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요토미 히데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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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도요토미 히데쓰구는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의 무장이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카이자 양자였다. 그는 혼노지의 변 이후 오미 국에서 영지를 받았으며, 시즈가타케 전투, 고마키·나가쿠테 전투, 시코쿠 정벌, 오다와라 정벌 등에서 활약했다. 1591년 히데요시의 후계자가 되어 관백이 되었으나, 1593년 히데요시의 아들 히데요리가 태어나면서 관계가 악화되었다. 1595년 모반 혐의로 고야산에서 할복했으며, 그의 가족과 가신들은 처형되었다. 그는 '살생 관백'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폭군으로 평가받기도 하지만, 최근 연구에서는 긍정적인 측면도 재조명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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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요토미 히데쓰구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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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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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미요시 노부요시 |
다른 이름 | 하시바 히데쓰구 |
별칭 | 축전 오이 님 살생 간파쿠 풍선각 |
출생 | 1568년 |
출생지 | 지타군, 오와리국, 일본 (현재의 지타군, 아이치현, 일본) |
사망 | 1595년 8월 20일 |
사인 | 불명 |
묘소 | 와카야마현이토군고야정의 고야산 고다이인 뒷산 (묘소) 교토시나카교구 기야마치 산조 사가루의 자슈산 즈이센지 (목 무덤) 교토시 사쿄구 오카자키 히가시후쿠노카와초의 젠쇼지 (보리사) |
국적 | 일본 |
가문 | 오동 가문 도요토미 씨 |
관직 | |
관위 | 정2위, 간파쿠, 좌대신 |
주군 | 도요토미 히데요시 → 고요제이 천황 |
직책 | 일본의 섭정 |
임기 시작 | 1585년 |
임기 종료 | 1591년 |
군주 | 고요제이 |
전임 | 도요토미 히데요시 |
후임 | 구조 가네타카 |
가계 | |
아버지 | 미요시 이치로 (야스케) |
어머니 | 즈이류인 닛슈 (도모) |
양아버지 | 미야베 쓰구마사 → 미요시 야스나가 → 도요토미 히데요시 |
배우자 | 정실: 이케다 쓰네오키의 딸 와카만도코로 계실: 기쿠테이 하루스에의 딸 이치노다이 측실: 모가미 요시아키의 딸 고마히메 (오이만의 방) 측실: 시조 다카나가의 딸 오쓰마 고젠 측실: 다누와 다카시게의 딸 고도노쓰보네 그 외 측실은 아래 참조 |
자녀 | 센치요마루 햐쿠마루 주마루 도마루 로게쓰인 그 외 서출은 아래 참조 |
친척 | 도요토미 히데요시 (삼촌) 도요토미 히데나가 (삼촌) 도요토미 히데요리 (사촌) 도요토미 히데카쓰 (형제) |
형제자매 | 히데쓰구 히데카쓰 히데야스 |
의형제자매 | 미요시 야스토시 히데카쓰 (이시마쓰마루) 쓰루마쓰 히데요리 히데카쓰 (오쓰기마루) 히데토시 고우히메 히데이에 히데야스 하치조노미야 도시히토 친왕 |
군사 정보 | |
소속 | [[파일:Goshichi_no_kiri_inverted.svg|15px]] 도요토미 씨 |
복무 기간 | 불명 |
참전 전투 | 시즈가타케 전투 (1583년) 고마키 전투 (1584년) 시코쿠 정벌 (1585년) 오다와라 정벌 (1590년) 구노헤 마사자네의 난 (1591년) |
기타 정보 | |
다른 이름 | 미야베 기치쓰구 미요시 노부요시 하시바 노부요시 |
통칭 | 지헤 지헤노조 손시치로 니헤 |
아호 | 도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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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도요토미 히데쓰구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누나 토모와 미요시 가즈미치 사이에서 태어났다. 처음에는 미요시 가문에 양자로 들어가 '''미요시 노부요시'''(三好信吉)라는 이름을 사용했으나, 후에 숙부 히데요시를 따라 성씨를 하시바(羽柴)로 바꾸고 이름도 '''하시바 히데쓰구'''(羽柴秀次)로 개명했다. '히데쓰구'라는 이름은 '다음 히데(秀)'를 잇는다는 의미로 해석되기도 한다.
1582년 혼노지의 변 이후 히데요시의 유력한 친족으로서 오미 국에 40만 석의 영지를 받으며 정치 무대에 등장했다. 시즈가타케 전투(1583년)에서는 오이와야마 요새(大岩山砦)를 지켰고, 고마키·나가쿠테 전투(1584년)에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상대로 고전하기도 했다. 이후 히데요시의 시코쿠 정벌[4]과 오다와라 정벌에 참전하여 공을 세워 능력을 인정받았다. 또한 오미하치만의 성곽 도시를 건설하고 관리하며 행정가로서의 면모도 보였다. 1590년에는 오다 노부카쓰의 옛 영지인 오와리 국 기요스 성의 성주가 되었다.
슈도(衆道) 전통의 수행자였던 히데쓰구는 여러 와카슈(若衆, 젊은 남성 측근)를 두었는데, 그중 후와 반사쿠(不破万作)가 특히 총애를 받았다고 전해진다.[5]
1591년, 히데요시의 적자 쓰루마쓰가 요절하자 히데쓰구는 히데요시의 양자가 되어 관백직을 물려받고 도요토미 정권의 공식 후계자가 되었다. 그는 교토의 주라쿠다이로 옮겨 정무를 보았으나, 실권은 여전히 히데요시가 쥐고 있는 이원정치(二元政治) 체제였다. 히데요시가 조선 침략에 집중하는 동안 히데쓰구는 일본 내 통치를 대행했다.
그러나 1593년 히데요시의 측실 요도도노가 아들 히데요리를 낳으면서 히데쓰구의 입지는 급격히 불안정해졌다. 히데요시와의 관계는 악화되었고, 히데쓰구가 잔혹한 살생을 일삼는다는 '살생 관백'(殺生関白)이라는 소문이 퍼졌다. 다만 현대 역사가들은 이러한 소문의 진실성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결국 1595년, 히데쓰구는 모반을 꾀했다는 혐의를 받고 고야산으로 추방되어 자결을 강요당했다. 그를 따르던 세 명의 와카슈도 히데쓰구의 도움을 받아 함께 목숨을 끊었다.[6]
히데요시는 히데쓰구 사후 그의 처자식과 첩 등 일가족 39명을 교토 산조가와라에서 공개 처형하는 잔혹한 조치를 단행했다. 이 사건은 당시 일본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많은 다이묘들이 도요토미 정권에 등을 돌리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모가미 요시아키는 자신의 15세 딸이 히데쓰구와 만나보지도 못한 채 처형당한 것에 분노하여 훗날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적극 지지하게 된다. 히데쓰구가 히데요시 외에 도요토미 가문의 유일한 성인 남자였다는 점과 맞물려, 이 사건은 도요토미 가문 몰락의 중요한 원인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히데쓰구의 자녀 중에서는 단 두 명의 딸만이 살아남았다. 갓 태어난 딸 기쿠히메(お菊)는 히데쓰구 할아버지의 조카인 고토 노리요시에게 입양되었고, 다른 딸 류세이인(隆清院)은 훗날 사나다 유키무라의 첩이 되었다.
2. 1. 어린 시절과 가계
에이로쿠 11년(156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누나인 토모(とも)와 미요시 요시하루(三好吉房)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명은 지헤이(治兵衛)였다. 출생지에 대해서는 오와리 국 지타 군 오다카 촌(현재의 나고야시 미도리구)이라는 설과 아버지의 저택이 있던 기후네사 부근이라는 설이 있다.겐키 3년(1572년), 오다 노부나가가 아자이 씨를 공격할 당시, 히데요시는 아자이 측의 미야베 게이준(宮部継潤)을 설득하기 위해 당시 4세였던 조카 지헤이를 인질 겸 양자로 보냈다. 지헤이는 '''미야베 요시쓰구'''(宮部吉継)로 이름을 바꾸었고, 이때 다나카 요시마사가 후견인으로 임명되었다고 전해진다.[8] 덴쇼 원년(1573년) 오타니 성 전투에서 아자이 씨가 멸망한 후, 미야베 쓰구준이 히데요시의 요리키가 되면서 요시쓰구는 하시바 가문으로 돌아온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히데요시가 시코쿠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해 아와 국의 유력자 미요시 야스나가(三好康長)에게 요시쓰구를 양자로 보냈다. 이 시기에 대해서는 덴쇼 3년(1575년)부터 덴쇼 10년(1582년) 사이라는 여러 설이 존재한다.[9] 요시쓰구는 '''미요시 노부요시'''(三好信吉)로 다시 개명하였고, 통칭은 손시치로(孫七郎)라 하였다. 이로 인해 아버지 야스케(미요시 요시하루)도 미요시 성을 쓰게 되었다. 덴쇼 11년(1583년) 무렵에는 미요시 가문의 가신단을 이끌며 가와치 기타야마 2만 석의 다이묘가 되었다.
덴쇼 10년(1582년) 야마자키 전투 직후, 히데요시의 주선으로 이케다 쓰네오키의 딸(와카만도코로)과 약혼하고 이듬해 결혼하여 정실로 맞이했다.[10][11]
덴쇼 12년(1584년) 봄 무렵, 하시바(羽柴) 성으로 복귀하여 '''하시바 노부요시'''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는 오다 노부타카가 제거되고 기나이가 안정되면서 히데쓰구가 미요시 가문에 머무를 필요성이 줄어들었기 때문으로 보인다.[9] 이때 미요시 가신단 중에서 선발된 이들을 와카에 팔인중이라 부르기도 한다.
덴쇼 13년(1585년) 7월 무렵, 히데요시가 관백에 취임한 것을 전후하여 그의 이름 한 자(히데, 秀)를 받아 '''하시바 히데쓰구'''(羽柴秀次)로 최종 개명하였다.[13][14]
관계 | 이름 | 비고 |
---|---|---|
부모 | 아버지: 미요시 요시후사 (三好吉房) | 원래 성씨는 기노시타(木下). 미요시 야스나가의 양자가 되면서 미요시 성 사용. |
어머니: 토모 (とも, 즈이류인 닛슈) |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누나. | |
형제 | 도요토미 히데카쓰 (豊臣秀勝) | 히데요시의 양자. 임진왜란 중 거제도에서 병사. |
도요토미 히데야스 (豊臣秀康) | 도요토미 히데나가의 양자. | |
정실 | 와카만도코로 (若政所) | 이케다 쓰네오키의 딸. |
이치노다이 (一ノ台) | 기쿠테이 하루스에 (이마데가와 하루스에)의 딸. 계실이라는 설도 있음. | |
측실 및 자녀[64][65] | colspan="2" | | |
손자 | 겐쇼인 (顕性院, 고타히메, 1604?-1635) | 류세이인의 딸. 이와키 노리타카의 계실. |
미요시 유키노부 (三好幸信, 1615-1667) | 류세이인의 아들. | |
증손 | colspan="2" | | |
현손 | colspan="2" | | |
내손 | colspan="2" | | |
곤손 | colspan="2" | | |
비고 | 겐쇼인의 계통은 히데쓰구의 곤손 대에서 단절되었다. 다만, 겐쇼인의 남동생 미요시 유키노부의 계통(아키타 사나다 가)은 막말부터 메이지 시대까지 존속하였다. | |
낙윤 (설) | 쇼카도 쇼조 (松花堂昭乗) |
2. 2. 하시바 히데쓰구 시기
1584년 (덴쇼 12년) 고마키·나가쿠테 전투에서의 패전 이후, 히데쓰구는 성씨를 하시바로 바꾸어 '''하시바 히데쓰구'''(羽柴 秀次)가 되었다. 이는 1585년 (덴쇼 13년) 7월경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관백에 취임한 전후로, 히데요시의 이름에서 한 글자를 받아 개명한 것으로 보인다.[13][14]1585년 (덴쇼 13년) 히데요시가 기이 사이카 정벌에 나서자, 히데쓰구는 숙부 도요토미 히데나가와 함께 부장으로 참전하여 이전의 실패를 만회할 기회를 얻었다. 3월 21일 센고쿠보리성 전투에서는 히데쓰구 군이 성을 맹렬히 공격하여 함락시켰고, 이후 오타성 포위에도 참여했다. 같은 해 6월 시코쿠 정벌에서는 병든 히데요시를 대신해 총대장이 된 히데나가 아래 부장으로서 3만 군사를 이끌고 아카시에서 출진, 아와국에 상륙하여 이와쿠라성을 함락시키는 등 공을 세웠다.

시코쿠 평정 후, 히데쓰구는 오미국의 가모군, 고카군, 야스군, 사카타군, 아자이군 5개 군에 걸쳐 본인 영지 20만 석과 가신단(나카무라 가즈우지, 야마우치 가즈토요, 호리오 요시하루) 몫 23만 석을 합쳐 총 43만 석의 영지를 받았다. 히데쓰구는 가모 군의 오미하치만시에 하치만산성을 축성하고 거점으로 삼았다. 성 아래 마을은 아즈치에서 주민들을 이주시켜 계획적으로 조성되었으며, 하치만호리 등 그 흔적이 현재까지 남아있다. 히데쓰구는 영지에서 선정을 베풀었다고 전해지며, "물의 다툼 재판"과 같은 일화가 남아있다. 이는 가신 다나카 요시마사 등의 보좌 역할도 컸지만, 히데쓰구 스스로 악정을 행한 대관을 처벌하거나 아버지 미요시 요시하루의 대리 통치에 대해 "미덥지 않다"고 평가하는 등 주체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히데쓰구의 지위는 점차 높아졌다. 1585년 (덴쇼 13년) 10월경 종4위하 우콘에곤쇼쇼(右近衛権少将)에 서임되었고, 1586년(덴쇼 14년) 봄에는 우콘에곤추조(右近衛権中将)가 되었다. 같은 해 11월 25일에는 히데요시로부터 도요토미 성씨를 하사받고[15] 산기에 임명되었다. 1587년(덴쇼 15년) 규슈 평정에는 히데요시의 명으로 교토 유수(留守居)를 맡아 출진하지 않았고, 그해 11월 22일 종3위 곤추나곤(権中納言)으로 승진했다.
1588년(덴쇼 16년) 4월 14일 주라쿠다이에서 고요제이 천황의 행차를 맞이했을 때(주라쿠다이 행행), 히데요시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서약서 서명 순서에서 히데쓰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오다 노부오, 도요토미 히데나가에 이어 네 번째 자리를 차지하며 높아진 위상을 보였다. 같은 해 4월 19일 종2위로 승서되었다.
1590년 (덴쇼 18년) 오다와라 정벌에 출진하여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지도를 받으며 야마나카성 공격을 지휘하여 반나절 만에 함락시키는 공을 세웠으나, 가신 이치야나기 나오스에를 잃었다. 오다와라성 포위에서는 히데쓰구 군은 오기쿠보(荻窪) 구역에 진을 치고, 7월 5일 호조씨가 항복할 때까지 주둔했다. 오다와라성 함락 직후인 7월 18일부터 오슈 평정에 참전하여 아이즈군의 검지 감독 등을 맡았다. 이후 가사이·오사키 잇키와 1591년 (덴쇼 19년) 구노헤 마사자네의 난이 발생하자 총대장으로서 진압에 나섰다.
오다와라 정벌의 논공행상에서, 영지 이전을 거부하여 개역당한 오다 노부오의 옛 영지인 오와리국과 이세국 북부 5군 등을 받아 기존 영지와 합쳐 100만 석의 다이묘가 되었다. 이에 따라 거성을 기요스성으로 옮겼다.
1591년 (덴쇼 19년) 1월 22일 숙부 히데나가, 8월 5일 히데요시의 적자 도요토미 쓰루마쓰가 잇달아 사망하면서 히데쓰구는 히데요시의 후계자로 급부상했다. 히데쓰구가 히데요시의 양자가 된 정확한 시점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이 무렵 히데요시는 조선 침략(당입(唐入))에 전념하기 위해 히데쓰구에게 일본 통치를 맡기고 관백직을 물려줄 의사를 밝혔다. 히데쓰구의 관위는 빠르게 승진하여 11월 28일 곤다이나곤,[16] 12월 4일 나이다이진에 임명되었다.[17]
12월 20일, 히데요시는 히데쓰구에게 5개 조의 훈계를 내렸는데, 마지막 조항에서 다도, 매사냥, 여성 편력 등에 빠지지 말 것을 경고하며 특히 "나(히데요시)를 흉내 내지 말라"고 강조하고 신에게 맹세하게 했다. 이는 히데쓰구의 개인적인 행실에 대한 우려와 경계심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2. 3. 도요토미 히데쓰구와 관백 취임
도요토미 히데쓰구는 미요시 가즈미치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누나인 토모 사이에서 태어났다. 처음에는 미요시 요시후사에게 입양되어 '''미요시 노부요시'''라는 이름을 사용했으나, 후에 숙부인 히데요시를 따라 하시바 히데쓰구로 개명했다. '하시바'는 히데요시의 성씨였으며, '히데쓰구'는 '다음 히데(秀)'를 의미하는 것으로 여겨진다.1582년 혼노지의 변 이후 히데요시의 몇 안 되는 친척으로서 오미 국에서 40만 석의 영지를 받았다. 1583년 시즈가타케 전투에서는 다카야마 우콘, 나카가와 기요히데와 함께 오이와야마 요새(大岩山砦)를 방어했고, 1584년 고마키·나가쿠테 전투에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상대로 고전하기도 했다. 이후 히데요시의 시코쿠 정벌[4]과 오다와라 정벌에 참여하여 능력을 인정받았으며, 오미하치만의 성곽 도시를 성공적으로 관리하기도 했다. 1590년(덴쇼 18년)에는 오다 노부카쓰가 다스리던 오와리 국 기요스 성의 성주가 되었다.
1591년(덴쇼 19년) 8월, 히데요시의 적자 쓰루마쓰가 요절하자, 히데쓰구는 같은 해 11월 히데요시의 양자가 되었고, 12월 관백에 취임하며 도요토미 가문의 공식적인 후계자이자 대표자가 되었다.

(교토 지조인 소장)
히데쓰구는 교토의 주라쿠다이(聚楽第)로 거처를 옮겨 정무를 보았으나, 히데요시가 실권을 완전히 넘기지 않아 사실상의 이원정치(二元政治) 체제가 운영되었다. 히데요시가 조선 침략에 몰두하면서, 히데쓰구가 일본 내의 국정 운영을 대행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러나 1593년(분로쿠 2년) 8월, 히데요시의 측실 요도도노가 오사카성에서 아들 히데요리를 낳으면서 상황이 변하기 시작했다. 히데요시는 히데요리의 탄생을 매우 기뻐했으며, 이는 히데쓰구의 입지에 미묘한 변화를 가져왔다. 히데요시는 마에다 토시이에 부부를 중매인으로 하여 히데요리와 히데쓰구의 딸(로게츠인)[21]을 약혼시켜 장래에 두 사람에게 천하를 물려주려는 구상을 하기도 했다.[22]
히데요리의 탄생 이후 히데쓰구는 천식 증상이 심해지는 등 심신이 불안정한 모습을 보였다는 기록도 있다.[23][24] 그럼에도 1594년(분로쿠 3년)까지 히데요시와 히데쓰구는 요시노 벚꽃놀이에 함께 가는 등 표면적으로는 양호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히데요시는 후시미성을 증축하고 히데요리와 요도도노를 이곳으로 옮기려 하는 등, 점차 권력의 중심을 히데요리에게 옮기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이는 히데쓰구를 견제하려는 의도로 해석되기도 한다.
한편, 임진왜란과 관련하여 히데쓰구가 직접 조선으로 출진해야 한다는 논의도 있었다. 구로다 요시타카 등은 히데쓰구가 조선으로 건너가 지휘할 것을 권했으나,[27] 히데쓰구의 건강 문제 등으로 인해 실현되지는 않았다.
2. 4. 히데요리 탄생과 몰락
분로쿠(文禄) 2년(1593년) 히데요시의 측실 요도도노가 아들 히데요리를 낳자, 히데요시와 히데쓰구의 관계는 점차 악화되기 시작했다. 히데요리와 히데쓰구의 딸을 혼인시키는 등 관계 개선을 위한 교섭도 시도되었으나[28], 히데쓰구가 반복적이고 부당한 살인을 저질렀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살생 관백'(殺生関白, sesshō-kanpaku일본어)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까지 얻게 되었다. 다만 현대 역사가들은 이러한 소문의 진위 여부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분로쿠 4년(1595년) 6월 말, 히데쓰구에게 모반 혐의가 제기되었다. 오타 규이치의 『태합님 군기 중』에 따르면, 히데쓰구가 매사냥을 핑계로 산속에서 반 히데요시 세력과 모의를 한다는 소문이 돌았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에게도 이는 근거가 희박한 이야기로 여겨졌다.
7월 3일, 이시다 미쓰나리, 마에다 겐이, 마스다 나가모리, 도다 사콘 등 히데요시의 봉행들이 주라쿠다이를 방문하여 히데쓰구에게 소문의 진위를 추궁하고 역심이 없다는 맹세(기청문)를 요구했다. 히데쓰구는 모반 혐의를 부인하며 7장에 걸친 맹세문을 작성하여 결백을 주장하려 했다.
7월 5일, 이시다 미쓰나리는 히데쓰구가 전년 봄에 가신 시라에 빈고노카미를 모리 데루모토에게 보내 독자적으로 맹약을 맺고 연판장을 작성했다는 (혹은 데루모토로부터 그러한 신고가 있었다는) 내용을 히데요시에게 보고했다[28]. 히데요시는 이를 빌미로 "부자간에 뜬소문이 도는 것은 직접 대화가 없기 때문"[28]이라며 히데쓰구에게 후시미성으로 출두할 것을 명했다.
7월 8일, 마에다 겐이 등 5명의 사자가 다시 방문하여 출두를 재촉하자 히데쓰구는 결국 후시미로 향했다. 그러나 히데요시를 만나기는커녕 등성조차 허락받지 못하고 기노시타 요시타카의 저택에 유치되었다. 곧바로 "고야산으로 가야 한다"[28]는 통보를 받고 삭발한 뒤 승려복(삭발 염의, 剃髪染衣) 차림으로 후시미를 떠나야 했다. 감시역으로는 기노시타 요시타카, 하네다 나가토노모리, 목식 응기 등이 동행했다. 7월 10일, 히데쓰구는 고야 산의 세이간사(青巌寺)에 도착하여 은둔 생활을 시작했으며, 이때 '''도요'''(道意) 또는 '''호젠코'''(豊禅閤)라 불리게 되었다.
히데쓰구의 추방과 함께 그의 가신들에 대한 숙청도 진행되었다. 7월 13일, 가로인 시라에 빈고노카미와 구마가이 나오유키가 할복하고, 기무라 지카노스케는 참수당했으며 재산은 몰수되었다[29]. 기무라 시게모치의 처자식은 나중에 산조가와라에서 능지형에 처해졌다. 다른 가신들도 도쿠가와 이에야스, 우에스기 가게카쓰, 사타케 요시노부 등 여러 다이묘에게 신병이 넘겨지거나 유배, 할복 등의 처분을 받았다. 히데쓰구의 친척과 측근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7월 15일, 후쿠시마 마사노리, 이케다 히데오, 후쿠하라 나가타카가 검시관으로 고야산에 도착하여 히데쓰구에게 자결을 명했다. 목식 응기가 사찰 내에서의 처형은 사원법에 어긋난다며 항의하고 시간을 끌려 했으나, 히데요시에게 거역할 경우 고야산 전체가 위험해질 수 있다는 후쿠시마의 설득과 히데쓰구 본인의 수용으로 결국 할복이 집행되었다.
히데쓰구는 할복 직전, 자신을 따라 죽기로 한 소년 가신 야마모토 주덴노스케, 야마다 산지로, 후와 반사쿠에게 명검을 하사하고 그들의 가이샤쿠를 직접 해주었다. 승려 호간 겐류도 스스로 배를 갈라 순사했다. 마지막으로 히데쓰구는 스즈메베 시게마사의 가이샤쿠를 받아 할복했다. 향년 28세였다[31]. 그의 법명은 고야산에서는 선정사전 고안도이 대거사(禅定寺殿 高巌道意 大居士), 보리사인 즈이센지에서는 즈이센지전 고엄일봉도이(瑞泉寺殿 髙巌一峰道意)이다.
그가 남긴 사세구(辞世の句)는 다음과 같다.
> 磯かげの松のあらしや友ちどり いきてなくねのすみにしの浦|물가 그늘 소나무에 폭풍 부니 벗인 물떼새여, 살아 우는 소리 들리는 스미노우라 포구로다.일본어
히데쓰구의 목은 후시미로 보내져 히데요시의 검토를 받았고, 유해는 다른 순사자들과 함께 고야산 오쿠노인에 매장되었다.
히데쓰구 사후, 히데요시는 그의 남은 가족들에게도 가혹한 처분을 내렸다. 히데쓰구의 자녀, 아내, 첩 등 39명의 여성과 아이들이 교토의 산조가와라(三条河原)로 끌려가 처형당했다. 이 처형의 잔혹함은 당시 일본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많은 다이묘들이 도요토미 정권에 등을 돌리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모가미 요시아키의 15세 딸은 히데쓰구의 첩이 되기 위해 교토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히데쓰구를 만나보지도 못한 상태였음에도 처형당했는데, 이는 5년 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모가미 가문이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원인이 되었다. 히데쓰구가 히데요시 외에 도요토미 가문의 유일한 성인 남성이었다는 점과 맞물려, 이 사건은 도요토미 가문 몰락의 주요 원인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히데쓰구의 자녀 중에서는 단 두 명의 딸만이 살아남았다. 생후 1개월 된 딸 기쿠히메(お菊)는 히데쓰구 할아버지의 조카인 고토 노리요시에게 입양되었고, 다른 딸 류세이인(隆清院)은 후에 사나다 유키무라의 첩이 되었다.
3. 히데쓰구 사건
분로쿠 4년(1595년), 히데요시의 후계자이자 조카였던 관백 히데쓰구는 히데요시로부터 모반(謀反) 혐의를 받게 된다. 히데쓰구는 결백을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결국 고야산(高野山)으로 추방되어 7월 15일 할복을 명령받아 자결하였다. 향년 28세였다.[31]
히데요시의 분노는 히데쓰구 개인에게 그치지 않았다. 히데쓰구의 자녀(4남 1녀)와 정실, 측실, 시녀 등 일가족 39명이 교토의 산조가와라(三条河原)에서 처형당하는 참혹한 사건이 벌어졌다.[64] 히데쓰구의 목이 놓인 앞에서 벌어진 이 처형은 약 5시간 동안 이어졌으며, 시신들은 한 구덩이에 매장되었다. 이 매장지에는 히데쓰구의 목을 담은 석궤(石櫃)가 놓였고, '히데쓰구 악역총(秀次悪逆塚)'이라는 비문이 새겨졌다. 당시 사람들은 이를 '축생총(畜生塚)'이라 부르기도 했다.[32] 이 무덤은 오랜 기간 방치되었다가 게이초 16년(1611년) 호상(豪商) 스미노쿠라 료이(角倉了以)에 의해 즈이센지(瑞泉寺)가 건립되면서 공양되었다.[33]
또한, 마에노 나가야스·마에노 가게사다 부자, 기무라 시게모치, 시라에 나리사다, 구마가이 나오유키 등 히데쓰구를 따르던 많은 가신들도 할복하거나 참수당하는 등 연좌되어 숙청되었다. 히데쓰구의 거성이었던 주라쿠다이와 오미하치만성 역시 철저히 파괴되어 그 흔적을 지웠다.
이 사건은 도요토미 정권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히데요시의 잔혹함과 비정함을 드러내는 동시에 정권 내부의 균열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히데쓰구 일족의 몰살은 얼마 남지 않은 도요토미 가문의 친족 세력을 더욱 약화시켰고, 이는 훗날 도요토미 가문이 몰락하는 한 원인이 되었다.[37]
3. 1. 숙청의 경위
분로쿠 4년(1595년), 히데쓰구는 히데요시에게 모반(謀反) 혐의를 받았다. 7월 3일, 주라쿠다이(聚楽第)에 머물던 히데쓰구에게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 마에다 겐이(前田玄以), 마시타 나가모리(増田長盛) 등 히데요시의 봉행(奉行)들이 찾아와 모반 혐의를 추궁하며 고야산(高野山)으로 갈 것을 요구했다. 히데쓰구는 혐의를 부인하며 역심이 없음을 기청문(起請文)으로 작성해 결백을 주장하려 했다.7월 5일, 히데쓰구가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와 독자적으로 맹약을 맺었다는 보고(이시다 미쓰나리의 참언설도 있음)가 히데요시에게 올라갔고[28], 히데요시는 히데쓰구에게 후시미성(伏見城)으로 출두하라고 명했다.
7월 8일, 거듭된 출두 요구에 히데쓰구는 결백을 증명하고자 후시미성으로 향했으나,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正則) 등에 의해 성 출입이 막히고 히데요시를 만나지 못했다. 결국 히데요시로부터 고야산으로 가라는 명령을 받고[28], 같은 날 머리를 깎고 승려복을 입은 모습(삭발 염의)으로 기노시타 요시타카(木下吉隆), 하네다 마사치카(羽田正親), 목식응기(木食応其) 등의 감시 하에 고야산으로 출발했다.
7월 10일, 고야산 세이간지(青巌寺, 현 곤고부지)에 도착하여 은둔에 들어갔다. 이 출가 때 '''도이'''(道意)라고 칭했다고도 하며, 이후에는 '''호젠코'''(法禅浩)라고 불리기도 한다.
7월 13일, 히데쓰구의 가신들에 대한 숙청이 시작되었다. 가로(家老) 시라에 나리사다(白江成定)와 구마가이 나오유키(熊谷直之)는 할복했고, 기무라 시게모치(木村重茲)는 참수당했으며[29] 그 처자식은 능지형에 처해졌다. 아와노 히데모치(粟野秀用), 히비노 기요미(日比野清実), 야마구치 시게카쓰(山口重勝), 마루모 후신사이(丸毛不心斎) 등도 할복했다. 마에노 나가야스(前野長康)·마에노 가케사다(前野景定) 부자, 이치야나기 카유(一柳可遊), 핫토리 잇추(服部一忠), 와타세 시게아키라(渡瀬繁詮), 아카시 노리자네(明石則実), 하네다 마사치카 등은 여러 다이묘에게 신병이 맡겨졌다가 대부분 사사(賜死)되었다. 기노시타 요시타카(木下吉隆), 아라키 모토키요(荒木元清), 사토무라 조하(里村紹巴) 등은 유배되었다.
7월 15일, 후쿠시마 마사노리, 이케다 히데오(池田秀雄), 후쿠하라 나가타카(福原長堯)가 고야산을 방문하여 히데요시의 할복 명령을 전달했다. 목식응기 등이 사찰 내에서의 처형에 반발하며 시간을 끌려 했으나, 히데요시는 결국 명령을 받아들였다. 히데쓰구는 자신의 시동(侍童)인 야마모토 주덴노스케(山本主殿助), 야마다 산주로(山田三十郎), 후와 반사쿠 (소년)(不破万作)가 먼저 할복하는 것을 직접 가이샤쿠(介錯)해주었고, 승려 호간 겐류(法眼玄隆)도 할복했다. 마지막으로 히데쓰구는 스즈메베 시게마사(雀部重政)의 가이샤쿠로 할복하여 생을 마감했다. 향년 28세[31]. 스즈메베 시게마사 역시 바로 자결하여 뒤를 따랐다. 히데쓰구 및 같은 날 할복한 이들의 유해는 세이간사에 묻혔고, 히데쓰구의 목은 검시를 위해 후시미로 보내졌다.
3. 2. 숙청의 이유
분로쿠 4년(1595년) 히데쓰구는 모반 혐의를 받았다. 그러나 당시 기록에서도 모반설은 단순한 풍문으로 여겨졌으며[39], 무고하다는 인식이 있었다. 야마시나 겐케이(山科言経)는 모반이 단순한 소문임에도 할복에 이른 것을 언어도단이라 분개했으며[39], 『오유도노노우에 일기』 역시 히데쓰구가 무실했기에 할복한 것이라고 기록했다.히데쓰구 숙청의 구체적인 이유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여러 설이 제기된다.
- 히데요시가 친아들 히데요리의 후계 자리를 확고히 하고, 히데쓰구의 자손을 없애 직계 계승을 지키려 했다는 설.
- 히데요리 탄생 후 히데쓰구가 주색에 빠져 난행을 일삼았다는 설. 이는 '살생 관백(殺生関白)'이라는 별명으로 이어졌으나, 현대 역사가들은 이러한 소문의 정확성에 의문을 제기한다.
- 히데요리의 생모인 요도도노와 이시다 미쓰나리 등 오미파(近江派) 관료들의 음모라는 설. 『당대기』 등에서는 모반 혐의가 허언이며 치부소(治部少)의 참언에 따른 것이라고 기록했다.[40]
- 히데쓰구가 기쿠테이 하루스에의 딸(과거 히데요시의 측실)을 히데요시 몰래 측실로 삼은 일로, 이시다 미쓰나리의 참언을 들은 히데요시가 질투심에 죄를 꾸며 처단했다는 설.
오타 규이치의 『태합 군기 중』과 같은 초기 기록은 히데쓰구의 포악한 행실이 숙청의 원인인 것처럼 묘사하여, 히데요시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경향을 보였다. 이러한 서술은 후대에 '살생 관백' 이미지를 강화하며 히데쓰구 폭군론의 근거가 되었다.[38] 그러나 이러한 기록들조차 모반의 구체적인 실체에 대해서는 명확히 제시하지 못했다.
결론적으로 히데쓰구 숙청의 정확한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존재하며, 모반 혐의는 명분이었을 뿐 실제 원인은 복합적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진실은 여전히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3. 3. 사건의 영향
히데쓰구 처형과 그의 처자, 가신들에 대한 잔혹한 처사는 당시 윤리관으로도 '악역무도'하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도요토미 정권에 큰 후유증을 남겼다. 이 사건은 히데요시 정권의 비정함과 정치적 모순을 드러내며 여러 방면으로 영향을 미쳤다.'''정치적 균열 심화'''
후지키 히사시는 히데쓰구 사건을 계기로 이전부터 존재했던 도요토미 정권 내부의 대립이 더욱 심화되었다고 평가했다.[36] 카사야 카즈히코 역시 조선 출병을 둘러싼 이료파(吏僚派)와 무단파(武斷派)의 대립과 더불어, 히데쓰구 사건이 도요토미 가문 및 가신단을 결정적으로 분열시킨 주요 원인이며, 이는 세키가하라 전투 발발의 한 배경이 되었다고 지적했다.[37]
'''다이묘 이반과 세력 약화'''
히데쓰구는 히데요시 외에 거의 유일한 성인 친족이었으므로, 그와 자식들의 몰살은 도요토미 가문의 친족 세력을 크게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이는 장차 히데요리를 지지할 후견 세력의 부재로 이어졌다. 또한, 산조가와라에서 벌어진 히데쓰구의 처첩과 자녀 39명에 대한 처형은 그 잔혹함으로 인해 일본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고, 많은 다이묘들이 도요토미 정권에 등을 돌리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모가미 요시아키의 15세 딸 고마히메가 히데쓰구를 만나보지도 못한 채 처형된 사건은 강력한 모가미 가문이 5년 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 측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연좌와 처벌'''
사건 이후 많은 다이묘들이 연좌되어 처벌받거나 곤경에 처했다.
- 아사노 유키나가는 히데쓰구를 변호했다는 이유로 노토 국으로 유배되었고, 그의 아버지 아사노 나가마사 역시 히데요시의 신임을 잃었다.
- 호소카와 타다오키는 할복한 가신 마에노 가게사다의 장인이었고 히데쓰구에게 금전적 채무가 있었으나, 딸을 이혼시키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중재를 통해 처벌을 면했다.
- 다테 마사무네는 히데쓰구와의 친분 때문에 모반 연루 의혹을 받았으나, 직접 상경하여 해명함으로써 용서를 받고 오히려 후시미에 저택 부지를 하사받았다.
이처럼 사건에 연루되어 히데요시의 노여움을 산 다이묘들 중 상당수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하면서, 자연스럽게 도쿠가와 측으로 기울게 되었고, 이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동군(도쿠가와 측)에 가담하는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히데요시는 사건의 파장을 축소하려 했으나, 결과적으로 정권의 기반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4. 인물 및 평가
도요토미 히데쓰구는 미요시 가즈미치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누나인 토모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처음에는 미요시 요시후사에게 입양되어 '''미요시 노부요시'''(三好信吉)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이후 숙부인 히데요시를 따라 성씨를 하시바(羽柴)로 바꾸고 이름도 히데쓰구(秀次)로 개명했다.
1582년 혼노지의 변 이후 히데요시의 몇 안 되는 친척으로서 오미국에 40만 석의 영지를 받았다. 1583년 시즈가타케 전투에서는 다카야마 우콘, 나카가와 기요히데와 함께 오이와야마 요새(大岩山砦)를 방어했으며, 1584년 고마키·나가쿠테 전투에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군대와 싸우다 큰 손실을 입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 히데요시의 시코쿠 정벌[4]과 오다와라 정벌에 참여하여 무공을 세웠고, 오미하치만의 성곽 도시를 다스리며 행정가로서의 능력도 보여주었다. 슈도(衆道) 풍습을 따라 여러 와카슈(若衆, 미소년 시동)를 곁에 두었으며, 특히 후와 반사쿠는 그 아름다움으로 유명했다.[5]
1590년, 오다 노부카쓰가 다스리던 오와리국 기요스성의 성주가 되었다. 이듬해 히데요시의 적자 쓰루마쓰가 요절하자 히데요시는 히데쓰구에게 관백 직위를 물려주었다. 이로 인해 히데쓰구는 교토의 주라쿠다이로 거처를 옮겼고, 히데요시와 히데쓰구가 함께 통치하는 이른바 '이원 정치'(二元政治) 체제가 형성되었다. 히데요시가 임진왜란에 집중하는 동안 히데쓰구는 국내 정무를 대행했다.
그러나 1593년, 히데요시의 측실 요도도노가 아들 히데요리를 낳으면서 히데요시와 히데쓰구의 관계는 급격히 악화되기 시작했다. 이 무렵 히데쓰구가 잔혹하고 부당한 살인을 반복한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殺生関白|셋쇼칸파쿠일본어('살생 관백')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을 얻게 되었다. 다만 현대의 역사가들은 이러한 소문의 진위 여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결국 1595년, 히데쓰구는 모반을 꾀했다는 혐의를 받고 고야산에서 할복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의 와카슈 세 명도 히데쓰구의 도움을 받아 함께 자결했다.[6] 할복 후 히데쓰구와 관련된 다이묘들은 유폐되었고 주라쿠다이는 파괴되었다. 더욱 비극적인 것은 히데요시가 히데쓰구의 자녀, 아내, 첩 등 일가족 39명을 교토의 산조가와라에서 모두 처형하라고 명령한 일이다. 이 잔혹한 처사는 당시 일본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많은 다이묘들이 도요토미 정권에 등을 돌리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모가미 요시아키의 15세 딸처럼 히데쓰구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던 인물까지 처형된 사건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모가미 가문이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도요토미 가문의 유력한 성인 후계자였던 히데쓰구와 그 일족의 몰살은 도요토미 정권 몰락의 중요한 원인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히데쓰구의 자녀 중에서는 고토 노리요시에게 입양된 딸 기쿠히메와 사나다 유키무라의 첩이 된 딸 류세이인만이 살아남았다.
히데쓰구 숙청의 직접적인 원인에 대해서는 이시다 미쓰나리 등이 참언하여 히데쓰구를 모함했다는 설이 오랫동안 제기되어 왔으나, 이는 후세의 추측일 가능성이 높으며 미쓰나리가 주도했다는 직접적인 사료는 없다.[47] 오히려 히데쓰구는 무장으로서의 공적 외에도 행정 능력과 문화적 소양을 갖춘 인물이었으며, 가신들의 신망도 얻고 있었다는 긍정적인 평가도 존재한다.[53][58][59][60] '살생 관백'이라는 평가와는 다른 다면적인 모습을 가진 인물로 재평가되기도 한다.
4. 1. 긍정적 평가


히데쓰구의 난행과 악행은 숙청의 빌미로 사용되었으나, 이는 주로 후대의 군기물이나 태합기류 서적에서 강조된 측면이 있다. 예를 들어 『태합님 군기 중』에서는 비에이 산의 금제를 어기고 기타노에서 좌두(座頭)를 살해한 것을 문제 삼았는데, 이는 당시의 천도 사상에 기반한 것으로 현대의 도덕 관념과는 차이가 있다. 반면, 기독교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는 히데쓰구에게 좋지 않은 관습이 있었음을 인정하면서도, 이를 사소한 결점으로 여기고 많은 미덕을 칭찬했다. 프로이스는 히데쓰구를 "숙부(도요토미 히데요시)와는 전혀 다르게 만인에게 사랑받는 성격의 소유자였으며, 특히 금욕을 지키고 야심가가 아니었다[60]", "온화하고 사려 깊은 성질이다" 등으로 기록하며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다만 프로이스는 기독교를 탄압하는 인물(당시 히데요시)에 대해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경향이 있었으므로 이를 감안할 필요는 있다.
히데쓰구 사건 당시, 히데요시의 옛 신하인 마에노 나가야스, 기무라 시게모리, 와타세 시게아키 등 많은 인물들이 히데쓰구의 무죄를 주장했고, 『오종기』에 따르면 이시다 미쓰나리조차 히데쓰구를 변호했다고 한다. 또한, 할복 시 가신과 고쇼(小姓, 시동) 중에서 순사자가 많이 나왔다는 점은 그가 가신들에게 신망을 잃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 무술: 스승 히키타 가게카네에게 검술과 창술을 배웠고, 나가사와 소키, 가타야마 히사야스에게도 검술을 배웠다. 할복 시 가이샤쿠(介錯)를 할 정도의 실력을 갖추었다고 하며, 도검 감정에도 능했다. 요시다 시게우지에게 히키류 궁술을, 아라키 모토키요에게 아라키류 마술(馬術)을 배웠다. 검술 시합 관람을 즐겼고, 주라쿠테이에서 진검 시합을 열기도 했다. 히데쓰구 소유로 전해지는 '주칠 칠 예찰 곤사건위 구족'(朱漆塗色々威胴丸具足) 갑옷이 산토리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 무장 및 정무: 16세 때 고마키·나가쿠테 전투에서 패배한 것을 제외하면, 이후 기이·시코쿠 공격, 오다와라 정벌에서의 야마나카 성 공격, 오슈 시오키 등에서 무공을 세웠다. 정무에서는 야마우치 가즈토요, 호리오 요시하루 등의 보좌를 받아 큰 문제 없이 수행했다. 이는 2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가 쇼군직에 오르기 전과 비교해도 손색없는 수준이다. 특히 히데쓰구가 본격적으로 통치한 오미하치만에서는 마을 구획 정리 등 행정 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쳐 지역 발전에 기여했으며, 현재까지도 오미하치만 지역에서 존경받고 있다는 점은 그가 상당한 역량을 지닌 문무겸비의 인물이었음을 시사한다[53].
- 고전 보호: 고전 수집과 보호에 힘썼다. 오다와라 정벌 후 무쓰국으로 가 주손지의 대장경을 가져왔으며, 아시카가 학교나 가나자와 문고의 서적도 수집했다. 또한 『일본서기』, 『일본후기』, 『속일본후기』, 『일본문덕천황실록』, 『일본삼대실록』, 『유취삼대격』, 『실료기』, 『백련초』 등 수집한 고서를 조정에 헌납했다[59].
- 문화적 소양: 고필(古筆, 옛 명필)을 아꼈고, 많은 공가(公家)와 교류하며 당대 일류의 교양인으로 인정받았다[58]. 덴쇼 16년(1588년) 이전에 『겐지모노가타리』를 필사하게 하여 소장했다[59]. 학문적 성취에 대해 칭찬하는 공가의 기록도 남아있다. 반면, 재야 학자 후지와라 세이카는 히데쓰구를 낮게 평가하며 상대하지 않았다고 하나, 세이카의 아버지(호소카와 유사이의 형) 레이젠 타메스미가 히데요시에 의해 죽임을 당했기 때문에 히데요시의 양자인 히데쓰구를 의도적으로 비판했을 가능성도 있다. 양아버지 미요시 야스나가에게서 다도와 렌가를 배워 즐겼으며, 15세 무렵부터 유명 가인들이 모이는 연가회에 참여하고 정주(亭主, 모임의 주최자)를 맡기도 했다. 이러한 문화적 소양은 오타 규이치의 저서 이후 퍼진 거친 인물상과는 다르며, 오와다 테츠오 등은 이러한 이미지가 잘못되었다고 반론한다.
- 다도: 일반적으로 센노 리큐의 제자로 알려져 있으며, 고리야 소탄, 쓰다 소규, 리큐 등과 다회(茶会)를 함께 했다. 히데요시로부터 리큐류 다이코(台子) 점례 비법을 전수받은 다이코 7인중의 한 사람으로 꼽히기도 한다.
- 노가쿠: 히데요시를 따라 노가쿠를 직접 연주했으며, 공가와 선승들에게 명하여 최초의 요곡 주석서인 『요초』(謡抄)를 편찬하게 하여 후세 문예에 큰 영향을 주었다.
- 기타: 히데요시와 마찬가지로 남색을 싫어했다[60]. "일동 칠도(一胴七度)"라는 별칭이 붙은 무라마사 검을 소유했다. 당시 무라마사는 특별히 나쁜 이미지가 없는 명검이었으며, 도쿠가와 이에야스 자신을 포함한 많은 무장들이 애용했다[61]. 히데쓰구가 소유했던 무라마사 타도의 오시가타(押形, 칼날 모양을 종이에 베껴 그린 것)가 남아있다[62]. 고바야시 스케지(小林 地區司)의 가설에 따르면, 히데쓰구는 히데요시가 다수 소지하고 있던 명도의 감정을 맡고 있었고, 명도 감정 체제 안에서 다메시기리(試斬)를 행했던 것은 아닐까 한다[49]. 오와다 테츠오는 히데쓰구가 기리시탄이었을 가능성도 제기한다.
4. 2. 부정적 평가와 '살생 관백'
사건 직전 히데쓰구는 히에이 산에서의 사슴 사냥이나[74] 기분 내키는 대로 사람을 마구 죽이는 등 도리를 저버린 행위, 밤길에 숨어 지나가던 사람을 베는 쓰지기리를 일삼았다는 소문이 돌아 '살생 관백(殺生關伯)'[75]이라는 별명을 얻었다고 전해진다. 또한, 히데요시의 측실 요도도노가 아들 히데요리를 낳은 1593년 이후 히데요시와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히데쓰구가 반복적이고 부당한 살인을 저질렀다는 소문이 퍼졌고, 이 별명은 더욱 굳어졌다. 다만 현대 역사가들은 이러한 소문의 정확성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히데쓰구가 모반 혐의로 숙청된 후, 그의 난행과 악행은 단죄의 근거로 여러 군기물(軍記物)이나 태합기(太閤記) 등의 기록에서 반복적으로 언급된다. 주요 악행으로 꼽히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수행 중 살인'''
철포나 활쏘기 수행을 명목으로 농민이나 행인을 쏘아 죽이고, 힘자랑이나 칼 시험을 한다며 길거리에서 사람을 베었다는 기록이 있다. 오타 규이치의 『덴쇼기』(『태합님 군기 중』)에 따르면 수백 명을 베어 '관백 천인 베기'라고 불렸다고 한다.
그러나 쓰지기리는 모모야마 시대부터 에도 시대 초기에 유행했던 행위이며[48], 다른 인물(예: 쓰다 노부토)의 행위가 히데쓰구의 소행으로 잘못 알려졌을 가능성도 제기된다[54]. 또한 히데요시 소유의 명검 감정을 히데쓰구가 맡았는데, 이때 칼 시험을 한 것이 와전된 것이라는 설도 있다[49].
'''고마치도노 상황 상중(喪中)의 부적절한 행동'''
분로쿠 2년(1593년) 고마치도노 상황이 붕어했음에도, 상중(諒闇)에 재계하지 않고 두루미 고기를 먹거나 사냥 등 유흥을 즐겼다는 비판이 있다. 『보안 태합기』는 붕어 7일도 안 되어 사슴 사냥을 했다고 기록한다.
그러나 『언경경기』에 따르면 히데쓰구의 사슴 사냥은 상이 끝난 분로쿠 3년(1594년)의 일이며[50], 오히려 히데요시가 상중에 매사냥을 했다는 기록이 있어 사실 관계에 논란이 있다.
'''히에이 산 금기 위반'''
여성 출입이 금지된 히에이 산에 여자들을 데리고 들어가 유흥을 벌이고, 살생 금지 구역에서 대량으로 사냥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태합님 군기 중』은 엔랴쿠지 경내에서 말을 매거나 사냥한 고기를 함부로 다루는 등의 악행을 저질렀다고 덧붙인다.
『보안 태합기』는 이를 분로쿠 2년(1593년) 6월 8일의 일로 기록하지만, 『언경경기』에 따르면 당일 히데쓰구는 주라쿠다이에 있었으므로 날짜 기록은 잘못된 것으로 보인다.
'''기타노텐만구에서 자토 살해'''
기타노텐만구에서 만난 자토(座頭, 맹인 악사)에게 술을 먹이겠다고 속여 팔을 자르고, 결국 능지처참했다는 이야기가 『보안 태합기』에 실려 있다. 『태합님 군기 중』에도 비슷한 기록이 있다.
다만, 이러한 이야기들은 후대의 창작이나 과장이 섞였을 가능성이 있다.
'''루이스 프로이스의 기록'''
예수회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는 1595년 일본 연보에서 히데쓰구가 "사람을 죽이는 것을 즐기는 야만적 행위"를 했으며, 죄인 처형 시 직접 집행하거나 잔혹한 방식으로 즐겼다고 기록했다. 특히 임산부의 배를 갈라 태아를 보았다는 기록은 그의 잔혹성을 보여주는 예로 언급된다.
그러나 프로이스는 기독교를 탄압했던 히데요시를 더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경향이 있으며, 히데쓰구의 악행을 언급하면서도 다른 미덕들을 칭찬하기도 했다. 또한 프로이스가 묘사한 처형 방식(예: 생동(生胴))이나 칼 시험에 인체를 사용하는 것은 당시 일본의 형벌이나 관습의 일부였을 수 있어, 이를 히데쓰구 개인만의 특이한 잔혹성으로 단정하기는 어렵다는 지적도 있다.
'살생 관백(殺生関白)'이라는 별명은 오타 규이치의 『다이코사마군기노우치』에 기록된 낙서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이 기록에 따르면, 본래 '살생'은 천황 상중에 사냥하여 불교의 살생 금지 계율을 어긴 것을 비꼬는 의미였다. 그러나 후대에 다른 악행들과 결부되면서 점차 잔인하게 사람을 죽이는 폭군이라는 의미로 확대 해석되었다[52]. 이러한 부정적 평가는 히데쓰구가 비참하게 숙청당하고 일가족까지 몰살당했기 때문에, 그럴 만한 큰 죄를 지었을 것이라는 후대의 인식이 투영된 결과라는 분석도 있다[52].
4. 3. 진보적 관점에서의 재평가
도요토미 히데쓰구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후계자로 지목되었으나, 후에 모반 혐의로 숙청당하면서 부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했다. 특히 반복적이고 부당한 살인을 저질렀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殺生関白|셋쇼칸파쿠일본어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까지 얻었다. 그러나 현대 역사가들은 이러한 소문이 과연 정확한 사실에 기반한 것인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며 히데쓰구에 대한 재평가를 시도하고 있다.
히데쓰구 숙청의 배경으로 이시다 미쓰나리 등의 참언이 있었다는 설이 오랫동안 제기되어 왔다. 여러 에도 시대 군기물에서는 미쓰나리가 히데쓰구를 시기하여 모함했다는 식으로 묘사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참언설은 후세 사람들의 추측에 기반한 것으로 보이며, 미쓰나리가 주도적으로 히데쓰구를 몰아내려 했다는 직접적인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오히려 미쓰나리를 포함한 봉행들은 히데요시의 명령을 충실히 따랐을 뿐이라는 견해가 현재로서는 더 유력하다.[47] 일부 기록에서는 미쓰나리가 히데쓰구를 변호했다는 내용도 존재한다.
기존의 부정적 평가와는 다른 측면에서, 히데쓰구는 여러 면에서 긍정적인 면모를 보인 인물이었다. 무장으로서는 16세 때 고마키·나가쿠테 전투에서 한 차례 패배를 겪었을 뿐, 이후 기이·시코쿠 정벌, 오다와라 정벌에서의 야마나카 성 공격, 오슈 시오키 등에서는 꾸준히 무공을 세웠다. 정무 능력 또한 야마우치 가즈토요, 호리오 요시하루 등의 보좌를 받아 안정적으로 수행했다. 특히 그가 본격적으로 통치했던 오미하치만에서는 도시 구획 정비 등 적극적인 행정을 펼쳐 지역 발전에 크게 기여했으며, 오늘날까지도 현지 주민들에게 존경받고 있다. 이는 히데쓰구가 단순한 무장이 아니라 문무를 겸비한 역량 있는 인물이었음을 보여준다.[53]
히데쓰구는 당대 최고의 교양인 중 한 명이기도 했다. 히키타 가게카네, 나가사와 소키, 가타야마 히사야스 등에게 검술과 창술을 배우고, 요시다 시게우지에게 히키류 궁술, 아라키 모토키요에게 아라키류 마술을 익히는 등 무예에도 조예가 깊었다. 또한 고전 수집에 힘써 주손지의 대장경, 아시카가 학교와 가나자와 문고의 서적 등을 확보하고 보호했으며, 『일본서기』, 『육국사』 등 귀중한 역사서를 조정에 헌납하기도 했다.[59] 고필(古筆)을 아꼈고 많은 공가들과 교류하며 학문적 소양을 쌓았다.[58] 다도에도 능하여 센노 리큐의 제자로 여겨지며, 다이코 7인중의 한 사람으로 꼽히기도 한다. 노가쿠에도 관심을 가져 직접 연주했을 뿐 아니라, 최초의 요곡 주석서인 『요초』 편찬을 명하여 후세 문예에 영향을 미쳤다.
인간적인 면모에서도 긍정적인 평가를 찾아볼 수 있다. 히데쓰구 사건 당시 마에노 나가야스, 기무라 시게모리, 와타세 시게아키 등 히데요시의 옛 가신들을 포함한 많은 인물들이 그의 무죄를 주장했으며, 그를 따라 순사한 가신과 고쇼(小姓)들도 적지 않았다. 이는 히데쓰구가 가신들로부터 상당한 신망을 얻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기독교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는 히데쓰구를 "숙부(히데요시)와는 전혀 다르게 만인에게 사랑받는 성격의 소유자", "온화하고 사려 깊은 성질"이라고 기록하는 등[60] 외부인의 시선에서도 긍정적으로 평가받았다. 일각에서는 그가 기리시탄이었을 가능성도 제기한다.
결과적으로 히데쓰구는 모반 혐의를 받고 고야산에서 할복했으며, 그의 처자식과 첩 등 일가족 39명마저 산조가와라에서 처형당하는 비극을 맞았다. 특히 모가미 요시아키의 15세 딸처럼 히데쓰구와 만나보지도 못한 채 처형된 사례는 당시 일본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이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등을 돌리는 다이묘들을 늘어나게 하여 결과적으로 도요토미 정권의 몰락을 앞당기는 한 요인이 되었다. 히데요시 사후 도요토미 가문을 이끌어갈 유력한 성인 남성이었던 히데쓰구와 그 일족의 처참한 죽음은 도요토미 정권의 큰 손실이었다. 이러한 비극적인 말로와 더불어 그의 행적과 능력에 대한 재검토는 '살생 관백'이라는 오명 뒤에 가려진 히데쓰구의 다면적인 모습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5. 임진왜란과 히데쓰구
히데쓰구에 대한 '살생 관백(殺生関白)', 즉 폭군이라는 평가에 대해서는 현재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나뉜다.
과거 제2차 세계 대전 이전의 역사학자들은 대체로 히데쓰구의 평소 행동이나 태도에 문제가 있었다는 설을 받아들였다. 도쿠토미 소호 등은 《태합기》의 내용을 그대로 신뢰했으며, 히데요시 가문을 연구한 와타나베 세이유 역시 히데쓰구 숙청의 원인 중 하나로 그의 불량한 행실을 꼽았다. 와타나베는 히데요시의 애정이 아들 히데요리에게 옮겨간 데다, 히데쓰구 자신이 포악하고 관백으로서 용납될 수 없는 행동을 많이 했기 때문에 결국 몰락했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후 연구에서 사료 분석이 진행되면서, 오타 규이치가 쓴 『태합님 군기 중(太閤様軍記の内)』 이전의 기록에는 히데쓰구의 폭행이나 비행을 직접적으로 기록한 사료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 여러 역사학자들에 의해 지적되었다. 이후 시대의 사료들은 오타 규이치의 저술에 강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여겨지면서, 에도 시대에 성립된 사료들의 신빙성에 의문이 제기되었고[53], 사료 자체에 대한 재검토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앞서 언급된 바와 같이, 히데쓰구가 상중(諒闇) 기간의 금기나 히에이 산의 규율을 어겼다는 이야기는 기록된 날짜가 불분명하거나 다른 사료와 내용이 모순되는 등 이미 의문이 제기된 상태다. 히데쓰구는 공가와 친밀하게 지내고 고전 교양에 밝은 문화인이었기 때문에, 그가 굳이 궁중의 관례를 깨뜨렸다는 이야기 자체가 부자연스럽다는 지적도 있다[54]。 활쏘기 연습으로 사람을 죽였다거나, 기타노텐만구에서 맹인을 살해했다는 등의 이야기에 대해서는 오타 규이치조차 나중에 "다른 죄까지 관백 전하(히데쓰구)에게 덮어씌워졌다"[54]라고 기록하며, 다른 사람의 범죄가 히데쓰구의 악행으로 잘못 알려졌을 가능성을 시사했다. 따라서 이러한 이야기들이 실제로 있었던 일인지, 단순한 뜬소문이었는지는 처음부터 명확하지 않았으며, 후대에 와서 구체적인 내용이 덧붙여져 히데쓰구의 소행으로 굳어진 것으로 보인다. 또한, 예수회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가 남긴 일본 연보에서 활과 조총 연습으로 사람을 죽였다는 부분은 "어떤 때는 또한 운이 없는 자들을 살아있는 과녁으로 삼아, 화살 또는 조총으로 쏘아 죽였다"라는 한 줄 기록에 불과하며, 이는 네로, 칼리굴라, 도미티아누스와 같은 로마 황제들과 비교하려는 의도가 강했다. 동시대 인물인 프로이스가 히데쓰구를 살인을 즐기는 인물처럼 묘사한 것은 역사적 증언으로서 가치가 있지만, 기록 전체적으로는 히데쓰구에게 동정적인 논조를 보인다. 많은 역사학자들은 당시 선교사들이 정보를 어떤 경로로 얻었는지 불분명하다는 점, 정보 출처에 대한 의문이 남는다는 점, 일부 의미가 불명확한 부분이 있다는 점 등을 들어, 프로이스의 기록이 시중에 떠도는 소문(巷説・風説)을 모아 쓴 것일 수 있다는 설을 제기한다.
히데쓰구 폭군론을 가장 강하게 부정하는 고와다 테츠오는 '살생 관백'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많은 일화가 창작되고 덧붙여졌다며[38], 관련 사료의 역사적 가치를 명확히 부정한다. 반면 타니구치 카츠히로는 히데쓰구의 비행 자체를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으면서도, 천도 사상에 입각한 인과응보 관념 때문에 그의 행동이 과장되어 전해졌을 가능성을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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