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크 메시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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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크 메시어는 캐나다 출신의 은퇴한 아이스하키 선수로, 에드먼턴 오일러스와 뉴욕 레인저스에서 활약하며 두 팀 모두를 스탠리 컵 우승으로 이끈 유일한 선수이다. NHL 통산 1,887포인트를 기록하여 역대 3위에 올랐으며, 1989-90 시즌에는 하트 메모리얼 트로피를 수상했다. 1984년 콘 스마이트 트로피를 수상했고, 1990년에는 레스터 B. 피어슨 상을 수상했다. 2007년 하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으며, NHL은 그의 리더십을 기려 마크 메시어 리더십 상을 제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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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 메시어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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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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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일 | 1961년 1월 18일 (세) |
출생지 | 앨버타주 세인트 앨버트 |
신장 | 6 피트 2 인치 (188 cm) |
체중 | 210 파운드 (95 kg) |
포지션 | 센터 / 레프트 윙 |
슈팅 방향 | 왼쪽 |
선수 경력 | |
아마추어 | 인디애나폴리스 레이서스 (WHA) 신시내티 스팅거스 (WHA) |
프로 | 에드먼턴 오일러스 (NHL) 뉴욕 레인저스 (NHL) 밴쿠버 커넉스 (NHL) |
드래프트 | 1979년, 전체 48번 |
드래프트 팀 | 에드먼턴 오일러스 |
선수 생활 시작 | 1978년 |
선수 생활 종료 | 2004년 |
국가대표 | |
국가대표팀 | 캐나다 |
수상 내역 | |
스탠리 컵 | 6회 우승 |
명예의 전당 | |
입성 년도 | 2007년 |
메달 기록 | |
캐나다 컵 |
2. 유년 시절 및 선수 경력 초기
메시어는 메리-진 디아와 더그 메시어의 아들로 앨버타 주, 세인트앨버트에서 태어났다. 그는 4남매 중 둘째 아들이자 셋째였으며, 그의 형제자매로는 폴, 메리-케이, 제니퍼가 있다.[8] 메시어 가족은 마크가 어렸을 때 오리건 주, 포틀랜드로 이사했고, 그곳에서 더그는 마이너 리그 서부 하키 리그의 포틀랜드 버카루스에서 선수로 활동했다.[9] 더그가 하키에서 은퇴한 후, 가족은 1969년 세인트앨버트로 돌아왔다.[10] 메시어는 주니어 하키 선수로 활동하며 에드먼턴의 세인트 프란시스 자비에 고등학교에 다녔고, 더그는 그의 초창기 시절 코치이자 멘토였다.
1979년 NHL 드래프트에서 에드먼턴 오일러스에 의해 3라운드 전체 48위로 지명되었다.[23] 그는 오일러스의 초기 계약 제안을 거부하고 더 나은 조건을 원했지만, 결국 오일러스가 제안한 조건에 서명했다.[24]
메시어는 1991년 10월 4일, 루이 드브루스크, 버니 니콜스, 스티븐 라이스와 함께 뉴욕 레인저스로 트레이드되었다.[28][29][30] 레인저스에서의 첫 시즌에 두 번째 하트 기념 트로피를 수상했고, 레인저스를 NHL 최고 기록으로 이끌었다.[27] 그러나 플레이오프 2라운드에서 피츠버그 펭귄스에게 6경기 만에 탈락했다.
Mark Messier영어는 뉴욕 레인저스에서 6시즌을 보낸 후 캐나다로 돌아왔다. 이는 감동적이고 주목받는 사건이었지만,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시즌 시작 전, 주장 트레버 린든은 메시어에게 주장 자리를 넘겨주었는데, 이는 밴쿠버 캐넉스 팬들에게 좋지 않은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팻 퀸 사장 겸 단장과 톰 레니 수석 코치가 해고되는 등 혼란스러운 시즌 속에서, 린든은 결국 새로운 코치이자 임시 단장인 마이크 키넌에 의해 뉴욕 아일랜더스로 트레이드되었고, 그곳에서 브라이언 맥케이브를 대신하여 주장이 되었다. 린든은 토드 베르투치와 함께 맥케이브와 트레이드되었다.[41] 메시어는 에드먼턴 오일러스와 레인저스에서 선수 생활 동안 줄곧 사용했던 등번호 11번을 요구했는데, 이는 1974년 웨인 마키의 갑작스러운 사망 이후 커넉스가 비공식적으로 영구 결번한 번호였기 때문에 그의 이미지를 훼손시켰다. 메시어는 "커넉스 역사상 가장 미움받는 선수임이 분명하다"는 평을 받기도 했다.[42]
Mark Messier영어는 2000-01 시즌에 매디슨 스퀘어 가든으로 복귀했다. 메시어의 레인저스 복귀를 기념하기 위해 열린 계약 발표 기자 회견에서, 메시어의 후임 주장이었던 브라이언 리치는 복귀하는 팀 동료에게 주장의 자리를 양보했고, 화해의 제스처로 도끼를 땅에 묻었다. 메시어는 더 나아가 레인저스가 플레이오프에 복귀할 것이라고 보장했다.[43]
메시에는 북미를 제외하고 캐나다 소속으로 단 한 번 출전하여 스웨덴에서 열린 1989년 세계 아이스하키 선수권 대회에서 은메달을 획득했다.[50] 그는 또한 세 번의 캐나다컵에서 우승했으며, 1996년 월드컵 오브 하키에서 은메달을 획득했는데, 그는 이 네 개의 토너먼트를 "국제 하키를 할 수 있는 나의 진짜 기회"라고 묘사했다.[50]
2006년 1월 12일, 뉴욕 레인저스는 1994년 스탠리 컵 우승 멤버 대부분과 스탠리 컵이 참석한 가운데, 에드먼턴 오일러스와의 경기에서 메시어의 등번호 11번을 영구 결번했다.[51] 레인저스는 이 경기에서 오일러스를 꺾었다. 2007년 2월 27일에는 전 동료 웨인 그레츠키가 감독으로 있던 피닉스 카이오티스와의 경기에서 에드먼턴 오일러스도 그의 등번호를 영구 결번했다.[52]
메시어는 슬하에 2남 1녀를 두고 있다. 장남 리옹은 1987년 8월 16일에 태어났으며, ECHL의 사우스 캐롤라이나 스팅레이스에서 두 시즌의 일부를 보냈고, 샬럿 체커스와 뉴멕시코 스콜피온스 모두에서 센트럴 하키 리그에서 활약했던 전직 수비수이다. 2003년 7월 15일에는 둘째 아들 더글러스 폴을 낳았고, 2005년 8월에는 딸 재클린 진을 얻었다.[12]
1976년, 메시어는 그의 아버지 더그 메시어가 코치를 맡고 있던 앨버타 주니어 하키 리그(AJHL)의 스프루스 그로브 메츠 주니어 아이스 하키 팀에 입단 테스트를 받았다. 메시어는 15세에 불과했기 때문에(나이 제한은 20세), 더그는 그가 팀에 들어갈 것이라고 예상하지 않았지만, 그는 명단에 추가되었다.[13] 메시어는 1976–77 시즌 메츠에서 57경기에서 66포인트를 기록했다. 다음 시즌에 세인트 앨버트로 팀을 옮기고 세인트 앨버트 세인츠로 이름을 바꾼 팀은 1977–78 시즌에 메시어를 주장으로 임명했고, 그는 54경기에서 74포인트를 기록했다.[14] 시즌이 끝난 후 그는 메이저 주니어 웨스턴 하키 리그(WHL)의 포틀랜드 윈터호크스에 합류하여 플레이오프에서 7경기에 출전하여 5포인트를 기록했다.[15]
1978–79 시즌이 시작되기 전에, 메시어는 AJHL에서 너무 잘한다고 느껴서 세인츠에서 또 다른 시즌을 보내는 것에 대한 대안을 찾고 있었다.[16] 그는 WHL에서 뛰는 데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1980년 동계 올림픽을 준비하고 있던 캐나다 남자 아이스 하키 국가대표팀에 입단 테스트를 받았다.[17] 동시에, 더그는 그의 전 주니어 팀 동료인 팻 스테이플턴 (하키)에게 연락했는데, 그는 월드 하키 협회(WHA)의 인디애나폴리스 레이서스의 코치를 맡고 있었고, 그들은 방금 트레이드한 또 다른 젊은 선수인 웨인 그레츠키를 대체할 선수가 필요했다. 더그는 그에게 전화해서 메시어에게 30000USD를 받고 인디애나폴리스에서 하키를 할 수 있는 계약을 맺었다.[18] 그러나 메시어는 5경기만 아마추어 시험 경기로 뛰었는데, 필요하다면 주니어 하키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17]
메시어는 시즌 초에 세인츠에서 13경기를 뛰었고, 11월 5일 위니펙 제츠 (1972–96)와의 프로 데뷔 경기를 위해 레이서스에 합류했다. 그는 레이서스에서 4경기를 뛰었고, 그 후 세인츠에서 2경기를 더 뛰었고, 11월 28일에 인디애나폴리스에서 마지막 경기를 했다.[19] 더 긴 계약을 제안받았지만, 메시어는 서명을 보류했는데, 팀이 12월 15일에 해체되면서 행운으로 증명되었다. 그에게서 받은 유일한 수표는 부도 수표가 되었다. 세인츠로 돌아온 메시어는 그들을 위해 주니어 하키에서 마지막 두 경기를 치렀고, 그 후 WHA의 신시내티 스팅어스와 계약을 맺었다.[20] 메시어는 스팅어스와 남은 시즌을 뛰기 위해 35000USD의 계약을 체결했다.[21] 그는 1979년 3월 20일 버밍햄 불스 (WHA)의 팻 릭긴을 상대로 자신의 첫 프로 골을 넣었다.[22] 메시어는 스팅어스에서 47경기를 뛰며 1골과 10어시스트를 기록했다.
3. 에드먼턴 오일러스 (1979-1991)
NHL 첫 해, 메시어는 여러 차례 징계 문제를 겪었다. 10월 말에는 팀 비행기를 놓쳐 CHL 제휴팀인 휴스턴 아폴로스로 4경기 출전 정지를 당하기도 했다.[25] 에드먼턴으로 돌아온 후에는 부모님과 함께 세인트앨버트의 집에서 다시 살았다.[26]
메시어는 격렬하고 끈기 있는 선수였으며, 라커룸에서의 리더십은 경기장에서 기록한 골만큼이나 중요했다. 처음에는 득점원으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오일러스에서 몇 년 동안 공격적인 기록이 꾸준히 증가했다. 1981–82 시즌에는 50골을 기록하며 최고의 시즌을 보냈다. 오일러스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글렌 앤더슨과 함께 뛰었다.
원래 왼쪽 윙어였던 메시어는(1982–83 시즌에 NHL 퍼스트 올스타 팀에 왼쪽 윙으로 선정되었다) 1984년 플레이오프에서 센터로 포지션을 변경했고, 그 결과는 놀라웠다. 1984년 결승전 3차전에서, 오일러스가 4회 연속 챔피언인 뉴욕 아일랜더스에게 한 골 뒤지고 있었을 때, 메시어의 눈부신 질주에 의한 골로 오일러스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오일러스는 첫 번째 스탠리 컵을 차지했고, 메시어는 플레이오프에서 가장 가치 있는 선수에게 수여되는 콘 스마이트 트로피를 수상했다.
1984년 12월 26일 캘거리 플레임스와의 경기에서 메시어는 제이미 매커운의 뺨뼈를 뒤에서 기습 공격으로 부러뜨려 10경기 출장 정지를 당했다. NHL은 메시어가 경기 초반 매커운에게 보딩을 당한 것에 대한 보복이었지만, 싸움을 시작했다고 판결했다.[27]
1985년 9월 6일, 메시어는 포르쉐를 조작하다가 통제력을 잃고 주차된 차량 3대를 들이받아 전손시켰다. 그는 나중에 뺑소니와 부주의 운전 혐의로 기소되었으며, 벌금을 냈다.[28]
그는 오일러스에서 1985년, 1987년, 1988년, 그리고 1990년에 4개의 컵을 더 우승했는데, 마지막 우승에서는 오일러스의 주장을 맡아 보스턴 브루인스를 5경기 만에 꺾었다. 오일러스가 1980년대 강팀이었지만, 웨인 그레츠키가 트레이드된 지 2년 만에 거둔 1990년 승리는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메시어는 또한 그 시즌 리그 MVP인 하트 기념 트로피를 수상했으며, 브루인스의 레이 보르크를 단 2표 차이로 제치면서, 이 상의 역사상 가장 근소한 차이를 기록했다.[27]
1988년에는 로스앤젤레스 킹스로 이적한 그레츠키의 후계자로 오일러스의 주장을 맡았다.
메시어는 1993년까지 오일러스와 계약되어 있었지만, 그의 에이전트이자 아버지인 더그 메시어는 1990년 여름에 오일러스 사장 겸 GM인 글렌 세이서에게 새로운 계약을 요구했지만 실패했다.[28][29] 1990–91 시즌 이후, 메시어는 오일러스가 아담 그레이브스를 팀에서 내보내려는 것에 불만을 품었다. 메시어는 캐나다 컵 토너먼트 기간 동안 공개적으로 트레이드를 요청하며, 중요한 선수들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조치를 취하지 않을 경우 팀을 떠나고 싶다고 말했다.[30]
4. 뉴욕 레인저스 (1991-1997)
1992-93 NHL 시즌에는 레인저스가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고, 메시어는 선수 경력 최초로 포스트시즌에 출전하지 못했다. 시즌 후 마이크 키넌이 감독으로 고용되었다.
1993-94 NHL 시즌에 레인저스는 다시 1위로 반등했다. 첫 두 라운드에서 뉴욕 아일랜더스와 워싱턴 캐피털스를 쉽게 물리쳤다. 뉴저지 데블스와의 1994년 동부 컨퍼런스 결승 6차전에서 2-0으로 뒤진 상황에서, 메시어는 뉴욕 언론과 인터뷰를 갖고 6차전 승리를 공개적으로 "보장"했다. 이는 베이브 루스의 예고 홈런과 조 네이머스의 슈퍼볼 III 보장과 비견될 만한 업적이었다. 그는 세 번째 기간에 내추럴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팀을 4-2 승리로 이끌었다.[31][32][33] 레인저스는 7차전 더블 연장전 끝에 시리즈에서 승리했다.[34][35]
1994 스탠리 컵 결승전에서 메시어는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열린 7차전에서 스탠리 컵 우승 골을 넣었고, 레인저스에게 54년 만의 첫 스탠리 컵을 안겨주었다. 그는 두 팀을 스탠리 컵으로 이끈 최초의 (그리고 현재까지 유일한) 선수가 되었다.[36][37][38] 뉴욕시의 종이 테이프 퍼레이드 목록 동안, 루디 줄리아니 뉴욕 시장은 메시어를 "6월의 미스터"라고 칭했다.[39]
1995-96 NHL 시즌에 메시어는 35세의 나이로 99점을 기록했다. 1996-97 NHL 시즌에 전 에드먼턴 오일러스 팀 동료 웨인 그레츠키가 레인저스에 합류했고, 메시어는 주장을 유지하며 84점을 기록했다. 두 사람은 팀을 동부 컨퍼런스 결승으로 이끌었지만, 필라델피아 플라이어스에게 5경기 만에 탈락했다. 메시어는 시즌 후 팀을 떠났다.[40]
5. 밴쿠버 캐넉스 (1997-2000)
메시어가 브로드웨이로 돌아온 첫 경기에서, MSG는 가든의 대형 스크린에 그를 위한 영상을 틀어주었다. 몇몇 팬들과 메시어 자신도 눈물을 흘리는 등 매우 감동적인 순간이었다. 그는 전 팀을 상대로 골을 넣었고, 다른 유니폼을 입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박수갈채를 받았다. 한 팬은 "당신은 영원히 우리의 주장, 메시어입니다"라는 팻말을 들었다.
1997-98 시즌에 60점을 기록한 것은 그의 NHL 첫 시즌 이후 최악의 성적이었다. 이후 두 시즌은 부상으로 단축되었고 3년간 158점을 기록했는데, 스티브 아이저먼과 조 사키치처럼 시즌당 600만달러를 받는 다른 스타 센터들에 비해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수준으로 평가받았다.[43] 메시어는 1998년 올림픽에 캐나다 남자 아이스하키팀에 선발될 것으로 예상되었는데, NHL이 처음으로 최고의 선수들의 참가를 허용했음에도 불구하고, 바비 클라크 단장에 의해 놀랍게도 제외되었다.[44]
키넌은 메시어가 밴쿠버에서 3년간 플레이하는 동안 팀이 플레이오프에 진출하지 못하면서 1998-99 시즌 중반에 커넉스 코치 자리에서 해고되었다. 팀은 메시어와 재계약을 시도하지 않았고, 그는 1999-2000 시즌 이후 자유 계약 선수가 되었다.
6. 뉴욕 레인저스 복귀 (2000-2004)
40세의 나이로 2000-01 NHL 시즌에 67점을 기록한 메시어의 시즌은 밴쿠버 커넉스 시절 그가 세운 어떤 기록보다도 뛰어났지만, 레인저스는 4년 연속 플레이오프에 진출하지 못했다. 2001-02 NHL 시즌의 절반을 팔 부상으로 결장한 후, 메시에는 23점만을 기록했고, 다음 해에는 40점 시즌으로 마무리했다.[43]
2003년 6월 30일, 마크 메시어의 권리는 4라운드 드래프트 지명권과 함께 산호세 샤크스로 트레이드되었다. 이 드래프트 지명권은 뉴욕주 로체스터 출신이자 미래의 레인저스 주장인 라이언 캘러핸을 지명하는 데 사용되었다. 샤크스는 단 몇 시간 동안 그의 권리를 가졌고, 그는 결국 자유 계약 선수 자격으로 레인저스와 재계약했다.[43]
2003년 11월 4일, 댈러스 스타스와의 경기에서 메시에는 두 골을 넣어 고디 하우를 제치고 통산 득점 순위 2위(1,851점)에 올랐으며, 이는 웨인 그레츠키에 이어 리그 역사상 두 번째로 높은 기록이었다. 11일 뒤, 메시에는 에드먼턴의 NHL 헤리티지 클래식에서 열린 레전드 게임에 유일하게 현역 선수로 출전하여 오일러스 동문들과 함께 경기에 나섰다.[43] 2004년 3월 31일 버팔로 세이버스에게 4-3으로 패한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의 마지막 경기에서 메시에는 퍽을 터치할 때마다 박수를 받았고, 경기 후에는 가든을 돌며 스케이트를 타며 모든 관중석에 고개를 숙이며 기립 박수를 받았다.[43] 43세의 나이에, 대부분의 언론 매체는 메시어가 은퇴를 결정했다고 믿었다. 2004-05 NHL 노사 분규로 인해 다음 시즌이 취소되었다. 모든 추측은 2005년 9월 12일, 그가 ESPN 라디오에서 은퇴를 발표하면서 끝났다.[43]
7. 국가대표 경력
8. 은퇴 후 경력
2007년 2월, 메시어는 레인저스 단장으로 NHL에 복귀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지만, 당시 단장이었던 글렌 세이서는 자리에서 물러날 계획이 없다고 답했다.[53] 2007년 11월 12일, 메시어는 하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메시어는 NHL의 마크 메시어 리더십 상 제정에 기여했는데, 이 상은 아이스 링크와 지역 사회에서 리더십을 보여준 선수에게 수여된다.
메시어는 뉴욕시에서 활동을 이어갔으며, 2011년 12월 31일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2012년 NHL 윈터 클래식 동문 경기에 뉴욕 레인저스 소속으로 출전하여 1개의 어시스트를 기록했다. 필라델피아가 3-1로 승리했다.[56] 2011년 11월 6일에는 뉴욕시 마라톤에 출전하여 4:14:21의 기록으로 완주했다. 또한 사라 휴즈와 함께 브롱크스의 킹스브리지 아머리를 세계 최대 규모의 실내 아이스 시설로 재개발하는 2.5억달러 규모[57], 약 73857.92m2의 킹스브리지 국립 아이스 센터 건설에 참여하고 있다.[58]
은퇴 후, 메시어는 미국에서 "마크 메시어 리더십 캠프"를 주제로 한 버서스 텔레비전 특별 프로그램에 출연했다. 이 프로그램은 뉴요커들이 리더십 세미나와 전직 레인저스를 상대로 한 하키 경기를 함께 즐길 수 있도록 구성되었으며,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스크리미지로 진행되었다. 메시어는 ''NHL on Versus''에서 스튜디오 분석가, ''NHL 올스타 게임 on Versus''의 경기 분석가, ''NHL on NBC''의 게스트 해설자로 활동했다. 2014년에는 로저스 커뮤니케이션스에 합류하여 전국 NHL 중계의 대변인 및 분석가로 활동했다. 2021년, ESPN/ABC와 계약하여 17년 만에 NHL 경기를 방송할 ESPN과 ABC의 새로운 스튜디오 중계를 이끌게 되었다.
메시어는 19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반 캐나다에서 방송된 레이스 칩 광고에 출연했다.
9. 개인 생활
메시어는 바하마 하버 아일랜드의 핑크색 모래 해변에 있는 Runaway Hill Club을 소유하고 있다.[12] 그의 형제인 폴은 메시어가 바하마, 하버 아일랜드에 소유한 호텔을 관리하는 것을 돕고 있다.[12]
10. 수상 내역
수상 연도 NHL 올스타전 1982, 1983, 1984, 1986, 1988, 1989, 1990, 1991, 1992, 1993, 1994, 1996, 1997, 1998, 2000, 2004 NHL 퍼스트 올스타 팀 1982 (레프트 윙), 1983 (레프트 윙), 1990 (센터), 1992 (센터) 스탠리 컵 1984, 1985, 1987, 1988, 1990 (에드먼턴 오일러스), 1994 (뉴욕 레인저스) 콘 스마이트 트로피 1984 NHL 세컨드 올스타 팀 1984 (레프트 윙) 하트 메모리얼 트로피 1990, 1992 레스터 B. 피어슨 상 1990, 1992 10. 1. NHL
1978년 당시 17세의 나이로 WHA의 인디애나폴리스 레이서스와 5경기 트라이아웃 계약을 맺었지만 5경기에서 득점을 올리지 못했고, 경영난에 시달리던 레이서스는 폐쇄 직전에 메시어를 방출했다. 새로 신시내티 스팅어스와 계약했지만, 47경기 출전에 1골에 그쳤다.
1979년, WHA가 경영난으로 폐쇄되면서 스팅어스는 해산되었다. 이후 NHL 드래프트에서 에드먼턴 오일러스에 지명되어 입단, 전년도 레이서스에서 함께 데뷔한 웨인 그레츠키와 다시 같은 팀이 되었다. 서서히 두각을 나타내, 1981-1982 시즌에는 올스타 게임의 제1팀으로 선발되었고, 그 다음 시즌에는 일찌감치 시즌 100포인트 이상을 기록하는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23] 그는 오일러스의 초기 계약 제안(4년 투웨이 계약 또는 1년에 2만 달러와 2년 옵션)을 거부하고 대신 1년에 5만 달러의 4년 계약을 원했지만, 결국 오일러스가 제안한 조건에 서명했다.[24]
NHL 첫 해 동안, 메시어는 여러 차례 징계 문제를 겪었고, 10월 말에는 팀 비행기를 놓쳐 CHL 제휴팀인 휴스턴 아폴로스로 4경기 출전 정지를 당했다.[25] 에드먼턴으로 돌아온 메시어는 부모님과 함께 세인트앨버트의 집에서 다시 살았다.[26]
메시어는 격렬하고 끈기 있는 경쟁자였으며, 라커룸에서의 그의 강렬한 리더십은 그가 얼음판에서 기록한 골만큼이나 중요했다. 그는 처음에는 득점자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오일러스에서 처음 몇 년 동안 공격적인 기록이 꾸준히 증가했다. 1981–82 시즌에는 50골을 기록하며 최고의 시즌을 보냈다. 오일러스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글렌 앤더슨과 함께 라인에서 뛰었다.
원래 왼쪽 윙어였던(그는 1982–83 시즌에 NHL 퍼스트 올스타 팀에 왼쪽 윙으로 선정되었다) 메시어는 1984년 플레이오프에서 센터로 포지션을 변경했고, 그 결과는 놀라웠다. 예를 들어, 1984년 결승전 3차전에서, 오일러스가 4회 연속 챔피언인 뉴욕 아일랜더스에게 한 골 뒤지고 있었을 때, 메시어의 눈부신 엔드 투 엔드 러시 골로 오일러스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시리즈가 끝날 무렵 오일러스는 첫 번째 스탠리 컵을 차지했고, 메시어는 플레이오프에서 가장 가치 있는 선수에게 수여되는 콘 스마이트 트로피를 수상했다.
1984년 12월 26일 캘거리 플레임스와의 경기에서 메시어는 제이미 매커운의 뺨뼈를 뒤에서 기습 공격으로 부러뜨려 10경기 출장 정지를 당했다. 메시어는 경기 초반 매커운에게 보딩을 당한 것에 대한 보복이었지만, NHL은 그가 싸움을 시작했다고 판결했다.[27]
1985년 9월 6일, 메시어는 포르쉐를 조작하다가 통제력을 잃고 주차된 차량 3대를 들이받아 전손시켰다. 그는 나중에 뺑소니와 부주의 운전 혐의로 기소되었으며, 벌금을 냈다.[28]
그는 오일러스에서 1985년, 1987년, 1988년, 그리고 1990년에 4개의 컵을 더 우승했는데, 마지막 우승에서는 오일러스의 주장을 맡아 보스턴 브루인스를 5경기 만에 꺾었다. 오일러스가 1980년대 강팀이었지만, 웨인 그레츠키가 트레이드된 지 2년 만에 거둔 1990년 승리는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메시어는 또한 그 시즌 리그 MVP인 하트 기념 트로피를 수상했으며, 브루인스의 레이 보르크를 단 2표 차이로 제치면서, 이 상의 역사상 가장 근소한 차이를 기록했다.[27]
1988년에는 로스앤젤레스 킹스로 이적한 그레츠키의 후계자로 오일러스의 주장을 맡았다.
정규 시즌 포인트 1,887점(694골, 1,193어시스트)은 2005년 은퇴 당시 NHL 역대 2위였지만, 그보다도 플레이오프에서의 승부 기질이 높게 평가받는 경우가 많다. 1984년 스탠리 컵 결승에서는, 강호 뉴욕 아일랜더스를 추격하는 에드먼턴 오일러스를 이끌고, 상대 팀의 수비를 1대1로 제치고 상대 골리를 지근거리에서 교묘한 리스트 샷으로 농락하며 골을 넣었다. 그리고 이 시리즈가 끝나고 플레이오프 최우수 선수상(콘 스마이트 트로피)을 받은 것은, 동료 웨인 그레츠키가 아닌, 메시어였다.
메시어는 1993년까지 오일러스와 계약되어 있었지만, 그의 에이전트이자 아버지인 더그 메시어는 1990년 여름에 오일러스 사장 겸 GM인 글렌 세이서에게 새로운 계약을 요구했지만 실패했다.[28][29] 1990–91 시즌 이후, 메시어는 오일러스가 아담 그레이브스를 팀에서 내보내려는 것에 불만을 품었다. 메시어는 캐나다 컵 토너먼트 기간 동안 공개적으로 트레이드를 요청하며, 중요한 선수들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조치를 취하지 않을 경우 팀을 떠나고 싶다고 말했다.[30] 1991년 10월 4일, 에드먼턴 경영진의 많은 비용 절감 조치 중 하나로, 메시어는 루이 드브루스크, 버니 니콜스, 스티븐 라이스와 함께 뉴욕 레인저스로 트레이드되었다.
레인저스에서의 첫 시즌에 메시어는 두 번째 하트 트로피를 수상했고 레인저스를 NHL 최고의 기록으로 이끌었다. 그러나 플레이오프 2라운드에서 최종 우승팀인 피츠버그 펭귄스에게 6경기 만에 탈락했다.
1992-93 시즌에 레인저스는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고, 메시어는 선수 경력 최초로 포스트시즌에 출전하지 못했다. 시즌 후 마이크 키넌이 감독으로 고용되었다.
1993-94 NHL 시즌에 레인저스는 다시 1위로 반등했고, 이번에는 컵 우승을 기대했다. 첫 두 라운드에서 아일랜더스와 캐피탈스를 쉽게 물리친 후, 레인저스의 컵으로 가는 길은 훨씬 더 어려워졌다.
라이벌 뉴저지 데블스와의 1994 동부 컨퍼런스 결승 6차전에서 2-0으로 뒤진 상황에서 메시어는 뉴욕 언론과 인터뷰를 갖고 6차전 승리를 공개적으로 보장했다. 양측의 팬과 선수들이 뉴스 헤드라인을 읽으면서, 이는 베이브 루스의 예고 홈런과 조 네이머스의 슈퍼볼 III 보장과 비견될 만한 업적이 되었고, 그는 세 번째 기간에 내추럴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이를 증명했다. ESPN 중계 해설자 게리 손은 "믿을 수 있겠어요? 믿을 수 있겠어요? 그는 우리가 6차전에서 이길 거라고 말했고 해트트릭을 기록했습니다!"라고 외쳤다.[31][32][33] 이는 레인저스가 2-0으로 뒤진 상황을 만회하여 4-2로 승리하는 데 기여했다. 레인저스는 짜릿한 7차전 더블 연장전 끝에 시리즈에서 승리했다.[34][35]
1994년 스탠리 컵 결승전에서 메시어는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열린 7차전에서 스탠리 컵 우승 골을 넣었고, 레인저스에게 54년 만의 첫 스탠리 컵을 안겨주었다. 그는 두 팀을 스탠리 컵으로 이끈 최초의 (그리고 현재까지 유일한) 선수로, 그의 전 동료 웨인 그레츠키가 1993년 스탠리 컵 결승전에서 해내지 못한 일이었고, 그 스탠리 컵 결승전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두 장면을 연출했다. 첫 번째는 버저가 울리자 압도적인 감정에 휩싸여 껑충거리며 뛸 때 종이 테이프가 쏟아지고 불꽃놀이가 터지며 팬들과 팀 동료들이 축하하는 모습이었다. 다른 하나는 매디슨 스퀘어 가든의 사진작가 조지 칼린스키가 찍은, 레인저스와 팬들에게 상징적인 이미지가 된 사진으로, NHL 커미셔너 게리 베트먼으로부터 스탠리 컵을 받을 때 믿을 수 없는 감정을 보여주는 모습이다.[36][37][38] 마지막으로, 레인저스의 우승을 기념하는 뉴욕시의 종이 테이프 퍼레이드 목록 동안, 시장 취임 5개월 만에 뉴욕 스포츠팀의 첫 챔피언십 우승을 목격한 루디 줄리아니는 메시어를 "6월의 미스터"라고 칭하며 레지 잭슨의 "10월의 미스터"라는 별명을 연상시켰다.[39]
1994년 동부 컨퍼런스 결승전에서 2승 3패로 궁지에 몰린 뉴욕 미디어 앞에서 6차전 승리를 공언한 메시어는, 그 말대로 2점 리드를 허용하고 있던 제3피리어드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뉴욕 레인저스를 승리로 이끌었다. 이 시리즈를 뚫고 올라간 레인저스는 54년 만에 스탠리 컵 우승을 차지했고, 컵 제7차전에서도 결승 골을 넣었다.
1994년 스탠리 컵은 현역 시절 후반의 분기점이 되었다. 1994-95 NHL 시즌은 록아웃이 있었지만, 53경기에서 64포인트를 올렸다. 1995-96 NHL 시즌에 메시어는 35세의 나이로 99점을 기록하며 1991-92 시즌 이후 처음으로 100점 고지를 넘을 뻔했다. 1996-97 NHL 시즌에 전 오일러스 팀 동료 웨인 그레츠키가 레인저스에 합류했고, 메시어는 주장을 유지하며 84점의 준수한 정규 시즌을 보냈다. 두 사람은 팀을 동부 컨퍼런스 결승으로 이끌었지만, 레인저스는 에릭 린드로스와 그의 "파멸의 군단" 라인메이트들의 크기와 힘에 미치지 못해 필라델피아 플라이어스에게 5경기 만에 탈락했다. 메시어는 시즌 후 팀을 떠났고, 메시어와 그레츠키가 불과 한 시즌 만에 같은 팀에서 다시 뭉치는 짧은 재회는 끝이 났으며, 이는 두 선수 모두의 마지막 플레이오프 출전이 되기도 했다.
메시어는 레인저스에서 선수 생활을 마무리하고 싶어했지만 매디슨 스퀘어 가든 사장 데이브 체케츠는 팀이 향후 3년 동안 메시어의 가치를 2,000만 달러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메시어는 시즌당 600만 달러 미만으로 1년 계약 연장에 서명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대중의 정서는 메시어를 지지했고, 그는 팀을 1위 정규 시즌 마무리 두 번과 스탠리 컵으로 이끌었지만, 단장 닐 스미스는 그레츠키와 팻 라폰테인을 최고의 센터로 두는 것에 만족했고, 1997년 여름에 조 사키치에게 오퍼 시트를 서명하여 콜로라도 애벌란체로부터 영입할 뻔했다.[40] (애벌란체는 오퍼를 따라 사키치는 선수 경력의 나머지 기간 동안 콜로라도에 남았다.)
36세의 메시어는 밴쿠버 캐넉스와 고액의 자유 계약을 체결했다. 그레츠키와 라폰테인을 지키려는 스미스의 결정은 실패로 돌아갔고, 라폰테인은 1997-98 시즌 중 선수 경력을 끝내는 뇌진탕을 겪었고 그레츠키는 다음 시즌 후 은퇴했다.
당시 6년 만에 미국에서 모국 팀에 재합류한 메시어에 대한 캐나다인들의 기대는 높았지만, 1997-1998 시즌에는 60포인트로 평범한 기록에 그쳤고, 캐넉스에서의 나머지 2시즌도 부상으로 풀 출전하지 못했다. 이렇게 3년간 162포인트로 캐넉스를 떠나게 되었다.
이미 선수로서 충분한 명성을 얻었지만, 다시 뉴욕으로 돌아가 레인저스 복귀를 이루게 된다. 2000-01 NHL 시즌, 40세로 67포인트를 기록했는데, 이는 캐넉스 시절의 어떤 성적보다 뛰어났다. 그러나 다음 시즌에는 약 절반의 경기에 결장하여 23포인트에 그쳤다. 또한, 그 다음 해에도 40포인트에 그쳤다.
2003-04 NHL 시즌은 대부분의 팬들에게 현역 마지막 해가 될 것이라고 여겨졌다. 2003년11월 11일 댈러스 스타스전에서, 통산 포인트 수에서 고디 하우를 제치는 2포인트를 올렸다. 그리고 그로부터 11일 후, 앨버타주 에드먼턴에서 열린 헤리티지 클래식에 유일한 현역 선수로 출전했다. 같은 시즌 매디슨 스퀘어 가든 최종전에서는, 퍽을 잡을 때마다 환호를 받았고, 경기 종료 후 링크를 돌며 관중들에게 인사를 보내자, 기립 박수를 받았다. 43세가 되려던 메시어에 대해, 대부분의 미디어는 은퇴를 예측한다는 뜻을 보도했다. 그리고 2004년부터 2005년의 NHL 록아웃에 의한 NHL 시즌의 전 경기 중단 이후, 2005년9월 12일에 공식적인 은퇴가 발표되었다.
은퇴하기까지 NHL의 정규 시즌 공식전에서는, 고디 하우에 불과 11경기 미치지 못하는 1,767경기에 출전했지만, 이 기록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갱신 불가능한 기록이라고 생각되고 있다. 또한, 정규 시즌 플레이오프 통산으로는 1,992경기라는 최고 기록(2005년 시점)을 보유하고 있다(참고로, 고디 하우의 동 기록은 1,924경기). NHL에서 4반세기에 걸쳐 플레이한 드문 선수이다.
수상 | 연도 |
---|---|
NHL 올스타전 | 1982, 1983, 1984, 1986, 1988, 1989, 1990, 1991, 1992, 1993, 1994, 1996, 1997, 1998, 2000, 2004 |
NHL 퍼스트 올스타 팀 | 1982 (레프트 윙), 1983 (레프트 윙), 1990 (센터), 1992 (센터) |
스탠리 컵 | 1984, 1985, 1987, 1988, 1990 (에드먼턴), 1994 (뉴욕 레인저스) |
콘 스마이트 트로피 | 1984 |
NHL 세컨드 올스타 팀 | 1984 (레프트 윙) |
하트 메모리얼 트로피 | 1990, 1992 |
레스터 B. 피어슨 상 | 1990, 1992 |
11. 기록
colspan="3" | | 정규 시즌 | 플레이오프 | ||||||||||
---|---|---|---|---|---|---|---|---|---|---|---|---|
시즌 | 팀 | 리그 | GP | G | A | Pts | PIM | GP | G | A | Pts | PIM |
1976-1977 | 스프루스 그로브 메츠 | AJHL | 57 | 27 | 39 | 66 | 91 | - | - | - | - | - |
1977-1978 | 세인트 앨버트 | AJHL | 54 | 25 | 49 | 74 | 194 | - | - | - | - | - |
1977-1978 | 포틀랜드 | WHL | - | - | - | - | - | 7 | 4 | 1 | 5 | 2 |
1978-1979 | 세인트 앨버트 | AJHL | 17 | 15 | 18 | 33 | 64 | - | - | - | - | - |
1978-1979 | 인디애나폴리스 레이서스 | WHA | 5 | 0 | 0 | 0 | 0 | - | - | - | - | - |
1978-1979 | 신시내티 스팅어스 | WHA | 47 | 1 | 10 | 11 | 58 | - | - | - | - | - |
1979-1980 | 휴스턴 | CHL | 4 | 0 | 3 | 3 | 4 | - | - | - | - | - |
1979-1980 | 에드먼턴 오일러스 | NHL | 75 | 12 | 21 | 33 | 120 | 3 | 1 | 2 | 3 | 2 |
1980-1981 | 에드먼턴 오일러스 | NHL | 72 | 23 | 40 | 63 | 102 | 9 | 2 | 5 | 7 | 13 |
1981-1982 | 에드먼턴 오일러스 | NHL | 78 | 50 | 38 | 88 | 119 | 5 | 1 | 2 | 3 | 8 |
1982-1983 | 에드먼턴 오일러스 | NHL | 77 | 48 | 58 | 106 | 72 | 15 | 15 | 6 | 21 | 14 |
1983-1984 | 에드먼턴 오일러스 | NHL | 73 | 37 | 64 | 101 | 165 | 19 | 8 | 18 | 26 | 19 |
1984-1985 | 에드먼턴 오일러스 | NHL | 55 | 23 | 31 | 54 | 57 | 18 | 12 | 13 | 25 | 12 |
1985-1986 | 에드먼턴 오일러스 | NHL | 63 | 35 | 49 | 84 | 68 | 10 | 4 | 6 | 10 | 18 |
1986-1987 | 에드먼턴 오일러스 | NHL | 77 | 37 | 70 | 107 | 73 | 21 | 12 | 16 | 28 | 16 |
1987-1988 | 에드먼턴 오일러스 | NHL | 77 | 37 | 74 | 111 | 103 | 19 | 11 | 23 | 34 | 29 |
1988-1989 | 에드먼턴 오일러스 | NHL | 72 | 33 | 61 | 94 | 130 | 7 | 1 | 11 | 12 | 8 |
1989-1990 | 에드먼턴 오일러스 | NHL | 79 | 45 | 84 | 129 | 79 | 22 | 9 | 22 | 31 | 20 |
1990-1991 | 에드먼턴 오일러스 | NHL | 53 | 12 | 52 | 64 | 34 | 18 | 4 | 11 | 15 | 16 |
1991-1992 | 뉴욕 레인저스 | NHL | 79 | 35 | 72 | 107 | 76 | 11 | 7 | 7 | 14 | 6 |
1992-1993 | 뉴욕 레인저스 | NHL | 75 | 25 | 66 | 91 | 72 | - | - | - | - | - |
1993-1994 | 뉴욕 레인저스 | NHL | 76 | 26 | 58 | 84 | 76 | 23 | 12 | 18 | 30 | 33 |
1994-1995 | 뉴욕 레인저스 | NHL | 46 | 14 | 39 | 53 | 40 | 10 | 3 | 10 | 13 | 8 |
1995-1996 | 뉴욕 레인저스 | NHL | 74 | 47 | 52 | 99 | 122 | 11 | 4 | 7 | 11 | 16 |
1996-1997 | 뉴욕 레인저스 | NHL | 71 | 36 | 48 | 84 | 88 | 15 | 3 | 9 | 12 | 6 |
1997-1998 | 밴쿠버 커넉스 | NHL | 82 | 22 | 38 | 60 | 58 | - | - | - | - | - |
1998-1999 | 밴쿠버 커넉스 | NHL | 59 | 13 | 35 | 48 | 33 | - | - | - | - | - |
1999-2000 | 밴쿠버 커넉스 | NHL | 66 | 17 | 37 | 54 | 30 | - | - | - | - | - |
2000-2001 | 뉴욕 레인저스 | NHL | 82 | 24 | 43 | 67 | 89 | - | - | - | - | - |
2001-2002 | 뉴욕 레인저스 | NHL | 41 | 7 | 16 | 23 | 32 | - | - | - | - | - |
2002-2003 | 뉴욕 레인저스 | NHL | 78 | 18 | 22 | 40 | 30 | - | - | - | - | - |
2003-2004 | 뉴욕 레인저스 | NHL | 76 | 18 | 25 | 43 | 42 | - | - | - | - | - |
NHL 합계 | 1756 | 694 | 1193 | 1887 | 1910 | 236 | 109 | 186 | 295 | 244 |
마크 메시어는 NHL 정규 시즌 통산 1887점을 기록하여 야로미르 야그르와 웨인 그레츠키에 이어 역대 3위를 차지했고, NHL 정규 시즌 및 플레이오프 통산 1,992경기에 출전하여 역대 3위를 기록했다.[63]
12. 기타
- 에드먼턴 오일러스와 뉴욕 레인저스 두 팀에서 모두 스탠리 컵 우승을 이끈 유일한 선수이다.[3]
- 2007년 2월 26일 에드먼턴에서 메시어의 고향인 세인트앨버트로 이어지는 세인트 앨버트 트레일의 일부를 마크 메시어 트레일로 명명했다.
- 렉솔 플레이스에서 그의 영구 결번 수여식이 거행되었고, 그의 이름은 그가 달았던 11번과 함께 렉솔 플레이스, 그리고 2016년부터의 홈구장 로저스 플레이스에 영원히 장식될 예정이다.
- 고향 앨버타주 세인트앨버트에서는 전설적인 인물로 추앙받고 있으며, 그 지역에 위치한 캠벨 아레나에는 메시어의 이름이 붙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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