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시오스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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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알렉시오스 1세는 1081년 니케포로스 3세를 폐위시키고 동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그는 셀주크 투르크, 노르만족, 페체네그족 등 외부의 끊임없는 침략에 맞서 싸우며 37년간 통치했다. 베네치아와의 동맹을 통해 해상 방어를 강화하고, 제1차 십자군을 지원했으나, 십자군의 약탈로 인해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내정에서는 통화 개혁과 작위 재편을 실시하고, 콤네누스 가문과의 혼인을 통해 황실의 권위를 강화했다. 그의 치세는 제국의 안정과 번영을 가져왔지만, 가족 중심의 정책은 훗날 제국의 족벌 체제를 강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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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시오스 1세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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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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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이름 | 알렉시오스 콤네노스 (그리스어: Αλέξιος Κομνηνός) |
출생 | 1057년경 |
사망일 | 1118년 8월 15일 (61-62세) |
종교 | 동방 정교회 |
통치 | |
작위 | 로마인의 황제 및 전제군주 |
즉위 | 1081년 4월 1일 |
퇴위 | 1118년 8월 15일 |
대관식 | 1081년 4월 4일 |
선임자 | 니키포로스 3세 보타니아티스 |
후임자 | 요안니스 2세 콤네노스 |
섭정 | 콘스탄티누스 두카스 (1081–87) |
섭정 유형 | 공동 황제 |
가문 | |
왕가 | 콤네노스 왕조 |
아버지 | 요안니스 콤네노스 |
어머니 | 안나 달라세네 |
배우자 | 이리니 두케나 |
자녀 | 안나 콤네나 마리아 콤네나 요안니스 2세 콤네노스 안드로니코스 콤네노스 이사키오스 콤네노스 에우도키아 콤네나 테오도라 콤네나 마누엘 콤네노스 조에 콤네나 |
2. 생애
알렉시오스는 요한네스 콤네누스와 안나 달라세네의 아들이자, 이사악 1세 콤네누스의 조카였다.[4] 아버지 요한네스는 이사악 1세가 퇴위한 후 왕위를 거절했고, 1067년 승려로서 생을 마감했다.[5] 알렉시오스는 로마누스 4세 디오게네스, 미카엘 7세 두카스, 니케포로스 3세 보타네이아테스 치하에서 군사적으로 활동했다.[6][7]
1074년, 루셀 드 바이유가 이끄는 서구 용병들이 소아시아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8] 알렉시오스는 1076년까지 이들을 성공적으로 진압했다.[9] 1078년, 니케포로스 3세에 의해 서부 야전군 사령관으로 임명된 알렉시오스는[10] 니케포로스 브리엔니오스 장로와 니케포로스 바실라케스의 반란을 진압했다.
마케도니아 왕조가 단절된 후 황제가 된 이사키오스 1세 콤네노스의 조카에 해당하며, 24세에 장군이 되었다. 두카스 왕조 통치 시대의 동로마 제국은 내우외환의 상황에 처해 있었다. 특히 소아시아의 대부분이 셀주크 제국에 빼앗겼고,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맞은편까지 투르크인들이 다가왔다.
1081년, 알렉시오스는 반란을 일으켜 니케포로스 3세 보타네이아테스를 퇴위시키고 스스로 황제가 되었다. 즉위 후, 알렉시오스는 대외 정책에 힘을 쏟았다. 당시 남이탈리아(마그나 그라이키아)는 노르만인 로베르토 귈리스카르도에 의해 정복되었고, 그 세력은 발칸 반도에까지 미치고 있었다. 알렉시오스는 베네치아 공화국과 동맹을 맺어 바다의 방어를 강화하고, 로베르토의 아들 보에몽을 복종시켜 로베르토의 병사를 격퇴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이때의 동맹의 대가로 베네치아에 관세 특권 등 여러 가지 특권을 부여한 것이, 후에 제국 내 상공업자들의 쇠퇴, 동로마 제국과 베네치아 공화국 사이의 대립 등을 초래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제국의 서쪽에서는 쿠만족 등 이민족에 의한 침략도 있었지만, 알렉시오스 1세는 이들을 토벌하여 제국 서부 영토 탈환을 이루었다. 또한 동쪽의 룸 셀주크 제국에 대해서는, 로마 교황우르바누스 2세에게 용병 제공을 요청했다.
1096년부터 시작된 제1차 십자군 원정으로 제국은 이슬람 세력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지만, 제국 영토가 십자군 원정의 통과 지점이 된 결과, 십자군의 폭력과 약탈로 인해 오히려 고통을 받았다.
내정 면에서는 통화 개혁과 작위 재편을 실시했고, 유력 귀족과 황족 간에 혼인 관계를 맺음으로써 관계를 강화했다. 이른바 “콤네누스 일족”이다. 1453년 동로마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모든 황제는 콤네누스 가문(Κομνηνοί)과 두카스 가문(Δούκαι)의 피를 이었다. 또한 대토지 소유 귀족들에게 군사력 제공과 교환으로 조세권과 토지를 주는 프로노이아(πρωνοια) 제도를 도입하여 제국의 군사력을 강화했다.
1118년 8월 15일,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사망했다. 향년 70세.
2. 1. 황제 등극과 집권 초기
그는 요안니스 콤니노스와 안나 달라세나의 아들이었고 이사키오스 1세의 조카였다. 알렉시오스는 비잔티움의 유력한 가문 출신으로 젊은 시절부터 무용으로 이름을 날렸다. 당시 동로마 제국은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 이후 걷잡을 수 없이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다. 1071년부터 1081년까지 로마누스 4세, 미카일 7세, 니키포로스 3세로 이어지는 혼란기에 그는 유능한 군사활동으로 젊은 장군으로 이름을 날렸다. 두터운 콘스탄티노폴리스 민중의 신임을 바탕으로 어머니 안나 달라세나, 부인 이리니 두케나 가문인 막강한 두카스 가문의 지원을 얻어 무능한 전임 황제 니키포로스 3세에게서 1081년 24살의 나이로 제위를 양도받는 데 성공했다.[11][12][13][14]

즉위 직후 그는 여러 차례 외부의 침입에 직면했다. 맨 처음으로 제국을 위협한 것은 이탈리아 남부의 노르만족이었다. 1081년 로베르토 기스카르가 이끄는 노르만족은 일리리아 속주의 수도인 두라초(오늘날의 알바니아의 두러스)를 침략했다. 알렉시오스는 즉각 베네치아 공화국에 도움을 요청하는 한편 신성로마제국의 하인리히 4세에게 이탈리아를 침공하게 했다. 알렉시오스는 몇 차례 전투에서 로베르트에게 패했으나 베네치아 해군의 도움으로 결국 노르만족의 침략을 물리칠 수 있었다. 베네치아 공화국은 이 승리의 대가로 동로마 제국 내에서의 광범위한 무역 특권을 얻었다.[15][16]
비잔티움 군대가 원정을 위해 집결하는 동안, 궁정의 두카스 파벌은 알렉시오스에게 접근하여 니케포로스 3세에 대한 음모에 가담하도록 설득했다. 알렉시오스의 어머니인 안나 달라세네는 1081년 쿠데타에서 현 황후인 알라니아의 마리아와 함께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미카엘 7세 두카스와 니케포로스 3세 보타네이아테스와 결혼했던 그녀는 미카엘 7세 사이에서 낳은 아들인 콘스탄티노스 두카스의 미래를 걱정했다. 니케포로스 3세는 왕위를 그의 친척 중 한 명에게 물려줄 의향이 있었고, 이로 인해 마리아는 모호한 입장을 취하며 콤네노스 가문과 동맹을 맺었지만, 이 정치적 동맹의 실질적인 원동력은 안나 달라세네였다.
황후는 이미 마리아의 사촌인 이레네(이사악 콤네노스와 결혼)를 통해 콤네노스 가문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으므로, 콤네노스 형제들은 그녀를 가족의 확대된 친족으로 대할 수 있었다. 게다가 황후 조에 치세 동안 궁궐의 사회적 유행이었던 입양 왕권의 관습을 받아들여 마리아는 음모를 돕기 위해 알렉시오스를 아들로 입양하는 것을 수락했다. 마리아는 자신의 "알란인들", 즉 조지아 출신의 수행원들과 환관들의 조언에 따라 그렇게 하도록 유도되었는데, 후자는 이사악 콤네노스의 지시를 받아 황후를 설득했다. 분명 안나는 입양 왕권의 합의에 대해 알고 있었고, 이 문제에 대한 그녀의 암묵적인 동의가 황후에 의한 알렉시오스의 입양이라는 최종 결론을 가능하게 했다. 결과적으로 알렉시오스는 황후 마리아의 친아들인 콘스탄티노스 두카스의 입양 형제가 되었다. 입양 왕권의 완료는 입양된 구성원이 왕위 계승자에게 충성과 충절을 맹세하는 의식의 일부로 포함되었으며, 예비 구성원이 혈연관계가 없고 황실 혈통이 아니었기 때문에 신성한 맹세를 통해 황제와 결합해야 하는 전형적인 관례였다. 따라서 알렉시오스와 그의 형제 이사악은 모두 왕위 계승자의 권리를 보호할 것을 맹세했다.
안나 콤네나의 서술에 따르면, 이사악과 알렉시오스는 1081년 2월 중순에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떠나 보타네이아테스에 대항하는 군대를 모았다. 시기가 적절하고 군대가 이미 수도로 진군하고 있을 때, 안나 달라세네는 나머지 가족을 신속하고 은밀하게 동원하여 성 소피아 대성당에 피신하여 그녀의 가족의 안전을 위해 니케포로스 3세 보타네이아테스와 협상하면서 두 아들의 황제에 대한 적대 행위를 부인했다. 안나 콤네나는 할머니가 교회에 들어갈 수 있도록 취한 단계들을 자세히 설명한다. 저녁 기도를 드리러 교회에 간다는 구실로 그녀는 고의적으로 보타네이아테스의 손자와 그의 충실한 가정교사를 제외하고 아들 알렉시오스와 이사악을 만나 콘스탄티누스 광장으로 갔다. 가정교사가 그녀가 사라진 것을 알아차리고 그녀를 찾으러 갔을 때 결국 궁궐 정원에서 그녀를 발견했다. 다시 한번 교활하게 안나는 그들이 곧 궁궐을 떠날 것이라고 그를 설득했다. 그러나 나머지 여성 가족 구성원들은 교회가 그 당시 폐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입장이 허락되기 위해 카파도키아에서 온 가난한 순례자로 가장하고 귀환 여행 전에 성상에 절을 하려고 했다. 그들과 함께 붙잡혔던 스트라보로마노스와 왕실 근위병들은 궁궐로 소환되었다. 그런 다음 안나는 그녀가 황제의 분노를 두려워하고 그녀의 아들들이 충성스러운 신하일 뿐이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알렉시오스와 이사악이 황제의 동의 없이 사라진 사실이 발각되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가족의 안전을 위해 항의했다. 그녀는 적들이 가족을 눈멀게 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었고, 그래서 그녀가 수도로 도망쳤다고 제안했다. 그녀는 그들과 함께 가기를 거부하고 성모 마리아에게 보호를 기도하도록 허락해 달라고 요구했다. 이 요청은 승인되었고, 안나는 그녀의 진정한 의사소통 및 리더십 능력을 보여주었다.
니케포로스 3세 보타네이아테스는 가족에게 보호를 제공하겠다는 공개적인 서약을 강요당했다. 스트라보로마노스는 안나에게 자신의 십자가를 주려고 했지만, 그녀에게는 그것은 모든 구경꾼이 맹세를 목격하기에는 너무 작았다. 그녀는 또한 십자가가 보타네이아테스에 의해 개인적으로 보내어져 그의 성실함에 대한 서약이 되어야 한다고 요구했다. 그는 자신의 십자가를 사용하여 가족에 대한 완전한 보장을 보내면서 이를 따랐다. 황제의 계속되는 주장과 자신의 안전을 위해 그들은 페트리온 수녀원에 피신했고, 결국 이레네 두카이나의 어머니인 불가리아의 마리아가 합류했다. 보타네이아테스는 그들이 손님이 아닌 난민으로 취급될 수 있도록 허락했다. 그들은 가족 구성원들이 자신의 음식을 가져올 수 있도록 허락받았고, 경비병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최신 뉴스를 알게 되었다. 안나는 반란의 세 가지 중요한 측면에서 매우 성공적이었다. 그녀는 아들들이 마구간에서 황실 말을 훔쳐 도시에서 탈출할 시간을 벌었다. 그녀는 황제의 주의를 산만하게 하여 아들들이 군대를 모으고 무장할 시간을 벌었다. 그리고 그녀는 보타네이아테스에게 자신에 대한 진정한 반역 음모가 없다는 잘못된 안전감을 주었다. 도시를 지키고 있던 서방 군대에 뇌물을 준 후, 이사악과 알렉시오스 콤네노스는 1081년 4월 1일에 승리하여 수도에 입성했다.[19][20]
이 기간 동안 알렉시오스는 미카엘 7세와 그의 후계자 니케포로스 3세 보타네이아테스와 결혼했던 조지아의 바그라트 4세 국왕의 딸이자 아름다움으로 유명했던 황후 마리아의 애인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알렉시오스는 마리아가 궁궐에 머무를 수 있도록 주선했고, 그녀와 결혼할 것을 고려하고 있다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미카엘 7세의 삼촌인 카이사르 요한 두카스의 손녀인 이레네 두카이나와의 황제의 결혼을 주선함으로써 두카스 가문과의 관계를 강화했는데,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알렉시오스를 지지하지 않았을 것이다. 두카이들의 지지를 유지하기 위한 조치로 알렉시오스는 미카엘 7세와 마리아의 어린 아들인 콘스탄티노스 두카스를 동황제로 복위시켰다.[21][22]
그러나 1087년 알렉시오스의 첫째 아들 요한 2세 콤네노스가 태어나면서 이 상황은 극적으로 바뀌었다. 안나와 콘스탄티누스의 약혼은 해소되었고, 그녀는 어머니와 할머니와 함께 살기 위해 본궁으로 옮겨졌다. 알렉시오스는 황후의 칭호를 박탈당하고 수도원으로 은퇴한 마리아와 사이가 멀어졌고, 콘스탄티노스 두카스는 동황제의 지위를 박탈당했다.[23]
2. 2. 외부의 침입 격퇴
알렉시오스 1세의 37년 통치는 끊임없는 투쟁으로 가득했다. 즉위 초 그는 로베르 기스카르와 그의 아들 보에몽이 이끄는 노르만족의 강력한 공격에 직면했다. 노르만족은 디라키움과 코르푸를 점령하고 테살리아의 라리사를 포위했다.[7] 알렉시오스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헨리 4세에게 를 주고 동맹을 맺어 이탈리아에서 노르만족을 공격하게 했다.[24] 이로 인해 노르만족은 1083년에서 1084년 사이에 국내 방어에 집중해야 했다. 또한 가르가노 반도를 지배하던 몬테 산탄젤로 백작 헨리와 동맹을 맺었는데, 이는 이탈리아 반도에 대한 비잔티움의 정치적 지배의 마지막 사례였다. 1085년 기스카르의 죽음으로 노르만족의 군사적 위협은 사라졌고, 비잔티움 제국은 대부분의 손실을 회복했다.[25]다음으로 알렉시오스는 트라키아의 혼란을 처리해야 했다. 이교도 종파인 보고밀파와 파울리키아노파가 봉기하여 다뉴브 강 너머에서 온 페체네그족과 연합했다.[26] 황제군 복무 중이던 파울리키아노 병사들 역시 알렉시오스가 노르만족과 싸우는 동안 탈영했다.[27] 노르만족의 위협이 사라지자 알렉시오스는 반란군과 탈영병들을 처벌하고 그들의 토지를 몰수했다. 이는 필리포폴리스 근처에서 추가적인 반란으로 이어졌고, 서부 야전군 사령관인 그레고리우스 파쿠리아노스는 전투에서 패배하고 사망했다. 1087년 페체네그족이 트라키아를 침략하자 알렉시오스는 뫼시아로 진격하여 보복했지만 도로스톨론(실리스트라)을 함락시키지 못했다.[28] 후퇴하는 동안 황제는 페체네그족과 맞서 싸워 패배했고, 휴전을 맺고 보호비를 지불해야 했다. 1090년 페체네그족이 다시 트라키아를 침략했고,[29] 룸 술탄의 매부인 차카스는 함대를 출격시켜 페체네그족과 함께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동으로 포위하려 했다.[30] 알렉시오스는 4만 명의 쿠만족과 동맹을 맺음으로써 이 위기를 극복했고, 그들의 도움으로 1091년 4월 29일 트라키아의 레부누니온에서 페체네그족을 격파했다.[31]
이로써 페체네그족의 위협은 종식되었지만, 1094년 쿠만족이 발칸 반도의 황제 영토를 침략하기 시작했다. 로마누스 4세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칭왕자 콘스탄티누스 디오게네스[32]가 이끄는 쿠만족은 산맥을 넘어 동트라키아를 침략하다가 아드리아노폴리스에서 지도자가 제거될 때까지 약탈을 일삼았다. 발칸 반도가 대체로 평정되자 알렉시오스는 셀주크 투르크에 의해 거의 완전히 점령당한 소아시아로 눈을 돌릴 수 있었다.[33]
알렉시오스 1세가 즉위했을 무렵, 셀주크는 소아시아 대부분을 점령했다. 알렉시오스는 농민 병사들을 보내 셀주크 진영을 습격함으로써 해안 지역 대부분을 확보했지만, 이것만으로는 튀르크인들을 완전히 막을 수 없었다.[34] 그는 또한 플랑드르 백작 로베르 1세와 같은 서방 통치자들로부터 군사적 지원을 받았다.[35]
1090년 초, 알렉시오스는 셀주크에 맞서 서방의 지원을 구하기 위해 교황청과 화해 조치를 취했다.[37] 1095년 그의 사절들은 피아첸차 공의회에서 우르바노 2세 앞에 나타났다.[38][39][40] 그가 서방으로부터 구한 도움은 용병대였지, 교황이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제1차 십자군을 선포한 후 도착한 막대한 군대는 아니었다.[41] 민중 십자군은 주로 무장하지 않은 가난한 농민과 농노들로 이루어진 폭도들이 설교자 피에르 에르미의 지휘 아래 고향의 기근에서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으로 도망쳤다.[42] 황제는 이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영토를 통과하는 것을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 자신의 동맹의 손에 발칸 반도 소유지가 추가로 약탈당하는 것을 보았다.[43] 결국 알렉시오스는 민중 십자군을 소아시아로 보냈고, 거기서 그들은 1096년 10월 시베토 전투에서 킬리즈 아르슬란 1세의 튀르크인들에게 학살당했다.[44]
"왕자 십자군"으로 불리는 두 번째이자 훨씬 더 강력한 십자군은 보에몽 1세, 툴루즈 백작 레이몽 4세 등 서방 귀족들의 지휘 아래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향했다.[45] 알렉시오스는 십자군 지도자들을 만나 충성 맹세와 정복한 땅을 비잔티움 제국에 넘겨줄 것을 약속받았다.[46] 알렉시오스는 각 부대를 아시아로 이동시키면서 충성 맹세에 대한 대가로 식량을 공급할 것을 약속했다. 십자군은 비잔티움 제국에 상당한 성공을 가져다주었는데, 알렉시오스는 여러 중요한 도시와 섬들을 되찾았다. 십자군의 니케아 공성전으로 인해 1097년 도시가 황제에게 항복했고, 그 후 도리라이온에서 십자군이 승리하면서 알렉시오스는 소아시아 서부 대부분을 회복할 수 있었다.[47] 요한 두카스는 1097년에서 1099년 사이에 키오스, 로도스, 스미르나, 에페소스, 사르디스, 필라델피아에서 비잔티움의 지배를 재확립했다. 1099년, 그는 십자군이 라오디케이아와 트리폴리에 이르는 다른 해안 도시들을 점령하는 것을 돕기 위해 10척의 비잔티움 함대를 파견했다. 타티키오스 지휘하의 비잔티움 부대가 안티오크 공성전 중에 십자군을 돕지 못하자 십자군은 자신의 맹세가 무효화되었다고 믿었다. 안티오크 공작이 된 보에몽은 알렉시오스와의 이전 합의에도 불구하고 고대 도시를 돌려주지 않았다. 그는 알렉시오스와 발칸 반도에서 잠깐 전쟁을 벌였지만, 비잔티움 군대에 의해 봉쇄되었고 1108년 데아볼리스 조약에 따라 알렉시오스의 봉신이 되기로 동의했다.[48]
1116년, 알렉시오스는 비티니아와 미시아에서 일련의 방어 작전을 수행하여 이코니움의 셀주크 술탄인 말리크 샤의 침입으로부터 아나톨리아 영토를 방어했다. 1117년 그는 공세로 나아가 군대를 튀르크인이 지배하는 아나톨리아 고원 깊숙이 진격하여 필로멜리온 전투에서 셀주크 술탄을 물리쳤다.
2. 3. 제1차 십자군
1090년경 알렉시오스는 1054년 교회의 대분열 이후 소원하던 서방 교회와의 화해를 모색하였다. 교황 우르바노 2세와의 교섭을 통해 서방의 군대를 끌어들여 아나톨리아에서 잃어버린 제국의 영토를 되찾을 계획을 세우고 교황의 지지를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호소했다.[37] 1095년 교황은 피아젠차에서 프랑스의 클레르몽으로 여행하며 십자군 원정을 선포하고 대(對)무슬림 전투에 참가하는 자들은 죄를 용서해주겠다고 선동하였다.[38][39][40] 이 호소에 힘입어 서방의 왕들과 주교, 기사들은 대군을 조직하고 준비하였는데 이는 알렉시오스가 바라던 바는 아니었다.[41] 알렉시오스는 서방의 무법자들이 제국을 거쳐 성지로 원정을 떠나는데 제국이 입을 피해를 걱정하였다. 은자 피에르를 위시한 어중이떠중이로 구성된 군중 십자군을 시작으로 서방에서 십자군이 제국의 영토로 몰려왔고 알렉시오스는 늘 이들의 뒤치닥거리로 바빴다.[42] 비록 서방의 야만스러운 무법자들이 제국을 엉망으로 만들기는 하였지만, 알렉시오스의 현명한 대처로 그들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거쳐 소아시아로 건너가서 일정 부분 성과를 거두었다. 알렉시오스는 이들에게 자신에게 충성할 것을 서약하게 했다.[46] 니케아와 몇몇 소아시아 도시들이 다시 제국의 수중에 떨어졌다. 십자군은 팔레스타인에서 예상치 못한 성공을 거두어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예루살렘 왕국을 세웠으나 나중에 거의 대부분 서약을 깨고 알렉시오스에게 충성하지 않았다.안티오키아 같은 유서깊은 제국의 도시가 영토가 오만한 노르만족인 타란토의 보에몽의 수중에 넘어갔고 보에몽은 안티오크 공국을 세웠다. 다른 십자군 장군들도 제국을 적대시하였다. 알렉시오스는 서부 아나톨리아에 대한 지배권을 일부 회복했고, 또한 보에몽을 견제해 타우루스 남동부 지방으로 진출해 아다나와 타르수스 주변의 비옥한 해안 평야의 대부분을 차지했으며, 아울러 시리아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멀리 진군했다. 그러나 십자군이 세운 작은 십자군 국가들에 대해 영구적인 통제권을 확립할 수 없었고, 1107년 보에몽이 그리스 서부의 아블로나를 침공했을 때 이에 맞서 힘겹게 싸워야 했다. 이때부터 수십 년간 노르만인들은 비잔티움의 최대 적수가 된다.

알렉시오스 1세가 즉위했을 무렵, 셀주크는 소아시아 대부분을 점령했다. 알렉시오스는 농민 병사들을 보내 셀주크 진영을 습격함으로써 해안 지역 대부분을 확보했지만, 이것만으로는 튀르크인들을 완전히 막을 수 없었다.[34] 그는 또한 플랑드르 백작 로베르 1세(로베르 프리스인)와 같은 서방 통치자들로부터 군사적 지원을 받았다.[35]
"왕자 십자군"으로 불리는 두 번째이자 훨씬 더 강력한 십자군은 보에몽 1세(타란토의 보에몽), 툴루즈 백작 레이몽 4세, 그리고 다른 중요한 서방 귀족들의 지휘 아래 여러 부대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향했다.[45] 알렉시오스는 도착하는 십자군 지도자들을 따로 만나 그들로부터 충성 맹세와 정복한 땅을 비잔티움 제국에 넘겨줄 것을 약속받았다.[46] 알렉시오스는 각 부대를 아시아로 이동시키면서 충성 맹세에 대한 대가로 식량을 공급할 것을 약속했다. 십자군은 비잔티움 제국에 상당한 성공을 가져다주었는데, 알렉시오스는 여러 중요한 도시와 섬들을 되찾았다. 십자군의 니케아 공성전으로 인해 1097년 도시가 황제에게 항복했고, 그 후 도리라이온에서 십자군이 승리하면서 알렉시오스는 소아시아 서부 대부분을 회복할 수 있었다.[47] 요한 두카스는 1097년에서 1099년 사이에 키오스, 로도스, 스미르나, 에페소스, 사르디스, 필라델피아에서 비잔티움의 지배를 재확립했다.
2. 4. 내정과 말년
알렉시오스 1세의 치세 마지막 20년간은 초기의 성공과는 달리 계속 평판이 나빠졌다. 그는 교회와 정부 개혁에 뛰어들어 이단을 척결하고 수도에 복지 시설을 확충하는 등 열성적으로 나라를 통치했다. 그의 집권 초기 모후인 안나 달라세나는 뛰어난 정치 감각과 행정력으로 정부 개혁에 큰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지나치게 가문에 의존하는 족벌주의 정책을 펴 훗날 비잔티움의 족벌 체제를 강화하는 데 일조하게 된다. 이단에 대해서도 지나치리만큼 가혹하게 처리했는데 1118년 보고밀파의 지도자 바실리오스를 무자비하게 화형시킨 적도 있다.또한 알렉시오스의 치세 말년은 후계자 문제로 골치 아팠다. 그는 1092년 아들 요안니스 콤니노스를 공동 황제에 앉히고 후계자로 지명했으나 황후인 이리니는 딸 안나 콤니니와 공모하여 사위를 제위에 앉히려고 계속해서 요안니스를 반대하였다. 1118년 건강이 나빠지자 알렉시오스는 아내를 배제하고 서둘러 후계자로 요안니스를 지정하고 곧 죽었다.[55]
내정 면에서는 통화 개혁과 작위 재편을 실시했고, 유력 귀족과 황족 간에 혼인 관계를 맺음으로써 관계를 강화했다. 이른바 “콤네누스 일족”이다. 결과적으로 1453년 동로마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모든 황제는 콤네누스 가문(Κομνηνοί)과 두카스 가문(Δούκαι)의 피를 이었다. 또한 대토지 소유 귀족들에게 군사력 제공과 교환으로 조세권과 토지를 주는 프로노이아(πρωνοια) 제도를 도입하여, 강력한 사병을 거느린 그들의 협력을 얻어 제국의 군사력을 강화했다.
이러한 정책들은 손자인 마누엘 1세 때에 이르러 제국을 곤경에 빠뜨리게 되지만, 일단 알렉시오스 1세의 통치에 의해 다시 안정의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바실리오스 2세 사후 쇠퇴 일로였던 제국은 약 100년 동안 쇠퇴를 막고, 동지중해 강국의 자리를 탈환·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1118년 8월 15일,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사망했다. 향년 70세.
3. 통치 정책
알렉시오스 1세는 내정 면에서 여러 개혁을 단행했다. 먼저 통화 개혁을 실시하여 기존의 저급화된 솔리두스 대신 순도가 높은 금화인 하이퍼피론을 도입했다. 이와 함께 엘렉트럼 아스프론 트라키, 빌론 아스프론 트라키, 구리 테타르테론과 누미온 등 새로운 화폐들도 도입했다.
작위를 재편하고 유력 귀족들과 황족 간의 혼인 관계를 맺어 "콤네누스 일족"이라 불리는 강력한 지지 기반을 마련했다. 그 결과 1453년 동로마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모든 황제는 콤네누스 가문과 두카스 가문의 혈통을 잇게 되었다.
또한, 대토지 소유 귀족들에게 군사력 제공의 대가로 조세권과 토지를 주는 프로노이아 제도를 도입하여 귀족들의 협력을 얻고 제국의 군사력을 강화했다.
이러한 정책들은 바실리오스 2세 사후 쇠퇴하던 제국에 약 100년간의 안정기를 가져다주었고, 동지중해 강국의 지위를 되찾게 하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알렉시오스 1세의 손자인 마누엘 1세 시대에 이르러서는 제국을 곤경에 빠뜨리기도 했다.
3. 1. 군사 및 외교
알렉시오스 1세는 즉위 직후 여러 차례 외부 침입에 직면했다. 우선 이탈리아 남부 노르만족의 로베르토 기스카르가 일리리아 속주를 침략했을 때, 베네치아 공화국과 신성로마제국의 하인리히 4세의 도움을 받아 격퇴했다.[7][24][25] 베네치아는 이 군사적 지원의 대가로 제국 내 광범위한 무역 특권을 얻었다.
또한 도나우강을 넘어 침입해오는 페체네그인을 쿠만족과의 동맹으로 격파했다.[26][27][28][29][30][31] 1094년에는 쿠만족이 로마노스 4세의 아들을 자처하는 이를 앞세워 트라키아를 침입했으나, 아드리아노폴리스에서 지도자가 제거될 때까지 약탈을 일삼았다.[32][33] 한편 아나톨리아의 룸 술탄국과는 외교적 협정을 통해 제국의 안위를 보장했다.[33]
1090년경, 알렉시오스는 교회의 대분열로 소원해진 서방 교회와의 화해를 모색, 교황 우르바노 2세와의 교섭을 통해 십자군 원정을 이끌어냈다. 그러나 서방 기사들로 구성된 십자군은 알렉시오스의 예상과는 달리 제국에 피해를 입혔다. 은자 피에르가 이끈 군중 십자군을 시작으로, 십자군은 제국 영토를 지나며 약탈을 일삼았다. 알렉시오스는 이들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거쳐 소아시아로 보내 니케아 등 일부 도시를 회복했으나, 안티오키아 등은 노르만족 출신 타란토의 보에몽에게 넘어갔고, 보에몽은 안티오크 공국을 세웠다. 알렉시오스는 서부 아나톨리아와 시리아 해안 일부를 회복했지만, 십자군 국가들에 대한 완전한 통제권을 확립하지 못했고, 1107년 보에몽의 침공을 힘겹게 막아내야 했다.[7]
알렉시오스는 두카스 왕조 시대의 내우외환 상황에서 즉위하여, 남이탈리아를 정복한 노르만족의 발칸 반도 침입을 베네치아 공화국과의 동맹으로 막아냈다. 그러나 이 동맹으로 베네치아에 부여한 특권은 훗날 제국 경제에 악영향을 미쳤다. 서쪽의 쿠만족 등 이민족 침입도 격퇴하고, 동쪽의 룸 셀주크 제국에 대항하기 위해 로마 교황에게 용병을 요청하여 제1차 십자군을 유도했다. 그러나 십자군은 제국에 또 다른 문제를 야기했다.
3. 2. 내정
알렉시오스 1세의 치세 마지막 20년은 초기의 성공과는 달리 평판이 나빠졌다. 그는 교회와 정부 개혁에 뛰어들어 이단을 척결하고 수도에 복지 시설을 확충하는 등 열성적으로 나라를 통치했다. 그의 집권 초기 그의 모후인 안나 달라세나는 뛰어난 정치 감각과 행정력으로 정부 개혁에 큰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지나치게 가문에 의존하는 족벌주의 정책을 펴 훗날 비잔티움의 족벌 체제를 강화하는 데 일조하게 된다. 이단에 대해서도 지나치리만큼 가혹하게 처리했는데 1118년 보고밀파의 지도자 바실리오스를 무자비하게 화형시킨 적도 있다.[55]
알렉시오스 1세 치세에 저급화된 솔리두스(테타르테론과 히스타메논)는 단종되었고, 1092년에 순도가 더 높은(일반적으로 0.900~0.950) 금화가 도입되었는데, 이는 일반적으로 4.45그램의 하이퍼피론(Hyperpyron)이라고 불렸다. 하이퍼피론은 솔리두스보다 약간 작았다. 하이퍼피론과 함께 도입된 것은 하이퍼피론의 3분의 1 가치를 지닌 엘렉트럼 아스프론 트라키(약 25% 금, 75% 은), 하이퍼피론 48개에 해당하는 빌론 아스프론 트라키 또는 스타메논(7% 은 도금), 그리고 구리 테타르테론과 누미온(빌론 아스프론 트라키 18개와 36개에 해당)이었다.
또한 내정 면에서는 통화 개혁과 작위의 재편을 실시한 외에, 유력 귀족과 황족 간에 혼인 관계를 맺음으로써 관계를 강화했다. 이른바 “콤네누스 일족”이다. 결과적으로 1453년에 동로마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모든 황제는 콤네누스 가문(Κομνηνοί)과 두카스 가문(Δούκαι)의 피를 이었다. 또한 대토지 소유 귀족들에게 군사력 제공과 교환으로 조세권과 토지를 주는 프로노이아(πρωνοια) 제도를 도입하여, 강력한 사병을 거느린 그들의 협력을 얻어 제국의 군사력을 강화했다.
이러한 정책들은 손자인 마누엘 1세 때에 이르러 제국을 곤경에 빠뜨리게 되지만, 일단 알렉시오스 1세의 통치에 의해 다시 안정의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바실리오스 2세 사후 쇠퇴 일로였던 제국은 약 100년 동안 쇠퇴를 막고, 동지중해 강국의 자리를 탈환·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알렉시오스의 치세 말년은 후계자 문제로 골치 아팠다. 그는 1092년 아들 요안니스 콤니노스를 공동황제에 앉히고 후계자로 지명했으나 황후인 이리니는 딸 안나 콤니니와 공모하여 사위를 제위에 앉히려고 계속해서 요안니스를 반대하였던 것이다. 1118년 건강이 나빠지자 알렉시오스는 아내를 배제하고 서둘러 후계자로 요안니스를 지정하고 곧 죽었다.[55]
4. 유산 및 평가
알렉시오스 1세는 위험한 위기를 극복하고 비잔티움 제국을 안정시켜 제국의 번영과 성공의 한 세기를 열었다. 그는 또한 비잔티움 정부의 성격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62] 알렉시오스는 강력한 귀족 가문들과 긴밀한 동맹을 추구함으로써 황제의 독점적인 전통을 종식시키고 대부분의 귀족들을 그의 확대된 가족, 그리고 그를 통한 정부에 편입시켰다. 이 확대된 가족의 일원이 되지 못한 자들은 권력과 명예를 박탈당했다. 반대를 줄이기 위한 이러한 조치는 니케포로스 브리엔니오스에게 수여된 ''판히페르세바스토스'' 칭호나 황제의 동생인 이사악 코무네누스에게 수여된 ''세바스토크라토르'' 칭호와 같이 새로운 궁정의 품위를 도입함으로써 병행되었다. 이 정책은 초기에는 성공을 거두었지만, 공적보다 가족 관계를 우선시함으로써 점차 황실 관료제의 상대적 효율성을 약화시켰다. 알렉시오스의 귀족 통합 정책은 연속성의 결실을 맺었는데, 알렉시오스 1세 코무네누스 이후 통치한 모든 비잔티움 황제는 혈통이나 혼인을 통해 그와 관련이 있었다.
5. 가족 관계
알렉시오스 1세는 이레네 두카이나와의 결혼으로 다음과 같은 자녀들을 두었다.[63]
이름 | 출생 | 사망 | 비고 |
---|---|---|---|
안나 콤네나 | 1083년 12월 1일 | 1148년/1155년 | 콘스탄티노스 두카스와 약혼, 1097년 니케포로스 브리엔니오스와 결혼. 알렉시오스 사후 왕위 찬탈 시도 실패 후 수도원 은퇴, 알렉시오스 치세의 역사를 기록. |
마리아 콤네나 | 1085년 9월 19일 | 1136년 이후 | 니케포로스 카타칼론과 결혼. |
요한 2세 콤네누스 | 1087년 9월 13일 | 1143년 4월 8일 | 황제 계승. |
안드로니코스 콤네누스 | 1091년 9월 18일 | 1130년/1131년 | 세바스토크라토르, 이레네와 결혼. |
이사악 콤네누스 | 1093년 1월 16일 | 1152년 이후 | 세바스토크라토르. |
에우도키아 콤네나 | 1094년 1월 14일 | 콘스탄티노스 이아시테스의 아들과 결혼. | |
테오도라 콤네나 | 1096년 1월 15일 | 콘스탄티노스 쿠르티케스, 콘스탄티노스 앤젤로스와 결혼. 이사악 2세 앤젤로스, 알렉시오스 3세 앤젤로스의 할머니. | |
마누엘 콤네누스 | 1097년 2월 | 출생 직후 사망 추정. | |
조에 콤네나 | 1098년 3월 | 출생 직후 사망 추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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