[43][44]
- 브란덴부르크 선제후는 동포메라니아 공위를 획득했다.
- 아우크스부르크 화의 내용을 재확인하고, 칼뱅파를 새롭게 용인했다.[43]
- 신성 로마 제국 내의 영방은 주권과 외교권을 인정받았다.[43][44]
- 1623년 황제 페르디난트 2세가 결정한 팔츠 선제후의 선제후 지위 박탈 및 바이에른 공작에게 부여하는 칙령은 유효하게 되어, 바이에른 공작 막시밀리안 1세는 부여받은 선제후 지위를 그대로 인정받았다. 한편, 팔츠 선제후 카를 1세 루트비히에게는 새로운 선제후 지위가 부여되었다. 구 팔츠 영토는 양자 간에 분할되었고, 바이에른 선제후는 오버팔츠를 획득했다. 바이에른과 팔츠가 통합될 경우 팔츠의 선제후 지위는 소멸하는 것으로 규정되었다.
이 결과, 스웨덴은 제국 의회 참가권을 얻었다. 한편, 독일에서는 영방 주권이 확립되어 영방 군주에 의한 연합체로서의 독일 체제가 확고해졌다.[44]
5. 3. 주요 조항
모든 진영은 각 제후에게 로마 가톨릭 교회, 루터교, 개혁교회 중 자신의 종교를 결정할 권리를 부여한 1555년의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를 인정한다.(''cuius regio, eius religio'' 원칙.)[46][49] 자기네 종파의 교회가 없는 공국에 사는 그리스도 교인은 할당된 시간 동안 그리고 사적으로 공적인 신앙 의식을 치를 수 있다.[50]네덜란드는 스페인에서, 스위스는 신성 로마 제국에서 공식적으로 독립한다.[44]
조약에서 대부분의 조항들은 추기경 마자랭이 쓴 것에 따를 수 있다. 당시 마자랭은 프랑스의 실권자였다. (국왕 루이 14세는 아직 어린 아이였다) 프랑스는 전쟁에서 다른 나라보다 훨씬 유리한 위치에서 끝냈다. 프랑스는 메츠, 툴루즈, 로렌 지방 근처의 베르됭의 주교령과 알자스의 열개의 동맹 도시(Décapole)를 확보했다.(그러나 스트라스부르 시, 스트라스부르 주교령 또는 뮐하우젠 제외)[43][44]
스웨덴은 서부 포메른(이때부터 스웨덴 포메른)과 비스마르 및 브레멘과 베르덴의 주교령을 지배함과 동시에 배상금을 받는다.[43][44] 따라서 스웨덴은 오데르, 엘베, 베저 강의 하구를 지배하게 되었으며, 독일 제국 의회의 제후 회의에서 3개 투표권을 얻는다. 스웨덴은 500만 타러(thaler)의 배상금을 받았는데, 주로 군대의 봉급 지급에 사용했다.[26]
바이에른은 선제후의 신성로마제국 황제 선거에 투표권을 계속 가지는데, 이것은 이미 1623년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의 칙령으로 승인을 받은 것이었다. 프리드리히의 아들인 선제후는 이제 8개의 투표권을 가지게 되었다.[27]
선제후령은 새로 승인된 칼 루트비히 1세의 영토와 바이에른의 막시밀리안 선제후 공작의 영토로 나누며, 이로써 개신교와 로마 가톨릭의 범위가 구분되었다. 칼 루트비히는 라인 강을 따라 상부 선제후령을 얻었고, 막시밀리안은 바이에른 북부의 상부 선제후령을 얻는다.[28]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이후 프로이센)은 동부 포메른 지역, 그리고 마그데부르크와 할버슈타트, 캄민, 민덴의 주교령을 얻는다.[43]
1609년에 죽은 윌리히-클레베스-베르크의 승계를 확실히 한다. 윌리히, 베르크, 라벤슈타인은 노이부르크 선제후 백작에게, 클레베스, 마르크, 라벤스베르크는 브란덴부르크에 넘긴다.
오스나브뤼크 주교령은 개신교와 로마 가톨릭이 공존하며, 브라운슈비크-뤼네부르크 가의 차남 이하의 자제 중에서 프로테스탄트 감독을 임명한다.
브레멘 시의 독립을 확인한다.
전란기에 생긴 무역 및 상업 장벽은 철폐되며, 라인 강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이 항행할 수 있다.[51]
6. 조약의 결과 및 영향
30년 전쟁은 가톨릭 세력 국가들, 특히 합스부르크 가문의 패배로 끝났다. 이 조약으로 신교도(특히 칼뱅파)의 권리가 인정되었고, 제국 의회와 법원에서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동등권이 확립되었으며, 가톨릭 황제가 분쟁을 조정하는 입장에 있지 않다는 것이 확정됨으로써 독일에서는 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길이 열렸다. 이 때문에 마지막 종교 전쟁이라고 불린다.[43]
독일은 제국 내 영방에 주권이 인정됨에 따라 300여 개에 달하는 영방 국가의 분립이 확정되었다. 또한 황제의 권리는 크게 제한되었고, 마치 제후들의 으뜸이라는 입장에 서게 되었다.[43] 이로 인해 합스부르크 가문은 여전히 제국의 최강 제후로서 황위를 독점했지만, 제국 전체에 대한 영향력은 저하되었고, 자신의 영토인 오스트리아 대공국이나 보헤미아 왕국·헝가리 왕국 등의 경영에 전념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합스부르크 군주국). 그 한편으로 제국의 조직은 보존되었고, 그러한 영방 국가들의 보존과 평화적인 분쟁 해결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이 조약으로 많은 이익을 얻은 것은 베스트팔렌 조약에서 맺었던 프랑스와 스웨덴이다. 덴마크 왕국·잉글랜드 왕국(청교도 혁명 중간)은 프로테스탄트이면서도 승전국에 참여하지 못했다. 또한 가톨릭의 에스파냐 합스부르크 가문이 이 전쟁을 통해 세력 감퇴를 보여주었고, 이후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43]
6. 1. 신성 로마 제국의 변화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신성 로마 제국의 헌법에 위배되는 페르디난트 3세의 권력은 분할되어 제국령의 지배자에게 돌아갔다.[48][49] 각 제국령의 지배자들은 자신의 종교를 결정할 권한을 갖게 되었으며, 개신교와 로마 가톨릭은 법 앞에 평등하게 규정되었고, 칼뱅주의도 법적으로 인정받았다.[19][20]
교황청은 이 합의에 매우 불만을 표했고, 인노켄티우스 10세는 교황령 ''Zelo Domus Dei''에서 이를 "무효이며, 헛되고, 부당하고, 불의하며, 저주받고, 타락하고, 공허하며, 의미와 효력이 영원히 없는 것"이라고 규정했다.[22][23]
베스트팔렌 조약은 중앙집권력이 약하고 통일된 "제국"으로서의 지위가 불안정했던 신성 로마 제국이 명확하게 통일성을 상실한 사건이었다. 이 조약은 "'''신성 로마 제국의 사망 진단서'''"라고 불리며,[44] 볼테르는 "'''신성하지도 않고, 로마도 아니며, 제국도 아니다'''"라고 평가했다.
독일 역사 전문가들은 스페인, 프랑스와 비교하여 독일의 지역 통일이 늦어진 이유로 신성 로마 제국의 중앙집권화 실패를 முதன்மை로 제시한다.[43] 베스트팔렌 조약은 위대한 공석 시대와 함께 독일 지역의 비중앙집권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여겨진다.
황제 권력이 실추되면서 제국의 중앙집권화는 무산되었고, 바이에른 왕국을 비롯한 각 지역의 영방 국가들이 독자적으로 중앙집권화를 추진해 나갔다. 독일 통일을 달성한 독일 제국도 영방 국가의 자치권을 완전히 폐지할 수 없었다. 나치 시대와 동서 분단을 거친 오늘날의 독일도 정체로서 연방제를 채택하고 있으며, 이는 독일의 지역 의식의 강함을 반영하고 있다고 평가된다.
이 조약으로 나폴레온 전쟁(1803년 - 1815년)까지의 유럽 국제 질서("'''베스트팔렌 체제'''")가 형성되었다.[45]
6. 2. 국제 질서의 변화
일부 국제 관계 학자들은 베스트팔렌 조약이 현대 국제 관계의 핵심 원칙, 즉 국경의 불가침성과 주권 국가의 내정 불간섭 원칙을 낳은 기원으로 여겨왔다. 이러한 체제는 문헌에서 베스트팔렌 주권으로 알려지게 되었다.[30] 하지만 대부분의 현대 역사학자들은 이러한 체제를 베스트팔렌 조약과 연관짓는 것을 비판하며, 이를 '베스트팔렌 신화'라고 부르고 있다.[31] 그들은 현대 유럽 국가 시스템이 베스트팔렌 조약에서 유래했다는 견해에 이의를 제기한다. 조약에는 국제법 원칙으로 해석될 수 있는 종교의 자유, 주권 또는 권력 균형에 대한 내용이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다. 주권과 종교적 평등이 언급된 유일한 맥락은 신성 로마 제국의 헌법적 체제이지만, 이러한 개념은 당시 이미 새로운 아이디어가 아니었다. 조약 자체에 현대 국가법의 기초가 포함되어 있지는 않지만, 유럽에서 장기간 지속된 종교 갈등의 종식을 상징하는 사건임에는 틀림없다.[32]6. 3. 종교 갈등 완화
페르디난트 3세가 행사하던 권력은 박탈되어 신성 로마 제국의 통치자들에게 돌아갔고, 이들은 다시 자신의 공식 종교를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 가톨릭과 루터교도는 법 앞에 평등한 것으로 재정의되었고, 칼뱅주의는 공식 종교로서 법적 인정을 받았다.[19][20] 모든 당사국은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종교화의를 인정해야 했으며, 각 제후는 자기 영토의 종교를 결정할 권리가 있었다(「구이우스 레기오, 에이우스 렐리지오」 원칙).[19][24] 1624년 1월 1일이 주의 지배적인 종교를 결정하는 기준일로 정의되었고, 모든 교회 재산은 1624년 상태로 복원되어야 했다. 자기 종파가 정교회가 아닌 영지에 사는 기독교인들은 사적으로, 그리고 할당된 시간 동안 공개적으로 신앙을 실천할 권리를 보장받았다.[24]30년 전쟁은 가톨릭 세력 국가들, 특히 합스부르크 가문의 패배로 끝났다. 이 조약으로 신교도(특히 칼뱅파)의 권리가 인정되었고, 제국 의회와 법원에서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동등권이 확립되었으며, 가톨릭 황제가 분쟁을 조정하는 입장에 있지 않다는 것이 확정됨으로써 독일에서는 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길이 열렸다. 이 때문에 마지막 종교 전쟁이라고 불린다.[43]
교황청은 이 합의에 매우 불만을 표했고, 인노켄티우스 10세 교황은 교황령 ''Zelo Domus Dei''에서 이를 "무효이며, 헛되고, 부당하고, 불의하며, 저주받고, 타락하고, 공허하며, 의미와 효력이 영원히 없는 것"이라고 규정했다.[22][23] 한편, 종교적 관용을 실천한 네덜란드 공화국의 독립은 유럽 유대인들에게 안전한 피난처를 제공하기도 했다.[21]
6. 4. 각국의 상황 변화
6. 4. 1. 프랑스
프랑스 왕국은 가톨릭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베스트팔렌 조약의 승전국이 되었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약화에 성공하고 알자스를 얻은 프랑스는 이후 라인강 서안으로 지배 영역의 확장을 꾀하며 침략 전쟁을 되풀이하게 된다.[43] 재상 리슐리외는 국왕 루이 13세를 쾰른 대주교(선제후)에, 나아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자리에 앉히려 했으나, 야망은 이루지 못했다.또한 프랑스는 알자스와 로렌의 일부를 획득했지만, 제국 제후가 될 수는 없었다. 이는 제국 의회·제국 크라이스에 개입할 길이 막혔다는 것을 의미했다. 후에 루이 14세는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서 라인강 유역에 손을 뻗었지만, 제국 크라이스에서 결속한 제후들은 하나로 뭉쳐 프랑스 세력에 맞섰다.
6. 4. 2. 스웨덴
이 조약으로 스웨덴은 발트해 연안 지역을 영토로 확보하여 그 일대에 패권을 확립했다.[43] 이 시대의 스웨덴은 발트 제국이라고도 불린다. 브레멘에서 프랑크푸르트까지를 제압하고, 이 구간에서 제국 우편을 몰아내고 스웨덴 우편을 운영했다.[43]1644년에 친정을 시작한 크리스티나 여왕이 관대한 태도로 대폭 양보했기 때문에, 몫이 급감했다고도 한다. 그녀는 아버지 구스타프 2세 아돌프의 이상(고트 기원설/고대 고트주의)을 버리고, 가톨릭과 화해했다. 그녀의 이상은 모든 기독교 세계의 구제였다. 구스타프 2세 아돌프의 정책을 계승하여 스웨덴에 승리를 가져다 준 재상 악셀 옥센셰르나는 친정 시작으로 사실상 실각했다. 후에 그녀는 스웨덴의 프로테스탄트 교회와 대립하여 왕위를 반납하고 가톨릭으로 개종한다.
또한 스웨덴에서 중요했던 것은, 프랑스와는 정반대로 레이엔이라는 형태로 영토를 부여받았다는 점이다. 즉, 스웨덴은 포어폼머른, 브레멘, 펠덴을 얻었지만, 이것은 스웨덴 국왕이 포어폼머른 공작, 브레멘 공작, 펠덴 공작의 지위를 겸임하는 것을 의미했다. 스웨덴은 제국 의회에 의석을 가지고, 오버작센, 니더작센, 니더라인 베스트팔렌의 3개의 제국 크라이스에 의석을 차지하여, 그것들을 기능 불능으로 만들었다.
그 한편으로 스웨덴은 제국 제후로서 제국이 전쟁을 수행할 경우 병력과 군자금의 공출을 의무화되었다. 네덜란드 침략 전쟁 때, 1674년에 제국 의회가 대프랑스 전쟁을 선포하자, 스웨덴은 프랑스 편에 서서, 1675년에 신성 로마 제국과 전쟁을 시작하는데, 스웨덴은 제국과 전쟁을 하면서도, 브레멘 공작으로서 니더작센 크라이스에 정해진 병력을 공출하는, 이상한 입장에 처하게 되었다.
6. 4. 3. 교황청
바티칸은 이 조약에 불복하여 조약 선포를 무효라고 주장했다. 현재도 철회되지 않았다.7. 평가 및 역사적 의의
베스트팔렌 조약은 근대 국제법의 기초를 마련하고 주권 국가 간의 관계를 규정하는 중요한 선례를 남겼다. 이 조약은 30년 전쟁으로 인한 분쟁을 완전히 종식시키지는 못했지만, 당시 유럽의 많은 미해결 문제들을 해결했다.[32] 프랑스와 스페인 간의 전투는 1659년 피레네 조약이 체결될 때까지, 네덜란드-포르투갈 전쟁은 1663년까지 지속되었다.
일부 국제 관계 학자들은 베스트팔렌 조약이 현대 국제 관계의 핵심 원칙, 즉 국경의 불가침성과 주권 국가의 내정 불간섭을 낳은 기원으로 보았다. 이러한 체제는 베스트팔렌 주권으로 알려지게 되었다.[30] 하지만, 대부분의 현대 역사학자들은 이러한 체제를 베스트팔렌 조약과 연관 짓는 것을 비판하며, 이를 '베스트팔렌 신화'라고 부르고 있다.[31] 조약에는 국제법 원칙으로 해석될 수 있는 종교의 자유, 주권 또는 권력 균형에 대한 내용이 명시적으로 포함되어 있지 않다.[32] 다만, 유럽에서 장기간 지속된 종교 갈등의 종식을 상징하는 사건임에는 틀림없다.[32]
베스트팔렌 조약은 중앙집권력이 약했던 신성 로마 제국의 통일성이 명확하게 상실된 사건이었다. 이 조약은 "'''신성 로마 제국의 사망 진단서'''"라고 불리며,[44] 볼테르는 신성 로마 제국을 "'''신성하지도 않고, 로마도 아니며, 제국도 아니다'''"(ni saint, ni romain, ni empire)라고 평가했다. 독일 역사 전문가들은 스페인, 프랑스에 비해 독일의 지역 통일이 크게 늦어진 이유로 신성 로마 제국의 중앙집권화 실패를 가장 먼저 제시하며, 베스트팔렌 조약과 위대한 공석 시대는 그 상징적인 사건으로 여겨진다.[43]
황제 권력이 실추되면서 제국의 중앙집권화는 무산되었고, 바이에른 왕국을 비롯한 각 지역의 영방 국가들이 독자적으로 중앙집권화를 추진해 나갔다. 이후 독일 통일을 달성한 독일 제국도 영방 국가의 자치권을 완전히 폐지할 수 없었으며, 나치 시대와 동서 분단을 거친 오늘날의 독일도 정체로서 연방제를 채택하고 있다.
이 조약으로 나폴레온 전쟁(1803년 - 1815년)까지의 유럽 국제 질서("베스트팔렌 체제")가 형성되었다.[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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