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나베 아키토키
1. 개요
마나베 아키토키는 니시다 기요사다의 아들로, 1708년 맏형 마나베 아키후사의 양자가 되었다. 같은 해 쇼군 도쿠가와 쓰나요시를 알현하고, 종5위하 시모후사노카미에 서임되었다. 1720년 아키후사의 사망으로 가독을 상속받았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에치고 무라카미에서 엣젠 사바에로 이봉되었다. 사바에에서 번정 확립에 힘썼지만 35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했고, 아들이 요절하여 조카 마나베 아키카타를 양자로 들였다.
| 씨명 | 마나베 씨 |
|---|---|
| 이름 | 마나베 아키토키 |
| 시대 | 에도 시대 중기 |
| 출생 | 겐로쿠(元禄) 3년 5월 2일 (1690년6월 8일) |
| 사망 | 교호(享保) 9년 8월 18일 (1724년10월 4일) |
| 이명 | 슈메 (주마, 통칭) |
| 시호 | 즈이쇼인 (서창원) |
| 묘소 | 도쿄도다이토구 하나카와도 구혼지 → 다마 영원으로 개장 |
| 관위 | 종5위하, 시모사노카미 |
| 막부 | 에도 막부 |
| 주군 | 불명 |
| 번 | 에치고무라카미번 번주 → 에치젠사바에번 번주 |
| 씨족 | 마나베 씨 |
| 부모 | 아버지: 니시다 기요사다, 어머니: 오가와 씨 (고주인) 양아버지: 마나베 아키후사 |
| 형제 | 아키후사, 아키사다, 아키유키, 아키히라, 아키토키 |
| 배우자 | 호렌인 (宝蓮院) (타키, 아베 마사타카의 양녀) |
| 자녀 | 미베 (마나베 아키카타 정실) 양자: 마나베 아키카타 |
| 대수 | 2 |
|---|---|
| 직책 | 무라카미번 번주 (마나베 가문) |
| 임기 | 1720년 |
| 전임자 | 마나베 아키후사 |
| 후임자 | 나이토 가즈노부 |
| 대수 | 1 |
|---|---|
| 직책 | 사바에번 번주 (마나베 가문) |
| 임기 | 1720년 ~ 1724년 |
| 후임자 | 마나베 아키미치 |
-
사바에번주 -
마나베 아키카쓰
마나베 아키카쓰는 에도 시대 사바에 번주이자 로주로, 덴포 개혁 시기 실각 후 이이 나오스케에 의해 재등용되어 막부 말기 주요 정치적 사건에 관여했으나, 강압적인 정치 스타일과 이이 나오스케 사후 실각하여 은거했다. -
마나베씨 -
오코치 마사타다
오코치 마사타다는 에도 시대 말기부터 메이지 시대에 걸쳐 활동하며, 사바에 번주의 아들로 태어나 오타키 번 번주를 계승, 보신 전쟁에서 구 막부군을 지휘했으나 패배 후 메이지 유신 이후 신정부 관료, 자작, 귀족원 의원을 역임하며 일본 근대사의 굴곡을 반영한 인물이다. -
마나베씨 -
다카사키번
에도 시대 고즈케국 다카사키 지역을 다스린 다카사키번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이이 나오마사에게 성을 건설하게 하면서 시작되어 여러 가문이 통치했으며, 막부 말기 덴구토 당의 난 진압, 보신 전쟁 때 신정부군에 합류 후 폐번치현으로 폐지되었다. -
1690년 출생 -
이중환
이중환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실학자로, 관료 생활 중 옥사에 연루되어 유배를 간 후 전국을 유랑하며 지리 등을 연구했고, 《택리지》를 저술하여 실학 사상 발전에 기여했으며, 사대부 비판과 상공업 발달 주장 등 개혁적인 사상으로 북학파 실학자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
1690년 출생 -
크리스티안 골트바흐
크리스티안 골트바흐는 프로이센 쾨니히스베르크 출신의 수학자로, 당대 수학자들과 교류하며 수학 연구에 기여했고, 특히 골드바흐 추측으로 유명하며, 상트페테르부르크 과학 아카데미에서 활동하고 러시아 정부에서 공헌했다.
2. 생애
니시다 기요사다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나, 호에이 5년(1708년) 맏형 마나베 아키후사의 양자가 되었다. 같은 해 쇼군 도쿠가와 쓰나요시를 오메미에(배알)하고 종5위하 시모후사노카미(下総守)에 서임되었다.
교호 5년(1720년) 양아버지 아키후사가 사망하자 가독을 상속받았으나, 곧 에치고국 무라카미에서 엣젠국 사바에로 영지를 옮기게 되었다. 이는 쇼군 도쿠가와 이에노부와 도쿠가와 이에쓰구 시대에 권세를 누렸던 마나베 가문을 성주 다이묘에서 진야를 거점으로 하는 무성(無城) 다이묘로 격하시키고 실질적인 수입(고쿠다카)도 줄이는, 사실상의 좌천 조치였다.
새로운 영지인 사바에에서 가신단을 편성하고 마을을 건설하는 등 번의 통치 기반을 다지기 위해 노력했으나, 실의 속에서 35세의 젊은 나이로 에도 시바(芝)의 미타(三田) 번저에서 사망했다. 아들이 있었으나 일찍 사망하였기 때문에, 조카(형 아키사다(明貞)의 아들)인 마나베 아키카타를 양자로 삼아 가문을 잇게 했다.
2.1. 출생과 가독 상속
니시다 기요사다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호에이 5년(1708년) 4월 15일, 맏형 마나베 아키후사의 양자가 되었다. 같은 해 5월 1일, 쇼군 도쿠가와 쓰나요시를 오메미에(배알)하였다. 같은 해 12월 18일, 종5위하 시모후사노카미에 서임되었다. 교호 5년(1720년) 9월 12일, 양아버지 아키후사가 사망하자 가독을 상속받았다. 그러나 가독 상속 직후, 기존 영지였던 에치고국 무라카미번에서 엣젠국 사바에번으로 이봉되었다. 이는 쇼군 도쿠가와 이에노부와 도쿠가와 이에쓰구 시대에 권세를 누렸던 마나베 가문을 성주 다이묘에서 진야를 거점으로 하는 무성(無城) 다이묘로 격하시키고 실질적인 수입(고쿠다카)도 줄이는 조치로, 명백한 좌천이었다.
이 때문에 아키토키는 새로운 영지인 사바에에서 처음부터 번의 통치 체제를 확립하는 데 힘써야 했다. 가신단을 편성하고 마을을 건설하는 등의 노력이 필요했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 아키토키는 실의에 빠져 35세의 나이로 에도 시바의 미타(三田) 번저에서 사망했다. 아들이 한 명 있었으나 일찍 사망하였기 때문에, 조카(형 아키사다의 아들)인 아키카타를 양자로 삼아 가독을 잇게 했다.
2.2. 좌천과 사바에 번
1720년 (교호 5년) 9월 12일, 양아버지이자 맏형인 마나베 아키후사가 사망하자 가독을 상속받았다. 그러나 가독 상속 직후, 기존 영지인 에치고 무라카미에서 엣젠국 사바에 번으로 영지를 옮기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는 쇼군 도쿠가와 이에노부와 도쿠가와 이에쓰구 시대에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던 마나베 가문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조치였다. 성주 다이묘의 지위에서 성이 없는 진야를 거점으로 하는 무성(無城) 다이묘로 격을 낮추고, 실질적인 수입(고쿠다카) 또한 줄이는 명백한 좌천이었다.
갑작스러운 영지 변경과 가문의 위상 하락으로 인해 아키토키는 새로운 부임지인 사바에에서 처음부터 번의 기틀을 다져야 하는 어려운 상황에 놓였다. 그는 가신단을 새로 편성하고 마을을 건설하는 등 번정 확립에 힘썼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실의를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35세의 젊은 나이에 에도 시바(芝)의 미타(三田) 저택에서 사망했다. 아키토키에게는 아들이 한 명 있었으나 일찍 사망하였기에, 조카(형 마나베 아키사다의 아들)인 마나베 아키카타를 양자로 들여 후사를 잇게 하였다.
2.3. 번정 개혁과 사망
교호 5년(1720년) 9월 12일, 양부 마나베 아키후사가 사망하자 가독을 상속받았다. 그러나 상속 직후, 에치고 무라카미에서 엣젠 사바에로 영지가 옮겨졌다. 이는 쇼군 도쿠가와 이에노부와 도쿠가와 이에쓰구 시대에 권세를 누렸던 마나베 가문을 견제하기 위한 조치로, 성주 다이묘에서 진야를 거점으로 하는 무성(無城) 다이묘로 격하되고 실질적인 수입도 줄어드는 사실상의 좌천이었다.
이 때문에 아키토키는 새로운 영지인 사바에에서 처음부터 번의 행정 체계를 세우는 데 힘써야 했다. 가신단을 다시 편성하고 마을을 건설하는 등의 노력이 필요했다. 하지만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 아키토키는 실의에 빠졌고, 결국 35세의 젊은 나이로 에도 시바의 미타(三田) 저택에서 사망했다. 아들이 있었으나 일찍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형 아키사다(明貞)의 아들인 조카 마나베 아키카타를 양자로 삼아 가문을 잇게 했다.
3. 가계
| 관계 | 이름 | 비고 |
|---|---|---|
| 부모 | 니시다 기요사다 | 친부 |
| 코주인 | 친모, 오가와 지로에몬의 딸 | |
| 마나베 아키후사 | 양부 | |
| 정실 | 호렌인, 타키 | 아베 마사타카의 양녀 |
| 자녀 | 켄부 | 나가이 나오히로 정실 |
| 양자 | 마나베 아키카타 | 마나베 아키사다의 장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