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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부르크 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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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르부르크 회의는 1529년 헤센의 필리프가 주도하여 개신교 신자들의 통합을 위해 열린 회의이다. 마르틴 루터와 울리히 츠빙글리를 비롯한 주요 종교 개혁가들이 참석하여 14개 신학적 문제에 합의했으나, 성찬례에 대한 이견으로 결렬되었다. 루터는 그리스도의 몸이 빵 안에 현존한다고 주장한 반면, 츠빙글리는 이를 거부하며 그리스도의 육신은 하늘에 있다고 주장했다. 회의 결과, 마르부르크 조항이 작성되었으나, 성찬례에 대한 최종 합의에는 이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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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부르크 회의
회의 정보
이름마르부르크 종교 회의
로마자 표기Mareubeureukeu jonggyo hoeui
영어 이름Marburg Colloquy
날짜1529년 10월 1일 ~ 10월 4일
장소독일 헤센 주 마르부르크
의제성찬에 대한 마르틴 루터울리히 츠빙글리 간의 의견 차이
주요 참가자마르틴 루터
울리히 츠빙글리
헤센의 필리프 1세
결과15개 조항 중 14개 조항에 합의
성찬에 대한 견해차로 완전한 합의 실패

2. 배경

헤센 방백 필리프는 종교개혁 진영이 분열된 상태로는 카를 5세에게 취약하다고 판단하여, 주요 개신교 지도자들을 통합하려는 정치적 동기를 가지고 있었다. 통일된 세력으로서 그들은 더 강력해 보일 것이었다. 통일을 위해서는 개신교 진영 내부의 종교적 화합이 필수적이었다.[1]

3. 참가자

울리히 츠빙글리


필리프 멜란히톤 (본명 필리프 슈바르처트)


마르틴 부처


카스파 헤디오


유스투스 요나스


안드레아스 오시안더

4. 회담의 진행 과정과 주요 쟁점

헤센의 필리프는 개신교 세력이 분열된 상태로는 카를 5세에게 취약하다고 판단하여 주요 개신교 지도자들을 통합하려는 정치적 동기를 가지고 있었다. 통일된 세력은 더 강력해 보일 것이기 때문에, 개신교 신자들 사이의 종교적 화합은 필수적이었다.[1]

이러한 상황에서 루터츠빙글리를 비롯한 주요 종교 개혁가들은 1529년 마르부르크에서 회담을 가졌다. 이들은 14가지 신학적 문제에 대해서는 합의를 이루었으나, 성만찬에 대한 15번째 문제에서 의견이 갈렸다.

( * 이후 내용은 '성만찬 논쟁' 하위 섹션에서 자세히 다루고 있으므로 생략)

결국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회담은 결렬되었으며, 이는 양측 모두에게 큰 실망감을 안겨주었다. 츠빙글리는 눈물을 흘리며 루터파와의 결합을 원한다는 심정을 표현하기도 했다.[6] 비록 회담은 실패했지만, 이후 루터와 츠빙글리는 서로를 존중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8]

4. 1. 성만찬 논쟁

''마르부르크 회의''


루터츠빙글리는 14개의 신학적 문제에 대해 합의를 이루었지만,[1] 성찬례와 관련된 15번째 문제에 대해서는 합의를 찾을 수 없었다.[2] 루터와 츠빙글리 모두 성찬례의 빵이 표징이라는 데 동의했다. 그러나 루터에게 빵이 의미하는 것, 즉 그리스도의 몸은 표징 '안에, 함께, 그리고 아래에' 있었다. 츠빙글리에게는 표징과 표상되는 것은 거리, 즉 하늘과 땅 사이의 넓이만큼 분리되어 있었다.[2]

이러한 불일치의 근본에는 그들의 그리스도론이 있었다. 루터는 그리스도의 육신이 편재(모든 곳에 존재)하며 빵과 포도주에도 현존한다고 믿었다. 이는 하나님의 속성이 그리스도의 인성에 스며들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루터는 그리스도의 인격의 일치성을 강조했다. 츠빙글리는 본성의 구분을 강조하며, 그리스도가 신성으로 편재하는 반면, 그리스도의 육신은 오직 한 곳, 즉 아버지의 오른편에만 존재할 수 있다고 믿었다.[3]

루터는 그리스도의 몸이 인간의 이해를 넘어선 어떤 신비로운 방식으로 먹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츠빙글리는 만약 문자적인 의미로 받아들인다면, 몸은 가장 거칠고 물질적인 방식으로 먹어야 한다고 대답했다. 츠빙글리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루터가 "구원의 주요점을 그리스도의 몸을 육체적으로 먹는 것"에 두었고, 그것을 죄의 용서와 연결했기 때문이다.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에 의해서, 오직 믿음을 통해서 이루어지며, 믿음과 빵을 통해서가 아니었다. 츠빙글리는 "믿는다는 것은 먹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성찬례에서 그리스도의 몸을 먹고 피를 마시는 것은 단순히 마음속에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현존하는 것을 의미했다.[4]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 분명해지자, 회의 막바지에 필리프는 루터에게 양측이 동의하는 교리 목록을 작성해 달라고 요청했다.[1] 슈바바흐 조항을 기반으로 한 마르부르크 조항은 15개 조항으로 구성되었으며, 회의에 참석한 모든 사람은 처음 14개 조항에 동의할 수 있었다.[1] 마르부르크 조항의 15번째 조항은 다음과 같다.[5]

합의를 찾지 못한 것은 양측 모두에게 강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츠빙글리는 "내가 루터교 비텐베르크인들과 함께하고 싶은 사람은 세상에 없다."라고 눈물을 흘리며 외쳤다.[6] 이러한 차이로 인해 루터는 처음에 츠빙글리와 그의 추종자들을 그리스도인으로 인정하는 것을 거부했지만,[7] 회의 이후 두 종교 개혁가는 비교적 더 많은 상호 존중을 글에서 보여주었다.[8]

5. 회담의 결과 및 영향

이후의 아우크스부르크 제국 회의에서 츠빙글리파와 루터파는 마르부르크 회의에서 다루었던 것과 동일한 문제들을 다시 탐구했으며, 의견 차이를 보여주는 별개의 성명서를 제출했다.[4]

참조

[1] 백과사전 Colloquy of Marburg https://www.britanni[...] 2016-12-25
[2] 서적 Theology of the Reformers B&H Publishing Group
[3] Lecture Luther: Gospel, Law and Reformation
[4] 서적 Theology of the Reformers B&H Publishing Group
[5] 문서 The Marburg Articles (1529) http://germanhistory[...] German History in Documents and Images
[6] 서적 Theology of the Reformers B&H Publishing Group
[7] 서적 Huldreich Zwingli, the Reformer of German Switzerland 1903
[8] 서적 Zwingli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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