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미요시 모토나가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미요시 모토나가는 센고쿠 시대의 무장으로, 미요시 씨의 총수였다. 1526년 호소카와 다카쿠니를 몰아내고 사카이 공방을 수립하는 데 기여하며 세력을 확장했으나, 이후 주군 호소카와 하루모토와 대립하다가 1532년 잇코잇키 군의 공격을 받아 자결했다. 그는 가쓰라가와 전투와 다이모쓰 붕괴 등 주요 전투에서 활약했으며, 그의 죽음은 미요시 씨 몰락의 시작을 알렸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미요시씨 - 미요시 요시쓰구
    미요시 요시쓰구는 미요시 나가요시의 조카이자 양자로서 미요시 가문의 후계자가 되었고, 아시카가 요시테루를 살해하는 사건에 가담했으나, 오다 노부나가에 대항하다 패배하여 자결했다.
  • 미요시씨 - 도요토미 히데쓰구
    도요토미 히데쓰구는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인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카이자 양자로서 후계자로 지명되어 관백의 자리에 올랐으나, 히데요시와의 관계 악화로 모반 혐의를 받아 자결하고 일족이 몰살당했으며, 포악한 인물로 알려졌으나 최근에는 문무를 겸비한 유능한 인물이라는 재평가도 있다.
미요시 모토나가
기본 정보
미요시 모토나가 이미지 (견성사 소장)
미요시 모토나가 이미지 (견성사 소장)
이름미요시 모토나가
다른 이름나가모토, 지쿠젠노카미
법명가이운
묘소오사카부사카이시사카이구 슈쿠인초히가시의 겐본지
생애
시대전국 시대
출생분키 원년 (1501년)
사망교로쿠 5년 6월 20일 (1532년7월 22일)
가명모토나가 → 가이운 (법명)
가문
씨족미요시 씨
부모아버지: 미요시 나가히데(이설로는 미요시 유키나가)
형제자매모토나가, 야스나가
배우자정실: 게이슌인(출자 불명)
자녀나가요시, 지쓰큐, 아타기 후유야스, 소가 가즈나리, 노구치 후유나가, 딸 (오가사와라 나리마스 실), 딸 (오가사와라 모토타케 실), 딸 (오니시 요리타케 실), 딸 (아쿠타가와 마고주로 실)
관직 및 역할
막부무로마치 막부야마시로슈고다이
주군호소카와 하루모토

2. 생애

분키 원년(1501년)에 미요시 유키나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에이쇼 17년(1520년), 아버지 유키나가가 호소카와 다카쿠니에게 패배하여 처형당하고, 그 세자였던 나가히데는 그 이전에 전사했다. 이 때문에 유키나가의 직계였던 모토나가가 미요시 가문의 새로운 총수가 되었지만, 다카쿠니에게 반격을 하지 못한 채 아와국에서 유키나가가 옹립했던 주군 호소카와 스미모토의 어린 아들 로쿠로(후의 호소카와 하루모토)와 함께 은거하고 있었다.

쇼군으로 복귀한 아시카가 요시타네와의 불화에 빠졌지만, 새로운 쇼군으로 아시카가 요시하루를 옹립함으로써 여전히 탄탄함을 유지했던 다카쿠니의 독재 정권에, 다이에이일본어 6년(1526년) 7월에 호소카와 타다카타의 참언으로 코자이 모토모리를 주살한 일로 인해 균열이 생겼다. 아무런 근거 없는 상의 처형에 모토모리의 형제인 하타노 모토키요와 야나기모토 겐지가 탄바국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다카쿠니의 정권은 진압에 실패하며 군사력의 약점을 드러냈다.

이를 호기로 여긴 모토나가 등은, 같은 해 10월에 아와국에서 거병했다. 아시카가 요리츠나 (요시하루의 형제)를 옹립하여 다카쿠니 군에 도전하는 주군인 호소카와 로쿠로를 도와 기나이까지 진군하여 해를 넘겼다. 다카쿠니에게 반란을 일으킨 하타노 군과의 합류를 이루자, 다이에이일본어 7년(1527년) 3월에는 다카쿠니와 요시하루의 연합군과 격돌하여 이를 격파(가쓰라가와 전투)하고 다카쿠니 등을 오미국으로 추방하여 입장을 역전시켰다.

이후, 도망으로 인해 정치 기능을 상실한 다카쿠니 정권을 대신하기 위해 사카이 공방 (사카이 다이쥬일본어)의 수립에 기여했다. 같은 해 11월 19일에는, 오미국의 롯카쿠 사다요리에치젠국아사쿠라 소테키 등의 도움을 받아, 사카이 공방파의 구축을 꾀하는 다카쿠니 군을 가쓰라가와 주변의 센조지 (카와카츠지일본어)에서 격퇴하여, 호소카와 로쿠로에 의한 새로운 기나이 지배 체제를 확립하기 위해 진력했다.

1528년 7월, 그동안의 공적에 의해 야마시로 슈고다이에 임명되었으나, 이듬해 1529년에는 새로 동료가 된 야나기모토 겐지, 마쓰이 무네노부 등과 사이가 나빠져서 아와 국으로 물러났다.

그동안 이세 국의 기타바타케 하루토모(다카쿠니의 딸과 결혼)와 하리마 슈고다이 우라가미 무라무네의 지원을 얻어 다시 군사를 일으킨 호소카와 다카쿠니 군이 중앙 진출을 위한 기반을 다지기 위해 하리마 국내 각지를 전전하며 승리하고 있었다. 1530년 6월, 하리마 국으로 요격을 위해 파견된 야나기모토 겐지가 급사(암살설도 있음)하면서, 다카쿠니와 무라무네의 연합군에게 8월에 셋쓰로의 침공을 허용하는 등, 모토나가가 없는 사카이 공방 파는 전황이 악화되어, 결국 야쿠시지 구니모리와 같이 다카쿠니 군에게 항복하는 자가 나타나는 등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1531년 2월, 호소카와 로쿠로의 간청으로 모토나가는 복귀했지만, 상황은 절박했다. 하리마 국으로부터 진격을 계속해온 호소카와 다카쿠니와 우라가미 무라무네의 연합군에게 고전을 면치 못했기 때문에, 이듬해 3월에는 사카이 공방 파에서 가와치 국에서 새롭게 가담한 기자와 나가마사가 교토의 방비를 포기하고 철수했기 때문에, 다카쿠니 군의 교토 탈환을 허용하고 말았다.

사카이 공방을 타도하려는 다카쿠니 군에게 셋쓰 남부까지 육박당한 궁지에 처해, 아와 국으로부터 원군 8,000명을 얻어, 다카쿠니 군의 선봉에 공격을 가했다. 그러나 원군을 더했음에도 불구하고, 사카이에 있는 아시카가 요시쓰나를 지키기 위한 전력을 절반 이상이나 할애하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에, 다카쿠니 군과 정면으로 대치하기에는 부족했고, 모토나가의 수완에 의존해야 했다. (나카시마 전투)

전황은 전선의 교착화를 초래했다. 같은 해 6월, 다카쿠니 군의 증원으로 나타난 아카마쓰 마사스케의 배신으로 상황이 진전되어, 다카쿠니 군을 괴멸시켰다.(다이모쓰 붕괴)

호소카와 다카쿠니를 제거한 후, 호소카와 하루모토아시카가 요시하루의 화해 문제를 두고 대립했다. 기자와 나가마사, 미요시 마사나가(소산) 등과의 갈등으로 입지가 약화되었다.[1] 1532년 1월, 야나기모토 진지로를 독단적으로 토벌하여 하루모토의 분노를 샀고, 출가하여 가이운(海雲)이라 칭했다.[1] 하타케야마 요시타카와 연합하여 기자와 나가마사의 이모리야마성을 포위했으나, 하루모토의 철병 요청으로 한 차례 물러났다.

이모리야마성 모형 (다이토시 역사민속자료관 소장)


1532년 5월, 이모리야마성을 재포위했으나, 6월 잇코잇키 군의 기습을 받아 패배했다. 1532년 6월 20일, 겐폰지(법화종)에서 잇코잇키 군에 포위되어 자결했다. 향년 32세.[1] 그의 자결은 할복 후 자신의 내장을 천장에 던지는 처절한 모습이었다고 전해진다.[1]

모토나가의 묘

2. 1. 초기 생애와 가문의 위기 (1501년 ~ 1520년)

분키 원년(1501년), 미요시 유키나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에이쇼 17년(1520년), 아버지 유키나가가 호소카와 다카쿠니에게 패배하여 처형당하고, 그 세자였던 나가히데는 그 이전에 전사했다. 이 때문에 유키나가의 직계였던 모토나가가 미요시 가문의 새로운 총수가 되었지만, 다카쿠니에게 반격을 하지 못한 채 아와국에서 유키나가가 옹립했던 주군 호소카와 스미모토의 어린 아들 로쿠로(후의 호소카와 하루모토)와 함께 은거하고 있었다.

2. 2. 거병과 정권 탈취 (1526년 ~ 1527년)

분키일본어 원년(1501년)에 태어났다.

에이쇼일본어 17년(1520년), 미요시 씨의 총수였던 유키나가는 호소카와 다카쿠니에게 패배하여 처형되었고, 그 세자였던 나가히데는 그 이전에 전사했다. 이 때문에 유키나가의 직계였던 모토나가가 미요시 씨의 새로운 총수가 되었지만, 다카쿠니에게 반격을 하지 못한 채 아와국에서 유키나가가 옹립했던 주군인 호소카와 스미모토의 유아인 로쿠로(후의 하루모토)와 함께 칩거하고 있었다.

쇼군으로 복귀한 아시카가 요시타네와의 불화에 빠졌지만, 새로운 쇼군으로 아시카가 요시하루를 옹립함으로써 여전히 탄탄함을 유지했던 다카쿠니의 독재 정권이었지만, 다이에이일본어 6년(1526년) 7월에 호소카와 타다카타의 참언으로 코자이 모토모리를 주살한 일로 인해 균열이 생겼다. 아무런 근거 없는 상의 처형에 모토모리의 형제인 하타노 모토키요와 야나기모토 겐지가 탄바국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다카쿠니의 정권은 진압에 실패하며 군사력의 약점을 드러냈다.

이를 호기로 여긴 모토나가 등은, 같은 해 10월에 아와국에서 거병했다. 아시카가 요리츠나 (요시하루의 형제)를 옹립하여 다카쿠니 군에 도전하는 주군인 호소카와 로쿠로를 도와 기나이까지 진군하여 해를 넘겼다. 다카쿠니에게 반란을 일으킨 하타노 군과의 합류를 이루자, 다이에이일본어 7년(1527년) 3월에는 다카쿠니와 요시하루의 연합군과 격돌하여 이를 격파(가쓰라가와 전투)하고 다카쿠니 등을 오미국으로 추방하여 입장을 역전시켰다.

더욱이, 도망으로 인해 정치 기능을 상실한 다카쿠니 정권을 대신하기 위해 사카이 공방 (사카이 다이쥬일본어)의 수립에 기여했다. 같은 해 11월 19일에는, 오미국의 롯카쿠 사다요리에치젠국아사쿠라 소테키 등의 도움을 받아, 사카이 공방파의 구축을 꾀하는 다카쿠니 군을 가쓰라가와 주변의 센조지 (카와카츠지일본어)에서 격퇴하여, 호소카와 로쿠로에 의한 새로운 기나이 지배 체제를 확립하기 위해 진력했다.

2. 3. 일시 퇴각과 기나이 복귀 (1528년 ~ 1531년)

1528년 7월, 그동안의 공적에 의해 야마시로 슈고다이에 임명되었으나, 이듬해 1529년에는 새로 동료가 된 야나기모토 겐지, 마쓰이 무네노부 등과 사이가 나빠져서 아와 국으로 물러났다.

그동안 이세 국의 기타바타케 하루토모(다카쿠니의 딸과 결혼)와 하리마 슈고다이 우라가미 무라무네의 지원을 얻어 다시 군사를 일으킨 호소카와 다카쿠니 군이 중앙 진출을 위한 기반을 다지기 위해 하리마 국내 각지를 전전하며 승리하고 있었다. 그 하리마 국으로 요격을 위해 파견된 야나기모토 겐지가 1530년 6월 급사(암살설도 있음)하면서, 다카쿠니와 무라무네의 연합군에게 8월에 셋쓰로의 침공을 허용하는 등, 모토나가가 없는 사카이 공방 파는 전황이 악화되어, 결국 야쿠시지 구니모리와 같이 다카쿠니 군에게 항복하는 자가 나타나는 등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1531년 2월, 호소카와 로쿠로의 간청으로 모토나가는 복귀했지만, 상황은 절박했다. 하리마 국으로부터 진격을 계속해온 호소카와 다카쿠니와 우라가미 무라무네의 연합군에게 고전을 면치 못했기 때문에, 이듬해 3월에는 사카이 공방 파에서 가와치 국에서 새롭게 가담한 기자와 나가마사가 교토의 방비를 포기하고 철수했기 때문에, 다카쿠니 군의 교토 탈환을 허용하고 말았다.

사카이 공방을 타도하려는 다카쿠니 군에게 셋쓰 남부까지 육박당한 궁지에 처해, 아와 국으로부터 원군 8,000명을 얻어, 다카쿠니 군의 선봉에 공격을 가했다. 그러나 원군을 더했음에도 불구하고, 사카이에 있는 아시카가 요시쓰나를 지키기 위한 전력을 절반 이상이나 할애하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에, 다카쿠니 군과 정면으로 대치하기에는 부족했고, 모토나가의 수완에 의존해야 했다. (나카시마 전투)

전황은 전선의 교착화를 초래했다. 같은 해 6월, 다카쿠니 군의 증원으로 나타난 아카마쓰 마사스케의 배신으로 상황이 진전되어, 다카쿠니 군을 괴멸시켰다.(다이모쓰 붕괴)

2. 4. 주군과의 대립과 몰락 (1531년 ~ 1532년)

호소카와 다카쿠니를 제거한 후, 호소카와 하루모토아시카가 요시하루의 화해 문제를 두고 대립했다. 기자와 나가마사, 미요시 마사나가(소산) 등과의 갈등으로 입지가 약화되었다.[1] 1532년 1월, 야나기모토 진지로를 독단적으로 토벌하여 하루모토의 분노를 샀고, 출가하여 가이운(海雲)이라 칭했다.[1] 하타케야마 요시타카와 연합하여 기자와 나가마사의 이모리야마성을 포위했으나, 하루모토의 철병 요청으로 한 차례 물러났다.

1532년 5월, 이모리야마성을 재포위했으나, 6월 잇코잇키 군의 기습을 받아 패배했다. 1532년 6월 20일, 겐폰지(법화종)에서 잇코잇키 군에 포위되어 자결했다. 향년 32세.[1] 그의 자결은 할복 후 자신의 내장을 천장에 던지는 처절한 모습이었다고 전해진다.[1]

3. 미요시 모토나가를 주제로 한 작품

미요시 모토나가를 주제로 한 작품으로는 아마노 쥰키의 소설 《패도의 창》이 있다.

3. 1. 소설

아마노 쥰키의 소설 《패도의 창》이 있다.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