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오푸메이
1. 개요
마오푸메이는 중화민국의 정치인 장제스의 첫 번째 부인이다. 1901년 장제스와 결혼하여 아들 장징궈를 낳았으나, 장제스와는 1927년 이혼했다. 이혼 후 불교에 귀의하여 마하전을 건립하고 아들의 안녕을 빌며 살았으며, 1939년 일본군의 폭격으로 사망했다. 그녀의 묘는 문화 대혁명 시기에 훼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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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제스의 배우자 -
야오예청
야오예청은 장제스의 측실이었으며, 장웨이궈를 양육하고 대만으로 이주했으며, 파킨슨병으로 투병하다 1972년에 사망했다. -
장제스의 배우자 -
천제루
장제스의 첩이자 후에 이혼한 배우자였던 천제루는 장제스와 결혼 후 6년간 그의 딸을 양육했고, 이혼 후 미국 유학을 거쳐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위원을 지냈으며, 사후 출간된 회고록을 통해 장제스와의 관계가 재조명받았다. -
닝보시 출신 -
쉬자오
쉬자오는 중국 배우로서, 영화 《장강 7호》로 주목받아 홍콩 영화제 남우조연상 등을 수상했으며, 《뮬란: 전사의 귀환》, 《미스터 고》 등의 영화와 《빙화》, 《심야식당》 등의 드라마에 출연하며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
닝보시 출신 -
장궈빙
장궈빙은 장제스의 조카이자 장징궈, 장웨이궈의 사촌으로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중화민국 육군 중교 예편 군인이며, 국부천대 사태를 목격했고 대한민국에서는 '장국병'으로도 불린다. -
화기 사고로 죽은 사람 -
김영랑
김영랑은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후까지 활동한 시인으로, '모란이 피기까지는'과 같은 서정시와 민족주의적 저항 의식을 담은 시를 동시에 선보였으며, 1935년에 시집 『영랑시집』을 발간했다. -
화기 사고로 죽은 사람 -
이한열
이한열은 1987년 6월 항쟁을 격화시킨 연세대생 민주화 운동가로, 시위 중 최루탄에 맞아 사망하여 민주국민장으로 장례가 치러졌고 연세대학교 명예 학사 학위가 추서되었으며 기념관이 건립되었다.
2. 생애
마오푸메이는 저장 성 펑화 시 출신으로, 장제스의 첫 번째 부인이다. 1901년 장제스의 어머니의 뜻에 따라 15세의 장제스와 결혼하여 1909년 장징궈를 낳았다. 그러나 장제스는 마오푸메이에게 애정이 없었고, 1927년 장제스의 어머니가 사망하자 둘은 이혼했다. 이후 마오푸메이는 불교에 귀의하여 아들의 성장을 빌며 살았다.
1939년, 일본군의 폭격으로 마오푸메이가 사망하자, 장징궈는 항일 결의를 다지는 석비를 세웠으나 일본군에 의해 파괴되었다. 이 비석은 나중에 재건되어 현재 원창각 내의 작은 양옥에 있다. 문화 대혁명 때 홍위병에 의해 마오푸메이의 묘가 파괴되었다.
2.1. 결혼과 이혼
1901년 겨울, 19세의 마오푸메이는 장제스의 어머니의 뜻에 따라 15세의 장제스와 결혼했다. 1909년 장징궈를 낳았으나, 장제스는 마오푸메이에게 애정이 없었다. 1927년 장제스의 어머니가 사망하자 둘은 이혼했다. 이혼 후, 마오푸메이는 불교에 귀의하여 마하전을 건립하고 아들의 성장을 빌며 살았다.
2.2. 불교 귀의와 죽음
1927년 장제스와 이혼한 후 불교에 귀의하여 마하전을 건립하고 아들 장징궈의 성장을 빌며 살았다. 1939년, 일본군의 폭격을 받아 펑화 현 시커우 진의 사저 펑하오팡에도 수 발의 탄이 떨어졌고, 부엌 밖으로 도망가다가 다리와 허리에 여러 발의 탄을 맞고 쓰러진 건물에 깔려 사망했다. 장징궈는 어머니가 쓰러진 부엌 밖의 통로에 "피로 피를 씻다(以血洗血)"라는 네 글자를 새긴 석비를 세워 항일의 결의를 다졌다. 이 비석은 그 후 점령한 일본군에 의해 파괴되었지만, 일본군이 떠난 후 다시 국민당 펑화 현 서기 왕쓰번의 초본에 의해 재건되었으며, 현재 원창각 내의 작은 양옥에 있다.
마오푸메이의 묘는 문화 대혁명 때 왕차이위(장제스의 어머니)의 묘와 함께 홍위병에 의해 파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