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림답부
1. 개요
명림답부는 고구려 연나부의 조의선인으로, 165년 차대왕을 시해하고 신대왕을 옹립한 쿠데타를 일으켰다. 신대왕 즉위 후 최초의 국상에 임명되었으며, 한나라의 침략에 청야전술을 펼쳐 격퇴하고 좌원 전투에서 승리하여 공을 세웠다. 179년 113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고구려의 국정에 60년간 헌신하며 폭군 암살, 왕권 강화, 침략자 격퇴 등 많은 공헌을 했다고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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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년 출생 -
켈수스
켈수스는 로마 제국의 법률가이자 정치가로서 프라에토르, 트라키아 총독, 집정관 등 고위 공직을 역임하고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자문으로서 법률 제정에 기여했으며, 그의 법률 격언들은 현대 민법의 핵심 원칙으로 남아있다. -
2세기 한국 사람 -
구수왕
구수왕은 백제의 제6대 국왕으로 재위 기간 동안 말갈, 신라와의 전쟁에서 주로 패배하고 가뭄과 기근으로 어려움을 겪었으며, 사반왕을 아들로 두었으나 비류왕과의 관계는 학계에서 논쟁이 되고 있고, 그의 치세는 백제 초기 왕권 경쟁의 불안정성을 보여주는 시기로 평가된다. -
2세기 한국 사람 -
을파소
을파소는 고구려 고국천왕 때 국상으로 임명되어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키고 진대법 실시를 건의했으며, 산상왕 때에도 국상직을 유지하다 203년에 사망했다. -
179년 사망 -
신대왕
차대왕의 폭정을 피해 은둔 생활을 하던 신대왕은 명림답부의 옹립으로 고구려 제8대 왕이 되어, 반대 세력 등용, 국상제 도입, 후한의 침략을 막아내는 등 왕권 안정과 국방 강화에 힘썼다. -
179년 사망 -
왕보 (후한)
후한 시대 환관 왕보는 조절과 함께 두태후의 총애를 받으며 권력을 장악하고 반대 세력 제거에 앞장섰으나, 양자의 비리와 부정부패가 드러나 처형당하며 몰락하여 후한 환관 정치의 폐단을 보여주는 사례로 남았다.
2. 생애
명림답부는 연나부(椽那部) 조의(皂衣)였다가 165년 쿠데타를 일으켜 차대왕을 시해하고 왕의 동생 백고를 신대왕으로 옹립했다. 166년 최초의 국상(國相)에 임명되었고, 패자(沛者) 벼슬을 더해 내외 병마(兵馬) 통수권과 양맥(梁貊)부락 지배권을 받았다.
172년, 한 현도태수 경림(耿臨)이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입하자 왕이 요격과 농성 중 어느 쪽을 선택할지 물었다. 명림답부는 청야전술을 주장하여 관철시켰다. 한 군사들이 굶주림에 지쳐 퇴각하자, 명림답부는 수천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추격하여 좌원(坐原)에서 크게 섬멸하였다. 이 공으로 좌원과 질산(質山)을 식읍으로 받았다.
179년 9월 113세로 죽자 신대왕이 직접 애도하고 예를 갖추어 질산에 장사지냈다.
2.1. 정권 장악
165년(차대왕 20년) 쿠데타를 일으켜 차대왕을 시해하고 왕의 동생 백고(佰固)를 신대왕으로 옹립했다. 166년(신대왕 2년) 최초의 국상(國相)에 임명되었고, 패자(沛者) 벼슬을 더해 내외 병마(兵馬)의 통수권과 함께 양맥(梁貊)부락에 대한 지배권을 받았다.
명림답부는 고구려 연나부(椽那部)의 조의(皂衣)였다. 그는 태조왕 재위 기간 동안 벼슬이 높아졌으며, 태조왕이 사망할 무렵에는 이미 조정에 있었다. 146년 차대왕이 즉위하자, 명림답부는 많은 어려움에 직면했고 폭군의 통치 아래 고통을 겪었다.
165년 차대왕 재위 20년에 명림답부는 군대를 이끌고 일부 귀족과 조정 관리들의 지원을 받아 왕을 시해하고, 99세의 나이로 고구려 정부를 장악했다.
그는 태조왕의 동생인 고백고를 다음 왕으로 초청했다. 고백고는 그해 고구려의 제8대 왕으로 추대되었고, 명림답부에게는 국상(國相) 자리가 주어져 고구려 역사상 최초로 이 칭호를 받았다.
2.2. 국상 임명 및 권력 행사
165년(차대왕 20년) 연나부(椽那部) 조의(皂衣)로 있다가 쿠데타를 일으켜 차대왕을 시해하고 왕의 동생 백고(佰固)를 신대왕으로 옹립했다. 166년(신대왕 2년) 최초의 국상에 임명되었고, 패자(沛者) 벼슬을 더해 내외 병마(兵馬)의 통수권과 함께 양맥(梁貊)부락에 대한 지배권을 받았다.
172년, 한(漢)의 현도태수(玄菟太守) 경림(耿臨)이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입하자 왕이 이를 요격할 것인지 아니면 농성할 것인지 의견을 물었는데, 청야전술을 주장하여 이를 관철시켰다. 결국 한의 군사들이 굶주림에 지쳐 퇴각하였고, 이에 명림답부가 수천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추격하여 좌원(坐原)에서 크게 섬멸하였다. 이 공으로 좌원과 질산(質山)을 식읍으로 받았다.
2.3. 한나라와의 전쟁
172년, 한(漢)의 현도태수(玄菟太守) 경림(耿臨)이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입하자 왕이 이를 요격할 것인지 아니면 농성할 것인지 의견을 물었는데, 명림답부는 청야전술을 주장하여 이를 관철시켰다. 한의 군사들이 굶주림에 지쳐 퇴각하자, 명림답부가 수천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추격하여 좌원(坐原)에서 크게 섬멸하였다. 이 공으로 좌원과 질산(質山)을 식읍으로 받았다.
2.4. 사망
179년 9월 113세의 나이로 사망하자 신대왕은 직접 애도를 표하고 예를 갖추어 질산에 장사지냈다. 명림답부는 한나라 군대를 상대로 고구려 군대를 승리로 이끈 후였다. 그는 고구려를 위해 60년간 국정에 헌신하며 폭군을 암살하고 왕권을 강화했으며, 침략자를 격퇴하고, 부패한 정부를 상대로 성공적인 혁명을 이끄는 등 많은 공헌을 했다.
3. 평가
명림답부에 대한 역사학자들의 평가는 다양하다. 고구려의 초대 국상으로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지만, 신대왕은 보장왕이 연개소문에게 휘둘렸던 것처럼 명림답부에게 조종당하는 꼭두각시는 아니었다. 명림답부가 권력을 남용하거나 잔혹했다는 기록은 없으며, 많은 역사학자와 학자들은 그를 진정한 애국자이자 잊혀진 영웅으로 평가한다.
3.1. 긍정적 평가
명림답부는 179년, 113세(만 112세)의 나이로 사망했는데, 이는 엄청난 한나라 군대를 상대로 고구려 군대를 승리로 이끈 후였다. 명림답부는 고구려를 위해 60년간 국정에 헌신하며 많은 공헌을 했다. 그는 폭군을 암살하고, 왕권을 강화했으며, 침략자를 격퇴했고, 마지막으로 부패한 정부를 상대로 성공적인 혁명을 이끌었다.
3.2. 권력에 대한 논란
역사학자들은 명림답부에 대해 다양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고구려의 초대 국상은 막강한 정치 권력과 영향력을 소유하여 거의 독재적이라고 여겨질 정도였다. 그러나 신대왕은 보장왕이 대막리지 연개소문의 영향 아래 있었던 것처럼 명림답부의 영향 아래 놓인 꼭두각시 군주는 아니었다. 명림답부가 권력을 남용하거나 특별히 잔혹하거나 폭력적이었다는 것을 시사하는 역사적 기록은 없다. 이로부터 많은 역사학자들과 학자들은 명림답부가 진정한 애국자이자 잊혀진 영웅이라고 추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