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사다 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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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모리사다 친왕은 다카쿠라 천황의 아들로, 헤이케의 지원을 받아 안토쿠 천황의 황태자로 옹립되었으나, 단노우라 전투 이후 고토바 천황이 즉위하면서 황위 계승에서 멀어졌다. 1189년 친왕 선하를 받고, 1191년 원복과 가관을 거쳤으며, 조사이몬인의 양자가 되어 지묘인노미야로 불렸다. 1212년 출가 후, 1221년 조큐의 난 이후 고호리카와 천황을 즉위시키고 태상천황으로 추대되어 인세를 행했으나, 2년 뒤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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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사다 친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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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인명 | 모리사다 친왕 |
본명 | 모리사다 |
기타 표기 | 행조 입도 친왕 |
존칭 | 지묘인노미야, 지묘인 법황, 고세인 |
추증 | 후고다카쿠라인 |
신분 | 삼품 친왕 → 입도 친왕 → 태상천황 (법황) |
출생일 | 1179년 4월 6일 (음력 1179년 2월 28일) |
출생지 | 대사인두 후지와라노 카네모리 저택 |
사망일 | 1223년 6월 14일 (음력 1223년 5월 14일) |
사망지 | 지묘인 저택 |
매장일 | 미상 |
매장지 | 기타시라카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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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관계 | |
아버지 | 다카쿠라 천황 |
어머니 | 보몬 시게코 (시치조인) |
배우자 | 지묘인 야스코 (기타시라카와인) |
자녀 | 존세이 법친왕 리시 내친왕 (시키켄몬인) 도신 법친왕 구니코 내친왕 (안카몬인) 모리히토 왕 (고호리카와 천황) 외 |
2. 약력
1179년 평씨(平氏)의 무장인 다이라노 도모모리(平知盛)의 정실 지부쿄노 쓰보네(治部卿局)를 유모로 하여 헤이케의 비호 아래 성장하였다. 1183년 헤이케가 수도를 떠나 서쪽으로 갈 때 안토쿠 천황의 황태자로 대우받아 함께 이동했다.[4] 단노우라 전투에서 헤이케가 멸망한 뒤 구출되어 수도로 돌아왔으나, 이미 고토바 천황이 즉위한 후였다.
모리사다는 헤이안 시대 말기부터 가마쿠라 시대 초기까지의 황족이다. 1179년 다카쿠라 천황과 고노에 모토미치(近衛基通)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1189년 친왕선하(親王宣下)를 받았고, 1191년 원복(元服) 및 가관(加冠)을 행하였다. 조사이몬인(上西門院)의 유자(猶子)가 되어 지묘인 모토이에(持明院基家)의 딸 후지와라노 진시(藤原陳子)를 비로 삼고, 지묘인(持明院)을 고쇼(御所)로 삼아 지묘인노미야(持明院宮)라 불렸다.[5]
1198년, 고토바 천황의 아들 쓰치미카도 천황이 즉위하면서 왕위 계승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으나, 가마쿠라 막부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1212년 출가하여 법명 교조(行助)를 사용했다. 왕위 계승 가능성이 희박해진 상황에서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여 출가한 것으로 보인다.
1221년 조큐의 난 이후, 막부에 의해 아들 도요히토 왕(茂仁王)이 즉위하고, 본인은 태상천황(太上天皇, 법황)으로 추대되어 인세이(院政)를 시작했다. 1223년 종기로 인해 사망했으며, 기타시라카와(北白河)에서 장례가 치러지고 '고타카쿠라인(後高倉院)'이라는 원호(院号)가 추증되었다.[6]
3. 생애
1189년 친왕선하(親王宣下)를 받고 1191년 원복(元服)과 가관(加冠)을 행하였다. 후에 조사이몬인(上西門院)의 유자(猶子)가 되어 지묘인 모토이에(持明院基家)의 딸 후지와라 진시(藤原陳子)[5]를 비로 삼고 지묘인 가(持明院家)와의 연고가 있는 지묘인(持明院)을 고쇼(御所)로 하여 지묘인노미야(持明院宮)라 하였다.
1198년 쓰치미카도 천황(土御門天皇)이 즉위하였다. 이 무렵 『교쿠요(玉葉)』에는 새로운 임금 후보로 고토바 천황의 형인 모리사다 친왕과 고레아키라 친왕(惟明親王)의 이름이 거론되고 있으며, 가마쿠라 막부(鎌倉幕府)가 어린 군주의 즉위에 난색을 표했다고 적고 있다. 또한 『엔쿄본(延慶本) 헤이케 이야기(平家物語)』에는 승려 몬가쿠(文覚)가 모리사다 친왕의 옹립을 도모하였으나 실현되지 않았다고 기술하고 있다. 1210년에는 쓰치미카도 천황이 준토쿠 천황(順徳天皇)에게 양위하였다.
1212년 모리사다 친왕은 출가하여 뉴도 친왕(入道親王)이 되었다. 법명(法名)은 교조(行助)였다. 왕위 계승 가능성이 희박해진 와중에 불우한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여 출가를 결정한 것으로 전해진다.
1221년 조큐의 난(承久の乱)이 일어났고, 교조의 운명도 한순간에 바뀌게 된다. 난이 진압된 뒤 막부는 고토바 계통의 왕족들을 모조리 처분했다. 가네나리 친왕을 폐위시키고 고토바 ・ 쓰치미카도 ・ 준토쿠 세 상왕을 유배시켰으며, 고토바인의 다른 후손들도 유배되거나 출가, 신적강하되어 왕족의 지위를 박탈당했다.
교조의 동생 고레아키라 친왕의 아들 구니타카 왕(国尊王)은 후견인이 없어 왕위 계승 후보에서 제외되었다. 결국 왕위 계승 후보자는 교조의 아들인 도요히토 왕(茂仁王)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막부는 도요히토를 고호리카와 천황으로 즉위시키고, 교조를 태상천황(太上天皇)으로 받들어 인세이를 행하게 하였다.
모리사다 친왕은 조큐의 난 뒤 조정 내부의 혼란을 수습하고 공무(公武) 관계의 융화에 실적을 남겼지만, 2년 만에 종기를 앓다 세상을 떠났다. 기타시라카와(北白河)에서 장례가 거행되었고, '고다카쿠라인'(後高倉院)이라는 원호(院号)를 추증받았다.[6]
3. 1. 출생과 초기 생애
1179년 다카쿠라 천황과 고노에 모토미치(近衛基通)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복형 안토쿠 천황이 있었기에 황위 계승과는 거리가 멀었다. 모리사다의 유모는 헤이케(平家)의 무장으로 기요모리의 아들인 다이라노 도모모리(平知盛)의 정실(正室)인 지부쿄노 쓰보네(治部卿局)였다. 헤이케의 허락으로 양육되었던 연고로 1183년 헤이케가 수도를 버리고 서쪽으로 향할 때에도 안토쿠 천황의 황태자(皇太子)로 대우받아 천황과 함께 사이고쿠(西国)로 데려갔다.[4]
3. 2. 헤이케와의 관계
모리사다의 유모는 헤이케의 무장 기요모리의 아들 도모모리의 정실(正室)인 지부쿄노 쓰보네(治部卿局)였다. 헤이케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랐고, 주에이 2년(1183년) 7월 헤이케가 교토를 떠날 때 안토쿠 천황의 황태자로 대우받아 천황과 함께 사이고쿠로 갔다.
단노우라 전투에서 헤이케가 멸망할 때 구출되어 수도로 돌아왔지만, 이미 수도에서는 고토바 천황이 즉위해 있었다.[4]
3. 3. 불우한 황족
1189년 친왕선하(親王宣下)를 받았으며, 1191년 원복(元服)과 가관(加冠)을 했다. 이후 조사이몬인(上西門院)의 양자가 되어 지묘인 모토이에(持明院基家)의 딸 후지와라 진시(노부코)[5]와 혼인하고, 지묘인(持明院)과 연고가 있는 지묘인을 거처로 하여 지묘인노미야(持明院宮)라고 불렀다.
그러나, 1198년 고토바 천황(後鳥羽天皇)의 아들인 쓰치미카도 천황(土御門天皇)이 즉위하면서 황위 계승 경쟁에서 밀려났다. 결국 1212년 3월, 자신의 황위 계승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판단한 모리사다 친왕은 출가하여 불우한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였다. 출가 후의 법명(法名)은 교조(行助)였다.[6]
3. 4. 조큐의 난과 치천의 군
1221년, 고토바 상황이 막부를 타도하기 위해 일으킨 조큐의 난은 모리사다 친왕의 운명을 바꾸었다. 난이 진압된 후, 막부는 주모자인 고토바 상황과 그 계통의 황족들을 대거 숙청했다. 이때 가네나리 친왕이 폐위되고, 고토바 천황, 쓰치미카도 천황, 준토쿠 천황 3 상황이 모두 유배되었다. 고토바인의 다른 후손들 또한 유배되거나 출가하여 승려가 되거나, 신적강하되어 왕족의 지위를 박탈당했다.[6]
모리사다 친왕의 동생인 고레아키라 친왕의 막내아들 구니타카 왕이 아직 출가하지 않았지만, 조큐의 난 직전에 고레아키라 친왕이 사망하여 후견인이 없었기 때문에 왕위 계승 후보에서 제외되었다. 결국 왕위 계승 후보는 모리사다 친왕의 셋째 아들인 도요히토 왕만이 남게 되었다.[6]
막부는 도요히토 왕을 고호리카와 천황으로 즉위시키고, 공석이 된 치천의 군 자리에는 이미 출가한 상태였던 모리사다 친왕에게 태상천황의 존호를 올려 인세이를 행하게 했다. 이는 일본 역사상 전례가 없는 조치였지만, 고토바인 계통의 다른 종친들이 모두 제거된 상황에서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6]
3. 5. 죽음
조큐의 난 이후, 치천이 된 모리사다 친왕(교조 뉴도 친왕)은 조정 내부의 혼란을 수습하고 조정과 막부 간의 관계를 융화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1223년 종기를 앓다가 2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장례는 기타시라카와에서 거행되었으며, 사후 '고타카쿠라인'(後高倉院)이라는 시호가 추증되었다.[6]
4. 계보
배우자 | 자녀 |
---|---|
지묘인 노부코(호쿠시라카와인) (지묘인 모토이에의 딸) | |
생모 불명 |
5. 관련 작품
참조
[1]
서적
増鏡
[2]
논문
後高倉王家の政治的地位
[3]
서적
百錬抄
1223-06-08 #貞応2年5月14日
[4]
서적
마스카가미
[5]
논문
後高倉王家の政治的地位
[6]
서적
백련초
[6]
서적
산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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