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클로시 벨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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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클로시 벨러는 1890년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나,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고 헝가리군에서 복무한 군인이다. 1930년대에는 베를린과 스톡홀름의 무관을 역임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헝가리 제1군 사령관으로 동부 전선에서 싸웠다. 1944년 소련군에 투항한 후 헝가리 임시 국민 정부의 총리가 되었으나, 1945년 총선 이후 총리직을 틸디 졸탄에게 넘겨주었다. 1947년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으나, 이듬해 의원직을 상실하고 정계에서 은퇴했으며, 1948년 부다페스트에서 사망했다. 그는 다양한 훈장을 수여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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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클로시 벨러 - [인물]에 관한 문서 | |
---|---|
인물 정보 | |
존칭 | 비테즈 |
이름 | 미클로시 벨러 데 달노크 |
원어 이름 | vitéz lófő dálnoki Miklós Béla |
출생일 | 1890년 6월 11일 |
출생지 | 부다페스트, 오스트리아-헝가리 |
사망일 | 1948년 11월 21일 |
사망지 | 부다페스트, 헝가리 |
배우자 | 에바 차카니 이르마 바르가 |
자녀 | 러요시 딸 1명 |
직업 | 군인 정치인 |
소속 정당 | 헝가리 독립당 |
군사 복무 | |
충성 | 오스트리아-헝가리 (1907–1918) 헝가리 왕국 (1919–1945) |
군 종류 | 오스트리아-헝가리 육군 헝가리 육군 |
복무 기간 | 1907–1918; 1919–1945 |
최종 계급 | 대장 |
참전 |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
지휘 | 제9군단 제1군 |
정치 경력 | |
직책 | 헝가리 총리 |
임기 시작 | 1944년 12월 22일 |
임기 종료 | 1945년 11월 15일(1945년 3월 28일까지 야당) |
군주 | 공석 |
국가 원수 | 최고 국가 평의회 |
이전 | 페렌츠 살러시 (국가지도자) |
이후 | 졸탄 틸디 |
직책 | 최고 국가 평의회 의원 |
동료 의원 | 벨러 제데니 에르뇌 게뢰 (1945년 5월 11일까지) 요제프 레바이 (1945년 5월 11일–9월 27일) 마차시 라코시 (1945년 9월 27일부터) |
임기 시작 | 1945년 1월 26일 |
임기 종료 | 1945년 12월 7일 |
이전 | 페렌츠 살러시 (국가지도자) |
이후 | 졸탄 틸디 나지 페렌츠 벨러 바르가 라슬로 라이크 |
2. 생애
1890년 6월 11일 부다페스트에서 세클리 출신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1907년 쇼프론 군사 김나지움을 졸업하고, 1910년 루도비카 군사 아카데미를 졸업한 후 기병 소위로 임관했으며,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
1920년부터 1921년 사이에 참모대학을 졸업한 후 국방부에서 근무했다. 1929년 섭정 호르티 미클로시로부터 비테즈 훈장을 수여받았다. 1933년부터 1936년까지 베를린과 스톡홀름 주재 무관으로 임명되었다.
1940년 10월, 헝가리군 유일의 기동군단장이 되어 유고슬라비아 왕국 침공에 참전했고, 군내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 1941년 6월, 솜바트헤이 페렌츠의 카르파티아 집단 주력을 구성했다. 같은 해 11월 말 헝가리로 귀국했고, 중장으로 승진했으며, 12월 4일 기사십자 철십자 훈장을 수여받았다.[3]
1942년 2월부터 10월까지 제9군단장을 역임했고, 같은 해 호르티 미클로시의 부관 겸 관방장관에 취임했다. 1943년 대장으로 승진했다. 1944년 8월, 제1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독소 전쟁 동부 전선에 투입되었다. 드네스트르강 및 세레트강 강변에서 방어전을 펼쳤으며, 9월부터 카르파티아 북동부에서 방어에 임했다.
1944년 10월 15일, 판처파우스트 작전으로 호르티 미클로시가 실각하자, 제2군 사령관과 함께 전투 중지를 시도했지만 실패했다.[3] 서러시 페렌츠가 이끄는 살십자당의 국민통일정부가 수립되자 소련 측으로 전향하려 했지만, 제1군을 직접 지배하던 독일 국방군의 고트하르트 하인리치는 이를 감지하고 출두를 명령했다. 곧 부관과 두 명의 병사를 데리고 탈주하여 소련군에 접촉을 시도했다. 소련군은 그를 폴란드 남부 리스코에 숨겼다.
다음 날 17일 아침, 리스코를 출발한 미클로시는 라디오를 통해 제1군 장병들에게 소련에 투항하고 반 추축군 대열에 합류할 것을 호소했다. 많은 장병들이 그를 따르려 했지만, 독일군은 가담하려던 한 연대장을 처형했다.
1944년 12월 21일, 데브레첸에서 임시 의회가 열렸다. 헝가리 공산당, 독립 소농업자당, 사회민주당, 국가농민당, 민주당 대표들이 참석했다. 이 의회는 소련의 승인을 받아 미클로시를 총리로 하는 임시 정부를 선출했다.[4] 1945년 헝가리 총선이 치러진 1945년 11월 15일까지 이 직위에 머물렀다. 재임 기간 동안 친독, 화살십자당 세력 숙청, 인민 재판소 설치, 마리아 테레지아 군사 훈장 폐지 등의 조치가 이루어졌다.[4] 그러나 헝가리 전역이 소련군에 점령되어 약탈과 폭력 행위가 만연했음에도, 임시 국민 정부는 소련의 괴뢰 정권이었기 때문에 항의할 수 없었다.[5] 1945년 헝가리 총선 이후, 틸디 졸탄에게 총리직을 이양했다.
1947년 7월, 독립 소농, 농민 및 시민당에서 분리된 헝가리 독립당(MFP)의 창립 멤버가 되었다. 1947년 헝가리 총선에서 헝가리 독립당 소속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파시스트"로 매도된 독립당의 모든 의석은 공산당 헝가리 노동자당의 압력으로 1947년 11월에 취소되었고, 공직에서 물러났다.[1]
1948년 11월 21일 부다페스트에서 사망한 그는 군사적 예우 없이 장례가 치러졌다.[1] 그의 아들은 1956년에 뉴질랜드로 이주했다.[1]
2. 1. 초기 경력
1890년 6월 11일 부다페스트에서 세클리 출신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1907년 쇼프론 군사 김나지움을 졸업하고, 1910년 루도비카 군사 아카데미를 졸업한 후 기병 소위로 임관했다.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 1920년부터 1921년 사이에 참모대학을 졸업한 후 국방부에서 근무했다. 1929년 섭정 호르티 미클로시로부터 비테즈 훈장을 수여받았다. 1933년부터 1936년까지 베를린과 스톡홀름 주재 무관으로 임명되었다.2. 2. 제2차 세계 대전
1940년 10월, 미클로시는 헝가리군 유일의 기동군단장이 되어 유고슬라비아 왕국 침공에 참전했고, 군내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 1941년 6월, 미클로시의 군단은 솜바트헤이 페렌츠의 카르파티아 집단의 주력을 구성했다. 군단은 2개 기계화 여단, 2개 기병 여단, 2개 독립 자전거 대대(약 2만 5천 명, 구식 전차 160대)로 편성되었다. 같은 해 11월 말, 군단은 헝가리로 귀국했고, 미클로시는 중장으로 승진했다. 같은 해 12월 4일, 기사십자 철십자 훈장을 수여받았다.[3]1942년 2월부터 10월까지 제9군단장을 역임했고, 같은 해 호르티 미클로시의 부관 겸 관방장관에 취임했다. 1943년 대장으로 승진했다. 1944년 8월, 제1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독소 전쟁 동부 전선에 투입되었다. 드네스트르강 및 세레트강 강변에서 방어전을 펼쳤으며, 9월부터 카르파티아 북동부에서 방어에 임했다.
1944년 10월 15일, 판처파우스트 작전으로 호르티 미클로시가 실각하자, 미클로시는 제2군 사령관과 함께 전투 중지를 시도했지만 실패했다.[3] 서러시 페렌츠가 이끄는 살십자당의 국민통일정부가 수립되자 소련 측으로 전향하려 했지만, 제1군을 직접 지배하던 독일 국방군의 고트하르트 하인리치는 이를 감지하고 미클로시에게 출두를 명령했다. 곧 미클로시는 부관과 두 명의 병사를 데리고 탈주하여 소련군에 접촉을 시도했다. 소련군은 그를 사령부가 있는 폴란드 남부 리스코에 숨겼다.
다음 날 17일 아침, 리스코를 출발한 미클로시는 라디오를 통해 제1군 장병들에게 소련에 투항하고 반 추축군 대열에 합류할 것을 호소했다. 많은 장병들이 그를 따르려 했지만, 독일군은 미클로시 측에 가담하려던 한 연대장을 처형했다. 이로 인해 헝가리 장병들이 전향할 가능성은 희박해졌다.
2. 3. 헝가리 임시 국민 정부 총리
1944년 12월 21일, 데브레첸에서 임시 의회가 열렸다. 헝가리 공산당, 독립 소농업자당, 사회민주당, 국가농민당, 민주당 대표들이 참석했다. 이 의회는 소련의 승인을 받아 미클로시를 총리로 하는 임시 정부를 선출했다.[4] 그는 1945년 헝가리 총선이 치러진 1945년 11월 15일까지 이 직위에 머물렀다. 그의 재임 기간 동안 친독, 화살십자당 세력 숙청, 인민 재판소 설치, 마리아 테레지아 군사 훈장 폐지 등의 조치가 이루어졌다.[4] 그러나 헝가리 전역이 소련군에 점령되어 약탈과 폭력 행위가 만연했음에도, 임시 국민 정부는 소련의 괴뢰 정권이었기 때문에 항의할 수 없었다.[5] 1945년 헝가리 총선 이후, 미클로시는 틸디 졸탄에게 총리직을 이양했다.2. 4. 말년
1947년 7월, 미클로시 벨러는 독립 소농, 농민 및 시민당에서 분리된 헝가리 독립당(MFP)의 창립 멤버가 되었다. 그는 반자유적인 1947년 헝가리 총선에서 헝가리 독립당 소속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파시스트"로 매도된 독립당의 모든 의석은 공산당 헝가리 노동자당의 압력으로 1947년 11월에 취소되었고, 미클로시는 공직에서 물러났다.[1]1948년 11월 21일 부다페스트에서 사망한 그는 군사적 예우 없이 장례가 치러졌다.[1] 그의 아들은 1956년에 뉴질랜드로 이주했다.[1]
3. 훈장
1행 | 칼이 달린 금색 군공 훈장 (1942년 1월 7일) | 헝가리 공로 훈장 사령관 십자성장, 칼과 전쟁 리본 (1941년 9월 23일) | 헝가리 공로 훈장 사령관 십자, 전쟁 리본 (1940년) | 헝가리 공로 훈장 사령관 십자, 칼과 전쟁 리본 (1939년) |
---|---|---|---|---|
2행 | 헝가리 공로 훈장 사령관 십자, 전쟁 리본 | 헝가리 공로 훈장 3등급 (1932년) | 군공 십자 훈장 3등급, 전쟁 장식과 칼 (1914년, 1918년) | 칼이 달린 은색 군공 훈장 (1917년) |
3행 | 칼이 달린 청동 군공 훈장 (1915년) | 헝가리 청동 군공 훈장 (1930년) | 카를 군단 십자 훈장 | 헝가리 제1차 세계 대전 기념 훈장 |
4행 | 장기 근속 훈장 2등급 | 장기 근속 훈장 3등급 (1930년 9월 18일) | 트란실바니아 기념 훈장 | 저지 헝가리 기념 훈장 |
5행 | 1912/13 동원 십자 훈장 | 독일 독수리 훈장 대십자장 (1941년) | 불가리아 군공 훈장 대십자, 전쟁 장식 (1943년 12월 1일) | 독일 적십자 훈장 1등급 (1936년 10월 17일) |
6행 | 철십자 훈장 1등급 (1941년) | 철십자 훈장 2등급 (1941년) | ||
배지 | 철십자 기사 십자 훈장 (1942년 1월 20일) | |||
배지 | 비테즈 훈장 배지 |
참조
[1]
서적
A history of Hungary
1990
[2]
문서
Halálesete bejegyezve a Budapest III. ker. polgári halotti akv. 632/1948 folyószáma alatt.
[3]
뉴스
A sikertelen kiugrási kísérlet: 1944. október 15.
http://www.magyarhir[...]
magyarhirlap.hu
[4]
웹사이트
A Katonai Mária Terézia Rend újabb emlékei
http://jam.nyirbone.[...]
[5]
웹사이트
Népi demokrácia nép nélkül
http://tortenelempor[...]
tortenelemportal.h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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