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키노 다다나리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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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키노 다다나리는 1581년 미카와 국에서 태어난 인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그의 후계자 도쿠가와 히데타다를 섬겼다. 세키가하라 전투와 오사카 전투에 참전하여 공을 세웠으며, 이후 에치고 나가오카 번주가 되었다. 히로시마 성주 후쿠시마 마사노리의 개역 과정에서 중재 역할을 수행했고, 정토종 사찰 제해사를 창건하기도 했다. 1654년 스루가노카미에 재임되었으며, 같은 해 에도에서 74세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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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노 다다나리 (초대) | |
---|---|
기본 정보 | |
씨명 | 마키노 씨 |
이름 | 마키노 다다나리 |
시대 |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 - 에도 시대 전기 |
출생 | 덴쇼 9년 (1581년) |
사망 | 쇼오 3년 12월 16일 (1655년1월 23일) |
개명 | 잇포시 (유명), 신지로 (가명), 다다나리 |
계명 | 호쇼인덴젠시혼센요겟가쇼신다이코지 |
묘소 | 니가타현나가오카시의 호사이 사 |
관위 | 종5위하・스가루노카미、우메노스케、종4위하시종 |
막부 | 에도 막부 |
주군 | 도쿠가와 히데타다 |
번 | 고즈케오고 번 번주→에치고나가미네 번 번주→에치고나가오카 번 번주 |
씨족 | 마키노 씨 |
부모 | 아버지: 마키노 야스나리、어머니: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양녀・호주인 |
형제자매 | 다다나리、쇼센인、미쓰루、히데시게、요시시게、게이다이인、게이코인 |
배우자 | 정실: 나가하라 도신의 딸・다이주인 계실: 마쓰다이라 이에타다의 딸이나가와 아키오『시리즈 번 이야기 나가오카 번』현대서관、2004년、16-17쪽。 측실: 하세가와 씨 |
자녀 | 미쓰나리、레이슈인、하나가타인、야스나리、도모시게、사다나리、다다키요、오요시 |
정치 경력 | |
전임 | 마키노 야스나리 |
후임 | 마에바시 번으로 편입 및 폐번 |
직책 | 오고 번 번주 (미카와 마키노가) |
임기 | 1610년 ~ 1616년 |
대수 | 2 |
후임 | 다카다 번으로 편입 및 폐번 |
직책 | 나가미네 번 번주 (미카와 마키노가) |
임기 | 1616년 ~ 1618년 |
전임 | 호리 나오요리 |
후임 | 마키노 다다나리 (2대) |
직책 | 에치고 나가오카 번 번주 (미카와 마키노가) |
임기 | 1618년 ~ 1655년 |
대수 |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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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1616년 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사망하자, 마키노 다다나리는 그해 7월에 에치고 국 나가미네 5만 석으로 영지가 늘어나고 거처를 옮기게 되어 나가미네 성을 쌓았다.[2] 1621년에는 넨무죠닌과 함께 에도 미타다이 정에 정토종 사찰 제해사를 창건하고, 그 개기가 되었다.[2]
2. 1. 초기 생애와 가독 상속
1581년(덴쇼 9년), 미카와 국 호이 군 우시쿠보(아이치현도요카와시우시쿠보 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마키노 야스나리처럼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섬겼고, 도쿠가와 히데타다를 따랐다. 이름 '다다나리(忠誠)'는 히데타다에게 편휘를 받은 것이다.[2]1600년(게이초 5년), 세키가하라 전투에 대비해 아버지 야스나리와 함께 도쿠가와 히데타다 군세에 참여, 우에다성의 사나다 씨를 공격했다.
1604년(게이초 9년), 아버지 야스나리가 공무를 사임하고 오고성에 은거하여, 다다나리가 아버지의 직무를 대리했다.
1605년(게이초 10년) 2월 29일,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쇼군 선하에 따라 상경했다. 같은 해 4월, 종5위하 스루가노카미에 서임되었다.
1609년(게이초 14년) 12월, 아버지 야스나리가 사망하여 오고 번 2만 석 영지와 오고성을 계승했다(오고 번 제2대 번주).
2. 2. 오사카 전투와 무공
1614년 오사카 겨울 전투에 도쿠가와 군의 다섯 번째 비로 참전했다.[2] 1615년 오사카 여름 전투에도 네 번째 비로 참전하여 분전, 5월 8일 휘하의 장사 등 27개의 수급을 올리고 오사카 함락에 기여했다.[2]2. 3. 에치고 나가오카 번주 시대
1618년 3월, 다다나리는 나가오카 6만여 석으로 가증되어 재전(에치고 나가오카 번 입번)되었다. 호리 나오요리의 거성을 확충, 완성하여 나가오카성으로 했다.[2]1619년, 히로시마성 성주 후쿠시마 마사노리가 개역되자, 하나부사 마사나리와 함께 상사(上使)를 맡아 에도 시바 아타고 아래의 후쿠시마 저택에 있던 마사노리에게 그 뜻을 전하고, 히로시마성 개성을 명하는 문서를 마사노리의 친필 묵서로 받았다. "어읍고풍담"[2]에 따르면, 마사노리는 처음에 스스로 할복하겠다고 했지만 생각을 고쳐, "...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만(이에야스 공이 돌아가시고는), 이제 와서 의미 없는 일이므로 성을 넘겨 드리겠습니다."라고 묵서 한 통을 적어 "스루가노카미 전"(다다나리)에게 건네주었다고 한다. 또한, 자신의 정실 부인인 쇼센인(다다나리의 친여동생)과 그 딸을 거두어 줄 것을 다다나리에게 부탁했다. 그 결과, 6월 19일(구력)에 무사히 개성했다. 같은 해, 다다나리는 관직명을 다시 우마노죠로 했다.
1620년, 전년의 상사 임무를 순조롭게 수행한 공으로 에치고 국 코시 군 도치오에 1만 석이 추가되었다. 마사노리의 부인은 다다나리의 여동생이지만,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양녀 형태로 후쿠시마 가에 들어갔기 때문에, 이 1만 석을 부양료로 추가했다는 견해도 있다.[2] 이로써 다다나리는 총 7만 4천여 석의 영지를 다스리게 되었다.
2. 4. 만년
1625년 10월, 히데타다로부터 영지를 발급받았다.[2] 1630년 6월, 처음으로 영지 나가오카에 들어갔다.[2] 1634년 7월, 도쿠가와 이에미쓰를 보좌하여 상경, 종4위하 지주에 서임되었다.[2]1654년 스루가노카미에 다시 임명되었다. 같은 해 12월 16일, 에도 저택에서 사망했다. 향년 74세였다.[2]
다다나리가 사망했을 때, 다음 인물들이 순사했다.
이름 | 석고 | 비고 |
---|---|---|
노세 효에몬 시게노부 | 200석 | |
와타베 시치로자에몬 마사노부 | 30석 | |
이케다 고자에몬 나리히로 | 300석 | 이케다 쓰네오키의 조카 |
세키가하라 전투의 전초전에서 사나다 마사유키, 노부시게 부자에게 대패한 책임을 지고 조슈 아즈마성에 칩거했으나, 몇 달 만에 복귀하여 도쿠가와 히데타다에게 충성을 다하며 출세했다.[3] 동생 마키노 히데나리는 가신들에게 인망이 있었으나, 가신단 내 파벌 싸움으로 인해 자해 또는 처형당했다고 전해진다.[3] 히데나리는 야히코 신사의 구 말사 고쇼구에 다른 마키노 가문 사람들과 함께 모셔져 있는데, 이는 그의 원념을 달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4] 또한, 다다나리는 가신 구리 고로다유의 처와 사생아를 낳았다는 설이 있다.[5]
[1]
서적
シリーズ藩物語 越後長岡藩
現代書館
2004
장오카 번 영내 코시고 군 스요시 촌(현 나가오카시 스요시 정)의 조동종 후사이 사에 묻혔다. 이 절에는 마키노 다다나리의 목상이 안치되어 있다. 2004년 니가타현 주에쓰 지진으로 이 절은 큰 피해를 입었으나, 붕괴된 마키노 다다나리 묘탑은 2006년에 복원되었고, 본당도 크게 파손되었지만 수리되었으며, 목상도 남아있다.[2]
3. 가족 관계
관계 이름 및 설명 아버지 마키노 야스나리 어머니 호우쥬인 - 사카이 타다츠구의 딸 정실 나가하라 미치자네의 딸 - 처음에는 첩이었다고 한다. 마츠다이라 도노노스케 이에타다의 딸이라는 설도 있지만 불명확하다. 장남 마키노 미츠나리 - 로노스케·야마토노카미. 생모는 정실. 아버지의 가독을 잇지 않고 1637년 6월 22일 요절. 차남 마키노 야스나리 - 초명 타케나리, 나이젠노카미. 생모는 정실. 아버지의 영내에서 요이타 번 1만 석을 분할 상속, 고모로 번의 조상. 삼남 마키노 토모나리 - 통칭 노토, 1631년 12월 13일 시나노 우에다에서 요절. 사남 마키노 사다나리 - 초명 나오나리, 통칭 하리마. 아버지의 영내에서 6천 석을 분할 상속받아 직참 하타모토가 됨. 미네야마 번의 조상. 오남 마키노 타다키요 - 통칭 한에몬. 이나가키 헤이스케 노리시게의 양자가 되지만, 마키노 가문에 복귀하여 도쿠가와 이에쓰나의 코쇼가 됨. 형 사다나리의 후계자가 되어 미네야마 마키노 가문을 이음. 장녀 레이슈인 - 미노국 오가키 번주 토다 우지노부 정실 차녀 하나가타인 - 하타모토 쿠라하시 마사카츠 (나이쿠스노스케) 실 삼녀 오키치, 게이운인 - 생모는 하세가와 씨 (측실). 데와국 마츠야마 번주 사카이 타다츠네 정실
실제 동생으로 마키노 히데나리와 마키노 기세이가 있다. 히데나리는 성격이 격한 이복 형 타다나리에 비해 온후하고 인망이 두터웠다고 전해지며, 히데나리를 옹립하려는 세력이 번 내에 있어 오이에 소동이 일어났지만, 미연에 숙청되어 소동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기세이는 신은을 받아 하타모토로 소환된 것으로, 에치고 나가오카 번이나 코즈케 오고 번의 소령을 분할 상속받아 분가로 분출시킨 것은 아니다. 기세이의 적류는 후에 개역되었지만, 서류 중 하나가 제후로 발탁되어, 나가오카 공을 근본으로 했다. (마키노 나리사다, 마키노 타다타카 참조)
4. 일화
참조
[2]
서적
長岡の歴史 第1巻
野島出版
1968
[3]
논문
牧野秀成怪死と長岡藩体制の確立
1974
[4]
간행물
弥彦神社末社「十柱神社」
1985
[5]
기타
諸士由緒記 九里惣右衛門頼純の項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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