란드리아노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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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란드리아노 전투는 1529년 6월 21일 프랑수아 1세가 롬바르디아 지역 란드리아노에 주둔시킨 프랑스군과 테라노바 공작 안토니오 데 레이바가 이끄는 스페인군 사이에서 벌어진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전멸했고, 프랑스는 이탈리아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했다. 프랑스군 패배 후, 프랑수아 1세는 신성 로마 황제와 협상하여 캉브레 조약을 체결하고, 이탈리아에 대한 권리를 포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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란드리아노 전투 | |
---|---|
전투 정보 | |
분쟁 | 코냐크 동맹 전쟁 |
날짜 | 1529년 6월 21일 |
장소 | 이탈리아 롬바르디아주 란드리아노 |
결과 | 제국-스페인군의 승리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프랑스 피렌체 공화국 밀라노 공국 |
교전국 2 | 카를 5세 제국 신성 로마 제국 스페인 |
지휘관 | |
지휘관 1 | 생폴 백작 프랑수아 드 부르봉 |
지휘관 2 | 안토니오 데 레이바 |
2. 배경
1528년 4월, 안드레아 도리아가 이끄는 제노바 함대가 나폴리를 해상에서 봉쇄하며 나폴리 공성전이 시작되었다.[11] 그러나 7월에 도리아 제독은 신성 로마 황제 카를 5세와 새로운 용병 계약을 맺고 전장을 이탈하여 봉쇄를 풀었다.[11]
흑사병으로 인해 프랑스군 지휘관 로트레크 자작 (오데 드 푸아)을 비롯한 많은 병사들이 사망하면서 프랑스군은 큰 타격을 입었다.[11] 8월 15일 로트레크 자작이 사망하자,[11] 조반니 루도비코 디 살루초가 지휘권을 인계받아 8월 29일 철수를 결정했다.[11] 철수하던 프랑스군은 오랑주 공 (필리베르 드 샬롱)이 이끄는 제국-스페인 연합군의 추격으로 큰 피해를 입었고,[11] 얼마 지나지 않아 이탈리아 남부의 프랑스군 전체가 항복했다.[8]
1528년 8월과 1529년 6월 사이에 프랑수아 1세와 카를 5세 간의 외교 활동이 활발하게 진행되어 바르셀로나 조약이 체결되었다.[11]
2. 1. 나폴리 공성전 (1528)
1528년 4월, 안드레아 도리아가 이끄는 제노바 함대가 나폴리를 해상에서 봉쇄하며 나폴리 공성전이 시작되었다.[11] 그러나 7월에 도리아 제독은 신성 로마 황제 카를 5세와 새로운 용병 계약을 맺고 전장을 이탈하여 봉쇄를 풀었다.[11]흑사병으로 인해 프랑스군 지휘관 로트레크 자작 (오데 드 푸아)을 비롯한 많은 병사들이 사망하면서 프랑스군은 큰 타격을 입었다.[11] 8월 15일 로트레크 자작이 사망하자,[11] 조반니 루도비코 디 살루초가 지휘권을 인계받아 8월 29일 철수를 결정했다.[11] 철수하던 프랑스군은 오랑주 공 (필리베르 드 샬롱)이 이끄는 제국-스페인 연합군의 추격으로 큰 피해를 입었고,[11] 얼마 지나지 않아 이탈리아 남부의 프랑스군 전체가 항복했다.[8]
1528년 8월과 1529년 6월 사이에 프랑수아 1세와 카를 5세 간의 외교 활동이 활발하게 진행되어 바르셀로나 조약이 체결되었다.[11]
2. 2. 바르셀로나 조약 (1529)
1528년 4월에 시작된 나폴리 공성전은 제노바 출신 해군 제독 안드레아 도리아가 프랑스 편에 가담하여 나폴리를 해상에서 봉쇄하면서 시작되었다.[11] 그러나 7월에 도리아 제독은 신성로마 황제 카를 5세와 새로운 용병계약을 한 후 전장을 이탈하면서 나폴리 항구에 대한 해상 봉쇄를 풀어버렸다.[11]나폴리 공성전은 8월경 프랑스군의 실패로 끝났는데, 이는 프랑스 진영에 흑사병이 발생하여 많은 병사와 지휘관들이 사망했기 때문이다.[11] 8월 15일에 프랑스 지휘관 로트레크 자작 (오데 드 푸아)이 사망한 후[11], 지휘권을 이어받은 조반니 루도비코 디 살루초가 8월 29일에 프랑스 군대를 철수시켰다.[11] 철수하던 프랑스 군대는 오랑주 공 (필리베르 드 샬롱)이 이끄는 제국-스페인 연합군의 추격으로 큰 피해를 보았으며[11], 얼마 안 있어 이탈리아 남부에 있던 프랑스군 전체가 항복하였다.[8]
1528년 8월과 1529년 6월 사이,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와 신성 로마 황제 카를 5세 간의 활발한 외교 활동으로 바르셀로나 조약이 체결되었다.[11]
3. 란드리아노 전투 (1529)
1529년 6월 21일 프랑수아 1세는 파비아 인근 롬바르디아 지역인 란드리아노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었다.[8] 생폴 백작 휘하의 프랑스군과 테라노바 공작 (안토니오 데 레이바)가 이끄는 스페인군 사이에 교전이 벌어졌다.[10] 이 전투에서 프랑스 군이 전멸 당하면서, 국왕 프랑수아 1세는 이탈리아에 대한 지배력을 되찾으려는 희망을 완전히 잃게 되었다.[12][5] 프랑스군 지휘관 생폴 백작(프랑수아 드 부르봉)은 포로로 잡혔고, 밀라노 공국은 카를 5세의 완전한 통제권하에 놓이게 되었다.[10][3]
그러나 오렌지 공 필리베르가 이끄는 제국-스페인 군대는 피렌체 공화국을 상대로 군사 행동을 계속하여 알레산드로 데 메디치를 피렌체의 통치자로 세웠다.[6]
4. 전투의 여파
란드리아노 전투에서 프랑스가 패배하고 바르셀로나 조약이 체결되자, 프랑수아 1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와 협상을 시작해야 했다.[8][2] 1529년 8월 3일, 프랑수아 1세의 어머니 루이사 디 사보이아와 황제의 이모 오스트리아의 마르가레테는 캉브레 조약을 체결했다.[8][2] 프랑수아 1세는 그의 두 아들을 돌려받았지만,[10][3] 이탈리아를 포기하고,[10][3] 베네치아인들과 페라라 공작에게 점령한 땅을 신성 로마 황제와 교황 클레멘스 7세에게 반환하도록 설득해야 했다.[10][3] 또한 이탈리아와 독일 문제에 간섭하지 않고,[10][3] 개신교와의 싸움에 협조하며,[10][3] 200,000 두카트의 보상금과[10][3] 카를 5세의 대관식을 위해 이탈리아로 갈 때 배 4척, 갤리선 12척, 갈레온 4척을 제공해야 했다.[10][3]
이 조약은 부르고뉴 공국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았는데, 이 침묵은 마드리드 조약에서 프랑수아 1세에게 가해진 굴욕적인 상황을 완화했다.[8][10][2][3]
4. 1. 캉브레 조약 (1529)
란드리아노 전투에서 프랑스가 패배하고 바르셀로나 조약이 체결되자, 프랑수아 1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와 협상을 시작해야 했다.[8][2] 1529년 8월 3일, 프랑수아 1세의 어머니 루이사 디 사보이아와 황제의 이모 오스트리아의 마르가레테는 캉브레 조약을 체결했다.[8][2] 프랑수아 1세는 그의 두 아들을 돌려받았지만,[10][3] 이탈리아를 포기하고,[10][3] 베네치아인들과 페라라 공작에게 점령한 땅을 신성 로마 황제와 교황 클레멘스 7세에게 반환하도록 설득해야 했다.[10][3] 또한 이탈리아와 독일 문제에 간섭하지 않고,[10][3] 개신교와의 싸움에 협조하며,[10][3] 200,000 두카트의 보상금과[10][3] 카를 5세의 대관식을 위해 이탈리아로 갈 때 배 4척, 갤리선 12척, 갈레온 4척을 제공해야 했다.[10][3]이 조약은 부르고뉴 공국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았는데, 이 침묵은 마드리드 조약에서 프랑수아 1세에게 가해진 굴욕적인 상황을 완화했다.[8][10][2][3]
4. 2. 피렌체 공화국의 멸망 (1530)
란드리아노 전투에서 프랑스가 패배하고 바르셀로나 조약이 체결되자, 프랑수아 1세는 신성 로마 황제와 협상을 시작해야 했다.[8] 1529년 8월 3일, 프랑수아 1세의 어머니 루이사 디 사보이아와 신성 로마 황제 카를 5세의 고모 오스트리아의 마르가레테는 캉브레 조약을 체결했다.[8] 프랑수아 1세는 두 아들을 돌려받았지만,[10] 이탈리아를 포기해야 했다.[10] 또한 베네치아인들과 페라라 공작에게서 점령한 영토를 신성 로마 황제와 교황 클레멘스 7세에게 반환하도록 설득해야 했다.[10] 이 외에도 이탈리아와 독일 문제에 간섭하지 않고,[10] 개신교와의 싸움에 협조하며,[10] 200,000 두카트의 배상금과[10] 카를 5세의 대관식을 위해 이탈리아로 갈 때 배 4척, 갤리선 12척, 갈레온 4척을 제공해야 했다.[10]이 조약에서는 부르고뉴 공국에 대한 언급이 없었는데, 이는 마드리드 조약에서 프랑수아 1세에게 가해진 굴욕적인 상황을 조장했다.[8][10]
5. 결과
란드리아노에서 프랑스가 패배하고 바르셀로나 조약이 체결되면서, 프랑수아 1세는 신성 로마 황제와 협상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8] 1529년 8월 3일, 프랑수아 1세의 어머니 루이사 디 사보이아와 황제의 이모 오스트리아의 마르가레테는 캉브레 조약을 체결했다.[8] 이 조약으로 프랑수아 1세는 두 아들을 돌려받았지만,[10] 이탈리아를 포기하고[10] 베네치아인들과 페라라 공작에게 점령한 땅을 신성 로마 황제와 교황 클레멘스 7세에게 돌려주도록 설득해야 했다.[10] 또한 이탈리아와 독일 문제에 간섭하지 않고,[10] 개신교들과의 싸움에 협조하며,[10] 200,000 두카트의 보상금과[10] 카를 5세의 대관식을 위해 이탈리아로 갈 때 배 4척, 갤리선 12척, 갈레온 4척을 제공해야 했다.[10]
캉브레 조약에는 부르고뉴 공국에 대한 언급이 없었는데, 이는 마드리드 조약에서 프랑수아 1세에게 가해진 굴욕적인 상황을 완화하는 결과를 가져왔다.[8][10]
6. 평가
6. 1. 한국 역사와의 비교
참조
[1]
서적
The Italian W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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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3]
서적
[4]
서적
[5]
서적
[6]
서적
The History of Italy
[7]
서적
The Italian Wars
[8]
서적
[9]
문서
1525년 밀라노 공국의 황제군 총사령관 자리를 페스카라 후작에게서 이어받았다. 마지막 스포르차 가문의 밀라노 공작인 프란체스코 2세가 1535년에 사망하자, 카를 5세에 의해 밀라노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10]
서적
[11]
서적
[12]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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