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스 저멜 주택
1. 개요
모리스 저멜 주택은 미국 뉴욕시 워싱턴 하이츠에 위치한 역사적인 저택으로, 팔라디안 건축 양식의 초기 사례로 평가받는다. 1765년에 건설되어 미국 독립 전쟁 시기 조지 워싱턴이 사령부로 사용했으며, 이후 여러 차례 소유주가 바뀌었다. 1907년 박물관으로 개관하여 현재까지 다양한 전시와 프로그램을 통해 대중에게 공개되고 있으며, 국립 역사 랜드마크, 뉴욕시 랜드마크 등으로 지정되어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이미지 준비중입니다.
| 위치 | 뉴욕시 맨해튼 워싱턴 하이츠, 웨스트 160번가, 주멜 테라스, 웨스트 162번가, 에지컴 애비뉴로 둘러싸인 로저 모리스 공원 내 주멜 테라스 65번지 |
|---|
| 건축 양식 | 팔라디오 건축, 조지 왕조 건축, 연방 건축 |
|---|---|
| 건설 | 1765년, 년 리모델링 |
| 국가 사적지 등재 유형 | 국립 역사 랜드마크 |
|---|---|
| 국립 사적지 등재일 | 1966년 10월 15일 |
| 국립 역사 랜드마크 지정일 | 1961년 1월 20일 |
| 뉴욕주 역사 유적 등록 | 1980년 6월 23일 |
| 뉴욕주 역사 유적 번호 | 06101.001801 |
| 뉴욕시 랜드마크 지정일 | 외관: 1967년 7월 12일 내부: 1975년 5월 27일 |
| 뉴욕시 랜드마크 번호 | 0308, 0888 |
| 소속 | 주멜 테라스 역사 지구 |
| 소속 등재 번호 | 73001220 |
-
뉴욕의 주택 -
리치먼드 역사 마을
리치먼드 역사 마을은 300년 역사의 공동체 생활상을 보여주는 15채의 복원된 건물로 구성된 뉴욕주 스테이튼 아일랜드의 역사 박물관이다. -
공식 웹사이트에 알 수 없는 변수를 사용한 문서 -
브루클린 미술관
브루클린 미술관은 1823년 브루클린 견습생 도서관으로 시작하여 현재 약 50만 점의 소장품을 보유한 뉴욕 브루클린 소재의 미술관으로, 다양한 분야의 예술 작품을 전시하며 특히 아프리카 미술과 여성주의 미술에 대한 기여가 크다. -
공식 웹사이트에 알 수 없는 변수를 사용한 문서 -
광주지방기상청
광주지방기상청은 광주광역시와 전라남도 지역의 기상 예보, 특보, 관측, 기후 정보 제공 등의 업무를 수행하는 기상청 소속 기관으로, 1949년 광주측후소로 설치되어 1992년 광주지방기상청으로 개편되었으며, 기획운영과, 예보과, 관측과, 기후서비스과와 전주기상지청, 목포기상대를 두고 있다. -
맨해튼의 국립역사기념물 -
센트럴 파크
센트럴 파크는 뉴욕 맨해튼에 있는 대규모 도시 공원으로, 다양한 자연 요소와 레크리에이션 시설을 갖추고 있어 많은 방문객이 찾는 세계적인 명소이며 센트럴파크 보존협회가 관리한다. -
맨해튼의 국립역사기념물 -
카네기 홀
카네기 홀은 앤드루 카네기의 기부로 설립된 뉴욕 맨해튼의 공연장으로, 다양한 음악 공연과 행사가 열리며 음악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2. 역사
모리스 저멜 주택은 18세기 중반 영국군 장교 로저 모리스가 할렘 하이츠의 높은 지대에 팔라디안 건축 양식으로 건설하면서 그 역사가 시작되었다. 미국 독립 전쟁 발발 후 왕당파였던 모리스 부부는 영국으로 피신했고, 1776년에는 약 한 달간 조지 워싱턴 장군이 이끄는 대륙군의 사령부로 사용되었다. 워싱턴은 이곳에서 할렘 하이츠 전투를 지휘했으며, 이후 저택은 영국군과 헤센 용병에게 점령되었다.
전쟁이 끝나고 왕당파 재산 몰수령에 따라 모리스 가문의 소유권은 박탈되었고, 저택은 잠시 선술집으로 운영되기도 했으며 여러 차례 주인이 바뀌었다. 미국 대통령이 된 워싱턴은 1790년, 한때 자신의 사령부였던 이곳을 다시 찾아 만찬을 즐기기도 했다.
1810년, 프랑스 출신 와인 상인 스테판 저멜과 그의 아내 엘리자 보웬 저멜이 저택을 매입하며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 저멜 부부는 저택을 연방 양식으로 개조하고 내부를 엠파이어 양식으로 꾸몄으며, 사교 활동의 중심지로 만들고자 노력했다. 스테판 저멜 사후, 엘리자 저멜은 1833년 전 미국 부통령 애런 버와 저택에서 결혼했으나 결혼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엘리자 저멜은 1865년 사망할 때까지 저택에 거주했으며, 말년에는 다소 기이한 행동을 보인 것으로 전해진다.
엘리자 저멜 사후에는 유산을 둘러싼 법적 분쟁이 있었고, 이후 저택은 체이스 가문, 얼 가문 등 여러 소유주를 거쳤다. 얼 가문은 저택을 '얼 클리프(Earle Cliff)'라 부르며 일부 개조를 진행하기도 했다. 20세기 초 뉴욕시가 저택을 인수하여 박물관으로 개관하기 전까지, 모리스 저멜 주택은 이처럼 다양한 변화를 겪었다.
2.1. 부지 및 건설
17세기 동안, 현재 저택이 위치한 부지는 할렘 마을의 일부였으며, '그레이트 메이즈 랜드'(Great Maize Land)라고 불리는 더 넓은 지역에 속해 있었다. 이 부지에 처음으로 집을 지은 사람은 얀 키어센으로, 그는 1695년 또는 1696년에 약 반 모르겐(약 1495yd2)의 땅을 받았다. 키어센은 또한 킹스브리지 로드(현재의 세인트 니콜라스 애비뉴) 동쪽에 집, 헛간, 정원을 지을 수 있는 허가도 받았다. 그는 1700년 또는 1701년에 해당 토지에 대한 권리증서를 취득하고 점차 자신의 재산을 늘려나갔다.
1750년대 후반에 이르러 이 땅은 키어센의 딸 얀티(Jannetje)와 그녀의 남편 야코브 다이크만에게 상속되었다. 키어센의 두 아들은 1763년 이전에 농지에 대한 자신들의 지분을 매각했으며, 같은 해 이 부지는 제임스 캐럴에게 1,000 뉴욕 파운드에 팔렸다. 캐럴은 2년 동안 이 땅에서 농사를 지었고, 1765년에 로저 모리스에게 매각했다. 일부 기록(레지널드 펠햄 볼턴)에 따르면 캐럴과 모리스가 키어센 부지의 다른 부분을 구매했으며 집이 1758년에 완공되었다고 주장하지만, 다른 자료들은 모리스가 캐럴로부터 직접 부지를 취득했고 저택 건설은 1765년에 시작되었다고 명시하고 있다. 아놀드 픽먼에 따르면, 모리스는 1765년 8월 캐럴로부터 여러 필지의 땅을 사들였으며, 당시 부지에는 이미 키어센 소유의 집이 있었다고 한다.
2.2. 미국 독립 전쟁 시기
모리스 부부는 미국 독립 전쟁이 시작된 1775년까지 이 집에서 살았다. 로저와 메리 모리스 부부는 영국 편에 선 왕당파였다. 역사가 윌리엄 헨리 셸턴은 로저가 뉴욕 입법 위원회 위원이었기 때문에, 마운트 모리스가 미국 독립을 추구하는 애국파의 공격 대상이 될 수 있었다고 기록했다. 로저는 자신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 전쟁이 시작될 때 영국으로 피신했다. 메리와 아이들은 1775년 중반, 그리고 아마도 1776년 초까지 집에 머물렀으나, 1776년 중반에는 필립스 저택으로 피신한 것으로 보인다.
1776년 9월 5일경, 대륙군 장군 윌리엄 히스와 그의 장교들이 저택을 점령하여 총사령관인 조지 워싱턴을 위해 준비했다. 영국군에 밀려 어퍼 맨해튼으로 후퇴한 워싱턴은 약 한 달간 이 저택을 사령부로 사용했다. 워싱턴은 1776년 9월 14일 밤 또는 15일 오전에 저택에 도착한 것으로 추정된다. 저택은 높은 지대에 위치하여 접근하는 적군을 관측하기 용이했기 때문에 사령부로 선택되었다. 일각에서는 워싱턴이 과거 메리 모리스와의 인연 때문에 이곳을 선택했다는 주장이 있었으나, 이는 근거 없는 소문으로 밝혀졌다.
워싱턴은 군사 비서와 여러 보좌관들과 함께 약 한 달간 저택에 머물렀고, 이곳에서 할렘 하이츠 전투의 전략을 구상하고 지휘했다. 약 8,000명의 대륙군 병사들이 인근에 야영했으며, 일부는 현재의 실반 테라스 자리에 나무 오두막을 짓고 머물렀다. 워싱턴은 저택 2층 발코니에서 1776년 뉴욕 대화재를 목격했다고 전해진다. 대륙군은 10월 18일경까지 비교적 방해받지 않고 주둔했으나, 펠스 포인트 전투가 시작되면서 상황이 변했다. 워싱턴은 진격해오는 영국군을 피해 10월 21일에서 22일경 저택에서 퇴각했고, 대륙군 대령 로버트 매거에게 저택 방어를 맡겼다. 1776년 11월 16일, 포트 워싱턴 전투 중 워싱턴의 군대가 저택을 탈환하려 시도했으나 영국군에 의해 격퇴되었다. 영국군은 약 3,000명의 대륙군 병사를 포로로 잡고 인근의 포트 워싱턴과 함께 저택을 점령했다. 포로로 잡힌 대륙군 병사들은 저택의 헛간에 감금되었다.
영국군은 1776년부터 1783년 뉴욕에서 철수할 때까지 저택을 점령했다. 영국군의 저택 점령 기간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으며, 주로 두 병사의 일기를 통해 알려져 있다. 포트 워싱턴 함락 직후 누가 저택을 점령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1777년과 1782년 지도에는 저택 부지 주변에 헛간, 마차 창고 등 4개의 건물이 표시되어 있다. 저택은 1777년에는 영국 육군 중장 헨리 클린턴의 사령부로, 1778년에는 헤센 용병 사령관인 남작 빌헬름 폰 크니파우젠의 사령부로 사용되었다. 크니파우젠 남작의 참모진도 저택의 일부 공간을 사용했다. 다른 헤센 및 영국 사령관들도 간헐적으로 저택을 점령했으며, 근처에는 텐트 야영지가 있었다. 1780년 동안 영국군은 저택을 감시 초소로 활용했고, 헤센 육군 소장 폰 로스부르크도 이곳에 거주했다.
2.3. 몰수 및 소유권 변동
1779년, 뉴욕주 몰수 위원회는 영국군이 뉴욕에서 철수하는 즉시 모든 왕당파의 재산을 몰수하는 몰수령을 통과시켰다. 이에 따라 왕당파였던 모리스 부부는 할렘 하이츠의 저택을 포함한 재산을 몰수당했고, 이 저택은 1783년 New York Gazette and Weekly Mercury에 매물로 광고되었다. 몰수 이후 마운트 모리스에는 여러 임차인이 거주했다. 기록에 따르면 이 집은 1784년 7월 존 베리안과 아이작 레디어드에게 2,250 뉴욕 파운드에 매각되었다. 일부 자료에서는 레디어드가 최소 1년 동안 이 집에서 살았다고 주장하지만, 다른 자료에서는 베리안과 레디어드 모두 이 집에 거주하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1785년, 저택은 탤미지 홀이 운영하는 "칼루메트 홀(Calumet Hall)"이라는 이름의 선술집으로 바뀌어 약 2년 동안 운영되었다. 이 선술집은 올버니 포스트 로드를 따라 여행하는 사람들이 자주 들르는 곳이었는데, 뉴욕 시에서 출발한 여행객들이 처음으로 마주치는 선술집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광고에서는 이곳이 모리스 부부의 옛집이라는 점과 업스테이트 뉴욕 및 뉴잉글랜드로 가는 마차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점을 홍보했다. 한 관찰자는 이 저택이 임시 방문객과 장기 투숙객 모두에게 적합하며, 특히 팔각형 응접실이 "거북이 파티에 매우 적합하게 설계되었다"고 묘사하기도 했다. 홀은 1788년 6월까지 선술집을 매각해야 했다.
1789년과 1790년에는 농부 존 보가더스가 저택을 임대했던 것으로 기록된다. 미국 대통령이 된 조지 워싱턴은 여러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 및 그 가족들과 함께 1790년 7월, 한때 자신의 사령부였던 이 집에서 만찬을 즐기기 위해 돌아왔다. 워싱턴은 당시 일기에 이 저택이 "몰수되어 평범한 농부의 소유"가 되었다고 적었다. 한편, 레디어드는 1791년 이전에 재산의 절반을 시어도어 홉킨스와 마이클 조이에게 매각했다. 부동산 중개인 앤서니 L. 블리커는 1791년과 1792년에 걸쳐 마운트 모리스 저택 전체를 매입했고, 이후 판매를 시도하는 동안 야곱 마이어라는 농부에게 임대했다. 1793년, 블리커는 모리스 저택을 포함한 토지를 윌리엄 케니언에게 팔았다. 로저 모리스가 1794년에 사망하자, 메리 모리스는 몰수령이 혼전 계약에 따라 자신에게 속한 저택에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소유권을 되찾기 위해 소송을 제기했다.
케니언은 1799년 8월 29일, 영국인 레너드 파킨슨에게 전체 토지를 매각했다. 파킨슨은 1809년에 재산을 매각하고 분할하기로 결정하여 15개의 부지로 나누었으며, 저택과 인접한 마차 창고는 8번 부지로 지정되었다. 같은 해, 메리 모리스는 저택에 대한 주장을 포기했고, 존 제이콥 애스터는 모리스 상속인들로부터 재산을 매입했다. 농부 마이어는 1809년까지 이 재산을 임대했던 것으로 보이며, 1800년 미국 인구 조사에 따르면 그의 가구는 11명이었다. 1810년 지도에는 두 개의 부속 건물(헛간과 마차 창고)만 표시되었지만, 1815년 지도에는 두 개의 추가 건물과 저택 근처의 문지기 집이 나타났다.
2.4. 주멜 가문 소유 시기
1810년, 프랑스 와인 상인 스테판 저멜은 이 집과 주변 토지를 10에 매입했다. 그는 사교계 명사인 엘리자 보웬 저멜과 입양 딸 메리 보웬과 함께 저택으로 이사했다. 저멜 부부는 로어 맨해튼에 살 때 사회로부터 대체로 외면받았으며, 가난한 환경에서 자란 엘리자는 뉴욕시 상류 사회의 일원이 되기를 갈망했다. 저멜 부부가 이 집을 산 후 반세기 동안 이 집은 "식민지 뉴욕의 사교 중심지"였다는 평가도 있다.
1810년 미국 인구 조사에 따르면 저멜 가구에는 7명이 거주했지만, 저멜 부부는 업타운 저택과 로어 맨해튼에 있는 집에서 시간을 나눠 보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저멜 부부는 저택을 개조하여 연방 양식 입구를 추가하고 내부를 엠파이어 양식으로 재단장했다. 스테판 저멜은 사회적 지위를 높이기 위해 아내에게 주는 선물이라고 공공연하게 밝혔으며, 몇몇 인근 농장도 매입했다. 메리 보웬은 집에 병사들의 유령이 나타난다는 믿음 때문에 혼자 저택에 머무는 것을 거부하기도 했다. 저멜 부부는 저택에 수많은 저명한 유럽 및 미국 손님을 초대했다. (일설에는 루이 필리프 1세와 샤를 모리스 드 탈레랑페리고르도 초대되었다고 하나, 이들은 저멜 부부가 저택을 소유하기 전인 1800년 이전에 미국에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사실과 다를 가능성이 높다.) 1814년 스테판 저멜은 저택과 다른 재산을 매각하려 했으나 저택은 팔리지 않았다.
1815년 스테판 저멜은 프랑스에서 여러 이집트 사이프러스 나무를 수입하여 저택 근처에 심었다. 같은 해 스테판과 엘리자는 저택을 신탁에 맡겼다. 저멜 부부는 사회적 지위를 충분히 얻지 못하자 같은 해 프랑스로 떠났다. (한 이야기에 따르면 스테판이 나폴레옹에게 할렘 하이츠의 집을 제안했다고 하나, 저멜 부부가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이 패배하기 전에 떠났기 때문에 사실일 가능성은 낮다.) 프랑스에서의 사회 생활에 만족하지 못한 엘리자는 1817년에 저멜 저택으로 돌아왔다. 1818년 메리 보웬이 합류하기 전까지 엘리자와 그녀의 하인들이 저택의 유일한 거주자였다. 1820년 미국 인구 조사에 따르면 당시 저택에는 7명이 거주했다. 엘리자는 1821년 4월, 저택에 있던 일부 가구와 그림을 팔고 다시 프랑스로 갔다.
저멜 부부가 프랑스에 머무는 동안 저택은 1820년대에 몇 차례 임대되었는데, 주로 여름철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임차인에는 모세 필드 가족(1825년)과 클린턴 가족(1826년) 등이 있었다. 스테판은 1825년 엘리자에게 저택과 주변 토지를 양도했다. 이는 엘리자의 계략 때문인지, 스테판의 채권자로부터 저택을 보호하기 위한 의도였는지에 대해서는 기록이 엇갈린다. 엘리자는 1826년 남편의 위임장을 가지고 영구적으로 돌아왔으며, 스테판은 1828년 중반에 돌아왔다. 같은 해 저택의 소유권은 메리에게 이전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저멜 부부가 프랑스에서 돌아온 후 저택 옆에 얼음 창고가 지어졌다. 1830년 미국 인구 조사에서는 저택에 거주하는 저멜 가구의 인원이 11명으로 기록되었다. 스테판은 마차 사고로 부상을 입은 후 1832년에 사망했다.
스테판의 사망 즈음, 메리는 변호사 넬슨 체이스와 결혼했고, 엘리자는 저택에 가구를 추가로 구입했다. 엘리자는 1833년 전 미국 부통령 애런 버와 약혼했으며, 그들은 그 해 7월 3일 저택의 응접실에서 결혼했다. 그러나 결혼 생활과 버의 저택 체류는 짧았다. 엘리자는 1834년 이혼 소송을 제기했고, 버가 사망하기 직전인 1836년에 이혼이 확정되었다. 버는 이혼 소송 제기 후 7개월간 저택을 떠났다가 5주 동안 다시 돌아오기도 했다.
버가 사망한 후 엘리자는 상류 사회에서 배척당했고, 이후 저택에 간헐적으로 머물렀던 것으로 보인다. (자료에 따라 엘리자가 버 사후 저택에 얼마나 머물렀는지에 대한 기록은 차이가 있다.) 1830년대 후반에는 펠 및 먼로 가족이 저택을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목수 앨바 노울턴은 1838년경 새로운 현관을 건설했다. 엘리자는 1840년대 대부분 동안 저택에 살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지만, 딸 메리 체이스가 사망한 지 5년 후인 1848년경에는 체이스 가족과 함께 다시 저택으로 이사했다. 1850년 미국 인구 조사에 따르면 저택에는 9명이 거주했고, 1855년 뉴욕주 인구 조사에서는 14명이 기록되었다. 우물은 1857년경 부지에 파여졌다.
엘리자 저멜은 만년에 괴팍한 행동을 보였다. 1850년대에는 병사 복장을 한 사람들을 따라 말을 타고 저택 주변을 행진하는 모습이 목격되기도 했다. 이웃들은 그녀의 기행을 이용하여 "버려진 농장에서 원하는 것을 가져갔다"고 전해진다. 1860년 미국 인구 조사에서는 가구에 7명이 기록되었다. 체이스 가족은 1862년까지 저택에 살았으나, 엘리자의 증손자가 자신의 증조모 그림에 잉크통을 던진 사건 이후 쫓겨났다. 이후 엘리자와 남자 하인 한 명이 1865년 그녀가 사망할 때까지 집을 지켰다. 이 시기 저택에는 방문객이 거의 없었고 쇠퇴하기 시작했으며, 엘리자가 찢어진 드레스를 입고 상상의 방문객을 접대하는 모습이 목격되기도 했다.
2.5. 엘리자 주멜 사후
엘리자 주멜이 사망한 후, 그녀의 유산을 둘러싸고 유언과 관련된 여러 소송이 이어졌다. 엘리자가 세상을 떠난 뒤 약 20년 동안 체이스 가문이 이 저택에서 살았다. 1868년 무렵에는 넬슨 체이스, 그의 아들 윌리엄 잉글리스 체이스의 가족, 그리고 넬슨의 딸 엘리자 주멜 페리의 가족이 저택에 거주했다. 이 세 가구는 저택의 각기 다른 구역에 살면서 식사 시간도 달랐다. 1870년 미국 인구 조사에는 체이스 가구가 기록되지 않았지만, 1880년 인구 조사에서는 저택에 체이스 가구 구성원 1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당시 한 작가는 주멜 저택이 맨해튼의 도시화로 인해 "우아한 시골 저택에서 도시의 우아한 교외 지역으로 빠르게 변모할 운명"이라고 언급했다. 19세기 후반, 엘리자 주멜이 사망하기 직전이나 직후에 판석으로 된 마차 길이 저택 앞에 추가되었다.
주멜 유산에 대한 분쟁은 1881년에 해결되었다. 법원은 메리 보웬이 법적으로 저택을 소유한 적이 없다고 판결하고 주멜 유산을 분할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1882년 5월, 뉴욕 주 대법원은 주멜 저택을 매물로 내놓을 수 있다고 판결했고, 같은 해 6월 저택과 주변 부지에 대한 경매가 열렸다. 신원이 밝혀지지 않은 구매자가 저택과 인근 30개 부지를 40에 매입했지만, 몇몇 사람들이 스티븐 주멜의 상속인이라고 주장하며 이의를 제기하면서 매각이 지연되었다. 결국 넬슨 체이스가 저택을 계속 소유하게 되었지만, 유산은 분할되었다. 그는 1885년경에 새로운 헛간을 지었으나, 이 헛간은 1909년 이전에 철거된 것으로 추정된다. 체이스 가문은 1921년까지 이 지역의 재산 매각을 완료했다.
체이스 가문은 1887년 3월까지 주멜 저택에 머물렀고, 넬슨 체이스와 엘리자 주멜 페리는 저택을 헨리 H. 토비에게 매각했다. 토비는 이를 다시 에반 서튼 주니어에게 팔았다. 서튼이 저택에 거주했다는 기록은 없으며, 매각 직후 누가 그 집에 살았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엘리자베스 르 프린스는 1889년 또는 1890년에 이 집으로 이사하여 1894년까지 머물렀을 가능성이 있지만, 이는 확인되지 않았다. 엘리자베스의 남편이자 초기 영화 제작자인 루이 르 프린스는 자신의 영화를 저택에서 공개 상영하려 했으나 1890년에 의문의 실종을 당했다. 1890년 초, 엘리자 주멜의 소장품으로 여겨지는 많은 가구들이 경매에 나왔지만, 넬슨 체이스의 가족은 여전히 주멜 가구를 소유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서튼은 1894년 5월 저택을 세스 밀리켄에게 매각했다.
1894년, 얼 가족이 저택을 인수하여 '얼 클리프(Earle Cliff)'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새로운 소유주는 퍼디난드 핀니 얼과 그의 아내 릴리 J. 얼이었는데, 퍼디난드의 어머니는 모리스 가문과 관련이 있었다. 얼 부부는 식민지 시대풍의 많은 장식을 지하실로 옮기고, 장식 요소를 교체했으며, 벽을 칠하고 집의 여러 부분에 벽지를 발랐다. 집의 북동쪽 모퉁이에는 새로운 주방이 건설되었다. 지하실에서 1층 식료품 저장실로 이어지는 계단은 폐쇄되었고, 얼 가족은 팔각형 부속 건물을 스튜디오 아파트로 개조하고 돌머 창을 제거했다. 미국 독립 혁명 아동회의 워싱턴 하이츠 지부장을 맡았던 릴리 얼은 때때로 저택에서 행사를 주최했다. 여기에는 어린이들을 위한 리셉션, 잔디밭 파티, 할렘 하이츠 전투 기념 행사, 그리고 미국 독립 혁명 후손회의 회의 등이 포함되었다. 1898년에는 인근의 해밀턴 그레인지가 이전된 지 10년 후에 얼 클리프를 이전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실패했다. 1900년 미국 인구 조사에 따르면 얼 가족 구성원 7명이 그 집에 살고 있었다. 퍼디난드 얼은 1903년 초 사망할 때까지 저택에 거주했다.
3. 박물관 역사
모리스-저멜 저택은 19세기 말부터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박물관으로 전환하려는 노력이 시작되었다. 뉴욕 시 정부는 여러 역사 단체의 요구에 따라 1903년 저택을 매입하여 로저 모리스 공원으로 지정하고 일반에 공개했다. 이후 미국 독립 혁명 딸들 산하의 워싱턴 본부 협회(WHA)가 박물관 운영을 맡아 1907년 공식 개관했다. 박물관은 20세기와 21세기에 걸쳐 여러 차례의 복원 및 개조 공사를 거치며 조지 워싱턴 관련 유적지이자 미국 독립 혁명 시기의 중요한 장소로 자리매김했다. 최근에는 브로드웨이 뮤지컬 해밀턴의 성공으로 다시금 주목받고 있으나, 건물의 노후화로 인한 지속적인 보존 노력이 요구되고 있다.
3.1. 박물관 개관 및 운영
1899년부터 뉴욕 시 정부가 저멜 저택을 매입하여 박물관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요구가 있었다. 이러한 계획을 지지한 이들 중에는 잡지 The Spirit of '76의 편집자, 미국 경관 및 역사 보존 협회, 미국 독립 혁명 딸들(Daughters of the American Revolution), 그리고 미국 독립 혁명 아들들(Sons of the American Revolution)이 있었다. 당시 이 저택은 프라운시스 타번, 세인트 폴 채플과 더불어 조지 워싱턴과 관련된 맨해튼에 남아있는 세 곳의 건물 중 하나로 여겨졌다. 시의 공공 개선 위원회는 1900년 3월에 이 계획을 처음 검토했으며, 같은 해 9월에는 맨해튼 공원부(훗날 뉴욕시 공원 및 레크리에이션부, NYC Parks)에 저택 부지를 지도에 표시하도록 요청했다. 처음에는 매입에 반대했지만, 공공 개선 위원회는 1901년 3월에 매입에 찬성표를 던졌다. 다음 달 위원회는 150에 저택을 구매하는 제안을 승인했으나, 매각은 즉시 이루어지지 않았다.
뉴욕 시 의회는 1901년 12월 저택과 주변 부지를 공원으로 전환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1902년 5월, 세스 M. 밀리켄이 저택에 설정된 30의 모기지를 압류하려 시도했으며, 이듬해 초 압류 절차의 일환으로 저택에 대한 lis pendens(소송 계속 사실 공시)가 제기되었다. 미국 독립 혁명 딸들은 1903년 2월 저택 기금 마련을 위한 위원회를 구성했고, 예산 및 분배 위원회는 그해 5월 공원 조성을 승인했다. 당시 소유주였던 릴리 얼은 처음에는 시에 저택 판매를 꺼렸지만, 나중에는 시나 역사 단체에 팔 의향을 밝혔다. 결국 시는 1903년 7월 235에 저택을 구입했다. 매각 후, 리얼티 보호 회사는 릴리가 저택 판매가의 10%를 지불하기로 한 약속을 어겼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부지는 약 6260.83m2로 축소되었고 세 면이 옹벽으로 둘러싸였다. 로저 모리스 공원은 1903년 12월 28일에 일반에 공개되었으며, 저택 정문 옆에는 청동 현판이 설치되었다.
미국 독립 혁명 딸들은 1904년 3월 박물관 운영을 위해 워싱턴 본부 협회(Washington Headquarters Association, WHA)를 결성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조상이 워싱턴 휘하에서 싸웠다는 이유로 박물관 운영 자격이 있다고 주장했다. 자매 단체인 미국 독립 혁명 아들들은 박물관 운영에 대한 경쟁 입찰을 제출했지만 나중에는 딸들에게 재정 지원을 제공하기로 동의했다. 아메리카 식민지 부인회도 딸들보다 더 책임감이 있다고 주장하며 입찰을 제출했다. 뉴욕 주 의회가 박물관 운영권을 식민지 부인회와 딸들 모두에게 부여하는 경쟁 법안을 통과시키는 분쟁이 발생한 후, 공원 위원 존 J. 팔라스가 분쟁 조정을 위해 임명되었다. 타협안으로 벤자민 오델 주지사는 그해 5월에 법안에 서명하여 공원부가 저택 운영권을 두 단체 중 하나에 넘길 수 있도록 했다. 1904년 11월 청문회 후, 팔라스는 1905년에 저택의 소유권이 공원부에 있다고 판결했다. 딸들은 팔라스의 결정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지만, WHA는 여전히 박물관을 운영하도록 허용되었다.
1905년 4월, WHA는 모리스-주멜 저택을 복원할 계획을 발표했다. 시의회는 100의 자금을 지원했다. 협회는 원래 식민지 양식의 건축적 세부 사항을 복원하고, 오래된 벽난로를 개방하고, 주멜 가문과 얼 가문의 가구 일부를 전시하고, 저택 주변의 정원을 조경할 계획이었다. 다른 변경 사항으로는 지하실의 새로운 나무 바닥, 저택의 헛간 중 하나가 있던 부지에 꽃 정원, 그리고 저택 동쪽에 아버가 있었다. 저택은 복원 공사가 완료되기 전에도 조지 워싱턴 탄생일 기념 행사와 같은 행사를 주최했다. 모리스-주멜 저택 박물관은 복원 공사가 완료된 후 1907년 5월 29일에 공식적으로 개관했다. 미국 남북 전쟁 참전 용사인 케이디 브라우넬이 박물관의 첫 번째 관리인이었다.
박물관 운영 초기 몇 년 동안 WHA는 매년 두 번의 행사를 저택에서 개최했으며, 1910년대 초반까지 박물관은 연간 3만 명 이상의 방문객을 유치했다. 모리스-주멜 저택은 당시 워싱턴 하이츠에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저택 중 하나였으며, 이 지역의 다른 대형 별장들은 대부분 철거되고 있었다. 저택은 현재 뉴욕 지하철과 암스테르담 애비뉴 노면 전차를 통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뉴욕 시의 경계 안에 있었다. 1913년에는 저택의 원래 정문과 디자인이 유사한 식민지 양식의 정문이 20의 비용으로 설치되었다. 이듬해에는 3층 일부가 전시 공간으로 개방되었다. WHA는 1915년 시의회에 저택을 워싱턴 본부로 명명해 달라고 청원했지만, 당시 저택에는 공식적인 이름이 없었으며, 저택은 개명되지 않았다. 역사학자 레지날드 펠햄 볼턴은 다음 해에 저택의 원래 주방 일부를 발견했다.
1920년대 박물관의 큐레이터였던 윌리엄 헨리 쉘턴은 많은 방문객들이 미국 서부와 미국 중서부 (혁명 전쟁 시대의 구조물이 거의 또는 전혀 없는 지역)에서 왔으며, 교사와 프랑스어 사용자들이 박물관을 선호한다고 보고했다. 헤럴드 스테이츠먼은 박물관이 어퍼 맨해튼에서 가장 인기 있는 역사 유적지 중 하나라고 보도했다. 1922년에 저택이 재도색되고 개조되었으며, 현관 기둥과 저택 동쪽 부분의 입구가 재건되었다. 1924년, 주멜 저택 복원 위원회는 찰스 A. 플랫의 저택 개조 계획을 승인했다. 이 프로젝트에는 난방 장비를 위한 새로운 벽돌 건물이 포함되었다. 이 프로젝트에는 새로운 조경과 복원된 주방도 포함되었다. 이 프로젝트는 1925년까지 115의 비용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되었으며, 정문의 원래 디자인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에 개조 계획이 지연되었다.
1930년대 초까지 이 집은 아직 개조되지 않았지만, 1932년 조지 워싱턴의 200번째 생일을 기념하여 다시 페인트칠을 했다. 뉴욕시 공원 및 레크리에이션부(NYC Parks)는 1934년에 이 집의 추가 개조를 계획하고, 사업 진척 관리국(WPA) 인부들을 고용하여 이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개조 공사는 그 해 9월에 시작되었다. 이 프로젝트를 통해 동쪽에 지하실로 이어지는 계단과 집 서쪽 절반에 아레아웨이가 추가되었다. 1층의 북동쪽 모퉁이에 있던 주방은 철거되었다. 또한 새로운 정원, 길, 배수관, 홈통 돌, 파티오가 건설되었다. 지하실 주방은 18세기 모습으로 복원되었으며, 식민지 시대 어린이들의 물건을 전시하는 전시관이 추가되었다. 미국 독립 혁명 딸들도 4개의 방을 개조했다; 딸들의 4개 지부 각각이 다른 방을 담당했다. 이 집은 1936년 10월에 재개장 했으며 한 달 만에 800명의 방문객을 기록했다. WHA는 1939년에 저택 밖에 새로운 깃발을 헌정했다.
20세기 중반에는 이 집이 모리스 저택과 주멜 저택으로 다양하게 불렸다. 낸시 맥클레랜드는 1945년에 호프스타터스 앤 선즈와 왓슨 앤 콜린스의 지원을 받아 내부를 복원하기 위해 고용되었다. 이 집의 전시물은 모리스 가문의 소지품이 1층에, 주멜 가문의 소지품이 2층에 전시되도록 재배치되었다. 벽지와 같은 시대 가구와 비품이 집 전체에 설치되었다. 식당과 뒷쪽 응접실의 복원은 1945년 6월에 완료되었으며, 전체 복원은 10월에 완료되었다. 저택은 그 다음 10년 동안 좋은 상태를 유지했으며 1960년대에는 국가 및 시 랜드마크로 지정되었다. 그 당시, 이 집에 유령이 출몰한다는 소문이 끊이지 않았다.
1970년대에는 엘리자 주멜에 관한 일련의 책들이 출판된 후, 이 박물관은 연간 2만 명의 방문객을 맞이했다. 당시 박물관 큐레이터였던 르로이 캠벨 부인은 방문객 대부분이 주멜의 삶에 대한 관심 때문에 저택을 찾았다고 말했다. 1976년 미국 건국 2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이 집을 방문한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를 포함한 방문객들이 있었다. 1980년대 초까지 이 집의 9개 방이 일반에 공개되었다. 이사회가 다시 낡아진 이 집의 복원을 위한 기금을 모금하고 있었다. 이 집은 1987년에 뉴욕 주 정부로부터 200의 보존 기금을 받았다. 주변 지역의 높은 범죄율에도 불구하고, 1980년대 후반에 저택의 큐레이터는 여러 보안 조치 덕분에 박물관이 범죄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는다고 말했다. 모리스-주멜 저택은 1989년에 설립된 역사적 주택 신탁(Historic House Trust)의 창립 멤버 중 하나였다.
모리스-저멜 저택의 외관은 1990년부터 광범위한 개조 공사를 거쳤다. 1986년에 저택의 상태 조사를 위해 고용되었던 얀 히르드 포코르니 건축가가 저택 복원을 위해 다시 고용되었다. 구조 개선 공사는 600의 비용 중 4분의 3을 차지했다. 포코르니 회사는 옛 사진을 참고하여 난간, 박공창, 창문과 같은 건축 세부 사항을 교체하며 구조물을 19세기 모습으로 복원했다. 1930년대에 지어진 외관 계단 중 하나는 메워졌다. 20세기 말 무렵, 저택과 주변 지역은 유럽 및 일본 관광객을 태운 버스들이 자주 드나들면서 지역 주민들의 불만을 샀다. 당시 12개의 방이 전시되어 있었다. 2000년대 초반에 페인트가 벗겨지기 시작하고 지붕에서 물이 새며 일부 장식 요소가 훼손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2002년에 저택을 다시 칠하고 창문을 교체했다.
2013년, 한 인턴이 저택 다락방을 청소하던 중 1775년 올리브 가지 청원서 초안을 발견했다. 박물관은 당시 350 규모의 개조 공사를 계획하고 있었고, 관장인 캐롤 워드는 재정 기금 마련을 위해 올리브 가지 청원서 원고를 판매하려 했다. 원고는 결국 912500USD 이상에 판매되었다. 2014년, 워드는 저택 250주년을 기념하여 개조 공사 및 교육 프로그램 마련을 위해 250를 모금할 계획이라고 발표했다. 그 해 박물관에는 1만 7,000명의 방문객이 찾아왔으며, 그 중 학생은 절반도 되지 않았다. 워드는 맨해튼 자치구장 사무실 등으로부터 1.2의 자금을 확보했지만, 뉴욕시 공원국은 개조 공사를 시작하기 전에 1.5를 더 모금하기를 원했다. 이 프로젝트에는 지붕 및 앞 발코니 개조, 가구 수리 및 구입 등이 포함될 예정이었으며, 이는 1775년 원고 판매로 얻은 700로 부분적으로 자금을 조달할 예정이었다.
2015년 브로드웨이 뮤지컬 해밀턴이 개봉한 후 박물관의 인기가 높아졌다. 워드는 2016년에 뮤지컬로 인해 박물관 방문객이 75% 증가했을 것으로 추산했다. 엘리자 주멜의 침실과 응접실은 2020년대 초에 복원되었다. 역사 주택 신탁은 2021년 11월에 개조 공사를 위해 2.7를 확보했다고 발표했다. 그 당시 개조 비용은 인플레이션과 추가 문제 해결의 필요성으로 인해 증가했다. 저택은 훼손되고 있었다. 외관의 페인트가 벗겨지고 2022년 말에는 현관 기둥 중 하나가 붕괴되었다. 2023년 말 뉴욕 타임스는 저택의 상태가 너무 좋지 않아 "손으로 만지기만 해도 손바닥에 축축하고 쪼개진 나무 사이딩 덩어리가 묻어 나올 정도"라고 묘사했다.
3.2. 20세기 박물관 운영
1899년부터 뉴욕 시 정부가 저멜 저택을 매입하여 박물관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요구가 있었다. 이러한 계획의 지지자로는 잡지 The Spirit of '76의 편집자, 미국 경관 및 역사 보존 협회, 미국 독립 혁명 딸들(Daughters of the American Revolution), 미국 독립 혁명 아들들(Sons of the American Revolution) 등이 있었다. 당시 이 저택은 프라운시스 타번 및 세인트 폴 채플과 함께 조지 워싱턴과 관련된 맨해튼에 남아있는 세 곳의 건물 중 하나로 여겨졌다. 시의 공공 개선 위원회는 1900년 3월 이 계획을 처음 검토했고, 같은 해 9월에는 맨해튼 공원부(뉴욕시 공원 및 레크리에이션부의 전신, 이하 NYC Parks)에 저택 부지를 지도에 표시하도록 요청했다. 처음에는 매입에 반대했지만, 공공 개선 위원회는 1901년 3월 매입에 찬성표를 던졌다. 다음 달 위원회는 150에 저택을 구매하는 제안을 승인했으나, 매각은 즉시 이루어지지 않았다.
뉴욕 시 의회는 1901년 12월 저택과 주변 부지를 공원으로 전환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세스 M. 밀리켄은 1902년 5월 저택에 대한 30의 모기지를 압류하려 했고, 다음 해 초 압류 절차의 일환으로 저택에 대한 lis pendens(소송 계속 사실의 공시)가 제기되었다. 미국 독립 혁명 딸들은 1903년 2월 저택 기금 마련을 위한 위원회를 구성했으며, 예산 및 분배 위원회는 같은 해 5월 공원 조성을 승인했다. 당시 소유주였던 릴리 얼은 처음에는 시에 저택 판매를 원치 않았으나, 나중에는 시 또는 역사 단체에 판매할 의향을 밝혔다. 시는 1903년 7월 235에 저택을 구입했다. 판매 후 리얼티 보호 회사는 릴리가 회사에 판매 가격의 10%를 지불하기로 한 합의를 어겼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부지는 약 6260.83m2로 축소되었고 세 면이 옹벽으로 둘러싸였다. 로저 모리스 공원은 1903년 12월 28일에 일반에 공개되었고, 저택 정문 옆에 청동 현판이 설치되었다.
미국 독립 혁명 딸들은 1904년 3월 박물관 운영을 위해 워싱턴 본부 협회(WHA)를 결성했으며, 조상들이 워싱턴 휘하에서 싸웠다는 이유로 박물관 운영 권리를 주장했다. 자매 단체인 미국 독립 혁명 아들들도 운영권 경쟁 입찰을 제출했으나 나중에 딸들에게 재정 지원을 제공하기로 합의했다. 아메리카 식민지 부인회 역시 딸들보다 더 책임감 있다고 주장하며 입찰에 참여했다. 뉴욕 주 의회가 박물관 운영권을 식민지 부인회와 딸들 모두에게 부여하는 경쟁 법안을 통과시키면서 분쟁이 발생하자, 공원 위원 존 J. 팔라스가 분쟁 조정을 맡게 되었다. 타협안으로 벤자민 오델 주지사는 1904년 5월 법안에 서명하여 공원부가 두 단체 중 하나에 운영권을 넘길 수 있도록 했다. 1904년 11월 청문회 후, 팔라스는 1905년 저택 소유권이 공원부에 있다고 판결했다. 딸들은 이 결정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고, WHA는 박물관 운영을 허가받았다.
1905년 4월, WHA는 모리스-저멜 저택 복원 계획을 발표했다. 시의회는 100의 자금을 지원했다. 협회는 원래 식민지 양식의 건축 세부 사항 복원, 오래된 벽난로 개방, 주멜 및 얼 가문의 가구 일부 전시, 저택 주변 정원 조경 등을 계획했다. 지하실에는 새로운 나무 바닥이 깔렸고, 저택의 헛간이 있던 자리에는 꽃 정원이, 저택 동쪽에는 아버(덩굴 식물을 올리는 시설)가 설치되었다. 저택은 복원 공사 중에도 조지 워싱턴 탄생일 기념 행사 등을 개최했다. 모리스-저멜 저택 박물관은 복원 완료 후 1907년 5월 29일에 공식 개관했다. 미국 남북 전쟁 참전 용사인 케이디 브라우넬이 박물관의 첫 번째 관리인이 되었다.
박물관 운영 초기 몇 년간 WHA는 매년 두 차례 행사를 개최했으며, 1910년대 초반까지 연간 3만 명 이상의 방문객을 유치했다. 모리스-저멜 저택은 당시 워싱턴 하이츠에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저택 중 하나였으며, 이 지역의 다른 대형 별장들은 대부분 철거되고 있었다. 저택은 뉴욕 지하철과 암스테르담 애비뉴 노면 전차를 통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뉴욕 시 경계 안에 있었다. 1913년에는 저택의 원래 정문과 디자인이 유사한 식민지 양식의 정문이 20의 비용으로 설치되었다. 이듬해에는 3층 일부가 전시 공간으로 개방되었다. WHA는 1915년 시의회에 저택을 워싱턴 본부로 명명해 달라고 청원했지만, 당시 저택에는 공식적인 이름이 없었으며, 저택은 개명되지 않았다. 역사학자 레지날드 펠햄 볼턴은 다음 해에 저택의 원래 주방 일부를 발견했다.
1920년대 박물관 큐레이터였던 윌리엄 헨리 쉘턴은 많은 방문객이 미국 서부와 미국 중서부 (혁명 전쟁 시대 유적이 거의 없는 지역)에서 왔으며, 교사와 프랑스어 사용자들이 박물관을 선호한다고 보고했다. 헤럴드 스테이츠먼은 박물관이 어퍼 맨해튼에서 가장 인기 있는 역사 유적지 중 하나라고 보도했다. 1922년에 저택이 재도색되고 개조되었으며, 현관 기둥과 저택 동쪽 부분의 입구가 재건되었다. 1924년, 주멜 저택 복원 위원회는 건축가 찰스 A. 플랫의 저택 개조 계획을 승인했다. 이 계획에는 난방 장비를 위한 새로운 벽돌 건물 건설, 새로운 조경 및 복원된 주방이 포함되었다. 이 프로젝트는 1925년까지 115의 비용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정문의 원래 디자인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에 개조 계획이 지연되었다.
1930년대 초까지 저택은 아직 개조되지 않았지만, 1932년 조지 워싱턴 탄생 200주년을 기념하여 다시 페인트칠을 했다. 뉴욕시 공원 및 레크리에이션부(NYC Parks)는 1934년에 이 저택의 추가 개조를 계획하고, 사업 진척 관리국(WPA) 인부들을 고용하여 이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개조 공사는 그 해 9월에 시작되었다. 이 프로젝트를 통해 동쪽에 지하실로 이어지는 계단과 저택 서쪽 절반에 아레아웨이(건물과 보도 사이의 움푹 들어간 공간)가 추가되었다. 1층 북동쪽 모퉁이의 주방은 철거되었다. 또한 새로운 정원, 길, 배수관, 홈통 돌, 파티오가 건설되었다. 지하실 주방은 18세기 모습으로 복원되었으며, 식민지 시대 어린이들의 물건을 전시하는 공간이 추가되었다. 미국 독립 혁명 딸들도 4개의 방을 개조했는데, 각 지부가 다른 방을 담당했다. 저택은 1936년 10월에 재개장했으며 한 달 만에 800명의 방문객을 기록했다. WHA는 1939년에 저택 밖에 새로운 깃발을 헌정했다.
20세기 중반에는 이 저택이 모리스 저택 또는 주멜 저택으로 다양하게 불렸다. 낸시 맥클레랜드는 1945년 호프스타터스 앤 선즈와 왓슨 앤 콜린스의 지원을 받아 내부 복원을 위해 고용되었다. 저택의 전시물은 모리스 가문의 소지품이 1층에, 주멜 가문의 소지품이 2층에 전시되도록 재배치되었다. 벽지와 같은 시대 가구 및 비품이 저택 전체에 설치되었다. 식당과 뒷쪽 응접실의 복원은 1945년 6월에 완료되었으며, 전체 복원은 10월에 완료되었다. 저택은 이후 10년간 좋은 상태를 유지했으며 1960년대에는 국가 및 시 랜드마크로 지정되었다. 그 당시 이 저택에 유령이 출몰한다는 소문이 끊이지 않았다.
1970년대에는 엘리자 저멜에 관한 일련의 책들이 출판된 후, 박물관은 연간 2만 명의 방문객을 맞이했다. 당시 박물관 큐레이터였던 르로이 캠벨 부인은 방문객 대부분이 주멜의 삶에 대한 관심 때문에 저택을 찾았다고 말했다. 1976년 미국 건국 200주년을 기념하여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가 이 저택을 방문하기도 했다. 1980년대 초까지 저택의 9개 방이 일반에 공개되었다. 이사회가 다시 낡아진 저택의 복원을 위한 기금을 모금하고 있었다. 저택은 1987년에 뉴욕 주 정부로부터 200의 보존 기금을 받았다. 주변 지역의 높은 범죄율에도 불구하고, 1980년대 후반 저택 큐레이터는 여러 보안 조치 덕분에 박물관이 범죄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는다고 밝혔다. 모리스-저멜 저택은 1989년에 설립된 역사적 주택 신탁(Historic House Trust)의 창립 멤버 중 하나였다.
3.3. 21세기 박물관 운영
모리스-저멜 저택의 외관은 1990년부터 광범위한 개조 공사를 거쳤다. 1986년에 저택의 상태 조사를 담당했던 얀 히르드 포코르니 건축가가 복원을 위해 다시 고용되었다. 포코르니 회사는 옛 사진을 참고하여 난간, 박공창, 창문과 같은 건축 세부 사항을 교체하며 구조물을 19세기 모습으로 복원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이 구조 개선 공사는 총비용 600 중 4분의 3을 차지했다. 또한 1930년대에 지어진 외관 계단 중 하나는 메워졌다. 20세기 말 무렵, 저택과 주변 지역은 유럽 및 일본 관광객을 태운 버스들이 자주 드나들면서 지역 주민들의 불만을 사기도 했다. 당시 저택 내 12개의 방이 전시되고 있었다.
2000년대 초반에 들어서면서 페인트가 벗겨지기 시작하고 지붕에서 물이 새며 일부 장식 요소가 훼손되는 등 노후화 문제가 나타났다. 이에 따라 2002년에 저택을 다시 칠하고 창문을 교체하는 보수 작업이 이루어졌다.
2013년에는 저택 다락방을 청소하던 한 인턴이 1775년 올리브 가지 청원서의 초안을 우연히 발견하는 중요한 사건이 있었다. 당시 박물관은 350 규모의 개조 공사를 계획하고 있었고, 캐롤 워드 관장은 재정 기금 마련을 위해 이 역사적인 문서를 판매하기로 결정했다. 원고는 경매를 통해 912.5 이상에 판매되어 박물관 재정에 크게 기여했다. 이듬해인 2014년, 워드 관장은 저택 건립 250주년을 기념하여 개조 공사 및 교육 프로그램 마련을 위해 250를 추가로 모금할 계획이라고 발표했다. 그 해 박물관 방문객은 17,000명이었으며, 그중 학생은 절반 미만이었다. 워드 관장은 맨해튼 자치구장 사무실 등으로부터 1.2의 자금을 확보했지만, 뉴욕시 공원 및 레크리에이션부는 개조 공사를 시작하기 전에 1.5를 더 모금하기를 원했다. 계획된 개조 프로젝트에는 지붕 및 앞 발코니 개조, 가구 수리 및 구입 등이 포함되었으며, 이는 올리브 가지 청원서 판매 수익금 700으로 부분적으로 충당될 예정이었다.
2015년 브로드웨이 뮤지컬 해밀턴이 개봉하면서 박물관의 인기가 크게 높아졌다. 뮤지컬 내용 중 일부가 이 저택과 관련이 있어 대중의 관심이 증가한 것이다. 워드 관장은 2016년에 뮤지컬의 영향으로 박물관 방문객 수가 75%나 증가했을 것으로 추산했다.
2020년대 초에는 엘리자 주멜의 침실과 응접실이 복원되었다. 2021년 11월, 역사적 주택 신탁은 개조 공사를 위해 2.7를 확보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그 사이 인플레이션과 추가적인 문제들이 발견되면서 예상 개조 비용은 계속 증가했다. 저택의 노후화는 심화되어 외관의 페인트가 벗겨지고, 2022년 말에는 현관 기둥 중 하나가 붕괴되는 일까지 발생했다. 2023년 말 뉴욕 타임스는 저택의 상태가 매우 심각하여 "손으로 만지기만 해도 손바닥에 축축하고 쪼개진 나무 사이딩 덩어리가 묻어 나올 정도"라고 묘사하며 보존 상태에 대한 우려를 나타냈다.
4. 건축
(내용 없음 - 제공된 소스의 정보는 하위 섹션에서 상세히 다루어지므로 중복을 피하기 위해 본 섹션 내용은 생략합니다.)
4.1. 건축 양식
모리스-주멜 저택은 미국에서 팔라디안 건축의 초기 사례로 평가받는다. 《토론토 스타》는 이 저택이 북미 최초의 팔라디안 양식 구조물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저택을 누가 설계했는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저택의 원래 소유주였던 로저 모리스가 직접 설계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의 삼촌은 영국에서 성공한 건축가였다. 당시 지역의 목수와 석공들이 저택 건설에 참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저택의 외부 디자인은 16세기 이탈리아 건축가 팔라디오의 영향을 받았으며, 내부 구조는 조지 왕조 양식의 평면을 가지고 있다. 이후 1810년경 저멜 부부가 저택을 구입한 뒤 진행한 개조는 연방 양식으로 이루어졌는데, 연방 양식의 입구를 추가하고 내부는 엠파이어 양식으로 새롭게 단장했다. 20세기의 신문 기사들은 이 집이 조지 왕조 양식으로 설계되었다고 묘사하기도 했다.
뉴욕시의 다른 18세기 해안가 저택들이 강을 향해 뒷면을 두고 지어진 것과 달리, 모리스-주멜 저택은 할렘 강과 거의 평행한 북-남 방향으로 지어졌다. 또한 이 저택은 1811년 위원회 계획에 따라 뉴욕의 가로 구획이 정비되기 이전에 건설되었다. 모리스-주멜 저택은 맨해튼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주택으로 알려져 있으며, 저택 내부에 관리인 아파트가 있어 기술적으로는 여전히 주거용으로 사용되는 맨해튼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기도 하다. 《뉴욕 타임스》 역시 이 저택을 맨해튼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 중 하나로 소개한 바 있다.
4.2. 외부
모리스-저멜 저택은 미국 팔라디안 건축의 초기 사례 중 하나로 꼽힌다. 일부 자료에서는 북미 최초의 팔라디안 양식 건축물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저택의 설계자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나, 건축에 조예가 깊었던 로저 모리스 본인이 직접 설계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건축에는 당시 지역의 목수와 석공들이 참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외부 디자인은 16세기 이탈리아 건축가 팔라디오의 영향을 받았으며, 내부는 조지 왕조 양식의 평면 구조를 가진 것으로 평가된다. 1810년경 주멜 부부가 진행한 개조는 연방 양식을 따랐다.
저택은 1811년 위원회 계획으로 맨해튼의 격자형 도로망이 확립되기 전에 지어졌으며, 할렘 강과 거의 평행한 남북 방향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는 강을 등지고 지어진 당시 뉴욕시의 다른 해안가 저택들과는 다른 배치이다. 모리스-저멜 저택은 맨해튼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주택으로 알려져 있으며, 현재도 관리인이 거주하고 있어 주거용으로 사용되는 건물 중에서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간주된다.
저택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된다. 본채는 2층 반 높이이며, 반 층은 다락방으로 사용된다. 본채 뒤편에는 2층 높이의 팔각형 부속 건물이 있는데, 이곳에는 응접실이 있으며 미국 최초의 팔각형 방일 가능성이 있다. 이 부속 건물은 '하이픈(hyphen)'이라 불리는 짧은 통로로 본채와 연결된다. 본채의 크기는 가로 약 16.05m, 세로 약 11.73m이고, 하이픈은 약 약 2.44m x 약 1.83m이다. 뒤쪽 부속 건물의 폭은 약 약 6.40m에서 약 6.71m이고 깊이는 약 9.14m에서 약 9.75m 정도이다.
구조는 나무 골조로 이루어졌으며, 단열을 위해 외부 벽은 벽돌로 채워졌다. 약 0.61m가 넘는 두꺼운 벽돌 벽 위에는 러스티케이션 기법으로 마감된 흰색 나무 사이딩이 덮여 있다. 건물의 모서리는 수직 코인으로 장식되었고, 2층 높이에는 나무 벨트 코스가 수평으로 둘러져 있다. 본채의 동쪽 벽을 제외한 모든 외벽은 판자로 마감되었으며, 동쪽 벽과 원래의 북쪽 벽은 더 저렴한 셰잉글(shingle)로 덮여 있었다. 지하실 벽의 바닥 부분에는 폭 약 55.88cm의 돌 갓돌(water table)이 있다. 창문의 크기는 조금씩 다르며, 한 창문 유리에는 엘리자 저멜의 손자가 다이아몬드의 진위를 확인하기 위해 긁었다는 자국이 남아있다.
본채의 남쪽 정면에는 토스카나식 기둥 네 개가 받치고 있는 웅장한 2층 높이의 현관과 삼각형 박공이 특징이다. 초기 역사가들은 현관이 19세기에 추가되었다고 주장했으나, 실제로는 저택 본 건물과 함께 지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이 현관은 미국 독립 혁명 이전에 지어진 뉴욕시의 유일한 현관이라는 주장도 있다. 현관은 원래 수 마일 떨어진 뉴욕 만까지 조망할 수 있었으며, 집 너비의 절반 정도를 차지한다. 정문은 화려하게 조각된 출입구로 둘러싸여 있으며, 양옆에는 측창이 있고 위에는 반원형 채광창이 있는 아치가 있는데, 이 채광창은 주멜 가문이 추가한 것이다. 정문 바로 위 2층에는 프렌치 도어와 발코니가 설치되어 있다.
본채의 지붕은 힙 루프 형태이며 도머 창문이 설치되어 있다. 지붕 가장자리는 처마 장식과 치상 장식이 있는 코니스로 둘러싸여 있다. 지붕 일부는 평평하게 만들어져 난간으로 둘러싸여 있다. 팔각형 부속 건물 역시 힙 루프 형태이다. 비대칭적으로 배치된 굴뚝 세 개가 있는데, 본채의 동쪽과 서쪽 벽 위에 각각 하나씩, 그리고 부속 건물 위에 하나가 있다. 19세기 초에는 지붕에 빗물받이(gutter)가 설치되어 기존의 지하실 갓돌을 대체하게 되었다.
4.3. 내부
뉴욕 데일리 뉴스는 실내 면적이 약 약 1114.84m2라고 언급하는 반면, 뉴욕 시 도시 계획부는 건물의 총 바닥 면적을 약 451.51m2로 인용한다. 원래 내부는 조지안 양식의 레이아웃, 올드 잉글리시 스타일의 주요 홀, 그리고 빠른 건설 속도 때문에 비교적 단순한 디자인을 가지고 있었다. 이 레이아웃은 미국 독립 전쟁 이전에 지어진 다른 주택들과 유사하며 다양한 팔라디안 홀이 있다. 홀을 포함하여 원래 19개의 방이 있었다. 뉴욕 시 랜드마크 보존 위원회에 따르면 이 저택은 "미국에서 가장 훌륭한 조지안 양식의 인테리어 중 일부"를 가지고 있다. 내부에 대한 가장 초기의 기록은 1792년 뉴욕 데일리 애드버타이저(New York Daily Advertiser)에 게재된 광고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엘리자 저멜이 사망한 후 저택은 19세기 건축 양식의 디테일로 재장식되었고, 주방은 당구장으로 개조되었다.
모리스-저멜 저택이 박물관이 되었을 때, 모리스, 워싱턴, 저멜이 저택에 거주했을 당시의 장식을 반영하도록 다시 가구를 배치했다. 현대의 저택은 시대적 가구와 시대적 카펫 및 벽지의 세심한 복제품으로 장식되어 있다. 복원된 9개의 방이 있으며, 그 중 하나는 워싱턴의 서재였다. 식당과, 나폴레옹의 것이었다고 전해지는 침대가 있는 엘리자 저멜의 침실도 개방되어 있다. 모리스, 워싱턴, 저멜, 그리고 애런 버의 개인 소장품이 박물관 컬렉션의 일부이다. 저택 전체에 반타원형 아치와 몰딩된 처마 장식이 있다.
=== 지하실 ===
지하실은 단단한 암반을 파서 만들었으며, 약 0.30m 두께의 칸막이 벽이 있었다. 이곳에는 하인들의 침실과 주방이 있었다. 1792년 뉴욕 데일리 애드버타이저의 광고에는 주방, 세탁실, 포도주 저장고, 창고, 식료품 저장실, 하인 방, 유제품 보관실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작은 방들과 1층 및 집 마당으로 통하는 계단은 주방에서 연결되었다. 저택이 박물관이 되면서 지하실 일부는 집 관리인의 침실 1개짜리 아파트가 되었고, 그는 그곳에 무상으로 거주하고 있다.
주방의 원래 크기는 약 6.10m x 약 9.14m였다. 1760년대에 드물게 큰 방으로, 나무 바닥과 회반죽 천장이 있었다. 위층 바닥을 지탱하기 위해, 주방 너비를 가로질러 약 6.10m 길이의 빔이 방 중앙 위에 놓였다. 이것이 천장에 아직 보이는 유일한 나무 조각이다. 그런 다음 약 4.57m 길이의 빔 두 개가 이 빔 위에 놓여 양쪽 벽에 연결되었다. 주방 동쪽 벽에는 굴뚝이 있는 약 2.74m 너비의 벽돌 벽난로가 돌출되어 있다. 워싱턴 시대에는 냄비와 주전자가 동쪽 벽에서 서쪽 벽의 철제 피벗까지 뻗어 있는 철사에 걸려 있었고, 이는 다시 조리 도구를 위층으로 운반했다. 집이 완공된 후, 겨울에 주방을 따뜻하게 유지하기 위해 벽돌 칸막이가 추가되었다.
=== 1층 ===
--
정문은 남쪽 정면 중앙에 위치하며, 앞쪽의 현관과 뒤쪽의 본관으로 이어진다. 현관과 본관은 뒤쪽의 팔각형 부속 건물로 이어지는 단일 통로를 형성한다. 복도는 약 약 3.66m 너비이다. 통로의 양쪽에는 큰 방이 두 개씩 있다.
현관과 본관의 왼편(서쪽)에는 각각 응접실과 서재가 있다. 응접실은 때때로 리셉션 룸과 티룸이라고 불리며, 집의 남서쪽 끝 근처에 있다. 1901년의 자료에 따르면 응접실의 크기는 약 5.49m x 약 6.10m이다. 이 방은 패널로 된 창문 덮개, 6/6 미닫이 창문과 처마 장식으로 장식되어 있다. 또한 나무 벽난로 선반, 대리석 프레임 및 벽난로 난로가 있다. 이 벽난로는 당시의 유사한 주택과는 달리 오버맨틀이 없다. 북서쪽 끝에 있는 서재는 비슷한 장식적 디테일을 가지고 있지만, 벽난로의 난로는 사암으로 만들어졌다. 서재의 원래 용도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1792년 광고에서는 서재를 "특히 탁아소에 적합하고 적합하다"고 했다. 응접실과 서재의 벽난로에는 1827년경에 석탄을 태우기 위해 설치된 "호브 격자"가 있었다.
현관의 오른편(동쪽), 집의 남동쪽 끝에는 식당이 있다. 이 공간은 응접실과 비슷한 방식으로 설계되었다. 1901년 자료에 따르면 식당의 크기는 약 5.59m x 약 7.32m이다. 식당의 북쪽 벽에는 좁은 벽감과 동쪽 끝에 있는 집사가 사용하는 식료품 저장실로 이어지는 넓은 아치형 통로가 있다. 북동쪽 끝, 본관 복도의 오른편에는 본 계단으로 이어지는 작은 아치가 있다. 계단 자체는 조개 껍질 디자인의 계단판과 좁은 스핀들로 지지되는 난간을 가지고 있다. 계단은 90도 회전하는 두 개의 계단참에 의해 중단된다. 19세기 어느 시점에 계단과 본관을 분리하는 출입구가 있었는데, 이 출입구는 1916년 이전에 "수년" 전에 제거되었다. 계단 중간 지점에는 계단참이 있는데, 예전에는 집사의 식료품 저장실로 이어지는 문이 있었다.
뒤쪽의 팔각형 응접실에는 다른 방과 마찬가지로 패널로 된 덮개, 처마 장식, 6/6 미닫이 창문이 있다. 벽에는 집의 다른 곳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패널로 된 걸레받이도 있다. 저택이 완공될 당시 벽은 벽지로 장식될 예정이었다. 조지 워싱턴은 한때 팔각형 응접실을 본부로 사용했다. 한 설명에 따르면 200명의 아메리카 원주민이 이 방에 모여 워싱턴에게 화환을 바쳤다고 한다. 나중에 엘리자 저멜은 인생의 마지막 시기에 응접실에 가짜 손님을 "만나기" 위해 왕족의 대좌를 설치했다. 19세기 후반에는 금박을 입힌 흑단 가구와 24개의 팔을 가진 황동과 유리 샹들리에로 장식되었다. 1914년의 설명에 따르면 이 방은 루이 15세 양식으로 장식되었으며, 엠파이어 양식의 천장과 벽난로가 있었다. 20세기 후반에 응접실은 중국 벽지와 같은 18세기 후반의 디테일로 재장식되었다.
=== 2층 ===
1792년 뉴욕 데일리 애드버타이저 광고에 따르면 2층은 아마도 7개의 침실로 나뉘었을 것이다. 본관 2층의 중앙 부분은 1층과 마찬가지로 앞쪽과 뒤쪽 홀로 나뉜다. 북서쪽, 남서쪽, 남동쪽에 있는 방들은 이전에 침실로 사용되었으며, 팔각형 별관에도 또 다른 침실이 있다. 1945년 개조 공사를 거쳐 이 침실들은 엘리자 저멜, 메리 보웬, 아론 버, 조지 워싱턴의 소장품으로 재단장되었다.
앞쪽 홀의 남쪽 끝에는 팔라디안 창문이 있고, 프랑스식 문은 정면의 발코니로 이어진다. 침실은 벽난로, 몰딩된 처마 장식, 패널 처리된 셔터, 세 개의 창틀이 있는 창문 등 1층의 방과 유사하게 장식되어 있다. 엘리자 저멜의 침실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남동쪽 침실은 엠파이어 및 나폴레옹 스타일의 가구와 벽지로 장식되어 있다. 남서쪽 침실은 아론 버의 침실이었을 것이고, 북서쪽 침실은 메리 보웬의 침실이었을 것이다. 이 모든 방들은 각 거주자를 연상시키는 19세기 가구로 장식되어 있다. 별관의 침실은 원래 세 부분으로 나뉘었고 독립 전쟁 당시 워싱턴이 사용했다. 이 방에는 여러 개의 창문뿐만 아니라 화석이 박혀 있는 대리석 벽난로와 벽난로 선반이 있다.
=== 3층 ===
3층은 원래 객실로 사용되었으며, 1792년 광고에 따르면 5개의 객실이 있었다. 1916년에는 침실이 3개만 남았다. 그 중 하나는 벽난로가 있었지만 벽난로 선반은 없었으며, 아마도 하인들이 사용했을 것이다. 현재 이 저택의 3층에는 기록 보관소와 참고 도서관이 있다. 이 도서관은 모리스-저멜 저택 친구들에게만 개방된다.
5. 운영
모리스 저멜 주택은 현재 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뉴욕 시 공원 및 레크리에이션부가 소유하고 비영리 단체인 모리스-저멜 맨션 주식회사가 관리한다. 이곳에서는 역사적인 소장품을 전시하고 다양한 교육 및 문화 프로그램을 제공하여 방문객들에게 저택의 역사와 의미를 전달하고 있다.
5.1. 운영 주체
뉴욕 시 공원 및 레크리에이션부가 이 집을 소유하고 있다. 박물관은 1904년 워싱턴 본부 협회에 의해 설립된 비영리 단체인 모리스-저멜 맨션 주식회사에서 운영하고 있다. 이 단체는 저택을 운영하고 전시 및 소장품을 큐레이팅하는 데 전념하고 있다. 박물관은 보조금, 행사 수익, 입장료를 통해 대부분의 자금을 지원받는다. 2014년 기준으로 박물관의 연간 예산은 평균 250였다.
5.2. 소장품
박물관이 1907년 처음 문을 열었을 때, 소장품에는 조각된 다리가 있는 토머스 셰리던 소파, 주석 램프와 탱크드, 수제 조각된 4개의 포스터 침대 프레임, 19세기 여성용 캘러시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미국 독립 전쟁 당시 군인들의 오두막에서 가져온 바닥재와 화로 쇠붙이도 소장품의 일부였다. 1921년 기록에 따르면, 박물관은 동전, 총, 인쇄물, 의류, 도자기, 가구 등 18세기 말 유물과 함께 조지 워싱턴의 성경, 그리고 전쟁 관련 유물인 테이블, 구급 상자, 시계, 안장 가방, 대포 등을 전시하고 있었다. 엘리자 저멜이 사용했던 의류와 유물, 그리고 레지날드 펠햄 볼튼과 윌리엄 라니어 워싱턴의 소장품도 전시되었다. 당시 2층 침실은 저택에 거주했던 이전 사람들의 삶을 보여주도록 꾸며졌다.
시간이 흐르면서 박물관은 다양한 물건들을 추가로 확보했다. 아론 버가 소유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메이슨 앞치마와 그가 사용했던 책상 두 개와 의자 등이 대표적이다. 1940년대에는 전시 방식이 재정비되어, 1층에는 모리스 가문의 소지품과 셰리던 가구 등이 배치되었고, 2층에는 주멜 가문의 소지품과 함께 침대, 의자, 간이 침대, 금박 시계, 그리고 버의 책상, 편지, 옷 보관함과 같은 기념품들이 전시되었다. 일부 전시품은 다른 박물관에서 대여하거나, 엘리자 저멜의 침대처럼 개인 수집가로부터 빌려온 것도 있었다. 1층의 작은 방에는 저택 근처에서 발굴된 독립 혁명 시대 유물이, 지하실 주방에는 당시 사용했던 조리 도구들이 전시되었다. 1985년 뉴욕 타임스 기사에서는 나폴레옹의 샹들리에와 워싱턴의 세탁 목록 같은 흥미로운 유물도 언급되었다. 박물관은 20세기 후반에도 소장품을 꾸준히 늘려, 1989년에는 저택의 원래 장식이었던 금박 나무 독수리 날개 세 쌍을 다시 확보하기도 했다.
21세기 현재에도 모리스-저멜 저택은 로저 모리스, 조지 워싱턴, 엘리자 저멜, 아론 버 등 저택과 관련된 인물들이 사용했던 다양한 물건들을 소장하고 있다. 가구 소장품에는 토머스 셰리던, 토머스 치펜데일, 던컨 파이프와 같은 유명 디자이너의 작품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 외에도 도자기 컬렉션, 엘리자 저멜의 침대, 프랑스 벽지 등 다양한 유물들이 보존되어 저택의 역사를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5.3. 전시 및 프로그램
영구 소장품 외에도, 수년에 걸쳐 여러 임시 전시가 열렸다. 박물관 초창기에는 미국 독립 전쟁 시대의 유물 전시와 여성들이 제작한 물건 전시와 같은 전시회를 개최했다. 1940년대에는 조지 워싱턴과 관련된 기념품들을 전시했다. 1980년대에는 워싱턴 취임 200주년 기념 전시와 3층의 잡다한 유물 전시도 열렸다. 21세기에는 박물관에서 정기적으로 임시 전시회를 개최한다. 여기에는 2009년의 저택 자체의 역사에 대한 전시, 18세기와 19세기의 작품들을 전시한 2012년 전시, 그리고 워싱턴 하이츠의 역사적인 초상화 전시회인 2022년 전시가 포함되었다.
박물관은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해왔다. 20세기 초에는 연례 잔디밭 파티와 워싱턴 생일 기념 행사를 주최했다. 초기 박물관에서는 저택의 역사에 대한 강연, 워싱턴 본부 협회(Washington Headquarters Association영어) 및 미국 독립 혁명의 딸들의 회의와 같은 행사도 열렸다. 20세기 중반에는 워싱턴 200주년 기념 행사, 국기의 날 기념식, 미국 독립 전쟁 재연 등이 있었다. 저택은 1970년대에 오픈 하우스와 스토리텔링 시리즈를 주최했으며, 박물관 관계자는 1977년부터 결혼식과 바트 미츠바를 제외하고 방문객이 저택에서 파티를 열 수 있도록 허용하기 시작했다.
20세기 후반과 21세기 초에는 저택에서 정기적으로 강연, 콘서트 및 특별 전시회를 열었다. 1980년대와 1990년대의 행사로는 엘리자 주멜의 삶에 대한 연극, 인근 주민들의 "블록 사교 행사", 음식, 공예 및 음악 축제, 역사적인 저택 축제, "저택의 재즈" 축제, 부활절 달걀 찾기 등이 있었다. 2000년대와 2010년대에는 야외 재즈 콘서트, 초기 음악 축제, 그리고 건국의 아버지들의 요리를 주제로 한 저녁 식사를 주최했다. 과거 프로그램에는 모형 방 디자인을 위한 어린이 워크숍과 매주 토요일 워킹 투어가 포함되었다. 박물관은 또한 저택의 기념일 행사를 주최했다. 225주년 기념일은 결투, 콘서트, 스토리텔링 축제로 기념되었고, 2015년의 250주년 기념일은 할로윈 축제로 기념되었다.
현재 박물관은 자체적으로 여러 정기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예를 들어, 저택에 최대 5명의 유령(에런 버와 엘리자 주멜의 유령 포함)이 있다는 소문을 활용하여 유령 투어와 정기적인 "초자연 현상 조사"를 주최한다. 한 달에 한 번, 가족의 날 행사가 저택에서 열리며, 박물관은 온라인 "응접실 채팅"을 주최한다. 저택에서 워크숍이 열리며, 연극과 미술 전시회도 열린다.
6. 영향
(내용 없음 - 원본 소스가 제공되지 않았습니다.)
6.1. 평가
1881년, 뉴욕 타임스는 "이웃집과는 조금 다른 집을 가끔 보는 것은 즐거운 일"이라며 모리스-저멜 저택이 그러한 건물 중 하나라고 평가했다. 1885년 워싱턴 포스트의 한 기자는 저택 외관이 자주 덧칠되어 "150년이 아닌 50년 된 것처럼 보인다"고 언급하면서도, 입구 홀의 크기는 중간 크기의 헛간에 비유했다. 같은 신문은 1897년에 이미 이 집의 역사적 중요성을 언급했다. 조시아 콜린스 펌펠리는 1903년에 이 집이 "여전히 연방 초창기에 살았던 사람들의 취향과 야심 찬 열망을 보여주는 눈에 띄는 기념물로 남아있다"고 기술했다. 이듬해 버팔로 이브닝 뉴스는 얼 부부가 집을 상당히 개조했음에도 불구하고, 방들이 초기 건축의 예로 여전히 인식될 수 있다고 평가했다.
1921년 크리스천 사이언스 모니터는 저택 설계에서 건축가의 솜씨가 드러난다고 썼고, 1925년 체슬라 셜록은 "내부는 매우 흥미롭고 일반적인 식민지 저택보다 세부적인 면에서 더 완벽함을 보여준다"고 평가했다.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의 건축가 중 한 명인 윌리엄 F. 램은 이 저택을 "뉴욕에서 가장 인상적인 광경 중 하나"라고 칭했다. 1936년 '더 스퍼(The Spur)'의 기자는 "방문객은 단순히 건물이 아니라 뉴욕의 그리운 과거의 기억으로 따뜻한 구조물을 보게 된다"고 말했으며, 1945년 크리스천 사이언스 모니터의 평론가는 이 집이 "가을의 부드러운 황금빛 속에서 튼튼하고 자애롭게 서 있다"고 묘사했다. 1987년 뉴욕 타임스 기사는 이 집을 "유쾌한 앙클라브"의 중심이라고 묘사했고, 워싱턴 포스트는 "시간과 장소에 대한 감각을 모두 잃을 수 있는 곳 중 하나"라고 불렀다. 2001년 또 다른 뉴욕 타임스 기자는 이 집을 "기분 좋게 초라한 신사풍의 식민지 더미"라고 표현했다. 길 건너에 살았던 재즈 음악가 듀크 엘링턴은 이 저택을 인근 맨해튼 슈가 힐 지역을 언급하며 "슈가 힐의 왕관"이라고 불렀다.
박물관 소장품에 대한 평가도 이어졌다. 1968년 뉴욕 데일리 뉴스는 엘리자 저멜의 생활 방식이 가구, 크리스탈, 도자기에서 잘 드러난다고 평가했다. 2003년 뉴욕 타임스 기자는 박물관이 워싱턴 하이츠의 다른 명소들 사이에서 "가치 있는 우회로"라고 언급했다. 월 스트리트 저널은 2014년에 이 저택을 "맨해튼에서 가끔 간과되는 문화적 보석" 중 하나라고 불렀으며, 뉴욕 타임스는 2018년에 박물관이 이 집의 17세기 특징을 잘 유지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2022년 인사이더의 한 기자는 입구에 현대식 링 초인종이 설치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집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고 썼다.
모리스-저멜 저택의 역사적 중요성은 일찍부터 인정받았다. 1914년 뉴욕시 미술 위원회는 카메라가 흔하지 않던 시절에 저택을 포함한 시의 주목할 만한 장소들을 촬영했다. 1930년대에는 역사적 미국 건축 조사의 일부로 기록되었으며, 뉴욕주 교육부는 1935년 건물의 역사를 요약한 표지판 두 개를 저택 밖에 설치했다. 1961년에는 국립 역사 랜드마크로 지정되어 최초의 랜드마크 중 하나가 되었다. 1966년 10월 15일, 1966년 국립 역사 보존법 발효와 함께 국립 사적지 등록재에 등재되었다. 외부 건물은 1967년에 뉴욕시 랜드마크로 지정되었고, 1970년에는 시에서 지정한 저멜 테라스 역사 지구의 일부가 되었다. 1973년에는 같은 이름의 국립 사적지 등록재(NRHP) 지구에도 추가되었다.
1975년, 뉴욕시 랜드마크 보존 위원회(LPC)는 연방 홀의 로툰다, 모리스-저멜 저택, 그리고 바토-펠 저택 내부의 랜드마크 지정 여부를 결정하기 위한 청문회를 개최했다. LPC는 1975년 5월 26일에 세 건물 내부를 모두 랜드마크로 지정했으며, 뉴욕시 추산 위원회는 같은 해 7월 이 지정을 비준했다. 이 지정을 통해 모리스-저멜 저택의 1층과 2층이 보호받게 되었다.
6.2. 미디어
모리스 저멜 주택은 19세기 초부터 소설, 시, 텔레비전 프로그램 등 다양한 대중 매체에 등장했다.
1821년, 제임스 페니모어 쿠퍼의 소설 스파이에 등장하는 저택의 영감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19세기에는 시인 피츠-그린 할렉이 하렘 강이 내려다보이는 저택 근처의 바위 노두에서 그리스 애국자 마르코 보차리스에 대한 시를 썼다. 1924년에는 루퍼트 휴즈의 소설 황금 사다리가 부분적으로 이 저택을 배경으로 삼았다.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도 저택이 소개되었다. 1996년에는 밥 빌라가 진행하는 A&E 네트워크의 프로그램 밥 빌라의 미국 역사적인 집 가이드에서 특집으로 다루어졌다. 2014년에는 초자연 현상을 다루는 프로그램 고스트 어드벤처스가 이곳에서 에피소드를 촬영했고, 2019년에는 코미디 프로그램 브로드 시티의 한 장면이 이 저택에서 촬영되었다.
현대 대중문화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2015년 작곡가이자 배우인 린-마누엘 미란다는 이곳에서 영감을 받아 뮤지컬 해밀턴의 일부를 작곡했다.
저택 자체나 관련 유물들이 다른 전시회에 등장하기도 했다. 1952년 뉴욕 역사 협회는 뉴욕시의 남북 전쟁 이전 주택을 주제로 한 전시회에서 이 저택을 포함시켰다. 1976년에는 로드 앤 테일러 빌딩의 한 방이 저택의 방과 유사한 가구로 장식되어 전시되었고, 1979년에는 저택의 유물이 1095 애비뉴 오브 아메리카스 로비에 전시되기도 했다.
수년에 걸쳐 저택은 여러 역사 연구의 대상이 되었으며, 1916년 윌리엄 헨리 셸턴이 저택의 역사를 상세히 기록한 책을 출판하는 등 관련 서적도 출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