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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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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막낀부는 막 왕조의 황제였으며, 1638년 아버지 막낀코안의 뒤를 이어 즉위하여 투언득 연호를 사용했다. 그는 찐씨 가문의 침략을 받았고, 청나라의 지원을 얻으려 노력했으나 실패했다. 삼번의 난 당시 오삼계를 지지했으나 난이 진압된 후 1677년 찐딱의 공격으로 패배하여 멸망했다. 이후 청나라에 의해 후 레 왕조에 인도되었고, 막 왕조는 멸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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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낀부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막 낀부 (莫敬宇)
본명막 낀부 (莫敬宇)
통치 정보
칭호대월 막조의 황제
재위 기간1623년 – 1638년
연호투언득 (順德)
이전 통치자막 낀코안
다음 통치자막 낀헤
인물 정보
아버지막 낀코안
왕가막조
사후 정보
묘호명종 (明宗)
시호장천혜지경문이무개황제 (莊天惠地景文頤武開皇帝)

2. 생애

막낀부는 막낀코안의 아들로, 1638년에 아버지 막낀코안이 죽자 뒤를 이어 즉위하였고, 연호를 투언득으로 고쳤다.[1] 찐짱이 막 왕조의 황제 교체기를 틈타 북벌을 시도했으나, 막 왕조 군대에 패배하였다. 이후 막 왕조는 태원(太原) 일대에서 여러 차례 소요를 일으켰다.[1]

1644년, 후 레 왕조까오방을 대대적으로 공격했으나, 막 왕조에 패배하였다.

1661년, 청나라는 사신을 보내 막낀부를 귀화장군(歸化將軍), 안남도통사(安南都統使)로 봉하였다.

1662년, 막 왕조는 양산(諒山) 칠천(七泉)에서 군대를 모아 후 레 왕조에게 빼앗긴 영토 회복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였다.

1666년~1667년, 찐딱찐깐, 찐동(鄭棟), 딘반따(丁文左) 등을 이끌고 까오방을 공격하자, 막낀부는 성을 버리고 청나라 운남(雲南)의 진안주(鎭安州)로 피신하였다. 그는 그곳 관리에게 뇌물을 주어 청나라의 힘을 빌려 까오방으로 돌아가려 했다.[1]

1669년, 강희제는 사신을 보내 후 레 왕조에 까오방 4주(석림(石臨), 광연(廣淵), 상랑(上琅), 하랑(下琅)) 반환을 요구했고, 막낀부는 까오방으로 돌아왔다. 이때 막낀부는 막응우옌타인(莫元淸)으로 개명했는데, 일설에는 그의 아들이었다고도 한다.[1]

1673년, 삼번의 난이 일어나자 막응우옌타인은 오삼계의 연호 소무(昭武)를 채택하고 그를 지지했다. 그러나 삼번의 난이 진압되면서 청군이 광서(廣西)에 진입했다.[1]

1677년, 찐딱이 다시 까오방을 공격하자 막응우옌타인은 패배하여 광서 용주(龍州)로 달아났다. 이로써 막 왕조는 완전히 멸망하였다.[1]

《흠정월사통감강목(欽定越史通鑑綱目)》에 따르면, 막낀부(혹은 그의 아들 막낀꽝)는 1683년 청나라에 의해 후 레 왕조에 인도되었다. 이후 사로잡히지 않은 막씨 자손들은 후 레 왕조에 투항했고, 일부는 석방되어 찐 주의 관원이 되었다.[1]

2. 1. 즉위 초반과 레-찐 연합군과의 항쟁

막낀부는 막낀코안의 아들이다. 《흠정월사통감강목(欽定越史通鑑綱目)》에 따르면 1638년에 막낀코안이 사망하자 뒤를 이었고, 연호를 투언득으로 고쳤다.[1] 찐짱이 막 왕조에서 황제가 교체되는 틈을 타 군사를 이끌고 북벌하였으나 막 왕조에게 패배하였다.[1] 이후 막 왕조는 여러 차례 병사를 내어 태원(太原) 일대에서 소요를 일으켰다.[1]

1644년, 후 레 왕조는 대대적으로 까오방을 공격하였으나 막 왕조에게 패배하였다.

1661년, 청나라가 사신을 파견하여 막낀부를 귀화장군(歸化將軍), 안남도통사(安南都統使)로 봉하였다.

1662년, 막 왕조가 양산(諒山) 칠천(七泉)에서 군대를 모아 후 레 왕조에게 빼앗긴 영토를 회복하려고 시도했으나 후 레 왕조에게 패배하였다.

2. 2. 청나라의 개입과 외교적 노력

1661년, 청나라가 사신을 파견하여 막낀부를 귀화장군(歸化將軍), 안남도통사(安南都統使)로 봉했다.[1]

1669년, 강희제는 이선근(李仙根), 양조걸(楊兆傑) 두 사람을 보내 후 레 왕조에게 까오방 4주(석림(石臨), 광연(廣淵), 상랑(上琅), 하랑(下琅))를 막 왕조에게 반환할 것을 요구했고, 막낀부는 까오방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1] 이때 막낀부는 막응우옌타인(莫元淸)으로 개명했는데, 일설에는 그의 아들이었다고도 한다.[1]

1673년, 청나라에서 삼번의 난이 일어나자 막응우옌타인은 오삼계의 연호인 소무(昭武)를 공개적으로 채용하고, 오삼계에게 양초(糧草)를 제공하며 그를 지지하였다.[1]

2. 3. 삼번의 난과 막 왕조의 멸망

1638년 막낀코안이 사망하자 막낀부가 뒤를 이었고, 연호를 투언득으로 고쳤다. 찐짱이 막 왕조에서 황제가 교체되는 틈을 타 군사를 이끌고 북벌하였으나 막 왕조에 패배하였다. 이후 막 왕조는 여러 차례 군사를 일으켜 태원(太原) 일대에서 소요를 일으켰다.[1]

1661년 청나라는 사신을 파견하여 막낀부를 귀화장군(歸化將軍), 안남도통사(安南都統使)로 봉하였다.[1]

1662년 막 왕조는 양산(諒山) 칠천(七泉)에서 군대를 모아 후 레 왕조에게 빼앗긴 영토 회복을 시도했으나 후 레 왕조에 패배하였다.[1]

1666년에서 1667년 사이 찐딱찐깐, 찐동(鄭棟), 딘반따(丁文左) 등 부(部)를 거느리고 대대적으로 북벌하여 까오방을 공격하였다. 막낀부는 성을 버리고 청나라 운남(雲南)의 진안주(鎭安州)로 피신하였다. 막낀부는 그 지역 관원에게 뇌물을 주어 청나라의 세력을 빌려 까오방으로 돌아가려 시도하였다.[1]

1669년 강희제는 이선근(李仙根), 양조걸(楊兆傑) 두 사람을 보내 후 레 왕조에게 까오방 4주(석림(石臨), 광연(廣淵), 상랑(上琅), 하랑(下琅))를 막 왕조에게 반환할 것을 요구하였고, 막낀부는 까오방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이때 막낀부는 막응우옌타인(莫元淸)으로 개명하였는데, 일설에는 그의 아들이었다고 한다.[1]

1673년 청나라에서 삼번의 난이 일어나자 막응우옌타인은 오삼계의 연호인 소무(昭武)를 공개적으로 채용하고 오삼계에게 양초(糧草)를 제공하며 그를 지지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삼번의 난이 진압되었고, 청군은 광서(廣西) 지역에 진입하였다.[1]

1677년 찐딱은 레 희종의 명의를 빌려 딘반따, 응우옌흐우당(阮有登) 등을 장수로 삼고 다시 까오방을 공격하였다. 막응우옌타인은 패배하여 광서의 용주(龍州)로 달아났다. 이로써 막 왕조의 잔여 세력은 완전히 소멸되었다.[1]

2. 4. 최후

1638년 막낀코안이 사망하자 막낀부가 뒤를 이었고, 연호를 투언득으로 고쳤다.[1] 찐짱이 막 왕조의 황제 교체 틈을 타 북벌을 감행했으나 막 왕조에 패배했다. 이후 막 왕조는 여러 차례 태원(太原) 일대에서 소요를 일으켰다.[1]

1644년, 후 레 왕조는 대대적으로 까오방(高平)을 공격했으나 막 왕조에 패배했다.[1]

1661년, 청나라는 사신을 파견하여 막낀부를 귀화장군(歸化將軍), 안남도통사(安南都統使)로 봉했다.[1]

1662년, 막 왕조는 양산(諒山) 칠천(七泉)에서 군대를 모아 후 레 왕조에게 빼앗긴 영토 회복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1]

1666년에서 1667년 사이, 찐딱이 대규모 북벌을 감행하여 까오방을 공격했다. 막낀부는 성을 버리고 청나라 운남(雲南)의 진안주(鎭安州)로 피신했다. 막낀부는 그 지역 관원에게 뇌물을 주어 청나라의 힘을 빌려 까오방으로 돌아가려 했다.[1]

1669년, 강희제가 사신을 보내 후 레 왕조에게 까오방 4주를 막 왕조에게 반환할 것을 요구했고, 막낀부는 까오방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이때 막낀부는 막응우옌타인(莫元淸)으로 개명했는데, 일설에는 그의 아들이었다고 한다.[1]

1673년, 청나라에서 삼번의 난이 일어나자 막응우옌타인은 오삼계의 연호인 소무(昭武)를 채택하고 그를 지지했다. 그러나 삼번의 난이 진압되면서 청군이 광서(廣西) 지역에 진입했다.[1]

1677년, 찐딱이 다시 까오방을 공격하자 막응우옌타인은 패배하고 광서의 용주(龍州)로 달아났다. 이로써 막 왕조의 잔여 세력은 완전히 소멸되었다.[1]

《흠정월사통감강목(欽定越史通鑑綱目)》에 따르면, 막낀부(혹은 그의 아들 막낀꽝(莫敬光))는 1683년 청나라에 의해 후 레 왕조에 인도되었다. 이후 막씨 자손 중 사로잡히지 않은 자들은 후 레 왕조에 투항했고, 일부는 석방되어 찐 주의 관원이 되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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