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건 창기라이
1. 개요
모건 창기라이는 1952년 짐바브웨에서 태어나 정치인으로 활동했다. 그는 1999년 민주변화운동(MDC)을 공동 창당하여 로버트 무가베 정권에 대항했으며, 2008년 대통령 선거에서 무가베를 앞섰으나 결선 투표를 앞두고 사퇴했다. 이후 권력 분점 합의에 따라 2009년부터 2013년까지 짐바브웨 총리를 역임했다. 2016년 대장암 진단을 받고 투병하다가 2018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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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 모건 리처드 창기라이 |
|---|---|
| 출생일 | 1952년 3월 10일 |
| 사망일 | 2018년 2월 14일 |
| 출생지 | 구투, 남로디지아 |
| 사망지 | 요하네스버그, 남아프리카 공화국 |
| 사망 원인 | 대장암 |
| 정당 | 짐바브웨 아프리카 민족 연맹 (1987년 이전) 짐바브웨 아프리카 민족 연맹 - 애국 전선 (1987–1999) 민주변화운동 (1999–2005) 민주변화운동-창기라이 (2005–2018) |
| 배우자 | 수잔 므훈드와 (1978년–2009년, 사별) 엘리자베스 마체카 (2011년) |
| 자녀 | 9명 |
| 서명 | Morgansign.svg |
| 정부 웹사이트 | 정부 웹사이트 |
| 당 웹사이트 | 당 웹사이트 |
| 로마자 표기 | 'tʃæŋɡɪraɪ' |
| 쇼나어 발음 | ts͎a.ᵑɡi.ra.i |
| 대통령 | 로버트 무가베 |
|---|---|
| 부총리 | 토코자니 쿠페 아서 무탐바라 |
| 임기 시작 | 2009년 2월 11일 |
| 임기 종료 | 2013년 9월 11일 |
| 전임 | 로버트 무가베 (1987년) |
| 후임 | 직위 폐지 |
| 임기 시작 | 1999년 9월 30일 |
| 임기 종료 | 2018년 2월 14일 |
| 전임 | 깁슨 시반다 |
| 후임 | 넬슨 차미사 |
| 임기 시작 | 1999년 9월 30일 |
| 임기 종료 | 2018년 2월 14일 |
| 전임 | 아벨 무조레와 |
| 후임 | 넬슨 차미사 |
| 임기 시작 | 1987년 5월 10일 |
| 임기 종료 | 1999년 9월 30일 |
| 전임 | 마소차 은들로부 |
| 후임 | 웰링턴 치베베 |
-
짐바브웨의 총리 -
로버트 무가베
로버트 무가베는 짐바브웨의 독립운동 지도자이자 총리 및 대통령을 지낸 정치인으로, 짐바브웨 아프리카 민족 연맹을 이끌며 독립을 이끌었으나 권위주의 통치와 인권 침해 등으로 비판받으며 실각했고, 그의 통치는 무가베주의로 특징지어진다. -
짐바브웨의 정치인 -
펠레케젤라 음포코
펠레케젤라 음포코는 짐바브웨의 외교관 출신 정치인으로, 보츠와나와 러시아 대사를 역임하고 남아프리카 공화국 대사로 발령 직전 2014년 12월 부통령에 임명되어 국가 치유, 평화 및 화해 장관직과 정책 조정 및 이행 업무를 겸임하다 2024년 12월 6일 인도에서 사망했다. -
짐바브웨의 정치인 -
조이스 무주루
조이스 무주루는 짐바브웨의 정치인이자 군인으로, 로디지아 부시 전쟁에 참전하여 여성 지휘관을 지냈고, 짐바브웨 독립 후 최연소 국무장관, 부통령 등을 역임했으나 로버트 무가베 대통령 암살 음모 혐의로 해임된 후 야당을 창당하여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다. -
1952년 출생 -
이낙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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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출생 -
이학영
2. 초기 생애 및 가족
츠반기라이는 1952년 당시 남로디지아(현 짐바브웨) 부헤라 지역에서 쇼나족 카랑가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9남매 중 장남이었으며, 광부, 목수, 벽돌공의 아들이었다. 그는 세인트 마크스 고네소 초등학교, 치카라 초등학교, 실베이라에서 초등 교육을 받았고, 고코메레 고등학교에서 중등 교육을 받았다. 1972년 4월, 8과목의 보통 수준 학력으로 학교를 졸업한 후 무타레의 엘라스틱스 & 테이프스 섬유 공장에서 직조 견습생으로 첫 직업을 얻었다. 1974년, 실베이라의 옛 학교 친구가 앵글로 아메리카의 빈두라 니켈 광산 견습생 채용 광고에 지원하도록 권유하여 10년 동안 광산에서 일하며 공장 운전원에서 공장 감독으로 승진했다.
1978년, 츠반기라이는 첫 번째 아내 수잔 츠반기라이와 결혼했다. 두 사람은 31년간 결혼 생활을 하며 여섯 명의 자녀를 두었으나, 2009년 자동차 사고로 아내와 사별했다. 2011년, 로카르디아 카리마츠엥가는 2010년에 츠반기라이와 관습적인 의식으로 결혼했다고 주장하며 매달 1만 파운드의 생활비를 요구했다. 1년 후, 23세 여성이 츠반기라이의 아이를 낳았다고 주장하며 소송을 제기하겠다고 위협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츠반기라이는 2012년 9월 15일, 세 자녀의 어머니인 엘리자베스 마체카와 두 번째 결혼을 했다.
3. 정치 활동
1980년 짐바브웨 독립 당시, 츠반기라이는 로버트 무가베가 이끄는 환우(ZANU)에 합류하여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당내에서 빠르게 성장하여 고위직에 올랐으며, 짐바브웨 노동조합총회(ZCTU) 사무총장(1989년)을 역임하며 노동 운동을 이끌었다. 츠반기라이는 ZCTU를 이끌면서 점차 집권당인 환우-PF와 대립하게 되었다.
로버트 무가베는 집권 3년 후, 북한에서 훈련받은 제5여단을 통해 마타벨란드에서 학살을 자행했다. 츠반기라이는 이 사건을 비판하며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등 ZANU에 대항하며 마타벨란드에서 지지를 얻었다.
1990년대 후반, 츠반기라이는 국가 헌법 제정 의회(NCA) 의장으로서 짐바브웨의 헌법 개혁 운동을 주도했다. NCA는 노동 운동, 학생, 여성, 교회 등 다양한 단체와 개인들을 모아 결성되었으며, 란카스터 하우스 협정으로 만들어진 헌법의 문제점을 해결하고 새롭고 민주적인 헌법 제정을 목표로 했다.
3.1. 민주변화운동(MDC) 창당
1999년, 츠반기라이는 로버트 무가베 정권에 반대하는 주요 야당인 민주변화운동(MDC)을 창당했다. MDC는 백인 농장주와 무가베 정권에 반대하는 흑인들의 지지를 받으며 성장했다. 창당 당시 의석 수는 3석에 불과했지만, 1999년 후반 정부가 제안한 대통령 권한 강화 헌법 개정에 반대하는 운동을 주도했다. 그 결과, 2000년 2월 국민투표에서 반대표가 과반수를 넘어 헌법 개정은 부결되었다. 2000년 6월 총선에서 MDC는 57석을 획득하여 ZANU-PF의 62석에 필적하는 큰 성과를 거두며 무가베 정권에 위협적인 존재로 부상했다.
3.2. 무가베 정권과의 갈등
로버트 무가베 정권은 1980년 집권 후, 북한에서 훈련받은 제5여단을 동원해 마타벨란드에서 학살을 자행했다. 츠반기라이는 이 사건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며 희생자들의 집단 무덤을 방문하고, 책임자 처벌을 요구했다.
츠반기라이는 2000년 선거 이후 반역죄 혐의로 체포되었으나 무혐의 판결을 받았다. 2004년에는 2002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무가베 암살 음모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넬슨 만델라의 변호사였던 조지 비조스의 변호로 무죄 판결을 받았다.
무가베 정권은 츠반기라이를 위협적인 존재로 간주하여 여러 차례 체포와 구금을 반복했다. 2003년 5월, 츠반기라이는 기자 회견 직후 폭력 선동 혐의로 체포되었다. 2007년 3월에는 기도 집회 참석 중 체포되어 경찰에게 심한 고문을 당해 두개골 골절, 내부 출혈 등의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이 사건을 촬영한 기자는 의문사했다.
2008년 대통령 선거에서 츠반기라이는 무가베를 앞섰으나, 지지자들에 대한 탄압으로 인해 결선 투표를 철회해야 했다.
3.3. 국제적 반응
2007년 3월 11일, 모건 창기라이가 체포되고 야당 관계자들이 탄압받은 사건은 국제 사회의 광범위한 비난을 불러일으켰다.
| 국가 | 반응 |
|---|---|
| 오스트레일리아 | 알렉산더 다우너 전 외무장관은 짐바브웨 정부에 체포된 사람들의 즉각적인 석방, 정치 활동 금지 해제, 즉각적인 개혁 시행을 요구했다. 그는 이 체포가 무가베 정부의 필사적인 권력 유지 시도라고 비판했다. |
| 캐나다 | 피터 맥케이 외무장관은 짐바브웨의 폭력 사태를 규탄하고 체포된 모든 사람들의 석방을 촉구했다. |
| 아일랜드 | 더모트 아헌 외무장관은 짐바브웨 당국의 행동을 규탄하며, 짐바브웨 정부에 모든 그러한 활동의 즉각 중단과 새로운 대화 정책 채택을 촉구했다. |
| 모리셔스 | 모리셔스 정부는 야당 지도자들의 체포, 구금, 폭행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고, 짐바브웨 정부에 모든 국민의 기본권과 자유 보장을 촉구했다. |
| 뉴질랜드 | 윈스턴 피터스 외무장관은 츠반기라이와 그의 동료들의 즉각적인 석방을 요구했다. |
| 영국 | 토니 블레어 전 총리는 짐바브웨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정말 비극적"이라고 표현하며, 법치와 정치적 견해 표명의 자유를 강조했다. |
| 남아프리카 공화국 | 아지즈 파하드 부외무장관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단속에 대해 우려하며, 짐바브웨 정부에 법치주의 존중을 요청했다. |
| 스웨덴 | 칼 빌트 외무장관은 짐바브웨 정부의 폭력 행위를 단호히 규탄해야 한다고 말했다. |
| 미국 | 미국은 이 사건 이후 짐바브웨 지도부에 대한 추가 제재를 고려했다. |
2007년 10월 25일, 츠반기라이의 경호원이었던 나모 무세키와가 2007년 3월 정부의 단속 과정에서 입은 부상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사망했다. MDC 대변인 넬슨 차미사는 무세키와가 2007년 3월 11일 츠반기라이를 포함한 다른 야당 인사들과 함께 경찰에게 심하게 구타당한 이후 피를 토했다고 밝혔다.
4. 2008년 대통령 선거와 권력 분점
2008년 짐바브웨 대통령 선거에서 모건 창기라이는 47.9%를 득표하여 로버트 무가베(43.2%)를 앞섰지만 과반 득표에는 실패했다. 민주변화운동(MDC)은 1차 투표에서 50.3%의 득표율로 승리했다고 주장했지만, 짐바브웨 선거위원회는 결선 투표가 필요하다고 발표했다.
결선 투표를 앞두고 창기라이는 암살 위협을 느껴 짐바브웨로 귀국하지 못하고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머물렀다. 5월 24일 짐바브웨로 귀국한 후, 창기라이는 MDC 국회의원들에게 짐바브웨의 경제 상황을 "절망의 상태"라고 비판하며 정치 폭력 가담자들에게는 사면이 없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2008년 6월 4일, 창기라이는 선거 유세 중 루파네 근처에서 경찰에 체포되어 9시간 동안 구금되었다가 풀려났다. MDC는 이를 선거 운동 방해 시도라고 비난했다. 6월 22일, 창기라이는 여당 민병대의 폭력으로 인해 대통령 선거 결선 투표에서 사퇴한다고 발표하고, 하라레의 네덜란드 대사관에 피신했다.
이후 남부 아프리카 개발 공동체(SADC)의 중재로 2008년 7월 22일, 창기라이와 무가베는 권력 분점 협상을 시작했다. 9월 11일, 양측은 권력 분점 합의서인 "양해각서"에 서명했다. 이 합의에 따라 무가베는 대통령직을 유지하고, 창기라이는 짐바브웨 총리가 되어 내각을 이끌게 되었다.
4.1. 짐바브웨 총리 취임 (2009-2013)
2008년 9월 15일, 남부 아프리카 개발 공동체 지도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로버트 무가베와 모건 창기라이는 하라레의 레인보우 타워 호텔에서 권력 분점 합의에 서명했다. 이 합의를 통해 무가베는 대통령직을 유지하고, 창기라이는 짐바브웨 총리가 되었다. MDC는 경찰을, 무가베의 ZANU-PF는 군대를 지휘하게 되었으며, 아서 무탐바라는 부총리가 되었다.
2009년 1월, 창기라이는 아프리카 지도자들의 주장에 따라 무가베와 함께 총리로서 연립 정부에 참여할 것을 발표했다. 2009년 2월 11일, 창기라이는 짐바브웨 총리로 취임했다.
그러나 통합 정부 출범 후에도 무가베와의 갈등은 계속되었다. 창기라이가 차기 농업부 차관으로 지명한 로이 베넷이 반역죄로 체포, 기소되었으나, 창기라이 정부는 이 혐의를 취소할 힘이 거의 없었다. 또한, 전쟁 참전 용사들에 의한 농지 침탈이 계속되었고, 무가베는 야당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토지 개혁 정책을 유지했다.
2012년 초, 창기라이는 This Is Africa와의 인터뷰에서 "무가베는 주지사와 대사를 임명했는데, 권력 분점 협정에 따르면 모든 임명은 나와 상의해야 한다. 그는 또한 경찰청장과 같은 핵심 안보 요직 일부의 임기를 연장했다."라며 당초 합의가 지켜지지 않고 있음을 비판했다.
통합 정부는 2013년 짐바브웨 총선으로 종식되었고, 이 선거에서 무가베가 대통령으로 재선되었다. 창기라이는 선거 부정 의혹을 제기했지만, 2013년 짐바브웨 헌법 개정에 따라 짐바브웨 총리직이 폐지되면서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5. 사망
2016년 6월, 츠반기라이는 대장암 진단을 받고 치료를 받고 있다고 발표했다. 이후 수년 동안 그의 건강 상태는 악화되었고, 2018년 2월 6일, 그는 위독한 상태이며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한 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발표가 있었다. MDC 대변인은 그의 상태의 심각성을 언급하며 "최악의 상황에 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8일 후인 2월 14일, 요하네스버그의 병원에서 6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사망 소식은 당 내 고위 관계자인 엘리아스 무즈리가 "그는 오늘 저녁 사망했습니다. 가족이 저에게 이 소식을 전했습니다."라고 발표하면서 알려졌다. 사인은 대장암으로 추정된다.
츠반기라이의 사망은 로버트 무가베 집권 종식 이후 처음으로 2018년 중반에 계획된 선거를 앞두고 MDC에 심각한 타격으로 여겨졌다. 츠반기라이 사망 후, 그의 어머니는 그의 후계자인 넬슨 차미사가 장례식에 참석하면 자살하겠다고 위협했다. 이러한 사건들은 츠반기라이 사망 직전 당 내부에서 그의 후계자 자리를 놓고 가장 가까운 지도자들이 경쟁하면서 당을 둘러싼 긴장된 분위기를 보여주는 것으로 일반적으로 여겨졌다.
6. 역대 선거 결과
| | 직책명 || 대수 || 정당 || 1차 득표율 || 1차 득표수 || 2차 득표율 || 2차 득표수 || 결과 || 당락 | |||||||||
|---|---|---|---|---|---|---|---|---|---|
| 2002년 선거 | 짐바브웨 대통령 | 2대 | 민주변화운동 | 41.96% | 1,258,401표 | 2위 | 낙선 | ||
| 2008년 선거 | 짐바브웨 대통령 | 2대 | 민주변화운동 - 창기라이 | 47.87% | 1,195,562표 | 9.78% | 233,000표 | 2위 | 낙선 |
| 2013년 선거 | 짐바브웨 대통령 | 2대 | 민주변화운동 - 창기라이 | 34.37% | 1,172,349표 | 2위 | 낙선 | ||
모건 창기라이는 2002년, 2008년, 2013년 짐바브웨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나 모두 낙선했다.
7. 수상
2010년 5월 대한민국 방문 중, 창기라이는 배재대학교로부터 법학 명예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이 감리교 기관 125년 역사상 13번째 명예 박사 학위 수여자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