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노에 모토미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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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노에 모토미치는 1166년 아버지 고노에 모토자네가 사망한 후 섭관가의 계승자가 되었으나, 어린 나이와 정치적 어려움으로 인해 섭정의 지위를 바로 얻지 못했다. 헤이시 정권과 고시라카와 법황의 후원을 받으며 섭관과 관백을 역임했으나, 정무 미숙과 헤이시와의 관계 등으로 인해 여러 차례 직무에서 해임되었다. 1196년 관백에 다시 임명되었고, 1198년 섭정이 되었으며, 1202년 사임 후 아들이 섭정직을 이었다. 1208년 출가하여 1233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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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노에 모토미치 |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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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 헤이안 시대 말기 - 가마쿠라 시대 전기 |
생년 | 에이랴쿠 원년 (1160년) |
사망일 | 덴푸쿠 원년 5월 29일 (1233년7월 8일) |
개명 | 기통 → 행리 (법명) |
별칭 | 보겐지 전, 근위 전 (호) |
계급 | 종1위, 섭정, 관백, 내대신 |
주군 | 다카쿠라 천황 → 안토쿠 천황 → 고토바 천황 → 쓰치미카도 천황 |
씨족 | 근위가 |
부모 | 아버지: 고노에 모토자네, 어머니: 후지와라노 다다타카의 딸, 양모: 다이라노 세이시 |
형제자매 | 기통, 아와타구치 다다요시, 미치코, 가쿠손, 유가쿠, 도칸 |
배우자 | 정실: 칸시 (다이라노 기요모리의 여섯째 딸), 보조 아키코 (보조 아키노부의 딸), 다이라노 노부코 (다이라노 노부노리의 딸), 사이슌의 딸 |
자녀 | 이에자네, 엔추, 미치쓰구, 다카쓰카사 가네모토, 엔조, 시즈타다, 모토노리, 엔키, 니즈미, 사네노부, 손닌 |
가계 | |
씨장자 | 고노에 모토자네 (1166년 ~ 1208년)의 뒤를 이음 |
기타 정보 |
2. 경력
에이만 2년(1166년), 고노에 모토미치는 6세 때 아버지 모토자네가 2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3] 이듬해 11세의 계모인 세이시가 준산후를 받고 고쿠라 천황의 준모(시라카와 전)가 되자, 세이시는 모토미치를 자신의 양자로 삼아 후견했다.
원래 후지와라노 타다미치 - 모토자네 - 모토미치로 세쇼가의 적통이 계승될 예정[3]이었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7세였던 모토미치는 섭관이 되기 전에 관위 자체가 없었기 때문에, 섭관의 지위는 모토자네의 이복 동생인 마츠도노 모토후사가 중개인으로 계승했다. 게다가, 어머니 쪽의 외숙부인 후지와라노 노부요리는 헤이지의 난의 주모자로서 참수되었고, '모반인의 조카'라는 그림자가 따라다녔다.
모토미치는 세력을 확장하는 헤이씨 일문을 사실상의 외척으로 삼아 섭관가의 계승자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고시라카와 법황이 세이시에게 섭관가 영지를 계승하게 한 것도 장래의 모토미치에게의 계승을 전제로 한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당시 모토자네의 동생인 구조 카네자네도 세이시를 '임시로 전령하는 사람', 모토미치를 '근본 문서·장원, 전령되어야 할 인물'이라고 부르며 모토미치를 섭관가의 계승자로 간주했다(『교쿠요』 지쇼 3년 6월 18일 조).
가오 2년(1170년) 4월, 쇼고이게에 서임되어, 지주나 우콘에 쇼쇼에 임관했다. 11세에 겐푸쿠를 한 이 즈음에 타이라노 키요모리의 여섯째 딸인 칸시를 정실로 삼은 것으로 보인다. 조안 4년(1174년) 8월에는 주산미에 서임된다. 그러나 마츠도노 모토후사가 10년 이상 섭관의 지위를 차지하여 독자적인 지위를 확립하게 되자, 법황은 모토후사에게 섭관가 계승을 생각하게 되었고, 모토미치의 후견인이었던 키요모리의 반발을 사게 된다.
지쇼 3년(1179년) 11월, 고시라카와 법황의 인세이가 정지되어 반 헤이씨의 공경이 일소되자(지쇼 3년의 정변), 모토미치는 비 산기 우추죠에서 내대신·나이란·관백으로 임명되었다. 이듬해 2월에는 안토쿠 천황의 섭정이 되어, 종1위에 서임된다. 그러나 위계는 공경이었지만 산기, 츄나곤·다이나곤과 같은 기세이칸에 취임할 수 없었고, 더욱이 아버지의 요절로 인해 유소쿠코지츠를 배울 수 없어, 정무에 미숙한 악조건이 겹쳤다. 그 때문에 여러 번 의식에서 실태를 범하여, 관백으로서의 권위는 낮았다.
고후쿠지의 승병이 헤이씨에 반란을 일으키려 하자, 그것을 막으려고 노력했다.
지쇼 5년(1181년) 윤 2월에 키요모리가 훙거하고 헤이씨는 급속히 쇠퇴했다. 주에이 2년(1183년) 7월에 미나모토노 요시나카의 공세 앞에 도성을 버리고 도망칠 수밖에 없게 되었을 때, 지금까지의 인연이 깊어 헤이씨와 행동을 함께 하도록 타이라노 노부모토에게 강요받았지만, 최종적으로 이를 거절하고, 고시라카와 법황의 곁으로 도망쳤다. 그 후 법황의 측근으로 섬기며, 고토바 천황의 옹립에도 공헌했다.
요시나카와 법황의 사이가 험악해져, 호주지 전투가 벌어졌을 때 요시나카에 의해 모든 직무를 해임당했지만, 주에이 3년(1184년)에 요시나카가 토벌되자 섭정에 복귀했다. 그 후 고시라카와 법황 최고의 측근으로 신임을 받았지만, 과거 헤이씨와 친했던 경위 때문에 숙부인 구조 카네자네를 시작으로 하는 공경으로부터 모토미치에 대한 비난이 잇따랐고, 분지 2년(1186년) 3월에는 미나모토노 요시츠네가 형인 요리토모 추토의 인선을 법황에게 내도록 중개한 장본인으로 간주되어 모든 직무를 해임당하고, 감금당하게 되었다. 그 후, 모토미치를 대신하여 구조 카네자네가 섭정이 되었지만, 법황은 여전히 모토미치를 비호했다고 전해진다.
겐큐 7년(1196년) 11월, 반 카네자네 파인 도미노코지 미치치카 등에 의해 옹립되어, 다시 관백으로 임명되었다(겐큐 7년의 정변). 겐큐 9년(1198년) 정월에는 도치미카도 천황의 센소와 함께 섭정으로 임명된다. 미치치카의 사후에는 고토바 상황의 의향으로 구조 요시쓰네가 복권되었기 때문에 겐닌 2년(1202년) 12월에 섭정을 사임하지만, 적자인 이에자네는 그대로 묘당에 남아, 겐큐 3년(1206년) 3월 10일, 급사한 요시쓰네를 대신하여 섭정이 되었다.
조겐 2년(1208년) 10월(이설로 7월)에 출가하여 교리라고 불렀다. 텐푸쿠 원년(1233년) 5월 29일에 훙거. 향년 74세.
모토미치와 숙부인 카네자네의 관계는 좋지 않았고, 카네자네는 모토미치의 관백 취임 직후에는 '고전(모토자네)의 심은을 생각한다'며 보좌를 했지만, 이윽고 소원해졌다. 카네자네의 일기 『교쿠요』에는 고시라카와 원과 모토미치의 관계를 '법황 염 섭정 의기 애념'(주에이 2년 8월 2일 조) '군신합체의 의, 이를 지극으로 할 수 있을까'(주에이 2년 8월 18일 조) 등으로 기록하여 그 남남 관계를 의심하고, 카네자네의 동복 동생인 지엔은 모토미치·이에자네 부자를 '무능한 인물'이라고 하고 있다(『구간쇼』).
- 가오 2년 (1170년)
- * 4월 23일: 원복하여, 정5위하에 서위. 승전과 금색을 허락받음.
- * 4월 29일: 시종에 임관.
- * 12월 5일, 우근위소장으로 전임.
- 가오 3년 (1171년) 1월 18일: 오미노카미를 겸임.
- 조안 2년 (1172년)
- * 1월 5일: 종4위하로 승서. 시종·오미노카미 여전?
- * 10월 26일: 우근위중장으로 전임. 오미노카미 여전?
- 조안 3년 (1173년) 11월 21일: 종4위상으로 승서하고, 우근위중장 여전.
- 조안 4년 (1174년) 8월 2일: 종3위로 승서하고, 우근위중장 여전.
- 조안 5년 (1175년)
- * 1월 22일, 미마사카곤노카미를 겸임.
- * 12월 8일, 정3위로 승서하고, 우근위중장·미마사카곤노카미 여전.
- 지쇼 3년 (1179년) 11월 17일: 정2위로 승서하고, 관백 선하. 내대신을 겸임. 열좌는 종1위 행 좌대신·오이노미카도 쓰네무네의 상좌. 일좌가 됨.
- 지쇼 4년 (1180년)
- * 2월 21일: 관백을 그만두고, 섭정 선하.
- * 4월 21일, 종1위로 승서하고, 섭정·내대신 여전.
- 주에이 원년 (1182년) 6월 28일: 내대신을 사임.
- 주에이 2년 (1183년) 11월 21일: 섭정·도씨장자를 정지함.
- 주에이 3년 (1184년) 1월 22일: 섭정 선하, 도씨장자 선하.
- 분지 2년 (1186년) 3월 12일: 섭정·도씨장자를 정지함.
- 겐큐 7년 (1196년) 11월 25일: 관백 선하.
- 겐큐 9년 (1198년) 1월 11일: 관백을 그만두고, 섭정 선하.
- 겐닌 2년 (1202년) 12월 25일: 섭정을 그만둠.
- 조겐 2년 (1208년) 7월 5일: 출가. 법명 "행리"
- 덴푸쿠 원년 (1233년) 5월 29일, 훙거. 향년 74세
2. 1. 섭관가의 계승과 초기 생애
에이만 2년(1166년), 고노에 모토미치는 6세 때 아버지 모토자네가 2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이듬해 11세의 계모 세이시가 준산후를 받고 고쿠라 천황의 준모(시라카와 전)가 되자, 세이시는 모토미치를 자신의 양자로 삼아 후견했다.원래 후지와라노 타다미치 - 모토자네 - 모토미치로 세쇼가의 적통이 계승될 예정이었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7세였던 모토미치는 섭관이 되기 전에 관위 자체가 없었기 때문에, 섭관의 지위는 모토자네의 이복 동생인 마츠도노 모토후사가 중개인으로 계승했다. 게다가, 어머니 쪽의 외숙부인 후지와라노 노부요리는 헤이지의 난의 주모자로서 참수되었고, '모반인의 조카'라는 그림자가 따라다녔다.
모토미치는 세력을 확장하는 헤이씨 일문을 사실상의 외척으로 삼아 섭관가의 계승자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고시라카와 법황이 세이시에게 섭관가 영지를 계승하게 한 것도 장래의 모토미치에게의 계승을 전제로 한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당시 모토자네의 동생인 구조 카네자네도 세이시를 '임시로 전령하는 사람', 모토미치를 '근본 문서·장원, 전령되어야 할 인물'이라고 부르며 모토미치를 섭관가의 계승자로 간주했다(『교쿠요』 지쇼 3년 6월 18일 조).
가오 2년(1170년) 4월, 쇼고이게에 서임되어, 지주나 우콘에 쇼쇼에 임관했다. 11세에 겐푸쿠를 한 이 즈음에 타이라노 키요모리의 여섯째 딸인 칸시를 정실로 삼은 것으로 보인다. 조안 4년(1174년) 8월에는 주산미에 서임된다. 그러나 마츠도노 모토후사가 10년 이상 섭관의 지위를 차지하여 독자적인 지위를 확립하게 되자, 법황은 모토후사에게 섭관가 계승을 생각하게 되었고, 모토미치의 후견인이었던 키요모리의 반발을 사게 된다.
지쇼 3년(1179년) 11월, 고시라카와 법황의 인세이가 정지되어 반 헤이씨의 공경이 일소되자(지쇼 3년의 정변), 모토미치는 비 산기 우추죠에서 내대신·나이란·관백으로 임명되었다. 이듬해 2월에는 안토쿠 천황의 섭정이 되어, 종1위에 서임된다. 그러나 위계는 공경이었지만 산기, 츄나곤·다이나곤과 같은 기세이칸에 취임할 수 없었고, 더욱이 아버지의 요절로 인해 유소쿠코지츠를 배울 수 없어, 정무에 미숙한 악조건이 겹쳤다. 그 때문에 여러 번 의식에서 실태를 범하여, 관백으로서의 권위는 낮았다.
고후쿠지의 승병이 헤이씨에 반란을 일으키려 하자, 그것을 막으려고 노력했다.
지쇼 5년(1181년) 윤 2월에 키요모리가 훙거하고 헤이씨는 급속히 쇠퇴했다. 주에이 2년(1183년) 7월에 미나모토노 요시나카의 공세 앞에 도성을 버리고 도망칠 수밖에 없게 되었을 때, 지금까지의 인연이 깊어 헤이씨와 행동을 함께 하도록 타이라노 노부모토에게 강요받았지만, 최종적으로 이를 거절하고, 고시라카와 법황의 곁으로 도망쳤다. 그 후 법황의 측근으로 섬기며, 고토바 천황의 옹립에도 공헌했다.
요시나카와 법황의 사이가 험악해져, 호주지 전투가 벌어졌을 때 요시나카에 의해 모든 직무를 해임당했지만, 주에이 3년(1184년)에 요시나카가 토벌되자 섭정에 복귀했다. 그 후 고시라카와 법황 최고의 측근으로 신임을 받았지만, 과거 헤이씨와 친했던 경위 때문에 숙부인 구조 카네자네를 시작으로 하는 공경으로부터 모토미치에 대한 비난이 잇따랐고, 분지 2년(1186년) 3월에는 미나모토노 요시츠네가 형인 요리토모 추토의 인선을 법황에게 내도록 중개한 장본인으로 간주되어 모든 직무를 해임당하고, 감금당하게 되었다. 그 후, 모토미치를 대신하여 구조 카네자네가 섭정이 되었지만, 법황은 여전히 모토미치를 비호했다고 전해진다.
2. 2. 헤이시 정권과의 관계
에이만 2년(1166년), 모토미치가 6세 때 아버지인 모토자네는 2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3] 이듬해 11세의 계모인 세이시가 준산후를 받고 고쿠라 천황의 준모(시라카와 전)가 되자, 세이시는 모토미치를 자신의 양자로 삼아 후견했다. 원래 후지와라노 타다미치 - 모토자네 - 모토미치로 세쇼가의 적통이 계승될 예정이었으나,[3]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7세였던 모토미치는 섭관이 되기 전에 관위 자체가 없었기 때문에, 섭관의 지위는 모토자네의 이복 동생인 마츠도노 모토후사가 중개인으로 계승했다.모토미치는 세력을 확장하는 헤이씨 일문을 사실상의 외척으로 삼아 섭관가의 계승자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고시라카와 법황이 세이시에게 섭관가 영지를 계승하게 한 것도 장래의 모토미치에게의 계승을 전제로 한 것으로 생각된다.
가오 2년(1170년) 4월, 쇼고이게에 서임되어, 지주나 우콘에 쇼쇼에 임관했다. 11세에 겐푸쿠를 한 이 즈음에 타이라노 키요모리의 여섯째 딸인 칸시를 정실로 삼은 것으로 보인다. 조안 4년(1174년) 8월에는 주산미에 서임된다.
지쇼 3년(1179년) 11월, 고시라카와 법황의 인세이가 정지되어 반 헤이씨의 공경이 일소되자(지쇼 3년의 정변), 모토미치는 내대신·나이란·관백으로 임명되었다. 이듬해 2월에는 안토쿠 천황의 섭정이 되어, 종1위에 서임된다. 그러나 위계는 공경이었지만 산기, 츄나곤·다이나곤과 같은 기세이칸에 취임할 수 없었고, 아버지의 요절로 인해 유소쿠코지츠를 배울 수 없어, 정무에 미숙한 악조건이 겹쳤다.
고후쿠지의 승병이 헤이씨에 반란을 일으키려 하자, 그것을 막으려고 노력했다.
지쇼 5년(1181년) 윤 2월에 키요모리가 사망하고 헤이씨는 급속히 쇠퇴했다. 주에이 2년(1183년) 7월에 미나모토노 요시나카의 공세 앞에 도성을 버리고 도망칠 수밖에 없게 되었을 때, 지금까지의 인연이 깊어 헤이씨와 행동을 함께 하도록 타이라노 노부모토에게 강요받았지만, 최종적으로 이를 거절하고, 고시라카와 법황의 곁으로 도망쳤다. 그 후 법황의 측근으로 섬기며, 고토바 천황의 옹립에도 공헌했다.
요시나카와 법황의 사이가 험악해져, 호주지 전투가 벌어졌을 때 요시나카에 의해 모든 직무를 해임당했지만, 주에이 3년(1184년)에 요시나카가 토벌되자 섭정에 복귀했다. 과거 헤이씨와 친했던 경위 때문에 숙부인 구조 카네자네를 시작으로 하는 공경으로부터 모토미치에 대한 비난이 잇따랐고, 분지 2년(1186년) 3월에는 미나모토노 요시츠네가 형인 요리토모 추토의 인선을 법황에게 내도록 중개한 장본인으로 간주되어 모든 직무를 해임당하고, 감금당하게 되었다.
겐큐 7년(1196년) 11월, 반 카네자네 파인 도미노코지 미치치카 등에 의해 옹립되어, 다시 관백으로 임명되었다(겐큐 7년의 정변).
2. 3. 섭정과 관백 역임
고노에 모토미치는 1166년 아버지 모토자네가 젊은 나이로 사망하면서, 세쇼가의 적통을 이을 예정이었으나[3] 어린 나이로 인해 섭관의 지위를 바로 계승하지 못했다.[3] 마쓰도노 모토후사가 중개인으로 섭관직을 계승하였고, 외숙부인 후지와라노 노부요리가 헤이지의 난의 주모자로 처형당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3] 그러나 헤이씨를 외척으로 삼아 섭관가의 계승자 지위를 유지하였고, 고시라카와 법황과 타이라노 키요모리의 후원을 받았다.1170년 쇼고이게에 서임된 후, 1179년 지쇼 3년의 정변으로 고시라카와 법황의 인세이가 정지되자, 내대신, 나이란, 관백에 임명되었다.[3] 1180년에는 안토쿠 천황의 섭정이 되었으나, 정무 경험 부족과 잦은 의례 실수로 권위가 낮았다.[3] 1181년 타이라노 키요모리가 사망하고 헤이씨가 쇠퇴하면서 미나모토노 요시나카의 압박을 받았으나, 고시라카와 법황에게 귀순하여 고토바 천황 옹립에 공헌하였다.
1184년 요시나카가 토벌된 후 섭정에 복귀하였으나, 헤이씨와의 관계로 인해 구조 카네자네를 비롯한 공경들의 비난을 받았고, 1186년 미나모토노 요시쓰네 관련 문제로 모든 직무에서 해임되었다.[3] 1196년 겐큐 7년의 정변으로 다시 관백에 복귀, 1198년 도치미카도 천황의 섭정이 되었으나, 1202년 사임하였다. 1206년 아들 이에자네가 섭정이 되었고, 1208년 출가하여 1233년 사망하였다.
모토미치는 숙부인 카네자네와 사이가 좋지 않았으며, 카네자네는 모토미치의 관백 취임 초기에는 협력했지만, 점차 소원해졌다. 카네자네의 일기 『교쿠요』에는 고시라카와 원과 모토미치의 관계를 '법황 염 섭정 의기 애념'(주에이 2년 8월 2일 조), '군신합체의 의, 이를 지극으로 할 수 있을까'(주에이 2년 8월 18일 조) 등으로 기록하며 남색 관계를 의심했고, 카네자네의 동복 동생 지엔은 모토미치·이에자네 부자를 '무능한 인물'이라고 평가했다(『구간쇼』).
2. 4. 헤이시 몰락과 요시나카와의 갈등
에이만 2년(1166년), 모토미치가 6세 때 아버지인 모토자네는 24세의 나이로 병사했다.[3] 이듬해 11세의 계모인 세이시가 준산후를 받고 고쿠라 천황의 준모(시라카와 전)가 되자, 세이시는 모토미치를 자신의 양자로 삼아 후견했다.원래는 후지와라노 타다미치 - 모토자네 - 모토미치로 세쇼가의 적통이 계승될 예정[3]이었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7세였던 모토미치는 섭관이 되기 전에 관위 자체가 없었기 때문에, 섭관의 지위는 모토자네의 이복 동생인 마츠도노 모토후사가 중개인으로 계승했다. 어머니 쪽의 외숙부인 후지와라노 노부요리는 헤이지의 난의 주모자로서 참수되었고, '모반인의 조카'라는 오명이 따라다녔다.
모토미치는 세력을 확장하는 헤이씨 일문을 사실상의 외척으로 삼아 섭관가의 계승자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고시라카와 법황이 세이시에게 섭관가 영지를 계승하게 한 것도 장래의 모토미치에게의 계승을 전제로 한 것으로 생각된다. 구조 카네자네도 세이시를 '임시로 전령하는 사람', 모토미치를 '근본 문서·장원, 전령되어야 할 인물'이라고 부르며 모토미치를 섭관가의 계승자로 간주했다(『교쿠요』 지쇼 3년 6월 18일 조).
가오 2년(1170년) 4월, 쇼고이게에 서임되어, 지주나 우콘에 쇼쇼에 임관했다. 11세에 겐푸쿠를 한 이 즈음에 타이라노 키요모리의 여섯째 딸인 칸시를 정실로 삼은 것으로 보인다. 조안 4년(1174년) 8월에는 주산미에 서임된다. 그러나 마츠도노 모토후사가 10년 이상 섭관의 지위를 차지하여 독자적인 지위를 확립하게 되자, 법황은 모토후사에게 섭관가 계승을 생각하게 되었고, 모토미치의 후견인이었던 키요모리의 반발을 사게 된다.
지쇼 3년(1179년) 11월, 고시라카와 법황의 인세이가 정지되어 반 헤이씨의 공경이 일소되자(지쇼 3년의 정변), 모토미치는 비 산기 우추죠에서 내대신·나이란·관백으로 임명되었다. 이듬해 2월에는 안토쿠 천황의 섭정이 되어, 종1위에 서임된다. 그러나 위계는 공경이었지만 산기, 츄나곤·다이나곤과 같은 기세이칸에 취임할 수 없었고, 더욱이 아버지의 요절로 인해 유소쿠코지츠를 배울 수 없어, 정무에 미숙한 악조건이 겹쳤다. 그 때문에 여러 번 의식에서 실태를 범하여, 관백으로서의 권위는 낮았다.
고후쿠지의 승병이 헤이씨에 반란을 일으키려 하자, 그것을 막으려고 노력했다.
지쇼 5년(1181년) 윤 2월에 키요모리가 사망하고 헤이씨는 급속히 쇠퇴했다. 주에이 2년(1183년) 7월에 미나모토노 요시나카의 공세 앞에 도성을 버리고 도망칠 수밖에 없게 되었을 때, 지금까지의 인연이 깊어 헤이씨와 행동을 함께 하도록 타이라노 노부모토에게 강요받았지만, 최종적으로 이를 거절하고, 고시라카와 법황의 곁으로 도망쳤다. 그 후 법황의 측근으로 섬기며, 고토바 천황의 옹립에도 공헌했다.
요시나카와 법황의 사이가 험악해져, 호주지 전투가 벌어졌을 때 요시나카에 의해 모든 직무를 해임당했지만, 주에이 3년(1184년)에 요시나카가 토벌되자 섭정에 복귀했다. 그 후 고시라카와 법황 최고의 측근으로 신임을 받았지만, 과거 헤이씨와 친했던 경위 때문에 숙부인 구조 카네자네를 시작으로 하는 공경으로부터 모토미치에 대한 비난이 잇따랐고, 분지 2년(1186년) 3월에는 미나모토노 요시츠네가 형인 요리토모 추토의 인선을 법황에게 내도록 중개한 장본인으로 간주되어 모든 직무를 해임당하고, 감금당하게 되었다. 그 후, 모토미치를 대신하여 구조 카네자네가 섭정이 되었지만, 법황은 여전히 모토미치를 비호했다고 전해진다.
모토미치와 숙부인 카네자네의 관계는 좋지 않았고, 카네자네는 모토미치의 관백 취임 직후에는 '고전(모토자네)의 심은을 생각한다'며 보좌를 했지만, 이윽고 소원해졌다. 카네자네의 일기 『교쿠요』에는 고시라카와 원과 모토미치의 관계를 '법황 염 섭정 의기 애념'(주에이 2년 8월 2일 조) '군신합체의 의, 이를 지극으로 할 수 있을까'(주에이 2년 8월 18일 조) 등으로 기록하여 그 남남 관계를 의심하고, 카네자네의 동복 동생인 지엔은 모토미치·이에자네 부자를 '무능한 인물'이라고 하고 있다(『구간쇼』).
2. 5. 섭정 복귀와 실각
고노에 모토미치는 1166년, 아버지 모토자네가 24세의 나이로 사망하자, 이듬해 준산후를 받은 계모 세이시의 양자가 되어 후견을 받았다.[3] 원래 세쇼가의 적통은 후지와라노 타다미치 - 모토자네 - 모토미치로 이어질 예정이었으나,[3] 아버지 사망 당시 7세였던 모토미치는 섭관이 되기에는 너무 어렸기에, 섭관직은 모토자네의 이복 동생인 마츠도노 모토후사가 임시로 계승했다.[3]모토미치는 헤이씨 일문을 사실상 외척으로 삼아 섭관가의 계승자 지위를 유지했다. 고시라카와 법황이 세이시에게 섭관가 영지를 계승하게 한 것도 장래 모토미치에게 계승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3] 카네자네도 세이시를 '임시 전령자', 모토미치를 '근본 문서·장원, 전령되어야 할 인물'이라 칭하며 섭관가 계승자로 간주했다.[3] 1170년 쇼고이게에 서임된 후, 겐푸쿠를 한 즈음 타이라노 키요모리의 여섯째 딸인 칸시와 정실로 결혼했다. 그러나 마츠도노 모토후사가 10년 이상 섭관직을 독점하며 법황과 관계가 깊어지자, 키요모리가 반발하게 되었다.
1179년, 고시라카와 법황의 인세이가 정지되자, 모토미치는 내대신, 나이란, 관백으로 임명되었고, 이듬해 안토쿠 천황의 섭정이 되어 종1위에 서임되었다. 그러나 정무 경험 부족과 아버지의 요절로 유소쿠코지츠를 배우지 못해 의식에서 실수를 범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고후쿠지 승병의 반란을 막으려 노력하기도 했다.
1181년 키요모리 사망 후 헤이씨가 쇠퇴하고, 1183년 미나모토노 요시나카의 공세에 헤이씨와 함께 도망치도록 강요받았지만, 이를 거절하고 고시라카와 법황에게 의탁했다. 법황의 측근으로 고토바 천황 옹립에 공헌했으나, 호주지 전투 때 요시나카에 의해 해임되었다가 1184년 요시나카 토벌 후 섭정에 복귀했다. 고시라카와 법황의 신임을 받았지만, 과거 헤이씨와의 관계로 인해 카네자네를 비롯한 공경들의 비난을 받았고, 1186년 미나모토노 요시츠네 관련 문제로 모든 직무에서 해임되고 감금되었다.
1196년, 겐큐 7년의 정변으로 미치치카 등에 의해 옹립되어 다시 관백에 임명되었고, 1198년 도치미카도 천황의 센소와 함께 섭정이 되었다. 1202년 요시쓰네의 복권으로 섭정을 사임했지만, 아들 이에자네가 1206년 요시쓰네의 급사로 섭정이 되었다.
모토미치는 1208년에 출가하여 교리라 불렸고, 1233년 74세로 사망했다. 숙부 카네자네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고, 카네자네는 모토미치를 보좌했지만, 점차 소원해졌다. 카네자네는 일기 『교쿠요』에 고시라카와 법황과 모토미치의 관계를 남남 관계로 의심했고, 동생 지엔은 모토미치 부자를 '무능한 인물'이라 평가했다(『구간쇼』).
2. 6. 두 번째 관백 임명과 사망
고노에 모토미치는 1179년 지쇼 3년의 정변으로 고시라카와 법황의 인세이가 정지되면서 내대신, 나이란, 관백에 임명되었고, 이듬해 1180년 안토쿠 천황의 섭정이 되어 종1위에 올랐다. 그러나 아버지의 요절로 유소쿠코지츠를 배우지 못해 정무에 미숙했고, 의식에서 실수를 범하여 권위가 낮았다.1181년 기요모리 사후 헤이시가 쇠퇴하고, 1183년 미나모토노 요시나카의 공세에 헤이시와 함께 도성을 떠나도록 강요받았으나, 이를 거절하고 고시라카와 법황에게 돌아갔다. 고토바 천황 옹립에 공헌한 후, 법황의 측근으로 섬겼다. 호주지 전투에서 요시나카에 의해 해임되었으나, 1184년 요시나카가 토벌되자 섭정에 복귀했다.
1186년 미나모토노 요시츠네를 요리토모 추토의 인선을 내리도록 중개한 장본인으로 간주되어 해임, 감금되었다.
1196년 겐큐 7년의 정변으로 다시 관백에 임명되었고, 1198년 도치미카도 천황의 센소와 함께 섭정이 되었다. 1202년 섭정을 사임했지만, 아들 이에자네가 1206년 섭정이 되었다.
1208년 출가하여 법명 교리(行理)를 얻었고, 1233년 74세로 사망했다.
숙부인 구조 카네자네는 지엔과 함께 모토미치 가문을 무능하다고 비판했다.
3. 계보
고노에 모토자네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후지와라 타다타카의 딸이다. 타이라 키요모리의 넷째 딸인 타이라 모리코를 양어머니로 두었다. 정실은 타이라 키요모리의 여섯째 딸인 타이라 칸코이다. 보조 아키노부의 딸인 보조 겐시를 첩으로 두어 장남 고노에 이에자네를 낳았다. 타이라 노리노리의 딸 타이라 노부코를 첩으로 두어 차남 고노에 미치츠네를 낳았다. 승려 사이슌의 딸 가녀방을 첩으로 두어 삼남 타카츠카사 카네모토와 사남 후지와라 모토노리를 낳았다. 이 외에도 생모 불명의 자녀로 쇼고인 11대 문적 엔츄, 엔조(또는 엔세이), 텐다이좌주 제73세 엔키, 쇼고인 12대 문적 세이츄, 닌초, 다이카쿠지 14대 문적 지네신, 손닌 등이 있다.
4. 평가
4. 1. 긍정적 평가
4. 2. 부정적 평가
4. 3. 종합적 평가
참조
[1]
서적
The Princeton Companion to Classical Japanese Literature
https://books.google[...]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20-09-01
[2]
서적
Living Images: Japanese Buddhist Icons in Context
https://books.google[...]
Stanford University Press
2001-01-01
[3]
문서
近年では、忠通は基実を排して弟(基房または兼実)に摂関を譲らせてその子孫に摂関家を継承させようとしたが、忠通自身の死で実現しなかったとする見方も出されている(詳細は[[近衛基実]]参照のこ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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