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하일 6세 브링가스
1. 개요
미하일 6세 브링가스는 1056년 8월 31일 사망한 여제 테오도라에 의해 후계자로 지명된 동로마 제국의 황제였다. 그는 즉위 전 군대 재무 장관을 역임한 노련한 귀족이자 궁정 관료였으나, 군사 귀족들의 불만을 샀다. 장군 니케포로스 브리엔니오스의 권리를 무시하고, 이삭 콤네노스의 반란에 직면하여 페트로 전투에서 패배한 후, 총대주교 미하일 케룰라리오스의 설득으로 이삭에게 양위하고 수도사가 되어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 이름 | 미하일 6세 브링가스 |
|---|---|
| 원어 이름 | Μιχαήλ Βρίγγας |
| 칭호 | 로마인의 황제 및 전제자 |
|---|---|
| 즉위 | 1056년 8월 31일 |
| 퇴위 | 1057년 8월 30일 |
| 대관식 | 1056년 8월 22일 |
| 이전 통치자 | 테오도라 포르피로게니타 |
| 다음 통치자 | 이사키오스 1세 콤니노스 |
이미지 준비중입니다.
| 사망 | 1057년 이후 |
|---|---|
| 직업 | 군인 |
| 로마자 표기 | Mikhaēl VI Stratiōtiko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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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0년대 사망 -
솔로몬 이븐 가비롤
솔로몬 이븐 가비롤은 스페인 유대인 시인이자 철학자로, 그의 아랍어 철학 저작 《생명의 샘》은 중세 유럽 사상계에 영향을 미쳤으며, 유대교 공동체에서는 시인으로 더 인정받고 그의 시 "왕관"은 유대교 전례에 남아 현대적으로 재해석되기도 한다. -
11세기 동로마 황제 -
알렉시오스 1세
알렉시오스 1세 콤네누스는 콤네누스 왕조를 창시하여 동로마 제국을 안정시키고 영토를 회복했으며, 제1차 십자군을 이용하여 셀주크 제국의 위협을 억제했으나, 십자군과의 복잡한 관계와 만년의 족벌주의, 후계 문제로 비판받았다. -
11세기 동로마 황제 -
콘스탄티노스 8세
콘스탄티노스 8세는 로마노스 2세의 아들이자 바실리오스 2세의 동생으로, 형과 공동 황제를 지내다 형의 사망 후 단독 황제가 되었으나, 정치 경험 부족으로 제국을 쇠퇴시키고 딸 조에를 로마노스 아르기루스와 결혼시켜 후계자로 삼았다. -
동방 정교 군주 -
콘스탄티노스 2세
콘스탄티노스 2세는 그리스 왕국의 마지막 국왕로, 재위 기간 중 정치적 혼란과 군사 쿠데타, 왕정 폐지를 겪었으며, 올림픽 요트 금메달리스트이기도 하다. -
동방 정교 군주 -
표트르 1세
2. 즉위 전 경력
요셉 브링가스의 친척으로 보이는 미하일 브링가스는 로마노스 2세 통치 기간 동안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는 즉위 당시 노련한 귀족이자 궁정 관료였으며, "게론"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미하일은 이전에 군대 재무 장관(logothetes tou stratiotikou)을 역임했으며, 'Stratiotikos'라는 칭호도 이 직책에서 유래했다. 1056년 8월 31일, 테오도라 여제가 사망하기 직전, 미하일 브링가스는 유연하다는 이유로 후계자로 지명되었다. 이 임명에는 테오도라의 최측근 조언자이자 수석 장관이었던 레오 파라스폰딜로스의 영향력이 컸다.
3. 황제 즉위
요셉 브링가스의 친척으로 보이는 미하일 브링가스는, 즉위 당시 노련한 귀족이자 궁정 관료였다. 그는 이전에 군대 재무 장관(logothetes tou stratiotikou)을 지냈다. 미하일 브링가스는 1056년 8월 31일 사망하기 직전 여제 테오도라에 의해 후계자로 선택되었는데, 이는 테오도라의 가장 신뢰받는 조언자이자 수석 장관이었던 레오 파라스폰딜로스의 영향력이 컸다.
미하일은 전 황제 콘스탄티누스 9세 모노마코스의 조카인 테오도시우스가 조직한 음모에서 살아남았지만, 군사 귀족들의 불만을 샀다.
4. 치세와 군부 반란
미하일 6세는 즉위 당시 노련한 귀족이자 궁정 관료였으며, 이전에는 군대 재무 장관을 지냈다. 그는 1056년 8월 31일 사망하기 직전 여제 테오도라에 의해 후계자로 선택되었다.
미하일 6세는 전 황제 콘스탄티누스 9세의 조카인 테오도시우스 모노마코스가 조직한 음모에서 살아남았지만, 군사 귀족들의 불만을 샀다. 그는 장군 니케포로스 브리엔니오스의 권리를 무시했는데, 이는 군대를 소외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브리엔니오스는 미하일 6세를 전복하려는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고, 그의 체포는 군사 귀족들이 1057년 6월 8일 파플라고니아에서 황제로 선포된 장군 이삭 콤네노스를 중심으로 뭉치게 만들었다.
미하일 6세를 지지하는 관료들은 반군에 대항하는 군대를 소집했다. 1057년 8월 26일, 정부군은 니케아 근처 페트로 전투에서 패배했고, 이삭 콤네노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격했다.
이후 미하일 프셀로스를 통한 이삭과의 협상 시도와 결렬, 그리고 수도에서의 이삭 지지 폭동 발생 등의 자세한 전개는 하위 섹션인 "이사키오스 1세 콤네노스와의 협상"에서 다루어진다. 결국 총대주교 미하일 케룰라리오스는 미하일 6세가 1057년 8월 30일 이삭에게 양위하도록 설득했다. 황제는 총대주교의 조언에 따라 수도사가 되었다. 그는 사저로 은퇴했고 그곳에서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