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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와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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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데와국은 712년 에치고국에서 분리되어 설치된 일본의 옛 행정 구역이다. 아스카 시대 이전부터 아이누족과 에미시족이 거주했으며, 야마토 조정은 7세기 중반부터 지배 영역을 넓혀갔다. 8세기에는 아키타성 건설 등 에미시와의 전쟁을 거쳐 영역을 확장했고, 헤이안 시대에는 "상국"으로 분류되었다. 중세에는 가마쿠라 막부의 지배를 받으며 쇼엔이 분할되었고, 센고쿠 시대 말에는 모가미 씨와 아키타 씨가 세력을 다투었다. 에도 시대에는 여러 번이 설치되었고, 보신 전쟁 이후 우고국과 우젠국으로 분할되어 아키타현과 야마가타현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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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와국
지도 정보
1868년 일본 지방 지도, 데와 국 강조
1868년 일본 지방 지도에서 데와 국 강조
기본 정보
일본어 이름出羽国 (데와노쿠니)
다른 이름羽州 (우슈)
양우 (료우)
소속도산도
영역야마가타현
아키타현(북동부 제외)
국력상국
거리원국
11군 71향
국부(추정) 야마가타현 쇼나이 지방 (데와 책)
아키타현 아키타시 (아키타 성터)
야마가타현 사카타시 (조우린 책터)
국분사(추정) 야마가타현 사카타시 (도노마에 유적)
(추정) 야마가타현 쓰루오카시
국분니사(미상)
이치노미야도리우미 산 오오모노이미 신사 (야마가타현 아쿠미 군 유자 정)
일반 명칭데와 국
정식 명칭데와 국
위치일본
행정 구역지방
국가일본
역사
이전 지역에치고 국
후계 지역우젠 국
우고 국
설치 시작 연도712년
폐지 연도1869년
면적 및 인구
기타

2. 연혁

나라 시대708년 에치고국(越後国) 쇼나이(庄内) 지방에 이데와 군(出羽郡)이 설치되었다.[25] 712년[26] 에치고에서 독립하여 데와 국으로 승격되었고, 무쓰국의 오키타마군(置賜郡)과 모가미군(最上郡)이 추가되었다.[27][28] 이후 토고쿠나 호쿠리쿠 등에서 8백 호 이상의 책호가 이주해 왔고, 책호나 공민(公民)[29]을 중심으로 군제 시행지가 넓혀졌다. 733년[30]경 무쓰 국과 대등한 변경의 쿠니로서 오가치군(雄勝郡)이 설치되었으나, 이후 버려지다시피 했다. 759년[31] 오카치성(雄勝城) 설치와 함께 오가치군과 히라카군(平鹿郡)이 다시 설치되었다.

8세기 무렵 아키타(秋田), 카와베(河辺) 등의 군이 설치되고, 야마모토군(山本郡)이 히라카군에서 분리되는 등 영역이 북쪽으로 넓혀졌다. 886년[32] 모가미군에서 무라야마군(村山郡)이 분리되었고, 엔기(延喜) 연간까지 데와군에서 아쿠미군(飽海郡), 타가와군(田川郡)이 분리되었다. 최종적으로 데와 국 관할 군·향은 11군 58향이었다. 헤이안 시대까지 데와는 '이데와'로 읽었다.

야마토 조정은 7세기 중반부터 9세기 초반까지 에미시의 땅에 성을 쌓고 군을 설치하여 지배를 넓혔다. 658년 도기사라책(都岐沙羅柵), 705년[33] 에치고성(越後城), 708년 데와책(出羽柵), 733년[34] 아키타무라 데와책(秋田村出羽柵, 지금의 아키타 시), 759년[35] 오카치성(雄勝城), 760년[36] 아키타성(秋田城, 지금의 아키타 시), 780년[37] 오무로새(大室塞) 등 일곱 요새가 건설되었다.

아키타 북쪽 군 설치 상황은 불분명하다. 헤이안 시대 초기까지 동북 변경의 에미시를 데와 국에서는 '蝦狄', 무쓰 국에서는 '蝦夷'로 기록했고, 무쓰 국 관할 시와군(紫波郡)이 데와 국 관할 '시와군(志波村)'으로 여겨지는 등 무쓰 국과의 경계가 불분명했다. 헤이안 시대 말기 오슈 후지와라 씨 지배를 통해 데와 국 직할지 이북이 무쓰 국으로 정리된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 무쓰 국 히나이군(比内郡, 후의 아키타군 북부)이 설치되었고, 가마쿠라 시대 초기 카호쿠군(河北郡, 초기 무쓰 국/데와 국 불분명, 후 데와국 히야마 군 거쳐 야마모토 군)이 설치되어 중세 말기까지 데와 국에서 관할했다는 견해가 있다.

메이지 원년 12월 7일(1869년 1월 19일) 보신 전쟁 패배 후 무쓰ㆍ데와ㆍ에치고 동맹 번에 대한 처분으로, 데와 국은 쇼나이(庄内) 지방 모가미(最上) 강 이북을 제외한 지금의 야마가타현 (우젠국)과 아키타현 (우고국)으로 양분되었고, 무쓰국도 다섯 개로 분할되었다.[5]

2. 1. 설치 이전

나라 시대708년에치고국(越後国) 경내의 쇼나이(庄内) 지방에 설치된 이데와 군(出羽郡)을 기원으로 한다.[25] 712년[26]에 에치고로부터 독립되어 데와 국으로 승격되었고, 무쓰국의 오키타마군(置賜郡)과 모가미군(最上郡)을 더해[27] 쿠니로서의 체제를 갖추었다.[28] 그 뒤 토고쿠나 호쿠리쿠 등의 여러 쿠니에서 8백호 이상의 책호가 이주되었고, 그 후로도 거듭 책호나 공민(公民)[29]을 중심으로 하는 군제시행지를 넓혀 나갔다. 이후 무쓰 국과 대등한 변경의 쿠니로서, 733년[30]경에는 오가치군(雄勝郡)이 설치되었다. 오가치군은 후에 버려지다시피 했지만, 759년[31]에는 오카치성(雄勝城)의 설치에 수반해 다시 오가치군과 히라카군(平鹿郡)이 설치되었다.

7세기 후반에 越国(에치고쿠니)에서 岩船郡(이와후네군)/磐舟(이와후네)와 沼垂郡(누타리군)/渟足(누타리)의 2개 군이 분리되어 越後国(에치고쿠니)이 설치되었다. 그 후 북쪽으로 세력을 확장하여, 와도(和銅) 원년 9월 28일(율력)[10](708년 11월 14일)에 出羽郡(데와군)을 설치하고, 거의 동시에 出羽柵(데와사쿠)(쇼나이 지방)을 축조했다.

야마토 조정은 7세기 중반부터 9세기 초반에 걸쳐 에미시의 땅에 성을 쌓고 군을 설치해 지배 판도를 넓히는 정책을 펼쳤다. 658년에는 도기사라책(都岐沙羅柵), 705년[33]에 에치고성(越後城), 708년에 데와책(出羽柵), 733년[34]에 아키타무라 데와책(秋田村出羽柵, 지금의 아키타 시)에서 759년[35] 오카치성(雄勝城), 760년[36]에 아키타성(秋田城, 지금의 아키타 시)을 설치하였다.

헤이안 시대 초기까지는 동북 변경의 에미시를 데와 국에서는 '蝦狄'으로 적고 무쓰 국에서는 '蝦夷'로 나누어 기록하기도 하고, 후에 무쓰 국 관할이 되는 시와군(紫波郡)이 데와 국 관할의 '시와군(志波村)'으로 여겨지는 등 무쓰 국과의 경계는 불분명했다. 그러던 것이 헤이안 시대 말기에는 오슈 후지와라 씨의 지배를 통해 데와 국 직할지 이북이 무쓰 국으로 정리된 것으로 보인다.

아스카 시대 이전, 데와(出羽) 지역에는 아이누족이나 에미시족 부족들이 거주하였고, 일본 천황가의 지배권 밖에 있었다. 아베노 히라후658년 현재 아키타와 노시로 시에 해당하는 지역에서 토착 에미시족을 정복하고 모가미 강에 요새를 구축하였다.

이 지역에는 여러 차례 군사 원정이 파견되었고, 무장한 식민 개척민들이 현재 야마가타현 쇼나이 지역에 해당하는 데와 중부에 목책으로 둘러싸인 정착촌을 형성하였다. 신설된 데와국의 국부(国府)는 처음에는 현재 사카타시의 일부에 위치한 데와사쿠(出羽柵)라는 요새화된 정착촌에 설치되었으며, 이곳은 야마토(大和)의 지배와 이 지역 정착 확장에 있어 중요한 군사 거점으로 기능하였다. 733년에는 국부가 북쪽으로 이동되었고, 나중에 "아키타 성(秋田城)"으로 명명된 새로운 군사 정착촌이 현재 아키타시 다카시미즈(秋田市雄物川) 지역에 건설되었다. 아베노 야카마로가 친주부쇼군(鎮守府将軍)으로 파견되었다. 737년에는 아키타 성을 태평양 연안의 타가 성(多賀城)과 연결하는 대규모 군사 작전이 시작되었다. 그 후 50년 동안 데와국 오카치(岡崎)와 무쓰국 모노후(物部)에 5000명이 넘는 병력을 동원하여 추가적인 요새가 건설되었다. 이 도로는 에미시족에게 큰 불만을 샀고, 767년 반란 이후 776년, 778년, 794년, 801년, 811년에 평정 원정이 실시되었다.[3]

나라 시대, 엔기식(延喜式)의 분류 체계에 따라 데와국은 "상국(上国)"으로 분류되었다. 율령 제도 하에서는 "원국(遠国)"으로 분류되었다. 데와국의 명칭은 원래 "이데와(Idewa)"라고 발음되었다. 데와국의 일궁(一宮)은 현재 야마가타현 유자정에 위치한 초카이산 오모노이미 신사(鳥海山大物忌神社)였다.

헤이안 시대878년에는 야마토 지배에 대한 반란인 간교의 난(元慶の乱)이 이 지역에서 일어났다. 또 다른 대규모 봉기는 939년 동일본 전쟁인 천경의 난(天慶の乱)의 일환으로 발생하였다. 헤이안 시대 말기에는 데와국이 11개 군으로 조직되었다. 그 후 고산넨 전쟁(後三年合戦)과 젠쿠넨 전쟁(前九年合戦)의 전장이 되었다.

2. 2. 데와 국 성립

나라 시대708년에치고국(越後国) 경내의 쇼나이(庄内) 지방에 설치된 이데와 군(出羽郡)을 기원으로 한다.[25] 712년[26]에 에치고로부터 독립되어 데와 국으로 승격되었고, 무쓰국의 오키타마군(置賜郡)과 모가미군(最上郡)을 더해[27] 쿠니로서의 체제를 갖추었다.[28] 그 뒤 토고쿠나 호쿠리쿠 등의 여러 쿠니에서 8백 호 이상의 책호가 이주되었고, 이후로도 거듭 책호나 공민(公民)[29]을 중심으로 하는 군제 시행지를 넓혀 나갔다. 733년[30]경에는 무쓰 국과 대등한 변경의 쿠니로서 오가치군(雄勝郡)이 설치되었다.

2. 3. 중세

헤이안 시대 말기, 오슈 후지와라 씨의 지배를 통해 데와 국 직할지 이북이 무쓰 국으로 정리된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에 무쓰 국 히나이군(比内郡, 후에 아키타군 북부)이 설치되었고, 가마쿠라 시대 초기에는 카호쿠군(河北郡, 당초는 무쓰 국인지 데와 국이었는지 알 수 없고, 후에 데와국 히야마 군을 거쳐 야마모토 군이 됨)이 설치되어 중세 말기까지 데와 국에서 관할했다는 견해가 있다.

1189년 가마쿠라 막부에 의해 북부 후지와라 씨가 멸망한 후, 많은 후지와라 당파가 데와의 산으로 도망쳐 중앙 정부의 권위에 저항했다.[4] 이 지역은 가마쿠라 시대 동안 수많은 쇼엔으로 나뉘었고, 이는 수많은 라이벌 사무라이 가문의 중심지로 발전했다. 1335년 시바 가네요리는 아시카가 다카우지로부터 데와 국을 영지로 받았지만,[4] 명목상으로만 지배했다. 센고쿠 시대 말엽에는 모가미 씨가 데와 국 남부 지역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으로 부상한 반면, 아키타 씨는 북부 지역을 지배했다. 두 가문 모두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지지했고, 도쿠가와 막부 시대 초기에 그들의 영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

2. 4. 근세

초기 에도 시대에는 모가미 씨와 아키타 씨가 모두 영지를 몰수당했고, 그 영토는 더 작은 번으로 분할되었는데, 그중 가장 큰 번은 사카이 씨와 우에스기 씨가 소유하였다. 막말에는 이 지역의 모든 번이 도쿠가와 막부를 지지하는 오에쓰 렙판 동맹에 가담하였다. 도쿠가와 측 세력의 패배 후, 새로운 메이지 정부는 1868년 데와 국을 북쪽의 우고 국|우고 국일본어과 남쪽의 우젠 국|우젠 국일본어으로 재편성하였다. 이들 두 국은 1876년 8월 2일에 아키타현야마가타현이 되었다.[5]

2. 5. 메이지 유신 이후

메이지 원년 12월 7일(1869년 1월 19일) 보신 전쟁에서 패배한 무쓰, 데와, 에치고의 여러 동맹 번에 대한 처분이 내려졌다. 이때 데와 국은 쇼나이(庄内) 지방 모가미(最上) 강 이북을 제외한 지금의 야마가타현에 해당하는 우젠국아키타현에 거의 상당하는 우고국으로 양분되었고, 무쓰국도 다섯 개로 분할되었다.[5]

3. 역사

데와 국은 일본의 율령제 하에서 상국(上國)으로 취급되었고[38] 에미시와 국경을 맞대고 있어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무쓰국이 동북방의 정치적·군사적 중심지 역할을 독점했다.[39] 8세기부터 9세기 초까지 데와에는 여러 성과 요새가 활발하게 축조되었고, 에미시와의 전쟁을 거쳐 점차 영역을 북쪽으로 확대했다. 무쓰국과 마찬가지로 황금이 산출되어 조정에 공납했다.

헤이안 시대 전기, 무쓰국 북부 4군은 거의 버려졌지만, 데와에서는 국부 및 아키타성의 통제가 계속되었다. 무쓰국과 달리 부수의 우두머리로 여겨지는 기요하라 씨(淸原) 집안이 재정관인으로서 힘을 길렀다. 후3년의 역으로 기요하라 씨가 멸망한 뒤, 오슈 후지와라 씨(奧州藤原氏) 집안이 무쓰국ㆍ데와의 지배자가 되었다.[40]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오슈 후지와라 씨를 멸망시키고 오슈를 차지한 뒤, 데와 국에 다치바나(橘, 오가시마小鹿島)ㆍ히라가(平賀)ㆍ오노데라(小野寺)ㆍ무토(武藤)ㆍ오에(大江) 집안 등 휘하 고케닌들을 지토로 배치했다.[40] 유리(由利) 지방 남쪽으로는 기존의 재지영주였던 유리씨 등이 그 전대로 재정관인으로서 권익을 유지하도록 두었다. 가사이 기요시게 등 가사이씨 집안이 시모우사 국에서 이주하여, 오슈 후지와라씨의 거점이었던 히라이즈미(平泉)의 통치를 맡아 오슈소부교(奥州惣奉行)직에 취임한 뒤에는 요네시로강 유역도 가사이 집안의 지배에 놓이게 되었다.

난보쿠초 시대를 전후해 영주들 사이의 다툼이 활발해지면서, 츠가루 지방에서 에조지(홋카이도)를 거쳐 카사이 집안의 영지를 차지하게 된 히야마(檜山)의 안도(安東) 집안, 다치바나 집안을 대신한 미나토(湊)의 안도(安東) 집안, 무쓰 국에서 이주해 온 토자와(戶澤)ㆍ오노데라(小野寺)ㆍ다이호우지(大寶寺) 집안, 무쓰 사바(斯波) 집안의 분파인 모가미(最上) 집안, 무쓰에서부터 진출한 다테(伊達) 집안 등의 지배를 받았다.

에도 시대에는 사타케(佐竹)ㆍ이와키(岩城)ㆍ로쿠고(六郷)ㆍ사카이(酒井)ㆍ토자와(戶澤)ㆍ우에스기(上杉) 등의 다이묘가 배치되었다. 보신 전쟁 때에는 무쓰나 에치고의 여러 번과 동맹을 맺어 바쿠후측을 도와 싸웠는데, 직후에 사타케 집안이 배반하고 다른 번들도 하나하나 격파되어 사카이ㆍ우에스기 등의 집안은 삭봉되었다.

3. 1. 고대

데와 국 성립 초기의 상황은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일본의 율령제 하에서 상국(上國)으로 취급되었고[38] 에미시와 국경을 맞대고 있어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에미시와 국경을 맞댄 무쓰국이 동북방의 정치적·군사적 중심지 역할을 독점했다.[39] 8세기부터 9세기 초까지 데와에는 여러 성과 요새가 활발하게 축조되었고, 에미시와의 전쟁을 거쳐 점차 영역을 북쪽으로 확대했다. 무쓰국과 마찬가지로 황금이 산출되어 조정에 공납했다.

헤이안 시대 전기에는 무쓰국 북부 4군이 거의 버려지다시피 했지만, 데와에서는 국부 및 아키타성의 통제가 계속되었다. 무쓰국과는 달리 부수의 우두머리로 여겨지는 기요하라 씨(淸原) 집안이 재정관인으로서 힘을 길렀던 것으로 보인다. 기요하라 씨가 후3년의 역으로 멸망한 뒤, 기요하라 씨 대신 오슈 후지와라 씨(奧州藤原氏) 집안이 무쓰국ㆍ데와의 지배자가 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40]

아스카 시대 이전, 데와(出羽) 지역에는 아이누족이나 에미시족 부족들이 거주하였고, 일본 천황가의 지배권 밖에 있었다. 아베노 히라후는 658년 현재 아키타와 노시로 시에 해당하는 지역에서 토착 에미시족을 정복하고 모가미 강에 요새를 구축하였다. 708년에는 에치고국(越後国) 내에 데와군(出羽郡)이 설치되었다. 데와군의 영역은 대략 현재 야마가타현 쇼나이 지역에 해당하며, 일본이 혼슈 북부의 토착민들을 밀어붙이면서 점차 북쪽으로 확장되었다. 데와군은 712년에 데와국(出羽国)으로 승격되었고, 이전에 무쓰국에 속했던 오키타마군과 모가미군을 편입하였다.[2]

이 지역에는 여러 차례 군사 원정이 파견되었고, 무장한 식민 개척민들이 현재 야마가타현 쇼나이 지역에 해당하는 데와 중부에 목책으로 둘러싸인 정착촌을 형성하였다. 신설된 데와국의 국부(国府)는 처음에는 현재 사카타시의 일부에 위치한 데와사쿠(出羽柵)라는 요새화된 정착촌에 설치되었으며, 이곳은 야마토의 지배와 이 지역 정착 확장에 있어 중요한 군사 거점으로 기능하였다. 733년에는 국부가 북쪽으로 이동되었고, 나중에 "아키타성"으로 명명된 새로운 군사 정착촌이 현재 아키타시 다카시미즈 지역에 건설되었다. 아베노 야카마로가 진수부장군(鎮守府将軍)으로 파견되었다. 737년에는 아키타성을 태평양 연안의 타가성(多賀城)과 연결하는 대규모 군사 작전이 시작되었다. 그 후 50년 동안 데와국 오카치와 무쓰국 모노후에 5000명이 넘는 병력을 동원하여 추가적인 요새가 건설되었다. 이 도로는 에미시족에게 큰 불만을 샀고, 767년 반란 이후 776년, 778년, 794년, 801년, 811년에 평정 원정이 실시되었다.[3]

나라 시대, 엔기시키(延喜式)의 분류 체계에 따라 데와국은 "상국(上国)"으로 분류되었다. 율령 제도 하에서는 "원국(遠国)"으로 분류되었다. 데와국의 명칭은 원래 "이데와(Idewa)"라고 발음되었다. 데와국의 일궁(一宮)은 현재 야마가타현 유자정에 위치한 초카이산 오모노이미 신사(鳥海山大物忌神社)였다.

3. 1. 1. 에미시와의 관계

일본의 율령제 하에서 데와국은 상국(上國)으로 취급되었고[38] 에미시와 국경을 맞대고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데와와 마찬가지로 에미시와 국경을 맞대고 있던 무쓰국이 동북방의 정치적·군사적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독점했다.[39] 8세기부터 9세기 초까지 여러 성과 요새가 데와에 활발하게 축조되었고, 에미시와의 전쟁을 거쳐 점차 영역을 북쪽으로 확대했다.

7세기 중반부터 9세기 초에 걸쳐, 야마토 조정은 에미시(蝦夷)가 사는 땅에 군(郡)을 설치하여 지배 영역을 확장하는 정책을 취했다. 이를 위해 에미시의 땅에 성곽(城柵)을 설치했다. 우선 기노메토게(木ノ芽峠)가 서쪽 끝, 야히코산(弥彦山)이 북쪽 끝이었던 에치고쿠니(越国)을 확장하여 삭(柵)을 세웠다. 다이카 3년(647년)에 누타리노키(渟足柵: 니가타시)[8], 다이카 4년(648년)에 이와후네노키(磐舟柵: 무라카미시)[9], 사이메이 천황 4년(658년)에 츠키사라노키(都岐沙羅柵: 아이누어 지명의 별칭, 위치 불명)을 설치했는데, 이 중 누타리노키와 이와후네노키는 현재의 시모에치 지방(下越地方)에 해당한다.

7세기 후반에 에치고쿠니에서 이와후네군(岩船郡)/이와후네(磐舟)와 누타리군(沼垂郡)/누타리(渟足)의 2개 군이 분리되어 에치고국(越後国)이 설치되었다. 그 후 북쪽으로 세력을 확장하여, 와도 원년 9월 28일(율력)[10](708년 11월 14일)에 데와군(出羽郡)을 설치하고, 거의 동시에 데와사쿠(出羽柵: 쇼나이 지방)을 축조했다. 와도 5년 9월 23일(율력)[11](712년 10월 27일)에 데와군이 '''데와국'''으로 승격되었고, 같은 해 10월 1일에 무쓰국으로부터 오키타마군과 모가미군을 넘겨받아 국가 체제를 갖추었다.[12] 이후, 도고쿠·호쿠리쿠 등 여러 국(國)에서 800호 이상의 책호(柵戸)를 이주시켰다. 그리고 나서도 책호와 공민[13]을 중심으로 군(郡) 제도 시행 지역을 확대해 나갔다.

무쓰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변방의 나라가 되었고, 덴표 5년(733년)경에는 유쇼군(雄勝郡)을 설치하였으며, 같은 해 12월 26일에는 데와사쿠가 쓰치자키항(아키타무라) 다카시미즈오카(아키타시)로 옮겨졌다. 그 후 유쇼군은 일단 폐기된 것으로 보이나, 덴표호지 3년(759년)에는 유쇼성(雄勝城) 설치에 맞춰 다시 유쇼군·히라카군(平鹿郡)이 설치되었다. 덴표호지 4년(760년)경, 데와사쿠는 아키타성으로 개편되었다. 이후에도 포로의 반란이 잇따랐기 때문에, 호키 11년(780년)에 아키타성의 폐기가 검토되었으나, 차관 국사인 데와노스케가 아키타성의 수장으로 상주하게 되었다. 이 무렵, 국부 기능이 시로와키사쿠(城輪柵: 야마가타현 사카타시)로 옮겨졌다. 무쓰국 국부에는 진수부가 설치되었고, 헤이안 시대 후기에 아키타성의 수장이 공석이 되자, 진수부장군이 양국을 군사적으로 통괄하였다.

헤이안 시대인 878년에는 야마토 지배에 대한 반란인 간교의 난이 이 지역에서 일어났다. 또 다른 대규모 봉기는 939년 동일본 전쟁인 덴교의 난의 일환으로 발생하였다.

3. 1. 2. 율령 국가의 통치

일본 율령제 하에서 데와국은 상국(上國)으로 취급되었고[38], 에미시와 국경을 맞대고 있어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에미시와 국경을 맞댄 무쓰국이 동북방의 정치적·군사적 중심지 역할을 독점했다.[39] 8세기부터 9세기 초까지 데와에는 여러 성과 요새가 활발하게 축조되었고, 에미시와의 전쟁을 거쳐 점차 영역을 북쪽으로 확대했다. 무쓰국과 마찬가지로 황금이 산출되어 조정에 공납했다.

헤이안 시대 전기에는 무쓰측 북부 4군이 거의 버려지다시피 했지만, 데와에서는 국부 및 아키타성의 통제가 계속되었다. 무쓰와는 달리 부수의 우두머리로 여겨지는 기요하라(淸原) 집안이 재정관인으로서 힘을 길렀던 것으로 보인다. 기요하라 씨가 후3년의 역으로 멸망한 뒤, 기요하라 씨 대신 오슈 후지와라 씨(奧州藤原氏) 집안이 무쓰ㆍ데와의 지배자가 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40]

3. 2. 중세

일본의 율령제 하에서 데와국은 상국(上國)으로 취급되었고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38] 8세기부터 9세기 초까지 여러 성과 요새가 데와에 활발하게 축조되었고, 에미시와의 전쟁을 거쳐 점차 영역을 북쪽으로 확대했다. 무쓰 국과 마찬가지로 황금이 산출되어 조정에 공납했다. 헤이안 시대 전기에는 부수의 우두머리로 여겨지는 키요하라(淸原) 집안이 재정관인으로서 힘을 길렀던 것으로 보인다. 키요하라씨가 후3년의 역으로 멸망한 뒤, 오슈 후지와라씨(奧州藤原氏) 집안이 무쓰ㆍ데와의 지배자가 되었다.[40]

남북조 시대를 전후해 영주들 사이의 다툼이 활발해지면서, 츠가루 지방에서 에조지(홋카이도)를 거쳐 카사이 집안의 영지를 차지하게 된 히야마(檜山)의 안도(安東) 집안, 다치바나 집안을 대신한 미나토(湊)의 안도(安東) 집안, 무쓰 국에서 이주해 온 토자와(戶澤)ㆍ오노데라(小野寺)ㆍ다이호우지(大寶寺) 집안, 무쓰 사바(斯波) 집안의 분파인 모가미(最上) 집안, 무쓰에서부터 진출한 다테(伊達) 집안 등의 지배를 받았다. 센고쿠 시대 말엽에는 모가미 씨가 데와 국 남부 지역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으로 부상한 반면, 아키타 씨는 북부 지역을 지배했다.

엔기(延喜) 연간까지 데와국이 관할한 것은 11군 58향이었다.[15]

데와국의 군(郡)
군 이름비고
아쿠타군(飽海郡)엔기(延喜) 연간까지 데와군(出羽郡)에서 분리
타가와군엔기(延喜) 연간까지 데와군(出羽郡)에서 분리
무라야마군(村山郡)닌나(仁和) 2년(886년) 모가미군(最上郡)에서 분리
야마모토군후의 센보쿠군(仙北郡). 헤이안 시대 헤이라카군(平鹿郡)에서 분리
가와베군(河辺郡)8세기에 설치



덴초(天長) 7년(830년)과 가쇼(嘉祥) 3년(850년)에는 큰 지진을 겪었다. 830년의 덴초 지진(天長地震)은 일본후기(日本後紀)에 아키타성 근처 큰 강물이 없어진 것이 기록되어 있으며, 850년의 데와 지진(出羽地震)은 일본삼대실록(日本三代実録)에 쓰나미가 성륜책(城輪柵) 근처 6리까지 밀려왔다는 기록이 남아있다.[16]

3. 2. 1. 가마쿠라 막부의 성립과 고케닌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賴朝)는 오슈 후지와라씨를 멸망시키고 오슈를 차지한 뒤, 데와 국에 다치바나(橘, 오가시마小鹿島)ㆍ히라가(平賀)ㆍ오노데라(小野寺)ㆍ무토(武藤)ㆍ오에(大江) 집안 등 휘하 고케닌(御家人)들을 지토(地頭)로 배치했다.[40] 유리(由利) 지방 남쪽으로는 기존의 재지영주였던 유리씨 등이 그 전대로 재정관인으로서 권익을 유지하도록 두었다. 가사이 기요시게(葛西清重) 등 가사이 집안이 시모우사 국에서 이주하여, 오슈 후지와라씨의 거점이었던 히라이즈미(平泉)의 통치를 맡아 오슈소부교(奥州惣奉行)직에 취임한 뒤에는 요네시로(米代) 강 유역도 가사이 집안의 지배에 놓이게 되었다.

3. 2. 2. 남북조 시대 이후의 혼란

일본의 율령제 하에서 데와국은 상국(上國)으로 취급되었고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38] 헤이안 시대 전기에는 부수의 우두머리로 여겨지는 키요하라(淸原) 집안이 재정관인으로서 힘을 길렀던 것으로 보인다. 키요하라씨가 후3년의 역으로 멸망한 뒤, 오슈 후지와라씨(奧州藤原氏) 집안이 무쓰ㆍ데와의 지배자가 되었다.[40]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賴朝)오슈 후지와라씨를 멸망시키고 오슈를 차지한 후, 데와 국에 다치바나(橘, 오가시마小鹿島)ㆍ히라가(平賀)ㆍ오노데라(小野寺)ㆍ무토(武藤)ㆍ오에(大江) 집안 같은 휘하 고케닌(御家人)들을 지토(地頭)로서 배치하고, 유리(由利) 지방 남쪽으로는 기존의 재지영주였던 유리씨 등이 그 전대로 재정관인으로서 권익을 유지하도록 두었다. 가사이 기요시게(葛西清重) 등의 가사이 집안이 시모우사 국(下総国)에서 이주하여 히라이즈미(平泉)의 통치를 맡아 오슈소부교(奥州惣奉行)직에 취임한 뒤에는 요네시로(米代) 강 유역도 가사이 집안의 지배에 놓이게 되었다.

남북조 시대를 전후해 영주들 사이의 다툼이 활발해지면서, 츠가루 지방에서 에조지(홋카이도)를 거쳐 카사이 집안의 영지를 차지하게 된 히야마(檜山)의 안도(安東) 집안, 다치바나 집안을 대신한 미나토(湊)의 안도(安東) 집안, 무쓰 국에서 이주해 온 토자와(戶澤)ㆍ오노데라(小野寺)ㆍ다이호우지(大寶寺) 집안, 무쓰 사바(斯波) 집안의 분파인 모가미(最上) 집안, 무쓰에서부터 진출한 다테(伊達) 집안 등의 지배를 받았다.

3. 3. 근세

중세 시대 데와 국은 북부에서는 공령제, 남부에서는 장원공령제가 시행되며 기본적으로 가마쿠라 바쿠후의 통제를 받았다. 남북조 시대를 전후해 영주들 간의 다툼이 활발해졌다. 츠가루 지방에서 에조지(홋카이도)를 거쳐 카사이 집안의 영지를 차지하게 된 히야마의 안도(安東) 집안, 다치바나 집안을 대신한 미나토(湊)의 안도(安東) 집안, 무쓰 국에서 이주해 온 토자와(戶澤)ㆍ오노데라(小野寺)ㆍ다이호우지(大寶寺) 집안, 무쓰 사바(斯波) 집안의 분파인 모가미(最上) 집안, 무쓰에서부터 진출한 다테(伊達) 집안 등이 데와 국을 지배했다.

3. 3. 1. 에도 막부의 통치와 번의 성립

일본의 율령제 하에서 데와 국은 상국(上國)으로 취급되었고[38] 에미시와 국경을 맞대고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헤이안 시대 전기에 키요하라(淸原) 집안이 재정관인으로서 힘을 길렀고, 후3년의 역으로 멸망한 뒤에는 오슈 후지와라씨(奧州藤原氏) 집안이 무쓰와 데와를 지배했다.[40]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賴朝)는 오슈 후지와라씨를 멸망시키고 데와 국에 다치바나(橘, 오가시마小鹿島)ㆍ히라가(平賀)ㆍ오노데라(小野寺)ㆍ무토(武藤)ㆍ오에(大江) 집안 같은 휘하 고케닌(御家人)들을 지토(地頭)로서 배치했다. 유리(由利) 지방 남쪽으로는 기존의 재지영주였던 유리씨 등이 그 전대로 재정관인으로서 권익을 유지하도록 했다. 가사이 기요시게(葛西清重) 등의 가사이 집안이 시모우사 국(下総国)에서 이주하여 오슈소부교(奥州惣奉行)직에 취임한 뒤에는 요네시로(米代) 강 유역도 가사이 집안의 지배에 놓이게 되었다.

남북조 시대를 전후해 영주들 사이의 다툼이 활발해졌고, 에도 시대에는 사타케(佐竹)ㆍ이와키(岩城)ㆍ로쿠고(六郷)ㆍ사카이(酒井)ㆍ토자와(戶澤)ㆍ우에스기(上杉) 등의 다이묘가 배치되었다. 초기 에도 시대에는 모가미 씨(Mogami)와 아키타 씨(Akita)가 모두 영지를 몰수당했고, 그 영토는 더 작은 번으로 분할되었는데, 그중 가장 큰 번은 사카이 씨(Sakai clan)와 우에스기 씨(Uesugi clan)가 소유하였다.

막말에는 이 지역의 모든 번이 도쿠가와 막부를 지지하는 오에쓰 렙판 동맹(Ōuetsu Reppan Dōmei)에 가담하였다. 보신 전쟁 때에는 무쓰나 에치고의 여러 번과 동맹을 맺어 바쿠후측을 도와 싸웠는데, 직후에 사타케 집안이 배반하고 다른 번들도 하나하나 격파되어 사카이ㆍ우에스기 등의 집안은 삭봉되었다.

3. 3. 2. 보신 전쟁과 메이지 유신

일본의 율령제 하에서 데와 국은 상국(上國)으로 취급되어[38] 에미시와 국경을 맞대고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데와 국에 다치바나(橘, 오가시마小鹿島)ㆍ히라가(平賀)ㆍ오노데라(小野寺)ㆍ무토(武藤)ㆍ오에(大江) 집안 같은 휘하 고케닌(御家人)들을 지토(地頭)로서 배치하고, 유리(由利) 지방 남쪽으로는 기존의 재지영주였던 유리씨 등이 그 전대로 재정관인으로서 권익을 유지하도록 두었다.

에도 시대에는 사타케(佐竹)ㆍ이와키(岩城)ㆍ로쿠고(六郷)ㆍ사카이(酒井)ㆍ토자와(戶澤)ㆍ우에스기(上杉) 등의 다이묘가 배치되었다. 보신 전쟁 때에는 무쓰나 에치고의 여러 번과 동맹을 맺어 바쿠후측을 도와 싸웠는데, 직후에 사타케 집안이 배반하고 다른 번들도 하나하나 격파되어 사카이ㆍ우에스기 등의 집안은 삭봉되었다.

막말에는 이 지역의 모든 번이 도쿠가와 막부를 지지하는 오에쓰 렙판 동맹에 가담하였다. 도쿠가와 측 세력의 패배 후, 새로운 메이지 정부는 1868년 데와 국을 북쪽의 우고 국|우고 국일본어과 남쪽의 우젠 국|우젠 국일본어으로 재편성하였다. 이들 두 국은 1876년 8월 2일에 아키타현과 야마가타현이 되었다.[5]

보신 전쟁 때, 데와 국의 여러 번들은 오슈에치 렬번 동맹에 가담하여 메이지 정부와 대항했지만, 구보타 번을 중심으로 북쪽 데와의 여러 번이 이반(離反)하자, 쇼나이번ㆍ모리오카 번(盛岡藩)이 공격하여 아키타 전쟁(秋田戦争)을 일으켰다. 구보타 성(久保田城) 부근까지 공격해 들어왔지만, 요네자와 번(米沢藩)・가미야마 번・센다이 번(仙台藩)이 항복함으로써 중심 세력인 쇼나이번과 모리오카 번도 후퇴하여 메이지 정부에 항복했다.

4. 주요 시설

### 국부(国府)

헤이안 시대 중기에 쓰여진 《와묘우루이쥬쇼(和名類聚抄》에는 데와국의 고쿠후(國府)가 히라카군에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중세 시대의 백과사전인 《슈가이쇼(拾芥抄)》에는 히라카군과 데와군 두 곳 모두 데와국의 고쿠후였다고 한다. 데와국 초기에는 데와책이 고쿠후였던 것으로 보이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733년에 고쿠후는 아키타의 타카키요미즈오카(高清水岡)로 옮겨졌다.[41] 이후 에미시들의 반란 등으로 고쿠후는 다시 이전해야 했다. 옮겨진 곳에 대해서는 카와베군[42], 히라카군[43], 데와책[44] 등 여러 설이 있지만, 최종적으로는 쇼나이 평야의 키노와책으로 옮겨졌다는 데에는 학자들 사이에 이견이 없다. 《일본삼대실록(日本三代實錄)》 닌나 3년(887년) 5월 20일조에는 데와의 고쿠후를 '데와 군 이구치의 땅(出羽郡井口地)'으로 표기하고 있는데, 이는 지금의 사카타시 토호쿠부에 있는 키노와책(城輪柵) 유적이라는 견해가 유력하다.[45] 에미시와 인접한 곳에는 759년에 오카치성이 설치되었고, 이후 쇼나이 평야의 고쿠후와 아키타 평야의 아키타성, 센보쿠 히라카 평야의 오카치성의 1부 2성 체제가 이어졌다.

### 사원

절 이름창건 시기비고
호코쿠산 하쿠산지야마가타시 야쿠시정에 있는 천태종 사찰로, 본존불은 약사여래이다.
국분사현존하지 않음. 헤이안 시대의 국분사는 성륜삭 외곽 동쪽에서 1.2km 동쪽에 있는 도노마에 유적을 비정하는 설이 유력.[21]
국분니사현존하지 않음. 도노마에 유적보다 4km 남쪽에 있는 고아미다 유적을 비정하는 설이 유력.[21]
법륭사(法隆寺)856년 4월 9일
관음사(観音寺)865년 6월 5일
유가사(瑜伽寺)866년 6월 23일
장안사(長安寺)867년 11월 12일
영산사(霊山寺)12월 29일 (지정연도 불명)데와(出羽)국 사이조(最上)군
안륭사(安隆寺)870년 1월 13일데와(出羽)국 야마모토(山本)군



### 신사

연희식신명장에는 대사(大社) 2좌 2사, 소사(小社) 7좌 7사로 총 9좌 9사가 기재되어 있다. 대사 2사는 모두 명신대사이다. 데와국의 식내사 일람을 참조.



; 총사・일궁 이하

  • 총사
  • * 총사신사 (아키타시 카와시리소샤정)
  • * 고시오왕신사 (아키타시 테라이코자쿠라)
  • * 록소신사 (야마가타현 쓰루오카시 후지시마[22] 록소하타 (구 히가시타가와군 후지시마정 후지시마[22] 록소하타))
  • 일궁 '''조계산대물기신사''' - 조계산 정상에 본전이, 산기슭의 후키우라와 와라비오카의 2곳에 구궁(리궁)이 있다. 오랫동안 2개의 구궁이 일궁의 칭호를 다투었기 때문에, 에도 시대 막부의 재정에 의해 정상의 사당이 일궁으로 정해졌다.
  • 이궁 조륜신사 - 국사견재사. 대물기신사의 섭사.
  • 삼궁 소물기신사


### 가도(街道)

4. 1. 국부(国府)

헤이안 시대 중기에 쓰여진 《와묘우루이쥬쇼(和名類聚抄》에는 데와국의 고쿠후(國府)가 히라카군에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중세 시대의 백과사전인 《슈가이쇼(拾芥抄)》에는 히라카군과 데와군 두 곳 모두 데와국의 고쿠후였다고 한다. 데와국 초기에는 데와책이 고쿠후였던 것으로 보이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733년에 고쿠후는 아키타의 타카키요미즈오카(高清水岡)로 옮겨졌다.[41] 이후 에미시들의 반란 등으로 고쿠후는 다시 이전해야 했다. 옮겨진 곳에 대해서는 카와베군[42], 히라카군[43], 데와책[44] 등 여러 설이 있지만, 최종적으로는 쇼나이 평야의 키노와책으로 옮겨졌다는 데에는 학자들 사이에 이견이 없다. 《일본삼대실록(日本三代實錄)》 닌나 3년(887년) 5월 20일조에는 데와의 고쿠후를 '데와 군 이구치의 땅(出羽郡井口地)'으로 표기하고 있는데, 이는 지금의 사카타 시 토호쿠부에 있는 키노와책(城輪柵) 유적이라는 견해가 유력하다. 에미시와 인접한 곳에는 759년에 오카치성이 설치되었고, 이후 쇼나이 평야의 고쿠후와 아키타 평야의 아키타성, 센보쿠 히라카 평야의 오카치성의 1부 2성 체제가 이어졌다.[45]

《일본명칭집(和名抄)》에는 평가군(平鹿郡)에, 《잡저(拾芥抄)》(가마쿠라 시대~남북조 시대)에는 “평가군(平鹿郡), 우슈군(出羽郡), 양쪽에 국부(府)”라고 기록되어 있다.

출우국(出羽国) 성립 당시 국부는 출우삭(出羽柵)(쇼나이 지방에 있었다고 여겨짐)에 설치되었지만, 소재는 불명이다. 출우삭은 733년에 아키타 다카시미즈오카(현재의 아키타성(秋田城)터)로 옮겨졌다. 그때 국부 기능도 아키타로 이전했는지 여부는 여러 설이 있지만, 발굴 조사에 따르면 8세기 후반에 아키타로 국부가 이전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아키타성 주변의 에미시(蝦夷)의 반란 등으로 국부는 재이전을 피할 수 없었고, 그 이전지에 대해서도 가와베군설(『일본후기(日本後紀)』의 가와베부(河辺府)를 국부로 보는 설), 평가군설(『일본명칭집(和名抄)』에 “출우국(出羽国), 국부재평가군(国府在平鹿郡)”이라고 있는 등의 설), 우슈군설(후에 아쿠타군(飽海郡))설(고고학 발굴 결과 등에 따른 설) 등의 논쟁이 있지만, 최종적으로 쇼나이 평야(庄内平野)의 성륜삭(城輪柵)터로 옮겨진 것에는 거의 이견이 없다. 더욱이 『일본삼대실록(日本三代実録)』 인화(仁和) 3년 5월 20일[19](887년 6월 15일)의 조에도, 국부는 “우슈군(出羽郡) 이구지(井口地)”라고 표기되어 있으며, 이 이구국부(井口国府)는 사카타시(酒田市) 동북부에 있는 국의 사적 성륜삭(城輪柵)이라는 견해가 유력하다.[20]

에미시(蝦夷)와의 경계 부근에는 759년에 유쇼성(雄勝城)도 설치되어, 이후 쇼나이 평야(庄内平野)의 국부, 아키타 평야(秋田平野)의 아키타성(秋田城), 센보쿠 평가 평야(仙北平鹿平野)의 유쇼성(雄勝城)의 일부이성(一府二城) 체제가 계속되었다.

유쇼성(雄勝城)의 소재지는 여러 설이 있다. 아키타성(秋田城)에 대해서는 발굴 조사에 따르면 10세기 중반까지의 유적만 확인되고 있지만, 문헌상으로는 아키타성(秋田城)은 12세기경까지 유수소(留守所)가 있었던 것이 알려져 있다. 또, 국부유수소(国府留守所)도 14세기경까지 존재하고 있는 것 같지만, 유쇼성(雄勝城)은 언제부터인가 폐쇄된 것으로 보인다.

4. 2. 사원

절 이름창건 시기비고
호코쿠산 하쿠산지야마가타시 야쿠시정에 있는 천태종 사찰로, 본존불은 약사여래이다.
국분사현존하지 않음. 헤이안 시대의 국분사는 성륜삭 외곽 동쪽에서 1.2km 동쪽에 있는 도노마에 유적을 비정하는 설이 유력.[21]
국분니사현존하지 않음. 도노마에 유적보다 4km 남쪽에 있는 고아미다 유적을 비정하는 설이 유력.[21]
법륭사(法隆寺)856년 4월 9일
관음사(観音寺)865년 6월 5일
유가사(瑜伽寺)866년 6월 23일
장안사(長安寺)867년 11월 12일
영산사(霊山寺)12월 29일 (지정연도 불명)데와(出羽)국 사이조(最上)군
안륭사(安隆寺)870년 1월 13일데와(出羽)국 야마모토(山本)군


4. 3. 신사

연희식신명장에는 대사(大社) 2좌 2사, 소사(小社) 7좌 7사로 총 9좌 9사가 기재되어 있다. 대사 2사는 모두 명신대사이다. 데와국의 식내사 일람을 참조.

  • 보카이군 대물기신사 (현 조계산대물기신사, 야마가타현 보카이군 유사정) - '''명신대사'''.
  • 보카이군 소물기신사 (야마가타현 사카타시 야마다테)
  • 보카이군 겟산신사 (야마가타현 히가시타가와군 쇼나이정 타치야자와) - '''명신대사'''. 데와삼산 중 하나.
  • 타가와군 온가신사 - 야마가타현 쓰루오카시 이오카, 동시 온가하라, 동시 게이나이지마에 론사 3사.
  • 타가와군 유즈사메신사 (야마가타현 쓰루오카시 유다가와)
  • 타가와군 이테하신사 (현 데와신사, 야마가타현 쓰루오카시 하구로정 테무케) - 데와삼산 중 하나.
  • 헤이라카군 엔토히코신사 (아키타현 요코테시 야마우치오마부카와)
  • 헤이라카군 하우시베쓰신사 (현 호로하야마하우시베쓰신사, 아키타현 요코테시 오오모리정 야사와기)
  • 야마모토군 소에가와신사 - 소에가와신사 (아키타현 미나미아키타군 하치로가타정 우라오오마치) 또는 다케록소신사 (아키타현 다이센시 신궁지), 하치만신사 (아키타현 다이센시 신궁지. 다케록소신사 경외사), 소에가와신메이샤 (아키타현 아키타시 소에가와)에 비정.


; 총사・일궁 이하

  • 총사
  • * 총사신사 (아키타시 카와시리소샤정)
  • * 고시오왕신사 (아키타시 테라이코자쿠라)
  • * 록소신사 (야마가타현 쓰루오카시 후지시마[22] 록소하타 (구 히가시타가와군 후지시마정 후지시마[22] 록소하타))
  • 일궁 '''조계산대물기신사''' - 조계산 정상에 본전이, 산기슭의 후키우라와 와라비오카의 2곳에 구궁(리궁)이 있다. 오랫동안 2개의 구궁이 일궁의 칭호를 다투었기 때문에, 에도 시대 막부의 재정에 의해 정상의 사당이 일궁으로 정해졌다.
  • 이궁 조륜신사 - 국사견재사. 대물기신사의 섭사.
  • 삼궁 소물기신사

4. 4. 가도(街道)

5. 지역

데와국은 현재의 야마가타현아키타현에 걸쳐 있었으며, 니가타현의 일부도 포함하는 넓은 지역이었다.

5. 1. 군(郡)

5. 2. 에도 시대의 번(藩)

번명다이묘 가문유형석고(石高)비고
구보타 번사타케(佐竹)도자마205000석아키타 번(秋田藩)으로도 불림
가메다 번이와키(岩城)도자마20000석
혼죠 번로쿠고(六郷)도자마20000석
쇼나이-마쓰야마 번사카이(酒井)후다이20000석쇼나이 번의 분번
쇼나이 번사카이(酒井)후다이170000석쓰루오카 번(鶴岡藩)으로도 불림
야마가타 번미즈노(溝口)후다이50000석
가미노야마 번

6. 인물

国司|고쿠시일본어일본 율령제 하에서 데와국을 다스리던 관리이다. 데와노카미(出羽守), 데와노스케(出羽介), 데와노조(出羽掾) 등의 관직이 있었다.

==== 데와노카미(出羽守) ====


  • 다지히케 마사카네(多治比家主) - 양로 7년 임관.
  • 타나베 난파(田辺難波) - 천평 9년 임관.
  • 후지와라노 다마로(藤原田麻呂) - 천평보자 7년 무쓰・데와 안찰사.
  • 후지와라노 와타마로(文室綿麻呂) - 연력 20년 정월 데와 권수.
  • 오토모노 이마히토(大伴今人) - 홍인 2년 3월 데와 수로서 무공을 세움.
  • 후지와라노 교세이(藤原興世) - 겐케이 2년 겐케이 천황의 난으로 망명.
  • 후지와라노 야스노리(藤原保則) - 겐케이 2년 데와 권수.
  • 후지와라노 요리(藤原義理) - 쵸호 2년 데와 수로서 말을 헌상.
  • 타이라노 스네노부(平季信) - 쵸호 3년 임관.
  • 후지와라노 스미이에(藤原済家) - 칸코 6년 임관.
  • 미나모토노 지카히라(源親平) - 칸코 9년 임관.
  • 나카토미노 노부시게(大中臣宣茂) - 쵸와 6년 임관.
  • 오에노 도키무네(大江時棟) - 칸닌 4년 임관.
  • 다쿠니노 다카타카(多米国隆) - 만주 4년 임관.
  • 후지와라노 다메미치(藤原為通) - 쵸겐 5년 임관.
  • 미나모토노 가네나가(源兼長) - 에이쇼 5년 임관.
  • 미나모토노 다다쿠니(源忠国)
  • 미나모토노 나리요리(源斉頼) - 텐키 5년 임관.
  • 미나모토노 요시이에(源義家) - 코헤이 6년 임관.
  • 나카하라노 모토모토(中原師元) - 다이가이키 겸 명경박사.
  • 타이라노 마사히라(平正衡) - 죠토쿠 3년 임관.
  • 미나모토노 미쓰쿠니(源光国) - 텐닌 2년 임관.
  • 타이라노 노부카네(平信兼) - 큐쥬 3년 임관.
  • 다카카이에노 야스쓰네(高階泰経) - 호겐 3년 임관.
  • 지치부노 시게쓰나(秩父重綱) - 큐안 4년 데와 권수.
  • 후지와라노 히데요시(藤原秀能) - 켄포 4년 임관.
  • 나카조노 이에나가(中条家長) - 죠오 2년 임관.
  • 니카이도노 유키요시(二階堂行義) - 카젠 3년 임관.
  • 니카이도노 사다후지(二階堂貞藤) - 정소집사.
  • 사에구사노 모토토키(寒河江元時)
  • 다이호지노 준시(大宝寺淳氏) - 칸쇼 3년 임관.


==== 데와노스케(出羽介) ====

  • 후지와라 모토보다


==== 데와노조(出羽掾) ====

==== 무가 관위(武家官位)로서의 데와노카미 ====

무가 정권 시대에는 데와노카미가 무사들의 명예 관직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이름비고
다니 와카토모(谷衛友)
모가미 요시아키
야나다 마사쓰나(簗田政綱)
우에무라 이에마사(植村家政)
사카사키 나오모리
마쓰다이라 나오마사(松平直政)
가토 야스오키(加藤泰興)
홋타 마사모리
미즈노 타다토시(水野忠職)
오쿠보 타다토모
요네즈 타다모리(米津田盛)
우치다 마사슈(内田正衆)
토키 요리오(土岐頼雄)
모리가와 시게노부(森川重信)
마쓰다이라 쓰나타카(松平綱隆)
아라카와 사다아키(荒川定昭)
소마 사다타네(相馬貞胤)
미야케 야스오(三宅康雄)
마쓰다이라 쓰나치카(松平綱近)
미즈타니 카쓰미(水谷勝美)
야나가사와 요시야스
미즈노 타다스케(水野忠周)
마쓰다이라 요시토오루(松平吉透)
사나다 노부히로(真田信弘)
오스가 타다마사(大須賀忠政)
마쓰다이라 노부타다(松平宣維)
마쓰다이라 키요타케(松平清武)
모리가와 토시타네(森川俊胤)
이시카와 마사아키(石河正章)
미즈노 타다타니(水野忠穀)
마쓰다이라 무네야스(松平宗衍)
마에다 후사나가(前田房長)
미야케 야스유키(三宅康之)
요네즈 미치마사(米津通政)
마쓰다이라 하루아쓰(松平治郷)
미즈노 타다토모(水野忠友)
다니 마모리(谷衛量)
하야시 타다히데(林忠英)
오쿠보 타다마사(大久保忠真)
아오키 가즈사다(青木一貞)
미즈노 타다나리(水野忠成)
마쓰다이라 나리쓰네(松平斉恒)
쓰가루 노부요시(津軽信順)
마쓰다이라 나리사이(松平斉斎)
우에무라 이에나리(植村家教)
미즈노 타다요시(水野忠義)
미즈노 타다타케(水野忠武)
미즈노 타다요시(水野忠良)
모리가와 토시타미(森川俊民)
마쓰다이라 사다야스(松平定安)
이시카와 미쓰요시(石河光美)
모리가와 토시타다(森川俊位)
미즈노 타다히로(水野忠寛)
모리가와 토시토쿠(森川俊徳)
미즈노 타다마사(水野忠誠)
홋타 마사야스
모가미 요시쓰나
미즈노 타다타카(水野忠敬)


6. 1. 국사(国司)

데와노쿠니 국사(国司)는 일본 율령제 하에서 데와국을 다스리던 관리이다. 데와노카미(出羽守), 데와노스케(出羽介), 데와노조(出羽掾) 등의 관직이 있었다.

==== 데와노카미(出羽守) ====

데와노카미는 데와국의 최고위 관리이다.

  • 다지히케 마사카네(多治比家主) - 양로 7년 임관.
  • 타나베 난파(田辺難波) - 천평 9년 임관.
  • 후지와라노 다마로(藤原田麻呂) - 천평보자 7년 무쓰・데와 안찰사.
  • 후지와라노 와타마로(文室綿麻呂) - 연력 20년 정월 데와 권수.
  • 오토모노 이마히토(大伴今人) - 홍인 2년 3월 데와 수로서 무공을 세움.
  • 후지와라노 교세이(藤原興世) - 겐케이 2년 겐케이 천황의 난으로 망명.
  • 후지와라노 야스노리(藤原保則) - 겐케이 2년 데와 권수.
  • 후지와라노 요리(藤原義理) - 쵸호 2년 데와 수로서 말을 헌상.
  • 타이라노 스네노부(平季信) - 쵸호 3년 임관.
  • 후지와라노 스미이에(藤原済家) - 칸코 6년 임관.
  • 미나모토노 지카히라(源親平) - 칸코 9년 임관.
  • 나카토미노 노부시게(大中臣宣茂) - 쵸와 6년 임관.
  • 오에노 도키무네(大江時棟) - 칸닌 4년 임관.
  • 다쿠니노 다카타카(多米国隆) - 만주 4년 임관.
  • 후지와라노 다메미치(藤原為通) - 쵸겐 5년 임관.
  • 미나모토노 가네나가(源兼長) - 에이쇼 5년 임관.
  • 미나모토노 다다쿠니(源忠国)
  • 미나모토노 나리요리(源斉頼) - 텐키 5년 임관.
  • 미나모토노 요시이에(源義家) - 코헤이 6년 임관.
  • 나카하라노 모토모토(中原師元) - 다이가이키 겸 명경박사.
  • 타이라노 마사히라(平正衡) - 죠토쿠 3년 임관.
  • 미나모토노 미쓰쿠니(源光国) - 텐닌 2년 임관.
  • 타이라노 노부카네(平信兼) - 큐쥬 3년 임관.
  • 다카카이에노 야스쓰네(高階泰経) - 호겐 3년 임관.
  • 지치부노 시게쓰나(秩父重綱) - 큐안 4년 데와 권수.
  • 후지와라노 히데요시(藤原秀能) - 켄포 4년 임관.
  • 나카조노 이에나가(中条家長) - 죠오 2년 임관.
  • 니카이도노 유키요시(二階堂行義) - 카젠 3년 임관.
  • 니카이도노 사다후지(二階堂貞藤) - 정소집사.
  • 사에구사노 모토토키(寒河江元時)
  • 다이호지노 준시(大宝寺淳氏) - 칸쇼 3년 임관.


==== 데와노스케(出羽介) ====

  • 후지와라 모토보다


==== 데와노조(出羽掾) ====

==== 무가 관위(武家官位)로서의 데와노카미 ====

무가 정권 시대에는 데와노카미가 무사들의 명예 관직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이름비고
다니 와카토모(谷衛友)
모가미 요시아키
야나다 마사쓰나(簗田政綱)
우에무라 이에마사(植村家政)
사카사키 나오모리
마쓰다이라 나오마사(松平直政)
가토 야스오키(加藤泰興)
홋타 마사모리
미즈노 타다토시(水野忠職)
오쿠보 타다토모
요네즈 타다모리(米津田盛)
우치다 마사슈(内田正衆)
토키 요리오(土岐頼雄)
모리가와 시게노부(森川重信)
마쓰다이라 쓰나타카(松平綱隆)
아라카와 사다아키(荒川定昭)
소마 사다타네(相馬貞胤)
미야케 야스오(三宅康雄)
마쓰다이라 쓰나치카(松平綱近)
미즈타니 카쓰미(水谷勝美)
야나가사와 요시야스
미즈노 타다스케(水野忠周)
마쓰다이라 요시토오루(松平吉透)
사나다 노부히로(真田信弘)
오스가 타다마사(大須賀忠政)
마쓰다이라 노부타다(松平宣維)
마쓰다이라 키요타케(松平清武)
모리가와 토시타네(森川俊胤)
이시카와 마사아키(石河正章)
미즈노 타다타니(水野忠穀)
마쓰다이라 무네야스(松平宗衍)
마에다 후사나가(前田房長)
미야케 야스유키(三宅康之)
요네즈 미치마사(米津通政)
마쓰다이라 하루아쓰(松平治郷)
미즈노 타다토모(水野忠友)
다니 마모리(谷衛量)
하야시 타다히데(林忠英)
오쿠보 타다마사(大久保忠真)
아오키 가즈사다(青木一貞)
미즈노 타다나리(水野忠成)
마쓰다이라 나리쓰네(松平斉恒)
쓰가루 노부요시(津軽信順)
마쓰다이라 나리사이(松平斉斎)
우에무라 이에나리(植村家教)
미즈노 타다요시(水野忠義)
미즈노 타다타케(水野忠武)
미즈노 타다요시(水野忠良)
모리가와 토시타미(森川俊民)
마쓰다이라 사다야스(松平定安)
이시카와 미쓰요시(石河光美)
모리가와 토시타다(森川俊位)
미즈노 타다히로(水野忠寛)
모리가와 토시토쿠(森川俊徳)
미즈노 타다마사(水野忠誠)
홋타 마사야스
모가미 요시쓰나
미즈노 타다타카(水野忠敬)


6. 1. 1. 데와노카미(出羽守)


  • 다지히케 마사카네(多治比家主) - 양로 7년(723년) 다지히이케 모리(多治比池守)의 아들.
  • 타나베 난파(田辺難波) - 천평 9년(737년)
  • 후지와라노 다마로(藤原田麻呂) - 천평보자 7년(763년) 무쓰・데와 안찰사.
  • 후지와라노 와타마로(文室綿麻呂) - 연력 20년(801년) 정월(데와 권수)
  • 오토모노 이마히토(大伴今人) - 홍인 2년(811년) 3월에 데와 수로서 무공을 세움.
  • 후지와라노 교세이(藤原興世) - 겐케이 2년(878년) 겐케이 천황의 난으로 망명.
  • 후지와라노 야스노리(藤原保則) - 겐케이 2년(878년) 데와 권수.
  • 후지와라노 요리(藤原義理) - 쵸호 2년(1000년) 데와 수로서 말을 헌상함.
  • 타이라노 스네노부(平季信) - 쵸호 3년(1001년) 임관. 데와 벤(出羽弁)의 아버지.
  • 후지와라노 스미이에(藤原済家) - 칸코 6년(1009년) 임관.
  • 미나모토노 지카히라(源親平) - 칸코 9년(1012년) 임관.
  • 나카토미노 노부시게(大中臣宣茂) - 쵸와 6년(1017년) 임관.
  • 오에노 도키무네(大江時棟) - 칸닌 4년(1020년) 임관.
  • 다쿠니노 다카타카(多米国隆) - 만주 4년(1027년) 임관.
  • 후지와라노 다메미치(藤原為通) - 쵸겐 5년(1032년) 임관.
  • 미나모토노 가네나가(源兼長) - 에이쇼 5년(1050년) 임관.
  • 미나모토노 다다쿠니(源忠国)
  • 미나모토노 나리요리(源斉頼) - 텐키 5년(1057년) 임관.
  • 미나모토노 요시이에(源義家) - 코헤이 6년(1063년) 임관.
  • 나카하라노 모토모토(中原師元) - 다이가이키 겸 명경박사.
  • 타이라노 마사히라(平正衡) - 죠토쿠 3년(1099년) 임관. 타이라노 키요모리(平清盛)의 증조부.
  • 미나모토노 미쓰쿠니(源光国) - 텐닌 2년(1109년) 임관. 텐에이 원년(1110년) 데와국 사가에 쇼(寒河江荘)에 난입함.
  • 타이라노 노부카네(平信兼) - 큐쥬 3년(1156년) 임관.
  • 다카카이에노 야스쓰네(高階泰経) - 호겐 3년(1158년) 임관. 고시라카와인의 측근.
  • 지치부노 시게쓰나(秩父重綱) - 큐안 4년(1184년) 데와 권수.
  • 후지와라노 히데요시(藤原秀能) - 켄포 4년(1216년) 임관.
  • 나카조노 이에나가(中条家長) - 죠오 2년(1223년) 임관. 평정중.
  • 니카이도노 유키요시(二階堂行義) - 카젠 3년(1237년) 임관. 평정중.
  • 니카이도노 사다후지(二階堂貞藤) - 정소집사. 법명 도운(道蘊).
  • 사에구사노 모토토키(寒河江元時)
  • 다이호지노 준시(大宝寺淳氏) - 칸쇼 3년(1462년) 임관.

6. 1. 2. 데와노스케(出羽介)


  • 후지와라 모토보다

6. 1. 3. 데와노조(出羽掾)

6. 1. 4. 무가 관위(武家官位)로서의 데와노카미

이름비고
다니 와카토모(谷衛友)
모가미 요시아키
야나다 마사쓰나(簗田政綱)
우에무라 이에마사(植村家政)
사카사키 나오모리
마쓰다이라 나오마사(松平直政)
가토 야스오키(加藤泰興)
홋타 마사모리
미즈노 타다토시(水野忠職)
오쿠보 타다토모
요네즈 타다모리(米津田盛)
우치다 마사슈(内田正衆)
토키 요리오(土岐頼雄)
모리가와 시게노부(森川重信)
마쓰다이라 쓰나타카(松平綱隆)
아라카와 사다아키(荒川定昭)
소마 사다타네(相馬貞胤)
미야케 야스오(三宅康雄)
마쓰다이라 쓰나치카(松平綱近)
미즈타니 카쓰미(水谷勝美)
야나가사와 요시야스
미즈노 타다스케(水野忠周)
마쓰다이라 요시토오루(松平吉透)
사나다 노부히로(真田信弘)
오스가 타다마사(大須賀忠政)
마쓰다이라 노부타다(松平宣維)
마쓰다이라 키요타케(松平清武)
모리가와 토시타네(森川俊胤)
이시카와 마사아키(石河正章)
미즈노 타다타니(水野忠穀)
마쓰다이라 무네야스(松平宗衍)
마에다 후사나가(前田房長)
미야케 야스유키(三宅康之)
요네즈 미치마사(米津通政)
마쓰다이라 하루아쓰(松平治郷)
미즈노 타다토모(水野忠友)
다니 마모리(谷衛量)
하야시 타다히데(林忠英)
오쿠보 타다마사(大久保忠真)
아오키 가즈사다(青木一貞)
미즈노 타다나리(水野忠成)
마쓰다이라 나리쓰네(松平斉恒)
쓰가루 노부요시(津軽信順)
마쓰다이라 나리사이(松平斉斎)
우에무라 이에나리(植村家教)
미즈노 타다요시(水野忠義)
미즈노 타다타케(水野忠武)
미즈노 타다요시(水野忠良)
모리가와 토시타미(森川俊民)
마쓰다이라 사다야스(松平定安)
이시카와 미쓰요시(石河光美)
모리가와 토시타다(森川俊位)
미즈노 타다히로(水野忠寛)
모리가와 토시토쿠(森川俊徳)
미즈노 타다마사(水野忠誠)
홋타 마사야스
모가미 요시쓰나
미즈노 타다타카(水野忠敬)


6. 2. 수호(守護)

데와국은 수호(守護)가 설치되지 않은 국가였기 때문에, 남북조 시대 이후 진수부장군(鎮守府将軍)(남조)・오슈 총대장(奥州総大将)(북조)・오슈 우슈 관령(管領)・가마쿠라 공방(鎌倉公方)(시노가와 고쇼(篠川御所), 이나무라 고쇼(稲村御所)) 등이 군사권을 행사했다. 남북조 시대 초기에 남조 측이 지방 영주에게 많은 권한을 부여했기 때문에 교토 부지중(京都扶持衆) 등을 낳는 원인이 되었다.

참조

[1] 서적 Japan: an Illustrated Encyclopedia Kōdansha 1993
[2] 서적 Annales des empereurs du japon https://books.google[...] 1834
[3] 서적 Japanese Castles AD 250-1540
[4] 서적 Terry's Japanese Empire https://books.google[...] 1914
[5] 서적 Japan Encyclopedia https://books.google[...] 2005
[6] 문서 이즈모국과의 중복을 피하기 위해서 두 번째 글자를 써서 부른다.
[7] 문서 메이지 유신 이후, 우젠국과 우고국으로 분할되었기 때문이다.
[8] 문서 造渟足柵置柵戸老人等相謂之曰數年鼠向東行此造柵之兆乎
[9] 문서 治磐舟柵以備蝦夷遂選越與信濃之民始置柵戸
[10] 서적 角川日本地名大辞典(旧地名編)
[11] 서적 角川日本地名大辞典(旧地名編)
[12] 서적 続日本紀 716-10-12
[13] 문서 조용조와 병역 및 잡역 등을 부담하는 사람들
[14] 서적 延喜式
[15] 서적 倭名類聚抄 고산사본
[16] 서적 일본인은 대재해를 어떻게 극복해 왔는가 아사히 신문 출판사 2017-06-25
[17] 문서 구안 5년(1149년)부터 인평 3년(1153년)에 걸쳐 오슈 후지와라 씨와 후지와라 섭관가는 연공 증징을 둘러싸고 다투고 있다.
[18] 문서 후지와라 섭관가와의 연공 증징을 둘러싼 다툼 이후, 섭관가 장원(간가에 장) 사찰로서의 성격을 지닌 지온사(간가에 시) 재건의 봉행직을 평충정이 맡고 있다는 점에서 사찰 영지 지배에는 의문이 남는다.
[19] 서적 角川日本地名大辞典(旧地名編)
[20] 서적 2003
[21] 서적 2003
[22] 문서 상토지마의 오류인가.
[23] 서적 고대씨족계보집성/중권
[24] 문서 이즈모국(出雲国)과의 중복을 피하기 위해서 두 번째 글자를 써서 부른다.
[25] 문서 문헌에 따르면 와도 원년 9월 28일이다.
[26] 문서 일본 연호로 와도 5년 9월 23일이다.
[27] 문서 와도 5년 10월 1일이다.
[28] 문서 《쇼쿠니혼키》와도 5년 10월 1일조 기사. 하지만 동서 영귀 2년(716년) 9월 23일조에도 무쓰 국 오키타마ㆍ모가미 2군을 데와 국에 예속시키라는 기사가 있다. 와도 5년이나 영귀 2년이라는 시점 기록이 둘 중 하나는 처음부터 틀렸다는 설과, 전자는 결정된 시점이고 후자는 실제로 시행된 시점이라고 해석하는 설이 있다.
[29] 문서 율령제에서 조ㆍ용ㆍ조를 비롯한 세금이나 병역을 비롯한 각종 부역 등을 부담한 민호(民戶)
[30] 문서 일본 연호로 덴표(天平) 5년이다.
[31] 문서 일본 연호로 덴표호지(天平寶字) 3년이다.
[32] 문서 일본 연호로 닌나(仁和) 2년이다.
[33] 문서 일본 연호로 게이운(慶雲) 2년이다.
[34] 문서 일본 연호로 덴표 5년이다.
[35] 문서 일본 연호로 덴표호지 3년이다.
[36] 문서
[37] 문서
[38] 문서
[39] 문서
[40] 문서
[41] 문서
[42] 문서
[43] 문서
[44] 문서
[45]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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