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대왕
1. 개요
신대왕은 고구려의 제7대 왕이다. 차대왕의 폭정을 피해 숨어 살다가, 명림답부가 차대왕을 시해한 후 77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즉위 후 정치적 안정을 위해 국상제를 도입하고 명림답부를 임명했으며, 후한과의 관계에서 굴욕적인 상황을 겪기도 했지만, 명림답부의 활약으로 위기를 극복했다. 91세로 사망했으며, 고국곡에 매장되어 신대왕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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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대왕 -
태조대왕
태조대왕은 고구려의 제6대 왕으로 7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93년간 재위하며 동옥저를 병합하고 요서 지역에 성을 쌓는 등 영토를 확장하여 국력을 신장시켰으며, 동생 수성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
신대왕 -
좌원 전투
좌원 전투는 172년 고구려가 한나라의 침략에 청야 전술, 해자 구축, 방어선 설치 등으로 맞서 승리하여 명림답부가 좌원과 질산을 식읍으로 하사받은 사건이다. -
179년 사망 -
명림답부
명림답부는 고구려 연나부의 조의선인으로, 차대왕을 시해하고 신대왕을 옹립하여 국상에 임명되었으며, 한나라의 침략을 격퇴하고 좌원 전투에서 승리하는 등 고구려 국정에 헌신하다 113세로 사망했다. -
179년 사망 -
왕보 (후한)
후한 시대 환관 왕보는 조절과 함께 두태후의 총애를 받으며 권력을 장악하고 반대 세력 제거에 앞장섰으나, 양자의 비리와 부정부패가 드러나 처형당하며 몰락하여 후한 환관 정치의 폐단을 보여주는 사례로 남았다.
2. 생애
신대왕의 가계는 기록마다 서로 상이하며 삼국사기 내에서도 서로 다른 대목이 있어 다소 불확실하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신대왕이 태조왕의 이복 동생이라 기록되어 있지만, 후한서에는 신대왕이 차대왕의 아들이라 기록되어 있다. 또한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는 신대왕의 아들 산상왕의 이름이 위궁이며 태조왕의 증손자라 하여 가계가 서로 맞지 않는다. 위궁을 산상왕이 아닌 손자 동천왕으로 비정한다 해도 태조왕과 신대왕의 관계가 형제가 아닌 부자로 설정해야 한다. 신채호는 신대왕을 태조왕의 서자로 보았다.
신대왕은 차대왕의 가혹한 통치 아래에서 조용히 지내며 산속에 은둔했다. 이후 왕위에 오른 신대왕은 왕권 강화를 위해 최고 재상직인 국상을 신설하고 명림답부를 그 자리에 임명했다.
2.1. 즉위 전
차대왕 때에는 폭정을 피해 산골로 숨어 살았다. 165년에 명림답부가 차대왕을 시해하자 좌보(左輔) 어지류(渪支留)가 사람을 보내 백고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이에 77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명림답부가 차대왕을 시해한 후, 신대왕은 조정 관리들의 초청을 받아 왕위에 올랐는데, 당시 그의 나이는 이미 77세였다.
2.2. 즉위 초
명림답부가 차대왕을 시해하자 좌보(左輔) 어지류(渪支留)가 사람을 보내 백고를 왕으로 추대하였고, 이에 77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166년, 좌·우보(左·右輔)를 폐지하고 국상제를 도입하여 명림답부를 임명하였으며 대사면령을 내리고 차대왕의 아들 추안(鄒安)을 양국군에 봉하는 등 정치적 안정을 꾀하였다. 즉위 2년(166년) 정월에 대사면을 실시하고, 차대왕의 태자인 추안이 출두하자 이를 용서하고 구산뢰(狗山瀬)·루두곡(婁豆谷)의 두 지역을 하사하여 양국군(譲国君)에 봉했다. 또한, 최고 관작이었던 좌보·우보를 국상으로 개칭하고, 초대 국상에는 명림답부를 임명했다.
168년에 후한(後漢)의 현도태수가 침공해 들어와 항복하였으며 169년에는 현도태수 공손도(公孫度)를 도와 부산적(富山賊)을 토벌하였다. 172년에 한나라가 쳐들어오자 청야전술로 대응하였다. 한군이 굶주림에 지쳐 퇴각하자 신대왕은 명림답부를 보내 좌원(坐原)에서 한군을 크게 격파하였다.
2.3. 후한과의 관계
168년에 후한(後漢)의 현도태수 경림이 침공해 오자 신대왕은 항복하였다. 169년에는 현도태수 공손도(公孫度)를 도와 부산적(富山賊)을 토벌하였다. 172년 한나라가 다시 쳐들어오자 명림답부는 청야전술로 대응하였다. 한군이 굶주림에 지쳐 퇴각하자 신대왕은 명림답부를 보내 좌원(坐原)에서 한군을 크게 격파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