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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브 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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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베이브 루스는 1895년 볼티모어에서 태어나, 1935년 은퇴할 때까지 메이저 리그에서 활약한 미국의 전설적인 야구 선수이다. 그는 뛰어난 타격 실력과 714개의 홈런 기록을 통해 야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보스턴 레드삭스 시절 투수와 타자를 겸하며 두각을 나타냈고, 뉴욕 양키스로 이적 후 타자에 전념하며 수많은 홈런 기록을 세웠다. 루스는 통산 타율 0.342, 장타율 0.690, OPS 1.164를 기록했으며, 야구 외적으로도 사회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1936년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으며, 1948년에는 그의 등번호 3번이 영구 결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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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브 루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920년 루스의 모습
본명조지 허먼 루스 주니어
영어 이름George Herman Ruth, Jr.
포지션외야수 / 투수
타석좌타
투구좌투
출생일1895년 2월 6일
출생지미국, 메릴랜드주, 볼티모어
사망일1948년 8월 16일
사망지미국, 뉴욕, 뉴욕 시티
선수 경력
데뷔 리그MLB
데뷔일1914년 7월 11일
데뷔 팀보스턴 레드삭스
마지막 리그MLB
마지막 경기일1935년 5월 30일
마지막 팀보스턴 브레이브스
선수 경력보스턴 레드삭스 (1914–1919)
뉴욕 양키스 (1920–1934)
보스턴 브레이브스 (1935)
코치 경력
코치 팀브루클린 다저스 (1938)
기록
타율.342
안타2,873
홈런714
타점2,214
승-패 기록94–46
평균자책점2.28
탈삼진488
수상 및 업적
올스타2회 (1933, 1934)
월드 시리즈 우승7회 (1915, 1916, 1918, 1923, 1927, 1928, 1932)
아메리칸 리그 MVP1923년
아메리칸 리그 타격왕1924년
아메리칸 리그 홈런왕12회 (1918–1921, 1923, 1924, 1926–1931)
아메리칸 리그 타점왕5회 (1919–1921, 1923, 1926)
아메리칸 리그 평균자책점 1위1916년
무안타 경기 합작1917년 6월 23일
영구 결번뉴욕 양키스 No. 3
기타 업적 및 기록베이브 루스의 커리어 업적 및 기록 목록
명예의 전당
종류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 년도1936년
득표율95.1% (첫 번째 투표)

2. 어린 시절

1895년 2월 6일 볼티모어에서 독일계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났다.[274] 아버지 조지 허먼 루스(George Herman Ruth, Sr)는 선술집 주인과 피뢰침 제조업자 사이를 전전했고, 어머니는 케이트 샴버거(Katherine Schamberger)였다.[274] 루스는 어려운 가정 환경 속에서 5살 때부터 입담배를 피우는 문제아로 성장했다.[274]

1902년, 루스는 아버지에 의해 로마 가톨릭교회 수도사들이 운영하는 세인트 메리 직업학교(St.Mary Industry School영어)에 보내졌다.[274] 이곳에서 12년 동안 지내며 로마 가톨릭 사제인 마티어스 신부를 만나 야구를 배우게 되었다.[274]

세인트 메리 학교에는 800여 명의 학생으로 구성된 40여 개의 팀이 있었고, 루스는 처음에는 포수로, 이후 왼손잡이 투수로 뛰며 지역에서 유명한 리틀 야구 선수가 되었다.[274] 1913년에는 아마추어팀이나 세미프로팀으로부터 초청을 받을 정도로 성장했다.[274]

루스의 부모는 모두 독일계 미국인이었고, 아버지 쪽 조부모는 프로이센과 독일 하노버 출신이었다.[1][2] 루스 시니어는 피뢰침 판매원, 노면전차 운전사, 식료품점 겸 술집 점원 등 여러 직업을 가졌다.[1][2] 루스는 어린 시절 독일어를 사용했다.[5]

줄리아 루스 스티븐스는 1999년에 조지 시니어가 볼티모어에서 술집 주인이었고 루스에게 제대로 된 지도를 하지 않아 그가 비행 청소년이 되었다고 회상했다.[6] 루스는 성인이 되어서 어린 시절 거리를 배회하고, 학교에 거의 다니지 않았으며, 아버지가 보지 않을 때 맥주를 마셨다고 인정했다.[7][8][9]

루스의 생가 (메릴랜드주 볼티모어)


베이브 루스의 부모, 조지 허먼 시니어와 캐서린

3. 프로 야구

베이브 루스는 어렸을 때부터 포수를 선호했지만, 왼손잡이라 어려움이 있었다. 당시 왼손잡이 포수용 미트는 없어 특별 주문을 해야 했다. 루스는 오른손잡이용 미트를 왼손에 끼고 던지는 등 자신만의 방식으로 포지션을 소화했고, 강한 어깨 덕분에 도루 저지도 수월하게 해냈다. 이후 투수, 1루, 외야수 등 다양한 포지션을 맡았고, 타자로서는 5할에 가까운 타율을 기록했다.

세인트 메리 재학 시절, 팀 투수가 부진하자 루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마시아스 코치의 제안으로 투수를 맡아 좋은 투구를 선보였다. 이후 투수로도 자주 등판하며 프로 선수로 발돋움하는 계기가 되었다. 투수로서도 뛰어났지만, 커브를 던질 때 혀를 내미는 버릇이 있었다. 뉴욕 양키스 시절에는 가끔 투수로 등판하기도 했다.

타이 콥은 루스에게 홈런만 노리지 않으면 4할 타율도 가능하다고 말했지만, 루스는 "나는 홈런으로 관중을 즐겁게 한다"라고 답했다. 이후 루스는 홈런을 양산하면서도 높은 타율을 기록하며 콥의 인정을 받았다.

루스는 루 게릭을 직접 지도하여 뛰어난 타자로 성장시켰다. 루스와 게릭은 리그 최고의 3, 4번 타자로 활약했다. 두 선수는 함께 낚시를 즐기는 등 좋은 관계를 유지했으며, 게릭이 근위축성 측삭 경화증(ALS)으로 사망하자 루스는 매우 슬퍼했다.

루스는 통산 122개의 도루를 기록했고, 그 중 8번은 홈 스틸이었다. 하지만 도루 성공률은 5할 2리로 낮은 편이었다.[270]

다저스 1루 코치 시절, 루스는 젊은 선수들에게 팬 서비스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사인을 거부한 젊은 선수에게 직접 사인을 해주고 "나는 베이브 루스다"라고 말하며 아이를 기쁘게 한 일화가 있다.

은퇴 후, 루스는 다저스 1루 코치를 맡은 것을 제외하고는 야구계와 큰 인연을 맺지 못했다. 감독 제의도 받았지만, 루스의 문제 행동 때문에 구단 경영진은 그를 감독으로 부적합하다고 판단했다. 루스는 야구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양키스 구장을 자주 찾았으며, 관중들의 환호에 모자를 벗어 인사하곤 했다.

3. 1. 볼티모어 오리올스 마이너리그 시절

1914년 초, 루스는 메이저리그 팀인 볼티모어 오리올스 마이너리그 계약을 맺었다. 이때 루스가 세상 물정을 모르고 감독을 따라다니며 레스토랑, 호텔, 기차에서의 에티켓을 몰랐기 때문에 "베이브"라는 유명한 별명이 붙었다.[270]

루스는 1914년 3월 7일 인터 스쿼드 경기에 처음으로 프로 야구 선수로 나왔다. 투수를 맡아 15-9로 이긴 경기에서 2이닝을 던졌고, 타자로서도 두 번째 타석에서 우전 적시타를 쳤다. 이후 필라델피아 필리스와 시범경기를 치렀는데, 루스는 중간에 투수로 3이닝을 던져 4회에 2실점 했지만 5회와 6회를 무실점으로 막았다. 다음 날 필리스와의 경기에서는 6회 중에 출전해 남은 이닝 동안 실점하지 않았고, 8회말 6-0으로 뒤진 상황에서 7점을 내 역전승하며 루스가 승리투수가 되었다.[270]

정규시즌이 시작되자 루스는 투수로서 재능을 보였고 팀도 좋은 성적을 거뒀지만, 언론의 주목은 거의 받지 못했다. 당시 제3의 메이저리그인 연방리그(1913년 마이너리그로 시작해 1914년부터 1915년까지 기존 리그와 경쟁한 리그)가 시작되면서 지역 프랜차이즈인 볼티모어 테라핀스가 훨씬 많은 인기를 얻었다. 테라핀스와의 경쟁으로 당시 마이너리그 볼티모어 오리올스의 소유자였던 잭 던은 큰 손실을 입었다. 6월 말 오리올스가 경기의 3분의 2 이상을 이기고 1위를 했지만, 관중수는 150명밖에 되지 않았다. 던은 오리올스가 버지니아주 리치몬드로 이전하거나 클럽 지분을 매각하는 방안을 모색했지만 무산되었고, 결국 돈을 마련하기 위해 팀의 최고 선수들을 메이저리그 팀에 팔 수밖에 없었다. 신시내티 레즈, 뉴욕 자이언츠(현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가 루스에게 관심을 보였지만, 던은 7월 4일 투수 어니 쇼어, 벤 이건과 함께 루스를 보스턴 레드삭스로 팔았다.[270]

3. 2. 보스턴 레드삭스 시절 (1914-1919)

1914년 7월 11일, 루스는 보스턴 레드삭스에 합류하여 그날 오후 클리블랜드 냅스를 상대로 4-3 승리를 거두며 투수로서 첫 경기를 승리로 장식했다. 그의 포수는 레드삭스 감독 빌 캐리건이었다.[34] 타자로서의 메이저 리그 데뷔전에서 루스는 윌리 미첼을 상대로 2타수 무안타를 기록했고, 첫 타석에서 삼진을 당한 후 7회에 대타로 교체되었다.[33]

보스턴 레드삭스에서 투구하는 루스


루스는 첫 해 적응기를 거친 후, 1915년 투수로서 18승 8패와 16경기 완투, 타자로서 타율 0.315와 4개의 홈런을 기록하며 보스턴을 대표하는 선수로 성장했다. 보스턴은 리그 우승 후 월드시리즈에 진출했지만, 쟁쟁한 투수진 때문에 선발 투수로 출전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보스턴은 4승 1패로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45]

1916년, 루스는 워싱턴 세네터스(현 미네소타 트윈스)의 에이스 월터 존슨과의 맞대결에서 4승 1패로 압도하며 주목받았다. 1916년 시즌에는 23승(모두 선발) 12패, 평균자책점 1.75, 완투 23번, 완봉승 9번을 기록하며 평균자책점 1위, 선발승 1위에 올랐다. 특히 9번의 완봉승은 1978년 론 가이드리가 타이 기록을 세울 때까지 왼손 투수 기록이었다.[49] 레드삭스는 월드시리즈에서 브루클린 로빈스(현 로스앤젤레스 다저스)를 꺾고 우승했고, 루스는 2차전에 선발 등판하여 14이닝 1실점으로 2-1 승리를 이끌었다.[50][51][52]

3. 3. 뉴욕 양키스 시절 (1920-1934)

뉴욕 양키스로 이적한 루스는 1920년부터 1934년까지 선수 생활을 이어갔으며, 이 기간 동안 많은 타격 기록을 세웠다. 1920년, 폴로 그라운드에서 첫 홈런을 친 이후 엄청난 홈런 페이스를 기록하며, 이적 첫 해에 54홈런, 158득점, 137타점을 기록했다. 양키스는 비록 3위에 그쳤지만, 폴로 그라운드에 120만 명의 관중을 끌어모으며 야구 인기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90] 1921년에는 로저 코너의 통산 홈런 기록(138개)을 경신하고, 59홈런을 기록하며 자신의 기록을 다시 한번 갈아치웠다. 177득점, 119개의 장타, 457개의 총루수는 2024년 현재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는 기록이다.[97]

1922년에는 출전 정지 징계를 받기도 했지만, 110경기에 출전해 35홈런을 기록했다. 1923년에는 타율 0.393, 41홈런, WAR 15.0으로 투타를 통틀어 단일 시즌 역대 WAR 1위 기록을 세웠으며, 아메리칸 리그 MVP를 수상했다. 양키스는 1923년 월드 시리즈에서 뉴욕 자이언츠를 꺾고 첫 우승을 차지했으며, 루스는 타율 0.368, 3홈런, 8타점, 장타율 1.000을 기록하며 팀 우승에 기여했다.[115] 1924년에는 타율 0.378, 46홈런으로 자신의 첫 타격왕과 6번째 홈런왕을 차지했다.

1927년, 루스는 60홈런을 기록하며 단일 시즌 최다 홈런 기록을 경신했다. 이 해 양키스는 110승이라는 기록적인 성적으로 아메리칸 리그 우승을 차지했고, 월드시리즈에서도 우승했다. 1929년에는 양키스 선수들에게 유니폼 번호가 부여되었고, 루스는 3번 타자였기 때문에 3번을 받았다.[137]

1932년 월드 시리즈 3차전에서는 '예고 홈런'으로 알려진 전설적인 홈런을 기록했다.

1933년에는 첫 번째 올스타전에 참가하여 올스타전 역사상 첫 홈런을 기록했다.[157]

3. 3. 1. 갑작스러운 슬럼프 (1925)

루스는 1923년과 1924년에 몸 관리를 하며 자신의 명성에 걸맞은 성적을 냈지만, 1925년 초에는 몸무게가 120kg까지 나가면서 몸 관리에 실패했고, 시즌 도중에 쓰러지는 등 컨디션이 최악이었다.[261] 영국 신문들은 그가 죽었다는 소문을 싣고 그의 부고를 싣기도 했다.[261] 이로 인해 루스는 98경기밖에 뛰지 못했고, 타율 0.290에 25개의 홈런을 기록하며 양키스 선수로서 최악의 시즌을 보냈다.[261] 양키스도 69승 85패로 꼴찌에서 두 번째 순위로 경기를 마치면서 루스와 양키스 모두 최악의 시즌을 보냈다.[261]

3. 3. 2. 루스의 부활과 살인 타선의 구축 (1926-1928)

1926년, 루스는 오프시즌 동안 아티 맥거번 체육관에서 운동하며 몸을 만들어 건강을 되찾았다. 당시 양키스가 리그 우승을 할 것이라고 예상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으나, 루스는 47홈런과 146타점, 타율 0.372를 기록하며 자신의 명성을 되찾았다.[6] 양키스는 2위와 3경기 차로 리그 우승을 차지하고 월드 시리즈에 진출했다. 루스는 월드시리즈 4차전에 3개의 홈런을 치는 등 활약했지만, 우승은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게 내주었다. 1926년 월드 시리즈는 루스가 병원에 입원한 11세 소년 조니 실베스터를 위해 홈런을 치겠다고 약속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실베스터는 말에서 떨어져 부상을 입었고, 루스는 그 친구로부터 홈런을 치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루스는 4차전에서 3개의 홈런을 치면서 그 약속을 지켰다. 이 일이 언론에 알려지자 일부 관계자들은 루스가 그를 찾아가 홈런을 치겠다고 약속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소년의 목숨을 구했다고 주장했다. 당시 루스의 1926년 연봉 52000USD는 여느 야구선수보다 월등히 많은 액수였지만, 12주간의 보드빌에서 100000USD를 벌어들이는 등 기타 수입으로는 적어도 2배는 벌었다.[6]

1927년 뉴욕 양키스 팀 선수들은 그라운드를 밟은 가장 위대한 선수들 중 하나로 여겨진다. 라인업의 위력 때문에 '''살인 타선'''으로 알려진 이 팀은 당시 아메리칸 리그 기록 110승을 거두었고, 2위와 19경기 차로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이 시즌은 페넌트레이스에서 긴장감은 없었고, 루스가 59개의 홈런 기록을 깨고 단일 시즌 최다 홈런 기록을 새로 쓸 것인가에 대한 관심이 쏟아졌다. 그는 9월 30일 경기에서 톰 자커리를 상대로 한 8회 2-2 동점을 만드는 60호 홈런을 쳤다. 루스는 통산 60홈런 외에 타율 0.356, 164타점, 장타율 0.772를 기록했다. 1927년 월드 시리즈에서 양키스는 피츠버그 파이리츠를 4경기 만에 스윕하며 우승을 차지했다. 당시 피츠버그 선수들은 양키스 선수들의 타격 연습을 보고 낙담했다고 한다.[6] 1928년 시즌에 그는 어느 때보다 빠른 페이스로 홈런을 쌓았고 8월 1일 42개의 홈런을 쳤다. 이로써 그는 이전 시즌 60홈런 페이스보다 앞서게 됐다. 그러나 그는 시즌 후반기에 슬럼프에 빠졌고, 그는 두 달 동안 12개의 홈런을 쳤다. 타율도 0.323로 이전 시즌들보다는 조금 떨어졌지만 홈런은 54개라는 좋은 성적을 기록했다. 양키스는 월드 시리즈에 진출하여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와의 대결에서 4경기 만에 전년도에 이은 월드시리즈 스윕으로 우승을 차지했다.[6]

3. 3. 3. 양키스 선수로서의 후반기 (1929-1934)

1929년 시즌에 양키스는 선수들에게 유니폼 번호를 부여했는데, 루스는 3번 타자였기 때문에 3번을 받았다.[137] 양키스는 시즌 초반 좋은 성적을 거두었지만, 필라델피아 애슬레틱스가 무서운 기세로 치고 올라왔다. 루스는 좋은 활약을 펼쳤지만, 양키스는 애슬레틱스에 18경기 뒤진 2위로 시즌을 마쳤다. 루스는 타율 0.345에 46홈런, 154타점을 기록했다.

1930년 1월 7일, 양키스와 루스는 연봉 협상을 벌였지만, 순식간에 결렬되었다. 3년 계약에 연봉 7만 달러를 막 끝낸 루스는 양키스가 제시한 1년 7만 달러와 2년 7만 5천 달러의 최종 제안을 즉각 거부했다.[145][146][147] 두 달 후, 루스가 2년 동안 전례 없는 연간 8만 달러에 합의하면서 타협이 이루어졌다.[148] 1930년, 루스는 타율 0.359에 49홈런, 153타점을 기록했고, 9년 만에 투수로 등판하여 승리 투수가 되었다.[1] 하지만 양키스는 리그 3위로 시즌을 마감하며 우승에 실패했다.

1931년 시즌에 양키스는 전 시즌보다 나아졌지만, 리그 우승을 차지하지는 못했다. 루스는 타율 0.373에 46홈런, 163타점을 기록하며 꾸준한 모습을 보였다.[1] 1932년 시즌에 양키스는 107승 47패로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1] 루스는 41홈런, 137타점, 타율 0.341을 기록했다.[1]

양키스는 1932년 월드 시리즈에서 시카고 컵스와 맞붙었다. 루스는 두 경기에서 홈런을 치는 등 활약했고, 홈팀이 승리했다. 컵스 관중들은 루스에게 조롱의 의미로 레몬을 던졌고, 컵스 선수들은 루스와 양키스 선수들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루스가 5회 초 타석에 들어섰을 때, 컵스 관중들과 선수들은 또다시 욕설을 퍼붓고 있었다. 그 때 루스는 홈런을 쳐 중앙 담장을 넘겼다. 약 150m의 비거리로 추정된다.[6] 양키스는 이 경기를 승리한 후 다음 날에도 승리하며 1928년 우승 이후 4년 만에 월드 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1933년 시즌, 루스는 타율 0.301에 홈런 34개, 103타점을 기록하며 기량이 조금씩 하락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여전히 꾸준한 모습을 유지했다.[1] 그리고 이 해에 처음으로 열린 올스타전에 참가하였다.[157] 1934년 시즌에는 타율 0.288에 22홈런을 기록하며 전 시즌보다 하락한 성적을 기록했고, 선수 생활의 끝이 다가오고 있었지만, 제2회 올스타전에도 참가하였다.[162] 이 해는 양키스 선수로서의 마지막 해였다.[163]

3. 4. 보스턴 브레이브스 시절 (1935)

1935년 보스턴 브레이브스로 이적한 루스는 선수로서의 기량이 이미 쇠퇴했음을 알았다. 5월 25일 경기에서 브레이브스가 11-7로 패했지만, 루스는 3개의 홈런을 포함해 4타수 4안타를 기록하며 마지막 불꽃을 태웠다.[178] 특히, 마지막 홈런은 포브스 필드 상단 관중석 위로 넘어가, 이 경기장 밖으로 타구를 날린 최초의 선수라는 기록을 세웠다.[177]

그러나 이후 루스는 부진을 거듭했고, 결국 6월 2일 은퇴를 선언했다.[178] 1935년 시즌 타율은 .181였으며, 통산 714개의 홈런 중 마지막 6개를 브레이브스에서 기록했다.[178] 루스가 떠난 후, 브레이브스는 38승 115패(.248)라는 저조한 성적으로 시즌을 마감했는데, 이는 현대 내셔널 리그 역사상 최저 승률이었다.[178]

4. 은퇴 이후

루스는 선수로서의 경력이 거의 끝났음을 인지하고, 야구계에 감독으로 남고자 했다. 그는 감독직이 나올 때마다 유력한 후보로 거론되었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그 꿈을 이루지 못했다.[164] 1932년 보스턴 레드삭스 감독 후보로 언급되었을 때, 루스는 아직 현장을 떠날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말했다.[164]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신시내티 레즈,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감독직에도 후보로 거론되었으나, 모두 무산되었다.[164]

1934년 시즌 직전, 루퍼트는 루스에게 뉴어크 베어스(인터내셔널 리그) 감독직을 제안했지만, 아내 클레어와 사업 매니저 크리스티 월시의 설득으로 거절했다.[159] 타이거스 구단주 프랭크 내빈은 루스를 선수 겸 감독으로 임명하는 것을 고려했지만, 루스가 하와이 여행에서 돌아온 후에 만나자는 고집과 과도한 연봉 요구로 인해 무산되었다.[165] 결국 타이거스 감독직은 미키 코크란에게 돌아갔다.[165]

1934년 시즌 초, 루스는 뉴욕 양키스 감독이 되기 위해 노력했지만, 루퍼트는 조 매카시 감독을 지지했고, 루스와 매카시의 관계는 악화되었다.[159] 1934-35년 오프 시즌 동안, 루퍼트는 루스를 받아들일 구단을 찾았지만, 필라델피아 애슬레틱스 구단주 겸 감독 코니 맥은 루스의 아내가 팀을 운영할 것을 우려하여 영입을 포기했다.[168]

결국 루스는 보스턴 브레이브스로 이적했지만, 선수, 부회장, 수석 코치로서의 직함은 겉치레에 불과했고, 감독이 될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174] 1935년 시즌 후, 루스는 은퇴했고, 어떤 메이저 리그 팀도 그를 고용하지 않았다.[1] 1936년 타이 콥, 호너스 와그너, 크리스티 매튜슨, 월터 존슨과 함께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지만, 루스만이 감독직 제안을 받지 못했다.[6] 구단주와 단장들은 루스의 사생활을 문제 삼았고, 배로우는 "자신조차 관리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다른 사람들을 관리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다.[50] 크리머는 루스가 메이저 리그 클럽 감독을 맡을 기회를 얻지 못한 것은 불공평하다고 주장하며, 존 맥그로, 빌리 마틴, 바비 밸런타인은 성격적 결함에도 불구하고 감독으로서 성공했다고 지적했다.[180]

은퇴 후 루스는 골프를 즐기고 시범 경기에 출전하며 여전히 많은 관중을 모았다.[181] 1938년 브루클린 다저스의 1루 코치를 맡았지만, 감독 레오 듀로처와의 불화로 시즌 후 팀을 떠났고, 다시는 야구계에서 일하지 않았다.[183][184]

1939년 7월 4일, 루스는 루 게릭 감사 행사에서 연설했고, 그 다음 주 뉴욕주 쿠퍼스타운에서 열린 야구 명예의 전당 개관식에 참석했다.[185] 제2차 세계 대전 동안에는 전쟁 지원 활동에 참여했고, 1946년에는 양키스 새 사장 맥페일에게 야구계 일자리를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186] 1999년, 루스의 손녀 린다 토세티와 딸 줄리아 루스 스티븐스는 루스가 양키스 감독직을 얻지 못해 우울증에 빠졌다고 말했다.[6]

1946년, 루스는 왼쪽 눈 위쪽에 심한 통증을 느꼈고, 비인두암 진단을 받았다.[207] 1998년 루스의 부검을 검토한 의사는 루스의 흡연이 암의 원인 중 하나일 것이라고 결론 내렸다.[208] 루스는 실험적인 치료를 받았고, 1947년 여름에는 극적인 호전을 보였다.[209][211] 그러나 이는 일시적인 완화였고, 1948년 6월 13일, 루스는 양키 스타디움에서 열린 25주년 기념 행사에 참석하여 작별 인사를 했다. 냇 페인이 촬영한 ''베이브 루스 작별 인사''는 퓰리처상을 수상했다.[216]

냇 페인의 퓰리처상 수상 사진 ''베이브 루스 작별 인사''


루스는 메모리얼 병원에 입원했고, 1948년 8월 16일 5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217][218] 그의 장례식은 양키 스타디움에서 열렸고, 77,000명이 조문했다.[219] 루스는 뉴욕주 호손에 있는 게이트 오브 헤븐 묘지에 안장되었다.[219][220]

5. 유산

베이브 루스는 미국 문화에서 가장 위대한 스포츠 영웅 중 한 명이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야구 선수 중 한 명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1936년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최초로 헌액된 5명 중 한 명이다.[1]

루스는 1914년부터 1935년까지 MLB에서 22년간 선수로 활동했다. 왼손 투수로 보스턴 레드삭스에서 메이저 리그에 데뷔했으며, 외야수 강타자로 뉴욕 양키스에서 가장 명성을 떨쳤다. 통산 714개의 홈런, 2213타점, 2062볼넷, 장타율 .690, OPS 1.164, 홈런왕 12회 등 수많은 MLB 기록을 세웠으며, 특히 장타율과 OPS는 2024년 현재까지 깨지지 않고 있다.

7세 때 세인트 메리 소년 공업 학교(소년 교정 시설)에 보내졌고, 그곳에서 자비오 수도회 수도사이자 교관인 마티어스 바울러에게 야구를 배웠다.

1920년 이전의 데드볼 시대에 뛰어난 활약을 펼쳤고, 1916년까지는 장거리 홈런을 치는 투수로서 명성을 쌓았다. 투수로서 2번의 시즌 23승을 기록했고, 레드삭스에서 3번의 월드 시리즈 우승을 경험했지만, 매일 경기에 출전하기를 원해 외야수로 전향했다.

1919년에는 29개의 홈런으로 당시 MLB 시즌 최다 기록을 갱신했다. 시즌 종료 후, 레드삭스 구단주 해리 프레이지는 구단 경영 관련 논쟁 속에서 루스를 양키스로 넘겼다. 이 트레이드는 레드삭스가 이후 86년간 월드 시리즈 챔피언이 되지 못하는 "밤비노의 저주" 징크스를 낳았다.

루스는 양키스에서 15년간 7번의 아메리카 리그 우승과 4번의 월드 시리즈 우승에 기여하며, 큰 스윙으로 통산 홈런 수를 늘려 팬들을 경기장으로 불러 모으고 야구의 인기를 높였다. 이는 라이브볼 시대의 도래를 알리는 계기가 되었으며, 야구는 저득점 전략에서 홈런 중심으로 변화했다.

1927년, 양키스의 "살인 타선" 일원으로서 60개의 홈런을 기록, MLB 시즌 기록을 경신했다. 1934년 시즌 후 양키스를 떠났고, 이듬해 보스턴 브레이브스에서 잠시 활약 후 은퇴했다.

루스는 평생 야구 업적과 더불어 음주, 여성 편력 등으로 언론과 대중의 관심을 받았다. 은퇴 후에는 선수 시절의 행동 때문에 메이저 리그 감독이 되지 못했다. 만년에는 공개석상에 자주 모습을 드러냈고, 특히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미국의 노력을 지지했다.

1946년, 비인두암을 앓았고, 2년 후 사망했다. 사후에도 미국 문화의 일부로 남아, 2018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으로부터 대통령 자유 훈장을 추서받았다.

일본 원정 당시 루스와 대화하는 가야노미야 쓰네노리(오른쪽) · 도시코 비(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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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즈오카 구사나기 구장의 베이브 루스 상


1934년 11월 2일부터 12월 1일까지, 루스는 전미 선발팀 일원으로 일본을 방문했다. 당시 항공편이 일반적이지 않아 긴 뱃길을 꺼렸으나, 스즈키 소타로가 이발소에서 루스에게 초상화 포스터를 보여주며 설득하여 방일을 결정했다. 일본에서 우천 속 을 쓰고 수비 연습을 하는 등 쇼맨십을 발휘, 야구 인기를 뿌리내리는 데 기여했다. 특히, 사와무라 에이지와의 대결에서 처음으로 삼진을 당한 일화는 유명하다.[272]

전미 선발팀 방일 환영 퍼레이드에서 일본인들의 환영은 미국 월드 시리즈 우승 이상이었고, 루스는 "수백만 명의 팬들이 진심으로 환영, 긴자 거리에 몇 킬로미터나 되는 환영 행렬, 영웅 대우"라며 기뻐했다. 전쟁 중 반일 감정으로 일본 도자기를 깨뜨렸지만, 종전 후 환영을 떠올리며 후회했고, 진주만 공격을 믿을 수 없다고 말했다.

1934년 11월 16일 고쿠라 이토즈 구장 미일 야구 경기에서 비에도 많은 팬들이 몰렸다. 코니 맥 감독은 "관객들을 위해 경기한다"고 결정, 루스는 갓과 장화를 신고 그라운드에 들어섰다. 경기 중에도 갓을 쓴 채 수비했고, 홈런을 쳤다.[273]

5. 1. 업적

베이브 루스는 1914년부터 1935년까지 22시즌 동안 12번 홈런왕에 올랐고, 은퇴할 때까지 통산 714홈런, 2213타점, .342의 타율을 기록했다.[1] 통산 장타율(.690)과 OPS(1.164)는 여전히 메이저 리그 최고 기록이다.[1] 1936년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최초로 헌액된 5인 중 한 명이다.

연도소속팀경기 수타수안타홈런타점타율장타율OPS
1914BOS510201.200.300.500
1915429229421.315.576.952
19166713637315.272.419.741
19175212340212.325.472.857
191895317951166.300 .555 .966
191913043213929114.322 .6571.113
1920NYY14245717254137.376 .8491.382
192115254020459171.378 .8461.358
19221104061283599.315 .6721.106
192315252220541131.393 .7641.309
192415352920046121 .378 .7391.252
1925983591042566.290.543.936
192615249518447150.372 .7371.253
192715154019260164.356 .7721.258
192815453617354142.323 .7091.172
192913549917246154.345 .6971.127
193014551818649153.359 .7321.225
193114553419946163.373 .7001.195
193213345715641137.341.6611.147
193313745913834103.301.5821.024
19341253651052284.288.537.985
1935BSN287213612.181.431.790
MLB 통산: 22년2503839828737142217.342 .6901.164


  • '''굵은 글씨'''는 리그 최고, '''진한 굵은 글씨'''는 MLB 역대 최고 기록.
  • 각 연도별 '''굵은 글씨'''는 리그 최고, '''진한 굵은 글씨'''는 MLB 역대 최고 기록.

5. 2. 사회문화적 영향

루스는 압도적인 대중의 찬사를 받은 최초의 야구 스타였다. 타이 콥과 '슈리스 조 잭슨' 등 스타플레이어가 있었지만, 팬들과 불편한 관계를 유지했다. 루스는 전쟁과 1918년 인플루엔자 유행으로 큰 타격을 입은 미국인들에게 희망과 가능성의 상징이 되었다. 그는 1920년대 초 사회 변화의 아이콘으로, "절대 막을 수 없는 뉴욕의 화신"으로 불렸다.[227][228][229]

루스는 생전에 미국의 상징이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일본 군인들은 미국 군인들을 화나게 하기 위해 "베이브 루스에게 지옥을"이라고 외쳤고, 루스는 "내 이름을 언급하는 모든 일본인이 총에 맞기를 바란다"고 답했다.[230] 그는 스포츠를 초월하여 "깨끗하고 빠르고 논쟁의 여지가 없는 결정적인 클라이맥스에 대한 미국의 깊은 열망"에 호소했다.[232] 그의 홈런은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사건"으로 여겨졌다.[1]

루스는 단순한 홈런 타자가 아니라, 뛰어난 번트 선수이자 외야수였다. 그의 홈런은 야구 경기 방식을 바꾸어, 1920년 이전의 데드볼 시대에서 홈런을 중심으로 한 라이브볼 시대로 이끌었다.

그랜트랜드 라이스에 따르면, 1920년대에 루스와 인기를 견줄 수 있는 스포츠 인물은 복서 잭 뎀프시와 경주마 맨 오브 워뿐이었다.[237] 루스는 교육받지 못하고 세련되지 않았지만, 아메리카 성공 신화를 보여주는 예시였다.[238] 그의 전설은 입소문과 스포츠 기자들의 과장을 통해 성장했다.[239]

크리머는 루스를 "미국 사회사의 독특한 인물"로 묘사한다.[1] 토마스 바텔은 그를 최초의 유명인 운동선수 중 한 명으로 묘사했다.[241] 스포츠 안팎에서 한 분야의 지배적인 인물은 종종 그 분야의 "베이브 루스"로 불린다.[231] "루스적인"은 스포츠에서 "거대하고, 극적이며, 엄청나고, 웅장하며, 강력한"을 의미하게 되었다.[242] 그는 스포츠 외 활동과 광고 수익으로 스포츠 자체보다 더 많은 돈을 번 최초의 운동선수였다.

1955년 볼티모어 기념 경기장에서 베이브 루스 기념 명판 제막식에 참석한 그의 미망인 클레어 루스


여러 설문 조사에서 루스는 역대 최고의 야구 선수로 선정되었다. 1998년, ''The Sporting News''는 그를 "야구 선수 100인" 목록에서 1위로 선정했다.[245] 1999년, 야구 팬들은 루스를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올 센추리 팀에 선정했다.[246] 1969년 프로 야구 100주년 기념 투표에서 야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로 선정되었다. AP 통신은 1993년에 무하마드 알리와 함께 미국에서 가장 인지도가 높은 운동선수로 꼽았다.[247] 1999년 ESPN 여론 조사에서 마이클 조던에 이어 세기의 미국 최고의 운동선수 2위로 선정되었다.[248] 1983년, 미국 우편국은 루스를 기념하여 20센트 우표를 발행했다.[249]

경매에서 판매된 역대 가장 비싼 스포츠 기념품 및 야구 기념품 중 일부는 루스와 관련이 있다. 2012년에 4415658USD에 판매된 루스의 1920년 양키스 유니폼은 역대 세 번째로 비싼 스포츠 기념품이다.[251] 그가 양키 스타디움에서 첫 홈런을 친 야구 방망이는 2004년 12월 2일에 1265000USD에 낙찰되어 ''기네스 세계 기록''에 가장 비싼 야구 방망이로 등재되었다.[252] 1934년 루스의 모자는 2012년 데이비드 웰스가 경매에서 537278USD에 판매하면서 야구 모자의 최고 기록을 세웠다.[253] 2017년 찰리 쉰은 루스의 1927년 월드 시리즈 반지를 경매에서 2093927USD에 판매하여 우승 반지의 최고 기록을 세웠다.[254]

야구 명예의 전당의 루스 기념품 (2014)


2018년 루스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으로부터 사후 대통령 자유 훈장을 수여받았다.[258]

현재 볼티모어 다운타운의 에모리 플레이스 216 (오리올 파크 앳 캠든 야즈의 북서쪽 2블록)에 베이브 루스 기념관이 있으며, 생전의 루스의 유품과 자료가 보관되어 있다.

5. 3. 한국 야구와의 관계



1934년 11월 2일부터 12월 1일까지, 베이브 루스는 전미 선발팀의 일원으로 일본을 방문했다. 그는 전일본팀과의 경기에서 11월 4일 진구 구장에서의 첫 경기를 시작으로 전국 12개 도시(도쿄, 하코다테, 센다이, 도야마, 요코하마, 시즈오카, 나고야, 오사카, 고쿠라, 교토, 오미야, 우쓰노미야)에서 16경기를 치렀다.[272] 당시에는 항공편을 이용한 이동이 일반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루스는 긴 뱃길을 처음에는 꺼렸다. 그러나 스즈키 소타로가 루스가 이발소에 있는 곳에 사전 약속 없이 찾아가 루스의 초상화를 크게 그린 포스터를 보여주며 설득했고, 루스는 그 포스터를 매우 마음에 들어하여 방일을 결정했다. 일본으로 향하는 배 위에서도 남들보다 더 연습에 매진하는 등 의욕이 넘쳤다. 일본에 도착해서는 우천 속에서도 을 쓰고 수비 연습을 하는 등 타고난 쇼맨십을 발휘하며 일본에 야구 인기를 뿌리내리는 데 크게 기여했다. 특히, 루스와 직접 대결한 사와무라 에이지의 이름을 오늘날까지 전설로 남게 한 "전미군 클린업 4연속 탈삼진" 일화에서, 루스는 처음으로 사와무라에게 삼진으로 물러났다. 이 경기는 초가을에 열렸고 기온이 높지 않아, 안타로 출루한 사와무라에게 스웨터를 입혀주는 등 스포츠맨십을 보여 "역시 메이저 리그 선수들은 하는 일이 다르다"며 관객들을 감탄하게 했다.

경기 후, 전미 선발팀의 방일 환영 퍼레이드가 열렸다. 이때 일본인들의 환영은 미국에서 월드 시리즈에서 우승했을 때 이상이었고, 루스는 매우 기뻐했다. 그는 방일의 인상을 "수백만 명의 팬들이 진심으로 환영해주는 것을 피부로 느꼈다. 긴자의 거리는 몇 킬로미터나 되는 환영 행렬이 이어졌고, 영웅과 같은 대우를 받았다"라고 회고했다. 전쟁 중에는 반일 감정 때문에 일본인에게 받은 도자기 등을 깨뜨렸지만, 종전 후 이때의 환영을 떠올리며 후회했다고 한다. 또한, 진주만 공격이 믿기지 않는다고도 말했다고 한다.

1934년 11월 16일 고쿠라 이토즈 구장에서 열린 미일 야구 경기에는 비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팬들이 루스를 보려고 몰려들었다. 전미의 코니 맥 감독은 "관객들이 기다리고 있는 이상, 경기를 한다"고 결정했고, 선두에서 그라운드로 들어선 것은 루스였다. 그는 갓을 쓰고 장화를 신고 있었다. 또한, 경기 중에도 갓을 쓴 채 수비를 했다. 타격에서는 이 경기에서 홈런을 쳤다.[273]

6. 기타


  • 세인트 메리 학교에 처음 들어갔을 때, 루스는 학교에 다니지 않았기 때문에 읽고 쓰기를 할 수 없었지만, 술집 메뉴 글자를 보며 음식 이름만은 읽을 수 있었다. 마시아스는 "너도 매일 꾸준히 노력하면 무엇이든 할 수 있게 될 거야"라고 격려했고, 루스는 진지하게 공부하여 이듬해 서예 상을 받았다.
  • 재단사가 되려고 했기에 미싱 솜씨가 뛰어났고, 야구 유니폼 수선을 스스로 했으며, 팀 동료들의 유니폼 수선도 도왔다. 루스는 "나에게 1시간만 주면 셔츠 4장을 꿰매어 보이겠다"라고 자랑했다. 세인트 메리 학교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을 때 "나는 재단사가 될 예정이라 야구할 시간이 없다"라며 거절했다는 일화가 있다.
  • 세인트 메리 학교는 라디오신문도 없는 외부와 격리된 환경이었고, 7살 때부터 동 학교에 다녔던 루스는 야구에 프로 팀이 있다는 것조차 몰랐다. 던 감독이 "연봉 600달러(현재 약 66000USD)를 주겠다"라고 하자 루스는 "좋아하는 야구를 하면서 그렇게 많은 돈을 받을 수 있단 말인가"라며 놀라 즉시 계약에 응했다.
  • 도시로 나온 루스는 처음으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재미있어하여 담당자에게 돈을 주고 직접 조작하게 했다. 당시 엘리베이터의 문은 격자형 문이었고, 루스는 문틈으로 머리를 내밀고 사이에 끼일 뻔했다.
  • 소년 시절 빨간 자전거를 갖고 싶어했고, 프로 입단 후 첫 월급으로 샀다. 자동차를 구입해도 이상하지 않은 나이였음에도 굳이 자전거를 사서 자랑스럽게 타고 다녔다. 루스는 여러 대의 고급차를 샀지만 자전거를 샀을 때만큼 기쁘지는 않았다고 한다.
  • 자동차 운전은 엉망이었다. 아내와 친구를 태우고 교외로 드라이브를 갔을 때 전복되어 차는 대파되었지만 다행히 모두 무사했다. 뉴욕 시내에서 운전하던 중 과속으로 "루스 사망?"이라는 기사가 나올 정도의 물적 손해 사고를 내기도 했다.
  • 어떤 신문 기자가 루스의 룸메이트에게 밤에 호텔에서 루스의 모습을 물었더니 "나는 루스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 왜냐하면 나는 그가 아니라 그의 여행 가방의 룸메이트니까"라고 대답했다.
  • 젊은 시절 기자에게 대처하는 방식이 좋지 않아 항상 악평만 쓰였다. 루스는 기자에게 "왜 나에 대해 안 좋은 기사만 쓰는 거요?"라고 묻자 "당신이 우리에게 대하는 태도가 좋지 않기 때문입니다"라고 기자가 대답했다. 루스는 사과했고 기자에 대한 태도가 좋아져 기자들도 호의적인 기사를 쓰게 되었다.
  • 양키스로 이적해 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타격 감각이 좋지 않은 루스에 대해 언론은 안 좋은 기사만 썼다. 지인은 "그것은 안 좋은 일밖에 쓸 것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거야. 활약하면 그것을 기사로 써줄 텐데"라고 말했고 다시 치기 시작하자 활약한 내용이 기사에 실리게 되었다.
  • 루스는 불량 소년이었던 자신을 처음으로 인정해 준 은사인 브라더 마시아스를 평생 존경하며 친아버지 이상으로 따랐다. 루스는 마시아스를 위해 고급차를 선물했지만 운전을 못하는 마시아스는 차를 곧 사고로 부수었고, 그 때마다 루스는 기꺼이 새 차를 선물했다. 마시아스가 사망한 후 루스는 "내 인생에서 가장 슬펐던 일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어머니를 잃은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마시아스 선생님을 잃은 것이다"라고 말했다.
  • 술을 매우 좋아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경기 전에도 맥주를 마셨다. 현대 영양학에서는 논외지만 당시에는 식사와 퍼포먼스의 관계에 논란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 왼손잡이였지만 글을 쓸 때는 오른손잡이였다.
  • 선수에게 걸려 돌아가는 78회전/분 레코드의 제목을 읽을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동체시력의 소유자였다.
  • 자신의 생일을 1894년 2월 7일이라고 믿었지만, 1934년에 출생 증명서에서 1895년 2월 6일이라고 밝혀진 후에도 이를 무시하고 2월 7일을 생일로 계속 기념했다.[268]

6. 1. 예고 홈런 전설

1932년 월드 시리즈 3차전에서 베이브 루스가 타석에 들어서기 전, 센터 쪽을 가리키며 홈런을 예고했다는 전설이 있다. 5회까지 4:4 동점 상황에서, 시카고 컵스 팬 5만 명의 야유와 관중석에서 날아온 레몬에 맞은 루스는 손가락 하나를 들어 센터 쪽을 가리켰다. 그리고 다음 공을 쳐서 센터 쪽 관중석에 꽂아 넣었다.[274]

하지만 이는 경기 후 한 기자가 쓴 글에서 비롯된 이야기일 뿐, 루스가 실제로 경기 중 손가락으로 홈런을 예고했는지는 불분명하다. 루스는 경기 전 "홈런을 날리는 데는 공 하나이면 충분하다"라고 말했지만, 경기 중 예고에 대한 진위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274]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예고 홈런'은 야구 역사상 가장 유명한 장면 중 하나로 남아있다.

6. 2. 개인적인 삶

루스는 두 번 결혼했다. 1914년 10월 17일, 십 대의 나이에 보스턴의 한 커피숍에서 웨이트리스로 일하던 헬렌 우드포드와 엘리콧 시티에 있는 성 바오로 가톨릭 교회에서 결혼했다.[191][192] 그들은 1921년에 딸 도로시를 입양했다. 루스와 헬렌은 루스의 반복적인 간통과 방치로 인해 1925년경에 별거했다.[193] 1929년 1월, 헬렌은 매사추세츠주 워터타운의 한 집에서 화재로 사망했는데, 당시 헬렌은 치과 의사 에드워드 킨더와 함께 살고 있었다.[193] 도로시는 후년에 저서 『나의 아버지, 베이브』에서[195] 자신이 후아니타 제닝스라는 정부와 루스 사이에서 낳은 친자라고 주장했다.[196]

1929년 4월 17일, 첫 번째 아내의 사망 후 3개월 만에 루스는 배우이자 모델인 클레어 메리트 호지슨과 결혼했고 그녀의 딸 줄리아를 입양했다.[197] 헬렌과 달리 클레어는 여행 경험이 많고 교육을 받았으며, 밀러 허긴스가 그라운드에서 그를 위해 했던 것처럼 루스의 삶에 구조를 부여했다.[6]

루스는 화려한 사생활로 유명했다. 팀 공동 소유주인 틸링하스트 '캡' 허스톤이 그의 생활 방식을 자제하도록 요청했을 때, 루스는 "술을 덜 마시고 일찍 자리에 들겠다고 약속하겠지만, 당신이나 5만 달러, 또는 25만 달러 때문에 여자를 포기하지는 않겠습니다. 여자는 너무 재미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201] 양키스가 시카고에서 그를 따라다니도록 고용한 한 형사는 루스가 밤에 여자 6명과 함께 있었다고 보고했다.[202] 1922년 시즌 시작 전, 루스는 연봉 5만 2천 달러로 3년 계약을 체결했고 2년 더 연장할 수 있는 옵션이 있었다. 1922 시즌 그의 성적은 부분적으로 그의 음주와 늦은 시간 탓에 실망스러웠다. 1922 시즌이 끝난 후 그는 도덕 조항이 포함된 계약 부록에 서명하라는 요청을 받았다. 루스와 루퍼트는 1922년 11월 11일에 이 조항에 서명했는데, 이 조항은 루스가 술을 완전히 금지하고, 감독의 허가 없이 훈련 및 경기 시즌 동안 오전 1시 이후까지 깨어 있지 않도록 요구했다. 또한 야구를 할 수 있는 능력을 저해하는 모든 행동이나 비행을 금지했다.[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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