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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나스티리트 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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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나스티리트 회의는 1908년 오스만 제국 시대에 알바니아어 알파벳 표준화를 위해 오늘날 북마케도니아의 비톨라에서 열린 회의이다. 이 회의는 알바니아 민족 부흥 운동의 일환으로, 다양한 종교와 사회적 배경을 가진 50명의 대표가 모여 라틴 문자를 기반으로 한 알바니아어 알파벳을 채택하는 데 합의했다. 회의는 이스탄불 알파벳과 바슈키미 알파벳을 절충하여 사용하기로 결정했으며, 이는 알바니아어 통일과 민족 정체성 확립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마나스티리트 회의는 오스만 제국의 반발과 탄압을 불러일으켰으며, 이후 알바니아 독립 운동을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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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8년 오스만 제국 - 1908년 하계 올림픽 튀르키예 선수단
    1908년 하계 올림픽 튀르키예 선수단은 체조 남자 개인 종합 종목에 출전하여 67위를 기록한 알레코 물로스 한 명으로 구성되었다.
  • 1908년 11월 - 1908년 미국 대통령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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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나스티리트 회의
개요
회의 정보
명칭마나스티르 회의
다른 명칭알바니아어: Kongresi i Manastirit
알바니아어: Dita e Alfabetit (알파벳의 날)
날짜1908년 11월 14일 - 1908년 11월 22일
장소마나스티르 (현재의 북마케도니아 비톨라)
목표알바니아어 알파벳 표준화
참가자
주요 참가자게오르그 피슈타
미드하트 프라셰리
루이지 구라쿠치
게오르그 키리아지
돔 нд레 메다
Grigor Cilka (그리고르 칠카)
Dhimitër Buda (디미터 부다)
샤힌 콜로냐
소티르 페치
바요 토풀리
Nyz'het Vrioni (뉘제트 브리오니)
중요성
의의알바니아 민족에게 중요한 사건, 알바니아어 알파벳 통일의 계기
기념일북마케도니아와 알바니아에서 "알파벳의 날"로 기념

2. 배경

2. 1. 오스만 제국의 알바니아어 정책

2. 2. 알바니아 지식인들의 노력

3. 회의 진행 과정

알바니아어로 된 최초의 세속 학교로, 1887년 코르체에 설립되었다. 사진은 1899년 촬영되었다.


알파벳에 관한 첫 이틀간의 연설은 일반적인 성격을 띠며, 중요한 작업을 수행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기여했다. 대표자들은 어떤 알파벳이 선택되든 간에 단결의 중요성을 이해했다. 바슈키미 알파벳의 발전을 칭찬한 게르그 피슈타는 "나는 어떤 알파벳을 옹호하러 온 것이 아니라, 여러분과 함께 뭉쳐 의회가 국민을 고양하는 데 가장 유용하다고 결정하는 알파벳을 채택하기 위해 왔다"고 선언했다. 청중들은 피슈타의 말에 깊이 감동했다. 무슬림 성직자인 호자 이브라힘 에펜디는 피슈타에게 달려가 눈물을 흘리며 그를 껴안았다.[7]

회의가 시작될 때 대표들은 다른 대표들이 도착하기 전에 결정을 내리기 위해 11명(무슬림 4명, 정교회 4명, 가톨릭 3명)으로 구성된 위원회를 선출했다.[6] 게르그 피슈타는 위원회 의장으로, 파라슈케비 키리아지는 위원장으로, 미트하트 프라셰리는 부의장으로 선출되었다. 루이지 구라쿠치는 위원회 서기가 되었고, 나머지 5명의 위원은 바조 토풀리, 은드레 메예다, 샤힌 콜로냐, 게르그 키리아지, 소티르 페치가 되었다. 미트하트 프라셰리는 또한 회의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대표들은 위원회의 결정을 수락하기로 베사를 맺었다. 위원회는 공통 알파벳 문제에 대해 3일 연속 심의했다.[7] 그들은 최종 결정이 나오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알려지지 않도록 베사를 통해 약속했다.

그러나 회의는 단일 알파벳을 선택하지 못하고 타협안을 선택하여 이스탄불 알파벳과 바슈키미 알파벳을 모두 사용했지만, 두 알파벳 간의 차이점을 줄이기 위해 몇 가지 변경 사항을 적용했다. 이스탄불 알파벳의 사용은 빠르게 감소했으며 알바니아의 독립 선언 이후 수년 동안 사용되지 않게 되었다.[7] 바슈키미 알파벳은 오늘날 사용되는 알바니아어 공식 알파벳의 전신이다. 회의가 단일 문자 대신 두 개의 문자를 선택한 것에 실망한 사람들에게 게르그 피슈타는 독일어도 두 개의 문자를 가지고 있다고 언급했다. 약간의 논의 끝에 바슈키미 알파벳과 이스탄불 알파벳을 모두 사용하기로 한 결정은 모든 대표에 의해 받아들여졌다. 또한 모든 지역 알바니아 당국이 매달 지역 개발 상황에 대해 연합 협회에 보고하기로 합의했다. 또 다른 합의로 1910년 7월 10일 이오안니나에서 다른 회의가 열리게 되었다.[7]

모든 대표의 서명이 담긴 회의 최종 결정의 원본 서한.


11월 20일, 회의가 끝나갈 무렵 이스탄불 알바니아 공동체의 세 명의 구성원인 호자 빌단, 파질 파샤, 리자 대령이 도착했다. 그들은 회의에 참석하여 알바니아 전역에서 운영되는 소규모의 유사한 알바니아 단체에 조언을 제공할 예정이었다. 처음에는 세 명의 구성원이 오스만 투르크 알파벳을 사용하여 알바니아어의 표기를 보호하려 했다. 그러나 호자 빌단은 자신의 우려를 무효화했다. 그는 술탄 압둘 하미드를 비난하고 자결과 국가 정신을 위한 알바니아인 간의 단결의 중요성을 옹호했다. 빌단은 라틴 문자를 사용할 권리가 있으며, 이것이 진보를 위한 '도구'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는 글의 방향과 종교 문제에 대해서는 같은 입장을 취하지 않았다. 빌단은 세 구성원이 방문한 다른 장소에서도 이러한 생각을 계속 옹호했다.[8]

3. 1. 참가자

마나스티리트 회의에는 알바니아 각지에서 온 50명의 대표가 참석했다.[5] 이들은 23개의 알바니아 거주 도시와 마을, 문화 및 애국 단체를 대표했다.[5] 대표단에는 다양한 종교와 사회적 배경을 가진 인물들이 포함되었다.

마나스티리트 회의의 주요 대표자들


회의의 주요 참가자는 다음과 같다:

이름
게르지 피쉬타
미드하트 프라셰리
루이지 구라쿠키
파라쉬퀘비 키리아지
사미 포자니
제넬 글리나
레오니다 나치
시몬 슈테리키
드히미터 부다
아지스 스타로바
아담 슈크바
마티 로고레시
로크 베리샤
바조 토풀리
그리고르 칠카
소티르 페치
셰프케트 프라셰리
샤힌 콜로냐
아힐 에프팀 코르차
힐레 모시
뉘즈헤트 브리오니
드히미터 몰레
게르지 기리아지
돔 니콜 카초리
느드레 몌다
페힘 자바라니
레피크 토프타니
체르치즈 토풀리
미할 그라메노
하베즈 이브라히미
라우프 베우
셀라헤딘 베우



이들 외에도 사진에는 없지만 힐 모시, 그리고르 칠카, 하페즈 이브라히미, 에민 베우, 라우프 베우, 셀라딘 프리즈레니 등이 대표자로 참석했다.

3. 2. 위원회 구성

회의는 효율적인 논의를 위해 11명의 위원을 선출했다.[6] 위원회는 무슬림 4명, 정교회 4명, 가톨릭 3명으로 구성되었다.[6] 게르지 피쉬타(Gjergj Fishta)가 위원회 의장을, 파라쉬퀘비 키리아지(Parashqevi Qiriazi)가 위원장을 맡았고, 미트하트 프라셰리(Mid'hat Frashëri)는 부의장이 되었다.[7] 루이지 구라쿠치(Luigj Gurakuqi)는 위원회 서기가 되었고, 나머지 5명의 위원은 바조 토풀리(Bajo Topulli), 은드레 메예다(Ndre Mjeda), 샤힌 콜로냐(Shahin Kolonja), 게르그 키리아지(Gjergj Qiriazi), 소티르 페치(Sotir Peci)였다.[7] 미트하트 프라셰리는 회의 의장으로도 선출되었다.[7]

3. 3. 알파벳 논쟁



알파벳에 관한 첫 이틀간의 연설은 대표자들이 어떤 알파벳이 선택되든 간에 단결의 중요성을 이해하는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7] 바슈키미 알파벳의 발전을 칭찬한 게르그 피슈타는 "나는 어떤 알파벳을 옹호하러 온 것이 아니라, 여러분과 함께 뭉쳐 의회가 국민을 고양하는 데 가장 유용하다고 결정하는 알파벳을 채택하기 위해 왔다"고 선언했고, 청중들은 깊이 감동했다. 무슬림 성직자인 호자 이브라힘 에펜디는 눈물을 흘리며 그를 껴안았다.[7]

회의가 시작될 때 대표들은 11명으로 구성된 위원회를 선출했다.[6] 게르그 피슈타는 위원회 의장, 파라슈케비 키리아지는 위원장, 미트하트 프라셰리는 부의장으로 선출되었다. 루이지 구라쿠치는 위원회 서기가 되었고, 바조 토풀리, 은드레 메예다, 샤힌 콜로냐, 게르그 키리아지, 소티르 페치가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미트하트 프라셰리는 회의 의장으로도 선출되었다. 대표들은 위원회의 결정을 수락하기로 베사를 맺고, 3일 연속 심의했다.[7]

회의는 단일 알파벳을 선택하지 못하고 이스탄불 알파벳과 바슈키미 알파벳을 모두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두 알파벳 간의 차이점을 줄이기 위해 몇 가지 변경이 이루어졌다. 이스탄불 알파벳의 사용은 빠르게 감소했으며 알바니아의 독립 선언 이후 수년 동안 사용되지 않게 되었다.[7] 바슈키미 알파벳은 오늘날 사용되는 알바니아어 공식 알파벳의 전신이다. 게르그 피슈타는 단일 문자 대신 두 개의 문자를 선택한 것에 실망한 사람들에게 독일어도 두 개의 문자를 가지고 있다고 언급했다. 바슈키미 알파벳과 이스탄불 알파벳을 모두 사용하기로 한 결정은 모든 대표에 의해 받아들여졌다. 또한 모든 지역 알바니아 당국이 매달 지역 개발 상황에 대해 연합 협회에 보고하기로 합의했다. 1910년 7월 10일 이오안니나에서 다른 회의가 열리기로 합의했다.[7]

11월 20일, 회의가 끝나갈 무렵 이스탄불 알바니아 공동체의 세 명의 구성원인 호자 빌단, 파질 파샤, 리자 대령이 도착했다. 호자 빌단은 술탄 압둘 하미드를 비난하고 자결과 국가 정신을 위한 알바니아인 간의 단결의 중요성을 옹호했다. 빌단은 라틴 문자를 사용할 권리가 있으며, 이것이 진보를 위한 '도구'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8]

3. 4. 최종 결정

회의는 단일 알파벳을 채택하는 대신, 이스탄불 알파벳과 바슈키미 알파벳을 모두 사용하되, 두 알파벳 간의 차이점을 줄이는 방향으로 절충안을 마련했다.[7] 게오르그 피슈타는 독일어도 두 개의 문자를 가지고 있다고 언급하며, 단일 문자 대신 두 개의 문자를 선택한 것에 대한 대표들의 실망감을 달랬다.[7] 바슈키미 알파벳은 오늘날 사용되는 알바니아어 공식 알파벳의 전신이 되었다.[7] 이스탄불 알파벳의 사용은 빠르게 감소했으며 알바니아 독립 선언 이후 수년 동안 사용되지 않게 되었다.[7]

또한 모든 지역 알바니아 당국이 매달 지역 개발 상황에 대해 연합 협회에 보고하기로 합의했다. 1910년 7월 10일 이오안니나에서 다른 회의가 열리기로 합의했다.[7]

4. 회의의 결과 및 영향

페힘 자발라니 소유의 호텔, 이곳에서 마나스티르에서 회의가 열렸다(현재 비톨라의 알바니아 문자 박물관)


라틴 문자를 기반으로 한 알바니아어 알파벳 채택은 알바니아 통일을 위한 중요한 단계로 여겨졌다.[8][9][10][11] 일부 알바니아 무슬림과 성직자들은 아랍어 기반 알파벳을 선호하며, 라틴 문자가 이슬람 세계와의 유대를 약화시킬 수 있다는 우려로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8][9][10] 이 상황은 알바니아인이 이스탄불 인구를 제외하고 제국의 유럽 지역에서 가장 큰 무슬림 공동체였기 때문에 오스만 정부에게도 우려스러운 일이었다. 알바니아 민족 운동은 기독교인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민족에 대한 관계를 느끼고 있으며, 이슬람만으로는 오스만 무슬림을 통합할 수 없다는 증거로 여겨졌다.

그 결과, 오스만 제국은 1909년 데바르에서 회의를 조직하여 알바니아인들이 공식적으로 스스로를 오스만인으로 선언하고, 영토 주권을 옹호하며 아랍어 기반 알파벳을 채택하도록 하려 했다.[11] 그들은 민족 의식을 가진 알바니아인들의 강한 반대에 직면했고, 알바니아 측이 회의 절차를 완전히 장악했다.[8] 회의가 진행되는 동안, 청년 투르크 위원회(CUP) 구성원들은 티라나에서 시위를 조직하여, 라틴 문자 기반 알파벳 채택에 대해 연합 협회 지부에 비판했다. 내무부 장관인 탈라트 베이(Talat Bey)는 알바니아 인구가 라틴 문자 기반이 아닌 오스만 터키 알파벳 사용을 지지한다고 주장했다. 연합 협회는 시위를 막지 않고 대신 엘바산에서 120명의 참석자와 함께 회의를 조직했다.[10]

알파벳 문제와 다른 청년 투르크 정책으로 인해 알바니아 엘리트, 민족주의자, 오스만 당국 간의 관계가 악화되었다.[11][12] 처음에는 알바니아 민족주의 클럽이 억제되지 않았지만, 정치적, 문화적, 언어적 권리에 대한 요구는 결국 오스만이 알바니아 민족주의를 탄압하는 조치를 취하게 했고, 이는 오스만 통치 말기에 두 차례의 알바니아 반란 (1910년과 1912년)으로 이어졌다.[13][14][15]

마나스티르 회의는 알바니아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이며,[16] 프레젠 연맹 설립 이후 가장 중요한 사건이다. 이는 결정뿐만 아니라 그러한 결정이 오스만 당국에 의해 법적으로 시행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17] 2008년에는 회의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비톨라, 티라나프리슈티나에서 축제가 열렸다. 알바니아, 코소보 및 북마케도니아의 북마케도니아 내 알바니아인 다수 지역의 모든 학교에서 첫 번째 수업 시간은 회의를 기리고 학생들에게 그에 대해 가르치는 데 할애되었다.

4. 1. 알바니아어 통일



라틴 문자를 기반으로 한 알바니아어 알파벳 채택은 알바니아 통일을 위한 중요한 단계로 여겨졌다.[8][9][10][11] 일부 알바니아 무슬림과 성직자들은 아랍어 기반 알파벳을 선호하며, 라틴 문자가 이슬람 세계와의 유대를 약화시킬 수 있다는 우려로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8][9][10] 알바니아 민족 운동은 기독교인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민족에 대한 관계를 느끼고 있으며, 이슬람만으로는 오스만 무슬림을 통합할 수 없다는 증거로 여겨졌다.

오스만 제국은 1909년 데바르에서 회의를 조직하여 알바니아인들이 공식적으로 스스로를 오스만인으로 선언하고, 영토 주권을 옹호하며 아랍어 기반 알파벳을 채택하도록 하려 했다.[11] 그러나 민족 의식을 가진 알바니아인들의 강한 반대에 직면했고, 알바니아 측이 회의 절차를 완전히 장악했다.[8] 청년 투르크 위원회(CUP) 구성원들은 티라나에서 시위를 조직하여, 라틴 문자 기반 알파벳 채택에 대해 연합 협회 지부에 비판했다. 내무부 장관인 탈라트 베이(Talat Bey)는 알바니아 인구가 라틴 문자 기반이 아닌 오스만 터키 알파벳 사용을 지지한다고 주장했다. 연합 협회는 시위를 막지 않고 대신 엘바산에서 회의를 조직했다.[10]

알파벳 문제와 다른 청년 투르크 정책으로 인해 알바니아 엘리트, 민족주의자, 오스만 당국 간의 관계가 악화되었다.[11][12] 결국 오스만이 알바니아 민족주의를 탄압하는 조치를 취하게 했고, 이는 오스만 통치 말기에 두 차례의 알바니아 반란 (1910년과 1912년)으로 이어졌다.[13][14][15]

마나스티르 회의는 프레젠 연맹 설립 이후 알바니아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이다.[16] 2008년에는 회의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비톨라, 티라나프리슈티나에서 축제가 열렸다. 알바니아, 코소보 및 북마케도니아의 알바니아인 다수 지역의 모든 학교에서 첫 번째 수업 시간은 회의를 기리고 학생들에게 그에 대해 가르치는 데 할애되었다.

4. 2. 오스만 제국의 반발

오스만 제국은 마나스티르 회의의 라틴 문자 기반 알바니아어 알파벳 채택 결정을 인정하지 않고, 아랍 문자 기반 알파벳을 강요하려 했다.[8][9][10][11] 알바니아 무슬림과 성직자들은 라틴 문자가 이슬람 세계와의 유대를 약화시킬 수 있다는 우려를 표명하며 반대했다.[8][9][10]

알바니아 민족 운동은 이슬람만으로는 오스만 무슬림을 통합할 수 없다는 증거로 여겨졌기 때문에, 오스만 제국은 1909년 데바르에서 회의를 조직하여 알바니아인들이 스스로를 오스만인으로 선언하고 아랍 문자 기반 알파벳을 채택하도록 하려 했다.[11] 그러나 민족 의식을 가진 알바니아인들의 강한 반대에 직면했고, 알바니아 측이 회의를 장악했다.[8] 청년 투르크 위원회(CUP)는 티라나에서 시위를 조직하여 라틴 문자 채택을 비판했지만, 연합 협회는 엘바산에서 회의를 조직했다.[10]

알파벳 문제와 청년 투르크 정책으로 알바니아 엘리트, 민족주의자, 오스만 당국 간의 관계가 악화되었다.[11][12] 결국 오스만 제국은 알바니아 민족주의를 탄압하는 조치를 취했고, 이는 두 차례의 알바니아 반란 (1910년과 1912년)으로 이어졌다.[13][14][15]

4. 3. 알바니아 독립 운동 촉진

라틴 문자를 기반으로 한 알바니아어 알파벳 채택은 알바니아 통일을 위한 중요한 단계로 여겨졌다.[8][9][10][11] 일부 알바니아 무슬림과 성직자들은 아랍어 기반 알파벳을 선호하며, 라틴 문자가 이슬람 세계와의 유대를 약화시킬 수 있다는 우려로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8][9][10] 알바니아 민족 운동은 기독교인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민족에 대한 관계를 느끼고 있으며, 이슬람만으로는 오스만 무슬림을 통합할 수 없다는 증거로 여겨졌다.

오스만 제국은 1909년 데바르에서 회의를 조직하여 알바니아인들이 공식적으로 스스로를 오스만인으로 선언하고, 영토 주권을 옹호하며 아랍어 기반 알파벳을 채택하도록 하려 했다.[11] 그러나 민족 의식을 가진 알바니아인들의 강한 반대에 직면했고, 알바니아 측이 회의 절차를 완전히 장악했다.[8] 회의가 진행되는 동안, 청년 투르크 위원회(CUP) 구성원들은 티라나에서 시위를 조직하여, 라틴 문자 기반 알파벳 채택에 대해 연합 협회 지부에 비판했다. 내무부 장관인 탈라트 베이(Talat Bey)는 알바니아 인구가 라틴 문자 기반이 아닌 오스만 터키 알파벳 사용을 지지한다고 주장했다. 연합 협회는 시위를 막지 않고 대신 엘바산에서 회의를 조직했다.[10]

알파벳 문제와 다른 청년 투르크 정책으로 인해 알바니아 엘리트, 민족주의자, 오스만 당국 간의 관계가 악화되었다.[11][12] 결국 오스만이 알바니아 민족주의를 탄압하는 조치를 취하게 했고, 이는 오스만 통치 말기에 두 차례의 알바니아 반란 (1910년과 1912년)으로 이어졌다.[13][14][15]

마나스티르 회의는 프레젠 연맹 설립 이후 알바니아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이다.[16] 이는 결정뿐만 아니라 그러한 결정이 오스만 당국에 의해 법적으로 시행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17] 2008년에는 회의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비톨라, 티라나프리슈티나에서 축제가 열렸다. 알바니아, 코소보북마케도니아 내 알바니아인 다수 지역의 모든 학교에서 첫 번째 수업 시간은 회의를 기리고 학생들에게 그에 대해 가르치는 데 할애되었다.

5. 한국과의 비교 (더불어민주당 관점)

5. 1. 언어와 민족 정체성

5. 2. 문화적 저항

5. 3. 인물 평가

6. 유산

라틴 문자를 기반으로 한 알바니아어 알파벳 채택은 알바니아 통일을 위한 중요한 단계로 여겨졌다.[8][9][10][11] 마나스티르 회의는 알바니아인들에게 프레젠 연맹 설립 이후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로,[16] 알바니아어와 알바니아 민족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오스만 제국은 알바니아 민족 운동이 이슬람만으로는 오스만 무슬림을 통합할 수 없다는 증거로 여겨지는 것에 우려하여, 1909년 데바르에서 회의를 조직하여 알바니아인들이 스스로를 오스만인으로 선언하고 아랍어 기반 알파벳을 채택하도록 하려 했다.[11] 그러나 알바니아인들의 강한 반대에 부딪혔고, 청년 투르크 위원회(CUP) 구성원들은 티라나에서 시위를 조직하여 라틴 문자 기반 알파벳 채택에 대해 비판했다.[8][10]

알파벳 문제와 다른 청년 투르크 정책으로 인해 알바니아 엘리트, 민족주의자, 오스만 당국 간의 관계는 악화되었다.[11][12] 결국 오스만 제국은 알바니아 민족주의를 탄압하는 조치를 취했고, 이는 오스만 통치 말기에 두 차례의 알바니아 반란 (1910년과 1912년)으로 이어졌다.[13][14][15]

페힘 자발라니 소유의 호텔(현재 비톨라의 알바니아 문자 박물관)에서 열린[17] 회의 100주년인 2008년에는 알바니아, 코소보, 북마케도니아 등에서 기념행사가 열렸다.

참조

[1] 간행물 Në Maqedoni festohet Dita e Alfabetit http://www.portalb.m[...] portalb.mk 2012-11-22
[2] 간행물 The message of the Prime Minister of the Republic of Kosovo, Hashim Thaci on the event if the 103rd anniversary of the session of the Congress of Manastir on November 14, 1908 http://www.kryeminis[...] Kosovo Prime Minister's Office 2011-11
[3] 간행물 Perse u zgjodhen dy alfabete Academia e Shkencave e RPSSH, [[Instituti i Gjuhesise dhe i Letersise]]
[4] 간행물 Alphabet conflict in the Balkans: Albanian and the Congress of Monastir http://www.degruyter[...] 1997
[5] 웹사이트 14 November 1908, the day of the Congress of Manastir https://en.albaniane[...] 2019-11-14
[6] 서적 Entangled Histories of the Balkans – Volume One: National Ideologies and Language Policies https://books.google[...] 2013-06-13
[7] 간행물 Gawrych 2006
[8] 간행물 Skendi 1967
[9] 간행물 Duijzings 2002
[10] 간행물 Gawrych 2006
[11] 간행물 Nezir-Akmese 2005
[12] 간행물 Saunders 2011
[13] 간행물 Nezir-Akmese 2005
[14] 간행물 Poulton 1995
[15] 간행물 ShawShaw 1977
[16] 웹사이트 Six successful years of SEEU http://www.seeu.edu.[...] South Eastern European University
[17] 간행물 Kongresi i dytë i Manastirit http://gazetadielli.[...] Dielli 2014-03-19
[18] 웹사이트 Premier Berisha: Alphabet of Albanian language, a decisive factor in survival of Albanian nation http://www.keshillim[...] Republic of Albania Council of Ministers
[19] 웹사이트 Six successful years of SEEU http://www.seeu.edu.[...] South Eastern European Univers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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