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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낀코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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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막낀코안은 17세기 초 베트남 막 왕조의 왕이다. 그는 즉위 전 경왕에 봉해졌으며, 막낀꿍에게 양위받아 1621년 대자현에서 칭제하고 연호를 롱타이로 개원했다. 1623년 찐씨 정권과의 전투에서 패배하여 도주했고, 1625년에는 후 레 왕조에 항복하여 명나라의 압력 하에 태위, 통국공에 봉해졌다. 이후 막 왕조는 쇠퇴하여 후 레 왕조에 조공했으며, 막낀코안은 1638년에 사망하고 그의 아들 막낀부가 뒤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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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낀코안
기본 정보
이름막 낀 콴 (Mạc Kính Khoan)
한자 표기莫敬寬
신분
칭호황제
왕조막 왕조
재위 기간
재위 기간1623년–1638년
선대 군주막 낀 꿍
후대 군주막 낀 부
생애
출생일알 수 없음
사망일1638년
가족 관계
기타
묘호광조 (光祖)
시호화천부지도문경무혜원황제(和天扶地度文慶武惠元皇帝)
연호융태(隆泰)

2. 생애

막낀코안은 막 왕조의 황제로, 즉위 전에는 경왕(慶王)으로 불렸다. 1594년 막낀꿍후 레 왕조찐뚱에게 패하고 명나라에 의지할 때, 막낀코안은 군대를 이끌고 타이응우옌을 근거지로 삼아 백부 막낀꿍과 힘을 합쳤다.[2]

1621년, 막낀꿍의 양위를 받아 황제에 즉위한 막낀코안은 롱타이(隆泰)라는 연호를 사용했다. 1623년 찐뚱 사후 후 레 왕조의 내분을 틈타 남쪽을 공격했으나 찐짱에게 패배하여 까오방으로 도망쳤다.[3] 1625년, 찐짱에게 까오방을 함락당하고 막낀꿍 등 가족을 잃은 막낀코안은 명나라로 피신했다가, 후 레 왕조에 항복하고 명나라의 압력으로 통국공(通國公)에 봉해져 까오방으로 돌아왔다.[4] 이후 막 왕조는 후 레 왕조에 조공을 바치는 약소 세력으로 전락했다.

1638년 막낀코안은 병으로 사망했고, 그의 아들 막낀부가 뒤를 이었다.[4]

2. 1. 즉위 전

막낀코안은 즉위 전에 경왕(慶王)에 봉해졌다. 1594년, 막낀꿍후 레 왕조찐뚱에게 패하여 사명부(思明府)로 달아났고, 명나라에 칭신했다. 막낀코안은 부(部)를 거느리고 타이응우옌을 근거지로 삼아 지켰으며 백부 막낀꿍과 회합했다.[2] 1621년, 막낀꿍이 막낀코안에게 양위했다.[3]

2. 2. 즉위와 후 레 왕조와의 항쟁

1594년, 막낀꿍후 레 왕조찐뚱에게 패하여 사명부(思明府)로 달아나 명나라에 칭신했다. 막낀코안은 부(部)를 거느리고 타이응우옌을 근거지로 삼아 지켰으며 백부 막낀꿍과 회합했다.[2]

1621년, 막낀꿍이 경왕 막낀코안에게 양위했고, 이후 대자현(大慈縣)에서 칭제하여 연호를 롱타이(隆泰)로 개원했으며, 막낀꿍을 태상황으로 높였다.[2]

1623년, 찐뚱이 죽고 찐짱과 찐쑤언이 쟁립하자 막낀코안이 기회를 틈타 군사를 거느리고 남쪽을 쳤으며, 동시에 각 로(路)의 세력을 선동하여 병사를 일으켜 반란하도록 했다. 병사가 가림현에 이르렀으나 8월 26일(9월 20일)에 찐짱의 공격을 받아 패했고, 전군이 몰살당했다. 막낀코안은 겨우 몸만 건져 산림 가운데로 도망가 까오방으로 돌아갔다.[3]

1625년, 찐짱이 까오방을 함락해 막낀꿍과 황태자 등을 잡아 죽였으며, 막낀코안과 그의 차자 막낀부는 명나라로 도망했다.[4] 같은 해 사람을 후 레 왕조로 보내 항복을 표하였고, 막 왕조의 연호를 제거하고 후 레 왕조의 영조 연호를 사용하게 했다. 명나라의 압력 아래 후 레 왕조는 막낀코안을 태위(太尉), 통국공(通國公)에 봉하였으며 까오방으로 돌아오는 것을 허락했다. 이후 막 왕조의 군사 실력은 더욱 쇠약해졌으며 아울러 후 레 왕조에게 조공해야 했다.

1638년, 막낀코안이 병으로 죽자 막낀부가 뒤를 이었다.

2. 3. 후 레 왕조에 굴복

1621년, 막낀꿍은 경왕 막낀코안에게 양위했고, 이후 대자현(大慈縣)에서 칭제하여 연호를 롱타이(隆泰)로 개원했으며, 막낀꿍을 태상황으로 높였다.[2]

1623년, 찐뚱이 죽고 찐짱과 찐쑤언이 권력을 다투는 틈을 타 막낀코안은 군사를 일으켜 남쪽을 쳤으며, 동시에 각 로(路)의 세력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키게 했다. 병사가 가림현(嘉林縣)에 이르렀으나, 그해 8월 찐짱의 공격을 받아 패했고, 전군이 몰살당했다. 막낀코안은 간신히 몸만 빠져나와 산림 속으로 도망쳐 까오방으로 돌아갔다.[3]

1625년, 찐짱이 까오방을 함락하여 막낀꿍과 황태자 등을 잡아 죽였으며, 막낀코안과 그의 차자 막낀부는 명나라로 도망했다.[4] 같은 해, 막낀코안은 사신을 보내 후 레 왕조에 항복을 표하고, 막 왕조의 연호를 버리고 후 레 왕조의 정삭을 받들었다. 명나라의 압력으로 후 레 왕조는 막낀코안을 태위(太尉), 통국공(通國公)에 봉하고 까오방으로 돌아오는 것을 허락했다. 이후 막 왕조의 군사력은 더욱 약화되었고, 후 레 왕조에 조공해야 했다.

1638년, 막낀코안이 병으로 죽자 막낀부가 뒤를 이었다.

2. 4. 사망

1638년에 막낀코안은 병으로 죽었고, 막낀부가 뒤를 이었다.[4]

참조

[1] 서적 Việt Nam sử lược https://vi.wikisourc[...]
[2] 서적 大越史記全書
[3] 서적 大越史記全書
[4] 서적 明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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