린 폰탠
1. 개요
린 폰탠(Lillie Louise Fontanne, 1887년 ~ 1983년)은 영국의 배우로, 브로드웨이와 웨스트 엔드 극장을 중심으로 활동하며 20세기 연극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05년 연극 무대에 데뷔한 폰탠은 1916년 미국으로 건너가 브로드웨이에서 활동을 시작했고, 배우 알프레드 런트를 만나 결혼하여 평생의 연기 파트너로 함께 활동했다. 폰탠과 런트는 씨어터 길드에 합류하여 다양한 작품에 출연하며 대화 중복 기법을 활용하는 등 연극계에 혁신을 가져왔다. 폰탠은 1964년 대통령 자유 훈장을 받았으며, 1980년 케네디 센터 공연 예술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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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명 | 릴리 루이즈 폰탠 (Lillie Louise Fontanne) |
|---|---|
| 출생일 | 1887년 12월 6일 |
| 출생지 | 영국 런던 우드퍼드 |
| 사망일 | 1983년 7월 30일 |
| 사망지 | 미국 위스콘신주 제네시디포 |
| 묘지 | 포레스트 홈 묘지 |
| 국적 | 미국 |
| 직업 | 배우 |
| 활동 기간 | 1905년 – 1967년 |
| 배우자 | 앨프리드 런트 (1922년 결혼, 1977년 사별) |
| IPA | /fɒnˈtæ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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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웹사이트 | 린 폰탠 웹사이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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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미상 수상자 -
존 클리즈
존 클리즈는 잉글랜드의 배우, 희극인, 작가, 영화 제작자로, 1960년대 코미디 그룹 활동을 시작하여 TV 프로그램과 몬티 파이튼, 시트콤 폴티 타워 등을 통해 인기를 얻었으며, 영화 각본 및 출연, 사회 정치 활동에도 참여하고 있다. -
에미상 수상자 -
니콜 키드먼
니콜 키드먼은 호주 영화로 데뷔하여 할리우드에서 성공을 거둔 호주계 미국인 배우이자 제작자로, 《디 아워스》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하고 에미상과 골든 글로브상을 수상하는 등 연기력과 영향력을 인정받으며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
런던 출신 배우 -
찰리 채플린
찰리 채플린은 런던 빈민가 출신으로 뛰어난 코미디 연기와 영화 연출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으며, "작은 방랑자" 캐릭터, 슬랩스틱 코미디, 판토마임 연기, 사회 비판적 메시지, 매카시즘 시대의 탄압, 아카데미 명예상 수상 등으로 대표되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영국의 배우이자 영화 감독이다. -
런던 출신 배우 -
크리스토퍼 리
크리스토퍼 리는 1922년에 태어나 2015년에 사망한 영국의 배우로, 영화 《드라큘라》에서 드라큘라 백작 역을 맡아 호러 영화 배우로 명성을 얻었으며, 《반지의 제왕》과 《스타워즈》 시리즈 등 다양한 영화에 출연하고 음악 활동도 병행했다. -
잉글랜드의 여자 텔레비전 배우 -
엘리자베스 슬레이든
엘리자베스 슬레이든은 잉글랜드 배우로, BBC SF 드라마 《닥터 후》에서 사라 제인 스미스 역을 맡아 세 번째, 네 번째 닥터의 컴패니언으로 출연했으며, 이후 스핀오프 드라마 《사라 제인 어드벤처》에서 주연을 맡았다. -
잉글랜드의 여자 텔레비전 배우 -
폴리 워커
폴리 워커는 발레리나의 꿈을 접고 배우로 전향하여 영화 《패트리어트 게임》에서 테러리스트 역으로 주목받은 잉글랜드 출신 배우로, 드라마 《로마》의 아티아 역으로 골든 글로브상 후보에 오르는 등 다양한 작품에 출연하며 활동하고 있다.
2. 생애와 경력
린 폰탠은 1887년 12월 6일 런던 우드퍼드에서 프랑스계 아버지와 아일랜드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세 딸 중 막내로, 런던에서 교육을 받았다. 가족 친구의 소개로 명배우 엘렌 테리에게 연기를 지도받았다.
1905년 드루어리 레인 극장의 판토마임 《신데렐라》 합창단원으로 데뷔, 이후 런던에서 여러 단역을 맡았다. 1909년 메이블 러브와 《레이디 프레데릭》에서 로즈 역으로 순회 공연을 했고, 런던 개릭 극장 등에서 연기했다. 1910년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 무대에 데뷔했다. 1911년 런던으로 돌아와 활동하다 1912~13년 《Milestones》에서 거트루드 리드 역으로 지방 순회 공연과 런던 공연을 했다. 미국의 스타 배우 로레트 테일러는 폰탠의 연기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1914년 《My Lady's Dress》로 성공을 거두었고, 1914~15년 런던에서 여러 작품에 출연했다.
폰탠은 젊은 변호사와 약혼했지만, 그는 제1차 세계 대전 중 사망했다. 1916년, 로레트 테일러의 제안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브로드웨이 무대에 데뷔, 테일러 부부는 폰탠의 경력에 큰 영향을 주었다. 1918년부터 1920년까지 뉴욕에서 여러 연극에서 주연을 맡았다. 이 시기 서머 스톡 공연 중 배우 알프레드 런트를 만났다.
1921년 덜시 주연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고, 도로시 파커는 폰탠을 찬양하는 시를 썼다. 1922년 런트와 결혼, 1923년 함께 공연하며 부부로서 첫 브로드웨이 무대를 밟았다.
1924년 런트 부부는 씨어터 길드(Theatre Guild)에 합류, 근위병(The Guardsman)에 출연하며 코미디 연기에 능숙하다는 평판을 얻었다. 이후 조지 버나드 쇼의 작품과 유진 오닐의 기묘한 막간극(Strange Interlude) (1928)에서 복잡한 내면 연기를 선보였다. 런트 부부는 대화 중복 기법으로 연극계에 혁신을 가져왔다.
1928년 변덕(Caprice)에 함께 출연하며 분리할 수 없는 연극적 파트너십을 시작, 이후 항상 함께 출연했다. 1931년 로버트 E. 셔우드의 비엔나의 재회(Reunion in Vienna)로 성공을 거두고, 뉴욕 외 지역 관객들을 위해 투어 공연을 했다.
런트 부부는 노엘 카워드와 절친했으며, 카워드는 1932년 런트 부부를 위해 삶의 설계(1932)를 썼다. 이 연극은 흥행 기록을 경신했다. 1934년 카워드의 포인트 발레인은 실패했지만, 런트 부부의 공동 경력에서 유일한 실패작이었다. 1930년대 후반, 말괄량이 길들이기(1935) 등 다양한 작품에 출연했다.
런트 부부는 위스콘신주 제네시 데포에 여름 별장을 가졌고,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영국과 유럽 전역에서 위문 공연을 했다.
전쟁 이후 미국으로 돌아와 씨어터 길드와 관계를 재개했다. 1946-47년과 1949-50년 내 사랑을 알아요등에 출연, 미국 전역을 순회 공연했다. 1952년 영국 웨스트 엔드에서 공연했다.,
1956년 위대한 세바스티안이 마지막 브로드웨이 초연작이었다. 1957년 마지막 작품 방문(연극)은 부유한 노부인이 50년 전 자신을 배신한 남자에게 복수하는 내용이다. 1958년 5월 뉴욕 런트-폰탠 극장을 개관하고 미국을 순회했다. 1960년 런던 공연을 끝으로 은퇴했다.
런트는 1977년에 사망했고, 폰탠은 1983년 지네시 디포에서 95세로 폐렴으로 사망, 남편 옆에 안장되었다.
2.1. 초기 생애 (1887-1916)
릴리 루이즈 폰탠(Lillie Louise Fontanne)은 1887년 12월 6일 런던 우드퍼드에서 프랑스계 아버지 쥘 피에르 앙투안 폰탠(Jules Pierre Antoine Fontanne, 1855–1942)과 아일랜드계 어머니 프랜시스 엘렌 손리(Frances Ellen, née Thornley, 1858–1921) 사이에서 태어난 세 딸 중 막내였다. 런던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가족 친구의 소개로 명배우 엘렌 테리에게 지도를 받았다.
1905년 드루어리 레인 극장에서 공연된 판토마임 《신데렐라》의 합창단원으로 데뷔하였다. 이후 루이스 월러, 허버트 트리 경, 레나 애슈웰 등이 출연하는 런던 공연에서 단역을 맡으며 경력을 쌓았다.
1909년에는 메이블 러브와 함께 《레이디 프레데릭》에서 로즈 역으로 순회 공연을 했고, 같은 해 12월 런던 개릭 극장에서 《Where Children Rule》, 1910년 6월에는 같은 극장에서 《Billy's Bargain》에서 레이디 멀버리 역을 연기했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1910년 11월 나지모바 39번가 극장에서 위든 그로스미스와 함께 《Mr Preedy and the Countess》에 출연하며 뉴욕 무대에 데뷔했다.
1911년 런던으로 돌아온 폰탠은 크리테리온 극장에서 《The Young Lady of Seventeen》, 보드빌 극장에서 《A Storm in a Tea Shop》에 출연했다. 1912~13년에는 아놀드 베넷과 에드워드 노블록의 《Milestones》에서 거트루드 리드 역으로 지방 순회 공연을 하고 런던에서도 같은 역을 맡았다. 이 역할에서 폰탠은 젊은 시절, 중년, 노년의 한 인물을 모두 연기해야 했다. 미국의 스타 배우 로레트 테일러는 폰탠의 연기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1914년 4월 로열티 극장에서 폰탠은 노블록의 《My Lady's Dress》에서 리자와 콜리슨 부인 역으로 성공을 거두었다. 1914~15년에는 런던에서 《The Starlight Express》 초연을 포함한 4개의 작품에 더 출연했다.
폰탠은 젊은 변호사 테디 번과 약혼했지만, 번은 1916년 제1차 세계 대전 중 전투에서 사망했다.
2.2. 브로드웨이 진출과 알프레드 런트와의 만남 (1916-1922)
1916년, 폰탠은 로레트 테일러 극단의 제안을 받고 미국으로 건너가 브로드웨이 무대에 데뷔했다. 테일러와 그녀의 남편 하틀리 매너스는 폰탠의 경력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테일러는 훗날 폰탠과 함께 연기하는 동안 배우라는 사실을 잊을 정도였다고 회상했다. 폰탠은 1918년부터 1920년까지 뉴욕에서 로라 호프 크루즈를 대신해 로킹햄 부인 역을 맡는 등 여러 연극에서 주연을 맡았다. 이 시기 서머 스톡 공연을 하던 중 배우 알프레드 런트를 만나 사랑에 빠졌지만, 런트의 구애는 폰탠의 기대보다 조심스러웠다.
1921년, 폰탠은 조지 S. 카우프만과 마크 코넬리의 코미디 덜시에서 주연을 맡아 처음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도로시 파커는 폰탠을 찬양하는 시를 썼을 정도였다. 1922년 5월, 폰탠은 런트와 결혼했고, 1923년에는 올드 드러리의 스위트 넬에서 함께 공연하며 부부로서 첫 브로드웨이 무대를 밟았다. 뉴욕 헤럴드의 알렉산더 울코트는 폰탠의 연기를 극찬하며 "훌륭한 기질, 진실되고 빛나는 무언가"라고 평했다.
2.3. 씨어터 길드와 전성기 (1924-1945)
1924년, 런트 부부는 씨어터 길드(Theatre Guild)에 합류했다. 씨어터 길드는 상업적인 연극보다는 진지하고 혁신적인 연극을 선보이며 브로드웨이의 관습에 도전했다. 런트 부부는 길드에서 페렌츠 몰나르의 근위병(The Guardsman)에 출연하며 가벼운 코미디 연기에 능숙하다는 평판을 얻었다. 이후 조지 버나드 쇼의 무기와 남자(Arms and the Man) (1925), 피그말리온(Pygmalion) (1926), 의사의 딜레마(The Doctor's Dilemma) (1927)에 출연했다. 폰탠은 유진 오닐의 기묘한 막간극(Strange Interlude) (1928)에서 복잡한 내면 연기를 선보이며 연기 스펙트럼을 넓혔다.
런트 부부는 대화 중복 기법을 통해 자연스럽고 현실적인 연기를 선보였다. 다른 배우가 말하는 도중에 배우가 말하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런트 부부는 대화 중복을 완벽하게 해냈다고 한다. 이 기법은 연극계에 혁신을 가져왔다.
1928년, 런트 부부는 변덕(Caprice)에 함께 출연했다. 이 작품은 그들이 주요 흥행 요소가 된 첫 작품이자, 분리할 수 없는 연극적 파트너십의 시작이었다. 이후 런트 부부는 항상 함께 출연했다. 1931년, 런트 부부는 로버트 E. 셔우드의 비엔나의 재회(Reunion in Vienna)에 출연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런트 부부는 뉴욕 외 지역 관객들을 위해 투어 공연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런트 부부는 노엘 카워드와 절친한 친구였으며, 카워드는 1932년 런트 부부를 위해 삶의 설계(1932)를 썼다. 이 연극은 세 스타의 인기에 힘입어 흥행 기록을 경신했다. 1934년, 카워드의 포인트 발레인은 실패했지만, 이는 런트 부부의 공동 경력에서 유일한 실패작이었다.
1930년대 후반, 런트 부부는 말괄량이 길들이기(1935), 멍청이의 즐거움(1936), 암피트리온 38(1937), 갈매기(1938) 등 다양한 작품에 출연했다.
런트 부부는 위스콘신주 제네시 데포에 여름 별장을 가지고 있었고, 제2차 세계 대전 기간에는 영국과 유럽 전역에서 위문 공연을 펼쳤다.
2.4. 은퇴와 사망 (1945-1983)
전쟁 이후 폰탠과 런트는 미국으로 돌아와 씨어터 길드와 관계를 재개했다. 1946-47년 테렌스 래티건의 코미디 사랑의 한가로움(브로드웨이에서는 오, 나의 여주인님이라는 제목으로 공연)과 1949-50년 마르셀 아샤르의 Auprès de ma blonde를 S. N. 베어먼이 각색한 내 사랑을 알아요에 출연했다. 이 작품들은 각각 482회와 247회 공연되었다. 런트 부부는 후자를 미국 전역에서 순회 공연했다. 1952년에는 세 번째이자 마지막 코워드 초연작인 1870년대를 배경으로 한 로맨틱 코미디 쿼드릴(연극)을 위해 영국으로 돌아가 웨스트 엔드에서 329회 공연을 한 후, 1954년 브로드웨이로 가져가 159회 공연을 했다. 더 오래 공연할 수도 있었지만 런트 부부는 1955년 3월에 막을 내리기로 결정했다.
폰탠과 런트의 마지막 브로드웨이 초연작은 1956년 하워드 린제이와 러셀 크라우즈의 "멜로드라마 코미디" 위대한 세바스티안이었다. 뉴욕에서 6개월 동안 공연한 후 미국 전역을 순회했다. 그들의 마지막 작품은 1957년 프리드리히 뒤렌마트의 Der Besuch der alten Dame를 모리스 발렌시가 각색한 방문(연극)이었다. 이 작품은 부유한 노부인이 50년 전에 자신을 배신한 남자에게 끔찍한 복수를 하는 내용이다. 1957-58년 영국에서 피터 브룩이 연출한 프로덕션으로, 처음에는 타임 앤 어게인이라는 제목으로 이 연극을 순회했다. 1958년 5월 그들은 같은 연극(이후 방문으로 제목 변경)으로 뉴욕의 런트-폰탠 극장을 개관하고 미국에서 순회했다. 1960년 6월 브룩의 연출로 런던의 새로운 로열티 극장에서 공연하여 10월 19일까지 공연했다. 11월 골더스 그린 히포드롬에서 마지막 한 주 동안 공연한 후 무대에서 은퇴했다.
런트는 1977년 8월 3일에 사망했다. 폰탠은 1983년 7월 30일 지네시 디포에서 95세의 나이로 폐렴으로 사망했으며, 위스콘신주 밀워키의 포레스트 홈 묘지에 남편 옆에 안장되었다.
3. 주요 작품
폰탠은 주로 연극 무대에서 활동했지만, 영화와 텔레비전 작품에도 몇 편 출연했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 런트 부부는 4편의 텔레비전 작품에 출연했으며, 1965년 매그니피선트 양키로 에미상을 수상했다. 폰탠은 메리 마틴이 주연한 1960년 텔레비전 프로덕션 피터 팬의 내레이션을 맡았고, 1967년 홀마크 명예의 전당 텔레캐스트 아나스타샤에서 마리 대공녀 역으로 두 번째 에미상 후보에 올랐다. 이 두 작품은 폰탠이 남편 없이 출연한 몇 안 되는 작품이었다. 런트 부부는 1940년대에 여러 라디오 드라마에도 출연했는데, 특히 극장 길드 프로그램에서 활약했으며, 이 방송들 중 상당수는 현재까지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